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리바이 - 상실의 글쓰기에 대하여
안드레 애치먼 지음, 오현아 옮김 / 마음산책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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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2년이 지난 9월 어느 날 쌍둥이마저 떠났다. 하루면 바닥나던 반 갤런의 우유가 갑자기 여드레를 갔다. 소시지도 피넛 버터도 사지 않고, 밀보다 설탕 함량이 더 높은 온갖 종류의 시리얼도 비축해두지 않는다. 집으로 달려와 밥을 챙길 필요도, 대학교 지원서를 교정할 필요도 없다. 더러운 양말을 분류할 일도, 이게 누구 셔츠니 하면서 한없이 싸우는 걸 말릴 일도, 아침에 알람 소리를 못 듣는다고 꼭두새벽에 알람시계를 맞출 일도, HB연필 두 자루가 아닌 한 타를 챙겨야 할 일도 없다.

모든 것이 20년 전의 속도로 늦춰졌다. 아내와 나는 미처 그리워하는 줄도 몰랐던 것을 다시 발견한다. 늦도록 밖에 있을 수 있고, 주말이면 여행을 떠나고, 해외여행을 가고, 일요일 밤에도 지인들을 초대하고, 내키면 영화를 보러 나갈 수도 있고, 이틀 연속으로 같은 청바지를 입지 않겠다고 하는 통에 밤늦게 세탁기를 돌리느라 골머리를 썩지 않아도 된다. 문은 활짝 열어젖혀졌고, 전쟁은 끝났으며, 우리는 해방되었다.

아들들이 떠나고 몇 달이 지나서 나는 이윽고, 내가 오랜 시간 등한시했던 관계가 다름 아닌 나와의 관계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내가 그리웠다. 나와 나는 말하기를 멈췄고, 만나기를 멈췄으며, 연락이 끊긴 채 서로 멀어졌다. 2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헤어진 지점으로 다시 돌아갔고 끝내지 못한 대화를 다시 시작했다. 이제 나 자신을 온전히 소유한 것이다.

어느 날 저녁 아내와 함께 저녁을 준비하다가 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내가 보기에도 민망한 짓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삶보다 더 소중한 세 아들 생각을 조금도 안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들들이 보고 싶지 않았고, 더 기이한 노릇은 하루가 지나도록 아들들 생각이 한 번도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인간의 마음이란 게 이토록 무심한 것일까?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마저 멀어진다는 게 자식에게도 해당하는 것일까? 정말로 그런가?(p.246~247)

* 안드레 애치먼의 글은 처음 접한다. 이집트 태생의 유대인으로, 에세이 내내 태생적 조건에 따른 내면과 환경의 불안함이 잘 드러난다. 인용한 글처럼 잘 읽히는 부분도 있지만 에세이인 것을 감안했을 때 생각보다 어렵게 다가오는 부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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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9-01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봄날의 언어님 안드레 애치먼 이책 저도 읽으면서 어려운 부분(저자의 감성을 잘 이해 못하는 ㅎㅎ)이 있었지만 콜미바이네임을 보고 나서 읽어서 인지 좋았습니다.

9월 건강과 행복 가득 하시길 바래요 ^.^

2021-09-01 01:5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