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_동물농장(1)


 

저녁노을에 붉게 물든 평원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트럭은 평원을 가로지르며 이어진 50번 국도를 따라 빠른 속도로 달려갔다. ‘엘 카르멘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고 적힌 푯말이 스쳐 지나갔다. 순이는 사내들과 함께 트럭 짐칸에 앉아 있었다. 에두아르도는 여기까지 오는 내내 말이 없었다. 기절해 있던 그가 깨어났을 때, 상황은 모두 종료되어 있었다. 그는 몇 번이고 토악질을 하면서도 가브리엘의 시신을 수습해 마대 자루에 담았다. 그 마대 자루는 지금 짐칸 구석에 덩그러니 놓인 채, 차의 흔들림에 박자를 맞춰 좌우로 갸우뚱거리고 있었다. 제프는 눈을 감고 뭔가를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아랍어였다. 순이는 열 가지가 넘는 언어를 쓰고, 읽고, 말할 수 있지만 그중에 아랍어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파티하(Fatiha)라는 거야. 코란에 나오는 기도문이지.”


제프가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순이를 의식하며 말했다.


알라께 가브의 영혼을 잘 거둬달라고 기도하고 있었어.”

신을 믿나?”


순이가 물었다. 제프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왜 기도하지?”


순이의 질문에 제프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때는 믿었거든. 그러니까…… 군대 초년병 시절에는 말이야. 그때는 내 동기들도 대부분 신을 믿었어. 우리는 신을 위해 전쟁터에 목숨을 바치는 거라고 믿었지.” 제프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런데 전역할 때쯤 되니 신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더군. 다들 손에 피를 너무 많이 묻힌 후였어. 신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한다는 말이 얼마나 허황된 소리인지 다들 깨달아버렸지.”

그런데 왜 기도하고 있지?”


순이가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글쎄……. 죽은 사람을 위해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혹시 알아? 신이 진짜로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렇다면 내 기도를 듣고 죽은 가브리엘의 영혼을 구원해줄지도 모르지.”


제프가 어깨를 으쓱했다.


순이는 자신의 무릎을 베고 누운 소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소녀는 눈을 감고 한 숨, 한 숨, 힘겹게 내쉬고 있다. 호흡이 이어질 때마다 앙상한 갈비뼈가 위아래로 들썩거린다. 금방 숨이 끊어져도 이상할 게 없을 만큼 위태로워 보인다. 이 소녀도 구원받을 수 있을까?


죽어가는 소녀는 순이로 하여금 그녀가 구하지 못한 수십 명의 소녀들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차가운 바닷물 속에서 하얗게 질려가던 소녀들의 얼굴과 도와달라고 아우성치던 목소리. 지금으로부터 4개월 전에 있었던 일이다. 그날, 정해진 길로 나아가는 듯했던 순이의 운명은 갑자기 노선을 이탈해 난폭하게 방향을 틀었다.


그날, 순이가 탄 군함은 멕시코 시날로아 연안을 지나고 있었다. 배는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하고 차가운 바닷물 속으로 가라앉았다. 배에는 수많은 소녀가 타고 있었다. 소녀들은 바닷물이 머리끝까지 차오른 그 순간에도 순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살려주세요!”


수십 명의 소녀가 동시에 아우성쳤다. 순이는 그녀들을 구해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구하기는커녕 겨우겨우 혼자 살아남았다.


살려달라는 말 때문일까? 몇 시간 전, 오두막에서 소녀를 처음 봤을 때 그날이 생각났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 소녀는 영원히 잊어버리고 싶은 기억들을 다시 떠올리게 만들었다. 누군가 서서히 목을 옥죄는 것처럼 숨이 막혀왔다. 호흡이 가빠지고 이마에 식은땀이 방울방울 맺혔다. 4개월 전의 그 사건을 떠올릴 때마다 찾아오는 증상이다. 병원에 가보진 않았지만 트라우마 증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순이는 눈을 감고 심호흡했다. 평원 저편에서 불어오는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그녀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순이는 흘러가는 바람이 머릿속 어딘가에 각인된 끔찍한 기억들을 함께 가져가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트럭은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샛길을 통해 50번 국도를 빠져나갔다.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를 한참 달려가자 좁은 언덕길이 나타났다. 길의 끄트머리, 그러니까 언덕 맨 위에 유럽의 고성(古城)을 떠올리게 하는 저택이 한 채 서 있었다.


저택은 원을 그리며 이어진 높은 담장으로 가로막혀 있었다. 담장 한가운데는 뻥 뚫려 있고, 문 대신 바리게이트가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바리게이트 양 끄트머리에 소총을 둘러메고 서 있던 경비원들이 트럭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바리게이트 안쪽은 저택의 마당이었다. 말이 마당이지 운동장처럼 넓었다. 마당 오른편에는 거대한 흰색 천막이 여러 개 늘어서 있었다. 드럼통이 여러 개 실려 있는 수레를 인부들이 천막 안으로 부지런히 실어 나르고 있었다.


트럭은 천막 옆에 멈춰 섰다. 순이와 사내들은 짐칸에서 우르르 내렸다. 시동을 끄고 운전석에서 내린 카를로스가 바닥을 내려다보며 소리쳤다.


다 새잖아!”


바닥에는 수레가 굴러 온 궤적을 따라 흰 가루가 길게 늘어뜨려져 있었다. 크랙(Crack). 코카인과 베이킹파우더를 섞어 만든 저비용 고효율의 합성 마약이었다.


코카 잎을 가공해 코카인으로 만들고, 그것을 다시 크랙으로 뻥튀기하는 마약 공장. 그것이 이 저택의 정체였다.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여기를 동물농장이라고 불렀다. 대외적으로는 파파야 농장으로 알려져 있었다. 정부에도 그렇게 등록되어 있다고 했다. 순이는 여기 취직한 이후 식사시간 말고는 파파야를 본 적 없었다.


인부들이 몰려와 땅에 떨어진 마약 가루를 보고 혀를 찼다. 카를로스는 그들에게 드럼통이 제대로 밀봉되어 있는지 다시 확인하라고 지시한 뒤 순이에게 다가왔다.


저 애를 좀 맡아줘야겠어.”


달갑지 않은 부탁이었다. 순이가 카를로스를 삐딱하게 쳐다봤다.


딱 하루만 돌봐줘.”

당장 병원에 데려가야 한다.”


순이가 말했다. 트럭에 오르기 전에도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


보스는 오늘 일이 밖에 새어나가는 걸 원치 않아. 우리랑 거래하는 왕진의사가 있어.”


카를로스는 순이에게 덜컥 아이를 맡기고는 저택 안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순이는 불러 세워서 따질까 하다가 꾹 참았다. 어쨌거나 카를로스는 고용주이고 순이는 피고용자였다. 그녀는 매주 현금으로 지급되는 봉급을 떠올리며 정신을 잃은 소녀를 둘러업었다. 더럽지만 돈으로 맺어지는 갑을 관계에 적응해야 했다. 그녀는 더 이상 공화국의 인민이 아니다. 오갈 데 없는 외국인 노동자일 뿐이다.


순이는 천막을 떠나 저택 왼편에 있는 커다란 창고로 향했다. 창고 지붕에 둥그런 유리창이 보였다. 거기가 순이가 머무는 다락방이었다. 늘씬한 아가씨 하나가 속옷만 걸친 채 창고 앞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이따금 순이의 말동무가 되어주곤 하는 에스메랄다였다. 그녀는 순이를 보고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 무사히 돌아올 줄 알았어.”

좀 도와줘야겠어.”


에스메랄다는 순이의 등에 업힌 소녀를 발견했다

그녀의 입가에서 미소가 지워졌다.







 <슬픈열대>

  7월 14일 출간예정


  [연재 이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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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표: 7월 1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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