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_희고 고운 손(1)

 

 

시간은 오후 330분을 지나고 있었다. 볼리바르 광장은 한산했다. 시청, 의회, 대법원, 대통령 궁 등 중요한 기관들이 모여 있는 이 광장은 흔히 보고타의 심장이라 불린다. 평일이었다면 바쁘게 오가는 공무원과 직장인들로 가득했을 테지만 오늘은 일요일이었다. 사람들은 성당 미사에 참석하거나, 맛있는 것을 먹고 즐기며 1주일에 단 하루 주어지는 휴일을 즐기고 있을 것이다.


주말에는 일터에 나올 필요가 없다는 점은 순이가 생각하는 자본주의의 장점 중 하나였다. 순이는 멍하니 텅 빈 볼리바르 광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노천카페 맨 안쪽 자리에 앉아 있었다. 볼리바르 광장이 한눈에 내다보이는 곳이었다. 시야 확보와 그것을 위한 자리 선점. 군인으로 10년이 넘는 세월을 보내는 동안 순이의 몸에 자연스럽게 밴 습관이었다.


그녀는 일요일마다 동물농장 식구들과 함께 보고타로 나왔다. 동물농장이 있는 엘 카르멘과 보고타는 차로 한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가깝다면 가까운 거리이지만 두 지역 사이를 오가는 버스는 하루에 서너 대밖에 없었다. 동물농장은 노동자들을 위해 일요일마다 픽업트럭을 운행했다. 운전사는 에두아르도였다. 일종의 직원 복지인 셈이다.


에스메랄다는 일요일을 쇼핑하는 날로 점찍어두었다. 그녀는 순이에게 함께 가자고 집요하게 매달렸지만, 순이는 매번 거절했다. 오늘도 에스메랄다는 다른 동료들과 함께 쇼핑센터로 떠났고 순이는 매주 찾는 이 카페에 왔다.


순이도 한 번 옷가게가 즐비한 거리에 들른 적이 있다. 그녀를 보던 콜롬비아 사람들의 시선이 똑똑히 기억났다. 멸종 위기 동물을 보는 것 같았다. 낯선 피부색에 대한 호기심과 거부감이 뒤섞인 묘한 눈길들. 마치 여긴 무슨 일로 왔느냐고? 언제까지 낯선 남의 나라에 머물 거냐고 묻는 듯했다. 그런 시선을 받을 때마다 순이는 이방인이라는 자신의 위치를 뼈저리게 느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여기가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 아니라는 것을. 극동아시아의 공산주의 국가가 그녀가 있어야 할 곳이라는 것을.

그러나 돌아갈 수 없었다. 그녀는 4개월 전 침몰하는 배와 함께 조국을 떠나보냈다. 그들은 순이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도대체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할까…….’


순이는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는 군인이었다. 한때는 조선인민군 육군에 소속되어 있었고, 지난 몇 년간은 35호실에서 복무했다.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지는 임무를 묵묵히 수행했다. 그게 자신과 가족, 나라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니다. 4개월 전까지는.


이제 그녀는 돈에 팔려 다니는 용병일 뿐이다. 지금도 꼬박꼬박 봉급을 받고 있지만 이 돈을 모아서 뭘 해야 할지, 아니 뭘 하고 싶은지조차 알 수 없었다.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돈이라는 개념조차 낯설었다. 그동안 그녀에게 허락된 돈은 오로지 공작에 필요한 자금뿐이었다.




순이는 눈앞에 놓여 있는 음료를 바라보았다. 직접 번 돈으로 자유롭게 소비한 결과다. 이것조차 낯설었다. 누굴 감시하거나 미행하려고 카페에 온 것도 아닌데, 아무것도 안 마시면 안 되나 하는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고작 몇 페소 하지도 않는 커피 한 잔조차 이렇게 껄끄럽다.


그때였다.


권순이?”


굵고 낮은 남자의 목소리가 순이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순이는 저도 모르게 음료에 꽂힌 빨대를 뽑아들었다. 테이블 아래 손을 숨기고 빨대를 구부려 끝을 날카롭게 만들었다. 심장이 콩닥콩닥 요동치기 시작했다. 권순이라는 이름 석 자. 들어본 지 오래됐다. 그동안 그녀는 집에서는 첫째’, 군에서는 권 소좌’, 이곳에서는 이라고 불렸다. 자신도 잊고 있던 이름 석 자를 누군가가 불렀다.


내 이름을 알고 있는 자. 아마도 나를 죽이러 온 자일 것이다. 발음을 들어보니 한국 놈이다. 조선노동당, 아니면 남한의 안전기획부에서 온 놈이겠지.’


순이는 각오를 단단히 하며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 그 남자가 있었다. 키는 순이보다 머리 하나 정도 훌쩍 컸다. 백지장처럼 하얀 얼굴에 시커멓고 커다란 눈동자가 순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권순이 씨…… 맞죠?”


남자가 소리쳤다. 그는 광장을 가로질러 순이에게 다가왔다. 거리는 충분하다. 여기에서 놈을 제압할 수도, 등을 돌려 달아날 수도 있다. 죽이자. 그렇게 다짐했다. 상대의 소속이 어디든 자신을 죽이러 왔다면 쉽게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도망치는데 성공하더라도 자신을 끝까지 쫓아올 것이다. 그녀는 적이 많았다. 그녀가 35호실에 몸담았을 때 했던 수많은 일들 때문이다.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아십니까?”


순이 맞은편까지 다가온 남자는 그렇게 투덜거렸다. 초면인데 마치 오래 알던 사이처럼 친근한 말투였다. 순이는 남자의 목울대를 노리기로 했다. 이 빨대 끝으로 한 방에 구멍을 낸다. 남자는 피를 쏟아내며 목울대를 움켜쥐겠지. 그때 발목에 차고 있는 단도를 꺼내서……. 순이의 머릿속에서 살인 계획이 차근차근 세워지고 있을 무렵, 그녀의 시선이 남자의 목덜미에 굳은 듯 고정됐다. 가늘고 고운 목선, 툭 튀어나온 둥그런 울대가 이상하리만치 귀여워 보였기 때문이다.


이 판국에 뭐가 귀여워? 미쳤나?’


순이가 자신을 엄중히 꾸짖었다.


므리오 프리오(Mlio Frio).”


남자기 실없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


순이는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남자가 순이 맞은편의 의자를 빼고 천연덕스럽게 엉덩이를 걸쳤다. 순이는 남자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는 그녀가 지금까지 상대한 남자들과 달랐다. 목선만큼이나 얼굴선도 가늘고 갸름했다. 맹해 보이는 두 눈에선 살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되게 쓰지 않던가요?”


남자가 물었다. 그는 테이블 위에 곱게 놓여 있던 티스푼을 집어 들었다. 순이의 몸이 움찔했다. 그녀는 손을 뻗어 남자를 후려치는 대신 그를 유심히 관찰했다. 이 남자가 자신을 죽이러 온 요원인지 아닌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살인을 앞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자는 티스푼을 천천히 저어 음료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것을 수면 위로 떠오르게 만들었다. 그런 다음 지휘봉을 휘두르는 지휘자처럼 티스푼을 골고루 섬세하게 휘둘러 음료를 고루 섞었다. 순이는 그의 손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희고 곱고 가는 다섯 손가락. 자잘한 상처 하나 없는 멀끔한 손등. 여인에게 어울릴 것 같은 손이다. 그동안 순이가 보고 겪어온 남자들의 손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들의 손은 투박하고 무쇠 같았다. 총이나 칼, 삽자루가 더 어울리는 손이었다. 이 남자의 손에는 티스푼이 더 어울려 보였다.

 




 <슬픈열대>

  7월 14일 출간예정


  [연재 이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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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표: 7월 1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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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님 2017-07-14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로운 캐릭터의 등장인건가요? 연재가 계속될 수록 00였고, 조국을 위해 살아왔던 순이가 멀리 떨어진 이국땅에 와(타의와 자의가 합쳐진) 앞으로 어떤 일을 하며 무엇을 배워나갈지 매우 기대가 되요. 다음 연재도, 본 책도 하루 빨리 보고 싶네요

2017-07-18 10: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7-21 01: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7-21 10:5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