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 발생 27분 전

2호선 지하철



“이번 역은 잠실나루, 잠실나루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달리는 지하철 안에서 안내방송이 흘러 나왔다. 안내방송이 들리자 지하철 오른쪽 문 앞에 서서 심호흡을 했다. 불꽃처럼 달리던 나의 19년 육상 인생에 종지부를 찍을 레이스가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잠시 후 지하철이 완전히 멈춰 서자 푸시식 소리를 내며 총 10량으로 이뤄진 2호선 지하철의 문이 일제히 열렸다. 스타트 신호다! 나는 문이 열리자마자 지하철의 가장 앞 칸인 1호차에서 승강장으로 튀어 나갔다.


잠실나루역에서 내리는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기 위해 최대한 지하철과 멀리 떨어진 쪽으로 포물선을 그리면서 빠른 속도로 달려 나갔다. 지상역인 잠실나루역의 창문 너머로 분홍빛 노을이 새어 들어왔다. 나는 눈을 찡그리곤 사람들이 지하철에서 다 내린 것을 확인한 후 달리는 방향을 꺾었다. 지하철 문 쪽으로 바짝 붙었다. 4호차쯤부터 직선으로 앞이 뻥 뚫려 있었다. 이대로 10호차까지 달려 문이 닫히기 전에 타면 된다. 나는 정차해 있는 지하철을 따라 전속력으로 달렸다. 지금 나에겐 이 길이 트랙이요, 나만의 레인이었다. 지하철이 정차한 짧은 시간 동안 

1호차에서 10호차까지 달려 탑승에 성공해야 하는, 이른바 ‘지하철도 레이스’였다!


“출입문을 닫겠습니다.”


8호차쯤 지났을 때, 잠실나루역 승강장에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10호차 문에서 연아와 지태가 몸을 반쯤 내민 채 나에게 빨리 오라고 소리쳤다. 연아의 손에는 스마트폰이 끼워진 셀카봉이 들려 있었다. 이 레이스는 연아의 스마트폰을 통해 인터넷으로 생방송되고 있었다. 


“빨리, 빨리!”

“조금만 더!”


연아와 지태가 발을 동동 구르며 나를 향해 소리쳤다. 푸시식 소리를 내며 지하철 문이 닫히려 했다. 연아와 지태는 깜짝 놀라 몸을 지하철 안으로 넣었다. 


“으아아아!”


기합을 넣듯 소리치며 9호차 옆을 번개같이 지나갔다. 10호차 문이 절반쯤 닫히는데 재빨리 몸을 웅크려 지하철 안으로 뛰어들었다. 문 안쪽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지태가 내 몸을 받으면서 우와악! 소리를 질렀다. 창던지기 선수라 근육이 잘 발달한 지태는 비틀거리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부딪히지 않게 나의 거구를 잘 받아냈다. 덜커덩, 하면서 지하철이 출발했다. 


“우와아아! 대박! 보세요! 성공했습니다! 1호차에서 10호차까지 거리는 200미터! 정차 시간은 약 20초! 지하철을 타고 내리는 사람들이 장애물처럼 있는데도 10호차에 탑승하는데 성공했어요! 참고로 200미터 세계 신기록은 19초대입니다! 물론 그 기록은 아무런 장애물이 없는 트랙에서 만들어진 거지요!”


연아가 한 손엔 20초라고 찍힌 스톱워치를 들고, 한 손엔 스마트폰이 끼워진 셀카봉을 든 채 소리쳤다. 스마트폰 카메라는 연아와 지태, 헉헉대는 나를 한 화면에 담고 있었다. 지태는 스마트폰을 보면서 이예! 오오! 괴성을 지르며 9회 말 투아웃에서 역전 홈런을 친 것처럼 세리머니를 했다. 실시간으로 동영상을 업로드하고 있는 스마트폰 화면에 사람들의 댓글이 마구 올라

왔다. 


「ㅋㅋㅋㅋㅋㅋ대박ㅋㅋㅋ 이걸 진짜 해내네.」

「초대박ㅋㅋㅋ 이걸 진짜 찍을 생각을 하다니! 그것도 성공!」

「ㅋㅋㅋㅋ강단이 인정. 멋진 은퇴다!」

「얘네 진짜 마지막까지 골 때리네ㅋㅋㅋㅋㅋ.」

「저게 가능하긴 한 거구나. 지하철 탈 때마다 궁금했는데.」

「맙소사, 잠시 문 열리고 닫히는 사이에 10칸을 달리다니ㅋㅋㅋ.」


우리 이벤트에 즐거워하는 댓글이 줄줄이 이어졌다. 우린 댓글들을 보면서 마구 웃어댔다. 개중엔 저게 무슨 민폐냐, 또 약 빨고 뛴 거냐, 미친 짓 좀 그만해라 등등 악플도 종종 달렸지만 우린 신경 쓰지 않았다. 도핑 스캔들이 터진 후 나와 지태, 연아는 세상에 존재하는 욕이란 욕은 모두 다 먹어본 것 같다. 그리고 이 방송은 대부분 연아의 팬들이 보기 때문인지 악플을 단 사람들은 공개적으로 비난을 받았다. 연아는 인터넷 방송계에서 꽤 유명한 인기 VJ였다. 


어찌 됐든 우리의 이벤트는 대성공! 나와 지태, 연아는 소리치며 하이파이브를 했다.


“이봐, 학생들! 지하철 안에서 왜 그렇게 소란스러워? 여기가 학교 운동장이야, 뭐야?”


날카로운 목소리가 잔뜩 흥이 오른 우리 뒤통수에 꽂혔다. 나와 지태, 연아는 웃다 말고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이 지긋한 아저씨가 자리에 앉은 채 우리를 꾸짖고 있었다. 그 밖에도 10호차에 타고 있는 어른들은 모두 다 불만스러운 얼굴로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당연했다. 우린 학교 운동장에서 노는 것처럼 떠들어댔으니까.


“너희, 어느 학교 학생이야? 보니까 아직 학교 끝날 시간도 안 된 것 같은데 버젓이 교복 입고선 말이야! 요즘 애들은 겁대가리가 없어. 어느 학교야!”


아저씨가 계속해서 우리에게 소리쳤다. 


“저, 자퇴했는데요.”


내가 퉁명스레 대답했다. 뭐, 당연하지만 거짓말이다. 육상 선수는 그만뒀어도 아직 학교는 그만두지 않았다. 그럼 왜 교복을 입고 나왔겠는가? 그저 오늘 하루 땡땡이 쳤을 뿐이다.

아저씨가 나의 대답에 잠시 당황했지만 질 수 없다는 듯 맞받아쳤다.


“자퇴한 게 자랑이야? 뭐 잘했다고 고개 쳐들고……. 어? 이제 보니 너 그놈이네. 몇 달 전에 육상 도핑 스캔들! 그거! 너 맞지?”


안 그래도 주목받고 있긴 했지만 아저씨의 말이 끝난 순간,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10호차 안의 눈 달린 모든 사람이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다.


“너, 그런 안 좋은 사건 일으켰으면 자숙하고 성실하게 지내야지 이게 지금 뭐하는 짓이야? 안 그래도 사람들을 죄다 실망시켜놓고 말이야. 공공장소에서 이렇게 떠들고 놀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어? 잘못했으면 눈에 안 띄게 조용히 지내야지! 반성하는 모습도 보이고! 안 그래?”


이 아저씨가 미쳤나? 당신 좋으라고 내가 그렇게 훈련하고 달린 줄 아나? 자기들 멋대로 나한테 기대했다가 실망해놓고선 무슨 헛소리야? 


내가 아저씨에게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퍼부으려 하는데, 연아가 불쑥 끼어들었다.


“얘가 뭘 반성해야 되는데요?”


아저씨는 나에게서 연아에게로 눈을 돌렸다. 연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더 쏘아붙였다. 


“얘가 뭘 그렇게 잘못해서 눈에 안 띄게 지내야 되는데요? 네? 한번 말해보세요.”

“야야, 됐어. 그만해.”


지태가 연아를 말렸다. 그러나 뚜껑 열린 연아를 말릴 순 없었다.


“단이도 모르고 먹은 거라고요. 스티브 그 새끼가 얘 속이고 약물 투약한 거라고요! 그리고 9초 91은 그전에 기록했거든요. 지금도 얘, 아시아 신기록 보유자는 맞아요. 그 기록 내려고 얼마나 힘들게 훈련했는지 아세요?”


연아의 말은 사실이다. 나는 스티브가 준 약물이 스테로이드제라는 걸 몰랐다. 작년에 9초 91을 기록했을 때는 약물을 복용하기 전이었다. 9초 91은 아시아 타이 기록이다. 육상 100미터 부문에서 고등학생이 그 정도의 기록을 세운다는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그만큼 대단한 일이라는 것!


“이 자식들이……. 자식 같아서 좋게 말했더니 꼬박꼬박 말대꾸네. 야, 너 어디서 그 따위 말버릇이야?”


연아를 쳐다보는 아저씨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어른들은 항상 저런 식이다. 자기들 멋대로 우리 같은 애들을 자식처럼 생각한다고 하면서 고분고분하지 않다고 화부터 냈다. 특히 연아 같은 여자애에겐 더했다. 이에 질세라 연아가 아저씨에게 한마디 더 하는데, 지태가 재빨리 양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았다.


“아저씨, 죄송합니다. 조용히 할게요! 죄송합니다!”


연아가 지태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그럴수록 지태는 손에 더욱 힘을 줬다. 아저씨는 그래도 화가 안 풀리는 듯 연신 연아를 향해 욕설을 내뱉다가 계속되는 지태의 사과에 화를 누그러뜨렸다. 이렇게 상황이 마무리되나 싶었는데, 지태가 나지막이 아저씨에게 한마디 내뱉었다.


“아저씨, 그런데요, 얘 이제 육상 그만뒀어요. 다신 안 달릴 거래요.”


아저씨가 지태를 향해 눈을 치켜떴다. 지태가 이어서 말했다.


“아저씨 말대로 얘 반성 많이 했거든요. 자기 행동에 딱 책임지고 물러난 거죠. 멋있죠?”


아저씨는 지태의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저씨의 얼굴엔 ‘멋있긴, 개뿔!’이라 쓰여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요, 얘 한때 세계 우승까지 노렸던 놈이거든요. 그랬던 놈이 이제 선수 생활 그만둔다는데 지금 얼마나 기분이 ‘엿’ 같겠어요. 아저씨 기분도 ‘엿’ 같은 거 잘 알겠는데 조금만 이해해주세요. 거 얼굴도 좀 ‘엿’같이 생기셔 가지고 그렇게 ‘엿’ 같은 말만 하시면 듣는 우리 기분도 ‘엿’ 같아지고, 서로서로 ‘엿’ 같아지는 거 잘 알 만하신 분이 왜. 거 참.”


지태가 욕설만 유달리 강조해서 말하자 연아가 피식 웃었다. 나도 실소를 머금었다. 반면 아저씨의 얼굴은 시뻘겋게 변했다. 주위의 다른 어른들도 지태의 욕설을 듣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지태가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나와 연아에게 지하철 다른 칸으로 옮겨 가자고 신호를 보냈다. 나와 연아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아저씨에게 함께 가운뎃손가락을 치켜들어 보이고는 다른 칸으로 이동했다. 깔깔대는 우리 뒤통수 너머로 아저씨가 버럭 화를 내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우리를 쫓아오진 않았다. 그럴 만한 용기와 끈기는 없어 보였다. 하긴, 그토록 성실하게 우리를 혼내는 어른은 본 적 없다.


사실 오늘 우린 하루 종일 가는 곳마다 이런 장난을 치는 중이다. 우리를 그저 골 빈 머저리들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봐도 오늘 우린 온종일 바보 같은 짓만 했으니까. 조금 전의 지하철도 레이스는 오늘의 바보짓 하이라이트였다. 하지만 조금만 이해해주길 바란다. 오늘은 내가 ‘영원히’ 육상을 그만두기로 한 날이니까. 내 청춘 다 바쳐가며 뛰었던 그 세계를 내 손으로 끝낸 날이니까. 


사실 내가 오늘 국제육상경기연맹으로부터 통지받은 처벌은 4년간 국제경기 출전 금지였을 뿐이다. 국내 육상경기연맹으로부터 받은 처벌도 4년간 국내 경기 출전 금지였을 뿐이다. 3개월 전 도핑 테스트에서 양성 반응이 나온 것에 대한 처벌의 결과였다. 4년 뒤엔 다시 국내외 육상 경기에 모두 출전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4년 뒤에 다시 9초대 기록을 세우고 올림픽에서 우승을 하더라도 나는 약쟁이로 불릴 뿐, 절대로 칼 루이스, 우사인 볼트 같은 스프린터로는 기억되지 못할 것이다. 트랙 위에서 사회자가 내 이름을 소개할 때마다 함성이 아닌 야유 소리가 울려 퍼질 것이다. 이건 나의 추측이 아니라 도핑 스캔들이 있는 선수라면 응당 짊어져야 할 영원한 족쇄다. 내 육상 선수 인생은 사실상 4년이 아니라 영원히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불명예를 떠안고 계속 뛰느니 스스로 육상을 그만두는 것을 선택했다. 


그래서 지태와 연아는 오늘만큼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해주겠다며 말만 하라고 했다. 사실 딱히 하고 싶은 건 없었다. 다만 나와 가족이라는 이유로 그동안 나와 함께 사람들에게 영혼이 부서질 정도로 욕을 먹은 두 사람을 위해 뭔가를 해주고 싶었다. 


웃긴 얘기지만, 그게 지하철도 레이스였다. 평소 연아와 내가 가족인 걸 아는 연아의 팬들은 연아에게 나에 대한 괴상한 질문을 해댔는데, 그중 가장 인기 있는 질문이 ‘지하철이 정차했을 때 강단이는 몇 칸이나 이동할 수 있나’였다(이에 대해 토론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지하철도 레이스를 마지막으로 육상을 그만두겠다고 연아와 지태에게 선언했다. 두 사람은 처음엔 물음표가 가득한 눈으로 날 쳐다봤지만, 이내 두 눈 속의 물음표는 느낌표로 바뀌었다. 그 느낌표 앞엔 이런 의미가 담겨 있었다. 마녀사냥하듯 우리를 욕하는 사람들에게 보란 듯이 우리의 미친 레이스를 보여주자! 


그렇게 우린 2호선 지하철을 타고 적당한 역을 골라 지하철도 레이스를 펼치게 됐다. 세계육상선수권대회? 올림픽? 다 필요 없다. 지태, 연아와 함께 이렇게 놀 수만 있다면 그곳이 나의 올림픽이지.


여기서 잠시 지태와 연아, 나, 우리 셋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고 넘어가야겠다. 어떤 사이이길래 이러한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는지 이해를 돕기 위해서.


나, 지태, 연아는 오래된 친구이자 동갑내기 남매다. 우린 절대 지울 수 없는 상처 하나를 공유하고 있다. 우리의 부모님들이 한꺼번에 돌아가신 사건이다. 열 살 때 그 사건이 일어난 이후 하루아침에 고아가 된 우린 새엄마의 보호 아래 한 집에서 살게 됐다. 원래는 친한 소꿉친구였다가 동갑내기 가족이 된 것이다. 아픈 상처와 끈끈한 세월을 공유하고 있는 만큼 우리 셋의 사이는 소꿉친구, 가족 이상으로 각별하다.


여기에 한 명 더. 우리를 누구보다 사랑하며 친부모 못지않은 정성으로 길러주신 우리의 엄마. 당시 우리 셋을 한꺼번에 입양해준 엄마가 아니었다면 열 살의 우리는 그 사건 이후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우리 셋이 지금처럼 자랄 수 있었던 건 오롯이 엄마 덕분이다. 

우리 셋, 그리고 엄마. 이렇게만 있으면 된다. 그럼 세상 부러울 게 없다.


우리가 탄 2호선 지하철은 어느새 지하로 들어와 사람들이 가장 많이 타는 강남 쪽 구간을 지나고 있었다. 이제 곧 퇴근 시간대여서 그런지 이전보다 많은 사람이 타고 내리는 게 느껴졌다. 그때였다. 서초역으로 향하던 지하철이 갑자기 고장 난 것처럼 끼이익 소리를 내면서 멈췄다.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면서 한쪽으로 도미노처럼 넘어졌다. 급정거였다. 어두컴컴한 지하 터널 어딘가에서 갑자기 지하철이 서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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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캉 2017-10-22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약물 복용으로 상실감이 큰 주인공이 실의에 빠져살줄 알았는데.. 견뎌내고 최대한 밝게 살려고 하는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