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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사 산책
쓰지 유미 지음, 이희재 옮김 / 궁리 / 2001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는 번역가들이 걸러준 많은 책들을 읽는다. 원전을 볼 수 없는 상황에서는 번역자가 맘대로 내용을 고치더라도 알 수가 없다. 명쾌한 원전의 필치를 전혀 살리지 못하는 딱딱한 번역도 난무하고, 한편으론 원전을 뛰어넘는 감칠맛 나는 번역도 가끔 볼 수 있다.(조그마한 책이지만 번역서를 한 권 출판해보기도 한 경험자로서) 가끔 원서를 읽으며 취미삼아 번역을 해보기도 해보는데, 그때마다 번역이라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새삼 느끼게 된다.
인류 문명의 역사가 번역의 역사와 얽혀있음을 이 책은 알려 준다. 프랑스의 번역사를 중심으로, 그것도 인물들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지만, 그 출발은 고대로부터 시작하며, 유럽이 르네상스시대에 그리스 원전을 찾게되기 전까지 학술적 업적을 유지해온 아랍권의 번역사도 다루고 있다.
정말 흥미로운 부분은 중간부분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저작들을 프랑스어로 번역한, 잘 알려지지 않은 번역가들의 이야기이다. 한 때 번역은 창작과 동일한 정도의 예술로 인정받았던 적도 있고, 단어 대 단어로 기계적 번역을 해야할지, 혹은 시대사회상과 번역자의 이해를 바탕으로 '역동적' 번역을 해야할지에 대한 논쟁도 있었다. 그 와중에 나름대로의 열정을 가지고 문명사, 사상사, 번역사에서 중요한 역할들을 해 온 몇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정말 산책 삼아 들려주는 책이다.
저자는 일본 여성으로서, 번역자들 중에서도 여성들에 대해 특히 흥미를 보이며, 종종 일본의 상황과 프랑스의 상황을 비교하기도 한다. 특히 이 책이 보통 역사서와 다른 점은 저자가 거리낌없이 화자로 등장한다는 점인데 (가령, 어떤 부분을 설명하다가 어느 도서관에서 이 자료를 찾았다는둥, 누가 이 부분에 큰 도움을 주었다는둥 하는 이야기들이 주석이 아닌 본문에 담겨 있다), 오히려 친밀하게 느껴지는 화술로 제목대로 '산책'이 되게 해준다.
다만 마지막 장에서 다루고 있는 번역가 조직의 역사 부분은 책의 나머지 부분과 다소 동떨어져 있고 흥미가 덜한 듯하다. 앞부분까지 번역가의 정열, 번역철학 등을 논하다가, 갑자기 직업인으로서 번역가의 이해 관계를 보호하는 등의 이야기로 돌아섰다고나 할까.
저자 후기에 따르면 잡지에 연재했던 글을 편집했다고 하는데, 잡지글처럼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작은 책이다. 번역에 대한 책인만큼 이 책의 번역은 상당히 매끄러웠다는 것을 지적해두고 싶다. 또 관련된 책으로 일본의 번역사를 상당히 심도있게 대화 형식으로 논한 <번역과 일본의 근대화>를 추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