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우에노 스테이션
유미리 지음, 강방화 옮김 / ㈜소미미디어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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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도쿄에서 지내면서 기억에 깊이 남은 장면은 여럿 있는데, 그중에는 노숙자와 얽힌 장면도 있다. 밤 9시가 넘은 시각, 신주쿠역. 환승하기 위해 역 건물을 가로지르다시피 해서 걸었다. 역 건물 넓은 공간에 노숙자들이 잠을 자기 위해 저마다 무언가를 깔고 자리를 잡고 있었다. 꽤 많았다. 함께 걷던 지인은 ‘어떤 화를 당하게 될지 모르니, 절대로 저들을 쳐다보거나 손가락질하지 않게 조심하라’라고 일러주었다. 곳곳에 경찰이 서있었는데, 노숙자를 쫓아내는 것 같진 않았고 질서 유지 정도의 역할을 하는 듯 보였다.


다른 어느 날. 햇볕이 전차 안을 나른하게 데워주던 한적한 평일 낮. 생전 처음 맡아보는 강렬한 냄새에 주위를 둘러보니 기다란 한쪽 좌석 칸 전체를 노숙자가 차지하고서 누워 있었다. 양손을 배 위에 가지런히 모으고서 곤히 잠을 자고 있었다. ‘본인에게서 이런 냄새가 난다는 걸 인지하고 있을까?’ 그런 그의 근처로 다가가지는 않으면서도 마치 없는 존재인 듯 행동하는 같은 칸의 사람들도 의아했다.


외국 땅을 밟고 돌아다닐 땐 좋고 아름다운 풍경만 눈에 들어왔으면 하고 내심 바라는 것 같다. 이런 마음 때문일까, 해외에서 노숙자를 맞닥뜨렸을 때의 충격이 유독 강렬한 건.


이 책은 도쿄의 우에노역에서 노숙자로 지내는 남성 ‘가즈’의 이야기다. 원제목은 ‘JR 우에노역 공원 출구(JR上野駅公園口)’.

우에노역에 가본 적 있다면 원제목이 더 와 닿을지도 모르겠다. 우에노역 ‘공원 출구’에는 양극이 공존한다. 벚꽃을 보러, 판다를 보러 들뜬 마음을 안고서 공원 출구로 나오면 상반된 풍경이 펼쳐진다. 화려한 벚꽃 잎, 담소를 나누며 들뜬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들, 분명히 노출되어 있지만 옅은 존재감으로 제자리에서 숨죽이고 있는 노숙자들. 도쿄 명소라는 화려한 수식어가 붙지만, 그런 수식어에 어울리지 않는 그늘이 있는 곳.


이런 느낌을 지우기 위해서인지 우에노역과 우에노 공원 일대는 리뉴얼을 거듭하고 있다. 2008년, 2010년, 2014년의 풍경이 사뭇 달랐고, 2020년은 또 다르다. 누추한 자리는 따스한 조명이 불 밝히는 말끔한 건물로 채워졌다. 옅은 존재감으로 그곳에 있던 노숙자들은 어디로 밀려났을까.




⚠️스포 있습니다.




주인공 ‘가즈’는 한 가정의 아버지다. 67세에 우에노 공원 노숙자가 되었다.


가즈는 후쿠시마현 소도시에서 평범하게 태어나 결혼을 했고, 딸과 아들을 낳았고, 가정을 위해 도쿄로 떨어져 나와 일용직 노동자로 일했다. 남들처럼 잘살아보려고 몸을 내던져 열심히 일했지만 삶은 늘 그에게 빡빡했다.


이야기의 시점은 현재와 과거와 미래를 자유롭게 오간다. 2012년의 우에노 공원이 묘사되다가, 젊었던 날의 주인공 삶이 펼쳐지다가, 갑자기 2006년이 그려진다.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대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탓이다. 시점의 전환에 별다른 표지가 없어서 별생각 없이 글자를 따라가다 보면 ‘그랬구나, 이랬구나, 아, 주인공은 결국 노숙자로 남겨졌구나’ 하고 독서 끝.


그렇게 읽었는데, 이상했다.


처음 읽을 땐 깨닫지 못했다. 소설의 첫 부분과 마지막 부분이 같은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 장면이 주인공의 자살을 암시하는 대목이라는 사실도.


가즈가 생을 마감하는 장면이 작품 속에서 네다섯 번 되풀이된다는 사실도, 같은 노숙자의 묘사(이를테면 오른발엔 가죽 신발을 신고 왼발엔 운동화를 신은 늙은 여자)가 표현만 조금씩 바꾸어 여러 번 묘사된다는 사실도, 이 책을 세 번 읽고 나서야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왜 진작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나는 노숙자가 주인공인 소설을 읽을 때조차 노숙자를 ‘한낱 배경’으로 얼렁뚱땅 삼키려 했던 건가.


2006년, 가즈는 우에노역 승강장에 몸을 던졌다.

그러나 되풀이된다. 가즈도, 공원도, 노숙자들도.


작품 곳곳에서 공원을 거니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대화가 생생하게 그려지지만 가즈라는 존재를 생각하면 지나가는 사람들의 대화를 꿀꺽 삼키기가 힘들다. 주인공 가즈는 늘 그들의 대화 뒤편 어딘가에 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없는 존재로. 그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소외되어 있다.



​하지만 어느덧 이 공원에 돌아와 있었다. 어디에도 가 닿지 못하고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무수한 의문들이 서로 부딪히는 나 자신을 그대로 남긴 채 생의 바깥에서, 존재할 가능성을 잃은 자로서, 그래도 끊임없이 생각하고 끊임없이 느끼면서.


《도쿄 우에노 스테이션》 p.115



소외된 자들을 위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느끼겠다는 작가의 다짐처럼 읽히기도 했던 대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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