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_동물농장(2)

 


 

순이와 에스메랄다는 창고 안으로 들어가 좁은 계단을 올랐다. 닫혀 있던 문을 열자 침대와 작은 탁자, 옷걸이가 전부인 썰렁한 방 풍경이 들여다보였다. 순이는 침대에 소녀를 눕혔다. 소녀는 모기만한 목소리로 신음을 흘렸지만 정신을 차리지는 못했다.


어떻게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 수 있어? 그것도 새파랗게 어린애를…….”


에스메랄다는 젖은 수건으로 소녀의 몸을 닦으며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피가 닦여 나갈 때마다 가려져 있던 크고 작은 상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찢긴 피부 너머로 빨간 생살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


에스메랄다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순이는 불을 붙여주었다. 에스메랄다는 동물농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다. 아침 8시에 출근해 저녁 7시까지 속옷 차림으로 크랙을 작은 비닐봉지에 포장하는 일을 한다. 동물농장의 여자들 중에서 에스메랄다는 젊은 축에 속했다. 대부분 사십을 훌쩍 넘긴 애 엄마들뿐이었다. 에스메랄다는 순이가 동물농장에 들어오자 금세 호기심을 보였다. 그녀가 콜롬비아에서 보기 힘든 동양인이라서가 아니라, 자신과 같은 또래였기 때문이다.


그녀의 유일한 취미이자 특기는 수다였다. 쉬는 시간이면 순이 주변을 배회하면서 자신에 대해 주절거렸다. 좋아하는 음식은 뭔지, 취미는 뭔지, 집에 가면 뭘 하는지, 첫 키스와 첫 섹스는 언제였는지. 천일야화처럼 이어지는 수다를 들으며 순이가 보이는 반응이라고는 ……” “……” “……” “그렇구나……가 전부였다. 성의 없는 반응에도 에스메랄다는 떠들기를 멈추지 않았다.


내가 오빠 얘기를 했나?”


에스메랄다가 물었다. 그 이야기만 세 번째였다. 순이는 지적하는 대신 입을 다물고 묵묵히 에스메랄다의 이야기를 들었다.


오빠를 처음 발견했을 때 꼭 이런 모습이었어. 발 한쪽이 잘려 나간 것만 빼면. 온몸이 칼자국에 피투성이였지.”


그녀의 친오빠는 어느 작은 마약 조직에 몸담았다가 상대 조직에게 습격당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콜롬비아에서는 그리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나도 언젠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게 되겠지? 그 애가 저런 일을 당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을까? 끔찍하지 않니? 이런 나라에서 어떻게 애를 키우겠어.”


에스메랄다가 진한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순이는 이것보다 더 끔찍하게 당한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더러는 순이가 그런 지경으로 만들어놓기도 했다. 그렇지만 자신의 아이가 이런 일을 당할 경우는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순이에게는 결혼도, 출산도 모두 딴 세상 이야기처럼 들렸다. 서른 살이 되도록 그녀의 유일한 인생 목표는 죽지 않고 살아남는 것이었다. 오늘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중요할 뿐, 그녀에게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나 마찬가지였다.

 



몇 시간 후, 해가 저물었다. 창 너머로 퇴근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밤이 찾아오자 온 사방이 고요해졌다. 멀리서 풀벌레 소리만 아련하게 울려 퍼졌다. 순이는 소녀와 단 둘이 다락방에 남았다. 소녀의 호흡은 전보다 한층 더 거칠어졌다. 오늘 밤을 넘기기 힘들어 보였다. 소녀는 순이가 발견했을 때 이미 많은 피를 흘린 상태였다.


어렸을 때, 순이도 소녀처럼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던 때가 있었다. 돼기(홍역의 북한말)에 걸려 며칠간 몸져눕고 물똥을 쌌다. 미음도 토해낼 정도로 속이 뒤집어졌고, 열이 펄펄 끓었다. 그녀의 고향, 평안남도 덕천군의 작은 시골 마을에는 변변한 의원이 없었다. 홍역 같은 돌림병에 걸리면 그저 아이가 잘 버텨내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밤이 오면 어머니는 잠들지 못하고 시름시름 앓는 순이 곁에서 자장가를 불러주곤 했다.


밤은 캄캄 깊어도 잠 잘 자거라…… 백두산에 큰 별님 밝게 웃을 때…… 너를 지켜준단다…….”


이상하게도 그 노래를 듣고 있으면 잠시나마 몸을 가득 채운 열기가 식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순이는 저도 모르게 그 노랫말을 흥얼거렸다. 졸음이 그녀의 눈을 가리고 납덩이 같은 피로가 어깨를 짓눌렀다. 오랜만에 치른 실전이었다. 많이 긴장했던 모양이다. 순이는 스스로 부른 자장가에 취해 까무룩 잠이 들었다.







 <슬픈열대>

  7월 14일 출간예정


  [연재 이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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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표: 7월 1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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