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버스를 타고 내릴 때, 문을 열고 닫을 때, 붐비는 길을 걸을 때나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머뭇거릴 때 어린이에게 빨리 하라고 눈치를 주는 어른을 종종 본다. 어른들이 보기에는 간단한 일이라 어린이가 시간을 지체하면 일부러 꾸물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할 것이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어렸을 때 기다려 주는 어른을 많이 만나지 못해서 그런지도 모른다. 지금 어린이를 기다려 주면, 어린이들은 나중에 다른 어른이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가 쓴 것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2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가 이름 앞에 작가의 작품이 붙는 건 당연한 일인데, 수록작 <오기>를 읽으며 작가 본인은 『82년생 김지영』의 작가라는 수식을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해졌다. 이제 이 소설은 무언가의 대명사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함의, 의제, 논란···. 물론 선두에 세워야 할 단어는 페미니즘이겠고. 

 

무릇 페미니즘이란 젠더 따지지 말고 서로 사랑하며 사이좋게 지내라는 뜻일진데, 필요는 하지만 전제 자체가 어긋난 논쟁을 보며 좀 신기했다. 『82년생 김지영』과 『우리가 쓴 것』이 던지는 이슈는 나를 둘러싼 주위에선 숨쉬듯 내뱉은 이야기들이었다. 활발히 논의되어 왔고, 그다지 어려운 이야기도 아니었고, 충분히 공감하고 공감받았다. 그래서 이 책을 두고 논쟁이 과열됐을 때 어느 쪽에선 평범한 이야기가 어느 쪽에선 불쾌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 몹시 신기했다. 한편으론 내가 속하지 않은 세계의 목소리는 전혀 모르고 살아왔다는 뜻이니, 강 건너에 선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리라. 그렇더라도 내가 나로 사는 이야기가 당신에겐 뭐 그렇게 불편하고 불쾌할까 싶어서 솔직히 말하면 웃겼다. 종내엔 우스워졌고. 

 

어쨌거나 글이 가진 힘이 책을 뚫고 나와 세상에 뿌리 내린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이 기분이 몹시 짜릿했다. 『우리가 쓴 것』은 또 어떤 이야기로 내 가려운 속을 긁어줄까 기대하며 책을 기다렸고, 읽었고, 도무지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한 남자의 내면을 여행하는 이야기가 아니라서 좋았다.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세계여서. 재미있다고는 말 못 하겠다. 글을 글로 바라볼 땐 재미라 표현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읽는 내내 '이건 너무도 현실이잖아!'라는 공포에 가까운 감정이 나를 지배했다. 아마 앞으로도 이 책을 두고 '재미'라는 단어를 사용할 순 없을 거다.

 

수록된 단편 단편이 각기 다른 면모로 빛났다. 작가가 알알이 흩어놓은 단편을 독자가 하나의 주제로 묶는 결과값이 단편소설집의 재미라 생각하는 편인데,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채로 끝나는 세계'라는 매듭을 지으며 책을 덮었다. 각 편의 감상을 기록해본다.

 

 

 

 

 

매화나무 아래

큰언니는 여전히 중환자실에서 회생 가능성 없이 누워 있다. 생사를 결론내지 않아 해결되지 않은 세계라는 건 내게 너무 무엄한 가치관이고. 그러니까 한 인간의 존엄을 누가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를 해결하지 못한 채로 이야기가 마감했다는 것인데. 닫혔든 닫히지 않았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고 소용도 없다. 작가가 띄운 운을 독자가 길어올려 저마다의 의미를 반추해보는 것이 소설 읽는 재미니까.

 

다음은 내가 파악한 작가의 질문이다.

 

- 무릇 인간이란 어떻게 사는 게 의미 있나.

- 살아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다행한 일인가.

- 우리 존엄을 얘기해볼까.

 

그에 관한 나의 생각은 아래 옮긴 일부에 기댔다. 결론은 아직 없고, 사는 내내 생각해보지 않을까. 이어지는 내용에 더 풍부한 질문이 담겨 있지만, 일부만 옮기겠다. 

 

"그런데 저는요, 할머니가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가 없어요. 기적 같은 걸 바라는 건 아니고요. 그냥 살아만 계시면 좋겠어요."

"근데 승훈아. 나라면 싫을 것 같아. 아무것도 못하고 저렇게 누워만 있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어?"

교차로의 신호등이 주황색으로 바뀌었고 차는 서서히 속도를 줄여 횡단보도 정지선 앞에 섰다. 승훈이가 물었다.

"어떻게 사는 게 의미 있는 걸까요?"

 

승훈이는 큰언니가 식당을 운영하며 쪽방에서 키운 손주다. 할머니를 갸륵히 여기는 장성한 손주의 마음보다 할머니랑 얘기하면 재미있다는 손주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그 말이 좀 낯설었다. 나는 재미있는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키가 큰 청년 하나가 내 쪽으로 걸어왔다. 그러고는 환하게 웃는다. 얼굴이 잘 보이지는 않지만 알 수 있었가. 분명 나를 보고 웃었다. 아이고야, 나 노망났나 봐.

"이모할머니, 언제 오셨어요?"

말이 입술에 걸려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내가 놀란 건 위 네 줄이다. 나이가 들어서도 그런 감정을 느낄 줄 몰랐다가 아니라, 나 역시 노년이 되어서도 그런 감정을 느낄 것 같기 때문에. 나의 미래를 예견한 내 자신에게 깜짝 놀랐다는 편이 맞겠지. 이 대목에서 영화 <세상의 모든 계절>도 떠올랐다. 제리의 잔인함에 주목했던 영화였는데, 문득 만져지는 메리의 마음이라니. 이 영화를 다시 이해할 시즌에 접어든 것인가.


세상의 모든 계절

 

 

 

오기

오기에서 해결되지 않는 건 관계다. 혜원 선생님에게 보낼 수 없는 메일을 쓰는 것으로 마치는 이야기라 생각했는데, 지금은 주인공이 발송 버튼을 눌렀다고 믿고 있다.

 

도무지 잡히지 않는 실마리로 이어가는 관계들. 나에게 인장을 남긴 내 인생에 중요한 사람들. 그게 곧 긍정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돌이켜보면 관계라는 건 대체로 오리무중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에 휘둘리고, 그걸 명징하게 설명할 수도 없으며, 설명한다 한들 티끌만큼의 오해없이 전달되기도 어렵다. 그렇다 보니 때때로 어긋나고 삐것대고 아름답게 안녕도 하는 것인데. 나는 오해라는 관계의 부스러기를 소명하지 않은 채, 순환에 맡기며 살아가는 경우와 입장이 많았다. 그리곤 시간이 흐른 후 깨닫는 것이다. 괜찮을 줄 알았던 그 지점이 내게 돌이킬 수 없는 구멍을 낸 거였다고.

 

아. 주인공이 자기고백으로 점철된 메일을 썼고, 끝내 발송 버튼을 눌렀다면, 그렇다면 이 얘기는 인생의 어느 단락을 해결한 이야기가 되는 거네. 

 

여러 방면에서 '<오기>의 에피소드들이 모두 제 경험담은 아닙니다.'라는 작가의 말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소설 밖에서 펼쳐지는 또 다른 소설이라고밖에 생각할 수가 없다, 이거는 진짜로.

 

 

 

 

 

 

가출

가출한 아빠가 돌아오지 않아서 해결되지 않은 이야기라 생각했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채로 끝나는 세계'라는 건, 바꿔 말하면 '뭔가를 해결해야 하는 세계'와 동일하다고 생각했다. 읽으면서는 '그러나 바뀌는 건 없다. 당연하다. 이게 현실이니까.'를 소설로 쓴 거라고 생각했다. 세 번째 소설 <가출>을 읽고 난 후 생각이 달라졌다. 아빠가 원하는 대로 살고 있는 지금. 그런 아빠를 위해 체크카드를 해지하지 않는 것으로 마음을 보내는 딸. 그럼 이건 해결할 필요 없는 세계 아닌가.

 

 

 

 

 

미스 김은 알고 있다

그런가 하면 네 번째 단편은 다시 해결하지 못하는 혹은 할 수 없는 세계로 돌아온다. 이건 좀 거대하다. 여자 혼자 살아가냐 하는 현실의 엄중함을 공포로 깨닫는 거. 혼자 자취해본 여자라면 한 번쯤은 느껴봤을 거다. 다만 완연한 어려움 속 귀여운 복수가 들어 있다. 진짜 사소하지만 거슬리는 것. 차마 어디 내놓고 말할 수 없지만 속에서 부글부글 끓는 종류의. 당신, 강력한 펀치라인을 못 가졌다고 살면서 뒷덜미 서늘하고 그러지 말 것. 당신이 가진 게 잽뿐이라면 끊임없이 잽을 날려라. 반복하다 보면 그게 당신의 돌이킬 수 없는 무기가 될 거다. 뭐 그런 기분이었다. 미스 김의 복수는. 

 

 

 

 

 

현남 오빠에게

다섯 번째 단편 <현남 오빠에게>는 양상이 바뀐다. 해결되지 못할 뻔했던 현실을 주인공이 직접 탈출한다. 주인공은 10년 연애 기간 동안 애매하게 이상하고 불편했던 지점이 가스라이팅이라는 걸 깨닫고 회사를 휴직한다. 직업도 바꿔볼 예정이다. 오빠에게 헤어짐을 고하는 오늘은 이사하는 날이다. 전화번호도 바꿨겠지? 청혼을 받고 가스라이팅을 깨닫다니. 일생일대의 위험에서 빠져나온 당신에게 축하를.

 

 

 

 

오로라의 밤

직장 다니며 육아까지 해야 하는데 의지할 곳 없는 여성이라면 너무 공감할 이야기. 고부관계를 고민하는 사람에게는 어떻게 다가갈까 궁금하기도 하고. 주인공에게 주어진 환경과 별개로 인물의 내면에 가장 공감하며 읽었던 단편이다. 페이지 모서리를 겹겹이 접었다. 그 중 일부를 소개한다.

 

팔을 쭉 뻗어 앞뒤로 번갈아 박수를 치며 언덕을 올랐다. 언덕이 너무 어둡고 조용해 갑자기 야생동물이 나타날 수도 있으니 기척을 하라고 가이드가 말했었다. 

"동물에게도 사람에게도 그게 안전해요."

내가 있다고, 가까이 간다고, 피하고 싶으면 피하라고 알려 주는 일. 서로의 안전을 지키는 일.

 

 

 

 

 

여자아이는 자라서 

현남 오빠로부터 탈출하는 것으로 첫발을 내딛었던 여성은 다시 십 대로 돌아가 좀 더 계획적으로 현실을 전복하려 한다. 잘못한 당사자가 정식으로 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하고, 대안을 마련할 마음은 없고 내빼기만 하니 현장을 잡는 것으로. 재발 방지를 위해 덫을 놓는 게 전복이라니. 애초 상황이 성립되지 않는 게 중요할 텐데 '정식으로 사과받고 재발 방지'를 대책이라고 쓰고 있는 내가 싫다. 하. 도대체 니 몸 내 몸 다 중요하다는 건 어디서 배울 수 있나. 난 배웠던가. 난 내 몸을 아꼈던가. 누가 내 몸을 소중하게 대해줬나. 너무 공포스러워서 읽다가 몇 번이나 멈췄다. 

 

내 마음을 파고든 작법 하나도 기록해둔다. 완두콩, 아보카도로 이어지는 식탁 위 열매로 정서를 만든 작가의 세공력을 무지 배우고 싶었다. 

 

 

 

 

 

첫사랑 2020

너무 슬픈 이야기인데 너무 귀엽게 쓰셨다. 이 단편은 작가의 말도 소설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옮겨두겠다.

 

"코로나 19로 일상이 무너졌던 2020년 여름에 썼습니다. 교육과 보살핌의 공백에 방치된 아이들, 고립된 아이들, 표정과 몸짓이 함께하는 대화를 나눌 수 없고, 땀이 나도록 뛸 수 없고, 이 상황이 왜 벌어졌는지 언제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어 더욱 불안한 아이들이 어떤 생각과 마음으로 자라게 될까 염려스러웠습니다."

 

소설 속에서 선생님은 두 아이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건넨다. 선생님이 뭐가 미안하냐는 물음에 글쎄,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답한다. 코로나 이후 나 역시 짝꿍이나 친구들과 '아이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가장 많이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상한 집 Studioplus
스티븐 프라이어 지음 / 시공주니어 / 2020년 2월
평점 :
품절


세상에나 아이들은 양치질을 왜 이렇게 싫어하는지, 원.

그때마다 아이 눈을 보고 얘기한다. 아가야. 누가 씻겨주고 먹여주고 입혀주는 날 길지 않아.

알아들을 리 만무하지만, 얘기는 해준다.

양치 잘 시키려고 별 수를 다 써보았고 가장 효과가 좋았던 건 애착 인형을 앞에 앉혀놓는 것이었다.

걔 이름은 '티거'인데 "티거야, 형아 양치하는 거 잘 봐라. 형아 진짜 멋지다." 하면서.

그럼 또 얘는 양치 다 하고 "티거야, 나 멋지지?" 하며 뿌듯해한다. 칭찬받으면 우쭐한 타입. 훗.

애석하게도 티거 약발은 2주를 못 채웠다.

어쩔 수 있나. 나는 또 양치책을 찾아 여행을 떠났고 <이상한 집>을 만났다.

반듯한 그래픽 스타일의 그림과 알록달록한 색감이 신선하고도 예쁘다.

중장비 좋아하는 아이가 최근 관심을 쏟는 각종 공구들이 나와서 흥미를 끌기에도 안성맞춤.

이야기도 재미있다. 스포일러라서 결말을 얘기하긴 어렵지만, 뜻밖의 반전이 아이를 열광하게 했다. 맨날 "DK 어딨어?"라고 묻는다.

그래도 한 마디만 덧붙이자면. <이상한 집>은 <이 상한 집>이었다는 사실.

그래서 최근 우리 집 양치질 처방전은 <이상한 집>이 되었다.

DK가 나오는 페이지를 펼쳐놓고, 그대의 입속 DK도 찾아보자고 말하면 흔쾌하게 쩍 벌려준다.

하... 양치 하나 시키는 데에도 꾀가 필요하다니. 어렵다, 육아 라이프.

책 육아하시는 분들이라면 아이에게 메시지를 전하고 싶을 때 관련 책을 고르는 편일 텐데, 치카치카 양치질 그림책을 찾고 계시다면 아주 적극적으로 추천하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늘은 하늘에 둥근 달
아라이 료지 지음, 김난주 옮김 / 시공주니어 / 202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침에 창문을 열면>과 수미상관을 이루는 그림책 <오늘은 하늘에 둥근 달>이 도착했다. 

하루를 여는 시간과 하루를 닫는 시간의 에너지를 담은 두 그림책을 나란히 세워본다.

정말이지 '에너지'라고밖에 설명 못할, 그림과 글씨를 뚫고 전해지는 기운이 담긴 두 그림책이다.

<아침에 창문을 열면>이 아침의 상쾌한 에너지를 전해준다면, 

<오늘은 하늘에 둥근 달>은 하루를 마무리하는 차분하고 고요한 에너지를 전해준다....

고 생각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아직 꺼지지 않은 태양의 잔불이 느껴진다.

해가 지고, 달이 뜨고, 달이 떠야만 시작되는 이야기가 가만히 고개를 드는 기분.

달무리가 줄지어 산책을 나갈 때 빚어재는 미묘한 뉘앙스가 은근하게 전해지는 기분.

괜히 모두 잠든 밤에 나 혼자 차라도 한 잔 마셔야 할 것 같은 소박한 열기가 몸을 데우는 기분이다.

표지를 보자마자 '사랑'이라는 말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어 '달이 아름답네요'라 번역했다던 나쓰메 소세키가 떠올랐다.

아, 맞아. 밤이라는 손님은, 밤새 써 내려간 편지가 아침에는 부끄러워지는 이상하고 달뜬 열기가 흐르는 시간이었지. 

밤이란 그런 것. 그런 밤에 둥근 달까지 떴으니.


지난 2주 동안 침대 헤드에 올려두고 밤마다 아이와 함께 읽었다.

그림책의 마지막 문장인 '선물 같은 달님'을 큰 소리로 따라 외치는 아이의 목소리도 선물 같다.

밤새 우리의 머리맡을 지켜주는 그림책의 고단함은 모른 척하기로 한다. 내내 위로로 기억하고 싶은 책이라서.


첫 페이지의 주인공인 아기가 하늘을 본다.

하늘엔 둥근 달이 떴다.

다음 페이지에서 그 달이 비치는 이는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버스에 오른 무용수다. 

그다음 페이지에 등장하는 운동화를 품에 안은 소년이 버스를 탄다.

소년의 앞 좌석에는 무용수가 앉아 있다.

동네 공원은 밤 축제 준비가 한창이다. 역시, 달이 그곳을 비춘다.

그 달은 공원 옆 아파트 또한 굽어본다.

아까 그 무용수가 춤 연습을 한다.

페이지를 넘기면 무용수의 집 위층에 또 다른 주민이 제 할 일을 한다.

이렇듯 달을 중심으로 같은 시공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페이지마다 소개된다.

그들이 겪는 시간, 그들을 감싸는 달의 온도, 모든 것이 우리가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기분 좋은 착각 혹은 희망을 품게 한다.


가장 인상 깊었던 페이지는 기타 연습을 하던 이가 등장하던 대목이었다.

그림 옆으로 이런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같은 곳을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연습하고 있어요.'

상상해본다. 기타리스트가 되고 싶었던 그는 부모님 반대에 부딪쳐 할 수 없이 회사에 취직했다.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아가고는 있지만 마음 어딘가가 허전하다.

그러다 퇴근길에 우연히 마주친 기타 가게에서 홀린 듯 기타를 한 대 샀다.

그리곤 밤마다 같은 곳을 몇 번이나 연습하는 거다.

성실한 직장인의 아침에 창문을 열고, 오늘은 하늘에 둥근 달이 뜨면 기타를 치는 거지.


아이를 재우다 같이 잠들어버리곤 새벽녘에 일어나 달을 바라보는 요즘의 나는 저녁이 있는 삶을 간절히 바란다.

하늘에 달이 떠야만 겨우 나만의 시간이 주어진다는 게 가끔은 울적했는데, 

누군가는 그 시간을 허투루 낭비하지 않고 몇 번이나 같은 곳을 연습하는 데 쓴다니. 

그 정성이 너무 예쁘고 마음이 좋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민 해결사 펭귄 선생님 네버랜드 우리 걸작 그림책 65
강경수 지음 / 시공주니어 / 202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휘영청 밝은 달이 뜬 어느 밤. 깊은 시름이 빨간 지붕집을 찾아갑니다.

개구리는 창밖을 보며 중얼거리죠. 내일은 꼭 펭귄 선생님을 찾아가 봐야겠다고요.

다음 페이지를 펼치자마자 마치 영화의 오프닝 타이틀처럼 등장하는 제목이라니.

제 귀에는 넷플릭스의 오프닝 시그널 '두둥'이 들려오는 것만 같았습니다.

이때 눈치챘어요. 범상치 않은 그림책을 만났구나.

서사보다는 캐릭터에 빠져 책을 따라가는 24개월 아이와 함께 그림책을 읽는 저로 말할 것 같으면요.

그동안 해외에서 출판된 전집을 많이 부러워했습니다. 이를테면 추피나 곰돌이나 바바파파 같은 캐릭터들이 이끌어나가는 시리즈를요.

아이가 워낙 좋아하니 매일 읽어주긴 하지만, 이 책들에게서 아쉬운 부분이 눈에 쏙쏙 들어오더라구요.

특히나 음식, 놀이, 문화를 토대로 만든 생활 동화들을 읽어줄 때면, 한국 사람이 보편적으로 공감하는 정서를 기반으로 한 이야기에 목말랐습니다.

아름다운 한글의 말맛을 잘 살린 한국 사람이 쓰고 그린 캐릭터 중심의 그림책.

그게 바로 제가 찾는 거였어요.

그리고 마침내 찾았습니다. 고민 해결사 펭귄 선생님을요.

이미 <코드네임 J>라는 시리즈로 유명하신 분인데 그것도 모르고 괜히 다른 나라 캐릭터들 부러워했어요.

이 책 펼치자마자 아이는 앉은 자리에서 4번을 다시 읽었습니다.

이 책이 저희 집에 온 그날부터 오늘까지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아이가 선정한 잠자리 독서 목록에 포함되었습니다. 보통 3일이면 질려 하는데, 이거 저희 집에서는 대단한 사건이에요.

반복되는 문장에서는 안정된 리듬감을,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까지 이어지는 내담자로 숫자 익히기를,

본인에게는 진지한, 듣는 '어른' 입장에서는 얼토당토않은 고민으로 웃음을,

그러나 그 고민을 고뇌하며 경청하는 아이를 보며 새로운 깨달음을,

유리창 너머로 상담실을 힐끔대는 다음 내담자를 보며 숨바꼭질 놀이를,

각 내담자마다 다른 포즈로 귀 기울이는 펭귄 선생님으로부터 듣는 자세를 배우게 되는 이 책.

얼핏 단순한 구조 같지만, 깨알 같은 의미를 곳곳에 심어놓아 발견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재미가 있는 책이었어요.

아, 펭귄 선생님의 반전 또한 잊을 수 없는 매력 포인트였습니다.

"그러나 그 고민을 고뇌하며 경청하는 아이를 보며 새로운 깨달음"이라고 쓴 이 부분을 좀 더 정리해두고 싶어요.

이제 연어가 맛이 없다는 곰이나, 겨울잠이 안 온다는 개구리 등 동물들의 절실한 고민이 어른인 저에게는 그저 유머 코드로 다왔는데, 아직 동물들의 속 사정을 모르는 아이는 미간을 찌푸리고 정말 심각하게 듣더라구요.

왜, 살면서 마주치는 가족, 친구, 지인의 고민이 내 보기엔 별로 심각하지 않을 때 있잖아요.

나에겐 정말 죽을 만큼 심각한 문제인데 대수롭지 않게 치부하는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요.

그동안 내가 맞닥뜨렸던 수많은 상황이 떠오르면서, 고민과 걱정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대해서 돌아보게 했던 순간이었습니다.

처음엔 고민도 걱정도 누가,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경중이 다르다는 의미겠으니, 나 역시 잠깐쯤은 걱정을 가볍게 바라보자고 정리하고 책을 덮었어요.

그런데 여러 번 반복해서 읽다 보니 다른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게 고민이 떠오를 때면 경중에 상관없이 잘 들여다보고 다독이고 소화시켜보자는 마음이요.

요즘 이런저런 고민이 많은 저에게 누군가 선물해 준 비밀의 열쇠 같았어요.

참. 우리 집 꼬마는 이 책의 면지마저 사랑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