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 발생  

2호선 지하철  


서초역으로 향하던 지하철이 급정거하자 서서 가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면서 넘어졌다. 의자 앞에 서 있던 나는 재빨리 한 손으론 손잡이를 잡고, 나머지 한 손으론 내 쪽으로 몸이 기울어지는 연아와 지태를 껴안았다. 나는 끄응, 작게 신음을 흘리며 내 몸에 실린 지태와 연아의 몸무게를 감당해냈다. 덕분에 다른 사람들은 와르르 넘어지는 와중에도 우린 아무도 넘어지지 않았다. 


덜커덩. 지하철이 완전히 멈춰 서자 우린 균형을 잡으며 똑바로 섰다. 넘어진 사람들도 앓는 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저마다 한마디씩 내뱉는 불평이 차량 안을 가득 채웠다. 지태도 몸을 추스르며 한마디 보탰다. 

“아, 무슨 브레이크를 이렇게 밟아? 기관사 잘라야 되는 거  아냐?” 

나와 연아는 몸을 추스르면서 지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멀리서 정체 모를 소리가 들려왔다. 

쿠쿠쿵. 쿵…… 쿵, 쿠쿵……. 
땅이 흔들리는 건지 약간의 진동도 느껴졌다. 무언가가 폭발하는 소리인가? 지하철에 타고 있던 사람들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우린 사뭇 놀란 얼굴로 서로를 쳐다봤다. 잠시 지하철 기관사의 안내방송을 기다려봤지만 어색한 침묵 속에 몇몇 사람들의 잡담만 오갔을 뿐이다.   

“이거 무슨 일 생긴 거 아냐?”  
“빨리 나가야 되는 거 아닌가?”  
“지진 났나?”  
“그냥 문 열고 나갈까?”  
“뭐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  
“아, 무슨 일인지 빨리 안내를 해주든가 해야지 뭐하는 거야?” 

사람들의 웅성거림 속에 불안감이 점점 커져가는 게 느껴졌다.  

“얘들아, 이거 봐봐.” 

연아가 스마트폰을 내밀며 말했다. 스마트폰 화면에는 연아가 가입한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이 띄워져 있었다. 게시판에는 새로운 글이 빠른 속도로 업로드되고 있었다. 최신 업로드 글 제목에는 공통된 키워드가 있었다. ‘전쟁’, ‘테러’, ‘지진’, ‘재난’, ‘서울’ 등등. 설마 지금 정말 서울에서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연아가 게시판의 글 하나를 터치하자 내용이 떠올랐다. 

「씨발, 전쟁이든 테러든 실제 상황 같다. 다들 서울 떠라.」    

연아가 다른 글을 터치했다. 

「그냥 지진 같은데. 서울 사람들 지진 겪어본 적 없어서 오버하는 듯. 이 정도 진동이면 진도 몇이려나.」 

또 다른 글을 터치했다. 

「나도 폭발 소리 들음. 뭔가 터지긴 터짐. 제대로 된 정보 아는 사람?」 

그 외에도 게시판엔 전쟁과 테러, 지진을 의심하는 글들이 무서운 속도로 업로드되고 있었다. 그중 ‘속보 떴다. 원인 파악 중이란다’라는 제목의 글이 뜨자 연아가 바로 터치했다. 속보 기사로 이동하는 링크 주소가 떴다. 또 한 번 터치했다. 속보 기사가 화면에 떴다. 뉴스 기사라는 말이 무색하게 ‘[속보] 서울 지하철 폭발 사고’라는 제목으로, 서울 시내 지하철과 지하철역 곳곳이 폭발했으며 정확한 원인과 사고 규모를 파악 중이라는 짤막한 내용만 적혀 있었다. 고작 두 줄짜리 기사였다.  

“아, 그냥 폭발 사고인 거야, 아님 진짜 뭐 테러라도 터진 거야?” 

지태가 답답한 듯 물었다. 

“지진일 수도 있다고 하잖아.” 

내가 다른 가능성에 대해 언급했다.  

“전쟁이 난 걸 수도 있지.” 

이번엔 연아가 다른 가능성을 말했다. 
순간 지하철 안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쏠리는 것이 느껴졌다. 사람들이 극도로 예민해졌다는 걸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뭔가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얘들아……, 이거 좀 봐봐.” 

잠시 후 연아가 다시 스마트폰을 가리키며 말했다. 연아의 표정이 더 없이 심각했다. 스마트폰 화면엔 아까 지하철도 레이스를 생방송했던 연아의 페이스북 계정이 띄워져 있었다.  
  
「연아님, 지금 당장 지하철에서 내려서 밖으로 나오세요. 안 그럼 다 죽습니다.」 

연아의 팬이 남긴 댓글이었다. 나는 연아와 지태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봤다. 아마 내 두 눈엔 이렇게 쓰여 있을 것이다. 이거 무슨 개소리냐? 

그때 갑자기 지하철 안의 전등이 일제히 꺼졌다. 사람들의 짤막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러곤, 침묵.  
코앞도 보이지 않는 암흑 상태가 된 지하철 안에는 사람들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무거운 적막감이 내려앉았다. 암흑은 빛만 삼킨 게 아니라 사람들의 목소리도 삼켜버렸다. 지하철 바깥 지하 터널을 밝히던 형광등도 꺼져버려 주위엔 희미한 빛 하나 보이지 않았다. 우린 밀폐된 터널의 완전한 암흑 속에 갇혔다.  

연아는 스마트폰 화면의 불빛으로 나와 지태의 얼굴을 확인했다. 나는 어두컴컴한 주위를 둘러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크게 떴다 반복하면서 어둠에 적응하려 했다. 그러나 사방엔 어둠, 어둠뿐이었다. 바로 옆에 있는 연아와 지태의 얼굴도 잘 보이지 않았다. 지하철 안 곳곳에서 불안해진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켜 촛불처럼 빛을 밝혔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어둠 속에서 사람들의 실루엣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곳이 암흑 속이란 사실은 변함없었다.  

나의 두 눈은 어둠 속을 방황하다가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한 점에 멈췄다. 지하철 창문 너머로 지하 터널이 펼쳐져 있었다. 지하 터널은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나의 시선은 헤어 나올 수 없는 늪에 빠진 것처럼 지하 터널의 어둠에 정박되어버렸다. 그 속에서 뭔가가 우릴 지켜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가능한 한 눈을 크게 뜨고 창문 너머 지하 터널을 살펴봤다. 시력의 한계 때문인지 온통 새카맣기만 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무언가가 우리를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번엔 눈을 가늘게 뜨고 창밖을 응시했다. 그 순간, 내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 희끄무레한 게 움직였다. 커다란 짐승 같기도 하고, 덩어리 같기도 한 무언가가……. 그다음엔, 내 착각일까. 희끄무레한 무언가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우리를 향해 오고 있었다. 등골이 쭈뼛했다. 무언가가 창밖에서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지하철 안으로 들어올 텐데, 지금 우리 위험한 거 아닌가?   

그때 팟, 하고 다시 전등이 켜지면서 지하철 안이 밝아졌다. 주위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지하철 바깥에도 형광등이 켜지면서 지하 터널이 훤히 보였다. 다행히 터널엔 아무것도 없었다. 역시 내 착각이었나? 나 역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래? 괜찮아?” 

연아가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왜? 나 아무렇지도 않은데?” 

내가 괜찮은 척 되묻자 연아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퍽이나. 귀신 한 다스는 본 것 같은 얼굴이야, 너.” 

내 얼굴이 그런가? 나는 지하철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을 쳐다봤다. 확실히 조금 창백해 보이는 것 같긴 했다. 

“아니……. 지하 터널에 뭐가 있는 것 같았는데 아무것도 아…….” 

내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또 다시 지하철의 전등이 꺼지며 암흑이 내려앉았다. 사람들은 이번엔 침묵하지 않았다. 이게 지금 뭐하는 짓이냐는 날카로운 목소리들이 새어 나왔다. 불 켜라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사람들의 예민함은 이제 한계를 넘어섰다. 지하 터널의 형광등도 모조리 꺼져 다시 완전한 암흑 세상이 됐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와장창! 유리 깨지는 소리가 들리면서 꺄아아아악! 비명이 울려 퍼졌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지하철 곳곳에서 연이어 와장창, 유리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의 비명이 찢어질 듯 커져갔다.  

“뭐야! 무슨 일이야?” 

쏟아지는 비명을 뚫고 바로 옆에서 지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쾅! 쾅! 콰쾅! 콰콰쾅! 무언가가 지하철을 부수려고 하는 건지 사방에서 둔탁한 충격음이 들리면서 지하철이 흔들렸다. 

“꺅! 흔들리잖아! 뭐야, 지금!” 

이번엔 연아의 목소리였다.  

“다 손 잡아! 빨리! 절대 놓지 마!” 

내가 소리치며 어둠 속으로 손을 뻗었다. 연아의 팔을 더듬어 손을 잡았다. 콰쾅! 쾅! 콰콰쾅! 우리는 흔들리는 지하철에서 서로의 손을 잡고 넘어지지 않게 몸의 균형을 잡았다. 여전히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새카만 암흑의 세계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었다. 와장창창! 콰쾅! 소리를 내며 우리 바로 앞에 있는 창문이 깨지면서 파편이 튀었다.  

“아악!”  

파편이 튀었는지 연아가 소리를 질렀다.  
동시에 “으아아악!” 하며 창문 아래 의자에 앉아 있던 남자가 비명을 질렀다. 그런데 갑자기 TV를 꺼버린 것처럼 남자의 비명이 뚝 끊어지고, 와드득! 하는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려왔다. 연이어 키에에엑! 하며 기괴한 소리를 내는 무언가가 지하철 안으로 튀어 들어왔다. 나는 그 무언가에 부딪히면서 연아의 손을 놓치고 튕겨 나갔다.   

“꺄악! 단아!” 

연아의 목소리가 멀어져 갔다. 날 밀쳐낸 무언가는 덩치도 크고 묵직한 무게감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몸의 중심을 잃고 핀볼처럼 지하철 안에서 우왕좌왕하는 사람들과 이리저리 부딪혔다. 사방에서 귀가 멍멍해질 정도로 수많은 비명이 들려왔다. 퇴근 시간이라 지하철 안은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이런 씨발!” 

나는 어둠 속에서 팔을 휘휘 저으며 뭔가 잡을 것을 찾았다. 장님이 된 것만 같았다. 그러다가 사람들 사이에서 딱딱한 무언가가 손에 잡혔다. 의자 근처에 있는 기다란 봉처럼 생긴 손잡이였다. 나는 손잡이를 잡고는 퍽퍽 부딪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넘어지지 않도록 몸을 지탱했다.  

“아, 밀지 좀 말라고!” 

나는 짜증스럽게 소리치며 온몸에 힘을 주었다. 겨우 몸의 균형을 잡고는 연아와 지태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봤다. 사방에선 귀를 찢을 듯한 비명만 들려왔다. 너무 어두워서 뭐가 뭔지 도저히 알아볼 수 없었다. 사람들이 들고 있는 스마트폰 불빛이 여기저기서 흔들렸다. 사람들과 부딪히며 몇 바퀴를 빙빙 돌다 보니 방향감각도 상실해버렸다. 제길, 내가 애들이랑 어느 쪽에 서 있었지?  

“이거 뭐야? 비켜! 으아악!” 

바로 근처에 있던 누군가가 소리쳤다. 동시에 키에에에엑! 하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콰직! 으드득! 하는 기분 나쁜 소리가 이어졌다. 소리만 들어도 간담이 서늘해졌다. 대체 내 주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그 소리에 주위에 있던 수십 명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우르르 내가 있는 쪽으로 몰려 왔다.  

“저리 비켜!”  
“이거 놔!”  
“밀지 말라고!”  
“야, 이 개새끼야!”  
“잡지 마세요!”  
“어딜 잡아!”  

어둠 속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사람들의 공포와 두려움이 뒤섞인 외침이 터져 나왔다. 나는 도리 없이 손잡이를 놓치고 그들 속에 파묻혀 쓸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바로 뒤에서 쿠쿵! 쿵! 쿵! 쿵! 쿵! 하면서 지하철의 바닥, 벽, 천장을 무언가가 뛰어다니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온몸의 털이 쭈뼛 섰다. 소리의 크기로 봐선 육중한 무게일 것 같은데 움직임이 매우 민첩했다. 곧 키에에에엑! 하는 소리가 들려오면서 천장에서 무언가 떨어져 나를 둘러싼 사람들을 마구 공격하기 시작했다. 정체가 뭔진 몰라도 한두 놈이 아니라 여러 놈이었다. 사람들의 찢어질 듯한 비명과 함께 얼굴에 끈적한 액체가 흩뿌려졌다. 비릿한 냄새가 났다. 혀에 닿는 액체에선 쇠 맛이 났다. 피, 피였다. 지하철 안의 사람들이 속절없이 죽어 나갔다.  

“으아악! 저리 가!” 
“안 돼! 살려주세요! 제발!” 
“끄아아아악!” 
“오지 마! 살려줘! 아악!”  

지하철은 처절한 비명으로 휩싸인 도살장과 다를 바 없었다. 흔들리는 스마트폰 불빛 사이로 정체 모를 무언가가 언뜻 비쳤다. 찰나였지만 정확히 봤다. 커다란 몸집에 온몸이 까만 털로 뒤덮인 괴물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어느 남자의 머리를 와드득 씹고 있었다. 와드득! 아까부터 계속 들려온 저 소리가 사람 머리를 씹어 먹는 소리였구나! 온몸이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 연아의 팬의 댓글이 떠올랐다.  

「지금 당장 지하철에서 내려서 밖으로 나오세요. 안 그럼 다 죽습니다.」 

“단아! 어디 있어? 단아!”  
“대답해! 강단이!” 

어디선가 연아와 지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환청인가? 아비규환 속에서 두 사람의 목소리가 똑똑히 들려오다니.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소리가 들리는 쪽을 돌아봤다. 어둠 속에선 비명과 포효만 들려올 뿐, 두 사람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어디야? 둘 다 어디에 있는 거야? 

“나 여기 있어! 연아야! 지태야!” 

애타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사람들의 비명뿐이었다. 겁이 나서 죽을 것 같았지만 어둠 속에서 두 팔을 앞으로 뻗으며 한 발 한 발 앞으로 내디뎠다. 발에 물컹하고 무언가 밟히는가 싶더니 쭉 미끄러져 넘어졌다. 몸을 받치느라 바닥에 손을 짚었는데, 누군가가 내 손목을 낚아챘다. 화들짝 놀라 손을 뿌리치다가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스마트폰 불빛이 내 손목을 잡은 이를 비췄다. 그를 본 순간, 나는 TV 정지화면처럼 온몸이 얼어붙었다.  

그의 허리 아래로 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그의 허리 단면은 맹수가 잡아 뜯은 것처럼 너덜너덜했다. 사람의 피부가 저렇게 찢어발겨질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살려줘……, 제발…….”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그가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의 얼굴을 본 순간, 또 한 번 숨이 멎을 뻔했다. 지태였다. 두뇌 회로가 정지한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지태……. 지태야……. 네가 왜……?  

나는 하반신이 뜯겨 나간 지태에게 다가갔다. 조금 더 가까이 가자 그가 지태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는 걸 알아챘다. 두 눈을 비비고 다시 남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지태가 아니라 30대쯤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나는 겁에 질려 벌떡 일어나 달렸다. 지태인 줄 알았다. 지태가 그렇게 된 줄 알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나는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른 채 지하철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이리저리 부딪히면서 무작정 앞으로 달렸다. 제길, 갑자기 왜 이런 상황이 된 거야……? 난 그냥 육상 그만두고 하루 재미있게 놀려고 한 것뿐인데……!  

그때, 누군가가 마구 달리는 나를 붙잡았다. 괴물인가 싶어 바로 밀쳐냈는데 그럴수록 완강하게 날 껴안았다.  

“나야, 지태! 나라고, 인마!” 

분명히 지태의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리자 랜턴 불빛에 비쳐 지태의 얼굴이 보였다. 랜턴 불빛이 옮겨 가더니 바로 옆에 있는 연아의 얼굴을 비췄다. 랜턴을 들고 있는 사람은 연아였다. 두 사람의 얼굴을 보자 얼어붙었던 마음이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둘 다 살아 있었구나. 

키에에에엑! 바로 옆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연아가 랜턴을 비췄다. 흔들리는 랜턴 불빛 사이로 우리를 향해 돌진해오는 괴물이 보였다. 

“씨발! 빨리 나가! 빨리!” 

지태의 외침에 랜턴을 든 연아가 뒤로 달려가 지하철 아래로 뛰어내렸다. 누군가 지하철 문을 열어놓았다. 지태가 정신없는 나를 붙잡고 달려가 함께 지하철 아래로 뛰어내렸다. 쿠쿵! 하고 뒤쪽에서 돌진해오던 괴물이 우리가 서 있던 곳에 처박히는 소리가 났다.  

지태와 난 소리를 지르며 어둠 속으로 떨어졌다. 갑작스레 딱딱한 바닥에 부딪친 우리는 악,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뒹굴었다. 지하 터널 바닥이 심하게 울퉁불퉁해서 뒹구는 내내 온몸이 여기저기 쑤셨다. 그 와중에도 지태는 내 팔을, 나는 지태의 팔을 놓지 않았다. 나와 지태는 서로에게 괜찮냐는 말을 하면서 바닥에서 일어났다. 

“연아야, 어디 있어? 연아야!” 

지태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나도 주위를 둘러보며 연아를 찾았다. 하지만 어둠은 그녀의 위치를 순순히 드러내주지 않았다.  

“연아야! 이연아!” 

나도 외쳤다. 그러자 누군가 한 팔로 내 몸을 더듬으며 감쌌다. 

“랜턴을 놓쳤어! 빨리 가자!” 

연아의 목소리였다.  

“야, 연아 너 맞지? 지금 단이 잡은 거지?” 
“맞아! 빨리 가자!” 

어둠 속에서 지태가 재차 확인하자 연아가 냉큼 대답했다. 나는 왼손으론 지태의 팔을, 오른손으론 연아의 팔을 붙잡았다.  

“내가 둘 다 잡았어! 가자!” 

터널 저 멀리 빛이 보여서 그곳으로 달려가려는 찰나, 우리 뒤에서 달려오던 사람들이 등 뒤로 부딪히면서 소리를 지르며 다 함께 와르르 넘어졌다. 사람들과 뒤엉키면서도 나는 악착같이 양손에 쥔 지태와 연아의 팔을 놓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팔이 없는 사람처럼 온몸으로 자갈 바닥에 넘어져야만 했다. 더 심하게 다치더라도 두 사람을 놓치는 일만큼은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다 비켜! 이 개새끼들아! 비키라고!” 

바로 뒤에서 우리와 부딪힌 사람들이 소리쳤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광기에 휩싸인 남자의 목소리였다.  

“너희들이나 비켜! 뒤에서 부딪힌 건 당신들이잖아!” 

지태의 목소리였다. 바로 왼쪽에서 들려왔다.  
어둠 속의 남자가 지태에게 더 화를 내려 하자 그와 일행인 듯한 사람들이 빨리 도망가자며 남자를 말렸다. 남자는 자기 분에 못 이겨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우리에게서 멀어졌다.   

“지태야, 괜찮냐?” 

내가 어둠 속에서 무릎을 꿇고 지태를 더듬으며 물었다. 

“난 괜찮아. 연아는?” 

지태의 물음에 연아가 내 오른쪽에서 대답했다. 

“아윽, 나도 괜찮아.” 

연아의 팔을 더듬어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내 손 잡아.” 

나는 양손으로 지태와 연아의 손을 잡고는 함께 바닥에서 일어났다. 그때 어디선가 불빛이 깜빡거리더니 갑자기 지하 터널이 환해졌다. 터널 벽면에 붙어 있던 형광등이 켜진 것이다.  

“불 들어왔다!” 

반가운 마음에 소리쳤다. 사방이 환해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눈앞에 우리가 타고 있던 지하철이 보였다. 그걸 본 순간, 차라리 불이 들어오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길게 늘어진 2호선 지하철은 본래의 상징 색깔인 초록색은 찾아볼 수도 없을 만큼 온통 검은 점으로 뒤덮여 있었다. 검은 점은 모두 괴물이었다. 수십, 아니 수백은 될 것 같은 괴물들이 흡사 박쥐 떼처럼 지하철에 들러붙어 사람들을 도륙하고 있었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봐버렸다.

이곳 지하는 괴물들의 소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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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표: 10월 3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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