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그라운드 언더그라운드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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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가 도쿄 지하철 사린가스 테러사건의 피해자들 인터뷰한 이 책 속 인터뷰 말미에는 항상 옴진리교에 대한 피해자들의 생각들이 나온다. 그들이 보여주는 태도는 대개 다음 중 세가지이다. 1.더 이상 관심없다 2. 보고싶지 않다. 3.상응하는 처벌을 해야 한다 (그리고 그건 대부분 사형을 의미한다) 1,2도 적지 않았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이들은 마땅히 '사형당해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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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밝히자면 나는 사형제도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인터뷰들을 읽다 보면내가 이들의 입장이어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하루키의 표현을 따르자면 '아무것도 다르지 않은 평범한 날'에 지하철을 탔다가 식물인간이 되거나, 죽거나, 몸이 허약해지거나,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이들이 세상에 존재한다. 그리고 그들 중 다수가 자신을 그렇게 만든 이들에 대해서 '사형 시켜야 한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이 정의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피해자 중에는 심각한 피해를 입고서도 가해자의 처벌보다는 피해자들의 치료가 우선이다.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러한 마음이 평범한 것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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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편적인 원칙을 이야기할때 그것에 힘을 실어주는 것도 구체적 인간들일 것이고, 그것에 가장 대적하는 것 또한 구체적 인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성혐오 내지는 외국인 노동자 혐오와 같은 경우가 드는 구체적 사례란 대부분이 협소하거나 루머에 가까운 경우가 많아 이성적으로 논박이 가능하지만. 처벌이나 타인의 고통에 관한 논쟁이라면 우리는 꿀먹은 벙어리가 되기 십상이다.

 다른 종류의 사례지만 나는 최근까지 사후에 화장을 해야한다는 입장이었고, 나와 내 가족 모두 그렇게 진행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어서 매장문화에 대해 심정적으로도 동의하지 않는 입장이었다. 그런 나에게 얼마전 외할아버지의 죽음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첫 경험이었고, 나는 그 계기로 매장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게 됐다. 장례식 마지막 날 할아버지의 관이 화장터에 들어가는 것을 보며 나는 왜 사람들이 매장을 그렇게 오랫동안 선호해왔는지, 심정적으로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 해도 화장을 해야 한다는 입장에는 변함이 없지만 매장과 화장에 대해서 적어도 쉽게 말할 수는 없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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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마 더 큰 원칙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형제도에 반대한다고 했을때. 그러한 인류애에 가장 거세게 반박하는 것은 사형제도의 통계적 유효성보다는 '피해자여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냐'라는 제3자의 반박, 혹은 실제 피해자의 구체적 발언일 것이다.구체성이나 경험이 주장을 가로막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보편적 주장을 하기 위해서 반드시 그 사건을 겪어야만 할까? 그건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 구체성에서 벗어난 어떤 냉정함,객관성이 있기에 더 나은 주장이나 발상이 가능할 것이다. 겪어본 사람만이 어떤 주장을 할 수 있다는 말은 우리에게 더 나은 사람이 되는 방법을 상상하는 걸 포기하라는 말과 다를 바 없다. 우리가 언제까지나 '겪어봤음에도 불구하고' 원수에 대한 사랑을 설파하는 보기드문 인간만을 칭송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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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가 하려는 주장들이 구체적인 목소리와 인간에 의해 의문의 여지 없이 반박당할때, 그때는 과연 어떤 태도를 가지고 설득을 할 것인가. 그리고 그러한 상황에 맞딱뜨렸을때도 그런 원칙을 고수하는 태도가 맹신인지, 아니면 합리적인 믿음인지는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이런 태도 자체가 이시하라 쇼코가 사린테러를 지시했을 때 자기 마음속의 인간적 양심. 혹은 구체성을 무시하고 테러를 감행한 그 사람들과는 어떻게 다를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언더그라운드>를 읽으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물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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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와는 별개로, 무라카미 하루키가 사건을 대하는 윤리적 태도와 분석,성실함은 그가 전하는 피해자들의 구체성만큼이나 중요하게 다가온다 그런 태도는 지금 내가 사는 세상의 문제에도 일정 부분 유효한 것이며 이 책이 전해주는 가치 중 가장 큰 것이다.


 인간의 고통은 사이비 사회학. 혹은 저널리스틱한 서술을 통해 뭉뚱그려진 보편적 해석이 아니라 대체될 수 없는 개개인의 특별한 고통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 우리가 강력범죄,대규모 테러 등이 일어났을 때 매스컴을 통해 무의식적/의식적으로 강요받는 선-악 순진무구-악랄의 구도를 벗어나 피와 살을 가진 구체성을 띈 개별 사례들을 총합해내고 양자가 거울관계임을 파악하는 것이 사건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라는 점. 그리고 어떤 그릇된 이야기에 사로잡힌 이들 (한국이라면 그것이 일베,여성혐오,외국인 노동자 혐오,국수주의 등이 있겠다)을 비웃기 전에 그릇된 이야기를 허무맹랑한 것으로 여기게 만들 수 있는 힘있는 이야기를 가지고 있냐는 물음까지.


 물론 그것을 단순히 이야기의 싸움만으로 볼 수 있느냐는 이론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격렬한 갈등의 국면에서 이야기꾼들의 역할이란 정말 엄청나게 큰 것일지도 모른다.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사회에서 작가의 역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하나의 답을 주는 책이기도 하다.


아래는 인용. 인용하고 싶은 부분이 정말 많았지만, 작가의 이 말이 가장 이 책의 의의를 잘 나타낸다 생각하여 이 부분만 옮겨본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옴진리교 지하철 테러사건)이 사건을 보도하는 매스컴의 기본 자세는 피해자=무구한 존재=정의라는 '이쪽'과 '가해자=더럽혀진 존재=악'이라는 '저쪽'을 대립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쪽의 포지션을 전제조건으로 고정시켜두고 그것을 이른바 지렛대의 받침점으로 삼아 저쪽의 행위와 논리의 왜곡을 철저하게 세분화하고 분석해가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호 유통성이 결여된 모멘트가 도달하는 곳은 항상 축소되고 패턴화된 논리이며, 혼탁함이 초래하는 무감각이다...'나나 당신도 조금만 사정이 달랐더라면 옴진리교에 들어가 지하철에 사린을 뿌렸을지도 모른다'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런 상황은 현실적으로(즉 확률적으로) 거의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애써 의식적으로 배제해야만 하는 것이 혹시 거기에 포함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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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된 장소에서 언더그라운드 2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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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더그라운드]에서 옴진리교 지하철 테러사건의 피해자를 인터뷰한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 다음 단계로 옴진리교 출신의 사람들을 인터뷰했다. 그렇게 나온 책이 바로 언더그라운드 2 - 약속된 장소에서 이다. 물론 인터뷰 대상이 된 신도들은 사린가스 사건의 직접적 가해자는 아니다. 이들은 예전에 옴진리교에 몸담았거나 지금도 믿음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다.


 인터뷰에 임하는 작가의 태도는 1편과 동일하다. 먼저 그 인물의 구체성을 최대한 끌어낸다. 그 다음에는 대상을 분석하고 제시하기보다는 들어주는 것에 집중한다. 단 옴진리교 소속의 사람들인 만큼 1편보다는 좀 더 적극적으로 작가가 개입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종교적 광신자가 아니라 착하지만 안쓰럽기도 하고, 그러나 부담스러운 인간들이다. 이들은 자신의 평화를 찾기 위해 안으로 안으로 파고 들어갔던 정서적으로 예민한 이들이며, 소위 주류사회에서 정서적 해법 내지는 행복이라고 하는 것들로는 만족할 수 없는 이들이다. 그들이 갈구하는 어떤 평온한 상태를 누가 제시해줄 수 있느냐에 따라 그들의 삶이 급격히 바뀌게 된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하루키는 여기에 대해 주류사회가 그런 공간을 제시해야 한다는 입장인 것 같지만, 이것은 개인적인 단위에서 좀 더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그저 그들만의 공간이 제시되면 끝인 것일까? 아무리 좋게 표현하더라도 그것은 일종의 격리상태이다. 물론 그 공간을 컬트종교가 주는 것 보다는 국가가 제시하는 게 낫다. 하지만 그 방법이 결코 윤리적 해법이라고 할 수는 없다. 나 자신도 종교적인 것에 깊게 빠져드는 시기가 있었고 초자연적인 사항들에 경도된 이들을 많이 보기도 했지만 사실 그런 '영적인 것'에 끌리는 사람들을 가까이 하고 소통하기는 부담스럽다. 시대를 막론하고 어느 시대에나 그런 인물들은 존재했으나 이제 그런 인물들을 의무적으로 대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은 더이상 환영받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다. 부담스러운 존재가 된 것이다. 대화니 소통이니 교류니 하는 작업들이 우리 모두를 균형잡힌 사람으로 만들어 줄 수 있다고 하지만, 그들의 소통은 주변사람들에게 일반인 이상의 큰 부담을 주기도 한다. 나 자신이 사는 것도 바쁘고 힘든데 언제 그런 것 까지 신경쓴단 말인가? 그럴때 우리가 부담스러운 상대를 대하는 윤리는 과연 어떤 것이 되어야 할까.


 이것은 비단 옴진리교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 종류의 사람은 지금 한국에도 너무 많다. 어느 하나에서 진리를 확신하고 그것 위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이들(하루키의 표현을 빌자면 '상자 하나의 분량밖에 세계를 바라보지 못하는 이들')은 어떤 상자냐의 차이가 있을 뿐 반드시 우리 주변에 한명씩은 있어왔다. 그리고 소위 '정상적'인 사람들은 더이상 그런 이들과 소통할 이유도,의무도 없다. 그 과정이 누적되면 과연 그들 안에는 무엇이 남게 되는가. 사실 우리에게는 부담스러운 타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 대한 명확한 윤리적 지침이 없다. 예전에는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확실히 지금은 그런 것은 생각조차 안하는 상태다. 물론 친구의 몇마디로 사람이 바뀌지는 않겠지만, 그러한 사소한 것들이 모여 사람의 삶은 장기간에 걸쳐 바뀌는 것을 믿는다면, 이 책에 수록된 옴진리교 신도들의 꿈에 '쩔은 듯한' 종교적 체험 이야기를 들으며 타인을 대하는 윤리를 좀 더 고민하게 될 수밖에 없다.


아래는 인용

"..그는 이상향에 몸을 던지고, 현세의 때에 물들지 않고 엄격한 수행을 계속하면서, 납득이 가는 의료를 철저하게 실천하여 한 사람이라도 많은 환자를 행복하게 만드는 꿈을 꿨을 것이다...그런 순진무구한 언설이 현실과 얼마나 심하게 괴리되어 있는지는 한발만 물러나서 생각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사실 우리가 하야시 의사(옴진리교 사린가스 테러 주모자 중 1인)에게 해줘야 할 말은 원래는 굉장히 간단할 것이다. 그것은 '현실이란 본래 혼란과 모순을 내포하고 성립되는 것이며, 혼란이나 모순을 배제해버리면 그것은 이미 현실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일견 정합적으로 들리는 말과 논리에 따라 교묘하게 현실의 일부를 배제했다고 믿어도, 그 배제된 현실은 반드시 어딘가에 잠복해있다가 당신에게 복수할 것이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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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콜드 블러드 트루먼 커포티 선집 4
트루먼 커포티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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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상의 모든 범죄에는 항상 사회적 맥락이 있고, 범죄의 발현에는 사회적 맥락과 개인적 운명이 함께 한다고 생각한다. 이 생각에 동감하고 아무리 잔인한 범죄일지라도 그 범죄를 잉태한 세상과 범죄를 같이 분석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라면 앞서 말한 요소들을 사람들에게 설득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 것이다. 물론 나는 성범죄자,살인자,강도,폭력범이 착하고 선량한 본질을 가졌다는 신학적인 이야기를 하자는 것은 아니다. 강력범죄들은 처벌의 대상이지만 그 죄가 분출되게 된 맥락을 우리가 살펴볼 수 있다면 우리는 인간을 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우리가 어떤 세상을 원해야 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란 이야기이다.


 

 하지만 범죄가 일어났을 때 우리가 보는 것은 공정한 처벌과 이해의 세상이기보다는 필요 이상의 분노로 가득찬 세상이다. 지면은 저널리스틱한 용어들로 도배되고 댓글란은 분노와 일차원적 감정들로 폭발한다. 약싹빠른 이들은 '범죄자에 대한 분노가 우리의 가장 자연스러운 감정'임을 설파하며 세상에 대한 말들은 감추고 범죄자에 대한 분노는 필요 이상으로 증폭시킨다. 범죄자를 사형시키는 것이 피해자를 보호하는 유일한 정의라고 믿는 세상에서 범죄의 맥락을 이해하자는 주장은 다음과 같은 무의미한 답변으로 일축된다. '가해자에게만 인권이 있고 피해자에겐 없냐' <인 콜드 블러드>를 읽으면 우리는 악에 대한 이해란 너무나 지난하고 길며, 천재와 함께 해야만 가능한 일이 아닌가 하는 회의를 가지게 된다. 또한 분노만이 가장 쉽고 빠르며 그다지 많은 지성이 필요하지 않은 일이라는 사실 또한 깨닫는다.


 대화의 90% 이상을 기억했다는 트루먼 카포티라는 천재에게도 일가족 4명을 단지 돈 몇푼과 성욕 때문에 죽인 2인조 무뢰배들이 화차에 올라타게 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6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 그에게도 그 잔인한 인간들이 괴물도,악마도 아닌 세상의 산물이라는 점을 설명하고 그들이 암흑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암흑이 돼버렸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500쪽이 넘는 지면이 필요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런 시도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세상만을 비난하는 것도 아니고, 범죄자의 악마성만을 파고드는 것도 아닌, 둘 사이의 복잡한 상호관계를 다뤄야만 사람들의 마음을 열고 이해를 넓힐 수 있다는 사실.


 그것이 이 책이 말해주는 가슴아픈 진실일 것이다. 천재조차 아닌 우리가 범죄 너머의 세상을 보고, 더 잔인한 본질을 보기 위해서는 도대체 어떤 노력들을 해나가야 하는가.


아래는 인용.


 "..듀이는 옆에 앉은 남자를 분노하며 쳐다볼 수는 없었다. 오히려 그는 일종의 동정을 느꼈다. 페리 스미스는 일생 동안 한 번도 온실에서 보호받으며 살지 못했으며, 불쌍하고, 추하고 외로운 과정을 겪어 하나의 망상에서 다른 망상으로 옮겨 다닌 것이다. 하지만 듀이는 용서나 자비를 줄 만큼 깊이 동정하지는 않았다. 그는 페리와 그의 동료가 교수형 당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둘이 등을 맞대고 매달리는 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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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각의 제국 - 맛칼럼니스트 황교익이 기록한 우리 시대 음식열전!
황교익 지음 / 따비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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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각의 제국>은 맛칼럼니스트 황교익이 우리에게 익숙한 80여가지의 음식에 대해 쓴 글이다. 글은 음식들의 배경과 역사. 맛에 관해 다루고 있다. 대중적이면서 음식에 대해서 깊게 논하고,우리가 처한 식문화에 대해 객관적인 글쓴이는 현재까지는 황교익 말고는 없다. 물론 우리는 황교익의 말이 어디까지가 진짜고 가짜인지 모른다. 이것은 우리가 처한 한계이다.그러나 적어도 황교익 때문에 우리가 음식에 대해 많은 것들을 착각하거나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는 좋은 기회다. 좋은 기회라면 살려야 하지 않겠는가.


 그의 글을 통해 얻는 미식에 대한 깨달음이란 먹는 사람의 계급적 상황을 떠나 '고품질의 맛'만이 진리이고 나머지는 하급이라고 말 하는 몰지각도 아니요. 맛도 훈련을 통해서 개발해낸 것만이 가치가 있다는 오도된 '미식'도 아니다. 그건 우리가 지불하는 비용과 우리가 처해있는 환경에 합당한 음식을 지금까지 제대로 먹은 적 없다는 의미에서의 '미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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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문에 황교익의 글은 미식가나 맛에 대한 안내서라기보다는 소비사회에서 어떤 상품이 정말 제대로 된 상품인지 알려주는 고발의 의미에 더 가깝다. 그러나 음식문화란 것이 일상적이고, 보수적인 만큼 그의 고발은 급진적이거나 잘난 척 하는 것 처럼 비춰지기 쉽다. 또한 그의 글을 무기삼아 시대와 계급을 무시한 채 맛의 계급을 세우려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이런 지식들이 우리에게 흔한 것이 아니기에 우리는 그의 비판글들을 보며 박노자의 책을 20대때 처음 읽었을 때를 떠올리게 된다. 이런 느낌들을 되새겨 보면, 이 정도의 소비지침 조차 없는 우리의 식문화라는 게 그간 얼마나 각박한 것이었는지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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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 - 다카키 마사오, 박정희에게 만주국이란 무엇이었는가
강상중.현무암 지음, 이목 옮김 / 책과함께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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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중•현무암 공저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는 일본제국이 만주사변을 통해 세운 인공국가 만주국의 탄생 과정과 운영 과정을 다룸와 동시에 만주국에 자신의 젊은 시기를 바친 기시 노부스케(일본 56,57대 총리)와 박정희가 해방 전후로 어떤 유착관계를 가지고 국가를 만들어 나갔는가를 다루는 책이다. '귀태'발언의 출처로도 유명한 책이기도 하다.

두 저자는 만주국이 세워지고 운영되는 과정에서 진행된 국가 경영술과 계획, 그리고 인맥이 어떻게 한 일 양국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웠지를 차근차근 설명해나간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사실은 현대 한,일의 근원이 만주국에서 행해진 국가 경영 시도들 및 인맥들에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당시 일본과 조선의 야심찬 젊은이들은 만주국에 자신의 꿈을 투영했다. 여기선 이러한 꿈과 꿈을 위한 시도들을 모두 통칭해서 '만주국 프로젝트'라고 하자. 만주국 프로젝트는 만주국이 내걸었던 슬로건 (오족협화 혹은 왕도낙토)과 같은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순수성이었을 수도 있고, 본토에서는 더이상 자신의 이상을 실현 불가능하다고 판단된 젊은 엘리트(기시 노부스케)의 이상을 실험하는 장이었기도 했다. 더불어 식민지인으로서 '제국인'이 되어 '칼을 차고 떵떵거리며' 살고 싶은 욕망을(박정희) 실현할 수 있는 최후의 방법이기도 했다.

어떤 욕망이건 만주국은 그러한 욕망을 빨아들이며 조선•일본 양국에서 '만주광(狂)'이라 불릴 정도의 붐을 형성했다. 실제로도 일본의 신진관료들은 만주국 고위관료로서 국가경영을 시도할 수 있었고, 박정희를 포함한 소수의 조선인들은 고급관료로 채용됐다. 이처럼 만주국은 젊은이들의 뒤틀린 이상을 어느 정도는 실현시켰다. 그러나 만주국의 본체인 일본제국의 태생적 한계와 2차대전 패전에 따라 만주국 프로젝트는 실패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당시 만주국에 꿈을 실었던 기시 노부스케,박정희는 결코 만주국 프로젝트를 포기하지 않았고 해방 이후의 전후복구 과정에서 다시 살아남은 그들은 자신의 마음속에 간직한 만주국 프로젝트를 만주국의 인맥을 통해 실현했다. 그 결과 한일 양국은 전후의 급속한 경제발전이라는 명과 독재자와 일당장기집권에 따른 깊은 상처와 갈등이란 암을 모두 안게 됐다. 그리고 이 상처와 갈등을 어떻게 소화해내고 합의할 것인가 하는 점은 아직도 양 국 모두 미지수로 남아있다. 박정희의 국가운영은 어찌됐건 성장을 가져왔고, 광범위한 동의와 지지층을 만들었다. 마치 만주국이 그 태생에 있어서 비도덕적이었고, 실제로 괴뢰국가였지만 만주국 안의 소수의 조선인들에게는 '오족협화'의 이상이 실현됐던 것 처럼 말이다.

만주국 프로젝트의 잔재를 모두 청산해야 한다면, 이러한 성과들에 대해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어디까지를 인정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이 나온다. 더 나아가 만주국 프로젝트의 폐해를 우려한 이들이 도입한 시스템(한국의 경우 자유주의 정부 10년과 전면적 시장 시스템)은 실패를 목전에 두고 있다.

더불어 강력한 통제경제라고 요약할 수 있는 만주국 프로젝트의 핵심 중 하나가 단순히 독재자만의 발상이 아니라 현재 체제의 폐해에 대해서 유력한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다면, 우리가 이 책을 친일파 고발서로만 읽는 건 아까운 일이다. 만주국으로 대표되는 정신, 혹은 경영 방침은 과연 어떤 점에서 문제인가, 그것의 장점은 취사선택 될 수 있는 것인가. (책 본문의 인용에서 박정희의 유신은 곧 중화학 공업이다 라는 말이 나온 것처럼), 그것에 대한 대안은 어떤 것이 있으며 과연 나오긴 했던 것인가? 그리고 이를 지지하는 이들에 대해 우리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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