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들의 시선이 등 뒤에 있다. 의미심장한 말이다. 생각해보면 지금의 문학이라는 것이 수업의 형태, 즉 가르치고 배우는 구조가 되었으니까. 문창과에 진학하기 위해 입시과외를 받고 문창과에서는 또 작법에 대한 수업을 들으니까. 상당수의 작가들이 선생님들의 시선과 말, 그리고 문학적 판단 같은 것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 같다. 당연하다. 결국 선생님들의 평가와 심사가 작가의 문학적 성취와 문단에서의 위치를 결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럴 때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선생님들의 심사는 언제나 저울처럼 공정하고 유리알처럼 투명하겠지만(웃음) 문제는 심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심사를 받아야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다. 작가들이 눈치를 불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술자리에서의 눈치뿐만이 아니라 글을 쓸 때 이미 심사위원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요즘 신인들의 글을 보면 다들 너무 똑똑하다. 이미 문단에 나올 때부터 준비가 되어 있는 느낌이다. 어떻게 서야 등단을 하고 어떻게 써야 문학상을 받는지 영악하게 알고 있다. 나는 작가들의 상상력과 취향이 공장에서 생산된 것처럼 다 비슷하다는 걸 믿을 수 없다. 그리고 한 주머니에 다 담아도 빠져나오는 송곳 하나 없다는 게 기이할 정도이다. 결국 선생님들의 시선이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는 뜻이다. 그 시스템이 반백 년 넘게 문단을 지배하고 있다. 바깥에서 보면 믿기 어려울 정도로 권위적이고 전근대적이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봐도 나쁜 짓이다.(p26~27)(인터뷰이:천명관) 농담 하나 곁들여볼까요. 인문대 사람들에게서 자료를 받거나 자문을 구하려면 일단 만나서 술을 먹어야 합니다. 네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자료를 주지, 이런 입장입니다. 하지만 과학자는 다릅니다. 메일을 정성껏 잘 써서 보내면 됩니다. 내가 수행하고 있는 일이 무엇이란 걸 밝힌 다음, 당신이 어떤 부분에 기여할 수 있고 그 기여를 이렇게 보상하려고 한다고 적는 겁니다. 그럼 된다 안 된다 답 메일이 옵니다. 일단 술부터 먹어보고 결정하겠다는 과학자는 없습니다. 접근하는 방식이 다른 겁니다. 제가 몇몇 과학자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도 카이스트 교수를 하면서 이런 차이를 느끼고 적절한 방식을 제 나름대로 찾은 겁니다.(p.352~353) (김탁환)* 어떤 소설가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풀고, 어떤 소설가에 대한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고, 다음 읽을 책을 고를 수 있게 한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