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의 그늘 - 상
황석영 지음 / 창비 / 199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베트남 전쟁에 대한 전혀 새로운 시각을 주는 소설이다. 어찌 보면 안정효의 [하얀 전쟁]은 주인공을 미국인으로 바꾸어놓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상투적인 작품이었다. 황석영은 '전쟁의 참상으로 망가지는 개인' 같은 상투적인 감상의 위험성을 지적하고 있다. 특이하게도 한국인 안영규 뿐 아니라 베트남인 팜 꾸엔, 팜 민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무기의 그늘]은 황석영이 천재적인 이야기꾼임을 확인시켜주는 작품이라 할 만 하다.

그는 전쟁중의 블랙 마켓 이야기를 그려냄으로써 전쟁의 주인공은 정보 장교들이 짚어주는 지도 위를 헤매며 죽어 자빠지는 불행한 군인이 아니라 수많은 민간인, 군인 엑스트라들이 싸구려 일당을 받으며 알아서 돌아다닐 동안 뒤에서 큰 돈을 챙기는 '부자 아빠'들이라는 것을 여실히 드러내준다.  

한편 베트남을 통해서 한국 전쟁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준다. 소설 중간 중간 등장하는 미군 법무실의 조사 보고서는 한국에서의 학살이 어떻게 이루어졌고,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또는 현재도 어떻게 처리되고 있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것이다. 또한 르로이가로의 상인들과 남대문시장, 미군 기지 옆의 기지촌과 클럽들이 얼마나 닮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p.67
아메리카의 재화에 손댄 자는 유 에스 밀리터리의 낙인을 뇌리에 찍는다. 캔디와 초콜릿을 주워먹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자라나는 아이들은 저들의 온정과 낙천주의를 신뢰한다. 시장의 왕성한 구매력과 흥청거리는 도시 경기와 골목에서의 열광과 도취는 전쟁의 열도와 비례한다. PX는 나무로 만든 말이다. 또한 아메리카의 가장 강력한 신형 무기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가 미국인인 양 착각을 하며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한국에서 별볼일 없었던 드라마를 베트남에선 재밌게 본다며 웃은 적은 없는가? 불면 날아가는 냄새나는 쌀을 먹는다며 비웃은 적이 없는가? 베트남전에 참전한 한국 군인들이 흰 아오자이를 입은 소녀들과 베트남 창부들을 기억하는 방식이라니... 미군이 흰 저고리의 한국 민간인과 기지촌의 여자들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 것에 분개하며 '누이'라느니(*이럴 때만 '누이'지?) 하지 말고 우리 정체성이나 제대로 찾을 일이다.

p.171
그 여자는 제리나 토머스나 특히 제임스와 같이 있을 때 자신에게는 경멸하거나 따가운 눈총을 보내면서도 제 곁의 백인 사내에게는 외경스런 눈초리와 굴종하는 태도를 보이던 기지촌 주변의 남자들 얼굴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중국, 프랑스, 미국에 차례로 시달리면서도 독립한 베트남 사람들 참 대단하다. 특히 이제껏 미국과 싸워 이긴 나라라곤 베트남밖에 없는 것 같은데... 어쨌든 전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황석영의 탁월한 지적은 아직 유효하다.

p.259
이 무섭고 피에 젖은 전쟁의 연막이 사라질 때 우리는 재정이 아직도 확고하게 서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아직도 새로운 장소에 투하될 돈을 발견할 것이며 무너지고 황폐한 세계를 재건할 돈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공장의 불을 다시 밝게 타오르게 하여 지구를 평화의 승리로써 밝혀줄 달러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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