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목소리를 잃었을 때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유디트 바니스텐달 지음, 이원경 옮김 / 미메시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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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제목 : 아버지가 목소리를 잃었을 때
작가 : 유디트 바니스텐달
출판 : 미메시스

가족이 겪는 아픔과 슬픔을 잔잔하면서도 감동 있게 그려낸 그래픽노블. 한 가족의 구성원이 아버지의 죽음을 앞에 두고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는가를 섬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작품이 시작하기 전에 가족 관계도를 보여준다. 이 관계도를 보여주는 작가의 의도는, 이 가족이 어떻게 맺어졌는가를 독자가 미리 알기를 바라는 것이고, 이 작품을 더 깊이 있게 이해하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작품에는 모두 다섯 명의 가족 구성원이 나오지만, 작품에서 자기의 생각을 드러내는 사람은 네 명이다. 루이즈는 너무 어려서 자기 생각을 말할 수 없기 때문에 귀여운 아기로만 등장한다.
주인공 다비드는 1946년생으로, 여행서적 전문 책방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이혼한 전처 율리아와는 연락을 하지 않고 지내지만 둘 사이에서 낳은 미리암과는 가깝게 지낸다. 다비드는 파울라와 재혼해 행복하게 살고 있는데, 나이 차이가 열일곱 살이어서 딸 미리암과 새엄마는 불과 열세 살 차이여서 엄마라기보다는 언니 같은 느낌이다.
미리암은 혼자 아이를 출산하는데, 미리암의 딸 루이즈가 2000년 생인데, 다비드와 파울라의 딸 타마르는 1992년으로 불과 여덟 살 차이나는 이모와 조카 사이가 된다. 미리암과 타마르는 이복 자매면서 열여섯 살 차이가 난다. 이런 가족 관계를 바탕으로, 작품은 네 사람의 시선으로 펼쳐진다. 
다비드는 친구인 의사 조르지 앞에서 자신이 후두암이라는 말을 듣는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아직 어린 딸 타마르였다. 어린 딸을 두고 죽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다비드는 진한 슬픔이 차오른다. 다비드를 위로해 주는 사람은 오래 전 세상을 떠난 유모였다. 유모는 쓰러진 다비드에게 나타나 용기를 주고, 희망을 심장에 넣어준다.

미리암
미리암은 2000년 4월, 베를린 프리드리히스하인에서 혼자 아이를 출산한다. 따뜻한 물이 가득한 욕조에서 루이즈를 낳는다. 미리암의 출산 방식은 한국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데, 산부인과에서 자연분만 또는 제왕절개술로 출산하는 것이 대부분인 것을 보면, 미리암의 자연분만, 그것도 물속에서 아이를 낳는 방식은 특별하면서 아름답게 보인다.
아빠와 새엄마, 이복동생은 모두 미리암이 아기를 낳은 것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아이를 낳고 미리암은 루이의 전화를 받는다. 루이즈의 아빠이기도 한 루이는 미리암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을 때 만났다. 그때 이미 루이는 여자친구가 있었지만 미리암도 사랑한다고 했고, 두 사람은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사랑을 한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사람은 저마다의 사연을 갖고 걷는데, 루이는 목수로 일을 하는데, 나무가 자신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고 했다. 미리암은 보도사진 작가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코소보 전쟁에 종군기자로 갔었다. 

여기서 잠깐, 미리암이 갔던 코소보 전쟁에 관해 간략하게 알아보자. 코소보 전쟁은 내전의 성격이었지만 미군과 나토군이 개입하면서 국제전쟁으로 확산한 전쟁이다. 1998년 2월에 시작해 1999년 6월에 끝난 전쟁으로 알바니아계 준군사조직인 코소보해방군과 유고슬라비아연방공화국 정부군이 상대였다. 코소보는 중세 세르비아 왕국의 발상지로 세르비아 영토였으나 오스만 제국에게 전쟁에서 패하고 오스만 제국의 통치를 받게 된다. 이때부터 무슬림계 알바니아인들이 코소보에 살기 시작하면서 알바니아인 비율이 높아졌고, 1974년 유고의 티토 대통령이 유고연방 내 자치주로 승격했다.
1980년, 티토가 죽고나서 1989년 밀로셰비치 대통령이 세르비아 공화국에서 집권하자 코소보는 세르비아 민족의 성지라는 이유로 코소보의 자치를 박탈한다. 이 조치에 분노한 코소보의 알바니아계 주민들이 분리독립을 주장하고, 1995년 코소보해방군을 결성해 무장투쟁을 시작한다. 
1998년 3월, 코소보해방군이 먼저 지역을 순찰하던 세르비아 경찰을 사살했고, 세르비아가 주세력이었던 유고연방은 정부군을 코소보로 파견해 코소보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미리암은 이 전쟁에 종군기자로 들어갔지만, 아이까지도 잔혹하게 학살하는 장면을 보면서 트라우마가 생겼고, 더 이상 전쟁 사진을 찍지 않게 된다.  
미리암이 루이즈를 낳고 집으로 돌아와 아빠 다비드를 만났을 때,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빠에게 그 말을 듣는 미리암의 손이 떨리고, 자러 들어갔던 타마르도 아버지가 암 선고를 받았다는 말을 듣고 울면서 나온다. 미리암은 새엄마 파울라에게 아버지의 암 이야기를 꺼내지만, 파울라는 미리암에게 화를 낸다. 남편 다비드나 미리암 모두 너무 과묵해서 마음을 나누지 않는 것에 화가 난 것이다. 바싹 마른 아버지의 모습에서 해골이 된 아버지의 환영을 보고, 죽음의 사신과 춤을 추는 꿈을 꾼다.

타마르
타마르는 아빠와 함께 여행을 떠난다. 5일 동안의 여행이지만 옆집 친구 맥스와 헤어지는 건 더 오랜 시간처럼 느껴진다. 타마르의 엄마 파울라는 남편에게 왜 같은 장소로만 여행을 하느냐고 묻지만 다비드는 대답하지 않는다. 아마 지난 5년의 세월이 다비드에게는 가장 소중하고 행복했던 시간이 아니었을까. 그 시기에 지금의 아내 파울라를 만났고, 둘 사이에 타마르가 태어났으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기 그 여행지에서 보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죽음을 앞둔 다비드가 딸 타마르와 단 둘이 그 여행지로 떠나는 것도, 어린 딸에게 추억을 남겨주고 싶은 죽음을 앞둔 아버지의 소박한 소망은 아닐까 생각한다.
호수에 도착해 다비드는 낚시를 하고, 타마르는 수영을 한다. 물속으로 잠수한 타마르는 인어를 만난다. 타마르는 인어에게 멀리서 낚시하고 있는 아빠를 보여주며, 자기를 낳아준 사람이라고, 하지만 곧 죽게 될 거라고 말한다. 타마르는 아빠와 장을 보러 가고, 배를 타고 낚시로 물고기를 낚아 배에서 직접 구워 먹는 소소한 일상을 누린다.
맥스가 쓴 편지를 파울라가 풍선에 묶어 보내면, 호수 여행지에 있는 다비드가 받아서 요트 돛대 기둥에 묶어 놓고 타마르에게 편지가 왔다고 알려준다. 물론 진짜 편지는 우편을 통해서 오지만, 아이들의 꿈을 살려주는 어른들의 다정한 모습을 보는 것도 정겹다.
타마르가 잠든 밤, 다비드는 선착장에 홀로 앉아 유모가 심어준 희망을 조금씩 꺼내보면서 기운을 잃지 않으려 하지만, 어린 딸을 생각하면 암으로 아픈 것보다 더 마음이 아리다.
타마르는 아빠와 둘이 배에서 잠을 자며, 별들이 쏟아질 것같은 하늘을 바라보다 묻는다. '영원하다'가 무슨 뜻이냐고. 세상은 모두 죽는다고, 사랑하는 사람들도 모두. 타마르는 호수의 인어와 인사하고 집으로 돌아와 맥스를 만난다. 비가 많이 내리던 어느 날, 맥스와 놀고 있던 타마르는 아빠가 쓰러지는 소리를 듣는다. 타마르는 작업실에 있던 엄마를 부르고, 구급차에 실려 다비드는 병원 응급실로 실려간다.

파울라
병원에 입원한 다비드의 상태를 보던 파울라는 주치의이자 다비드의 친구인 의사 조르지에게 남편의 상태에 관한 설명을 듣는다. 다비드의 후두암은 이미 온몸으로 퍼져 있었고, 앞으로 남은 기간이 길어야 6개월이라는 말을 듣는다. 
퇴원한 다비드를 돌보며 자기 일-패브릭 디자이너-을 하는 파울라는 헬싱키에서 닷새간 객원 강사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다비드나 옆집 맥스 엄마는 걱정하지 말라며 헬싱키에 다녀오라고 말하지만, 남편이 언제 죽을까 애태우는 파울라는 다비드에게도, 맥스 엄마에게도 화를 낸다. 그는 슬프면 화가 난다고 했다. 다비드가 죽을 거라는 생각만으로도 미쳐버릴 것 같은 파울라는 자신의 감정을 정리하지 못한 채 헬싱키로 떠난다. 그는 호텔에 도착해 호수가 있는 곳으로 산책을 나왔다가 우연히 만난 노인에게 남편이 암으로 죽어가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노인에게서 건강했을 때 남편에게서 맡았던 냄새가 난다고 말한다. 파울라는 다시 집으로 돌아오고, 타마르는 이제 아홉살이 되었다. 파울라가 작업실에서 잠깐 낮잠을 자고 일어났을 때, 가족이 모두 사라졌다. 맥스 엄마는 모두 병원에 갔다고 말한다. 파울라가 병원에 도착해 다비드 병실에 들어섰을 때, 타마르 홀로 아빠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파울라는 다비드의 마지막 순간이 머지 않았음을 직감한다.

다비드
몸 상태가 조금 좋아질 때면 딸 타마르와 놀아주지만 그보다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약에 취해 깊이 잠들거나 통증으로 괴로워한다. 다비드는 이제 헛것을 본다. 딸 미리암이 헤어진 아내 율리아로 보인다. 다비드와 미리암의 대화를 들어보면, 다비드의 전 아내 율리아도 일찍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보인다.
암 종양이 식도를 누르자 조르지는 후두를 제거하는 수술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후두를 제거하고, 말을 할 수 없는 다비드는 종이에 연필로 필담을 한다. 통증으로 몹시 괴로워하는 다비드. 마지막으로 가족 모두를 만나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다비드는 친구 조르지에게 자신의 삶을 끝내달라고 간절하게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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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땀 - 여섯 살 소년의 인생 스케치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데이비드 스몰 지음, 이예원 옮김 / 미메시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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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바늘땀
작가 : 데이비드 스몰
출판 : 미메시스

작가의 자전적 성장 이야기. 여섯 살부터 고등학생이 되어 집을 나올 때까지의 시간에서 중요한 사건을 중심으로 주인공 소년과 가족의 관계를 그리고 있다. 미국 디트로이트에 사는 여섯 살 아이는 작가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데이비드는 방사선과 의사인 아버지 에드와 전업주부 엄마 베티, 형 테드, 넷이 한 식구로 살아가는 평범한 중산층 가정의 막내다. 겉으로 보기에는 무난한 중산층 가족으로 보이지만, 소년의 눈에 보이는 부모의 모습은 정상이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엄마는 웃는 모습이 드물고, 한번 화가 나면 일주일, 한달씩 집안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곤 했다. 아버지는 병원에서 퇴근하면 지하실에 매달아 놓은 샌드백을 두드리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고, 형 테드는 드럼을 치며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다. 막내인 데이비드는 우울한 집안 분위기와 화를 참지 못해 난폭한 행동을 하는 엄마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꾀병을 앓았다.
데이비드는 대개 혼자였으며, 주로 그림을 그리거나 밖에서 혼자 놀거나, '앨리스와 이상한 나라의 마법사'에서 앨리스가 되는 꿈을 꾸며 앨리스 흉내를 내다 동네 아이들에게 게이, 호모, 변태, 기지배라는 놀림을 당하기도 한다. 
봄방학 때, 아버지는 형 테드와 친가로 떠나고, 데이비드는 엄마를 따라 외가를 방문했다. 가족이 이렇게 갈라져서 각자의 부모를 만나러 가는 것도 신기하다. 어린 데이비드는 정확히 몰랐지만, 엄마는 다른 엄마들과 달랐다. 다정다감하지도 않았고, 데이비드를 살뜰하게 보살피지도 않았다. 게다가 외가가 있는 인디애나 남동부까지 가는 동안 엄마는 마치 남의 집안 이야기처럼 당신의 가계에 관해 데이비드에게 이야기를 했다. 그 내용은 겨우 아홉살 아이가 듣기에는 잔인한 내용이었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댄스파티에서 만났다. 두 사람은 사랑했고, 외할머니가 임신하자 결혼하려 했지만 외할아버지의 부모님(증조할머니, 증조할아버지, 머피 부부)은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했다. 결국 두 사람은 집을 나와 집안 소유의 땅에 있는 오두막에서 살았다. 할머니는 아이(데이비드의 엄마)를 낳았지만, 아이의 심장은 오른쪽에 있었다. 
데이비드의 엄마가 열 살 때 외할아버지는 술을 마시고 운전하다 낭떠러지에 떨어져 사망했다. 외할머니와 엄마는 증조할머니의 구박과 핍박이 심해지자 사유지를 떠나 코너스빌로 이사했고, 할머니는 가정부로 일하다 재혼했다. 증조할아버지는 배수관 세정제를 마시고 자살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성대가 타버려 목소리를 잃었다.
시간이 흘러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장례를 치르게 되었을 때, 집안에서 그녀가 훔친 물건이 쏟아져 나왔다. 포목점에 들를 때마다 물건을 훔쳤는데, 포목점에서는 증조할아버지에게 전화했고, 증조할아버지는 곧바로 돈을 지불했다. 
데이비드가 기억하는 집안 어른들의 이야기는 이 작품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어린 데이비드가 엄마를 따라 외가를 방문했을 때, 외할머니는 재혼해 존과 살고 있었다. 존 할아버지는 장의사에서 일했고, 마을 주민들과 잘 어울리는 좋은 사람이었다. 반면 외할머니는 괴팍하고, 폭력적인 행동을 하는 이상한 노인이었다. 데이비드는 엄마에게 할머니가 미친 것 같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엄마는 데이비드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할머니의 태도와 엄마의 태도는 매우 비슷했다.
데이비드가 열한 살이 되었을 때, 집에서 병원 부인회 친목회가 열리곤 했는데, 외과의 남편을 둔 딜런 아주머니가 데이비드의 눈길을 끌었다. 딜런 아주머니가 방문할 때는 늘 우울하던 엄마도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그 무렵, 데이비드의 목에 혹이 생긴 것을 발견하게 된다. 데이비드는 아버지가 일하는 병원에서 목에 생긴 혹을 검사하고, 열네 살에 혹 제거 수술을 받는다. 이 무렵은 데이비드의 아버지도 승진하고 수입도 많아져서 새 차를 구입하고, 집안 가구도 새 것으로 바꾸는 등 데이비드의 부모는 비교적 행복하게 지낸 것으로 보인다.
수술은 간단하다고 했지만, 두 번을 했고, 첫 수술에서는 목소리가 잘 나왔지만, 두 번째 수술을 받고나서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성대의 한쪽과 편도선이 사라진 것이다. 집안 분위기는 여전히 냉랭했고, 가족들은 모래알처럼 따로 놀았으며, 목소리를 잃은 데이비드는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마치 유령같은 존재였다. 그러다 우연히 자기가 받은 혹 제거 수술이 사실은 후두암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 가족 누구도 그 혹이 암이었다고 말하지 않았으며, 수술을 받고 나서도 알려주지 않았다. 데이비드는 살았지만, 어쩌면 후두암으로 죽을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가족들은 여전히 데이비드에게 냉랭했고, 가족들 사이에는 사랑이 없었다.
데이비드는 학교에 가지 않고 극장에서 같은 영화를 여러 번 보며 시간을 보내고, 아버지의 차를 훔쳐타고 도망가다 잡혀서 유치장에 갇히기도 하고, 부모가 기숙학교에 강제로 전학시켰지만 세 번이나 탈출하다 퇴학당했다. 열 다섯 살이 되는 해, 데이비드는 문제 학생이 되어 심리상담을 받게 되는데, 그때 만난 상담 선생님의 말을 들으면서 커다란 충격을 받는다. 그 선생님-헤럴드 데이비드슨-은 데이비드에게 누구도 하지 않았던 말을 한다.
"네 어머니는 너를 사랑하지 않아." 
그 말을 들은 데이비드는 충격을 받고, 그동안 쌓였던 마음의 응어리를 헤럴드 선생에게 풀어 놓는다. 데이비드는 부모에게 '방치형 학대'를 당했던 것이다. 부모의 학대는 자식에게 여러 형태로 드러나는데, 폭력을 쓰지 않는 학대도 있다는 걸 부모도, 아이도 모르는 상태로 지냈던 것이다. 데이비드는 심리상담을 하는 헤럴드 선생을 만나면서 정서적으로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지만, 그의 가족은 서서히 그러나 그동안 쌓였던 불만, 부정, 냉대, 위선이 드러나면서 붕괴하기 시작했다. 
데이비드가 어느 날 집에 도착했을 때, 엄마의 침실에서 그가 좋아했던 딜런 아주머니를 발견한다. 그 장면을 보는 순간, 엄마의 냉랭한 시선과 마주치면서 그동안 겪었던 엄마의 냉대의 근원이 어디에서 시작한 것인지를 느낀다. 뒤 이어 외할머니가 존 할아버지를 지하실에 가두고 집에 불을 질러 주립 정신병원에 끌려가는 일이 발생했다. 결정적으로, 아버지는 데이비드의 목에 암이 생긴 것은 자기 때문이라는 말을 한다. 아버지는 데이비드가 어릴 때 필요 이상으로 방사선을 많이 쬐어 암이 발생한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어쩌면 죄책감을 숨길 수 없었기 때문에 데이비드에게 용서를 구하려고 고백했을 것이지만, 진실은 알 수 없었다.
데이비드는 열여섯 살이 되자 집을 나와 따로 살기 시작했다.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디트로이트 외곽의 폐가에서 지냈는데, 이곳에는 집을 마련하지 못하거나 몰락해서 내몰린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데이비드는 학업과 함께 그림을 열심히 그렸고, 뛰어난 그림 실력으로 예일 예술 대학원에 진학했으며, 뉴욕의 대학에서 그림을 가르쳤다. 그가 마지막으로 엄마를 만난 것은 서른 살이 되던 해, 엄마가 위독하다는 아버지의 전화를 받고서였다. 엄마는 아무 말없이 눈을 감았고, 데이비드도 애달픈 마음이 들지 않았다.

어린 데이비드는 어려서 정서적 학대를 당하며 자랐다. 이걸 알게 된 것은 그가 열 다섯 살, 문제아로 심리상담을 받기 위해 헤럴드 선생님을 만나고 나서였으니 어린 데이비드가 겪었을 심리적 고통을 생각하면 독자의 마음도 먹먹하고 답답해진다. 정서적 학대를 한 사람이 엄마와 아버지 모두 였을 걸로 생각하는데, 특히 엄마는 자신도 어려서 정서적 학대를 당하며 살았기 때문에 이미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상태에서 결혼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데이비드의 외할머니는 결국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할 정도로 상태가 나빠지는데, 외할머니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을 거라고 짐작하는 이유는, 시부모(데이비드의 증조할머니, 증조할아버지)의 구박에 크게 충격을 받은 것이 원인일 수 있다. 그때 외할머니는 임신한 상태였고, 임산부는 평상보다 훨씬 정서적, 육체적으로 민감하고 여린 상태에 놓이게 된다. 따라서 임산부를 더 따뜻하고 안락하게 보호해야 하는 것이 주변 사람들이 할 일이지만, 외할머니의 시부모는 오히려 자식 내외를 거부하고, 구박하며, 못 살게 굴었다. 
그렇게 나쁜 인성을 보였던 증조할머니는 결국 상습적으로 도둑질을 하는 나쁜 버릇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고, 그의 도벽은 역시 그의 집안 환경과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집안 내력에 속된 말로 '나쁜 피'가 흐르고 있다는 의심을 하게 한다. 외가 쪽으로 이렇게 좋지 않은 환경이 이어지면서 데이비드의 엄마, 외할머니, 증조할머니까지 정상의 범위에서 벗어나는 어른들이 보이는 기이한 행동이 어린 데이비드에게 심각한 정서적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데이비드의 엄마는 자신이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아마 오래 전-어쩌면 결혼 전-부터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예전에는 여성이 자신의 성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은 사회적으로 매장 당할 각오를 해야하므로 평범한 여성으로는 결정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데이비드의 엄마 베티는 자신이 레즈비언으로 있을 때-딜런 아주머니와 함께 있을 때-는 '정상'의 인물로 돌아온다. 자신의 성 정체성을 확인할 때는 행복했던 것이다. 베티는 자기가 원하지 않는 삶을 살았기에 남편도, 자식도 모두 관심이 없고 자신의 삶에서 큰 의미를 두지 않았을 수 있다.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았는지, 끝내 몰랐는지 작품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작가는 그 질문을 끝내 하지 않았을 수 있다. 하지만 아버지는 자기 아내가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부부라면 모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부부는 아이를 낳았고,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한 가족, 가정을 이루며 살았다. 베티가 죽은 다음에도 에디는 재혼해서 여든 네 살까지 행복하게 살았다. 
정서적 학대를 당한 아이가 마음의 상처를 극복하고 원만하게 사회생활을 영위하기가 쉽지 않은데, 데이비드는 훌륭한 선생님을 만나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데이비드는 이 작품을 통해 자신의 과거를 다시 들여다보고, 과거의 자신, 과거의 가족을 객관의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당시의 상황과 심리를 이해하고, 부정적 감정을 해소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어려서부터 그림을 그렸다는 것, 그림을 매우 잘 그려서 그것으로 직업을 삼고, 학업을 마치고, 경제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는 것은 커다란 행운이었다. 어려서 정서적 학대를 당한 많은 사람들이 범죄자가 될 확률이 높은 것을 감안할 때, 예술적 재능을 타고난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펴내면서 스스로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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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그림자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시릴 페드로사 지음, 배영란 옮김 / 미메시스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제목 : 세 개의 그림자
작가 : 시릴 페드로사
출판 : 미메시스

피할 수 없는 운명과 맞닥뜨렸으나, 그 운명을 거부해야 하는 사람은 어떤 삶을 살게 될까. 이 작품은 형식적으로는 한 가족의 이야기지만, 신화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평화롭게 살아가는 가족-루이, 리즈, 조아킴-에게 어느 날, 정체를 알 수 없는 세 명이 나타난다. 이들은 가까이 다가오지 않고, 그저 멀리서 가족을 지켜볼 뿐이다. 루이는 성실한 농부로 부지런히 농사 짓고 가족을 지키는 것에 자부심을 갖는 평범한 사람이다. 아내 리즈도 남편과 아이를 위해 음식을 준비하고, 집을 돌보고, 살림을 맡아 하는 살뜰한 여성이다. 좋은 부모를 둔 조아킴은 구김살 없이 나날이 행복하고 즐거운 순간을 보낸다. 평화로운 풍경, 아름다운 자연이 집을 둘러싸고 있어 부족함 없는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이 가족에게 나타난 정체를 알 수 없는 세 명은 누구일까. 루이와 리즈는 그들이 아들 조아킴을 데리러 온 사신이라고 믿는다. 루이는 그들과 정면으로 맞닥뜨려 대결을 펼치고 싶지만 그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리즈는 마을에 사는 주술사를 찾아가 부적을 써 오지만 역시 효험이 없다. 루이가 아들 조아킴을 지키기 위해 마지막으로 선택한 방법은 집을 떠나 죽음의 사신이 쫓아올 수 없는 먼 곳으로 가는 것 뿐이다.
다가올 운명을 피해 길을 떠나는 것은 전형적인 영웅의 서사이기도 하다. 영웅은 운명과 맞닥뜨려 운명과 싸워 이기고 새로운 삶을 개척하기도 하지만, 운명과 맞서 싸워 처절하게 몰락하기도 한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이 닥쳐올 운명을 알고 있다면, 가장 먼저 할 수 있는 방법은 그 운명을 피해 도망하는 것이겠다.
그렇게 루이는 아내 리즈를 집에 남겨둔 채, 아들 조아킴을 데리고 세 개의 그림자를 피해 길을 나선다. 그 길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영원한 길이라는 걸 이들도 알고 있지만 내색하지 않는다. 이들의 아늑한 생활은 세 개의 그림자가 나타나는 순간 깨졌고, 미래는 불안과 두려움이 지배할 것임을 예감한다. 신화적으로 본다면, 루이와 리즈는 인류의 앞선 세대에 해당한다. 이들은 세 개의 그림자 즉, 죽음, 자연, 질병에 맞서 후손의 생존을 지키려는 눈물겨운 투쟁을 떠올리게 한다. 
루이는 지니고 있던 돈을 모두 내놓고 배를 탈 수 있는 탑승권을 구입한다. 재산을 다 내놓고라도 세 개의 그림자로부터 멀리 도망쳐야 하는 절박함이 드러난다. 그 절박함은 곧 조아킴을 지키려는 굳건한 마음이기도 하다. 사흘을 건너야 하는 거대한 호수는 바다처럼 넓어서 비바람이 거세게 불고, 태풍이 몰아친다. 루이는 세 개의 그림자를 따돌렸다고 생각하지만, 배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하고 루이는 살인자로 지목되어 조아킴과 함께 감옥에 갇힌다. 
태풍으로 배가 가라앉고, 루이와 조아킴은 겨우 살아나는데, 두 사람을 구해 준 노인이 있었다. 노인은 두 사람을 극진하게 구명한다. 죽을 고비를 넘긴 루이는 자신이 두려워했던 세 개의 그림자보다, 사랑하는 가족이 서로 떨어져 고생하는 것보다는 함께 보내는 시간이 더 소중하고 행복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루이가 이미 건너온 호수를 다시 되짚어 돌아가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하자, 자신을 구해준 노인은 조아킴을 지킬 수 있는 힘과 능력을 부여하겠다고 제안한다. 루이는 자신의 목숨과 조아킴을 바꿀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노라고 말한다. 노인은 루이의 심장을 꺼내고, 조아킴을 지킬 수 있는 거대한 힘을 부여한다. 이 장면은 신화적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 장면이다. 루이의 심장 즉 '생명'의 상징을 꺼내는 것은 하나의 삶이 끝나는 걸 뜻한다. 루이가 한 명의 개체로서의 영웅이든, 어느 집단을 상징하든 그 집단, 세대, 영웅은 소멸하고, 그가 가진 힘과 권위가 다음 세대를 지키게 된다. 노인은 '절대자'이며, 앞선 세대를 끝내면서 뒤이어 오는 세대가 살아갈 환경을 부여한다. 앞선 세대의 희생에 의해 후손은 살아갈 여지를 만들게 되는 것이다. 
뒤이어 루이와 조아킴을 뒤따라오던 세 개의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들은 악, 재앙, 폭력, 질병과 같은 부정적 존재가 아니라 인간이라면 피해갈 수 없는 시간, 행복, 슬픔 같은 것이어서 그렇게 공포에 떨 만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된다. 루이가 세 개의 그림자 정체를 일찍 알았다면 과연 그렇게 가족과 헤어지면서까지 힘겨운 길을 떠났을까.

심장을 내준 루이는 거대한 불멸의 존재로 변하고, 조아킴을 지키려 안간힘을 쓰지만, 그는 자신의 몸도 지키지 못하고 쓰러진다. 루이는 인류의 역사를 의인화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는 인류가 만드는 역사의 한 가운데를 지나며 전쟁과 폭력으로 점철된 인류의 생존 과정을 드러낸다. 그가 지키고자 했던 조아킴(인류의 후손)은 세 개의 그림자와 함께 떠난다. 결국 인류가 지키려고 했던 소중한 것들은 인류의 힘으로 저지하기에는 불가능한 것임을 알게 된다. 세 개의 그림자가 공포, 두려움, 재앙이든 시간, 행복, 슬픔이든 인류는 그 어떤 것도 막을 수 없다. 결국 루이는 집으로 돌아가 리즈를 만나 두 딸과 함께 행복하게 지내는 환상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루이가 말하는 동양의 격언, '일어서서 버텨라. 그리고 삶이 있는 곳에 머물러라.'는 말은 현실의 삶, 현재의 삶에 충실한 것이 인류 본연의 모습임을 깨닫게 한다.


작가의 주제의식과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도 훌륭하지만, 무엇보다 작가의 그림은 이 이야기를 납득하도록 만드는 힘이 있다.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흔히 사용하는 펜과 잉크가 아니라 붓펜을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도 세필붓으로 매우 가는 선으로 그리고 있는데, 붓선은 펜선보다 부드러우면서 선의 굵기를 자유롭게 그릴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펜선으로는 톤의 느낌을 내기 어려운 반면, 붓선은 선의 강약과 얇고 두꺼움을 통해 짙거나 옅은 선과 면을 그릴 수 있어 톤 효과를 낼 수 있다. 이 작품에서도 붓선은 선의 외곽 뿐아니라 면을 그리는데도 효과적으로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작가가 그리는 선은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이미지를 완벽하게 구현하고 있어 실력이 출중하다는 걸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그가 디즈니에서 애니메이터로 일한 경력만 봐도 실력은 검증이 되었지만, 이야기와 그림이 잘 어울리고 있어서 아무런 이질감을 느끼지 못한다. 여기에 한국어 번역판에서 말풍선 안에 들어가는 대사의 글꼴도 이미지와 잘 어울리는 손글씨 글꼴을 쓰고 있어서 작품의 품질을 높였다. 만약 말풍선 안의 활자를 보통 인쇄체 글꼴로 썼다면 그림과 어울리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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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시릴 페드로사 지음, 배영란 옮김 / 미메시스 / 2014년 10월
평점 :
절판



제목 : 포르투갈
작가 : 시릴 페드로사
출판 : 미메시스

잘 만든 양장본에 두툼한 두께의 이 그래픽 노블은 무엇보다 아름다운 그림만으로도 소장가치가 충분하다. 그래픽 노블의 특징이자 장점인 그림은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다. 내가 그래픽 노블을 선택하는 가장 큰 요소는 그림이다. 내용이 아무리 훌륭해도 그림이 수준 이하라면 보고 싶지 않다. 반대로 내용은 별로인데 그림이 훌륭하다면 그것은 보게 된다. 그렇다면, 그래픽 노블에서 최우선 요소는 역시 그림이다.
지은이는 월트디즈니에서 애니메이터로 일했고, 이후 만화가로 전업하면서 유명한 만화상을 받아 실력을 인정받았다. 이 책만 봐도 말할 필요 없이 최고의 수준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이 책은 모두 삼부작으로 구성되었고, 주인공 시몽 뮈샤는 작가의 분신처럼 보이는 만화가지만 작가 자신의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작가의 자전적 요소가 어느 정도 들어 있고, 삼대로 이어지는 집안의 뿌리를 찾아가는 이야기가 잔잔하면서도 애틋하게 그려지고 있다.

시몽 이야기
주인공 시몽은 만화가로 작품집도 발표한 작가지만 심각한 슬럼프 상태에 있다. 그는 학교에서 임시 교사로 일하고 있는데, 세상 일이 심드렁하고, 삶의 의지도 박약한 상태로 침체되어 있는 상태로 살아간다. 그의 애인 끌레르는 집을 사서 한 곳에 안정적으로 정착하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시몽은 정착할 마음이 없어 갈등을 일으킨다. 시몽은 포르투갈에서 열린 작은 만화축제에 참가한 다음, 포르투갈과 자신의 끈이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프랑스 사람으로 살아왔던 시몽에게 포르투갈에 자신의 친척들이 많이 살고 있다는 사실, 할아버지의 고향이자 뿌리가 포르투갈이라는 사실은 뜻밖의 사실로 다가오고, 마음이 끌리는 걸 느끼게 된다. 그동안 가족들과도 소원하게 지내온 주인공은 사촌의 결혼식을 계기로 프랑스를 벗어나 포르투갈에서 한동안 지낼 생각을 하게 되고, 그동안 만나지 않았던 사촌들을 만나기 시작한다.
모든 일에 의욕도 없고, 미래를 설계하지도 않는 시몽을 보면서 끌레르는 결국 시몽의 곁을 떠난다. 시몽의 태도는 누가 봐도 이해하기 어렵다. 가까이 있는 사람을 사랑하지도 않고, 심지어 자기 자신도 사랑하지 않으면서 끝없이 외로움을 느끼며 정서적, 정신적으로 결핍 상태에 놓어 있으면서 그것을 적극적으로 해결할 의지도 없어 보인다. 그는 심리상담을 하지만, 그것도 진도가 나가지 않아서 상담사도 포기한다. 시몽은 감정, 정서적으로 자기애가 과잉인 상태로 보인다. 자기가 생각하는 '이상'을 찾아 헤매고 있는데,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자신도 모른다. 부모를 잃은 결핍인지, 고향이 없어서 겪는 디아스포라적 삶에 관한 원초적 슬픔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의 존재 자체에 관한 허무 때문인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장의 이야기
장은 시몽의 아버지다. 둘은 서로 다른 도시에서 살고, 자주 만나지 않는다. 형의 딸(조카) 아네스의 결혼식에 가는 걸 두고도 두 사람은 마지막까지 망설이다 결국 참석하기로 한다. 이런 모습은 우리에게 퍽 낯설다. 가족의 결혼식이라면 당연히 참석하는 걸로 생각하는 우리와는 다르게, 이들은 철저히 자기의 삶을 중심에 놓고 생각한다는 걸 볼 수 있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장은 아들 시몽과 함께 조카 아네스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부르고뉴를 찾는다. 사돈댁은 부르고뉴에서 포도농장을 크게 경영하고 있었고, 와인을 생산하는 넉넉한 집안이었다. 결혼식의 하객은 주로 신랑 쪽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신부 쪽은 몇 명에 불과했다. 장은 조카의 결혼식에서 형과 누나를 만난다. 장의 형제들도 각자의 삶을 살아가느라 자주 만날 기회가 없었다. 
장과 그의 누나는 부모님이 장남인 장의 형을 편애했다고 기억한다. 결혼식을 계기로 남매들이 만나서 이야기 할 기회를 갖게 되고, 이들이 계획에 없던 소풍을 나가면서, 돌아오는 길에 차가 고장나고, 비까지 내려 차 안에 갖힌 상태로 오래 전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함께 따라간 시몽은 큰아버지, 고모, 아버지가 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아버지의 시대와 할아버지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 된 이야기를 처음으로 다양하게 들을 기회를 맞는다.
시몽은 끌레르와 헤어지는 것을 인정하고, 두 사람은 차라리 헤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아벨의 이야기
시몽은 아버지의 고향이자 지금도 그의 친척들이 살고 있는 포르투갈로 간다. 그곳에서 사촌의 집에 머물며 의뢰받은 작업도 하고, 할아버지의 고향과 그곳에 살고 있는 친척들을 만나며 천천히 자신의 뿌리에 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사촌이 묵으라고 한 집은 오래 전, 할아버지 아벨과 그의 동생 마뉴엘이 직접 지은 집이었고, 지금도 '무샤' 성을 가진 친척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시몽은 프랑스에서 태어나 자란 프랑스 사람으로, 언어도 프랑스어만 할 줄 알았지만, 자신의 뿌리가 포르투갈이라는 것, 포르투갈어가 낯설지 않다는 걸 느낀다.
할아버지 아벨을 잘 알고 있는 마을의 노인을 찾아 이야기를 듣고, 집앞 텃밭을 가꾸는 아주머니에게서도 할아버지의 동생 마뉴엘에 관해 이야기를 듣다가 그는 결정적인 내용을 알게 된다. '무샤' 집안의 뿌리는 스페인에서 온 무사들이 어린 아이를 마을에 놓고 떠난 사건에서 비롯했으며, 그 이름 모를 아이가 자신을 '무차초'라고 말해서 '무샤'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무샤' 집안의 시작이 된 그 아이는 이름도, 고향도 알 수 없었고, 오직 스페인에서 왔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아벨이 포르투갈을 떠난 것은 1930년대로, 포르투갈이 정치적으로 독재 상황이었고, 경제적으로도 몹시 어려운 시기여서 아벨과 마뉴엘은 먹고 살기 위해 프랑스로 일을 찾아 떠났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고향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벨은 프랑스에 그대로 남고, 동생 마뉴엘만 고향으로 돌아와 이후 고향을 지키며 살게 된 것이다.  

이 작품은 시몽의 일상에서 시작해 점차 가족, 집안의 뿌리로 거슬러 올라가는 점층적 서사를 보이고 있다. 그 과정에서 친절한 설명은 없지만, 등장하는 인물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통해 그들의 관계, 감정, 살고 있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시몽과 그의 아버지를 비롯한 남매들은 자신들이 디아스포라적 삶을 산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자신들의 뿌리가 포르투갈에 있고, 시몽의 할아버지대에 포르투갈에서 프랑스로 이주해 정착했다는 것은 알고 있다. 드물게 프랑스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프랑스인이라고 생각하는 자신들에게도 '호적등본'을 떼야 하는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이 프랑스에서 '외국인' 즉 '타자'로 보이게 되는 상황을 드러내며 복잡한 마음이 된다.
포르투갈은 프랑스에서 멀지 않지만, 중간에 스페인이라는 큰 나라가 있고, 포르투갈은 스페인 옆에 붙어 있는 작은 나라처럼 보인다. 포르투갈도 중세 유럽의 식민지 개척 시기에는 강력한 국가였지만 지금은 유럽에서는 힘이 많이 빠진 중진국이고 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선진국이라는 걸 감안한다면 쇠퇴한 국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라의 여건이야 어떻든 이 만화에서는 포르투갈의 평범한 시민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경제적으로 중진국 수준이지만 이들은 소박하고 낙천적인 성향으로 낯선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고 친절하게 대하고 있는 걸 보여준다. 
주인공 시몽은 자신의 할아버지 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집안의 역사를 알아보는 과정에서, 떨어져 살던 아버지와도 조금은 더 가까워지고,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척들-큰아버지, 작은아버지, 고모, 사촌들과도 쉽게 한 식구처럼 가까워진다. 이런 현상은 포르투갈에 살고 있는 친척들의 따뜻한 환대와 열린 마음, 가족을 소중히 생각하는 그들의 문화 덕분이기도 한데,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프랑스에서 느끼지 못한 따뜻한 분위기가 시몽의 태도와 마음을 바꾸는 계기가 된다.
시몽의 할아버지는 형제가 프랑스로 취업 이민을 위해 고향 포르투갈을 떠났고, 원인을 알 수 없지만 시몽의 할아버지인 아벨은 프랑스에서 사망한다. 아벨의 동생이자 시몽에게는 작은할아버지인 마뉴엘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를 지으며 살게 되었고, 두 집안은 그때부터 조금씩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이 이야기의 마지막 반전은 주인공 집안인 무샤의 집안이 어디에서 시작했는가를 알려주는 전설이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전쟁을 하던 시기에 포르투갈의 한 마을에 스페인 기사들이 찾아오고, 한 아이를 재워달라고 부탁하고 기사들은 떠나간다. 그 아이는 혼자 남게 되고, 그 마을에서 자라 농부가 되는데, 그가 바로 '무샤' 집안의 조상이었던 것이다. 그 사실로만 본다면 '무샤'집안의 뿌리는 스페인에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 마지막 이야기는 퍽 낭만적이고 애틋해서 찡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뒤로 갈수록 더 재미있고 흥미진진하며 감동이 더하는 이 그래픽 노블은 여러 번을 봐도 좋을 만큼 훌륭한 작품이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그림이 더할 나위없이 아름답다. 작가 시릴 페드로사의 그림은 한컷 한컷이 뛰어난 일러스트 작품일 정도로 완성도가 높고 뛰어나다. 작품은 모두 채색이며, 수채화 작업으로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
채색의 특징은 이야기의 구성과 깊은 관련이 있어서, 과거, 회상, 현재, 감정에 따라 채색의 톤을 달리해 이야기의 흐름을 쉽게 구분할 수 있도록 배치했다. 채색의 톤은 약간 어둡게 가라앉아서 차분하고 우울한 느낌이다. 이것은 주인공을 비롯한 등장인물들의 심리 상태를 드러내는 것으로, 이들의 마음을 채색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이 작품이 주로 '과거'를 이야기하고 있어, 탈색된 느낌으로 채색을 한 것은, 과거의 이야기를 이미지로 드러내려는 의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작가는 섬세한 펜선으로 꼼꼼하고 섬세하게 그리고, 그 위에 여러 겹의 채색으로 배경을 입혔다. 
작품에서 시몽과 그의 가족이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사용하고, 포르투갈어를 외국어로 표기한 것은 작가가 의도한 역설이다. 포르투갈에 뿌리를 둔 사람들이 외국인 프랑스에서 태어나 자라 외국어인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것이 어떤 느낌인가를 상대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배치한 것이다. 
한국인을 부모로 둔 사람이 미국에서 태어나 영어를 모국어로 쓰면서, 한국을 방문해 한국어를 들었을 때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모국어와 자신의 정체성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를 이 작품에서도 시몽과 그의 사촌이 나누는 대화에서 볼 수 있다. 이때 개인의 정체성은 물리적 공간(지역)에 있는 것인지, 혈연(핏줄)에 있는 것인지를 철학적으로 고민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작품을 다 읽으면 시몽이 초반에 자신의 정체성과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방황을 이해하게 되지만, 그렇다고 그가 보인 행동을 납득하기는 어렵다. 결국 그는 여자친구와 헤어지게 되는데, 관계의 파탄은 오로지 시몽 자신에게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개인의 삶과 생각을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단지 어떤 행동, 행위의 결과만을 두고 판단할 뿐이다. 시몽이 보였던 행동은 어리석고 멍청하게도 보이지만, 그에게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삶의 경험이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생각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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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들의 감옥
고경숙 지음 / 개미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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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들의 감옥 - 고경숙 소설집

마당의 우편함에서 우편물을 꺼내보니 예상 못한 우편물이 있었다. 책봉투였고, 나에게 책을 보냈다는 사람이 없었으니 의외의 우편물이었다. 꺼내보니 소설집이다. 출판사가 보냈을까, 저자가 직접 보냈을까. 책표지 다음 장에 내 이름을 쓴 저자의 친필과 인장이 찍혀 있었다. 저자께서 직접 보내주신 책이다. 하지만 나는 고경숙 작가를 잘 모른다. 작가 소개를 읽어보니 아뿔사, 임헌영 선생님 사모님이셨다. 존경하는 임헌영 선생님은 문학평론가시니 잘 알고 있었지만, 사모님께서 소설을 여러 편 발표하신 작가라는 걸 몰랐다. 죄송할 따름이다.
문단의 말석에 있는 나에게 책을 보내주신 고마움에 보답하는 길은 오로지 책을 잘 읽는 것이라 생각해서 성심껏 책을 읽었다. 

소설집을 관통하는 주제는 '여성 서사'다. 특히 여성이 사회적 약자, 사회적 소수인 남성가부장제 사회, 남성우월주의 사회에서 성장하는 여성을 다루고 있는 독특한 소설들이다. 여성 작가라면 돌아갈 수 없는 페미니즘에 관한 직접적 언급이 없음에도 이 소설은 깊이 있는 페미니즘을 다루고 있으며, 70년대 이후 한국현대사를 관통하는 사회참여의 확장이 이루어지고 있다.
작품들에는 작가 자신의 삶과 경험, 시간과 지혜가 투사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개인의 운명이 오로지 자신의 선택으로만 이루어질 수 없듯이, 외부에서 들이닥치는 강렬한 경험이 또한 개인을 성장시키기도 한다. 다만 그것은 자발적으로 선택하고 싶지 않은 고통스러운 경험일 때가 많으며, 고난의 시간을 견디는 그 자체가 이미 시대의 역사와 함께 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작가는 원하지 않았지만, 주어진 환경에 굴복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섰다.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불의의 사회에서 개인이 선택해야 하는 양심의 문제가 결코 남의 일이 아닌 것을 깨닫고, 자신이 모르던 세상을 알기 위해 배우는 자세를 갖춘다. 우리가 살았던 과거의 시대는 불의의 시대였다. 독재가 시민을 억압했고, 이념의 틀에 개인을 가뒀다. 독재에 저항한 지식인은 삶이 망가지는 고통을 당했고, 설 자리를 빼앗았다.
지식인이 저항의 당사자로 시대의 기록을 남기는 경우는 적지 않지만, 수십 년의 삶을 지식인의 배우자로 살면서 겪은 참담함과 애통함을 여성 서사로 기록한 작품을 만나는 건 퍽 드문 경우인데, 이 소설집은 그런 점에서 매우 특별하다.
지금 한국에서는 70년대, 80년대의 독재정권과 그에 투쟁했던 역사를 다루는 서사가 부족할 뿐 아니라, 청년들은 특히 모르기도 하지만, 적극 알려 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한때 '운동권 후일담'이 유행했던 시기에 이미 운동권이었던 일부 사람들의 행태에 부정적인 모습이 있었던 것도 한 원인이겠지만, 그때라도 이 작품집처럼 목소리 높이지 않으면서도 사회와 지식인의 불화를 온전하게 다룬 작품이 있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이 늦게 출간된 것은 아쉽지만, 이제라도 세상에 나왔으니 퍽 다행한 일이다.

어머니의 천국 ______ 009

오윤수는 장년의 남성으로 건설업을 하는 중소기업가이기도 하다. 그는 직접 지방 현장에 내려가 진두지휘를 하고 있는데, 아내의 전화를 받는다. 노환이 깊어진 어머니가 곧 돌아가실 듯하다는 내용이었다. 당장 집으로 올라가야 했지만 현장도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어 불안한 마음으로 일을 하다 결국 늦은 밤, 기차를 타고 상경한다.
썰렁한 기차에 앉아 어두운 창밖을 바라보며 윤수는 오래 전 일을 떠올린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윤수는 인민군에 의해 북한으로 끌려갔다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기며 집으로 돌아온다. 텅 빈 서울에서 어머니는 집을 지키고 있었고, 윤수는 어머니의 보살핌으로 겨우 살아났다. 하지만 그의 두 동생 윤태, 윤호는 행방을 알 수 없었다. 인민군에게 잡혀갔는지, 자발적으로 월북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전쟁이 끝나고 윤수는 작은 건설회사를 운영하며 겨우 식솔을 꾸려나가고 있었다.
전쟁 끝나고 30년이 지났을 때, 그에게 충격적인 사건이 닥쳤는데, 정보기관에서 윤수를 호출해 동생들의 행방을 캐물었다. 정작 아무 것도 모르는 윤수는 동생들이 살아있다는 것, 북한에서 남한으로 내려왔을 수 있다는 사실에 오히려 상봉의 기대를 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정보기관도 더 이상 윤수를 괴롭히지 않게 되었을 때, 윤수는 정보기관을 찾아가 동생들 소식을 물었지만, 그들은 어떤 사실도 알려주지 않았다.
어머니는 텔레비전 방송에서 이산가족찾기를 시작하자 생사를 알 수 없는 두 아들의 이름을 크게 쓴 현수막을 만들어 출연했다. 윤수는 처음에 극구 말렸으나 어머니의 깊은 한을 외면할 수 없어 여의도 방송국 앞에서 두 동생의 이름이 쓰인 현수막을 만들고, 어머니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어머니는 임종을 앞두고 여전히 잃어버린 두 자식을 그리워했다. 그들이 북한에 있었다면 남쪽으로 내려오지 말고 차라리 그곳에서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잃어버린 두 아들을 그리워하며 평생을 산 것도 슬프고, 괴롭고, 고통스러웠던 어머니는 정보기관에서 두 아들이 간첩이라고 닥달하는 고통까지 당하며 살았다. 

소설에서 이념 문제나 전쟁의 이야기는 자세히 드러나지 않지만 배경으로 깔려 있다. 한국전쟁은 이데올로기 전쟁이었고,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무수히 많은 사람이 억울하게 죽었다. 이 소설의 단서가 되는 역사적 사실은 고경숙 작가의 남편, 임헌영 선생님의 과거 역사와 닮은 부분이 많다. 임헌영 선생님의 아버님이 한국전쟁 당시 보도연맹원으로 몰려 사형당했고, 형은 실종되었다가 나중에서야 북한에 살고 있다 사망한 사실을 알게 된다.
임헌영 선생님과 가족은 한국전쟁의 직접 피해자이며, 분단으로 인한 이산가족이자 반공이데올로기의 피해자로, 한국현대사의 질곡과 비극을 온몸으로 겪으며 살아온 가족이기도 하다. 고경숙 작가 역시 남편인 임헌영 선생의 사회활동으로 독재정권에서 많은 고통을 받은 분으로, 이런 가족사가 작품의 배경이자 창작의 동기가 되었다.

푸른 배낭을 멘 남자 ______ 031

푸른 배낭을 메고 등산복을 입은 남자는 남편 현우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불쑥 어디론가 사라져 한 달, 두 달 소식이 없을 때가 있었다. 사복을 입은 정보경찰 여럿이 세영의 집을 감시하며 여러 날이 지나도 현우가 돌아오지 않자, 경찰은 세영을 연행해 '서빙고'로 데려간다. 그곳에서 경찰에게 뺨을 맞으며 수모를 당하면서도 남편 현우가 어디 갔는지 알 수 없기에, 사실대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남편의 형이 월북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고, 세영의 삼촌 두 명도 월북했다고 정보경찰은 우겼다.
며칠 뒤, 현우는 경찰에 잡혔고, 세영도 다시 '서빙고'에 끌려가 최조를 당했다. 현우는 간첩사건의 한 사람으로 신문과 방송에 알려졌으나 그렇게 엄청난 사건치고는 우습게도 반년 뒤에 현우는 풀려났다. 감옥에서 풀려난 현우는 마치 다른 사람처럼 다정하고 부드러운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금, 다시 현우는 불쑥 집을 떠났고, 경찰이 들이닥쳤다. 경찰은 현우를 빨갱이라고 비난했으며, 집안을 들쑤셔 쑥대밭을 만들었다. 경찰은 집을 점령하고 주인행세를 했으며, 현우의 행방을 쫓으려 세영의 모든 친인척을 괴롭혔다. 그런 와중에 세영은 씩씩하게 직장(대학 행정실)에 출근했지만 학교에서는 휴가를 쓰라고 배려했다.
신문에서는 '자생공산게릴라'라는 무시무시한 제목으로 검거자, 수배자 명단이 있었다. 현우는 수배자 명단에 있었다. 그렇게 경찰이 집을 점거하고 엿새가 지나서 현우가 세영에게 전화해 자수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비겁하게 숨는 것보다 당당하게 독재정권에 맞서겠다는 말이었다. 그렇게 현우가 집으로 돌아와 경찰에게 잡히고, 세영은 아이들을 앞세워 아버지에게 인사를 시켰다. 잡혀가는 사람은 당당했고, 보내는 사람은 담담했다. 이층에서 내려다보는 어머니의 눈에는 눈물이 흐르리라.

이 소설 역시 작가의 경험이 녹아 있다. 남편인 임헌영 선생은 1974년 '문인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정보기관에 잡혀갔었고, 1979년에는 '남민전 사건'으로 다시 체포되었다. 이 사건은 모두 국군보안사나 정보기관에서 조작한 것으로 나중에 진실이 밝혀졌다.
하지만 이 시기에 시퍼런 독재정권의 폭압으로 수많은 민주시민, 지식인, 학생, 노동자가 억울한 죽음과 감옥에 갇히는 일은 일상이었다. 이 작품은 고통을 당하는 사건의 당사자가 아닌, 그의 배우자가 겪는 고통과 슬픔, 희망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박정희가 군부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이후, 18년 독재를 하는 과정에서 민주주의를 말살하고, 영구집권을 획책한 것에 대해 지금도 박정희를 훌륭한 인물로 여기는 사람이 많은데, 역사의 진실을 모르는 사람은 박정희가 가난한 한국을 일으켰다고 믿는다. 오히려 반독재, 민주주의 투쟁으로 한국을 민주국가로 만든 수많은 사람의 피와 땀과 눈물이 지금의 한국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5박 6일 ______ 065

구치소에 갇혀 있는 남편에게 영치금을 예치하고 직장(대학 행정실)으로 돌아오던 진영은 학교에서 곧바로 정보기관원에게 납치되다시피 끌려와 '서빙고'의 유치장에 갇힌다. 대학은 휴교령이 내렸고, 경찰, 정보기관원이 대학 곳곳에 상주하며 시위하는 학생을 폭행해 체포하고 있었다.
남편이 감옥에 갇히고 직장에서 진영의 위치도 불안한 처지여서 진영은 총장을 찾아가 어떤 자리라도 좋으니 다닐 수 있게만 해달라, 늙은 시어머니와 자식 셋의 목숨이 달렸다고 호소해 겨우 쫓겨나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진영을 취조하러 들어 온 경찰은 시위 학생에 관한 배후로 진영을 꼽았다. 그러면서 직장에서 사표를 내라고 강압했다. 남편은 빨갱이로 이미 감옥에 있고, 진영이 남편에게 빨갱이 교육을 받아 지금 학생들을 선동하고 있다는 것이 경찰의 논리였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에 맞아 죽고, 곧바로 12월 12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일으킨 쿠데타로 나라는 벌집을 쑤신 듯했다. 대학에서는 대학생들이 모두 들고 일어나 시위를 하고 있었고, 진영의 남편은 이미 구속되어 감옥에 있었으나 대학 시위와 관련해 정보기관에서는 대학교수와 행정직원들을 잡아와 사표를 쓰라고 협박하고 있었다.
진영은 말할 수 없는 고초를 당하면서도 끝내 사표는 쓸 수 없다고 버텼다. 이미 구치장에 들어온 수백 명의 교수와 교직원들 거의 모두는 사표를 쓰고 석방되었고, 진영처럼 사표를 쓰지 않겠다고 버티는 사람은 몇 명 없었다. 경찰은 진영의 집을 불법수색해 진영의 일기장을 가져왔고, 진영은 그들의 악행에 의식을 잃을 정도로 분노하며 저항했다. 결국 경찰은 '각서'라는 형태로 경찰이 불러주는대로 진영이 작성한 서류를 받고 석방했다. 쿠데타가 일어나고 몇 달이 지난 1980년 7월 24일부터 29일까지 진영이 겪은 일이었다.

작가의 삶을 거의 그대로 쓴 작품으로, 작가는 이 시기에 숙명여대 행정실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작품에서도 남편이 이미 감옥에 있다고 나오는데, 1979년에 정보기관은 '남민전 사건'을 조작해서 민주인사를 간첩으로 조작 발표했다. 작가는 현실 생활에서도 늙으신 시어머니와 세 자녀를 책임진 가장이었으며, 대학에서도, 정보기관, 경찰에서도 작가가 대학에서 사표를 쓰고 나가도록 위협했다. 
이 작품은 작가의 개인적 경험에 매몰하지 않고, 당시 시대상황, 군부쿠데타 이후 대학에서 벌어진 활화산같은 시위 상황을 내부자의 시선으로 그리고 있다. 대학교수 일부가 보여주는 파렴치하고 야비하며 비겁한 모습도 있고, 이름 없이 사라진 억울한 학생의 이야기도 담겨 있다. 이 작품은 소위 '후일담 소설'이라고 알려진, 한때 운동권의 가장자리에 있던 사람이 쓴 가짜 이야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진솔하고 진실하다.

두 번째 실수 ______ 101

그녀는 3년 전, 성당 앞을 지나다 우연히 '비행청소년 자원봉사 교육프로그램'을 보고 공부를 시작했다. 그녀는 자원봉사로 보호관찰소에 있는 청소년을 상담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병호를 만났다. 병호는 17살고, 중학교 3학년 때 교사 폭행으로 학교에서 퇴학당하고, 어떤 사람의 턱뼈를 부숴서 소년원에서 장기 보호관찰을 선고받았다. 
병호는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지만 그녀가 자기 이야기를 하며 편하게 대하자 자기가 학교에서 선생을 폭행한 이유와 그날의 상황을 자세하게 말한다. 
중학교 교사로 학생을 가르치다 그만두고 그림을 그리며 사는 그녀는 마흔의 나이지만 아직 미혼이다. 그녀는 병호를 만나지 못하고 병호의 여자친구가 일하는 술집을 찾아가 '미수'를 만난다. 병호가 어떤 남자의 턱뼈를 부순 것도 미수를 보호하기 위해서였고, 미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술집에서 일하고 있었다.
미수가 들려주는 병호의 처지는 처참했다. 아버지는 알콜중독자에 엄마는 병이 들어 아프다고 하는데, 아버지가 상습적으로 엄마를 폭행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미수 역시 자의반 타의반 집을 나왔는데, 그의 아버지는 미수를 없는 자식으로 치고, 젊은 여자와 바람을 피운다고 했다. 
그녀는 그녀대로 아픈 과거가 있었다. 사랑하는 남자를 만났고, 임신을 했지만 남자는 아이를 낳기도 전에 죽고 말았다. 아기를 낳았지만 부모의 극렬한 반대로 아기는 어딘가로 입양하고, 그녀는 그런 기억을 지우고 살아가고 있었다.
병호는 분식집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이틀이나 출근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녀는 병호의 집을 찾아갔다. 병호는 아픈 엄마를 간호하고 있었고, 그녀는 병호와 그의 어머니를 위로하고 돌아왔다. 병호에게는 누나가 있었지만 아버지의 폭행과 알콜중독이 싫어서 집을 나간 뒤 연락이 닿지 않고 있었다.
며칠 뒤, 병호가 사는 마을의 파출소에서 그녀에게 전화가 왔다. 가보니 병호가 아버지를 폭행해 소년원에 갔다고 알려주었고, 그녀는 병호를 면회하면서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공부를 계속하라고 말했다. 보호관찰관은 더 이상 병호와 상담하는 것은 그만두고 다른 상담자를 소개하겠다고 알려왔다. 그녀는 상담에 실패한 것일까.

봄바람 부는 날 ______ 131

동생 찬식의 결혼식이 있는 날, 찬옥은 홀어머니에게 지금의 남편 윤서를 소개할 때가 떠오른다. 윤서는 아버지가 월북했다고 솔직하게 말해서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했지만, 찬옥의 집안에서도 이미 동생 찬식이 감옥에서 만난 동기생과 결혼했으며, 삼촌들이 전쟁 때 사라진 것이 자진 월북인지, 납북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이웃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살았던 것을 기억했다. 아버지는 찬옥이 열 여섯 살에 사망했는데, 토목기사로 작은 회사를 운영하며 건실하게 살았지만 그의 두 동생과 일찍 헤어졌다는 것, 아래 동생은 좌익활동을 하다 월북하고, 막내는 붙잡을 수 있었던 기회를 놓친 것이 평생 한이 되었다.
장남 찬호는 아버지의 바람대로 공부를 해서 좋은 직장에 다녔지만 막내 찬식은 대학에서 열렬한 운동권 학생이 되어 감옥에 가게 되었다. 찬식의 어머니도 찬식의 신부가 될 명주를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찬식의 단호한 태도와 형 찬호의 설득으로 두 사람은 결혼식을 진행했다. 하지만 찬식이 명주의 부모님을 만나러 갔을 때는 아예 만나주지도 않았다. 명주는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고, 아버지는 기업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가 세상을 달리 보기시작한 건 고등학생 때 과외선생인 대학생 언니에게서 청계천에서 분신한 노동자 이야기를 들은 이후였다. 명주는 이후 야학을 하며 청계천의 작은 공장에서 일했다. 
찬옥이 사돈이 될 명주의 어머니를 만나 전후 이야기를 들어보니 명주의 집안에서는 할아버지부터 아버지까지 명주가 선택한 삶, 대학도 졸업하지 않고, 가난한 노동자들과 함께 가난하게 사는 것을 선택한 삶에 대해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걸 알았다.
찬식과 명주의 모교 운동장에서 열린 민주결혼식에는 찬옥의 남편 친구들, 찬식의 동지 선후배들로 하객은 넘쳐났다. 명주의 부모님은 끝내 참석하지 않은 채 결혼식이 진행되었고, 한창 길놀이를 하던 때, 명주의 부모님이 도착했다. 

'민주결혼식'은 이제 80년대 풍경이 되었다. 나도 선배의 결혼식에 참석한 적이 있는데, 합정동의 한 수도원에서 열린 그 결혼식은 결혼식장에서 하는 '웨딩'과는 본질에서 달랐다. 이렇게 아름답고 신나는 결혼식을 왜 하지 않고, 마치 공장에서 기계로 찍어내듯 결혼식장을 빌려 뷔페식으로만 하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든다.
열렬한 학생운동을 하던 그 선배는 군대에서 만난 선임이었는데, 전역을 하고 퍽 오랜동안 소식이 끊겼다가 어렵게 만나서 지금도 연락을 하며 지낸다. 한때 운동권에 있었던 사람들 가운데 소수는 정치권으로 진입해 자신의 이념과 가치관을 버리고 출세의 욕망에 눈이 멀어버린 사람도 있지만, 많은 청년들은 시간이 지났어도 여전히 그때의 열정을 간직하고 살아가고 있다고 믿는다.

새가 된 아이 ______ 149

텔레비전에서 과거 다니던 고등학교에서 선생들이 시위하는 장면을 본 나는 12년 전, 고등학교 3학년 때를 떠올린다. 학교 주인은 교장이고 이사장은 교장 부인, 교장의 동생이 이사, 학생주임과 선생 몇이 친족으로 얽힌 사학에서 군대보다 더 심한 검열과 폭력, 억압이 일상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감방 동기가 운영하는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고, 그곳에서 책을 훔치는 택주를 알게 되었다. 같은 학교에 다니던 둘은 여자친구가 없고, 좋아하는 책이 비슷해서 친구가 되었다. 학교에는 비밀독서회가 있었는데, 곽선생이 병가를 내고 임시교사로 온 여선생이 이어서 독서회를 운영했다. 학교에서는 대학진학 외에는 모든 것을 불법으로 단정했기 때문에, 독서회는 자연히 비밀모임이 되었고, 학교가 아닌, 근처 교회에서 열렸다. 그 회원 명단에 인표가 있었다.
학원민주화를 위한 투쟁이 재학생과 졸업생의 주도로 일어났지만 그 시위 과정에서 택주가 선생에게 끌려갔다. 나는 그날 저녁 택주네 집을 찾아가 택주를 만났지만 택주는 일부러 모른 채했다. 강남의 부잣집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나나 택주 같은 아이들은 거지 취급을 당했다. 선생들은 대놓고 학생들을 차별했으며, 부잣집 아이들에게는 아부를 했다. 
학교에서 시위가 있고 사흘이 지나서, 선생이 나에게 지하교련실로 내려가라고 했다. 그곳에는 지난 시위에 참가했거나 그런 혐의를 받는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나는 학생주임에게 폭행을 당하고 자술서를 쓰고 겨우 풀려났지만, 그 다음 날, 다시 악질 선생인 권영두에게 혼자 불려가 다음 날부터 독방에서 취조를 당하게 된다. 나는 아버지에게 사실대로 말하고, 아버지와 함께 학교에 와서 아버지가 항의까지 했지만, 권영두는 비밀독서회에 대해 추궁했다.
택주는 새벽에 찾아와 끝까지 비밀을 지키자고 다짐했지만, 그 다음 날, 학교에서는 다시 나를 불렀고, 나는 택주가 쓴 일기장의 복사본이 그곳에 있는 걸 보고, 택주가 경찰에 잡혔다고 생각하고 교무실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택주 어머니가 있었고, 택주의 일기장은 택주 어머니가 자진해서 학교에 가져온 것이었다.
학교에서는 내가 시위를 주동한 주모자로 낙인 찍었고, 비밀독서회를 지도한 여선생 신정미 선생이나 나의 아버지가 선동했다고 없는 말을 지어냈다. 그리고 다른 학교에 전학이라도 하려면 학교에서 시키는대로 하라는 말에, 나는 오기가 생겨 거칠게 항의했다. 그때 학교에서 학생이 투신했다는 말이 들렸고, 그 현장에서 발견된 사람은 택주였다.

슬픈 청첩장 ______ 187

뜻밖에 인혜의 아들 수민이 결혼한다는 청첩장을 받았다. 어릴 때 둘도 없이 친했던 인혜였지만, 그는 아들의 결혼식에도 부르지 않았다. 중학교 2학년 때, 학교 밖 이층 양옥집은 내 학급 반장의 집이자 도장학사의 집이기도 했다. 반장은 아버지의 위세를 믿고 시건방진 행동을 했는데, 어느 날, 인혜에게 칠판에 한자를 써보라고 놀리다 인혜에게 뺨을 맞는다. 반장은 뺨을 맞고 나뒹굴었고, 히스테리를 일으켰으며, 선생은 인혜에게 반성문을 쓰라고 했다. 나는 저녁까지 기다렸다가 먼저 가겠다고 하자 인혜는 화를 내며 다시는 나와 상종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후 우리는 서먹하게 지냈고, 고등학생이 되어 다시 친하게 지내다 서울로 대학 진학을 하면서 서로 다른 대학을 다녔지만 주말이면 자취방에서 살다시피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인혜는 미국 유학을 가겠다고 했지만 갑자기 결혼을 했고, 나도 비슷한 시기에 결혼했다. 남편들은 우연히 신문기자로 일하고 있었고, 그때 서울 외곽에 언론인을 위한 집단주거지이 생겨 같은 동네에 이웃하며 살았다. 하지만 남편 윤조가 시국사건에 연루되어 회사에서도 강제 해직당하고 투쟁하고 있을 무렵, 인혜는 다른 곳으로 이사하면서 윤조의 행동이 위험하다는 말을 했다.
인혜가 내게 거리를 두는 것이 느껴졌고, 남편이 감옥에 갇힌 뒤 인혜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때 나는 다니던 직장에서 쫓겨나 남편 친구의 도움으로 작은 출판사에서 임시로 일하고 있을 때였다. 인혜는 나에게 윤조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고 비난했다. 그리고 자기의 남편이 나와의 인연을 끊으라고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기가 가난하게 살았어도 지금 대통령 덕분으로 이렇게나마 살게 된 거라고 말했다. 
그 이후 31년 동안 잊고 살았지만 소식을 알 수 있었다. 인혜의 남편도 기자였고, 군사정권을 옹호하던 신문사의 간부가 되어 있었다. 결혼식 전에 전화를 여러 번 해도 닿지 않았지만 나는 결혼식장을 찾아갔다. 인혜를 만날 기대를 했으나 그날 인혜는 없었다. 알아보니 인혜는 암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다고 했다. 병원의 접수계에서 인혜의 이름을 찾았지만 알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다른 병원으로 옮겼을까해서 원무과로 가던 길에 인혜를 쏙 빼닮은 인혜의 딸 수진이를 만났다. 인혜는 방금 숨을 거두었고, 내가 아들의 결혼식을 봐서 다행이라고 했다.

별들의 감옥 ______ 209

승재는 엄마가 자는 틈을 노려 엄마 지갑에서 돈을 빼내다 엄마 순미에게 들킨다. 명서는 아파트 단지에 새벽 신문을 돌리는데, 순미도 신문을 돌리겠다며 고집을 부리고 일을 한다. 명서는 얼마 전, 회사에서 해고당했지만 말을 못하고 있었다. 벌초를 핑계로 아들 승재와 길을 나선 명서는 승재가 엄마 지갑에서 돈을 훔치고, 학교에서도 성적이 하위권이라는 말을 듣고 승재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승재가 부모의 돈을 몰래 훔친 이면에는 친구 종하의 탁구채가 있었다. 부잣집인 종하네는 종하의 형이 탁구를 좋아해 집에 탁구대 일습이 있는데, 종하의 아버지가 일본에서 사 온 비싼 탁구채를 종하가 승재에게 하루 빌려주었고, 비싼 탁구채를 아끼려고 했던 것이 오히려 탁구채를 망가뜨리게 되자, 종하는 승재에게 돈을 갚으라며 폭행까지 했다. 결국 집에서 몰래 돈을 훔쳐 갚기 시작했고, 들켜서 아버지에게 털어놓았다.
승재네는 아버지 명서가 회사에 다닐 때만 해도 중산층은 되었지만, 강남에 살 만큼 부자는 아니었다. 엄마 순미가 승재 교육을 핑계로 무리해서 강남으로 이사했고, 어떻게든 일류대학에 진학하라고 과외까지 시키고 있었다. 
명서가 순미에게 회사에서 해고되었다고 밝히자 당장 승재 교육 문제를 들고 나왔다. 명서는 어차피 명예퇴직은 예상했었고, 이제는 가난하게 살아도 부자들 쫓다가 가랑이 찢어지는 짓을 하지 말자고 말한다. 그때 승재에게 전화가 오고, 종하가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렸다며 엉엉 울었다. 명서와 순미는 승재에게 침착하라고, 곧 도착한다고 말하며 벌떡 일어난다.

악연 ______ 231

서용주를 아느냐고 경찰에게 전화가 왔고, 나는 그와의 인연을 떠올린다. 중학생 때 단짝이었던 용주였다. 둘 다 부모가 일찍 돌아가셨고, 용주는 친척집에서, 나는 오빠집에서 눈칫밥을 먹으며 살았다. 용주는 일찍 서울로 올라와 식모로 일하면서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해 은행에 취직했고, 나는 대학에 진학했다. 하지만 내가 일찍 남자를 만나 결혼한 이후 용주와의 연락을 끊었다. 
용주를 다시 본 건 내가 월세, 전세를 전전하다 단독주택을 장만해 입주하고 동네 마트에 갔을 때였다. 점원과 악다구니를 하며 싸우는 여자가 용주였다. 
남편은 회사에서 승승장구했다. 매일 술을 마시고 들어왔고, 그럴 때마다 주머니에서 두툼한 봉투를 꺼내 은행에 넣으라고 했다. 
나는 용주를 본 이후 용주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했다. 은행에 다닐 때 용주는 두 남자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다. 둘 다 같은 은행 직원이었고, 한 남자는 부잣집, 한 남자는 시골 출신의 촌티가 나는 남자였다. 우연히 아이의 학교 육성회에서 옛날 중고등학생 때 친구를 만났고, 그 친구로부터 용주가 나를 찾는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그 친구에게 전화번호를 알려주었고, 곧바로 용주에게서 전화가 왔다.
용주를 만난 것은 '살롱'이란 곳이었고, 그곳에서 용주는 유명하다는 패션디자이너를 소개했다. 그날 비싼 옷을 맞추고, 용주에게서 투자를 하라는 권유를 받는다. 그러다 패션디자이너가 저녁을 사겠다고 하면서 호텔 레스토랑에서 용주와 셋이 밥을 먹으며 투자를 하라는 패션디자이너와 용주의 말을 믿고 거액을 투자한 나는 처음 몇 달은 쏠쏠한 배당금 수입으로 행복했지만 어느 날, 배당금이 끊겼고, 용주도, 패션디자이너도 연락이 끊겼다. 그 와중에 남편의 회사가 압수수색을 당하고, 남편 영도가 지명수배가 되었다가 경찰에 잡혔다. 남편이 가져다 준 비자금을 내가 모두 사기당했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경찰은 그 사기꾼도 체포했다. 
남편 영도가 출소하고 몇 년이 지나서 갑자기 용주가 집으로 찾아왔다. 용주는 마지막으로 한 번만 도와달라고 했지만 나는 냉정하게 외면했지만, 나중에 용주가 알려 준 주소로 몇 번 송금을 하기는 했다. 용주는 자살했고, 그의 아들은 절도범으로 소년원에 있었다. 나는 그 아이에게 꼭 찾아가겠노라고 말한다.


대법원 판례 ______ 253

용미는 아버지 삼우제를 지내고 가족들 모임에 가는 길이다. 큰오빠는 택배 회사를 차려 돈을 벌고, 둘째 오빠는 박사가 되었고, 막내 용필은 학업을 중단하고 영화를 하겠다고 하다 아버지의 병환 수발을 위해 집으로 들어왔다. 용미는 작은 출판사를 하지만, 입에 풀칠하기도 버겁다. 
가족이 모인 목적은, 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남은 부의금을 어떻게 할 것이냐였다. 아버지는 생전에 자식들에게 재산을 똑같이 나눠주었고, 아내에게도 집과 얼마의 저축도 남겼다. 하지만 의논도 하기 전에 어머니는 마음이 상해서 방으로 들어가고, 형제들끼리 돈의 나눔을 두고 언쟁이 벌어졌다. 그런 와중에 용미의 언니 용화가 대법원 판례를 들어가며 알아서 해결하겠노라고 했고, 다음 날, 은행으로 입금된 돈과 함께 '대법원 판례'를 메일로 보냈다.

그 여름의 귀환 ______ 267

미국에 사는 강희는 딸 승주와 함께 한국에 왔다. 친구 희원이 마중 나왔고, 이들은 자연스럽게 촛불시위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강희가 한국에 온 이유는 죽은 남편의 묘를 파묘해 화장해서 바다에 뿌리기 위함이었다. 
강희, 희원, 주명이 모처럼 식당에 모였다. 이들은 대학 동기로 학생운동을 했고, 주명은 학교교수의 고자질로 경찰에 잡혀 들어가고, 복학생 진우는 주명을 구하려다 오히려 후배들을 모두 경찰에 넘기는 실수를 하고 말았다. 1년 뒤 대부분 석방되었지만 진우는 4년을 더 감옥에 있었고, 감옥에 나와서도 선후배의 비난을 받으며 살았다. 그런 진우를 마지막까지 지킨 건 강희였다. 진우와 강희 사이에 딸 승주가 생겼고, 진우가 사망한 다음, 처가의 도움을 받아 미국으로 이민한 오빠와 어머니가 있는 로스엔젤레스로 이주했다.
셋은 밥을 먹으며 우연히 주명과 진우를 잡아가라고 악다구니하던 교수가 지금 양평의 어느 요양원에 있다는 소식을 이야기했고, 한번 만나보자고 했다. 그들이 요양원을 찾아가 늙은 교수를 만났지만, 그녀는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소리를 질렀다.
셋이 인사동 골목의 음식점에서 술을 마시고 있을 때, 촛불시위에 참석했던 희원의 아들이 전화했다. 시위대에 떠밀려 승주가 다쳤다는 내용이었다. 셋은 병원에 도착해 승주를 보니 다리뼈가 부러졌다고 했다. 한국에서의 휴가는 내내 깁스를 하며 지내야 했다.
미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공항 가는 길, 승주는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에 돌아와 살겠다고 말한다. 강희는 철없는 소리라고 말하지만, 주명의 전화를 받고 자신도 언젠가 한국으로 돌아올 것 같은 예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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