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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론 현대사상의 모험 10
에릭 홉스봄 지음, 강성호 옮김 / 민음사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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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즘 같은 '포스트모던'의 시대에 역사는 두가지 정체성을 가진다. 하나는 베스트셀러. 하나는 무용함. 서점에 가면 베스트셀러 목록에는 항상 먹을거리에 대한 역사, 성의 역사 등 다양하게 즐길 수 있는 역사서적들이 존재하지만 정작 우리 세계에 대해서 이야기할때 '역사성'을 언급하기 시작하면 우리 대부분은 "아..그놈의 역사성..'이라며 속으로 인상을 찌뿌릴 것이다. 세상이 이모양인데 어떡해요? 라고 되묻는 옆사람에게 "역사성"을 언급했다가는 비웃음 사기 십상이다. 그러니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답변들은 이제 역사성에 기반한 정치적 행위가 아니라 "니 자신의 열정에 몰두하라"가 되었다.  

 

 비단 몇년전까지만 해도 역사라는 것이 "지금과는 다른 세상을 상상할 수 있도록 해주는 사유의 방법"이었던 것에 비하면 이 단어의 쓰임은 정말 많이 바뀌었다. 아마도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더이상 단일하게 묶일 수 있는 사회라는 공간이 해체된 결과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역사에 대해서 알고자 하는 욕구를 갖는 것은 1.또다른 재미있는 오락을 찾거나 2.이제는 천대받는 '역사성'이라는 계몽의 힘을 재확인하려는 정치적 의지-중 하나일수밖에 없다. 

 

2.

 100살을 바라보는 이 맑시스트 역사가가 말하는 역사란 후자에 속하며 이 책을 읽는 우리의 입장 또한 후자일수밖에 없다. '정치'라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역사. 즉 현재의 신화들을 타파하고 야만의 요소를 파악하며 보다 나은 상상과 기획을 가능하게 해주는 역사 말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홉스봄의 역사는 어떤 역사인가?  인간사회는 민중의 생활,귀족의 생활,경제,문화,종교 모든 요소가 모여 이루어진 총체이자 지난 시간의 잔여물과 현재의 구성물이 같이 축적된 흐름이기 때문에 제대로 된 역사라면 이 모든것을 다루는 "전체사(total history)"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그리고 한편으로는 신화를 깨는 과학으로서 역사가가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홉스봄의 역사관이다.  이를 위해서 홉스봄은 방법론적으로는 맑스주의의 최소공리(생산양식 우선시와 체제내 모순에 따른 변증법적 발전)에 기반하고 역사가의 윤리로서는 보편성과 겸손,끊임없는 과학적 검증,긍정적인 당파성을 제시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노학자가 꽉 막힌 좌파 역사가는 아니다. 그는 역사가는 끊임없이 연구방법을 개발해나가야 하며 필요하다면 심리학,경제학, 모든 것에서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전체사에 대한 지향과, '역사성'-즉 지금 존재하는 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그리고 물질적인 것과 사람들의 관념체계의 상호작용 결과-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실증주의와 계량사의 위험성은 바로 이를 망각한 것에서 나온다.


3.

 이 격심한 혼란과 지나친 자유의 시기에 홉스봄의 말은 아직 '역사' 혹은 계몽을 믿는 사람들에게 "그래 역사를 버릴수는 없지"라는 한줄기 믿음을 전해준다. 그러나 그 다음의 문제가 도래한다. 정치는 믿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홉스봄에게 전수받은 '신화를 깨는 역할'인 역사에 대한 믿음은 어떤 식으로든 실천되지 않는다면 무력하다. 우리가 역사가라면 그의 윤리강령을 실천하는 것 만으로도 충분하겠지만 우리는 역사가가 아니다.더군다나 홉스봄 스스로도 역사가들은 "소극적 힘"밖에 가지지 못함을 한탄하며 마지막 장을 마무리한다.

 

 우리가 정치적 의지로써 이 책을 읽어냈다면, 이 책을 어떻게든 실천적으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 역사론 독해의 완성일텐데, 우리 스스로의 정체성마저 의심하는 시대에 우리는 역사성을 통해서 누군가를 설득할 수 있을까? 아니 일단 스스로부터 설득할 수 있는지 나 자신에게 물어봐야 하지 않을까.

 

 사실 그렇게 생각해본다면 역사론의 독해 후 남는 것은 허탈함이다. 초반에 제시했던 역사를 알려는 두가지 이유-교양이냐 정치냐-는 우리가 원하던 원하지 않던 교양으로서의 역사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허탈함.  타인을 설득할 수 있는 힘을 잃은 채 자기 자신의 윤리로서,혹은 종국에는 흩어지고 말 타인과의 수다에만 쓰이는 지식만큼 더 '교양적'인 것이 어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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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정복
버트란트 러셀 지음, 이순희 옮김 / 사회평론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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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해지는 법이라니. 자기계발스러운 제목에 나는 처음에 의심을 가졌다. 사실 행복이란 말 만큼 모두가 원하지만 미심쩍은 말도 없을 것이다. 요근래 이 단어가 수상한 냄새를 풍기게 된 건 그게 세상과 단절된 폐쇄적인 의미에서 쓰여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소위 멘토라고 불리는 부르주아 승려,교수 등이 조건과 사람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채 자신이 생각하는 행복의 조건을 마치 모두가 지금 이 순간 가능한 것인 마냥 무책임하게 지껄이는 탓도 크다고 생각한다. 러셀이란 양반도 말년에는 정신이 나가 <천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와 같은 미친 책을 쓴 것인가?

  하지만 제목이 자기계발서 같더라도 긴 시간 통용되는 고전은 항상 다 이유가 있는 법. 러셀의 행복론은 서두부터 다르다. 누가 철학자 겸 수학자 아니랄까봐 러셀은 책 문두에서 자신이 말하는 행복의 정복을 실행할 수 있는 조건을 명확히 하고 들어간다. 사회구조로 인한 불행과 같이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불행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않겠으며. 자신의 이 글이 대상으로 하는 사람들은 평범한 삶을 영위하는,어느정도까지는 자신의 마음먹기 따라 극복 가능한 수준의 일상적인 불행에 시달리는이들이라 정하고 그 이후에도 논의가 사회적인 문제를 짚은 것으로 흘러갈때는 글을 마무리한다. 책임감있는 태도인 것이다.

  물론 책 내내 그가 말하는 행복의 정복법에 대해서 "그것 또한 사회적 결과이다"라고 하거나 그 조차도 쉽지 않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을 수 있겠다. 맞다. 글을 읽어보면 행복에 대해 그는 내적인 집중이나 훈련이 아니라 세상과 타인과의 균형잡힌 소통. 다양한 종류의 취향과 평온함. 일의 중요성 등을 이야기하는데 결코 쉬운 방법들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말과 해결들이 사회적 산물인가. 정말 유효한 방법인가 하는 점을 떠나서 내가 감명깊었던 것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목표와 대상과 적용 가능 범위를 명확히 하려는 러셀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 때문에 끊임없이 문두에 "내 생각에는"이라는 말을 붙이는 한 노인의 태도였다. 사람은 이렇게 말 하기가 쉽지 않다. 나이가 들면 더더욱 그렇다. 유명한 사람이면 더 심할 것이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번씩 나의 주장이 일반론이라고 무의식중에 착각하며 그것이 그저 내 견해일 뿐이라는 생각을 잊곤 하니까.

  러셀은 말년에도 사회활동에 열의가 있었는지. 집회에 참가했다가 정부로부터 구류형을 선고받았다고 한다. 사람들이 정부가 노인에게 너무 가혹하다고 비판하자 러셀은 오히려 "나이가 들 수록 자기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라고 반응했다고 하니. 그런 분이 쓴 책 답다.

 때문에 이 책은 행복에 대한 욕구가 아니더라도 한 어른의 책임감 있는 글이라는 점에서도 꼭 읽어볼만한 가치있는 책이다. 좋은 책은 내용 뿐 아니라 저자의 태도에서도 배우고 새길 것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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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도끼다
박웅현 지음 / 북하우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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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문학이 대체 무엇인가? 라는 질문 만큼 요즘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질문도 없다. 이 책에 한하자면, 박웅현의 인문학이란 '삶의 감각을 풍부하게 만들어서, 더 많은 것을 느끼게 하고 그로 인해 행복을 찾는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책 내내 사물을 보는 법, 평상시의 행복을 찾는 법 등을 설파한다. 이 정도면 '인문학을 알아야 취업한다' 따위의 돈냄새 나는 소비방식 보다는 훨씬 세련된 패턴이 아닌가.

 그러나 나는 그가 말하는 풍부한 감상,풍부한 삶이라는 게 누구나 인문학을 통해서 도달 가능한 것이 아니라 이미 물질적으로 잉여가 있는 이들이 찾을 수 있는 여유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강신주의 냉장고 타령..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중산층 정도 되는 이들의 미덕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요즘 우리가 인문학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꼭 파랑새에 대해 말하는 것 같다. 인문학을 알게 되면 우리가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엄청난 기만이라 생각한다. 사람의 삶을 여유있게 해주는 것은 결국 내 삶을 꾸릴 수 있도록 해주는 물질적 기반이며, 이것이 일정 수준에 다다르지 않고는 인문학 운운 하는 것은 기만일 뿐이다. 

 판자와 쓰레기 속에 사는 이에게 판자와 쓰레기를 살펴볼수 있는 풍부한 감각과 평상시의 행복을 말하는 것은 삶을 나아지게 하는 게 아니라 그를 기만하는 것이다. 실업난 속에서 자본주의란 인성을 파괴하니 거부하세요,여유를 가지세요 라고 말하는 것은 실업자를 엿먹이는 것이다. 

 왜 사람들은 박웅현이, 그리고 인문학을 찬양하는 장사꾼들이 안타까워 하는 것처럼 인문학같이 좋은 걸 모르고 죽은 듯이 살고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할까? 그것은 우리 대다수가 죽은듯이 살아야만 삶을 영위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질문의 선후관계가 잘못되었다. 인문학적 사유가 없어서 이런 삶들을 사는 게 아니라, 우리가 사는 삶이 그런 사유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박웅현의 독법이나 삶의 태도가 잘못되었다는 비판을 하자는 게 아니다. 그의 삶, 글, 생각은 너무나 훌륭하다. 그러나 배경에 상관없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소화하고 활용할수 있으며, 그래야만 뭔가 제대로 사는 거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 가혹하고 기만적인 이야기라고 나는 생각한다.

 지독히 불우했던 친구 하나는 삶의 풍요로움에 듣고 읽고 알수록 자신의 삶의 비루함을 견딜수 없다고 했다. 학자금도 못내고 취직도 어려워 찌들어 사는 친구였다. 그런 이에게 김훈의 글을 읽고 자연풍경을 되새기라는 말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물론 의지로 똘똘 뭉쳐 그런 모든 환경에도 불구하고 형이상의 세계로 날아가며 살아가는 이들도 있으나, 그것을 모두에게 당연한 미덕으로 말할수 없을 것이다.

 인문학으로 표상되는, 현재를 보고 주변을 보라는 태도는 더 나아져야만 하는 삶들을 현재에 묶고 비탄에 빠진 이들을 욕심에 가득찬 이기적 현대인으로 만든다. 나는 정말로 우리 세계에 필요한 태도란 인문학적 태도 운운하며 자연이니 절제니 여백이니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 태도들이 결국 다다르는 것은 지독한 냉소 아니면 자아도취 뿐일 것이다. 지금 시대의 인문학이란 결국 스펙의 끝에 다다라서 기업들이 추가로 생각해낸 스펙이거나, 새로운 생산수단이거나, 중산층 이상의 삶을 사는 이들의 미덕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 같아 보인다. 물론 그것도 충분히 의미있겠지만.

 그러나 나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들이 더 필요하고 의미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하는 일들과 우리가 사는 세상은 왜 이리 고단한 걸까, 누구 때문인 걸까. 정말 나아져야 하는데 나아지지 못한 것들, 정말 개발되어야 하는데 개발되지 못한 것들은 왜일까. 우리가 파괴해야 할 것들은 무엇일까. 등등. 계속해서 우리는 더 나아질수 있고, 인간은 자연과는 다르다 라고 말하는 욕심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문제들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이 책을 찾았겠지만. 그 힘과 답은 적어도 요 근래 유행하는 괴이한 '인문학'의 것은 아닌 것 같다. 비참에 대해 풍경의 아름다움을 알아야 한다고 해 봤자 비참이 사라지지는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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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철학자들 - 철학은 어떻게 정치의 도구로 변질되는가?
이본 셰라트 지음, 김민수 옮김 / 여름언덕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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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마르틴 하이데거와 칼 슈미트를 비롯하여 많은 독일 학자들이 나찌 정권 초반부터 말기까지 어떻게 독일 대학을 황폐화시키고 유대인 탄압과 분서갱유에 일조했는지 써내려간다. 이 책을 읽으면 두가지를 알게 되는데, 첫번째는 한국에서 독재정권이 그렇듯이 독재는 지식인층의 협조 없이는 절대 그 세력을 기형적으로 확장할 수 없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사람들이 서구사회는 나치부역자를 효과적으로 처벌했으나, 한국은 그렇질 못해서 아쉽다고 생각하는 것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는 것이다.


 읽다 보면 나치에 부역한 학자들의 행동은 거의 발암물질 수준이다. 유대인 철학자들의 저서 2만권을 모아 대학에서 태우며 희희낙락했다던가, 유대인이 왜 열등한가 하는 논문을 일년에 몇십편씩 쓰질 않나, 하이데거 같은 인간은 자기한테 사실상의 은인이나 다름 없는 후설이나 야스퍼스를 유대인 탄압이 시작되니 무시하고 온 열과 성을 다해서 히틀러를 찬양하고..사실 한국에서 좌빨이니 종북이니 타령하는 거랑은 그 수준이 달라 한숨이 나올 지경인데, 패전 이후에는 그래도 이놈들 다 처벌받았겠지? 라는 희망을 갖게 하다가 말미인 '뉘른베르크 재판 이후' 에서 그 희망을 다 산산조각 내는 게 또 이 책의 별미.


 나치에 진심으로 부역한 수많은 학자들은 정말 핵심적인 인물들이 아니면 별다른 처벌 없이 교수직을 유지했다. 가장 드라마틱한 인물은 아마 하이데거일텐데, 그는 옛 정을 잊지 못한 한나 아렌트(!)의 헌신적인 노력 뿐 아니라 반나찌 성향을 지녔던 프랑스 철학자들의 도움까지 받아가며 화려하게 부활한다. 칼 슈미트는 자신이 어쩔수 없이 협조했을 뿐이라는 변명으로 시종일관하며 법학계의 슈퍼스타가 되었다.


 반면 나치 치하에서 저항했던 철학자들 중 어떤 이들은 죽은뒤에도 명예를 회복하지 못했고, 망명했다 돌아온 이들은 교수직을 다시 얻지 못한 채 '교수가 되려면 유대인이어야 하냐'라는 경멸어린 말을 듣는 신세가 되었다. '철학은 윤리의 학문인데, 나찌부역자의 사상이 철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을 용납해야 하는가?'라는 저자의 문제의식에 대한 답은 쉽게 할 수 없지만, 정의가 실현되지 못한게 한국만이 아니라는 점이 이 책이 주는 위안이라면 위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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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국가 북한 - 카리스마 권력은 어떻게 세습되는가
권헌익.정병호 지음 / 창비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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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라는 국가는 수수께끼 같은 존재가 아니며 그랬던 적도 없다. 북한에는 카리스마 권력의 독특한 마력을 어떻게 만들어내는지를 잘 아는 대단히 능란한 정치 지도자가 있었다”-책 서문 중.


   우리가 사는 시대에 가장 즉각적인 도덕판단을 불러일으키면서 가장 이해 불가의 대상이 되는 존재들 중 하나는 아마 북한이 아닐까. 북한이 한때 자주의 상징이었던 시기를 지나 2013년 현재. 정말 소수의 몇을 제외하고는 한국에서 북한이라는 존재는 혐오이자 비웃음의 대상이다. 사실 보편적으로 생각해봐도 3대째 국가를 세습하면서 국민을 떼죽음에 이르게 하는 체제를 곱게 봐주고 이해할 이유는 없어보인다. 


   그러나 세상에 무조건 비합리적인 일은 없다. 아무리 신비하거나 우습게 보인다 할 지라도 대상은 언젠가는 해명될 수 있다 생각하는 것이 세상을 보다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영영 이해 불가능한 존재는 없다. 사회적.정치적 판단을 내릴때 도덕적 가치판단이 개입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것이 어떤 합리성에서 도출되느냐 마느냐는 큰 차이를 부를 것이다.


  사실 북한과 합리성은 거리가 먼 단어처럼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장국가 북한>은 국민국가의 시대에 가장 미스테리한 존재인 북한에 대하여 최대한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분석한다. 도덕적 판단은 정말 이 책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극장국가 북한>은 국가의 권위를 만들어 내는 것은 폭력의 독점 뿐 아니라 대중연설과 순방 같은 공연적 퍼포먼스와 스펙터클을 기반으로 한다는 기어츠의 극장국가론과, 카리스마 권력의 유지와 변화에 대한 베버의 분석을 기반으로 한다. 이를 통해 현재의 북한이 김일성 사후의 시점에서 어떤식으로 각종 공연과 의례, 사상교육을 총동원하여 현재의 선군정치 시스템을 정착시켰는지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있게 읽었던 구절은 다음과 같다. 저자들은 언뜻 보면 봉건적으로 보이는 충효일심의 북한의 사상과 체제야 말로 가장 근대적인 행위라고 설명한다. 봉건시대에 별개의 윤리였던 충과 효를 독재자와 국가의 목표를 위해 강제로 통합시켰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러한 통합이 근대에 나타난 전체주의 국가들의 주요한 특징이었다는 점에서 가장 근대적인 정치행위였다는 것이다. 이처럼 이 책은 최대한 도덕적 판단을 자제하고 거부감이 들 정도로 분석에 집중한다. 북한의 김씨왕조 위주의 역사 왜곡과 선군정치 제도에 대해서도 그것의 허구성을 이야기하기보다는 철저히 북한 체제의 내부에서 그것이 어떤 계보와 목표를 가지고 어떤 효과를 북한 내부에 불러왔는지를 더 중요시하는 식이다. 읽다보면 '이거 너무 체제 옹호적인거 아냐?..'라는 느낌이 들 정도다. 이들은 시종일관 북한의 개인숭배 자체가 특이한 것이 아니라, 그것의 지속성이 독특한 것이며 북한은 결코 이해 불가의 대상이 아니라 학문적으로 충분히 분석 가능한 체제임을 증명해내고자 한다. 


 하지만 이런 객관적인 탐구의 여정에도 불구하고 책은 북한이 실패했다고 결론 내린다. 김일성 죽음 이후에 선군정치와 김씨일가 숭배 강화로 대표되는 일련의 조치들은 결국 '국민의 역사를 가장해 사회에 강요한 국가의 역사에 불과'하고 제 식구 하나 제대로 먹일 수 없는 처참한 상황을 불러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결론은 오히려 북한에 대해 저자가 도덕적 판단을 최대한 지양하고 수없는 분석을 진행한 끝에 자연스레 도출한 결론이기에 더 설득력있으며 더 도덕적이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하고도 민감한 존재를 다루고 있기에 그 어느 책보다도 합리와 분석의 힘을 다시금 실감하게 한다. 더불어 읽으면서 나 자신의 북한에 대한 도덕적 혐오가 어느정도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툴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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