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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들러 리스트 (2disc) - 할인행사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리암 니슨 외 출연 / 유니버설픽쳐스 / 2007년 7월
평점 :
품절
‘쉰들러 리스트’를 보고
아주 오랫만에 특별한 영화를 보았다. 특별하다는 것은 한 가지가 아니고 아주 여러가지 면에서 드러나는 특징을 의미한다. 우선 이 영화는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 헐리우드 영화가 다루던 주제와 거리가 먼 ‘유태인 학살’에 관한 영화였고 이 영화를 만든 사람이 오락영화의 천재인 스티븐 스필버그였으며 영화가 흑백이었다는 점이다. 94년도 아카데미 영화상에 12개 부문이 후보에 올랐을 정도로 격찬을 받고 있는 영화이며 당시의 상황을 객관적이고도 냉정하게 관객에게 보여주고 있다. 런닝타임이 무려 3시간 15분이나 되는 긴 영화임에도 조금도 지루함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주제를 깊이있게 끌어나가고 있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별볼일 없던 독일인이 유태인 차별정책으로 쓰러진 한 그릇공장을 인수하고 유태인 회계사와 함께 돈을 벌었으며 나중에는 유태인 1천1백명의 목숨을 돈과 바꿔서 구해준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실화였으며 소설로 먼저 발간되었다.
유태인 학살을 그린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는 서양에서 많이 제작되었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주목을 받는 것은, 특이한 소재와 영상미학적인 측면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오스카 쉰들러라는 독일인이 남긴 역사적 발자취가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도 커다란 의의가 있었으며 전쟁의 회오리 속에서 한 인간이 어떻게 변해가는가를 살펴보는 것도 흥미진진한 일이다. 또한 영화의 기술적인 측면에서도 흑백의 사용과 영화 중간에 아주 적은 부분에서만 컬러를 사용하여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방법이 동원되어 미학적 측면에서 강한 인상을 남기고 있다.
이 영화의 줄거리를 말하는 것은 지면의 낭비일 것이다. 영화 속에서 독일장교와 독일군들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그 잔인한 학살의 주범으로 아주 당당하고 정면으로 등장한다. 권총과 소총으로 충동적으로 사살을 하는 장면들, 총이 발사되고 사람이 발작을 일으키는 것처럼 쓰러지고, 탄피가 땅에 떨어지는 금속성 소리가 들리고, 바닥을 흥건하게 적시며 검붉은 피가 번져나가는 모습들...
만일 이 영화가 컬러로 만들어졌다면 이만한 영상미학을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영화가 흑백으로 만들어진 이유를 스티븐 스필버그는 “나는 유태인들의 학살을 담고 있는 영화를 흑백으로 밖에 보지 못했다. 책이나 화보 등도 마찬가지, 그래서 나는 그 장면들과 충격들을 흑백으로 담아낼 수 밖에 없었다”라고 말한다. 흑백이라고는 하지만 피가 번져서 흘러내리는 장면에서는 분명 검붉은색으로 느껴졌다.
쉰들러가 사업에 성공을 거두고 잘 나가고 있을때, 유태인 학살이 시작되고 있었다. 승마에서 돌아오는 길에 유태인 게토를 바라보다가 그는 그 학살 장면을 보게 된다. 무수한 사람들이 즉석에서 총살을 당하고 남은 사람들은 개처럼 끌려서 죽음의 수용소로 잡혀가고 있었다. 그때 화면의 가운데에 아주 작은 점으로 빨간 원피스를 입은 한 소녀가 등장한다. 정말 기이한 화면인데, 그 빨간색은 흑백의 화면에서 아주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 소녀는 나중에 유태인을 태우는 소각장에서 다시한번 쉰들러의 눈에 보임으로써 학살의 충격을 확실하게 전달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 학살의 충격으로 쉰들러는 유태인을 살리려는 노력을 시작한다. 자신이 벌어들인 모든 돈을 가지고 독일군 장교들을 매수하여1천1백명의 유태인 명단을 작성한다. 온갖 우여곡절 끝에 이들 모두는 살아난다. 그러나 쉰들러는 전범으로 쫓기는 신세가 되고, 영화는 유태인의 이주로 끝난다.
결국 컬러로 보여주는 부분은 영화의 시작과 마지막 부분에서 약간이다. 그리고 중간에 아주 작은 부분에서 컬러가 등장하며 이것은 영화의 효과를 극대화시키고 있다.
이 영화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는 크게 두 가지이다. 제목에서 밝히듯이 오스카 쉰들러라는 인물의 행적을 쫓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독일군의 만행과 유태인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독일군들이 저지른 유태인 학살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히틀러라는 한 독재자의 힘과 인종차별의식이 가져온 엄청난 결과였다. 인간이 더 이상 인간일 수 없는 그런 야만의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도 존재하고 있다. 그렇게 공공연하게 국가적으로, 대량 학살의 형태는 아닐지 모르지만 분명 남미나 아시아나 미국과 같은 나라에서는 인종차별과 독재와 극우의 폭력으로 무수한 사람들이 학살 당하고 있는 것이다.
독일군의 만행이 치를 떨게 하는 것이라면 유태인의 모습은 가련하고 불쌍한 면과 함께 교활하고 이기적이라는 느낌이 많이 들었다. 그것이 보다 솔직하고 현실적인 모습이어서 이 영화에서 성공하고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유태인들은 자신들을 학살하는 독일군의 만행을 끝까지 믿지 않으려 했고, 동족들이 학살을 당하고 있어도 자신만 살면 된다는 생각으로 수용소로 끌려가는 것을 면할때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했다. 이런 모습은 어쩌면 인간이 처한 한계상황에서는 자연스러운 것인지 모른다. 어쨌거나 생존을 위해 필사적으로 애쓰는 유태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자꾸 두려워졌다.
오스카 쉰들러는 독일인이고 나치당원이며 교활하고 사교성이 많은 사업가이다. 그는 유태인들이 박해받는 것을 이용해서 돈을 벌려고 작정한 사람이다. 그는 유태인 회계사를 포섭하고 유태인이 운영하던 공장을 인수하고 유태인 부자에게서 돈을 받아내 사업을 시작한다. 독일군 장교들을 매수하여 물건을 모두 군대에 납품하면서 돈을 많이 벌게 된다. 그는 독일군 장교들에게 뇌물을 갖다바치고 늘 파티와 여흥으로 독일군 장교들을 매수해 놓는다.
그러던 그가 유태인 학살 장면을 목격하면서부터 달라지기 시작한다. 이 영화의 감독은 그 시점을 바로 빨간색 원피스를 입은 소녀의 등장으로 잡고 있다. 그는 유태인들이 당하는 고통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으며 구체적인 고통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교활한 사업가에 불과했지만 전쟁과 인종차별과 학살이라는 구체적인 사건들을 통해 변해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간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곧장 돈을 챙겨 독일군 사령관을 만난다. 유태인 한 사람당 얼마씩을 쳐서 자신이 사는 것으로 흥정을 한 것이다. 그렇게 산 유태인이 무려 1천1백명. 그는 독일인이고 사업가이고 돈을 벌 목적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다. 그런데 자신이 그동안 번 모든 돈을 털어넣으면서 유태인을 살리겠다는 의지는 과연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이것이 이 영화의 아이러니이다.
우리는 인간의 속성을 다 알지 못한다. 더우기나 극한 상황에서 변하는 인간의 내면을 파악하기란 더욱 어렵다. 쉰들러가 변하는 것은 인간의 내부에 존재하는 ‘인간다움’의 확인일 것이다. 인간이 인간에게 절망하다가도 다시 인간에 의해 희망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이 바로 이런 점 때문일 것이다.
독일군의 만행을 본다면, 인간에 대해 기대할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절망 뿐일 것이다. 인간이,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가 개나 돼지보다도 못하게 전락하는 처참한 상황 속에서 가장 고귀한 인간에 대한 사랑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우리같은 평범한 사람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그 잔학한 학살에 대해서 전쟁이 만들어내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이유와 목적으로도 인간의 학살은 없어야 한다. 만일 민주주의와 정의의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 문민정부에서도 그렇다 - 학살이야말로 가장 악랄한 파시스트의 만행인 것이다.
우리나라도 이런 학살을 경험했다. 이런 처참한 비극을 겪고 나서 또 다시 그런 일을 저지르려는 사악한 기도가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땐 어떡해야 하는가. 이야기가 조금 빗나가지만 지금 미국의 군수자본가들과 극우 군벌들, 보수주의자들이 한국전쟁을 부추기고 있는 상황을 보면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문제이다.
쉰들러는 떠나기 직전에 살아남은 유태인들에게 자신이 더 많은 유태인을 살릴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노라고 자책을 한다. 나는 그가 진심을 말했다고 믿는다. 그는 자신이 결코 영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동족인 독일인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서 아주 적은 부분이라도 속죄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가 평범한 상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유태인이라는 것을 나는 오늘 처음알았지만 또 다시 유태인 문제가 세계적으로 화제를 가져올 것만 같다. 유태인은 전세계 - 거의 유럽과 미국이지만 - 에서 권력과 금력을 가장 확실하게 가진 소수 민족의 하나이다. 그들의 영향력은 매우 대단해서, 세계의 여론을 주도할 정도이다. 이런 영화가 만들어지는 것도 그런 영향력의 하나일 것이다.
유태인이 당한 그 고통스러움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동정과 연민과 아픔을 함께하지만 나는 무조건 유태인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질 수는 없다. 그것은 지금 중동에서 벌어지고 있는 또 다른 만행때문이다. 바로 자신들이 당한 것과 같은 방법으로 또 다른 민족, 팔레스타인을 학살하는 유태인들을 보면서.
모든 유태인들이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니 유태인들이라고 일반화시킬 수는 없지만 이미 국가를 이룬 유태인들은 불과 40년전에 있었던 자신들의 일을 잊어버렸단 말인가? 독일민족에게 당한 그 고통과 아픔을 간직한 채 정직하고 정의롭게 살아간다면 실력이 있는 민족으로써 존경과 사랑을 충분히 받을 만한 민족인 유태인들은 이제 더 이상 동정과 연민을 받는 처지가 아니라 학살자라는 비난과 저주를 받게 되었다. 나는 그들을 결코 좋게보지 않는다. 이제 그들은 학살자이며 저주받을 민족이라고 생각한다.
내 생각이 빨리 바뀌기를 희망한다. 모든 폭력과 학살이 사라지고 민족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이 사라지고 평화롭게 서로 기대며 살아가는 날이 되어야 할 것이다. 세상은 자꾸 이상하게 변해가고 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