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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아이를 둔 주부로서 하루하루 빠듯하게 살아가는 나는, 마음의 빗장이 헐거워지면 생각나는 스승님이 있다.
  성탄이나 세일 무렵 백화점의 갖가지 물건들 앞에서, 누나 옷을 물려 입은 동생을 업고 빛고운 아동복 매장을 지나가다가, 명절이나 부모님 생신 때 만 원짜리 돈 몇 장으로 고마움을 때우려 할 때 그렇다.
  유치원에서 딸아이가 친구에게 얻어맞고 얼굴에 난 상처를 볼 때, 아파트 단지를 도는 음악학원, 컴퓨터 학원, 영어학원의 노란 봉고차들을 볼 때, 복권이나 경품 따위를 은근히 바라고 있는 나 자신을 느끼게 될 때, 얼굴 거죽에 두터운 이기심과 경솔함, 생각의 천박함을 꾸짖는 선생님의 희끗희끗한 눈썹이 떠오른다.

  그 분은 고려대학교 영문학과 김우창 선생님이시다. 허영에 찬 마음으로 신청한 '20세기 영시(英詩)' 수업. 미팅에서 남학생들에게 잘난 체라도 해볼까, 영어로 낭만과 문학을 향유해볼까 하는 경박한 마음 때문이었을까. 형편없는 학점을 받고 말았다. 정신을 차리고 책을 펴고 강의에 몰두하니, 그 말씀은 매 시간마다 우매한 대학생을 깨우치는 깨달음이었다.


  문학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문학으로 세상이 바뀌나 하는 의혹이 들 무렵이었다. 어느 날 선생님은 'Passion'에 대해 말씀하셨다. 우리말로 '열정'이라 번역되는 'Passion'은 실은 고통이라는 뜻이 있다고 하셨다. 그래서 바흐의 '마태수난곡'도 영어로는 'Passion of St. Mathew'라고 하시며, 무엇에 대한 열정은 그것에 대한 고통까지 기꺼이 취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셨다.

  그리고 남자친구를 만나 사랑하고, 꿈을 가지고 직업을 갖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부모가 되고 하면서 그 말씀이 맞는구나 하는 때가 많았다. 사람을 사랑하는 일,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해내는 일은 열정이 없이는 껍데기나 다름없고, 또 몸과 마음이 아픈 고통이 없이는 살아내기 어려운 것 같다. 또 두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고통이 삶을 얼마나 아름답게 하는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느끼게 된다.     

  열정과 고민이 넘쳐 이리저리 방황하던 대학 시절, 김우창 선생님은 늘 한결같은 모습이셨다. 회색 양복바지에 흰 와이셔츠. 회색 바지는 오래 입으셔서 무릎과 엉덩이 부분이 반짝반짝 윤이 났다. 백발이 성성한 머리와 눈썹. 마르고 키가 작으신 체구. 안경을 끼고 책을 보고 강독하시다가, 안경을 벗으시면서 이야기를 풀어놓으시곤 했다. 그러면 형형한 문사(文士)의 눈빛을 볼 수 있었다.

  어느 날 선생님이 몹시 화를 내신 적이 있다. 당시 육순이 넘으신 할아버지였는데, 선생님은 언성도 눈빛도 무시무시하게 화를 내셨다. 그 날은 '20세기 영시' 기말고사를 보던 날이었다. 선생님이 들어오셔서 시험지를 나눠주셨다. 빨리 시험을 보고 긴 방학을 즐기려는 마음이 급했다. 그런데 맨 뒤에서 남학생이 말했다. "시험지가 모자라는데요?" 그러자, 뒤에 앉은 학생들이 모두 시험지를 못 받았다고 더 달라고 말했다. 그러자 선생님이 크게 노하셨다.
 

 "모두 한 장씩 갖고 돌리면 딱 맞는 것인데, 왜 모자랍니까?"

  강의실 안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하다가 다시 술렁거렸다. 그까짓 시험지 한 장 더 가진 게 뭐가 그리 큰 잘못이냐는 것이었다. 당시 학생들은 시험을 보면서 문제와 답을 다른 종이에 써놓고 답을 맞춰보거나, 복사해서 후배들에게 나눠주는 사람이 많았다. 또 바로 답안을 쓰는 것이 아니라, 개요를 잡고 문장을 가다듬고 할 연습지로 쓰는 사람도 많았다. 시험지를 채울 시간은 점점 가고 있었고, 뭐 그런 것 갖고 난리냐 투덜대는 이가 많았다.     "자신만 두 장을 갖겠다는 생각입니까? 다같이 나눠 가지면 모자라지 않는데, 왜 나만 더 가져야 합니까?"

  선생님은 스무 살 남짓한 젊은이들에게 호되게 야단을 치셨다. 나 역시 시험지를 세 장 가지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선생님은 그 날 마지막으로 '배운 놈들아, 이기적으로 살지 말아라.' 호통을 치셨던 것 같다.
  학점은 나빴지만, 나는 그 후 선생님의 책을 찾아 읽었다. 선생님은 문학과 세상, 시와 정치를 한 종이에 놓고 살피고 계셨다. 선생님은 시인은 심미적 이성으로 세상을 바꿔나갈 수 있으며, 사람들은 의사소통의 합리성으로 대화할 수 있다고 보셨다. 그것은 문학을 전공한 나에게 희망 같이 느껴졌다.

  나는 선생님의 책을 읽고 감동했지만, 선생님의 책보다 감동적이었던 것은 선생님 자신이었다. 육순의 연세에 신입생들에게 교양영어부터 가르치시던 선생님. 문학과 역사를 재미있는 이야기 속에 녹여내어 깨달음을 주시던 선생님은 새 것이 판치는 세상에서 헤진 바지를 입고 계셨다. 저만 더 잘하고, 저만 더 가지려는 이기적인 학생들을 꾸짖으셨다.
  선생님은 두 아이의 엄마가 된 '나'라는 사람이 선생님의 강의를 듣고, 시험지를 세 장 챙겨서 혼난 적이 있는지는 전혀 기억하지 못하실 것이다. 나를 전혀 몰라 주셔도, 선생님이 바른 모습으로 존재하시는 것, 그래서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어 주시는 것이 나는 고맙다.

  우리 사회에 모범이 없다. 신문을 펼치면 윗분들의 부정과 비리가 허다하다. 그런데도 누구나 자신의 말이 옳다고 주장한다. 좋은 말을 남기기야 그리 어렵지 않겠지만, 말과 행동이 일치하기는 얼마나 어려운가. 나이 먹어서도 이기적이지 말아야지, 말과 행동이 일치해야지, 생각 없는 부모로 살지 말아야지, 다잡게 하시는 선생님은 고마우신 스승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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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각자의 각자인 것

 

  말썽꾸러기 어린이가 있다. 어른인 작가는 그 아이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어른이 보기에 이 아이는 6학년도 되었으니, 이제는 말썽 부리지 말고, 철 좀 들었으면 좋겠다. 성질이 급한 엄마는 이 아이의 말썽을 마주칠 때마다 매번 잔소리를 할 것이다. 혼을 내보고 때려도 보다가 스스로 지칠지 모른다. 사려 깊은 할아버지는 이 아이를 관찰할 것이다. 그리고 아이의 생각을 헤아려 때때로 던지는 한마디 말로 아이와 공감을 나눌 수 있다. 과묵한 아버지는 아이가 스스로 철이 들 때까지 침묵으로 기다릴지도 모른다. 아이보다 조금 크다고 느끼는 누나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아이와 대화를 나눌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으며 줄곧 살핀 것은, 저자 야마나카 히사시는 <내가 나인 것>이라는 멋들어진 제목의 이야기를 통해, '어린이 독자와 어떤 대화를 나누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어른들이 쓴 이야기인 동화는 아이들과 어떤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어린이를 위한 문학 작품에서 때때로 재미와 감동 속에 어쩌면 어른의 잔소리를 담는 것을 아닐까? 그것이 부모됨의 발로이거나 교육적 의도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작가가 어린이인 독자를 어른과 마찬가지로 독립된 주체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말하고자 하는 내용과 그 태도 면에서 어린이의 주체적인 자아를 존중하고, 마주보며 이야기를 건네는 듯했다. '내가 나인 것'이란 자기 고유의 독립된 정체성을 말하며, 우리 각자는 각자의 정체성을 지닌다. 개인의 그것이 묵살될 때 고민과 갈등이 생기며, 그것이 사회와 세계 속에서 억압당할 때 비리와 불의가 생긴다. 이 작품의 주인공 히데카즈는 이야기 속에서 가출과 모험과 갈등 속에서 스스로 그것을 찾아나간다.  

 

1. 말썽꾸러기 주인공 히데카즈

 

  '가장 뛰어난 아이'라는 이름의 히라타 히데카즈는 늘 엄마한테 혼나는 아이다. 일일이 잔소리를 해 대는 엄마 앞에서 히데카즈는 언제나 작은따옴표 안에 딴 생각을 하고 있다. 늘 집에 들어가기 싫고, 없어져 버리고 싶고, 집은 폭삭 내려앉았으면 좋겠다. 고자질쟁이 동생 때문에 학교에서 있었던 일까지도 잔소리 세례를 받아야 한다. 그래서 히데카즈는 생각한다. '나는 야단맞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닐까?' 워낙 입이 싸고 진지함이 없어서 가출을 하겠다고 해도 놀라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정도다.
  얼마나 생생한 말썽꾸러기 캐릭터인지... 이런 아이를 감당하는 부모님과 선생님의 고충에 고개가 끄덕여질 만큼, 주의 산만하고 성적 나쁘고 자신에 대한 진지한 생각이 없이 몸만 커다란 아가다. 이 아이에 대해 처음 알게 되면서 의문이 생겼다. 작가는 이 대책없는 말썽쟁이에게 어떻게 충고를 할 것인가. 뭐라 말할 것인가. 
  그런데 읽다 보니 히데카즈는 어른의 눈을 가리고 앙큼을 떠는 여동생 미도리에 비해, 솔직하고 어수룩한 녀석이다. 그래서 히데카즈는 가출을 하겠다는 생각도 참지 못하고 동생에게 말해 버리고, 수다쟁이 동생을 통해 히데카즈의 가출은 사람들 사이에 '양치기 소년 이야기'같은 농담이 되어 버린다. 결국 히데카즈는 체면 때문에 실제로 가출을 하게 된다.

 

2. 자아를 찾는 모험 - 가출

 

  히데카즈는 가출을 통해 잔소리를 들어야 뭘 하는 집과 학교를 벗어나, 날것 그대로의 세계를 만난다. 이 모험에서 히데카즈는 두 가지의 외부 세계를 경험한다. 가출 소년에게 호의적인 세계와 비리와 악으로 가득 찬 세계이다. 호의적인 쪽에서 히데카즈는 엄마 없는 가정에서 사는 성숙한 여자아이 나츠요를 만나고, 다케다 신겐의 보물에 대해 알고 있는 무뚝뚝한 할아버지를 만난다. 그곳에서 히데카즈는 스스로 일하고, 밥하고, 공부하는 나츠요와 비교하여 의존적인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악의적인 쪽에서 히데카즈는 사람을 차로 치고 도망치는 마루진의 마사나오를 목격한다. 그는 엄마를 만나고 싶어하는 나츠요에게 거짓 엄마를 데려다 주고, 할아버지를 죽게 한 뒤 할아버지의 재산을 가로채려 한다. 그것은 명백한 악이다. 히데카즈는 이 악에 맞서서 선한 나츠요를 돕고 악을 물리쳐야 함을 배우게 된다. 
  히데카즈의 가출은 그리하여 이야기로서는 흥미진진한 모험이며, 주제 면에서는 자아를 찾는 통과의례가 된다. 그런데 작가는 여기에서 '말썽꾸러기 아이'로 시작된 이야기의 실체를 한층 더 깊이 파고든다.

 

3. 갈등하는 가족과 불의에 찬 사회

 

  히데카즈가 집으로 돌아오자, 의존적이었던 자신이 미처 보지 못했던 '관계의 형태'를 보게 된다. 엄마는 히데카즈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엄마 자신의 의지대로 아이를 움직이려 한다. 그것은 남편에게도, 다른 형제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엄마는 자신의 얼굴에 먹칠을 한 돌아온 탕아, 히데카즈를 데리고 동네 사람들에게 인사를 시킨다. 그리고 팥빙수를 사주며 가출했던 동안 무엇을 했는지 말하라고 한다. 여동생 마유미를 시켜서 히데카즈를 관찰하게 하고, 결정적으로 나츠요에게 보내는 편지를 빼돌리고, 히데카즈가 하려는 일을 몰래 막아버린다. 
  가출을 통해 성숙한 자아 히데카즈는 엄마의 억압에 저항한다. 그 과정에서 형 마사카즈 역시 엄마에게 말하지 않은 비밀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나츠요가 편지로 부탁한 엄마건에 대해 용감하게, 때로는 신문팔이소년으로 위장하는 기지를 발휘하여 '나카에 아야'와 마사나오의 속셈을 알아낸다.
  그런데 히데카즈의 엄마는 아들과 나츠요의 편지를 보고, 히데카즈가 나츠요의 일에 끼어든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막으려 한다. 엄마는 어린이인 히데카즈가 현실의 불의와 악에 맞서서 살아가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엄마는 어린이 히데카즈를 독립된 인격체로서가 아닌, 자신에게 속한 어린애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엄마의 이런 행동은 일면 타당성이 있다. 가출했다 돌아온 초등학교 6학년짜리 아이의 엄마라면, 아이가 가출했다 만난 친구와 비밀스런 편지를 주고받으며, 술집여자의 집을 기웃거리는 것을 좋게 보지 않을 것이다.
  작가는 이런 엄마의 태도가 가진 문제점을 아프게 꼬집는다. 평범하고 당연해 보이는 엄마의 행동은 사실은 위법이며, 인격체에 대한 무시이다. 불의의 현실에 맞서지 말고 상관하지 말라는 엄마의 태도는 사실 두려움 때문이며, 자기 가족만 물질적으로 잘살고자 하는 이기심 때문이라고 꼬집는다. 
  학생 운동하는 친구 때문에 덩달아 경찰서에 끌려갔다 온 큰형의 입을 통해 작가는 어머니의 이러한 태도를 정면으로 공격한다. 소시민적인 안락을 위해, 무조건적으로 공부와 출세를 강요하는 어머니의 태도가 부정과 비리로 썩은 사회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현실에 대한 무관심이며, 본질적으로 '나의 나인 것' 곧 자신에 대한 무관심에서 비롯된다.    
  아이를 독립된 인격체로 보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강요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작은형 마사카즈의 사건을 통해 학생의 자율을 인정하지 않는 교사와 마찬가지이며, 큰형 요시카즈를 통해 힘없는 자들을 짓밟는 권력과 마찬가지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4. 내가 나인 것

 

  가출 전 철부지였던 히데카즈는 지진이 나서 집이 폭삭 무너지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하곤 했다. 작가는 결국 갈등에 휩싸인 히데카즈의 집을 불태우고, 재만 남은 곳에서 다시 시작하게 한다. 그곳에서 어머니만의 집은 남편과 아이들이 자신의 자아를 찾고, 서로에게 자신을 이해시킬 수 있는 곳으로 다시 출발하게 된다.
  말썽꾸러기 히데카즈의 문제는 그 속을 깊이 들여다보니, 부모의 문제, 사회의 문제인 것이었다. 어린이를 부모에게 딸린 존재로 보아, '말썽꾸러기들아, 말썽 부리지 말자'로 머물지 않았다. 작품 속에서 어른들의 세계와 현실의 모순을 어린이에게 솔직히 드러내고, 문제를 깊이 통찰하는 작가의 목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
  선과 악이 공존하는 세계 속에서 불의의 현실을 타파해나가는 것은 히데카즈의 이야기에서처럼 자신의 모습을 직시하는 것에서 시작할 수 있다. 자신을 직시한다는 것은 히데카즈의 어머니와 같은 대다수의 반성할 줄 모르는 어른들에게는 어려운 일일 것이다. 책을 덮으면서, '내가 나인 것', '나의 나 됨됨이'에 대해 돌아보게 된다. 또한 '결국 말썽꾸러기 아이의 문제는 어른들이 말썽이라는 소리구나.' '가족과 사회와 아이를 불행에 빠뜨리는 엄마가 되어서는 안되겠구나.' 등등 굉장한 교훈을 주었다. 하지만 읽는 동안에는 그렇게 한 수 가르쳐줄 줄을 몰랐다. 생생하고 사랑스런 말썽꾸러기 캐릭터, 흥미진진한 모험, 팽팽한 갈등과 현실 인식 등 노련하게 짜여진 재미난 작품이다.
  말썽꾸러기에게 무슨 말을 할까?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본다. 이 작품에서 히데카즈라는 인물에 대해 작가가 깊이 - 히데카즈라는 아이는 물론 그 아이를 둘러싼 관계와 사회까지 이해하고 있음을 느꼈다. 아이들에 대한 진실한 이해로 아이들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것은 얼마나 멋진 대화인가?   

 

- <내가 나인 것> (야마나카 히사시, 사계절, 2003) 독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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