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추억의 힘 - 탁현민 산문집 2013~2023
탁현민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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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5

북극을 가리키는 나침은 무엇이 두려운지 항상 여윈 바늘 끝을 떨고 있습니다. 여윈 바늘 끝이 떨고 있는 한 우리는 그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 바늘 끝이 전율을 멈추고 어느 한쪽에 고정될 때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 합니다. 이미 나침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영복, 〈지남철〉


책 맨 앞의 발췌 글을 보고 얼마간 멍했다.


나침반의 바늘이 떨리는 걸 거추장스럽게만 여겼지, 나침반의 생리를 생각해 본 적이 있었나. 나침반은 북쪽을 향해 끝없이 바늘을 움직인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인생은 돌아보고, 되묻고, 나은 길을 찾으려 하고, 들뜬 마음으로 향한 저쪽에서 이내 한풀 꺾인 마음을 안고 되돌아오는 일의 연속이다. 우리는 언제나 무언가를 찾아 바늘 끝을 떠는 나침반과 같다. 어떤 이유에서건 더는 바늘이 떨리지 않게 되면, 그것은 삶이라 부를 수 없다.

적잖은 위로가 되었다. 끊임없이 나아가며 돌아보고 흔들리는 삶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고, 삶이라는 건 원래 그런 거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이런 생각을 하고 나서야 든 생각. 작가가 자신만의 이야기의 운을 떼기도 전에 내보인 글이 이것이라면, 이 글은 작가에게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띄는 것이란 말인가.


책을 읽어나갈수록 신영복 선생이 저자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신영복이라는 사람이 쓴 책을 학창 시절 처음 접한 이야기, 그를 처음 마주한 날의 이야기, 인생이 롤러코스터를 탈 때마다 신영복 선생이 저자에게 들려주었던 이야기, 작별 인사까지. 신영복 선생의 글을 괜히 책 맨 앞에 실은 것이 아니구나, 싶었다.


살면서 한두 번쯤은 이름을 들어본 사람들과 얽힌 에피소드가 이 책에는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인맥, 이라고 해야 하나. ‘인맥’이라는 단어에서 나는 때때로 ‘애써 이어 붙여 만들었다’는 인위적인 냄새를 맡곤 하는데, 저자가 펼쳐놓는 사람 이야기에서는 딱히 그런 냄새가 없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고 사람이 있구나, 싶달까.


이 책은 총 세 부분으로 나뉜다.

〈1부 사소한 추억의 힘〉에는 저자의 전작 《미스터 프레지던트》에서 볼 수 없었던 저자의 사적 이야기가 담겨 있다.

〈2부 흔들리며 흔들거리며〉에는 2012년 대선 이후 파리 생활의 에피소드가 담겨 있다. 분위기는 분명 쓸쓸한데, 1인 원맨쇼를 보는 듯 ‘풉풉’ 하고 터진다.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 하지 않던가.

〈3부 당신의 서쪽에서〉에는 2016년 제주 생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고기는 잡아먹고 살겠다’는 신념을 장착한 채 제주에 발 디딘 저자의 처절한(?) 제주 생존기다.


연출가 탁현민의 공무 수행 이야기를 읽고 난 뒤로 작가 탁현민의 사적인 이야기를 조금 더 듣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에세이집이 나와주니 사는 맛이 조금은 더 풍요로워진 것 같다. 신영복 선생의 책도 장바구니에 담아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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