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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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나의 그림자.

벽이 높이 솟은 마을과, 마을 바깥의 세상.


나의 무의식이 강하게 잡아끄는 세계와

나의 몸이 놓인 현실 세계에 관한 이야기.


*


우리에게는 저마다 견고한 벽으로 쌓아 올린 마을이 있다.

마을은 말하자면 한때 강렬하게 이끌려 내 마음 깊숙이 새겨져 버린 가공의 유토피아, 달리 말하자면 도피처. 그런데 이 마을에서 지내자면 나의 그림자와는 헤어져야 한다. 유토피아에서 굳이 그림자를 데리고 다니는 수고로움을 감수할 이유는 없으니 당연한 흐름이다. 내가 마을에서 지내는 동안, 마을 바깥으로 내몰린 나의 그림자는 나의 현실을 살아가게 된다.


벽으로 둘러싸인 마을에서 지내는 나와, 

마을 바깥의 또 다른 나의 분신.

그런데 어느 쪽이 진짜 ‘나’일까? 

내가 혹시 ‘그림자’인 건 아닐까?


하여 우리는 때때로 나 자신이 진짜 나인지, 

그저 하나의 페르소나에 지나지 않는지

스스로도 헷갈리곤 하지 않던가.


문장은 어렵지 않게 읽히면서 때로는 찬란하기까지 하고,

치밀한 서술 덕분에 각각의 사건은 언뜻 명확한 듯 보이지만,

다 읽고 전체를 바라보면 무척 관념적이어서 쉽사리 손에 잡히지 않는 게 하루키 소설의 강력한 매력.



*


⚠️스포 &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

작품 중반부 이후를 따라가자면 이렇다.


*


중년이 된 현실 세계의 나는 한적한 시골 마을에 터를 잡았고, 

벽에 둘러싸인 마을에 가보았다는 도서관장과 교류하고(다만 그는 이미 죽은 존재다), 

벽에 둘러싸인 마을에 지대한 관심을 표하는 옐로 서브마린 파카를 입은 소년을 만났다.

그리고 한 여자를 만났다. 여자를 만나며 열일곱 시절에 만난 열여섯 소녀를 다시금 강렬히 떠올린다. 

나는 결국 소녀가 만들어 내고 내가 완성한 가공의 세계(벽으로 둘러싸인 마을)로 회귀한다.


나만의 유토피아가 실존함을 굳게 믿고 싶었고(feat. 죽은 도서관장) 

나만의 유토피아가 실존함을 증명해 줄 누군가가 있었으면 하고 바랐던(feat. 노란 잠수함 소년) 나는,

열여섯 소녀가 그리워서 다시 벽에 둘러싸인 마을로 회귀해 버린 중년의 나는, 

나만의 유토피아가 실존함을 증명해 준 노란 잠수함 파카 소년이 마을로 찾아와 들려주는 이야기를 받아들인다. 

비로소 불확실한 벽으로 둘러싸인 마을을 떠나 현실 세계로 나아가기로 마음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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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추억의 힘 - 탁현민 산문집 2013~2023
탁현민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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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5

북극을 가리키는 나침은 무엇이 두려운지 항상 여윈 바늘 끝을 떨고 있습니다. 여윈 바늘 끝이 떨고 있는 한 우리는 그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 바늘 끝이 전율을 멈추고 어느 한쪽에 고정될 때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 합니다. 이미 나침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영복, 〈지남철〉


책 맨 앞의 발췌 글을 보고 얼마간 멍했다.


나침반의 바늘이 떨리는 걸 거추장스럽게만 여겼지, 나침반의 생리를 생각해 본 적이 있었나. 나침반은 북쪽을 향해 끝없이 바늘을 움직인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인생은 돌아보고, 되묻고, 나은 길을 찾으려 하고, 들뜬 마음으로 향한 저쪽에서 이내 한풀 꺾인 마음을 안고 되돌아오는 일의 연속이다. 우리는 언제나 무언가를 찾아 바늘 끝을 떠는 나침반과 같다. 어떤 이유에서건 더는 바늘이 떨리지 않게 되면, 그것은 삶이라 부를 수 없다.

적잖은 위로가 되었다. 끊임없이 나아가며 돌아보고 흔들리는 삶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고, 삶이라는 건 원래 그런 거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이런 생각을 하고 나서야 든 생각. 작가가 자신만의 이야기의 운을 떼기도 전에 내보인 글이 이것이라면, 이 글은 작가에게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띄는 것이란 말인가.


책을 읽어나갈수록 신영복 선생이 저자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신영복이라는 사람이 쓴 책을 학창 시절 처음 접한 이야기, 그를 처음 마주한 날의 이야기, 인생이 롤러코스터를 탈 때마다 신영복 선생이 저자에게 들려주었던 이야기, 작별 인사까지. 신영복 선생의 글을 괜히 책 맨 앞에 실은 것이 아니구나, 싶었다.


살면서 한두 번쯤은 이름을 들어본 사람들과 얽힌 에피소드가 이 책에는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인맥, 이라고 해야 하나. ‘인맥’이라는 단어에서 나는 때때로 ‘애써 이어 붙여 만들었다’는 인위적인 냄새를 맡곤 하는데, 저자가 펼쳐놓는 사람 이야기에서는 딱히 그런 냄새가 없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고 사람이 있구나, 싶달까.


이 책은 총 세 부분으로 나뉜다.

〈1부 사소한 추억의 힘〉에는 저자의 전작 《미스터 프레지던트》에서 볼 수 없었던 저자의 사적 이야기가 담겨 있다.

〈2부 흔들리며 흔들거리며〉에는 2012년 대선 이후 파리 생활의 에피소드가 담겨 있다. 분위기는 분명 쓸쓸한데, 1인 원맨쇼를 보는 듯 ‘풉풉’ 하고 터진다.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 하지 않던가.

〈3부 당신의 서쪽에서〉에는 2016년 제주 생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고기는 잡아먹고 살겠다’는 신념을 장착한 채 제주에 발 디딘 저자의 처절한(?) 제주 생존기다.


연출가 탁현민의 공무 수행 이야기를 읽고 난 뒤로 작가 탁현민의 사적인 이야기를 조금 더 듣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에세이집이 나와주니 사는 맛이 조금은 더 풍요로워진 것 같다. 신영복 선생의 책도 장바구니에 담아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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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우에노 스테이션
유미리 지음, 강방화 옮김 / ㈜소미미디어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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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도쿄에서 지내면서 기억에 깊이 남은 장면은 여럿 있는데, 그중에는 노숙자와 얽힌 장면도 있다. 밤 9시가 넘은 시각, 신주쿠역. 환승하기 위해 역 건물을 가로지르다시피 해서 걸었다. 역 건물 넓은 공간에 노숙자들이 잠을 자기 위해 저마다 무언가를 깔고 자리를 잡고 있었다. 꽤 많았다. 함께 걷던 지인은 ‘어떤 화를 당하게 될지 모르니, 절대로 저들을 쳐다보거나 손가락질하지 않게 조심하라’라고 일러주었다. 곳곳에 경찰이 서있었는데, 노숙자를 쫓아내는 것 같진 않았고 질서 유지 정도의 역할을 하는 듯 보였다.


다른 어느 날. 햇볕이 전차 안을 나른하게 데워주던 한적한 평일 낮. 생전 처음 맡아보는 강렬한 냄새에 주위를 둘러보니 기다란 한쪽 좌석 칸 전체를 노숙자가 차지하고서 누워 있었다. 양손을 배 위에 가지런히 모으고서 곤히 잠을 자고 있었다. ‘본인에게서 이런 냄새가 난다는 걸 인지하고 있을까?’ 그런 그의 근처로 다가가지는 않으면서도 마치 없는 존재인 듯 행동하는 같은 칸의 사람들도 의아했다.


외국 땅을 밟고 돌아다닐 땐 좋고 아름다운 풍경만 눈에 들어왔으면 하고 내심 바라는 것 같다. 이런 마음 때문일까, 해외에서 노숙자를 맞닥뜨렸을 때의 충격이 유독 강렬한 건.


이 책은 도쿄의 우에노역에서 노숙자로 지내는 남성 ‘가즈’의 이야기다. 원제목은 ‘JR 우에노역 공원 출구(JR上野駅公園口)’.

우에노역에 가본 적 있다면 원제목이 더 와 닿을지도 모르겠다. 우에노역 ‘공원 출구’에는 양극이 공존한다. 벚꽃을 보러, 판다를 보러 들뜬 마음을 안고서 공원 출구로 나오면 상반된 풍경이 펼쳐진다. 화려한 벚꽃 잎, 담소를 나누며 들뜬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들, 분명히 노출되어 있지만 옅은 존재감으로 제자리에서 숨죽이고 있는 노숙자들. 도쿄 명소라는 화려한 수식어가 붙지만, 그런 수식어에 어울리지 않는 그늘이 있는 곳.


이런 느낌을 지우기 위해서인지 우에노역과 우에노 공원 일대는 리뉴얼을 거듭하고 있다. 2008년, 2010년, 2014년의 풍경이 사뭇 달랐고, 2020년은 또 다르다. 누추한 자리는 따스한 조명이 불 밝히는 말끔한 건물로 채워졌다. 옅은 존재감으로 그곳에 있던 노숙자들은 어디로 밀려났을까.




⚠️스포 있습니다.




주인공 ‘가즈’는 한 가정의 아버지다. 67세에 우에노 공원 노숙자가 되었다.


가즈는 후쿠시마현 소도시에서 평범하게 태어나 결혼을 했고, 딸과 아들을 낳았고, 가정을 위해 도쿄로 떨어져 나와 일용직 노동자로 일했다. 남들처럼 잘살아보려고 몸을 내던져 열심히 일했지만 삶은 늘 그에게 빡빡했다.


이야기의 시점은 현재와 과거와 미래를 자유롭게 오간다. 2012년의 우에노 공원이 묘사되다가, 젊었던 날의 주인공 삶이 펼쳐지다가, 갑자기 2006년이 그려진다.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대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탓이다. 시점의 전환에 별다른 표지가 없어서 별생각 없이 글자를 따라가다 보면 ‘그랬구나, 이랬구나, 아, 주인공은 결국 노숙자로 남겨졌구나’ 하고 독서 끝.


그렇게 읽었는데, 이상했다.


처음 읽을 땐 깨닫지 못했다. 소설의 첫 부분과 마지막 부분이 같은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 장면이 주인공의 자살을 암시하는 대목이라는 사실도.


가즈가 생을 마감하는 장면이 작품 속에서 네다섯 번 되풀이된다는 사실도, 같은 노숙자의 묘사(이를테면 오른발엔 가죽 신발을 신고 왼발엔 운동화를 신은 늙은 여자)가 표현만 조금씩 바꾸어 여러 번 묘사된다는 사실도, 이 책을 세 번 읽고 나서야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왜 진작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나는 노숙자가 주인공인 소설을 읽을 때조차 노숙자를 ‘한낱 배경’으로 얼렁뚱땅 삼키려 했던 건가.


2006년, 가즈는 우에노역 승강장에 몸을 던졌다.

그러나 되풀이된다. 가즈도, 공원도, 노숙자들도.


작품 곳곳에서 공원을 거니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대화가 생생하게 그려지지만 가즈라는 존재를 생각하면 지나가는 사람들의 대화를 꿀꺽 삼키기가 힘들다. 주인공 가즈는 늘 그들의 대화 뒤편 어딘가에 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없는 존재로. 그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소외되어 있다.



​하지만 어느덧 이 공원에 돌아와 있었다. 어디에도 가 닿지 못하고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무수한 의문들이 서로 부딪히는 나 자신을 그대로 남긴 채 생의 바깥에서, 존재할 가능성을 잃은 자로서, 그래도 끊임없이 생각하고 끊임없이 느끼면서.


《도쿄 우에노 스테이션》 p.115



소외된 자들을 위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느끼겠다는 작가의 다짐처럼 읽히기도 했던 대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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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의 이웃 - 허지웅 산문집
허지웅 지음 / 김영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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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작에 사놓았는데, 몸보다도 마음이 굼뜬 나는 겨우겨우 이 책을 꺼내 들었다.


‘최소한의 이웃’이 무슨 뜻일까. 책장에 꽂아둔 책 제목에 눈이 갈 때마다 생각했다. 친한 사람의 숫자나 범위를 말하는 건가 했는데, 다 읽고 보니 이런 뜻인 듯하다.


이 땅 위 오천만 국민이 손에 손잡고 대통합을 이루어 하하 호호 살아갈 수는 없을지언정, 서로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켜주기 위한 최소한의 마음은 열어두고 살아야 하지 않겠나. 적어도 남을 비참하게 만들지는 말아야 하지 않겠나. 선물을 주고받으며 살갑게 지낼 필요까지도 없고, 그저 서로가 서로에게 최소한의 이웃만 되어준다면.


읽은 사람은 알겠지만 이 책의 각 글에는 ‘제목’이 안 붙어있다. 여섯 챕터로 구분은 되어있는데, 각 챕터에 실린 글에는 제목이 없다.

저자의 이전 책들에는 글마다 제목이 붙어있어 ‘자, 이제부턴 이런 이야기를 할 겁니다’ 하고 이정표 역할을 해주었는데. 읽다 보니 저자가 진행하는 라디오 오프닝에 쓰인 내용도 섞여 있는 것 같은데, 그래서 제목이 없는 건가 싶기도 하고.


진짜 이유는 알 길이 없지만 그냥 ‘꼭지마다 제목을 달지 않은 게 이 책의 의도이겠거니’ 하며 읽었다. 같은 사건도 저마다의 입장에 따라 달리 보일 수 있는데 글이라고 다르지 않겠지. 같은 글도 사람에 따라 달리 느낄 수 있고, 같은 사람이라도 읽을 때마다 다를 수 있다. 이런 생각이 제목을 뭘로 다느니 하는 고민에 손톱만큼이라도 영향을 미쳤으리라 멋대로 추측하면서. 제목이라는 울타리가 사라지니 처음부터 글의 방향을 단정 짓는 일 없이, 저자가 풀어놓는 이야기를 마음 가는 대로 자유롭게 읽을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우연히 마주친 먼 이웃과 잠시 커피 한잔하듯, 그렇게 오늘 새벽 앉은 자리에서 책을 다 읽었다.


‘와, 이 구절은 기억해두고 싶다.’ 읽으면서 표시해둔 구절을 모아놓고 보니 하나같이 실수와, 실수를 딛고 일어서는 마음과, 그 마음에 대한 응원 들이었다. 요즘 나에게 필요한 말은 이런 것들이었구나.

누군가의 응원이 이렇게 와닿는 건, 응원을 보내오는 사람에게서 그만큼 넉넉한 따스함과 깊이감을 느꼈기 때문. 정답보다는 오답에서 더 나은 방향을 찾고, 조용하지만 강인한 평정 안에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것.


그리고 부끄럽지만, 나 살기 바쁘다는 이유로 ‘아이고 그거참 안됐네’ 하고 흘려보냈던 아픈 일들을 다시금 꺼내주어 고맙다.


우리는 모두 잘못을 저지릅니다. 나라는 사람의 본질은 내가 저지른 잘못으로 정해지지 않습니다. 그것을 수습할 방법을 결정하는 순간에 정해집니다. 


《최소한의 이웃》 p.55


지금 여러분이 맞닥뜨린 크고 심란한 문제도 사실 본질을 따지고 보면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닐지 모릅니다. 여러분이 소음 앞에 무너지지 않기를. 휘둘리거나 잡아먹히지 말기를. 조용하고 강인한 평정 안에서 무엇보다 자유로운 사람이기를 바랍니다.


《최소한의 이웃》 p.237


사유가 더해지지 않은 극복의 경험은 그저 고생일 뿐입니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괜한 고생이겠지요. 끊임없이 생각하고 고민하며 경험을 재료로 나만의 답을 찾는 것. 그리고 그 답을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고 겸허한 마음으로 나의 쓸모를 찾는 것. 중요한 건 경험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이후의 태도에 달려있다. 그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최소한의 이웃》 p.264


확실한 건 현실에서 우리의 노력이 대부분 보답받지 못한다는 사실일 겁니다. 나의 쓸모를 제대로 알아주는 조직은 드뭅니다. 헌신에 고마워하는 파트너도 희귀합니다. 쓸모를 알아주는 조직에 몸담고 있다면, 헌신에 감사하는 파트너와 함께라면 고마워해야 합니다. 분노하지 말고, 실망하지 말고, 때를 기다리며 버팁시다. 여태 운이 없었다면 그 운이 언젠가 나의 쓸모를 알아보고 고마워할 줄 아는 만남으로 돌아오리라. 제가 함께 응원하겠습니다.


《최소한의 이웃》 p.232




큰 힘이 되는 응원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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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의 집 청소
김완 지음 / 김영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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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합니다.

읽는 동안 목숨을 끊은 이들의 후일담을, 나를 바라보는 수단으로 삼고 말았습니다.

나의 삶에 안도하는 나를 보았습니다.


날 때부터 남들보다 생을 빨리 마감하고 싶다고 원했을 리 없는데, 어떤 사정에서건 등 떠밀리듯 그런 상황으로 내몰렸을 이들.

마음만큼은 진작에 이 세상을 등졌겠으나, 마지막의 마지막에 그런 마음마저 몸을 완전히 떠난 뒤 오래도록 한 곳에 남겨졌던 육신.

저자의 직업은 (주로) 그런 육신이 얼마간 방치되었던 곳을 흔적도 찾아볼 수 없게 말끔히 청소하는 특수청소부다.


그러고 보면 사람이 숨을 거둔 뒤 죽은 이의 유품을 정리하거나 죽은 자리를 정리하는 일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내가 어떻게 죽고 어떤 식으로 정리될지, 나의 죽음 이후 누군가가 짊어져야 할 수고로움에 대헤 생각해 본 적은 더더욱 없다.

여껏 살면서 죽음의 처리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니, 나는 죽음에 얼마나 무지하단 말인가.


흔쾌히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생생해서 읽는 내내 죽음이 바로 곁에 어른거리는 듯했다.

어떻게 살고 싶은지 생각하려면 어떻게 죽고 싶은지 먼저 생각해 보라는 말.

삶과 죽음은 종이 한 장 차이이고, 우리는 모두 죽음을 향해 살고 있다는 말도 다시금 곱씹어 본다.


십 분이 넘도록 아무런 기척이 없자, 약간 걱정스러워서 슬그머니 그 방 앞에 가보았습니다. 당신의 동생은 방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서서 문 쪽으로 등을 보인 채 양손으로 입을 막고 거칠게 어깨를 들먹이고 있었습니다. 저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그토록 오랫동안 서서 우는 남자의 뒷모습을 여태껏 본 적이 없었습니다.

저는 당신의 동생을 그대로 내버려 둔 채 잠자코 걸음을 뒤로 물려야 했지요. 그러고서, 문을 열어놓고 사용했다가는 이웃에게 곧잘 항의를 받을 만큼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전기 분무기의 스위치를 켜야 했습니다. 왜냐면 저는 당신의 동생처럼 아무 소리를 내지 않고 울지는 못하니까요.

(중략)

그들은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아직 당신이 살아 있을 때, 병에 걸려 고통 받으면서도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만은 절대 잊지 않았던 사람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남긴 모든 것은 결국 사라지고 지워질 테지만, 당신이 남긴 사랑의 유산만은 누구도 독점하지 못하고, 또 다른 당신에게, 또 다른 당신의 당신에게 끝없이 전해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당신을 사랑합니다. 부디 이 사실 하나만은 당신에게 전달되길 바라며, 모자라고 부끄러운 글월을 부칩니다. 


《죽은 자의 집 청소》 p.126


그곳이 어디든, 우리가 누구든, 그저 자주 만나면 좋겠다. 만나서 난치병 앓는 외로운 시절을 함께 견뎌내면 좋겠다. 햇빛이 닿으면 쌓인 눈이 녹아내리듯 서로 손이 닿으면 외로움은 반드시 사라진다고 믿고 싶다. 그 만남의 자리는 눈부시도록 환하고 따뜻해서 그 어떤 귀신도, 흉가도 더 이상 발을 들이지 못하리라. 


《죽은 자의 집 청소》 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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