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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 비슷한 것>은 <라쇼몽>에서 이야기가 멈춘다. 무척 아쉽다..













어쨌건 어린절 이야기에서부터 영향을 많이 받았던 형에 대한 이야기. (영화와 문학에 대한 모든 영향을 에게서 얻었다고 한다. 서른을 넘어서는 살지 않겠다고 말한 형님은 실제로 28살에 자살을 해버린다. 이 형님은 가히 천재적으로 영리한 사람이었고 구로사와 아키라에게 이상한 경험들을 어린 시절에 많이 심어주신 분이다.... )형님의 시체를 수습해 돌아가는 길에 시신이 신음 소리를 냈다는 장면(시체에 공기가 있던 것이 접혀 있던 다리에 눌리면서 그랬던 모양.)이나, 영화사 P.C.L에 들어가게 된 계기, 그 이후 도호에서 만든 영화에 대한 술회와 파업과 그로 인해 생겼던 피로와 괴로움, 자신의 페르소나라 할 만한 배우 미후네 도로시에 대한 서술 등이 생생하게 적혀 있다. 


개인적으로 재밌었던 지점은 구로사와 기본적으로는 문학과 회화 등 다방면에 관심이 많았던 점이다. <요짐보>의 원작은 대실 헤밋의 <붉은 수확>이었으며, <천국과 지옥>은 에드 멕베인의 <왕의 몸값>이라는 작품이 바탕이 되었다고. 대실 헤밋은 <단편집>과 <몰타의 매>를 읽었는데, 대실 헤밋을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영화적인 감각을 떠올릴 수 밖에 없을 듯 하다. 

<들개>의 시나리오를 쓸 때는 먼저 소설 형식으로 서술을 했다고 하는데, 조르주 심농을 좋아하서 심농풍의 사회 범죄 소설을 먼저 썼다고 한다. 소설풍으로 먼저 쓴 덕에 시나리와 영화에 대한 재인식을 할 수 있었다고도 적고 있고.. <란>은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을 월등히 뛰어넘으며,,,, <라쇼몽>이야 다들 아다시피 아쿠다카와의 <덤불속>과 <라쇼몽>을 합쳐서 만든 이야기. <라쇼몽>에서 나오는 그 거대한 라쇼몽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렇게 크게 지을 생각이 없었는데 교토에 불러 놓고 다이에이 기획사가 좀 기다리게 하는 바람에 이미지가 그렇게 커졌다고...영화를 보면서 세트 크기랑 비오는 장면은 대체 어떻게 찍었나 싶었는데 예상대로 엄청난 소방차의 도움과 촬영소 소화전을 총동원...책에 그 세트가 지어지는 사진들도 있다..중간 중간 첨부된 사진들이 있어서 좋다.... (94년에 민음사에서 <감독의 길>이라는 제목으로 나온 동일한 책은 영어중역에 이런 사진들도 없어서인지 느낌이 확연히 다르다.)
















<천국과 지옥>은 얼마 전 영상자료원에서 보다가 정말 놀랐다.... 자수성가한 주인공 곤도의 

아들이라 착각해 운전수의 아들이 대신 납치가 되고 돈을 건네야 할 지 말아야 할 지 고민하는 1부는 곤도의 집이라는 좁은 공간만 나오는데, 돈을 주기로 결정하는데 까지 에너지는 굉장히 뜨겁다. 돈을 건네는 열차를 기점으로,,(으으 정말 군더더기가 없다..)해서 2부로 이야기가 전환되는데 2부는 범인을 찾기 위한 형사들의 이야기가 주가 된다. 여기서부터 공간이 갑자기 확 펼쳐지지만 에너지는 차갑고 지적으로 바뀐다. 이십 여명이 되는 형사들이 모여서 경과보고하는 장면에서의 에너지 전환 장면에서는 정말 놀랍다. 마지막에 범인과 곤도의 짧은 대화를 통해 천국과 지옥이 어디인지를 관객에게 생각하도록 만들고는 이야기가 끝나는데, 이건 뭐 더 할말이 없을 정도....다. (영화를 보던날 영상자료원이 무척 더워서 불쾌한 상태로 영화를 봐야만 했다...극기훈련을 하는 기분으로 더위를 참으면서 영화를 보다가 영화가 끝나자마자 밖으로 튀어나갔다. 휴;;)


- 체크해 둔 페이지 중

"15년 혹은 조금 더 이전의 일이다. 어떤 젊은 감독이 무슨 자리에서, 메이지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이 어서 죽어 자리를 내주지 않으면 우리는 앞으로 나가려고 해도 더 나갈 수가 없다고 말했다...나중에 나루세 미키오 감독에게 그 말을 듣고 기가 막혔다. 말수 적은 나루세 씨는 그 이야기를 하면서 쓴웃음을 지었다."그렇다고 죽을 수도 없고..."

(....)메이지 시대에 태어난 미조구치 겐지 감독, 오즈 야스지로 감독, 그리고 나루세 미키오 감독이 죽고 일본 영화계가 기울었을 때, 너는 도대체 무엇을 했는가? 과연 그 빈자리를 채웠는가?...내가 메이지 시대에 태어난 사람이라고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다. 다만 세상의 이치를 말하는 것이다. 남에게 의존하는 나약하고 썩은 정신은 모든 것을 망친다는 말을 하고 싶을 뿐이다. 이 짱구야!"


"그 길을 오갈 때 늘 책을 읽으면서 걸었다. 히구치 이치요, 구니키다 돗포, 나쓰메 소세키, 두르게네프도 그 길에서 읽었다. 형 책, 누나 책, 내가 산 책을 가리지 않고 이해하거나 말거나 닥치는 대로 읽었다."


닥치는 대로 하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그는 닥치는 대로 했던 거 같다. 책 읽기, 영화 찍기, 시나리오 쓰기.... 그의 영화들은 그가 닥치는 대로 살다가 남긴 결정체들이다. 그 결정체들은 시간이 지나도 별처럼 반짝거린다. 모든 별들이 어떤 에너지와 힘의 결과인 것처럼, 예술의 결과물들도 비슷한 것 같다. 너무 뜨거우면 금세 폭발해 사라져버리고 너무 차가우면 빛나지 못한다. 빛나기 위해서는 뜨겁되 차가워야 한다...


다음은 이 자서전의 첫 부분.. 읽자마자 매료됐다.


"나는 알몸으로 대야에 들어가 있었다. 좀 어두컴컴한 곳이었는데,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근 채 대야 가장자리를 잡고 흔들고 있었다. 대야는 경사진 낮은 마룻바닥 한가운데서 뒤뚱뒤뚱 흔들리면서 찰랑찰랑 물소리를 냈다. 아마 그게 재미있었나 보다. 더 열심히 대야를 흔들었다. 그러다가 홀라당 뒤집혔다."


아, 이 아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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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에게 민감하다는 것, 공감한다는 것은 단지 규칙을 아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 행동이 어떤 감정을 표현하지?” 라는 의문을 제기할 필요가 생기려면, 타인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만큼 떨어져야 하는데, 이는 사실 진정한 감수성이나 공감과는 양립할 수 없다. 진정한 감수성이나 공감에는 규칙이 들어설 틈이 없다. 숙고를 위한 자리도 없다. 그러므로 규칙을 무의식적으로 재빨리 적용할 틈 따윈 더더욱 없다.”(뇌과학의 함정, 173)

 

알바 노에의 책 <뇌과학의 함정>을 읽으면서 비트겐슈타인 생각이 많이 났다. 알바 노에의 책에도 몇 번 인용되기도 했지만,,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이 인지과학과 다시 만나니 흥미롭다. 알바 노에가 다루는 이야기들은 주로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철학과 만나는데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철학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비트겐슈타인이 생각하기에 이제까지의 철학의 문제는 언어에 대한 잘못된 생각 때문에 빚어졌다. 언어가 실재를 지시한다는 착각 때문에, 형이상학적인 문제들이 마치 실재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 생각하기에 언어란 실재를 지시하지도 않으며, 명확한 문법이나 규칙을 가지고 있지 않다. 아이들이 놀이를 하는 것처럼 언어놀이는 실제로 행해지면서 규칙이나 규범이 드러난다. , 아이들은 규범을 배우는 게 아니라 놀이에 참여하면서 규칙을 발견하는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니다. 삶의 규칙이라 할 만한 관습이나 규범, 제도들은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조금씩 변화하고 바뀌고 없어지기도 한다. 절대적인 규칙이나 원리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모든 놀이가 특정 상황이나 맥락 속에서 벌어지는 것처럼, 맥락이나 상황을 익히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면서 배우는 전부이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형사 데커드가 안드로이드를 가려내기 위한 테스트도, 삶의 규칙이 아니라 특정 맥락을 어떻게 수용하는지를 통해 인간인지 아닌지 판가름하는 것이었다. 또 데커드는 안드로이드의 반응 테스트 결과를 들으며 그들의 맥락을 파악하려 애쓴다. 하지만 테스트는 안드로이드와 인간이 서로 다른 맥락에서 삶을 살고 있다는 전제에서만 가능하다. 예를 들어 살아있는 생명에 대한 연민이나 공감의 정도에 따라 인간인지 아닌지의 여부를 판별하는 식이다. 문제는 여기서 생겨난다. 인간 속에 있는 비인간적인 지점, 동물을 학살하고 공감하지 않고 연민하지 않는 비인간적인 인간과, 인간은 아니지만 살고 싶어하고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느끼는 비인간의 인간화된 지점 때문에 둘은 섞이게 된다. 이 둘이 섞이는 지점에서 영화의 또 다른 맥락이 드러난다. 자신의 죽음 속에서 자기의 삶의 기억이 사라진다고 느끼는안드로이드 로이 베티에게서 인간의 삶을 배우게 된 데커드는 비로소 자기의 맥락 속에 레이첼이라는 안드로이드를 들여오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대부분의 삶이 이런 식인 것 같다. 누군가를 만나고 기존의 맥락이 뒤섞이고 분기하고 비슷한 상황들이 연속되거나 조금씩 달라지는 속에서 우리는 그냥 산다. 주지주의자들처럼 지성 때문에 우리가 더 나은 삶을 영위하는 것도 아니며, 뇌 신봉자들의 말처럼 우리의 세계는 뇌가 만들어내는 거대한 착각도 아니다. 세계는 실재로 거기 있고 내 몸도 있고 의식을 만들어내는 뇌도 엄연히 있다. 이 세 가지가 함께 만나 특정 맥락에서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 삶이다.

위에 인용한 문장처럼 삶으로부터 떨어져 우리가 어떻게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하면, 뇌과학자들이 했던 것 같은 일이 생긴다. 삶의 규칙을 찾아내고 규칙을 통해 삶의 도식을 그려내고 그것이 마치 삶인 것처럼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세계는 메를로 퐁티의 말대로 체화된 몸이다. 이 체화된 몸은 비어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단순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세계에 대해 열려 있는 것이다. 즉 우리는 그 안에서 우리가 갈 길을 찾을 수 있다.”(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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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Z 2013-05-21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뇌과학의 함정>의 포인트는 뇌만능주의에 대한 경고하고 결국 우리의 습관과 삶의 맥락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과학에 삶으로, 문제가 옮겨오게 되면서 불교나 동양에서의 논의들이 많이 필요한 것 같다. 바렐라의 책 <윤리적 노하우> 에서 그런 연결 지점을 보여준다.
 

에피쿠로스는 <헤로도토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원자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원자들은 영원히 운동한다. 원자들 중 어떤 것은 아래로 곧장 떨어지고 어떤 것들은 비스듬히 떨어지고 다른 것들은 충돌해서 위로 튕긴다... 이러한 운동은 출발점을 가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원자와 허공이 그 운동의 원인이기 때문이다.”(쾌락, 56-57) 바로 뒤엔 이걸 잘 이해하면 존재하는 것들의 본성을 이해할 수 있다고 적혀 있다. 자연학의 이해가 존재론의 이해인 것이다.

 

 

 

 

 

 

 

 

 

 

루크레티우스는 원자들의 편위를 옹호하기 위해 두 가지 논증을 펴는데, “첫째는 편위가 없다면 자연은 어떤 것도 만들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이고 둘째는 제1물체들에 편위라는 신기한 특성이 있는 이유를 생명체가 지닌 의지에서 비롯된 현상들에 대한 관찰에서 끌어온다는 점이다.”(172) 첫 번째 직선 낙하 운동에서 루크레티우스는 허공을 진공 상태를 가정하고 있는 것 같다. “물체 비율에 따라 낙하에 가속도가 붙지만... 허공에서는 가장 무거운 원자들도 가장 가벼운 것들을 결코 따라잡을 수 없으며, 따라서 그것들끼리 서로 충돌하지도 못하고, 집적체, 회오리, 세계 탄생에 기여할 수 없다.”(172) 물체의 무게가 달라도 그것들이 진공에서 직선 낙하하는 한 절대로 만날 수가 없다. 맑스는 이 직선 운동의 상태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점이 선 안에서 부정(지양)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낙하는 모든 물체는 그것이 그리는 직선 안에서 부정된다. 물체의 특수한 질은 여기서는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사과도 떨어질 때는 쇳조각과 마찬가지로 수직선을 그린다. 우리가 낙하 운동에 관심을 가지는 한 모든 물체는 단지 움직이는 점일 뿐이며, 그것도 자율성이 없는 점이다.”(맑스,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의 차이>, 74)

원자가 직선 운동만 하는 한, 존재의 개별성은 없다. 왜냐, 직선 운동은 허공에 대한 원자의 운동성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자가 보편적인 제 1물질이라면 자기가 자기 원인임을 표현하고 현실화해야 한다. 편위는 허공에 대해 원자가 맺는 관계를 부정하는 것이고, 또 그런 관계로부터 벗어나 스스로의 자립성을 구축하는 의지의 표현이다. 자발적인 의지들, 개별성들의 충돌 혹은 만남이 우주의 생성 원리였던 것이다!

문득, 원자의 편위가 힉스 입자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결이 될지 모르겠지만 일단 막 던져보기로 한다... 자연계에는 중력, 전자기력, 약력, 강력이 있다. 이 네 가지 힘은 각각 그 힘을 매개하는 입자가 있고 또 그 힘을 구성하는 입자가 따로 있다. 중력을 제외한 나머지 힘들은 모두 게이지 이론에 의해 설명이 가능하다고 한다. 이 힘들은 서로 입자를 주고 받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으로, 전자기력은 광자를, 약력은 WZ, 강력은 글루온을 교환하는데 이 입자들이 다 게이지 입자다. 게이지 입자는 기본적으로 게이지 대칭을 요구한다. 문제는 이런 대칭 상황에서는 입자가 질량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실제 입자 중에는 광자와 글루온 빼고는 질량이 있기 때문에 모순이 발생한다. 여기에 과학자들은 자발적 대칭성 깨짐이라는 이론을 마련한다. 그게 바로 힉스 입자이다. 힉스가 소립자들에게 질량을 부여하기 때문에 소립자들이 질량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만물생성은 질량을 가진 것들의 탄생과 소멸이므로, 힉스에 신의 입자라는 별명이 생긴 것이다. 원자와 입자는 분명 다르지만, 직선 낙하 운동에서 힉스 입자의 개입으로 질량이 생겨나는 원자로부터 무수한 충돌이 생겨나면서 발칵 뒤집히는 우주 이미지는 비슷한 것 같다. 게이지 이론에 자발적 대칭성 깨짐(이론이 현실화가 될 때 대칭성은 깨진다.)을 생각한 과학자가 꼭 에피쿠로스와 유사하지 않은가.

각설하고, 원자는 허공과의 관계에 의해 자신의 운동을 이야기할 수 있다. 하지만 원자가 속한 관계를 부정하는 편위가 원자의 실존을 확인해준다. 원자는 자신의 조건과 관계를 부정하고 벗어나는 한에서 자기 자신일 수 있다! 에피쿠로스에 의하면 이 자연학을 이해하면 우리는 행복할 수 있다. 자신의 실존을 규정하는 모든 관계들을 부정하는 것이 에피쿠로스에게는 쾌락이었던 것이다. 그가 마시고 먹고 노는 것에 대해 절제를 하도록 한 것은 그것들이 나의 실존을 규정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외부적 규준들이 나의 실존을 규정하는 것이 좋은가. 진짜 싫다. 그건 고통이고 부자유다.

하지만 사람은 살면서 수없이 많은 관계에 들어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나를 규정하는 관계를 버리라는 말인가? 아니다. 편위와 직선 운동의 관계는 상보적인 관계이다. 원자가 직선 운동 하듯, 나도 세상 속에 있다. 원자가 직선 운동이라는 관계 속에서 자기 의지를 스스로 드러내는 것처럼, 세상과 관계 속에서 나의 의지를 펼치는 게 나의 자유이며 나의 탁월함이다. 그 상황 속에서 스스로의 실존적 형식을 규정할 수 있는 방법은 그 관계가 나를 규정짓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에피쿠로스의 쾌락의 윤리학은 사실 자유를 향한 노력의 윤리학이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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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Z 2013-05-21 2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 살렘의 <고대원자론>을 읽을 때, 2장 에피쿠로스를 먼저 읽고 1장과 3장을 읽으면 좀 수월하다. <고대원자론>은 에피쿠로스를 중심으로 앞 시기 데모크리토스와 후대 루크레티우스의 사상이 펼쳐져 있는데, 데모크리토스부터 읽으면 이 사람 저 사람 주장만 난무해서 처음엔 적응이 힘들다 -_-; <고대원자론>을 읽으면서 막스의 박사논문을 함께 읽으면 이해가 쉽다. 에피크로스의 <쾌락>을 같이 읽으면 더욱 좋다.
 

  소설의 화자는 자그마치 천 개이다. 따라서 이 소설에는 중심이라는 것이 없다. 게다가 목소리를 가지는 화자 역시도 인격을 지닌 존재보다 관념적인 화자(예를 들면, 만남 혹은 이혼 같은)나 사물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 추상적 주체들은 마치 의지를 가진 것처럼 서술하며 세계를 드러낸다.

 

“나는 만남이다. 오늘 나는 항상 지구의 회전에 맞춰 현재를 사는 요이치에게 물거품 호수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담수어를 소개하였다... 한편 잉어는 요이치의 흐물흐물한 몸에서 심상치 않은 기가 전류처럼 생생하게 흐르고 있음을 인식하고, 백 년 남짓 살면서 이제야 비로소 대등하게 사귈 만한 인간을 만났다는 기분이 들었다. 둘은 보편의 물과 대기를 뚫고 잠시 서로의 가슴속을 들여다보았다. 그 동안 물결은 잠잠했고, 나는 새는 공중에 정지하였다.”(1권 72쪽)

 

관념과 사물의 세계는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리기 일쑤다. 즉 소설에서 한번 쯤 목소리를 얻었던 것들은 단 하루만에 온전히 사라지고 만다. 그것은 일견 당연해 보인다. 생명을 얻은 것이라면 응당 죽어야 마당하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사물이나 관념이 드러낸 의지 역시도, 하루 만에 무의지로 변화하는 것도 이 소설에서는 지극히 자연스러워 보인다.

 

 

“나는 따스한 기운이다. 열렬한 애국심에 찬물을 끼얹고, 서민들의 속사정을 다 아는 척하는 위정자에게 자학의 미소를 띠게 하고, 치정으로 치닫기 쉬운 자의 머리를 식히고,....이렇게 하여 나는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쳤으나 해가 기울면서 다시금 청량한 가을이 나를 밀어내, 해가 지고 나서는 도로아미타불이 되고 말았다.”(2권 279쪽)

 

이렇게 화자가 쉽게 사라지기 때문에, 마호로 마을을 감싸는 이 ‘나’라는 주체는 무한한 증식이 가능해 보인다. 그들은 매일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노을이나 눈과 같은 자연현상 같기도 하고, 우두커니 집에서 잠자고 있는 사물들이 갑자기 생명을 얻어서 내는 목소리가 될 수도 있다. 아니 무엇이든 ‘나’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수많은 ‘나’들 속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것이 있다. 그것은 요이치라는 병든 소년이다.

 

소설에서 요이치도 단 한번 자신의 목소리로 말을 한다. 늘 무언가의 배경 혹은 풍광으로 존재해서 일까. 요이치의 목소리는 마호로 마을의 수많은 사물의 목소리와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어쩌면 요이치는 인간으로서 자신을 드러내기에 앞서, 사물로서 자신을 인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 사물의 운명처럼 요이치의 세계도 금방 사그라드는 것도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요이치, 사람과 사물의 경계에 선 이 뇌성마비 소년은 제법 단단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 이 의지는 사물들처럼 세계를 드러내고자 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자신이 키우는 큰유리새가 ‘되고’ 싶을 뿐이다. 자신을 매혹시킨 단 하나의 대상이 ‘되기’ 위해 요이치는 자신의 전생애를 아픈 몸뚱이를 거의 투신한다. 큰유리새라는 중심에 다가가기 위해서 세계를 배회하고 맴돈다. 쉽게 사그라드는 의지가 되지 않기 위해서 하나의 고정된 상이 되려고 하지도 않고, 흔들리는 몸을 고정하여 거리 위에 우뚝 서려고 하지 않는다. 눕거나 굴러버린다.

 

요이치가 그렇게 천일이라는 시간을 어슬렁거린 결과 머리칼이 저절로 유리색으로 변하고 마침내 천 일이라는 시간도 요동을 치며 변화한다.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는 온 몸의 경련이 새의 날개짓이 된 것이다. 마침내 천 일은 영원이 되고 요이치도 새가 된다.

 

그러나 이 새가 된 경험은 요이치를 죽이고 말았다. 의지 그 자체가 된다는 것, 그것은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에 대해 풍경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풍광이 된다는 것, 영원이 된다는 것은 죽음을 불사한다는 것이다. 의지라는 것은 애초에 드러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풍광처럼 힐끗 포착되었다 사라지는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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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 전기 <빈, 비트겐슈타인, 그 세기말의 풍경>에서는 비트겐슈타인의 사유 궤적을, 오스트리아 빈이라는 공간과 합스부르크 왕조의 몰락과의 연관성을 찾아 기록한다. 저자는 빈이라는 공간의 풍요로움 뒤에 감추어진 빈곤과 주택 부족 현상 등을 언급하면서 그러한 이중성이 빈의 여러 측면을 특징짓는다고 말한다. 찬란하면서도 병적인 도시 빈에서는 20세기 사상을 지배하던 천재들이 대거 등장했지만, 빈에서 그들은 소리 없이 죽어갔다고도 적고 있다. 그들이 바로 1900년대 초반 모더니즘 문화의 주축이던 인물들, 쇤베르크, 아돌프 로스, 오스카 코코슈카, 에른스트 마하, 프로이트 등이었다.

 

같은 책에서 저자는 합스부르크 사회의 이중성을 보여준 결정적인 사건을 레들 사건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레들 사건은 “1913년 5월 제국의 육군 정보국 부국장인 알프레드 레들이 반역자이며 그 이유가 동성애 생활에 필요한 유흥비를 마련하는데 밝혀”진 사건이다. 레들의 동성애적 자각은 사관 학교 시절에 찾아왔지만, 이후 군생활을 하면서 동성애 성향을 성공적으로 감추어 꿈의 도시 빈의 부르주아들에게 충격을 주었다고 한다.

 

무질의 자전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는 <생도 퇴를레스의 혼란>은 레들 사건에 초점을 맞춘 것이기도 하다. 빈의 시민들에게 충격을 주었던 이 사건은 사실 합스부르브 사회 전체를 놓고 볼 때 “작위성과 겉치레는 당시로서는 예외라기보다 하나의 규칙이었고, 적절한 외양과 치장은 삶의 모든 측면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이러한 오스트리아 빈의 이중성과 합스부르크 왕조의 마지막 나날 속에서 탄생한 <생도 퇴를레스의 혼란>은 퇴를레스의 인식과 감각의 혼란 속에서 보내는 한 시절을 ‘빈’적인 스타일로 서술해 내려가고 있다.

 

소설 속에서 퇴를레스와 함께 하는 인물은 인도 철학과 초월적 세계에 심취한 바이네베르크와 음모를 꾸며 사람을 조종하기 좋아하는 권력형 인간 라이팅, 그리고 바이네베르크의 돈을 훔쳐서 라이팅과 바이네베르크에게 성적 괴롭힘을 당하는 바시니이다. 바이네베르크와 라이팅은, 바시니가 돈을 훔친 것을 트집잡아 그를 괴롭히고 추행하는데, 퇴를레스 역시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 바시니를 괴롭히고 추행하는데 동참하게 되고 퇴를레스는 자기 앞에 불어닥친 일 앞에서 혼란을 겪는다.

퇴를레스의 혼란은 수학의 허수에 대한 의문과 궤를 같이 한다.

 

"그래,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자. 하나의 연산을 할 때 우리는 확실한 수에서 출발을 해. 그러니까 미터나 무게 혹은 다른 구체적인 단위로 표현할 수 있는 실수로써 시작한다는 말이지. 그리고 연산의 마지막에 나오는 수도 역시 그러한 수겠지. 그런데 처음과 끝에 나오는 이 두 수를 서로 연결시켜 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어떤 영역이 아닐까? 달리 말하자면 첫 교각과 마지막 교각만 있는데도 사람들은 마치 그 교각 사이가 놓여 있는 것처럼 마음놓고 건너다니는 그런 다리 같은 게 아닐까? 마치 한 순간만 발을 잘못 놀리면 허방으로 빠져버릴 것 같은 거지. 그런데 정말 섬뜩한 것은 사람들이 다시 올바르게 도착할 수 있도록 꼭 붙들어매주는, 그런 연산 뒤에 숨어 있는 힘이야."132-133

 

퇴를레스에게 허수란 완벽하게 정립된 수학이라는 세계 안에서 부과적으로 도입된 이상한 것이다. 그러나 완벽하게 정립된 세계를 지탱하는 것은 우리의 인식 밖에 있는 이상한 수,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허수이다. 퇴를레스는 이 허수, 인식과 오성의 영역 밖에 있는 이상한 감각이 이 세계를 지탱하는 힘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이 생각은 훗날 갑자기 소환된 (특이하게도 미래의 퇴를레스가 소환된다.) 미래의 퇴를레스는 당시의 자신의 혼란에 대해 이렇게 서술한다.

 

“그래서 훗날 자신에게서 청소년기에 있었던 그 이야기를 들은 상대방이 혹시 이런 기억이 부끄럽게 느껴지지는 않느냐고 물으면 퇴를레스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나는 그 일이 타락이라는 점은 부인하지 않아요. 그런데 그런 일은 왜 일어나서는 안 되는 걸까요? 그 일은 이미 지나갔어요. 하지만 그 중 일부는 내게 남아 있어요. 미량의 독은 영혼에게서 너무나도 분명하고 안정된 건강함을 빼앗는 대신, 영혼에 보다 더 섬세하고 예리하고 이해심이 넘치는 건강함을 부여하는 데 필요한 것이지요."” 205

 

퇴를레스에게 세계는 단순한 오성과 과학적 합리성만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미래로부터 소환된 퇴를레스의 명쾌함 속에는 미량의 혼란, 완전한 세계에 이상하게 끼어들어간 허수와 같은 존재를 인정하는 태도가 포함되어 있다.

 

“인간 심연에 존재하는 것을 타인에게 설명할 수 없는 언어적 무능력에 관한 우려를 릴케, 카프카와 함께 공유”했던 것이다. 그러나 소설의 결론은 미래의 퇴를레스의 단정한 태도와는 달리, 학교에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끝이 난다. 즉 “언어는 가장 진실한 것을 설명할 수 없었던 것이며, 그것은 사람의 주관성의 심연 속에 영원히 내밀한 것으로 남게 되는 그 무엇”인 것이었다.

 

그렇다면 퇴를레스에게 남겨진 언어,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자신이 전하고자 했던 의도, 목적을 가진 그 말이 실패했다면 퇴를레스에게는 언어의 결여만이 남겨진 셈이다. 즉, 퇴를레스의 언어에는 언어와 비언어가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비언어가 언어를 지탱하는 이 퇴를레스의 세계는 세기말의 빈이라는 공간을 닮았다. 풍요로움을 가장한 빈곤, 사회혼란과 정치혼란 등이 탄생시킨 지적인 결실(비트겐슈타인과 프로이트, 볼츠만과 같은 과학자들, 쇤베르크와 말러 등의 예술가들)을 보라. 세기말의 혼란과 몰락의 냄새가 발효시켰던 풍요로운 사상처럼, 퇴를레스의 언어는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 정확히 말할 수 없었던 혼란, 자신의 말에서 자꾸만 미끄러지는 비언어라는 허수와 같은 존재에 의해 겨우 유지되는 하나의 질서는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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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앨런 제닉, 스트븐 툴민 지음, <빈, 비트겐슈타인, 그 세기말의 풍경>, 이제이북스, 2005, 94-96쪽.

2)위의 책, 195쪽.

3) 위의 책, 1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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