허먼 멜빌의 이상한 소설 <바틀비 이야기>는 월스트리트라는 메이저한 공간에서 좀체로 가시화되지 않았던 존재들, 필경사들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한다. 칠면조, 펜치 그리고 심부름하는 생강비스킷. 그들은 주인공의 말대로 좀체로 관심이나 시선이 가지 않는 존재들이다. 그럼에도 주인공이 그들에게 시선을 준 이유는 새로 온 필경사 바틀비 때문이다.

                                          

 

 

 

 

 

 

바틀비는 두개의 칸막이와 등 뒤의 벽이라는 공간에 파묻혀 오로지 필경한다. 굶주린 듯 필경하던 바틀비는, 필경본 검토를 거부하지만, 고용자이면서 돈을 지불하는 주인공은 이상하게 바틀비의 그러한 거부 앞에서 무기력해지고 만다. 결국에 ‘나’는 바틀비로 부터 도망치지만 원래의 건물 주인과 사무실에 들어간 변호사 때문에 소란은 잦아들지 않는다. 고용인, 돈을 지불하는 자를 무력하게 만드는 바틀비의 말은 오로지 하나,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이다. 그러나 종국에는 필경마저 거부하며 그 어떤 행위도 하지 않은 채 마침내 죽어버린다. 소외된 자, 혼자 있으며 사회, 혹은 공동체로부터 벗어난 것처럼 보이는 바틀비는 사실 공동체의 본질을 보여준다.

구성원들이 공통의 목적이나 의지를 공유한다는 것은 공동체에 대한 가장 흔한 착각이다. 그렇다면 공동체란 무엇인가. 블랑쇼에 의하면 공동체의 본질은 바틀비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음, 즉 무위에 있다. 공동체는 ‘단수성들의 차단 또는 단수적 존재들 자체가 유예되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즉 우리는 모두 혼자라는 점, 고독하다는 점, 절대 서로를 이해하거나 가까이 다가갈수도 없는 거대한 심연이 단수성들 사이에 존재한다는 점만을 ‘분유(分有)’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홀로 있음, 단수로서 함께 있음을 극명히 드러내주는 사건은 죽음이다. ‘내’가 바틀비라는 인간을 ‘인간’일반 즉 자신과 동류로서 인식했던 사건도 죽음이지 않았던가. (‘나’의 탄식을 보라. ‘아 바틀비여, 아 인간이여!’) 하지만 죽음은 괴상하다. 죽음이란 두 가지의 모순적인 상황을 보여준다. 바틀비가 여기-함께-있었음을 증언해주며, 동시에 더이상 여기-함께-없음을 드러내주기 때문이다. “공동체는 타인의 죽음에서 드러나며, 따라서 공동체는 언제나 타인에게 드러나는 것이다. 자아들-결국 不死의 주체들과 실체들-의 공간이 아니라 언제나 타인들인 (또는 아무것도 아닌) 나들의 공간이다. 공동체가 타인의 죽음에서 드러난다면, 그 이유는 죽음 그 자체가 자아들이 아닌 나들의 진정한 공동체를 이루기 때문이다.” 진정한 공동체가 타자의 죽음에 의해 이루어진다면 나라는 존재는 늘 공동체의 바깥에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즉 나는 거기 속해 있지 않음으로써 속해 있는 것이다. 고독의 연원은 바로 그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바틀비가 죽고 난 뒤, 공동체는 깨졌는가? 이제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나? 아니다. 그들 사이에 나누었던 어떤 말 혹은 침묵이 거기 있다. 바틀비의 무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에 대해 쓰고 있는 문학이 여기 있지 않은가.

문학작품이 증언한다. 바틀비라는 비가시적인 존재가 있었음을. 그러나 “문학은 오직 무위를 긍정하기 위해 자신이 부당하다는 사실을 작품에서 뚜렷이 보여준다. 그때 그 문학의 부당성을 입증하는 소통을 통해 공동체가 계속 유지된다.” 블랑쇼의 이 말은 의미심장하다. 실제의 공동체는 바틀비와 같은 무위의 존재, 즉 문학이 쓸모없다는 사실을 소통함으로써만 간신히 유지되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이 문학 혹은 쓸모없는 것이 존재하는 이유였던 것이다.   

1) 장 뤽 낭시 지음, 박준상 옮김, 『무위의 공동체』, 인간사랑, 2010, 47쪽.
2)장 뤽 낭시, 모리스 블랑쇼 지음, 박준상 옮김, 『밝힐 수 없는 공동체』, 문학과 지성사, 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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