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g Fat Cat의 세계에서 제일 간단한 영어책
무코야마 아츠코 외 지음, 은영미 옮김 / 나라원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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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서점에 갔다가 우연히 보게 되었다. 손에 딱 붙는 크기, 보기 좋은 일러스트에 갑자기 사고 싶다는 마음이 동했다. 그리고 마음을 굳힌 것은, 머릿말을 보고 나서였다. 당시 난 영어와 관련한 스트레스를 꽤나 많이 받고 있었다. 취직 시험과 유학 준비 등에 시달리고 있는 건 아니지만, 대학원을 다니면서 계속 원서를 접하게 되었고 매일매일 영어 책을 읽는 것이 꽤 힘들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외국에 나가 공부해야할지도 모른다는 부담감 때문에 아직 시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바심으로 가득차 있었다.

하지만, 그 조바심이 영어를 잘하게 해주는 것은 아니었다. 처음엔 단어 실력이 부족해서 그런가란 생각을 했지만, 계속 공부해가면서 깨닫게 된 것은내가 영어를 '체득'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었다. 국어를 말하고 쓰고 읽고 하는 것과 달리 영어는 공부할 때만 쓰는 언어였다. 그랬기 때문에 나는 서투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난 그걸 열등감으로 확대시켜 부끄러워하고, 심지어는 내 자신을 깎아내리기에 이르렀다. '난 영어를 원래 못해'마음 속으로 언제나 이런 식으로 위로했다.

커다랗고 뚱뚱한 고양이는 나의 이런 열등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해 주었다.
책은 정말 유쾌했고, 책을 들고와서 난 내 방에 틀어박혀 이 책을 꼬물꼬물 읽었다. 앉은 자리에서 마지막 장까지 다 읽고나니, 갑자기 뿌듯한 느낌이 들었다. 덕분에 지금은 온라인 모임 내 리딩반에 들어 공부를 하고 있다. 혼자 원서도 읽고 있고, 7월부턴 영작반에도 참여할 생각이다. 그리고, 책에서 소개된 책들도 차차 읽어보려고 한다. 영어를 잘 하고 싶다. 이젠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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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2 - 사랑의 테마로 읽는 신화의 12가지 열쇠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2
이윤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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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윤기 아저씨가 좋다. 그의 동인문학상 작품이었던 숨은 그림 찾기를 읽고 무작정 좋아하기 시작해서 그분이 쓰신 작품들을 이리저리 찾아 읽고 또 좋아하고.. 그랬다. 그래서 아저씨의 그리스·로마 신화 역시 찾아 읽었다. 예전에 나온 1권은 서점에서 서서 읽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들린 서점에서, 이윤기씨의 새 책이 나왔노라 하기에, 그냥 빨려들듯이 책 속에 들어가 읽어버렸다. 그 때의 경험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2권 역시 춘천에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읽었다. 절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춘천으로 가게 되어 그 사람의 얼굴을 보러간 여행이었다. 그 사람 집에 이 책이 있기에 다음에 돌려주겠다고 약속하고 오는 차안에서 읽었다.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고 책까지 얻어왔으니, 그 여행에서의 수확은 정말 풍성했던 것 같다. 돌아오는 차안에서 나는 어느새 경춘가도가 아닌 그리스의 신전으로 날아가 있었다. 2권에 테마라고 할 수 있는 신들의 사랑 이야기는 너무나도 격렬하고 치열한 것이었다. 오이디푸스의 비극적인 운명의 이야기에선 내 눈마저 뽑혀져 버릴 것만 같았다. 간간히 느껴지는 이윤기 씨의 입담을 듣고 나니, 그에게 최고의 언어술사란 이름이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아마도 오랜 연마 끝에 얻게된 귀한 재능이란 생각이리라.

단단하다고 모두들 여기고 있지만, 필연적으로 깨지고 마는 금기들. 나는 그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아무리 단단한 관념일지라도 언젠가는 깨어지고 부셔지고 다시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하게 되는 그런 모습 말이다. 지금은 어림없이 보이는 사랑의 형태가 예전부터 많이 이야기되어오고, 심지어는 신들이 주인공이 되어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은 적잖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들의 비극 적인 결말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란 느낌도 들었지만, 무언가, 어딘가 내 가슴 한편에는 찜찜한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작가는 아마도 이런 감정을 노렸을지도 모른다.

'내가 가지고 있는 편견은 정당한 것인가' 나 역시 단단한 껍질 속에서 내 자신을 더 딱딱하게 만들고 있는 건 아닌지 반성해 본다. 너무나 뻔하디 뻔한 느낌이긴 하나, 신화를 읽으면서 옛 이야기를 통해 현재의 나를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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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스펜서 존슨 지음, 이영진 옮김 / 진명출판사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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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르치는 학생의 집에서 우연히 이 책을 보게 되었다. 아이가 숙제를 해오지 않은 탓에 한참을 잔소리를 하고, 숙제 해놓으라고 윽박지른 뒤였다. 아이는 의기소침해서 남은 숙제를 하고 있었고, 나는 그 녀석의 책장을 뒤적거리다가 얍상하게 생긴 책을 집어들었다.

너무나 빠르게 변하는 사회를 뒤쫓느라 요즘은 내 자신이 허걱된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쉴새 없이 쏟아지는 책들과 연구 결과, 논문들. 그리고 인터넷에 접속하면 나를 덮쳐버릴 것 같은 많은 정보들. 학문을 시작하겠노라고, 이제부터 열심히 공부하겠노라고 결심한 새내기 대학원생의 생활은 그리 녹녹치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가벼운 질문의 제목으로 시작되는 책인데다가 스르륵 넘겨본 책장 속엔 구멍이 숭숭 뚫린 치즈 그림이 가볍게 그려져 있었다. 1시간 동안 단숨에 읽어버린 그 책은 결국 내 가슴 속에 막힌 부분을 숭숭 뚫어주고 갔다.

인상 깊었던 것은 치즈와 미로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친구들이 토론을 하는 부분이었다. 나는 과연 누구와 닮았을까. 그들의 토론은 내 자신 역시 되돌아보는 기회를 갖게 해주었다. 나 역시 텅 빈 치즈창고에서 이제는 모두 사라져 버린 치즈의 냄새를 뒤쫓는 그런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마치 책을 읽는 과정이 나의 가까운 지인에게서 이야기를 듣고 그리고 그 사람과 이야기하는 느낌이 들어 좋았다.

나의 치즈는 어디에 있을까? 혹시 그 치즈는 예전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건 아닐까? 그런 압박감이 나에게도 역시 큰 부담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설령 치즈가 존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는 찾기 위해 노력할 것이기 때문이다. 열심히 살아보라는 말. 이 책이 나에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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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방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9
최인호 지음 / 민음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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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나는 방에 불을 켜놓지 않으면 잠이 들지 않는 불편한 버릇이 생겼다. 예전부터 가지고 있던 불면증이 확대된 것인지, 어두운 곳에 있으면 괜한 공상거리만 떠오를 뿐, 통 잠이 오질 않는 것이다. 그래서 난 언제나 엎드려 책이나 잡지 등을 뒤적거리다 잠이 들곤 한다. 나에게도 어두운 내 방은 마치 다른 공간과 같이 느껴지는 것이다.

¶ 그는 누구인가.

주인공도 마찬가지로 아내가 없는 자신의 방에 돌아와 불을 켠 잠시, '낯선 곳'과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이러한 자신의 자각 이전에 이미 이웃에게는 이웃이 아닌 타인으로 오해받는다. 그는 열쇠도 가지고 있고 아내도 있는데, 왜, 타인으로 오해받는 것일까. 여기에서 아내는 그와 방의 소유관계를 증명해 줄 수 없었다. 방한용 피륙과 같은 성기를 가진 아내, 아내는 그를 감싸주고 챙겨줄 유일한 존재였다. 그러나 후에 깨닫게 되듯, 아내는 거짓의 편지를 남기고 사라져 버린다. 그가 가진 것은 단지 열쇠뿐이다. 열쇠는 충분히 타인도 지닐 수 있는 것이고, 어쩌면 그는 열쇠주인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이미 그는 타인에게 자신을 이해시킬 수 없었다. 문을 닫는 순간까지 이웃은 그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 방은 무엇인가.

물론 이 소설에는 남자와 도입부의 옆집 사내, 그리고 결말부분의 '아내' 이외에는 등장인물이 없다. (잡다한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 '江'과는 상당히 대조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한가지 중요한 소재가 등장하는데, 그것은 그의 '방'이다.

방은 그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공간이다. 자유롭게 마음껏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공간이란 것이다. 처음에 그는 이곳에서 여러 자유로운 행동을 한다. 붙여놓은 껌을 씹음으로써 아내가 남긴 보잘 것 없는 흔적을 음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자유는 뒤에 역전이 된다. 언제부턴가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듯한 방을 눈초리를 느낀다. 그것이 그를 불안하게 만들다가 결국에는 몸을 굳게 만들고, 어느 사이에 그는 방의 구성물들과 한 몸뚱이가 되어 버린다.

¶ 왜, 그는 방이 되어버렸나.

한가지 주의깊게 읽었던 부분은 그가 방으로 변하는 부분이다. 그는 어느새 부턴과 자신 이외의 존재가 방에 들어와 무언가를 한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그런데 그 존재에 대해 어떤 두려움이나 공포를 가진 것이 아니었다. 호의나 반가움 역시. 그는 이상하게도 '심한 고독감'을 느낀다. 그리고 갖혀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다. 느낀 순간, 방안의 모든 물건이 살아서 꿈틀거리기 시작하고 그는 굳기 시작한다.

작가가 방이라고 상정한 것은 우리 자신의 의지란 생각을 했다. 어느 누구도 증명해 줄 수 없는 나만의 공간이다. 어느새 타인에게 나의 의지, 자아를 의심받는 순간, 동시에 그것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진다. 계속 내가 다스릴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다. 결국 그와 방의 관계는 역전되고 '불을 켜려는', 즉 자신의 자아를 조금이나마 밝혀 보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소멸한다. 이제 그는 자신의 의지를 더 이상 조절할 수 없다. 순간 부활하는 것처럼 느끼지만, 결국에는 방의 구성물로 변할 뿐이다. 남아있던 일말의 가능성, 그를 일깨워 줄 수 있는 존재인 아내 마저 다시 그를 떠난다. 처음의 편지보다 다소 공손하지 않은 쪽지만을 남기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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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동의보감 - 상 소설 동의보감 3
이은성 지음 / 창비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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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1991년도의 일이다. 나는 그때 당시 초등학교 5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나의 담임 선생님은 갓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으로 담임을 맡은 새내기 교사였고 그녀의 젊은 의욕은 우리 어린 마음을 이끌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나의 어린 시절은 당신의 영향을 참으로 많이 받았다.

여름 즈음해서 우리 반 학생들은 부쩍 수업태도가 좋아졌다. 왜냐하면 우리가 선생님 말 잘듣는 착한 어린이로 보내는 날에는, 선생님이 그 노력에 대한 보답으로 '옛날 이야기' 상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소설 동의보감> 이야기 즉, 허준이라는 의원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것을 듣기 위해 우리는 정말 열심히 공부하고 사이좋게 조별활동을 하고 청소도 깨끗이 하는 등 선생님이 예뻐할 일을 했다.

그 91년은 바로 <소설 동의보감>이 나온지 얼마 안된 시기였다. 그 당시 동화책이나 소년소녀 명작소설 등만 읽어왔던 우리들은 사실 어른용으로 나온 그 소설책을 읽기란 힘든 나이였다. 그렇기에 우리 선생님은 저녁 퇴근 후 집에서 소설을 열심히 읽으신 후에 그 이야기를 들려주셨던 것이다.

허준이 유의태에게서 쫓겨나는 이야기를 들으며 어린 우리들은 눈물을 글썽였고 허준이 아픈 사람을 고치는 대목에서는 모두 환호성을 질렀다. 그리고 내의원 시험을 보지 못해 문 앞에서 쫓겨날 때는 우리모두 가슴을 졸이며 안타까워 했다. 이렇게 나의 선생님의 들려주시는 허준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조선시대에 양반과 천민, 적자와 서자의 차별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우리 나라에도 훌륭한 의술이 있었고 백성들을 생각하는 의원들이 많았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훌륭한 스승 밑에는 그에 합당하는 훌륭한 제자가 있고 노력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그에 합당하는 보답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어린 우리들이 어렴풋이 깨닫게 된 허준의 가르침이었다.

내가 중학교에 진학하고 나서 찾아간 선생님에게서 그것이 바로 소설책 이야기였음을 듣게 됐다. 그리고 나서 나는 부리나케 서점에 달려가 소설책을 사들고 왔고 밤새워 책을 읽었다. 활자로 읽은 감동은 띄엄띄엄 걸러서 듣게된 선생님의 이야기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한가지 아쉬웠던 점은 원작자인 이 은성 작가가 작고한 이유로 허준의 이야기가 끝을 맺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가 계획했었다던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이야기 중 겨울이 결국 빛을 못봤다는 그 사실은 너무나 안타깝고 가슴아팠다. 그 때 '신은 왜 그를 데려가셨을까' 하는 원망도 어린 가슴에 나왔으니 그때 아쉬움은 가히 짐작할만 하다. 그렇게 나의 학창시절은 선생님의 이야기, 소설 그리고 그 안에 살아있던 허준과 함께였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대학에 입학한지 어언 3년째에 이르렀다.

너무나 정의로운 허준의 모습은 지금 검어져만 가는 세상사람들, 특히 위정자들의 모습에 비춰볼 때 부럽고 샘나고 심지어는 지금의 세상이 안타깝기만 하다. 특히 그를 길러낸 유의태의 모습을 통해 진정한 스승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됐고, 교육을 공부하는 나에게 있어서 그의 교육자적 모습은 의원으로의 모습보다도 더욱 뚜렷이 각인됐다. 실천자 적인 그의 모습은 앞으로 교육의 본질, 교육의 목적이 무엇인지 실체를 깨닫게 해주는 것 같았다. 허준이 천번을 오가며 현판을 외우는 벌을 받았을 때 스승의 가르침을 마음에 담고 그것을 이겨가는 모습, 아픈 병자를 고치며 스승의 은혜를 생각하는 모습을 볼 때면 바로 교육자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진정한 교사의 모습이 어떠한 것인지를 느끼게 했다. 아무래도 사람의 눈은 자기를 중심으로 보는 것일까. 유의태의 모습을 보면서 가장 많이 느꼈던 부분은 바로 이러한 것이었다.

이는 내 어릴적 허준을 맹목적으로 좋아하던 시절과는 달라진 나의 모습이었다. 대할때마다 새로움을 주는 허준의 이야기. 떠들썩한 드라마보다 나를 더 감동시켰던것은 처음 읽었던 그때의 허준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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