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특가판]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 안소니 퀸 외 출연 / PS월드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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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을 보고

영화를 보면서 이렇게 흐느껴 울기는 처음이었다. 나도 모르게 터져나오는 울음을 참을 수 없어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안소니 퀸이 아이스크림을 사먹으며 길을 걷다가 귀에 익은 노래소리를 따라 주위를 둘러보다 한 아낙을 부른다.

그 노래를 어떻게 알게 되었수?”

이곳에 살던 어떤 아가씨가 부르던 노래였어요. 트럼펫을 어찌나 잘 불던지 나도 모르게 배웠지요.”

그 아가씨는 지금 없수?”

벌써 4-5년 전에 죽었는걸요. 정신도 이상했고 몸도 많이 아팠어요. 날마다 이 노래를 불렀지요. 어디에 사느냐고 물어도 대답은 않고 그저 조용히 웃기만 했어요.”

이 대목에서 나는 정말 미칠 것만 같았다. 안소니 퀸은 모르는 체 하고 그저 발길을 돌리고 있었지만 나는 젤소미나가 불쌍해서, 너무나 불쌍하고 안타까와서 눈물을 줄줄 흘리며 울었다. 거의 통곡에 가까운 슬픔이 마음을 뒤흔들었다. 그 크고 맑은 눈동자의 젤소미나, 천사같이 착하고 귀여운 젤소미나, 살며시 웃음지을 때 그 천진하고 아름다운 모습이 겹쳐지면서 젤소미나의 죽음은 영화가 아니라 현실처럼 느껴졌다.

은 영화가 아니라 현실이다. 내 마음 속에서 사라지지 않을 현실로 다가선 것이다. 가난하고 어리석은 삶을 살고 있는 안소니 퀸과 젤소미나는 내 마음을 울린다. 나는 젤소미나만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안타까운 사랑, 너무나 가여운 사람, 그렇게 죽어서는 안될 아름다운 사람, 젤소미나는 그렇게 쓸쓸하고 불쌍하게 죽어서는 안되는 사람이었다.

행복해야 할 사람이, 인생을 꽃피워야 할 사람이 어느 이름없는 마을에서 누구의 보살핌도 없이 쓸쓸하게 죽어간다는 생각을 하면 나는 견딜 수가 없다. 인생은 너무나 잔인하고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그렇게 죽어간 젤소미나가 불쌍하고 그것을 보고 있는 내 마음이 아파서 나는 눈물을 흘린다. 영화의 마지막에 몸부림치며 울부짖던 안소니 퀸처럼.

아아...인생이란, 정말 길처럼 끝없고 안타까운 것이란 말인가. 이 글을 쓰면서도 나는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사랑하는 젤소미나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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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들러 리스트 (2disc) - 할인행사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리암 니슨 외 출연 / 유니버설픽쳐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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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들러 리스트를 보고

아주 오랫만에 특별한 영화를 보았다. 특별하다는 것은 한 가지가 아니고 아주 여러가지 면에서 드러나는 특징을 의미한다. 우선 이 영화는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 헐리우드 영화가 다루던 주제와 거리가 먼 유태인 학살에 관한 영화였고 이 영화를 만든 사람이 오락영화의 천재인 스티븐 스필버그였으며 영화가 흑백이었다는 점이다. 94년도 아카데미 영화상에 12개 부문이 후보에 올랐을 정도로 격찬을 받고 있는 영화이며 당시의 상황을 객관적이고도 냉정하게 관객에게 보여주고 있다. 런닝타임이 무려 3시간 15분이나 되는 긴 영화임에도 조금도 지루함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주제를 깊이있게 끌어나가고 있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별볼일 없던 독일인이 유태인 차별정책으로 쓰러진 한 그릇공장을 인수하고 유태인 회계사와 함께 돈을 벌었으며 나중에는 유태인 11백명의 목숨을 돈과 바꿔서 구해준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실화였으며 소설로 먼저 발간되었다.

유태인 학살을 그린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는 서양에서 많이 제작되었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주목을 받는 것은, 특이한 소재와 영상미학적인 측면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오스카 쉰들러라는 독일인이 남긴 역사적 발자취가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도 커다란 의의가 있었으며 전쟁의 회오리 속에서 한 인간이 어떻게 변해가는가를 살펴보는 것도 흥미진진한 일이다. 또한 영화의 기술적인 측면에서도 흑백의 사용과 영화 중간에 아주 적은 부분에서만 컬러를 사용하여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방법이 동원되어 미학적 측면에서 강한 인상을 남기고 있다.

이 영화의 줄거리를 말하는 것은 지면의 낭비일 것이다. 영화 속에서 독일장교와 독일군들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그 잔인한 학살의 주범으로 아주 당당하고 정면으로 등장한다. 권총과 소총으로 충동적으로 사살을 하는 장면들, 총이 발사되고 사람이 발작을 일으키는 것처럼 쓰러지고, 탄피가 땅에 떨어지는 금속성 소리가 들리고, 바닥을 흥건하게 적시며 검붉은 피가 번져나가는 모습들...

만일 이 영화가 컬러로 만들어졌다면 이만한 영상미학을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영화가 흑백으로 만들어진 이유를 스티븐 스필버그는 나는 유태인들의 학살을 담고 있는 영화를 흑백으로 밖에 보지 못했다. 책이나 화보 등도 마찬가지, 그래서 나는 그 장면들과 충격들을 흑백으로 담아낼 수 밖에 없었다라고 말한다. 흑백이라고는 하지만 피가 번져서 흘러내리는 장면에서는 분명 검붉은색으로 느껴졌다.

쉰들러가 사업에 성공을 거두고 잘 나가고 있을때, 유태인 학살이 시작되고 있었다. 승마에서 돌아오는 길에 유태인 게토를 바라보다가 그는 그 학살 장면을 보게 된다. 무수한 사람들이 즉석에서 총살을 당하고 남은 사람들은 개처럼 끌려서 죽음의 수용소로 잡혀가고 있었다. 그때 화면의 가운데에 아주 작은 점으로 빨간 원피스를 입은 한 소녀가 등장한다. 정말 기이한 화면인데, 그 빨간색은 흑백의 화면에서 아주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 소녀는 나중에 유태인을 태우는 소각장에서 다시한번 쉰들러의 눈에 보임으로써 학살의 충격을 확실하게 전달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 학살의 충격으로 쉰들러는 유태인을 살리려는 노력을 시작한다. 자신이 벌어들인 모든 돈을 가지고 독일군 장교들을 매수하여11백명의 유태인 명단을 작성한다. 온갖 우여곡절 끝에 이들 모두는 살아난다. 그러나 쉰들러는 전범으로 쫓기는 신세가 되고, 영화는 유태인의 이주로 끝난다.

결국 컬러로 보여주는 부분은 영화의 시작과 마지막 부분에서 약간이다. 그리고 중간에 아주 작은 부분에서 컬러가 등장하며 이것은 영화의 효과를 극대화시키고 있다.

이 영화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는 크게 두 가지이다. 제목에서 밝히듯이 오스카 쉰들러라는 인물의 행적을 쫓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독일군의 만행과 유태인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독일군들이 저지른 유태인 학살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히틀러라는 한 독재자의 힘과 인종차별의식이 가져온 엄청난 결과였다. 인간이 더 이상 인간일 수 없는 그런 야만의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도 존재하고 있다. 그렇게 공공연하게 국가적으로, 대량 학살의 형태는 아닐지 모르지만 분명 남미나 아시아나 미국과 같은 나라에서는 인종차별과 독재와 극우의 폭력으로 무수한 사람들이 학살 당하고 있는 것이다.

독일군의 만행이 치를 떨게 하는 것이라면 유태인의 모습은 가련하고 불쌍한 면과 함께 교활하고 이기적이라는 느낌이 많이 들었다. 그것이 보다 솔직하고 현실적인 모습이어서 이 영화에서 성공하고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유태인들은 자신들을 학살하는 독일군의 만행을 끝까지 믿지 않으려 했고, 동족들이 학살을 당하고 있어도 자신만 살면 된다는 생각으로 수용소로 끌려가는 것을 면할때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했다. 이런 모습은 어쩌면 인간이 처한 한계상황에서는 자연스러운 것인지 모른다. 어쨌거나 생존을 위해 필사적으로 애쓰는 유태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자꾸 두려워졌다.

오스카 쉰들러는 독일인이고 나치당원이며 교활하고 사교성이 많은 사업가이다. 그는 유태인들이 박해받는 것을 이용해서 돈을 벌려고 작정한 사람이다. 그는 유태인 회계사를 포섭하고 유태인이 운영하던 공장을 인수하고 유태인 부자에게서 돈을 받아내 사업을 시작한다. 독일군 장교들을 매수하여 물건을 모두 군대에 납품하면서 돈을 많이 벌게 된다. 그는 독일군 장교들에게 뇌물을 갖다바치고 늘 파티와 여흥으로 독일군 장교들을 매수해 놓는다.

그러던 그가 유태인 학살 장면을 목격하면서부터 달라지기 시작한다. 이 영화의 감독은 그 시점을 바로 빨간색 원피스를 입은 소녀의 등장으로 잡고 있다. 그는 유태인들이 당하는 고통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으며 구체적인 고통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교활한 사업가에 불과했지만 전쟁과 인종차별과 학살이라는 구체적인 사건들을 통해 변해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간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곧장 돈을 챙겨 독일군 사령관을 만난다. 유태인 한 사람당 얼마씩을 쳐서 자신이 사는 것으로 흥정을 한 것이다. 그렇게 산 유태인이 무려 11백명. 그는 독일인이고 사업가이고 돈을 벌 목적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다. 그런데 자신이 그동안 번 모든 돈을 털어넣으면서 유태인을 살리겠다는 의지는 과연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이것이 이 영화의 아이러니이다.

우리는 인간의 속성을 다 알지 못한다. 더우기나 극한 상황에서 변하는 인간의 내면을 파악하기란 더욱 어렵다. 쉰들러가 변하는 것은 인간의 내부에 존재하는 인간다움의 확인일 것이다. 인간이 인간에게 절망하다가도 다시 인간에 의해 희망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이 바로 이런 점 때문일 것이다.

독일군의 만행을 본다면, 인간에 대해 기대할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절망 뿐일 것이다. 인간이,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가 개나 돼지보다도 못하게 전락하는 처참한 상황 속에서 가장 고귀한 인간에 대한 사랑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우리같은 평범한 사람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그 잔학한 학살에 대해서 전쟁이 만들어내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이유와 목적으로도 인간의 학살은 없어야 한다. 만일 민주주의와 정의의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 문민정부에서도 그렇다 - 학살이야말로 가장 악랄한 파시스트의 만행인 것이다.

우리나라도 이런 학살을 경험했다. 이런 처참한 비극을 겪고 나서 또 다시 그런 일을 저지르려는 사악한 기도가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땐 어떡해야 하는가. 이야기가 조금 빗나가지만 지금 미국의 군수자본가들과 극우 군벌들, 보수주의자들이 한국전쟁을 부추기고 있는 상황을 보면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문제이다.

쉰들러는 떠나기 직전에 살아남은 유태인들에게 자신이 더 많은 유태인을 살릴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노라고 자책을 한다. 나는 그가 진심을 말했다고 믿는다. 그는 자신이 결코 영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동족인 독일인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서 아주 적은 부분이라도 속죄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가 평범한 상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유태인이라는 것을 나는 오늘 처음알았지만 또 다시 유태인 문제가 세계적으로 화제를 가져올 것만 같다. 유태인은 전세계 - 거의 유럽과 미국이지만 - 에서 권력과 금력을 가장 확실하게 가진 소수 민족의 하나이다. 그들의 영향력은 매우 대단해서, 세계의 여론을 주도할 정도이다. 이런 영화가 만들어지는 것도 그런 영향력의 하나일 것이다.

유태인이 당한 그 고통스러움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동정과 연민과 아픔을 함께하지만 나는 무조건 유태인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질 수는 없다. 그것은 지금 중동에서 벌어지고 있는 또 다른 만행때문이다. 바로 자신들이 당한 것과 같은 방법으로 또 다른 민족, 팔레스타인을 학살하는 유태인들을 보면서.

모든 유태인들이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니 유태인들이라고 일반화시킬 수는 없지만 이미 국가를 이룬 유태인들은 불과 40년전에 있었던 자신들의 일을 잊어버렸단 말인가? 독일민족에게 당한 그 고통과 아픔을 간직한 채 정직하고 정의롭게 살아간다면 실력이 있는 민족으로써 존경과 사랑을 충분히 받을 만한 민족인 유태인들은 이제 더 이상 동정과 연민을 받는 처지가 아니라 학살자라는 비난과 저주를 받게 되었다. 나는 그들을 결코 좋게보지 않는다. 이제 그들은 학살자이며 저주받을 민족이라고 생각한다.

내 생각이 빨리 바뀌기를 희망한다. 모든 폭력과 학살이 사라지고 민족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이 사라지고 평화롭게 서로 기대며 살아가는 날이 되어야 할 것이다. 세상은 자꾸 이상하게 변해가고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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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지성사에서 반드시 기억되어야 할 이름, 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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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시피 버닝 (1disc) - 아웃케이스 없음
알란 파커 감독, 진 해크만 외 출연 / 20세기폭스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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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미시시피 버닝을 보고

 

영화를 통해 사회를 변혁시킬 수는 없지만 사회를 반영하고 비판하여 인간의 이성을 깨어있게 하는 역할은 가능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가 만들어진 이후 100년이 시간이 흐르는 동안 세계의 여러나라에서 만들어진 진보적 영화들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으며 찬사를 받아야 한다.

문학에서 말해지는 거울과 램프의 역할은 영화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많은 영화감독들이 자신의 영화에 정치적 비판의식 이데올로기 그리고 민중의 저항 체제비판에 관한 내용들을 담았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혁명과 계급투쟁을 통한 민중의 승리를 외쳤고 억압받는 제3세계에서는 독재와 착취에 관한 메세지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또한 제국주의적 자본주의에서도 독립영화나 진보영화에서 반자본주의와 인권유린에 관한 내용들이 담겼고 극소수 자본가와 권력자들의 음모를 비판하는 영화가 제작되어 소수의 사람들에게 공유되고 있다.

세계는 여전히 두 개의 커다란 집단으로 나뉘어 있다. 물론 마르크스의 계급론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그렇게 구분하지 않아도 인권, 환경, 빈민, 복지, 노동, 여성, 기아, 마약, 전쟁 등 세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문제들에 관해 비판적 시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진보적 집단과 이런 문제들을 버려두고 권력다툼과 자본의 축적에 눈이 먼 다른 집단의 싸움이 계속되는 것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이러한 사회의 구조 속에서 모순된 현실을 영화로 전달하려는 움직임이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으며 이러한 움직임은 인간의 이성이 탐욕과 파렴치한 행위를 극복하는 하나의 증거로 제시되고 있다. 이 영화 미시시피 버닝도 그러한 영화 가운데 하나이다. 이미 우리에게 잘 알려진 알란 파커 감독은 사회의 모순을 지적하는 일련의 영화작업을 통해 자신의 발언을 하고 있는 작가이다.

이 영화의 주제는 인종차별이다. 인종차별의 문제는 비단 미국이라는 나라에서만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백인과 흑인의 문제만도 아니다. 인종차별은 피부색깔이 다르기 때문에 백인이 다른 색의 피부를 가진 인종을 혐오하는 차원이 아니라 자본가와 권력자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끊임없이 인종차별을 부추기고 강화하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인종차별과 자본주의가 겉으로는 상관관계가 없을 듯 하지만 사실은 가장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자본가와 자본가의 대표인 정치가 또는 국가는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커다란 대립집단의 격렬한 계급투쟁을 막기 위한 여러가지 방법을 고안해 내고 있는데, 제국주의로 전환할수록 그 방법은 세련되고 은유적이 된다. 우리나라에서도 80년부터 새 군부의 독재체제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섹스, 스포츠, 스크린 정책이 그 가운데 하나이다. 초기에 자본가와 권력가의 의도로 구성된 이런 정책들은 시간이 지나면 스스로의 힘을 가지고 움직이게 된다.

인종차별 역시 미국이 가진 200년 이상의 전통 속에서 자리잡은 것이다. 19세기 전까지의 인종차별이 백인들의 무지와 편견, 그리고 악의적인 배타성에 근거한 것이라면 자본주의가 성숙되고 사회의 물질적 조건이 일정한 수준에 달한 20세기에 들어서는 인종차별 정책이 교묘한 조정과 정책에 의해 조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일부에서는 제도()적으로 인종차별 정책을 없애고 있는데 그게 무슨 소리냐고 할 것이다. 물론 제도가 바뀌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러한 변화가 자본가나 정치권력의 자발적인 태도가 아니라 끊임없이 이의를 제기하고 인종차별 정책에 반대하는 내용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흑인들과 소수 양심적인 백인들이 투쟁을 통해 바꾼 것이지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보면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가장 최근까지도 인종분리정책(아파르트헤이트)을 고수하던 백인정권이 왜 흑인과 타협하고 정권을 내놓았는가는 모두 아는 사실이다. 투쟁 앞에서 목숨을 내놓기 싫었기 때문에 정권을 대신 넘겨준 것이다. 미국에서는 여전히 흑인의 수가 백인에 비해 1/3의 수준에 머물고 미국 전체의 부를 1%의 인구가80%의 부를 독식하고 있는 현상과 중산층의 다수가 백인이라는 점에 의해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같은 현상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미국의 정치권력은 미국의 평화 - 자본가와 권력자의 평화 - 를 위해 다수의 백인들과 흑인들의 대립을 적절하게 이용하며 부추길 것이다.

다수의 백인은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지만 자신이 은연중 생각하고 있는 인종차별에 관해서 백인의 우월성을 유지하고 싶은 욕구를 가진다. 이러한 생각이 바로 계급투쟁의 본질을 왜곡하고 희석하고자 하는 자본가와 정치권력의 의도인 것이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지성의 발달로 인종차별이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고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그 시간이 될 때까지 인간은 인종차별이라는 괴물의 껍데기를 쓰고 온갖 야만과 더러운 폭력, 광기를 드러낼 것이다. 20세기인 지금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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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콤X - 비트윈 30종 특별할인
에스엠픽쳐스(비트윈)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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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말콤 엑스를 보고

 

영화 말콤 엑스는 무려 3시간 30분의 상영시간이 말해주듯 할 말이 많은 영화이다. 미국 흑인의 지도자로 널리 알려진 말콤 엑스의 일대기를 그린 이 영화는 그러나 그리 큰 감동을 주지 못하고 있다. 영화를 보는 사람의 주관에 따라 받아들여지는 감동도 천차만별일 것은 당연하겠지만 영화의 보편적 정서는 대게 비슷하다고 볼 때, 이 영화를 보고 감동한 관객이 많지 않음은 이 영화가 시대와 역사적 배경이 다르다는 이유 말고도 다른 이유들이 있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한다.

이 영화의 주인공을 맡은 덴젤 워싱턴은 영화 남과 북에서 남우조연상을 받은 흑인 연기자이다. 그 영화에서 탈출한 노예로, 북군 최초의 흑인부대원으로 등장하는 덴젤의 연기는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말콤 엑스 에서도 그의 연기는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 영화의 성격상 연기의 뛰어남이 관객의 눈에 두드러지게 들어오지는 않았다.

이 영화를 만든 감독 스파이크 리는 흑인 감독이다. 그는 최근에 한국인 이민자들이 등장하는 영화 속에서 한국인을 비하했다고 비판을 받고 있는 감독이기도 하다. 그런 감독이 말콤 엑스를 만들었다는 것이 아이러니이기는 하지만 흑인인 그로서는 흑인의 지도자를 멋지게 그려보고 싶은 충동이 있음은 당연한 일이겠다.

영화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거리의 부랑아였던 말콤이 도둑질을 하다 들켜서 감옥에 가게 되었고, 감옥에서 이스람교의 지도자를 만나 이슬람교를 믿게 되고 흑인의 처지를 깨닫고 흑인의 처지를 개선하기 위한 운동을 전개하다가 암살 당한다는 것이다. 그 사이에 스승의 교파와 갈라지고 백인들의 테러위협에 시달리는 과정들이 등장한다. 말콤이 이집트에서 이슬람에 대한 공부를 더 하면서 그동안 가졌던 인종에 대한 편견을 벗어나 평등과 평화, 자유를 부르짖게 되었다는 부분이 있었으나 그것을 실천하기도 전에 암살을 당하고 만다.

이 영화는 흑인인 한 지도자의 삶이기 이전에 한 인간의 성장과정 면에서도 뜻있는 영화이다.쓰레기 같은 삶에서 주체적이고 이타적인 삶으로 바뀌는 것은 인간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영화의 전편에서 석연치않은 느낌이 자꾸 드는 것은 왜일까. 여러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이 영화가 헐리우드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이 그 하나이다. 미국은 유색인종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매우 심한 곳이다. 겉으로는 아닌척하지만 실제로 인종차별때문에 잠시라도 시비가 끊이지 않는 것이다. 미국인구의 십분의 일인 25백만명의 흑인이 이렇게 차별대우를 당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보다 훨씬 더 적은 소수인종들의 경우는 어떠할까. 흑인들이 검은 것은 아름답다고 부르짖는 것은 자신들의 자존심을 위해서는 바람직할지 모르지만 유색인종의 차별을 근본에 깔고 있는 것이라면 또 하나의 편견만을 부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최근에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벌어진 흑인들의 폭동에서 유색인종인 한국인이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이 그 단적인 예다.

미국내의 흑인은 미국에서 가장 큰 피해를 당하는 인종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근본적인 것은 차별당하는 흑인들의 처지가 아니라 차별을 당하고 있는 흑인들의 의식인 것이다. 흑인들의 사상적, 이데올로기적 토대는 매우 복잡한 경로를 통해 생성되었기 때문에 여기서 간단히 말할 성질은 아니지만, 타의에 의한 억압과 차별의 피해자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보다 시야를 넓게 본다면 흑인들에 대한 동정이 그들을 위하는 길이 아님을 알 것이다.

미국에서 백인들은 400년동안 1억이 넘는 흑인들을 학살하고 노예로 부렸으며 그보다 많은 인디언들을 멸종시켰다. 인디언들은 지금 마치 동물들처럼 수용되어 관광기념물 정도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른바 보호구역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말콤도 말했듯이 백인들은 범죄자이고 학살자이며 강도이다. 그렇다면 악질적인 백인들에 대해 흑인들은 면죄부를 받을 수 있을까. 말콤도 말했다. 흑인들에게도 두 부류가 있다고. 백인에게 봉사해서 아부하며 살아가는 부류와 타협을 거부하고 흑인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부류가 있다. 그런데, 오늘날 이런 부류의 분리가 엄격하게 이루어지고 있는가. 또는 그런 의미가 있는가. 흑인들도 유색인종의 멸종에 한몫을 담당했고 제3세계의 착취와 억압과 독재정권의 수립을 돕는데 한몫을 했다. 흑인들은 미국내에서 백인들의 차별만을 강조하고 피해당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밖의 세계에서 백인들이 하고있는 만행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가.

지금 미국내 흑인지도자들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그야말로 흑인집단이기주의에 다름아니다. 그들은 백인에게 차별당하고 있다는 것을 빌미로 다른 유색인종들을 차별하고 있다. 흑인의 인권을 신장하기 위해 유색인종을 억압하고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흑인들은 어리석고 못배워서 무식하며 판단력이 없고 가난하고 알콜중독자에 마약을 하고 뒷골목에서 싸움질이나 하고 백인여자를 강간이나 하는 쓰레기같은 인종이라고 몰아부치는 것은 백인들의 의도적인 음모이다. 그렇다. 그것은 명백한 이데올로기적 음모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고 그 원인은 바로 그동안 백인들이 저질렀던 모든 분야에서의 차별과 억압의 결과이다. 따라서 그런 음해와 현실역시 백인이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

, 현실적으로 흑인이 모든 분야와 경제적 처지에서 열등한 조건에 있는 것은 백인들이 만든 결과이지만, 그것을 역전시키는 것은 흑인들의 몫이다. 너희들이 이렇게 만들었으니 너희들이 책임을 져라,하고 아무리 떠들어 봐야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흑인들이 비판받아야 하는 것이 바로 이런 점이다. 유색인종들은 흑인들보다 훨씬 늦게 미국에 발을 들여놓았지만 흑인들보다 잘 살고 있다. 이것은 유색인종들이 백인들에게 노예신세가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고, 역사적으로도 주인과 노예, 멸시와 복종의 악연이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스스로의 노력이 더 중요하다고 보아야 한다. 백인사회에서도 유대인들은 돼지취급을 받는다. 유대인들은 어디서나 수난을 당하고 멸시를 받으며 살았다. 그렇지만 오늘날 유대인들은 전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리에 올랐으며 모든 부분에서 탁월한 결과물을 배출하고 있다. 유대인이 백인이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한다면 너무 단순한 논리일 것이다.

미국내에서 복잡한 인종문제는 백인들에 의해 시작되었고 그 비극의 씨앗은 여전히 백인들에게 있지만 그렇다고 백인들이 이 문제를 해결할 능력은 없다. 그들이 하루아침에 인종편견을 없애고 평등과 자유를 흑인들에게 허용한다고 말할 것같은가. 어림없는 소리다. 겉으로는 민주주의를 부르짖으면서도 가장 확고한 자본주의적 계급질서를 옹호하고 유지시키려는 것이 미국의 백인이라고 본다. 그들은 자본가의 안전을 위해서는 그들이 뽑은 대통령도 대낮에 암살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하물며 그깟 검둥이 몇 명 정도는 우습지 않은가.

미국에서 성공한 흑인들은 하나같이 정치적인 인물이 없다. 뉴욕시장인 브레들리 정도가 흑인일 뿐이다. 하원에 약간 명이 있고, 주지사에도 몇 명이 있다. 하지만 그것이 흑인들의 인권을 신장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인권신장이라는 말도 웃기는 말이다. 인간은 똑같지 않으면 짐승과 마찬가지이다. 그야말로 흑백논리이다. 누가 누구에게 조금이라도 차별을 가한다면 그때부터 동등한 인간이란 없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인종이 달라서 벌어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계급의 차별이 그렇고 계급과 인종을 뒤섞은 것이 그렇다. 미국에서는 이 두가지가 모두 해당된다.

마이클 잭슨이 전세계의 톱스타라고는 하지만 그가 수십번의 수술을 하는 엄청난 고생을 하면서 되고자 한 것은 바로 백인의 얼굴이었다. 그는 흑인이면서도 흑인을 거부했던 것이다. 남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이 마이클 잭슨의 공연을 반대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미국 최고의 인기코미디언 빌 코스비나 영화배우 에디머피같은 사람들은 흑인이긴 하지만 흑인이 아니다. 농구선수 매직 죤슨도 그렇고 육상선수 칼 루이스도 그렇다. 그들은 흑인이면서도 흑인이 아니다. 베버리힐즈에 수십만평의 대지에 어마어마한 저택을 지어놓고 완전히 별세계에서 사는 그들이 동족인 흑인들의 고통을 이해하겠는가. 이해할려고 노력이나 하겠는가. 미국은 철저히 개인주의적인 사회라고 한다. 그들은 능력대로 벌고 능력대로 산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어서 노력하면 잘산다는 이데올로기를 주입시킨다. 그래서 몇몇의 성공한 흑인들이 마치 모든 흑인들의 갈길인 것처럼 선전을 해대는 것이다.

미국이 자본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이런 일은 너무나 당연하다. 흑인들은 자신들의 단결에 힘쓰기 보다는 유색인종들이 자신들의 구역에서 돈을 벌어 몽땅 가지고 간다고 불평을 하고 기회만 되면 가게를 약탈한다. 인종의 도덕성도 없고 자존심도 없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흑인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이라는 양키 자본주의의 본질을 보여주는 것이니 그것에 물든 사람이 어디 흑인뿐이겠는가.

하지만 적어도 말콤 엑스같은 영화가 나오기 위해서는 흑인의 자존심과 도덕성에 대한 반성의 소리가 있어야 할 것이다. 흑인이 당하고 있는 억압과 차별에 대해서 전세계 민중에게 호소를 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지금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를 보여줘야 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이 영화가 매우 신중하고 객관적이며 흑인의 처지를 충실하게 보여줄려고 노력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자기 반성없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어보인다. 그런 면에서 오히려 리처드 라이트의 자전적 소설이 나에게는 더 감동으로 와닿는다. 같은 흑인이어도 스파이크 리와 리처드 라이트는 다르다. 흑인들이 먼저 알아야 할 것은, 미국내의 흑인이 가지고 있는 위치와 함께 인종의 국제주의이다. 말콤도 이집트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깨달은 것이 바로 인종의 국제주의이다. 전세계 사람들은 어느 민족, 어느 인종을 막론하고 모두가 평등하고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흑인이 당하고 있는 피해와 역사적 피해의식은 상처가 깊은 것이지만 인디언도 있고 제3세계의 민중들도 흑인들 못지않은 고통을 당했고 당하고 있다. 흑인들만이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처럼 행세한다면 그것은 또다른 인종이기주의를 낳을 뿐이다.

흑인들의 처지를 백번 이해하면서도 인간의 보편적 진리를 먼저 생각하게 되는 것이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계급차별은 있지만 인종차별은 없는 우리나라에서는 미국의 인종차별 실태가 실감있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말콤엑스의 삶을 보기 위해 영화관을 찾는 것은 그가 흑인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완성되어가는 과정을 보기 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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