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의 전기 <빈, 비트겐슈타인, 그 세기말의 풍경>에서는 비트겐슈타인의 사유 궤적을, 오스트리아 빈이라는 공간과 합스부르크 왕조의 몰락과의 연관성을 찾아 기록한다. 저자는 빈이라는 공간의 풍요로움 뒤에 감추어진 빈곤과 주택 부족 현상 등을 언급하면서 그러한 이중성이 빈의 여러 측면을 특징짓는다고 말한다. 찬란하면서도 병적인 도시 빈에서는 20세기 사상을 지배하던 천재들이 대거 등장했지만, 빈에서 그들은 소리 없이 죽어갔다고도 적고 있다. 그들이 바로 1900년대 초반 모더니즘 문화의 주축이던 인물들, 쇤베르크, 아돌프 로스, 오스카 코코슈카, 에른스트 마하, 프로이트 등이었다.

 

같은 책에서 저자는 합스부르크 사회의 이중성을 보여준 결정적인 사건을 레들 사건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레들 사건은 “1913년 5월 제국의 육군 정보국 부국장인 알프레드 레들이 반역자이며 그 이유가 동성애 생활에 필요한 유흥비를 마련하는데 밝혀”진 사건이다. 레들의 동성애적 자각은 사관 학교 시절에 찾아왔지만, 이후 군생활을 하면서 동성애 성향을 성공적으로 감추어 꿈의 도시 빈의 부르주아들에게 충격을 주었다고 한다.

 

무질의 자전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는 <생도 퇴를레스의 혼란>은 레들 사건에 초점을 맞춘 것이기도 하다. 빈의 시민들에게 충격을 주었던 이 사건은 사실 합스부르브 사회 전체를 놓고 볼 때 “작위성과 겉치레는 당시로서는 예외라기보다 하나의 규칙이었고, 적절한 외양과 치장은 삶의 모든 측면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이러한 오스트리아 빈의 이중성과 합스부르크 왕조의 마지막 나날 속에서 탄생한 <생도 퇴를레스의 혼란>은 퇴를레스의 인식과 감각의 혼란 속에서 보내는 한 시절을 ‘빈’적인 스타일로 서술해 내려가고 있다.

 

소설 속에서 퇴를레스와 함께 하는 인물은 인도 철학과 초월적 세계에 심취한 바이네베르크와 음모를 꾸며 사람을 조종하기 좋아하는 권력형 인간 라이팅, 그리고 바이네베르크의 돈을 훔쳐서 라이팅과 바이네베르크에게 성적 괴롭힘을 당하는 바시니이다. 바이네베르크와 라이팅은, 바시니가 돈을 훔친 것을 트집잡아 그를 괴롭히고 추행하는데, 퇴를레스 역시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 바시니를 괴롭히고 추행하는데 동참하게 되고 퇴를레스는 자기 앞에 불어닥친 일 앞에서 혼란을 겪는다.

퇴를레스의 혼란은 수학의 허수에 대한 의문과 궤를 같이 한다.

 

"그래,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자. 하나의 연산을 할 때 우리는 확실한 수에서 출발을 해. 그러니까 미터나 무게 혹은 다른 구체적인 단위로 표현할 수 있는 실수로써 시작한다는 말이지. 그리고 연산의 마지막에 나오는 수도 역시 그러한 수겠지. 그런데 처음과 끝에 나오는 이 두 수를 서로 연결시켜 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어떤 영역이 아닐까? 달리 말하자면 첫 교각과 마지막 교각만 있는데도 사람들은 마치 그 교각 사이가 놓여 있는 것처럼 마음놓고 건너다니는 그런 다리 같은 게 아닐까? 마치 한 순간만 발을 잘못 놀리면 허방으로 빠져버릴 것 같은 거지. 그런데 정말 섬뜩한 것은 사람들이 다시 올바르게 도착할 수 있도록 꼭 붙들어매주는, 그런 연산 뒤에 숨어 있는 힘이야."132-133

 

퇴를레스에게 허수란 완벽하게 정립된 수학이라는 세계 안에서 부과적으로 도입된 이상한 것이다. 그러나 완벽하게 정립된 세계를 지탱하는 것은 우리의 인식 밖에 있는 이상한 수,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허수이다. 퇴를레스는 이 허수, 인식과 오성의 영역 밖에 있는 이상한 감각이 이 세계를 지탱하는 힘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이 생각은 훗날 갑자기 소환된 (특이하게도 미래의 퇴를레스가 소환된다.) 미래의 퇴를레스는 당시의 자신의 혼란에 대해 이렇게 서술한다.

 

“그래서 훗날 자신에게서 청소년기에 있었던 그 이야기를 들은 상대방이 혹시 이런 기억이 부끄럽게 느껴지지는 않느냐고 물으면 퇴를레스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나는 그 일이 타락이라는 점은 부인하지 않아요. 그런데 그런 일은 왜 일어나서는 안 되는 걸까요? 그 일은 이미 지나갔어요. 하지만 그 중 일부는 내게 남아 있어요. 미량의 독은 영혼에게서 너무나도 분명하고 안정된 건강함을 빼앗는 대신, 영혼에 보다 더 섬세하고 예리하고 이해심이 넘치는 건강함을 부여하는 데 필요한 것이지요."” 205

 

퇴를레스에게 세계는 단순한 오성과 과학적 합리성만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미래로부터 소환된 퇴를레스의 명쾌함 속에는 미량의 혼란, 완전한 세계에 이상하게 끼어들어간 허수와 같은 존재를 인정하는 태도가 포함되어 있다.

 

“인간 심연에 존재하는 것을 타인에게 설명할 수 없는 언어적 무능력에 관한 우려를 릴케, 카프카와 함께 공유”했던 것이다. 그러나 소설의 결론은 미래의 퇴를레스의 단정한 태도와는 달리, 학교에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끝이 난다. 즉 “언어는 가장 진실한 것을 설명할 수 없었던 것이며, 그것은 사람의 주관성의 심연 속에 영원히 내밀한 것으로 남게 되는 그 무엇”인 것이었다.

 

그렇다면 퇴를레스에게 남겨진 언어,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자신이 전하고자 했던 의도, 목적을 가진 그 말이 실패했다면 퇴를레스에게는 언어의 결여만이 남겨진 셈이다. 즉, 퇴를레스의 언어에는 언어와 비언어가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비언어가 언어를 지탱하는 이 퇴를레스의 세계는 세기말의 빈이라는 공간을 닮았다. 풍요로움을 가장한 빈곤, 사회혼란과 정치혼란 등이 탄생시킨 지적인 결실(비트겐슈타인과 프로이트, 볼츠만과 같은 과학자들, 쇤베르크와 말러 등의 예술가들)을 보라. 세기말의 혼란과 몰락의 냄새가 발효시켰던 풍요로운 사상처럼, 퇴를레스의 언어는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 정확히 말할 수 없었던 혼란, 자신의 말에서 자꾸만 미끄러지는 비언어라는 허수와 같은 존재에 의해 겨우 유지되는 하나의 질서는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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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앨런 제닉, 스트븐 툴민 지음, <빈, 비트겐슈타인, 그 세기말의 풍경>, 이제이북스, 2005, 94-96쪽.

2)위의 책, 195쪽.

3) 위의 책, 1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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