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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페터 회 지음, 박현주 옮김 / 마음산책 / 2005년 8월
평점 :
처음엔 스밀라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미혼처녀는 37살밖에 되지 않았으면서 다 늙어버린 것처럼 군다. 부유한 덴마크인 아버지덕분에 바지 안감에 대어진 실크의 촉감을 즐길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사냥꾼이었던 이누이트 어머니만을 자신의 유전자 제공자로 여기는 듯한 모순적인 여자이다. 남에게 말 한 마디 지는 법이 없고, 강하며, 자신의 뜻대로 인생을 살아간다.
이런 스밀라같은 여자들은 약한 척 하고,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며, 친구보다 데이트를 선택하는 경향이 있는 나 같은 여자를 무시하거나 불쌍히 여긴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 같은 사람은 주로 스밀라의 글쓰기 대상으로 혹은 곁다리로 등장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밀라의 길들여지지 않는 강함과 솔직함은 슬슬 나를 끌어들였다. 물론 나는 몰래 그녀의 글을 읽으며 좋아하거나, 어쩌다 마주치는 그녀의 재치있는 말솜씨에 즐거워할 만한 사람이지, 수리공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책의 가장 놀라운 점은 -아직도 믿을 수 없다!- 스밀라의 창조자가 남자라는 점이다.
남자가 그려내는 여자는 대부분 죽어있는 인형에 불과하다. 남자가 그려내는 여자 중 가장 실물과 비슷한 인형은 어머니이지만, 그마저도 아들 앞에서만 존재하는 신기루, 여자의 한쪽 껍데기일 뿐이다.
피터 회의 스밀라는 살아있다. 피터 회가 사실은 여자가 아닐까 싶을 정도다.
추리 소설로서도 아주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추리'만 놓고 보더라도 다빈치코드보다 34배쯤 괜찮았다.
'액션' (ㅎㅎ) 면에서도 긴박한 상황 묘사가 실감난다. 스케일도 크다.
밤에 혼자 이 책을 읽다가 물을 마시러 거실로 나갔는데, 방밖이 크로노스호의 복도가 아니며, 파도에 흔들리지 않고 있다는 데 대해 잠시 어안이 벙벙했다.
그린란드, 눈, 얼음에 대한 묘사를 읽을 때면 찬바람이 부는 듯 했고, 수리공이 커피를 만드는 부분에선 휘핑크림과 우유가 1:2 비율로 섞여 내는 향기와 눈보다도 예쁜 그 모습(냠냠)이 그려지곤 했다.
왜 스밀라를 좋아하게 되었을까. 그녀의 매력에서 빠져나오려고 용을 썼는데도...
1000원 할인쿠폰을 깜빡하고 사서 마음에 한이 맺혔는데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