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_희고 고운 손(2)

 

 

마셔봐요.”


남자가 잔을 순이에게 슬며시 밀었다. 순이는 남자를 노려보며 잔을 입에 가져갔다. 순간적으로 어깨가 부르르 떨릴 만큼 달콤하고 상큼한 맛이었다. 몰라보게 달라진 음료가 긴장으로 말라붙은 입안을 촉촉하게 적셨다.


어때요? 맛있죠?”


남자가 빙글빙글 웃었다. 붉은 입술 사이로 하얗고 가지런한 치아가 드러났다.


날 어떻게 압니까?”

콜롬비아 어때요?”


남자가 말을 돌렸다.


전 이 나라가 싫어요. 온 지 두 달 됐는데 아직도 시차적응이 안 됐어요. 가끔 아침인가 싶어서 눈을 뜨면 온 사방이 깜깜하고 조용해요. 게다가 해가 지면 거리에 아무도 없죠. 아는 사람도 없고.”


그럼 남조선으로 돌아가시죠?”


순이가 쏘아붙이자 남자가 피식 웃었다.


거기서 태어나긴 했는데, 영 마음이 가지 않네요.”


나도 같은 신세인데. 순이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남은 음료를 모두 삼키며 마음을 추스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음 보는 남자와 더 나눌 이야기는 없었다.


덕분에 잘 마셨습니다.”


그녀가 등을 돌리려는데 남자가 입을 열었다.


“I-122.”


남자의 입에서 익숙한 코드 넘버가 튀어나왔다.


선체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죠. 순이 씨에게는 뻐꾸기 122’가 더 익숙할까요?”


순이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녀의 손아귀에는 아직 빨대가 들려 있었다.


그 배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으셨죠?”


남자는 다 알고 있다는 투로 말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요.”


순이가 모르는 척 고개를 저었다.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남자가 본론을 끄집어냈다. 순이의 눈에 남자는 훈련받은 요원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 그 배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일까?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순이가 매섭게 고개를 돌렸다. 쟁반을 들고 가게에서 나오던 웨이트리스와 눈이 마주쳤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웨이트리스는 걸음을 멈췄다. 남자를 죽이면 여러모로 골치 아파진다. 남자의 정체가 불분명 하다는 점도 찝찝했다. 순이는 몸을 돌려 말도 없이 걸음을 옮겼다. 일단 남자를 떼어내고 싶었다.


잠깐만요!”


남자는 다급하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순이의 손목을 붙들었다. 그의 손에는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 적의도 느껴지지 않았다. 부드러운 손길이 순이의 피부를 감쌌다.


도와드리려는 겁니다.”


남자는 손을 잡았을 때처럼 부드럽게 순이를 돌려세우더니 손에 명함 한 장을 쥐어주었다.

 

콜롬비아 대한민국 대사관

외무관 장덕진

 

외교관이었어? 순이는 남자를 쳐다봤다. 그의 인상은 어딘지 모르게 기묘한 구석이 있었다. 어떻게 보면 한량 같으면서도 또렷하고 묵직한 두 눈은 신중하고 차분했다.


그 배에서 발견된 여자애들……. 그 불쌍한 애들에 관해서 뭔가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소녀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목구멍에 뭔가 걸린 것처럼 숨이 턱 막혔다. 순이는 자신의 상태를 들키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렸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하게 알아야 순이 씨를 도울 수 있습니다.”

돕긴 뭘 돕습니까?”


순이가 물었다.


일하고 계시죠? 무슨 파파야 농장이라고 하던데……. 머무시는 동안만이라도 종종 뵙고 싶은데요.”


남자는 호의를 보이는 척하면서 제 할 말만 늘어놓았다.


일없습니다.”


순이는 차갑게 돌아섰다. 등 뒤로 덕진의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명함에 제 호출기 번호가 있습니다.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그녀는 명함을 구겨 바닥에 집어 던졌다.



 

순이는 보고타 시내를 쏘다니다가 다시 볼리바르 광장으로 돌아왔다. 약속 시간이 가까워졌다. 곧 에두아르도가 픽업트럭을 몰고 광장으로 올 것이다. 덕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테이블 위에는 순이가 먹던 음료수 잔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그새 웨이트리스가 일을 때려치우기라도 한 것일까? 빈 음료수 잔 옆에는 4000페소가 놓여 있었다. 순이는 그제야 음료 값도 내지 않고 도망치듯 떠났던 것을 기억해냈다.


지폐 아래 뭔가가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지폐를 치우자 아래 깔려 있던 덕진의 명함이 보였다. 그녀가 구겨버린 명함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펴놓았다.


장덕진……. 뭐하는 놈이지……?’


생각은 픽업트럭에 올라탄 후에도 계속됐다. 에스메랄다는 순이 옆에 딱 붙어서 오늘 있었던 일을 재잘거렸다. 옷가게에서 마음에 드는 원피스를 본 이야기, 웬 잘생긴 남자가 자꾸만 추파를 보내더란 이야기. 순이는 그녀의 수다를 한 귀로 흘리면서 장덕진이라는 남자에 대해 생각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의뭉스러운 남자와 엮여서 좋을 일은 없다. 게다가 그녀가 영원히 잊어버리고 싶은 4개월 전 사건을 끄집어낸 남자다. 순이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구겨진 명함을 꺼내들었다.


순이를 태운 트럭은 보고타를 빠져나와 시원하게 뚫린 국도 위를 달리는 중이었다.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냥 밖으로 명함을 집어 던지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손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마음 한구석에 덕진에 대한 호기심이 피어났다. 정말 외교관일까? 어떻게 내가 콜롬비아에 들어와 있는 것을 알았을까? 문득 그의 얼굴과 목덜미, 희고 고운 손이 떠올랐다.


뭐야, 이건? 명함이잖아?”


에스메랄다가 불쑥 손을 뻗어 명함을 빼앗았다. 상념에 젖어 있던 순이가 깜짝 놀라 명함을 도로 가져왔다.


이거 수상한데……. 남자가 준 거 아냐?”


에스메랄다가 순이를 놀렸다. 순이는 얼굴이 벌게진 채 명함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순이는 적어도 덕진의 정체와 목적이 확실해질 때까지는 명함을 버리지 말아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조금이라도 낌새가 이상하면 그때 죽여도 늦지 않다. 그의 손은 순이의 공격을 감당하기에 너무 가냘프고 연약해 보였다.



 




 <슬픈열대>

  7월 14일 출간예정


  [연재 이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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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표: 7월 1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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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소영 2017-08-23 17: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슬픈열대라는 책을 처음 접해보았는데 진짜루ㅠㅠㅠㅜ완전 짱인거 같아요❤내용도 깔끔하고 읽기좋은것같아서 너무 잘 읽고있습니다! 이렇게 출간전에 약간연재하시니까 책 을고를때도 도움이 많이되는것같아요!.❤❤👍👍👍진짜 짱 입니다!👊👊😙

김주은 2017-08-31 23: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슬픈열대....연재를 보니까 제목이 왜 슬픈열대인지 그리고 더 많은 내용들이 궁금해져요~^^❤️😻얼른사탸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