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시시피 버닝 (1disc) - 아웃케이스 없음
알란 파커 감독, 진 해크만 외 출연 / 20세기폭스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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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미시시피 버닝을 보고

 

영화를 통해 사회를 변혁시킬 수는 없지만 사회를 반영하고 비판하여 인간의 이성을 깨어있게 하는 역할은 가능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가 만들어진 이후 100년이 시간이 흐르는 동안 세계의 여러나라에서 만들어진 진보적 영화들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으며 찬사를 받아야 한다.

문학에서 말해지는 거울과 램프의 역할은 영화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많은 영화감독들이 자신의 영화에 정치적 비판의식 이데올로기 그리고 민중의 저항 체제비판에 관한 내용들을 담았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혁명과 계급투쟁을 통한 민중의 승리를 외쳤고 억압받는 제3세계에서는 독재와 착취에 관한 메세지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또한 제국주의적 자본주의에서도 독립영화나 진보영화에서 반자본주의와 인권유린에 관한 내용들이 담겼고 극소수 자본가와 권력자들의 음모를 비판하는 영화가 제작되어 소수의 사람들에게 공유되고 있다.

세계는 여전히 두 개의 커다란 집단으로 나뉘어 있다. 물론 마르크스의 계급론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그렇게 구분하지 않아도 인권, 환경, 빈민, 복지, 노동, 여성, 기아, 마약, 전쟁 등 세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문제들에 관해 비판적 시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진보적 집단과 이런 문제들을 버려두고 권력다툼과 자본의 축적에 눈이 먼 다른 집단의 싸움이 계속되는 것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이러한 사회의 구조 속에서 모순된 현실을 영화로 전달하려는 움직임이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으며 이러한 움직임은 인간의 이성이 탐욕과 파렴치한 행위를 극복하는 하나의 증거로 제시되고 있다. 이 영화 미시시피 버닝도 그러한 영화 가운데 하나이다. 이미 우리에게 잘 알려진 알란 파커 감독은 사회의 모순을 지적하는 일련의 영화작업을 통해 자신의 발언을 하고 있는 작가이다.

이 영화의 주제는 인종차별이다. 인종차별의 문제는 비단 미국이라는 나라에서만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백인과 흑인의 문제만도 아니다. 인종차별은 피부색깔이 다르기 때문에 백인이 다른 색의 피부를 가진 인종을 혐오하는 차원이 아니라 자본가와 권력자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끊임없이 인종차별을 부추기고 강화하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인종차별과 자본주의가 겉으로는 상관관계가 없을 듯 하지만 사실은 가장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자본가와 자본가의 대표인 정치가 또는 국가는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커다란 대립집단의 격렬한 계급투쟁을 막기 위한 여러가지 방법을 고안해 내고 있는데, 제국주의로 전환할수록 그 방법은 세련되고 은유적이 된다. 우리나라에서도 80년부터 새 군부의 독재체제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섹스, 스포츠, 스크린 정책이 그 가운데 하나이다. 초기에 자본가와 권력가의 의도로 구성된 이런 정책들은 시간이 지나면 스스로의 힘을 가지고 움직이게 된다.

인종차별 역시 미국이 가진 200년 이상의 전통 속에서 자리잡은 것이다. 19세기 전까지의 인종차별이 백인들의 무지와 편견, 그리고 악의적인 배타성에 근거한 것이라면 자본주의가 성숙되고 사회의 물질적 조건이 일정한 수준에 달한 20세기에 들어서는 인종차별 정책이 교묘한 조정과 정책에 의해 조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일부에서는 제도()적으로 인종차별 정책을 없애고 있는데 그게 무슨 소리냐고 할 것이다. 물론 제도가 바뀌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러한 변화가 자본가나 정치권력의 자발적인 태도가 아니라 끊임없이 이의를 제기하고 인종차별 정책에 반대하는 내용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흑인들과 소수 양심적인 백인들이 투쟁을 통해 바꾼 것이지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보면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가장 최근까지도 인종분리정책(아파르트헤이트)을 고수하던 백인정권이 왜 흑인과 타협하고 정권을 내놓았는가는 모두 아는 사실이다. 투쟁 앞에서 목숨을 내놓기 싫었기 때문에 정권을 대신 넘겨준 것이다. 미국에서는 여전히 흑인의 수가 백인에 비해 1/3의 수준에 머물고 미국 전체의 부를 1%의 인구가80%의 부를 독식하고 있는 현상과 중산층의 다수가 백인이라는 점에 의해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같은 현상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미국의 정치권력은 미국의 평화 - 자본가와 권력자의 평화 - 를 위해 다수의 백인들과 흑인들의 대립을 적절하게 이용하며 부추길 것이다.

다수의 백인은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지만 자신이 은연중 생각하고 있는 인종차별에 관해서 백인의 우월성을 유지하고 싶은 욕구를 가진다. 이러한 생각이 바로 계급투쟁의 본질을 왜곡하고 희석하고자 하는 자본가와 정치권력의 의도인 것이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지성의 발달로 인종차별이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고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그 시간이 될 때까지 인간은 인종차별이라는 괴물의 껍데기를 쓰고 온갖 야만과 더러운 폭력, 광기를 드러낼 것이다. 20세기인 지금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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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콤X - 비트윈 30종 특별할인
에스엠픽쳐스(비트윈)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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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말콤 엑스를 보고

 

영화 말콤 엑스는 무려 3시간 30분의 상영시간이 말해주듯 할 말이 많은 영화이다. 미국 흑인의 지도자로 널리 알려진 말콤 엑스의 일대기를 그린 이 영화는 그러나 그리 큰 감동을 주지 못하고 있다. 영화를 보는 사람의 주관에 따라 받아들여지는 감동도 천차만별일 것은 당연하겠지만 영화의 보편적 정서는 대게 비슷하다고 볼 때, 이 영화를 보고 감동한 관객이 많지 않음은 이 영화가 시대와 역사적 배경이 다르다는 이유 말고도 다른 이유들이 있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한다.

이 영화의 주인공을 맡은 덴젤 워싱턴은 영화 남과 북에서 남우조연상을 받은 흑인 연기자이다. 그 영화에서 탈출한 노예로, 북군 최초의 흑인부대원으로 등장하는 덴젤의 연기는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말콤 엑스 에서도 그의 연기는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 영화의 성격상 연기의 뛰어남이 관객의 눈에 두드러지게 들어오지는 않았다.

이 영화를 만든 감독 스파이크 리는 흑인 감독이다. 그는 최근에 한국인 이민자들이 등장하는 영화 속에서 한국인을 비하했다고 비판을 받고 있는 감독이기도 하다. 그런 감독이 말콤 엑스를 만들었다는 것이 아이러니이기는 하지만 흑인인 그로서는 흑인의 지도자를 멋지게 그려보고 싶은 충동이 있음은 당연한 일이겠다.

영화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거리의 부랑아였던 말콤이 도둑질을 하다 들켜서 감옥에 가게 되었고, 감옥에서 이스람교의 지도자를 만나 이슬람교를 믿게 되고 흑인의 처지를 깨닫고 흑인의 처지를 개선하기 위한 운동을 전개하다가 암살 당한다는 것이다. 그 사이에 스승의 교파와 갈라지고 백인들의 테러위협에 시달리는 과정들이 등장한다. 말콤이 이집트에서 이슬람에 대한 공부를 더 하면서 그동안 가졌던 인종에 대한 편견을 벗어나 평등과 평화, 자유를 부르짖게 되었다는 부분이 있었으나 그것을 실천하기도 전에 암살을 당하고 만다.

이 영화는 흑인인 한 지도자의 삶이기 이전에 한 인간의 성장과정 면에서도 뜻있는 영화이다.쓰레기 같은 삶에서 주체적이고 이타적인 삶으로 바뀌는 것은 인간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영화의 전편에서 석연치않은 느낌이 자꾸 드는 것은 왜일까. 여러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이 영화가 헐리우드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이 그 하나이다. 미국은 유색인종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매우 심한 곳이다. 겉으로는 아닌척하지만 실제로 인종차별때문에 잠시라도 시비가 끊이지 않는 것이다. 미국인구의 십분의 일인 25백만명의 흑인이 이렇게 차별대우를 당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보다 훨씬 더 적은 소수인종들의 경우는 어떠할까. 흑인들이 검은 것은 아름답다고 부르짖는 것은 자신들의 자존심을 위해서는 바람직할지 모르지만 유색인종의 차별을 근본에 깔고 있는 것이라면 또 하나의 편견만을 부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최근에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벌어진 흑인들의 폭동에서 유색인종인 한국인이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이 그 단적인 예다.

미국내의 흑인은 미국에서 가장 큰 피해를 당하는 인종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근본적인 것은 차별당하는 흑인들의 처지가 아니라 차별을 당하고 있는 흑인들의 의식인 것이다. 흑인들의 사상적, 이데올로기적 토대는 매우 복잡한 경로를 통해 생성되었기 때문에 여기서 간단히 말할 성질은 아니지만, 타의에 의한 억압과 차별의 피해자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보다 시야를 넓게 본다면 흑인들에 대한 동정이 그들을 위하는 길이 아님을 알 것이다.

미국에서 백인들은 400년동안 1억이 넘는 흑인들을 학살하고 노예로 부렸으며 그보다 많은 인디언들을 멸종시켰다. 인디언들은 지금 마치 동물들처럼 수용되어 관광기념물 정도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른바 보호구역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말콤도 말했듯이 백인들은 범죄자이고 학살자이며 강도이다. 그렇다면 악질적인 백인들에 대해 흑인들은 면죄부를 받을 수 있을까. 말콤도 말했다. 흑인들에게도 두 부류가 있다고. 백인에게 봉사해서 아부하며 살아가는 부류와 타협을 거부하고 흑인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부류가 있다. 그런데, 오늘날 이런 부류의 분리가 엄격하게 이루어지고 있는가. 또는 그런 의미가 있는가. 흑인들도 유색인종의 멸종에 한몫을 담당했고 제3세계의 착취와 억압과 독재정권의 수립을 돕는데 한몫을 했다. 흑인들은 미국내에서 백인들의 차별만을 강조하고 피해당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밖의 세계에서 백인들이 하고있는 만행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가.

지금 미국내 흑인지도자들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그야말로 흑인집단이기주의에 다름아니다. 그들은 백인에게 차별당하고 있다는 것을 빌미로 다른 유색인종들을 차별하고 있다. 흑인의 인권을 신장하기 위해 유색인종을 억압하고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흑인들은 어리석고 못배워서 무식하며 판단력이 없고 가난하고 알콜중독자에 마약을 하고 뒷골목에서 싸움질이나 하고 백인여자를 강간이나 하는 쓰레기같은 인종이라고 몰아부치는 것은 백인들의 의도적인 음모이다. 그렇다. 그것은 명백한 이데올로기적 음모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고 그 원인은 바로 그동안 백인들이 저질렀던 모든 분야에서의 차별과 억압의 결과이다. 따라서 그런 음해와 현실역시 백인이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

, 현실적으로 흑인이 모든 분야와 경제적 처지에서 열등한 조건에 있는 것은 백인들이 만든 결과이지만, 그것을 역전시키는 것은 흑인들의 몫이다. 너희들이 이렇게 만들었으니 너희들이 책임을 져라,하고 아무리 떠들어 봐야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흑인들이 비판받아야 하는 것이 바로 이런 점이다. 유색인종들은 흑인들보다 훨씬 늦게 미국에 발을 들여놓았지만 흑인들보다 잘 살고 있다. 이것은 유색인종들이 백인들에게 노예신세가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고, 역사적으로도 주인과 노예, 멸시와 복종의 악연이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스스로의 노력이 더 중요하다고 보아야 한다. 백인사회에서도 유대인들은 돼지취급을 받는다. 유대인들은 어디서나 수난을 당하고 멸시를 받으며 살았다. 그렇지만 오늘날 유대인들은 전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리에 올랐으며 모든 부분에서 탁월한 결과물을 배출하고 있다. 유대인이 백인이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한다면 너무 단순한 논리일 것이다.

미국내에서 복잡한 인종문제는 백인들에 의해 시작되었고 그 비극의 씨앗은 여전히 백인들에게 있지만 그렇다고 백인들이 이 문제를 해결할 능력은 없다. 그들이 하루아침에 인종편견을 없애고 평등과 자유를 흑인들에게 허용한다고 말할 것같은가. 어림없는 소리다. 겉으로는 민주주의를 부르짖으면서도 가장 확고한 자본주의적 계급질서를 옹호하고 유지시키려는 것이 미국의 백인이라고 본다. 그들은 자본가의 안전을 위해서는 그들이 뽑은 대통령도 대낮에 암살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하물며 그깟 검둥이 몇 명 정도는 우습지 않은가.

미국에서 성공한 흑인들은 하나같이 정치적인 인물이 없다. 뉴욕시장인 브레들리 정도가 흑인일 뿐이다. 하원에 약간 명이 있고, 주지사에도 몇 명이 있다. 하지만 그것이 흑인들의 인권을 신장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인권신장이라는 말도 웃기는 말이다. 인간은 똑같지 않으면 짐승과 마찬가지이다. 그야말로 흑백논리이다. 누가 누구에게 조금이라도 차별을 가한다면 그때부터 동등한 인간이란 없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인종이 달라서 벌어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계급의 차별이 그렇고 계급과 인종을 뒤섞은 것이 그렇다. 미국에서는 이 두가지가 모두 해당된다.

마이클 잭슨이 전세계의 톱스타라고는 하지만 그가 수십번의 수술을 하는 엄청난 고생을 하면서 되고자 한 것은 바로 백인의 얼굴이었다. 그는 흑인이면서도 흑인을 거부했던 것이다. 남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이 마이클 잭슨의 공연을 반대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미국 최고의 인기코미디언 빌 코스비나 영화배우 에디머피같은 사람들은 흑인이긴 하지만 흑인이 아니다. 농구선수 매직 죤슨도 그렇고 육상선수 칼 루이스도 그렇다. 그들은 흑인이면서도 흑인이 아니다. 베버리힐즈에 수십만평의 대지에 어마어마한 저택을 지어놓고 완전히 별세계에서 사는 그들이 동족인 흑인들의 고통을 이해하겠는가. 이해할려고 노력이나 하겠는가. 미국은 철저히 개인주의적인 사회라고 한다. 그들은 능력대로 벌고 능력대로 산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어서 노력하면 잘산다는 이데올로기를 주입시킨다. 그래서 몇몇의 성공한 흑인들이 마치 모든 흑인들의 갈길인 것처럼 선전을 해대는 것이다.

미국이 자본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이런 일은 너무나 당연하다. 흑인들은 자신들의 단결에 힘쓰기 보다는 유색인종들이 자신들의 구역에서 돈을 벌어 몽땅 가지고 간다고 불평을 하고 기회만 되면 가게를 약탈한다. 인종의 도덕성도 없고 자존심도 없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흑인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이라는 양키 자본주의의 본질을 보여주는 것이니 그것에 물든 사람이 어디 흑인뿐이겠는가.

하지만 적어도 말콤 엑스같은 영화가 나오기 위해서는 흑인의 자존심과 도덕성에 대한 반성의 소리가 있어야 할 것이다. 흑인이 당하고 있는 억압과 차별에 대해서 전세계 민중에게 호소를 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지금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를 보여줘야 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이 영화가 매우 신중하고 객관적이며 흑인의 처지를 충실하게 보여줄려고 노력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자기 반성없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어보인다. 그런 면에서 오히려 리처드 라이트의 자전적 소설이 나에게는 더 감동으로 와닿는다. 같은 흑인이어도 스파이크 리와 리처드 라이트는 다르다. 흑인들이 먼저 알아야 할 것은, 미국내의 흑인이 가지고 있는 위치와 함께 인종의 국제주의이다. 말콤도 이집트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깨달은 것이 바로 인종의 국제주의이다. 전세계 사람들은 어느 민족, 어느 인종을 막론하고 모두가 평등하고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흑인이 당하고 있는 피해와 역사적 피해의식은 상처가 깊은 것이지만 인디언도 있고 제3세계의 민중들도 흑인들 못지않은 고통을 당했고 당하고 있다. 흑인들만이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처럼 행세한다면 그것은 또다른 인종이기주의를 낳을 뿐이다.

흑인들의 처지를 백번 이해하면서도 인간의 보편적 진리를 먼저 생각하게 되는 것이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계급차별은 있지만 인종차별은 없는 우리나라에서는 미국의 인종차별 실태가 실감있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말콤엑스의 삶을 보기 위해 영화관을 찾는 것은 그가 흑인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완성되어가는 과정을 보기 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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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이름으로 - [할인행사]
다니엘 데이 루이스 감독, 엠마 톰슨 외 출연 / 유니버설픽쳐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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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버지의 이름으로를 보고

 

금년 아카데미 영화상에서 스티븐 스필버그의 쉰들러 리스트 12개 부문에 올라서 7개 부문에서 상을 받았다. 반면, 이 영화는 7개 부문에 올랐으나 2개 부문에서 수상을 했다. 주연인 다니엘 데이 루이스와 아버지역으로 나온 피터 포스톨트웨이트의 남우조연상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이미 베를린 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수상해서 세계적인 인정을 받았다.

나의 왼발로 유명한 짐 쉐리던 감독 작품이고 주인공도 나의 왼발에서 주연을 한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맡았다. 이 영화는 분명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쉰들러 리스트보다 뛰어난 주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영상미학적인 측면에서는 쉰들러 리스트가 앞서 있지만, 사회성이라는 면에서는 이 영화가 더 많은 점수를 받고 있음은 분명하다. 지금도 해결되지 않은 영국과 아일랜드 사이의 지배와 투쟁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다. 북아일랜드인인 주인공 제리 콜론은 그저 평범하고 적당히 세상을 살아가는 젊은이다. 아버지도 직장생활을 하면서 근근히 살아가고 있다. 말썽을 일으키는 아들을 영국 런던에 보냈으나 아들은 돈이 떨어져 빌빌대다가 매춘부의 집을 털어 돈을 만든 다음 집으로 돌아온다. 그 중간에 영국에서 폭탄테러 사건이 일어나는데, 영국 경찰들은 히피들인 제리 콜론과 친구들을 잡아다가 테러범으로 몰아 구속을 시킨다. 증거는 없었지만 강요된 자백만으로 이들은 30년 형을 살게된다.

아버지도 테러지원 혐의로 잡혀들어와 아들과 한방에서 지내게 되는데,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갈등을 느낀다. 하지만 아버지는 끝까지 법정투쟁을 계속하고 아들은 방관만 하는데, 결국 아버지는 감옥에서 숨을 거둔다. 아버지는 살아있으면서 끝까지 아들을 위해 진실이 승리할 것이라고 말한다.

감옥 안에서 진짜 테러리스트를 만나게 되고 자신들이 무죄임을 알게 되었으나 달리 방법이 없이 아버지는 죽고 제리는 자신을 도와주는 변호사를 통해 마침내 자유와 진실을 위해 싸우겠노라고 선언한다. 물론, 변호사의 도움으로 15년을 살았던 그 감옥에서 무죄로 풀려나오게 된다.

이 영화는 1975년에 있었던 실제 사건이었다. 영국의 경찰은 무고한 아일랜드인을 잡아다가 15년 이상을 감옥에서 썩게 했다. 모든 사건을 조작했고, 진범이 잡혔음에도 이를 밝히지 않았다. 오히려 이 사건은 한 변호사의 집념에 의해 간단하게 해결되어 보인다. 물론15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기는 했지만 결정적인 문서 하나로 범죄혐의가 벗겨진 것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문득 1894년에 벌어졌던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이 생각난다. 진실을 밝히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는 우리가 늘 부딪치는 문제이다. 역사를 은폐하고 왜곡하려는 인간들은 권력을 가지고 있거나 기득권을 지키고자 하는 힘있는 쪽들이다.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들의 안정을 위해 역사를 은폐하고 반대파를 학살하고 진실을 왜곡한다.

인간이 인간을 파괴하고 증오하며 적대적이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들이 바로 여기에 있다. 결코 화해하거나 용서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해하고 싶고, 용서하고 싶고, 화해하고 싶은 사람에게 먼저 칼을 들이대고, 총을 쏘고, 고문을 하고, 학살을 하고, 거짓말을 하고, 야비하게 왜곡하고, 비웃고, 속임수를 쓰고, 뻔뻔스럽게 흉물을 떨고, 자신의 잘못을 전혀 뉘우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지구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투쟁들의 모습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약소민족을 깔아뭉개고, 약소 인종을 차별하고 학살하고, 약소국가를 비웃고 협박을 하는 제국주의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흑백인종차별(아파르트헤이트), 영국과 아일랜드의 독립투쟁, 남미의 반독재민주화투쟁, 멕시코의 원주민 민족해방투쟁, 그리고 우리나라의 반미 민주화투쟁, 이런 것들이 모두 하나의 끈을 가지고 있다.

더 많이 빼앗으려는 놈들과 지키려는 사람들의 싸움이며 폭력을 숭배하는 놈들과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싸움이다. 인간을 사랑할줄 모르는 놈들과 인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투쟁이다. 이 싸움은 민족간의 전쟁으로, 인종간의 투쟁으로, 계급투쟁으로, 반제국주의 투쟁으로 그 형태는 모두 다르지만, 정의와 불의의 싸움임에는 틀림없다. 거짓과 진실의 싸움이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계속될지도 모르는 그런 싸움이다. 하지만 계속되는 싸움에서 정의는 한발씩 전진하고 있다. ‘진실의 이름으로, 아버지의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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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티 오브 조이 - [초특가판]
롤랑 조페 감독, 패트릭 스웨이지 외 출연 / (주)다우리 엔터테인먼트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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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CITY OF JOY’를 보고

 

모든 예술이 그러하듯, 예술이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도록 한다. 물론, 이제는 그러한 목적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만들어지는 예술작품이나 창작행위들이 훨씬 많지만, 예술의 탄생이 인간의 소망에서 기원했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예술은 인간의 삶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어떠한 예술이건 그 속에서 인간적인 체취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매우 기쁘고 다행한 일이다. 실제로, 요즘의 예술이란 포스트모더니즘이니 해체니 어쩌구 하면서 형식과 의미를 파괴하고 독선적인 행보를 하는 것이 유행이긴 하지만 인간이 추구해야 할 공통선은 있기 마련이다. 그 가운데서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것은 바로 인간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아닐까. 어찌보면 진부한 주제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인간에 대한 믿음과 사랑은 인간이 존재하는 한 영원한 주제이기도 하다.

이 영화 시티 오브 죠이 역시 인간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그리고 있다. 최근에 국내에서 상영된 영화 가운데 이런 종류의 주제를 다룬 영화들이 몇 편 있었다. ‘한 사람의 힘이 그렇고 사라피나가 그렇다. 사회적 관심과 정의의 실천을 그린 영화들이 대개 이런 범주에 든다고 보는데, 코스타 가브라스의 정치적 영화나 올리버 스톤의 사회성 영화들도 인간의 정의와 실천이 주제가 되고 있다. , 인간의 올바른 삶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 공통점인 것이다.

줄거리를 말하는 것은 번거로울듯 하다. 이 영화에서 가장 거슬리는 것은 역시 제국주의적 시각이었다. 아무리 인간의 평등과 사랑을 그린다고는 하지만, 작품의 바닥에 깔려있는 감독이나 제작자의 제국주의적 시각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음을 충분히 느낄 수 있을만큼 이 영화에는 기분나쁜 그늘이 숨어있는 것이다. ‘맥스로 대표되는 미국의 이미지는 제3세계인 인도의 땅에서 그 위력을 아낌없이 발휘하고 있다. 그러나 예전과는 달리 제국주의의 침략을 옹호하거나 미화하려고 한 흔적은 노골적으로 보이지 않고 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겉으로는 틀림없이 패트린 스웨이지가 맡은 맥스라는 미국인 의사이다. 하지만 그는 주인공일 수 없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 그의 연기력은 매우 평범하고 역할의 비중 또한 그리 무겁지 않았다. 만일 패트릭 스웨이지의 연기력이나 그의 유명세를 생각하고 주인공 역을 맡겼다면 그건 틀림없는 실패이다. 백인 의사역에는 무명의 백인을 아무나 시켜도 되는 그런 역이었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은 인도인 하사리이다. 시골의 빈민인 하사리 가족이 가뭄으로 빚을 지고 도시로 무작정 상경하는 것이 이 영화의 시작이다. 도시빈민이 되어 근근히 살아가는 모습이 마치 70년대의 우리 농촌을 보는듯 하다. 인도의 절대빈곤과 무지 속에서 민중들은 비틀리고 왜곡된 삶을 살아간다. 도시에서 만난 사람들 가운데는 하사리 가족을 궁지에 몰아넣는 사기꾼도 있고 악질 자본가도 있다.

그러나 기쁨의 도시라는 이름은 도시의 변두리에 있는 빈민촌의 이름이다. 아이러니컬한 이름이기는 하지만,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을에 이런 이름이 붙은 까닭을 우리는 영화를 통해서 알게되고 다시한번 인간의 사랑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기쁨의 도시를 지배하는 악질 자본가 가탁을 상대로 벌어지는 빈민들의 권리쟁취과정에서 이 영화는 허구가 아닌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인도의 계급사회는 아직도 유효하고 엄격하기로 이름이 나있다. 그만큼 세습적인 관념과 이데올로기가 단단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인도의 현실이 당장에 모순을 극복할 수 있을만큼 쉽지않음은 분명하지만 인도 민중들의 작은 싸움을 통해서 서로 협력하고 공동체로 살아가야하는 당위성과 필요함을 설득력있게 보여주고 있다.

극적인 구성에 있어서 하사리와 자본가의 아들인 아쇼카의 개인적 대결로 큰 싸움을 마무리하는 것이 못마땅하기는 하지만 극중에 등장하는 나병환자와 빈민들의 협동, 진료소를 중심으로 서로 협력하고 돕는 빈민촌 사람들의 건강한 삶만으로도 관객은 감동을 한다. 오히려 이방인처럼 끼어든 백인들이 이 영화를 어설프게 만들 뿐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하사리가 딸의 결혼지참금을 벌기 위해 온몸을 던져 일을 하는 장면이다. 한 컷, 한 컷이 참으로 아름답게 보여지는 이 하사리의 일하는 모습은 다른 어떤 장면보다도 아름답고 감동적이었다. 아버지로서, 가장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성실한 자세는 한 인간의 고결한 인격으로 표현된다. 힘에 겨운 표정을 감추려고 고개를 돌리는 대목에서는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하사리는 말한다. ‘인생이 왜 이렇게 살기가 힘들까하고. 그렇다. 못배우고 가난한 민중들은 모두 말한다. ‘인생이 왜 이렇게 살기가 힘들까 그러면서도 자신의 몫을 감당하면서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자신들을 짓밟는 악질 자본가 가탁 아쇼카같은 동족의 거머리들에게 피를 빨리면서도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는 그 인내가 어리석기까지 했지만, 한번 분노하면 한꺼번에 모든 것을 뒤엎어버리는 그 엄청난 힘을 민중들은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하사리는 이방인인 백인의 도움도 거절하고 자존심을 지킨다. 물론, 이방인이 모두 적대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이 영화에서는 보여주고 있지만 이 땅을 지키는 것은 결국 이 나라의 민중들임에 틀림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누구의 힘에 의지하기 보다는 어려워도 자신들의 힘으로 지키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하사리의 몸부림은 인도인의 자존심을 지키는 것이라고 보여진다.

이 영화에서는 영웅이 등장하지 않는다. 잘난 사람도 없고 기상천외한 장면도 없다. 정상적인 사람들과 탐욕스럽고 잔인한 인간들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혼자 잘난척 하는 것보다 못났어도 함께 어우러져 공동체로 살아가는 것이 아름다운 삶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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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둘 수는 없습니다 - 조영래변호사 남긴 글 모음
조영래 지음, 조영래변호사를 추모하는 모임 엮음 / 창비 / 199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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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래님의 진실은 감옥에 가두어 둘 수 없습니다를 읽었다.

나는 조영래님을 단 한번도 가까이에서 볼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내가 조영래님을 마음으로 존경하게 된 것은 그가 전태일 평전 -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책을 썼다는 사실을 알고부터였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분들 가운데 아직도 전태일이 누구인지 모르는 분이 있다면 당장 서점으로 가서 위의 책을 구입하라고 권하고 싶다. 

그래서 그 탁월한 문장과 감동깊은 이야기를 읽고 난다면 아마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질 것이다.

조영래님에 대해서 많이 모른다는 사실이 많이 부끄럽기는 하지만 지금이라도 그분의 글을 통해 배우고 느끼는 것이 너무나 많다. 

이 땅의 많은 지성들이 조영래님을 존경하고 그의 업적을 기리고 그의 이른 죽음을 가슴아파하는 지금, 나도 조영래님을 통해 나를 되돌아 본다.

나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  무엇을 위해, 무엇이 되어 살아가고 있는가. 

그러나 시원한 답은 없다.  아니,  더없이 부끄러울 뿐이다. 아직 나이가 있다고 변명을 하지만 그것이 변명이 될 수는 없다.  내가 아닌 다른 많은 사람들의 삶에 관심을 갖고 나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결국 모두가 행복해야 한다는 이 평범한 진리를 몸으로 실천하지 못하는 이상,  조영래님을 존경한다는 사실까지가 부끄러울 뿐이다.  그렇다면 어떡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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