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친코 1
이민진 지음, 이미정 옮김 / 문학사상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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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파친코

재미교포 이민진 작가의 장편소설. '애플TV'에서 이 소설을 드라마로 만들겠다고 2018년에 발표했고, 지금 촬영하고 있다고 알려졌다. 이 소설이 미국에서 발표된 이후, 지금까지 30개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 여러 나라에서 출판되었고, 미국에서도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이 소설이 미국의 주류 문학계에서 주목받는 현상은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한국인은 미국에서 소수민족이며, 그리 주목받지 못한 대상으로 100년을 살았다. 한국인의 미국 이민과 일본 거주는 20세기 초반의 비극적 역사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공통의 기원이 있다. 1910년, 일본의 강제병합 이후 조선인의 삶은 고통과 울분, 비통의 연속이었다. 
비참한 삶에서 벗어나려던 조선인들은 가까운 일본으로 건너가거나 하와이, 쿠바, 멕시코의 사탕수수 농장으로 가는 배를 타고 고향을 떠났다. 이렇게 떠난 조선인은 인종차별과 하층 노동자로 온갖 수모를 당하면서도 꿋꿋하게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다.

한국인에게 근현대사의 시작은 비극이었다. 동학혁명이 일본군의 폭력에 무너지면서 민중의 삶은 짓밟히기 시작했고, 그것은 조선왕조에서의 삶과는 비교할 수 없이 참혹한 것이었다. 이 소설에서는 당시 조선의 근현대사 배경이 설명되지는 않는다. 부산의 영도 바닷가에 살던 이름 없는 가난한 어부 부부에게 온전치 못한 몸을 지닌 아들 '훈'이 있고,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사는 더 가난한 집안의 막내딸 양진이 부부로 맺어지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훈'이는 장애를 갖고 태어났지만 몸은 튼튼했고, 듬직하고 다정한 남편이자 아버지였다. 너무 가난해서 입 하나를 덜기 위해 시집 온 양진은 시부모와 함께 힘든 시간을 지내지만, 그럼에도 행복한 삶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선자가 태어나고, 선자는 튼튼하고 야무진 여성으로 성장한다.

이 작품은 4세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각 세대는 드라마틱하게 다른 삶을 살지만 등장인물들이 일본에 정착하면서 살게 된 삶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재일조선인', 일본사회에서의 소수자로 당하는 차별, 멸시의 구조다. 주인공들이 일본에서 자기의 꿈을 펼치지 못하는 가장 중요한 원인은 일본의 '재일조선인' 정책과 조선인을 차별하는 사회적 공모가 강하게 뿌리내렸기 때문이다. 
'재일조선인'의 구성은 하나의 원인으로 설명할 수 없지만, 가난한 조국 조선을 자발적이든, 강제로든 떠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디아스포라적 삶인 것만은 분명하다. 이들은 '실존적'이든 '이념적'이든 '경계인의 삶'으로 존재하고 있다. 역사 속의 집단이자 개인으로 디아스포라이면서 경계적 존재로 사는 사람들은 유대인과 재일조선인이 공통점을 갖는다. 유럽에는 '집시'도 있으나 그들은 단일한 민족 정체성을 갖지 못한 집단 유랑민이라는 점에서 유대인과는 또 다르다.

작품 제목인 '파친코'는 '재일조선인'을 상징하는 단어다. 이는 마치 유대인을 상징하는 단어로 '고리대금업자'를 떠올리는 것과 같다. 두 경우 모두 그 집단이 자발적으로 선택한 직업이 아니며, 사회에서 천대와 멸시를 받는 존재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작품의 제목인 '파친코'와 작품의 등장인물에서 여성의 삶은 서로 만나는 지점이 없다. 즉, 이 작품은 여성의 서사로 이루어져 있음에도 제목은 '재일조선인' 가운데서도 남성이 운영하는 '파친코'로 되어 있어 제목과 내용 사이에 괴리가 생긴다. 이것을 작가가 의도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상징성에 무게를 두었다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여성 서사를 다루고 있다. 작가가 여성이어서 여성의 삶에 보다 공감과 깊이를 더 할 수 있는 장점이 있으며, 여성은 남성에 비해 사회적 약자로 큰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자신의 삶은 물론, 가족의 삶을 구원하는 구원자적 존재로 등장한다. 여성은 늘 남성의 그늘, 발 아래, 뒤치닥꺼리, 조력자, 보조자 등으로 존재하지만, 길게 보면 남성을 품고, 기르고, 키우고, 성장시키는 구원자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작품에서도 양진은 가난한 집 막내딸로 굶주리는 삶을 살다, 나이가 많고, 몸도 성치 않은 어부의 아들 '김훈'의 아내가 된다. 다행히 김훈은 장애가 있지만, 성실하고 따뜻한 사람이어서 양진은 가난 속에서도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다. 두 사람의 딸인 선자는 아버지가 병으로 죽자 엄마와 두 사람의 일하는 여성과 함께 하숙을 치면서 성장한다.
선자가 고한수를 만나 그의 아이를 임신하고, 평양에서 온 백이삭 목사의 도움으로 결혼식을 하고 정식으로 백이삭의 아내가 되어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면서, '재일조선인' 1세대의 삶이 시작된다. 백이삭의 형 백요셉은 이미 그의 아내 이경희와 함께 일본에서 정착했고, 이경희는 선자를 동생처럼 여기며 끈끈한 연대와 우정을 쌓아간다. 
고한수는 조선인이지만 일본인 아내와 결혼하고 세 딸을 두었고, 그의 장인은 야쿠자 두목이었던 것이 나중에 드러난다. 고한수 역시 장인의 야쿠자 조직에서 일하고 있었으며, 그는 평생 야쿠자로 살면서 돈과 권력을 행사한다.
하지만 선자의 남편 백이삭은 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하다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히고, 2년의 옥살이 끝에 결국 숨을 거둔다. 백요셉 역시 미군의 폭격에 화상을 입고 고생하다 죽는데, 남성들이 이렇게 온전한 삶을 살지 못하는 것도 '재일조선인'의 비극이라는 것을 작가는 드라마틱한 사건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남성(남편)의 부재로 곤란한 생계를 꾸리는 건 여성들이다. 경희와 선자는 김치 파는 행상을 시작으로 집안을 위해 무슨 일이든 한다. 김치는 맛있다는 소문이 나고, 김창호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이들의 김치를 전부 구입하겠다며 두 사람을 식당 주방에서 직접 김치를 담그게 한다. 시간이 지나서 김창호의 뒤에 고한수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되지만, 설령 일찍 알았다 해도 경희와 선자는 그 주문을 거절하지 못했을 것이다.
경희와 선자에게는 아들 노아와 모자수가 있었다. 두 아이를 건강하고 떳떳하게 키우는 것이 삶의 전부이자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는 두 사람은, 아들을 위해서라면 어떤 어려움도, 고통도, 굴욕도 참을 수 있을 것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아버지의 부재로 성장하는 두 아들 노아와 모자수는 평생 힘겹게 일하는 엄마와 큰엄마를 보면서 엇나갈 수 없었다. 아버지의 부재는 곧 조국의 부재이기도 하다. 나라를 잃은 민족, 조국을 떠나 낯선 곳에서 살아가야 하는 디아스포라의 존재인 이들 '재일조선인'은 끊임 없이 '아버지의 부재'를 느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존재해서는 안 되는 '아버지' 고한수는 노아에게 고통의 근원이다. 이미 아내와 딸이 있는 그는 어린 선자를 좋아하고, 임신시켜 선자의 인생을 망친다. 그렇게 태어난 노아는 아버지의 존재 자체가 불행이며, 자신을 키워준 아버지 백이삭이 죽은 이후, 존재할 수 없는 아버지가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리고 그 아버지가 사회에서 가장 비난받는 야쿠자라는 이유로, 자기의 삶을 방기한다.
이삭의 비극은 '재일조선인'이기 때문에 발생한 필연적 결과일까, 아니면 야쿠자를 부모로 둔 자식이라면 누구나 비슷한 절망과 자포자기의 감정을 느끼게 되는 걸까. 이삭의 자살은 '재일조선인'이 일본에서 뿌리내리는 것이 얼마나 절망적인가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이다. 노아는 자신의 실존적 고민을 거듭하다 결국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데, 그의 삶도 모순적이긴 마찬가지다. 그가 자기의 정체를 숨기고 파친코 가게에 취업해 많은 돈을 벌면서 '아버지' 고한수가 보내준 학비를 다 갚고, 어머니에게도 많은 돈을 보낸 이후에도 그는 결혼도 하고, 아이도 여럿 낳아 기르면서 평범한 중산층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자신의 위치가 노출되었다고 삶을 스스로 끝내는 것은, 자신의 아내와 아이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는 애초에 결혼할 마음도 없었던 것은 아닐까. 아니, 이삭은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했다고 말한다. 그건 분명하다. 아내와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면서도,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는 딜레마, 극단의 감정을 공감하지 못한다 해도, 이삭의 결정을 존중할 수는 있지 않을까.

모자수는 우연하게 파친코 업계에 발을 들여 놓지만, 이 역시 그의 존재가 '재일조선인'이라는 점이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이었다. 일본 사회에서 주류에 속할 수 없는 존재이기에, 아무리 노력해도 일본의 주류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사회에서 강하게 밀려나고 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그럴 때 선택할 수 있는 일은 위험하거나 더럽거나 불법한 일일 수밖에 없다.
모자수를 파친코로 끌어들인 사람 역시 재일조선인 고로 씨였다. 성실하고 머리가 뛰어난 모자수는 빠르게 일을 배우고,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을 하면서 빠르게 성장한다. 그는 고로 씨의 도움으로 파친코를 직접 경영할 뿐 아니라 가게도 늘리면서 막대한 돈을 벌기 시작한다.
모자수의 아내 유미는 모자수의 단골 양복점에서 일하던 미싱공이었으나 늘 일본을 떠나 미국으로 이민가는 걸 꿈꾸던 여성이었다. 모자수와 결혼해 아들 솔로몬을 낳고 몇 년 지나지 않아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나는데, 이런 크고작은 비극이 재일조선인 사회에서 끊임없이 일어난다.
솔로몬은 부자 아버지인 모자수 덕으로 어려서부터 국제유치원에 다니며 영어를 배우고, 미국으로 유학을 간다. 하지만 미국에서 공부하고, 좋은 회사에 취직해 일본으로 돌아왔지만, 일본인 상사에게 이용당하고 해고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을 겪으면서, 솔로몬은 아버지가 하는 파친코 업계에서 일을 하겠다고 자청한다.

'재일조선인' 4세대인 솔로몬이라면 자기가 원하는 삶을 충분히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다. 아버지가 파친코로 돈을 벌어 아무런 불편 없이 살아갈 수 있고, 원한다면 세계 어느 곳에서도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솔로몬의 위치였다.
하지만 솔로몬은 일본에 눌러 앉는다. 솔로몬은 할머니와 엄마, 아버지의 삶을 가까이서 지켜봤고, 자신 역시 '재일조선인'으로 3년 마다 지문을 등록해야 하는 차별을 당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기에, 경제적으로 성공한 '재일조선인'이라 해도, 일본 사회에서 늘 변두리, 울타리 너머에 존재하는 이방인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그럼에도 외국에서 공부하고, 부모 세대와는 차원이 다른 삶을 살아온 솔로몬 같은 청년 세대가 '재일조선인'으로 일본 사회에 뿌리를 내리겠다는 결심은, 차별과 멸시의 땅, 고통과 비난이 발목을 잡는 일본 사회에서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재일조선인'은 불행한 역사를 만든 일본이 상상하지 못한 존재였지만, 일본 내부의 모순을 뚫고 성장하는 기형적 존재이면서, 한편으로 일본인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거울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재일조선인'은 일본의 과거 침략과 범죄 역사의 살아 있는 증거이자 증인이며, 조선인의 의지와 투지를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 존재 그 자체다.
'재일조선인'의 존재는 일본의 내부적 모순을 드러내는 한편, 모순을 첨단, 극대화하는 존재로 작동한다. 일본은 '재일조선인'의 존재를 부정할 수도, 인정할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져 있으며, 이들의 존재만으로도 일본의 과거 전쟁범죄는 사라지지 않고 유효하며, '재일조선인'을 차별하는 구조를 유지하는 것으로 일본인의 저열함, 야비함, 악랄함을 증명하기 때문에, '재일조선인'은 일본 양심의 리트머스 시험지로 작동하고 있다.

작품에서 '재일조선인' 인물들 가운데 기독교와 관련한 내용이 많다는 것이 장점이자 단점일 수 있다. 작품에서 백이삭과 선자가 만나는 대목은 어색하지 않다. 백이삭은 평양의 부잣집 둘째 아들로, 목사가 되어 일본에 있는 교회로 목회를 하러 가는 중이었다. 일본에는 이미 그의 형 백요셉이 아내와 함께 정착했고, 이삭을 불러들인 것이다. 
백요셉이 일본으로 가는 과정에서 선자의 부모가 하는 하숙집에 머물렀던 인연이 있었고, 요셉은 그 하숙집을 소개한 것이다. 그렇게 이삭과 선자가 만나는데, 선자는 이미 임신을 했고, 아버지인 고한수가 유부남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 선자는 고한수와 결별한다. 선자는 이삭의 헌신에 감동하고, 진심으로 이삭을 사랑하지만, 이삭은 일본 경찰에 잡혀 고문당하고 일찍 사망한다.
이삭의 아들은 노아, 모자수이고, 모자수의 아들은 솔로몬이다. 일본은 기독교가 극히 미미한 존재인데, '재일조선인'으로 조선사람의 흔한 이름이 아닌, 성경에 나오는 이름을 차용한 것은 작가의 의도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백이삭과 백요셉이 평양에서 온 기독교인이라는 점은, 미국과 깊은 관련이 있다. 
평양은 미국 개신교 선교회가 가장 먼저 자리 잡은 곳으로, 당시 조선에서 기독교가 처음 뿌리를 내린 곳이기도 하다. 개신교 선교사들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 학교를 세우고, 조선사람을 교육시켰다. 교육과 목회는 서로 떨어지지 않았고, 공부를 잘 하는 조선인은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 공부하도록 돕기도 했다.
따라서 조선의 근대화에 미국 개신교는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으며, 재미교포 작가인 이민진 작가는 작품 취재를 통해 '재일조선인'으로 살고 있는 사람 가운데 이 시기 평양의 개신교도를 취재했거나 자료를 읽었을 가능성이 높다.

읽으면서 독특한 문장이라고 생각했는데, 작가가 재미교포로 어렸을 때 미국으로 이민가서 성장한 사람이고, 영어를 모국어로 쓰기 때문에, 한글 문장과는 사뭇 다른 영어 문장으로 작품을 썼고, 그것을 다시 한글로 번역하면서 한국소설을 읽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라는 건 이해할 수 있다.
내용은 분명 '재일조선인'의 이야기를 하고 있고, 한국인의 삶을 다루고 있지만, 문장은 한국소설에서는 볼 수 없는 낯선 구조로 짜여 있다. 그런 점에서 작가의 의식구조는 이미 '미국인'으로 확고히 정립되어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는데, 그가 모국인 한국과 한국의 역사, 한국인의 고난에 관해 깊은 관심을 갖고 바라보고 있다는 건 퍽 높게 평가하면서, 이민진 작가의 영어 소설이 한국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세계 문학의 보편성을 획득하기에 필요한 문장구조가 서양(미국)식으로 짜여지고 있는 것은 흥미를 갖고 지켜봐야 할 대목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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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밖의 사람들 - 파견 노동 확대에서 메탄올 실명까지, 청년노동의 현실 평화 발자국 26
김성희.김수박 만화 / 보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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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밖의 사람들

1988년 무렵에 나는 구로공단에 있는 영세한 공장에 다니고 있었다. '삼미금속'이라는 회사였는데, 도금 공장이었다. 일당을 많이 벌려면 공사장에서 일하는 것이 나았고, 군대 입대 전에는 3년 정도 배관공으로 일을 한 경력도 있어서 나는 공사현장이나 매형이 있는 사우디아라비아 파견 노동자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는 중동 건설 붐이 일고 있었고, 몇 년만 다녀오면 집을 한 채 마련할 수 있을 정도여서 인기가 높았다. 나는 그런 기회를 잡았지만,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하는 바람에 중동에 가지 못했다.
구로공단의 영세한 공장에 들어가게 된 것은 내 밥벌이도 있었지만, 그때 함께 공부하던 선배들의 권유에 따른 것이다. 70년대 후반부터 알게 된 독서회는 번성했고, 내가 살던 지역에 새로운 독서회가 생기면서, 그곳에서 선배, 친구들을 만났다. 이들 가운데 극소수가 따로 '스터디'를 했는데, 사회과학 공부였다. 나는 정규 학교를 다닌 것이 국민학교가 전부였으므로 이때만큼 열심히, 깊이 있게 공부한 적은 없었다. 그래도 검정고시로 중학교, 고등학교 과정을 마쳤고, 대학에 진학할 생각도 있었지만, 선배들은 대학보다는 현장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말했다.
나는 대학생이 아니었으므로 '위장취업'이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노동자였고, 이미 몇몇 공장을 전전하고 있었다. 휴대용 가스렌지를 조립하는 공장, 텔레비전 케이스에 필름을 씌우는 공장 등을 거치면서 저녁에 집에 돌아와 소설을 썼다. 그 소설이 제1회 전태일문학상에 당선되었고, 나는 '노동자 작가'가 되었다. 그래도 삶은 달라지지 않았고, 올림픽이 열린다는 그 해에도 도금 공장에 다니며, 삶은 어둡고 무거웠다. 노동조합을 만들겠다는 목표가 있었지만, 노동자의 의식은 낮았고, 회사의 감시는 심했다.
도금공장에는 황산, 염산 원액과 시안화나트륨(청산가리), 시안화칼륨 등 독극물이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다. 심지어 시안화나트륨은 작은 흰색 덩어리인데, 드럼통으로 가득 우리들이 옷을 갈아 입는 탈의식에 놓여 있었다.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청산가리를 가지고 나갈 수 있었다.
염산, 황산, 시안화나트륨, 시안화칼륨 등 독극물을 취급하면서도 우리는 고무장화와 고무장갑만 끼었을 뿐, 보호안경도 없었다. 그 용액이 눈에 튀어 들어가면 물로 씻는 것이 전부였다. 그렇게 일하던 어느 날, 라디오에서 '문송면 군이 수은중독으로 사망했다'는 뉴스를 들었다.
이렇게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일하면서도 노동자들은 항의조차 하지 못했다. 나는 동료들과 함께 쉬는 날 등산도 하고, 가끔 야근을 하지 않을 때는 저녁도 먹으면서 노동조합의 필요성에 대해 슬쩍 떠봤지만, 그들도 이 공장에서 오래 일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이 작품을 읽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80년대 군부독재 시절의 영세한 공장에서 일어났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는 사고가 지금, 경제선진국이라는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도 그렇고, 파견노동자, 하청노동자, 비정규노동자 등으로 더 잘게 쪼개져 차별당하는 노동자의 현실이 답답하고 안타까웠다.
정치는 군사독재에서 민주정부로 진보했지만, 노동자의 처지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한국의 경제 규모가 성장하고, 수출이 세계 10위권이고, 국민총생산, 국가총생산, 1인당 국민소득 등은 꾸준히 늘어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노동자의 소득도 증가하고, 절대 빈곤에서는 벗어났으며, 개인의 절대적 삶의 환경도 개선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자본이 성장하고, 자본가와 부르주아가 가져가는 부의 크기에 비하면, 노동자들의 몫은 상대적으로 더 작아진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즉, 사회의 부가 커지면 거의 대부분을 소수의 자본가와 부르주아가 차지하고, 다수의 노동자는 아주 적은 몫을 나눠 갖는 것이다. 
이것을 서양 자본주의에서는 '신자본주의'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한국은 특히 1997년 외환 위기를 겪으면서 빈부의 격차는 더 극심하게 벌어지고, 노동자의 고용 불안정이 깊어졌다. 정규직, 비정규직, 하청, 파견 노동자 등으로 세분화한 것도 외환 위기 이후부터였다.
이렇게 노동자의 고용 환경이 나빠지면서 노동자의 삶은 더 불안정하고, 임금 격차는 커지게 되었다. 자본은 이윤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것이 본능이고, 노동자를 소모품으로 여기기 때문에, 노동자의 죽음을 하찮게 여긴다. 
이 작품에서 메탄올 독성으로 실명하게 된 여섯 명의 청년 노동자들도 자본의 이윤 추구에 소모품으로 희생당한 사람들이다. 역사는 민주주의로 발전하면서 인권이 중요한 화두로 등장했다. 인권의 확대로 인해 노동시간은 줄어들고, 각종 차별은 사라졌거나 사라지고 있으며, 노동 환경도 개선되고 있다. 주5일 노동, 최저임금제 등 노동자의 권익이 향상되는 것도 시대의 당연한 흐름이다.
그럼에도 지금 한국은 서양의 다른 자본주의 나라들보다 노동자의 처지가 매우 열악하고, 자본의 착취가 악랄한 현실이다. 자본가의 범죄는 가볍게 처벌되고, 노동자의 당연한 권리인 파업은 무겁게 처벌된다.

자본가는 노동자를 착취해 이윤을 추구한다는 것이 고전적 형태의 자본 축적에 관한 해석이다. 현대 자본주의는 금융자본의 진화로 자본의 축적은 더 다양하게 발전하고, 노동자의 착취도 세련되게 바뀌었다. 여기에 노동자도 인간으로의 욕망을 가진 존재라서 이기심, 경쟁 같은 자본주의의 특성에 쉽게 빠지게 된다.
괴물이 된 자본을 통제할 수 있는 건 민주주의와 인권, 복지를 바탕으로 하는 정부의 통제와 제도적 장치다. 보편적 복지를 확대하고, 자본(가)의 범법 행위를 미리 감시하는 구조를 만들고, 자본가가 범죄를 저지르면 강하게 처벌하는 법률을 만드는 등 자본을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은 분명 있지만, 그런 일을 하는 국회의원이나 정치인들을 자본이 매수하는 방식으로 길들여 자본의 이익에 복무하도록 만든다.
여기에 사법부까지 매수하면서 자본은 모든 권력을 길들이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일하도록 만든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주인은 자본가다. 그들은 막강한 자본으로 국가를 장악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노동자는 다수지만 가진 것은 오직 '머릿수' 뿐이다. 노동자는 '노동조합'을 통해 자본가와 힘겨루기를 하지만, 사실 노동조합은 자본주의 체제를 뒤엎는 전진기지 역할을 해야 하며, 자본주의는 노동계급의 혁명을 통해 끝장난다는 것이 고전적 혁명이론이다.
인간은 누구나 동등한 존재다. 평등하지는 않지만, 동등한 존재임에도 노동자는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아간다. 인류의 역사가 불평등과 차별의 역사인 것은 분명하지만, 인간 보편의 평등과 인권이 확대되고, 부의 집중과 편향도 줄어들어드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기 위해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피땀을 흘리고 있다.
이 작품은 그런 상황에 놓인 노동자들과 노동자와 함께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노동자들은 먹고 살기 위해 위험한 공장에 취업하고, 파견노동자가 된다. 공장은 하청, 재하청으로 내려오는 구조로 생산단가가 깎이고, 영세공장의 자본가는 최소한의 임금에서 이윤을 남기려고 독극물을 아무런 보호 장치 없이 쓰게 된다.
산재를 당한 노동자들을 돕는 단체의 일꾼들 역시 열악한 처지에 있지만, 이들은 한결 같이 어려운 처지의 노동자와 함께 한다. 올바른 국가라면 이들 일꾼들이 하는 일은 모두 정부의 기관에서 해야 할 일이다. 정부가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일하지 않기 때문에 노동자와 함께 하려는 사람들이 단체를 만들어 일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도 최저 임금 이하의 '생존비'를 받으며 일하면서도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언제까지 이렇게 자기를 희생하는 사람들에게만 기대야 하는 걸까.

한국 그래픽노블이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놓치지 않고 천착한다는 점에서, 김성희, 박수박 작가를 비롯한 그래픽노블 작가들의 성과가 놀랍고, 대단하다. 다른 장르보다 그래픽노블이 갖는 특별한 힘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만화 장르가 기존의 '오락물'이라는 선입견을 떨치고, 깊이 있고 진지한 장르일 수 있다는 걸 그래픽노블 작품들이 보여주고 있다.
만화는 현실을 조금 떨어져서 보는 효과가 있다. 소설은 상상을 통해, 영화는 미장센을 통해 리얼리즘을 구축한다. 만화는 단순화한 선으로 사물을 표현하기에 실제 현실 세계가 아닌 듯한 느낌을 준다. 이 비현실성은 독자가 작품 속 세계와 현재(실제 세계)의 중간에서 작품과 현실을 오가며 비교, 판단할 수 있는 거리를 두게 만들 수 있다. 
이 작품은 지금, 현재 일어난 사건이지만 마치 1970년대, 1980년대 일어난 사건처럼 보인다. 그만큼 비정상적 사건이라는 뜻이다. 내용에도 나오지만, 후진국에서조차 일어나지 않는 미개한 수준의 사건이라는 뜻인데, 자본가와 관리자들이 화학물질을 다루는 기본의 기본 조차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사건이고, 그 원인은 오로지 '단가'를 맞추기 위한 것이며, '단가'를 맞춘다는 것은 영세 자본가가 자신의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의도 때문이다. 
비현실적 사건과 상황을 표현하는 김성희 작가의 그림은 디테일이 많이 생략된 단순한 선으로 보인다. 하지만 단순한 듯 보이는 그림은 오히려 실사화보다 작품의 내용에 몰입하게 하는 효과가 있으며, 구체적으로 표현할 필요가 있는 장면에서는 디테일이 살아난다. 67쪽과 89쪽에 등장하는 박근혜의 그림은 다르다. 같은 인물을 실제 인물과 매우 비슷하게 그리거나, 만화화 해서 표현하는 것은 작가가 그 내용의 중요성을 강조하고픈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픽노블은 어렵고 복잡한 내용을 그림과 함께 이해하기 쉽게 풀어주는 기능도 있다. 이 작품 역시 언론에 보도되기는 했지만, 실제 내용 전체를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 김성희, 김수박 작가는 밀도 있는 취재를 통해 사건의 시작, 피해 노동자 개인의 삶, 노동자를 돕는 단체와 단체에서 일하는 사람들, 영세기업과 대기업의 태도 등 이 사건을 둘러싼 노동자와 자본의 이해관계를 잘 드러내고 있다. 이 작품은 어린 학생들도 읽고 토론할 수 있는 수업 재료로도 훌륭한 교재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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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로자 - 만화로 보는 로자 룩셈부르크
케이트 에번스 지음, 폴 불 엮음, 박경선 옮김, 장석준 해제 / 산처럼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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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로자

80년대, 사회과학 공부를 할 때는 로자 룩셈부르크를 몰랐다. 시간이 지나서 '레닌보다 뛰어난 이론가'였던 로자의 평전을 읽었다. 로자의 비범함은 물론이지만, 당시 유명한 사회주의자들의 비겁한 태도를 보면서, 유럽에서 혁명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로자가 살던 시대는 '혁명의 시대'였다. 로자는 1871년, 폴란드의 도시 자모시치에서 태어났다. 이 도시는 폴라드의 수도 바르샤바에서 우크라이나 국경 쪽으로 붙은 도시였고, 유대인들이 전체 주민의 약 30%를 차지할 만큼 많았다. 
현재의 자모시치 구 시가지는 1992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자모시치 시는 폴란드의 귀족이었던 얀 자모이스키가 16세기에 세운 도시로, 서유럽과 북유럽을 연결하는 무역로에 세운 도시다. 도시 설계는 이탈리아 건축가 베르난도 모란도가 했으며, 후기 르네상스 시대의 건축양식을 적용한 아름다운 도시로 이름이 있다.
로자는 유대인이었지만, 그의 부모는 자유롭고 진보적인 성향이어서 유대인의 율법을 따르지는 않았다. 오히려 '폴라드인'의 정체성을 갖도록 자식을 키웠으며, 부자는 아니었지만 자식들 교육을 위해 노력하는 부모였다.
그런 부모에게서 막내로 태어난 로자는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자랐고, 그만큼 어렸을 때부터 똑똑했다. 하지만 다섯 살 무렵, 그는 한쪽 다리가 뒤틀리며 키도 자라지 않아 평생 장애를 갖고 살았다. 로자는 여성, 장애인, 유대인이라는 여러 겹의 차별과 억압 속에서 살아야 했지만, 그의 지성은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세상에 자기의 사상을 널리 알릴 만큼 뛰어났다.
로자가 세 살되는 해, 1873년에 로자의 가족은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로 이주한다. 바르샤바 역시 유대인 인구가 전체의 약 30%에 이를 정도로 많았고, 로자는 중산층 집안에서 자유롭게 성장했다. 로자가 성장하던 바르샤바는 폴란드, 독일, 러시아의 역사와 문화가 뒤섞인 복합적인 도시였으며, 유대인 공동체도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하지만 로자의 부모는 유대인 공동체에 들어가지 않았으며, 특정한 종교나 정파에 소속하지 않은, 진보적 시민으로 살아갔다. 이런 환경에서 로자는 폴란드어, 러시아어, 독일어, 프랑스어까지 네 개의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하게 되었다. 
이런 재능은 로자의 장애와 관련이 있다고 본다. 육체적 장애로 인한 제한된 자유를 확장하기 위해 로자는 책을 열심히 읽었다. 우연의 일치지만, 프랑스의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도 1871년, 로자와 같은 해에 태어났고, 그는 천식으로 인한 호흡기 질환을 평생 앓았다. 마르셀도 육제적 장애를 지닌 채 글을 쓰기 시작했고, 대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남겼다. 재능 있는 사람은 스스로 빛을 낸다. 비록 육체가 자유롭지 못하다 해도, 지성까지 장애를 갖는 건 아니라는 걸 우리는 이들을 통해 새삼 확인한다.
로자는 불과 아홉 살 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는 독일어로 쓴 시와 산문들을 번역하고, 자신의 글을 써서 바르샤바에서 발행하는 어린이 잡지에 실린다. 

1881년 3월 1일, 러시에서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인민의 의지파' 단원들에게 암살당한다. 이들 무정부주의자들 가운데 폴란드인 '이그나치 리니에비에드츠키'가 있었다. 러시아 제국의 압제에 있었던 폴란드인들은 속으로 환호했지만, 러시아 제국은 폴란드를 더욱 강하게 압박했다.
암살단원 가운데는 러시아 여성 '소피아 페로프스카야'도 있었고, 그녀는 이 그룹의 지도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재판을 통해 이들은 모두 사형당하고, 로자는 그들의 소식을 신문을 통해 들으면서, 여성 혁명가의 삶에 관해 깊이 생각하는 계기가 된다.
로자가 중학생이던 1883년 무렵, 처음으로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 이 시기에도 '프롤레타리아 당'에서 활동하던 혁명가들이 경찰에 체포되어 사형당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특히 여성 혁명가의 체포와 죽음은 로자에게 특별한 충격을 주었다. 1885년에 '프롤레타리아 당' 당원이자 혁명가인 여성 두명, 19살의 마리아 보후스제비치와 로살리아 펠센하르트가 경찰에 체포되어 죽고, 1886년에는 '프롤레타리아 당' 지도부 네 명이 바르샤바 성채에서 교수형을 당한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서 로자는 자신도 뭔가 행동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15살 무렵 '프롤레타리아 당'에 가입한다.
로자가 '혁명가'의 삶을 선택한 것은 시대적 소명을 정확하게 읽었기 때문이다. 폴란드인으로 러시아 제국에 압제를 당하는 조국의 현실, 수많은 진보 지식인, 학생들의 반제국 투쟁, 로자가 다니는 학교에서 겪었던 차별, 여성의 사회적 제약, 장애를 가진 여성으로의 고통 등 여러 겹의 구조적 모순이 로자를 내리 눌렀고, 로자는 그런 차별과 억압에 정면으로 저항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16살의 로자는 이미 차르 경찰의 '요시찰 대상'이 되었으며, 그는 이때 마르크스, 엥겔스의 자적을 읽기 시작했다. 비밀 조직이었던 '프롤레타리아 당'과 나중에 결성한 '폴란드 노동자 연맹' 등에 대한 경찰의 감시와 탄압은 심해지고, 1888년, 17살이 된 로자는 여권을 만들어 스위스로 탈출한다. 불과 5년 전, 마르크스가 영국에서 사망했다.

로자는 취리히대학 철학과에 등록하고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수강한다. 마르크스의 저작은 물론, 다윈의 진화론을 비롯해 수학, 생물학 등 과학 분야의 지식을 쌓아간다. 사회주의자가 가져야 할 덕목 가운데 빠뜨릴 수 없는 분야가 바로 '과학'이다. 과학과 철학은 철저하게 이성적 활동이며, 과학은 특히 객관적 근거가 증명되어야 하는 엄격한 분야여서 논리와 분석, 구조를 중요하게 여기는 철학자, 사회주의자라면 반드시 배워야 할 학문이기도 했다.
스위스, 취리히에는 이미 정착한 선배 혁명가들이 많았고, 그는 폴란드 혁명가들은 물론, 러시아, 독일의 유명한 혁명가들의 흔적을 찾았고, 그들을 만나 교류했다. 그는 1893년,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제3차 대회'에서 발언하며 선배, 동료 혁명가들로부터 진짜 혁명가로 인정받는다.
1898년, 독일사회민주당에 가입했고, 1905년 1차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을 때 바르샤바로 가서 혁명에 동참했다. 이때부터 로자의 고난이 시작된다. 러시아 경찰에 잡혀 감옥에 갇혔으며, 1911년에는 인터내셔널 사회주의국의 구성원으로 활동하고, 1915년에는 다시 독일 경찰에 체포되어 구금된다. 그는 감옥에서 나온 이후에도 경찰의 감시를 받는 '보호관찰' 대상자였음에도 급진 좌파 단체인 '스파르타쿠스'의 지도부로 참여하게 된다. 1917년, 러시아혁명이 레닌의 지도로 성공하면서 1918년에는 독일공산당 창립 총회에서 연설하고, 1919년, 운명의 그해에 스파르타쿠스 반란의 배후로 체포되어 학살당한다.

혁명의 시기, 반제국주의, 반자본주의 깃발을 내걸고 투쟁한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들은 당대를 가장 앞서 가는 지성인들이었다. 다수의 민중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그들은 목숨을 걸로 투쟁했으며, 그들이 살았던 당대는 제국주의 폭력이 세상을 망치고 있었다.
진보적 지성인이 할 수 있는 행동은 당연히 반제국주의였으며, 사회주의 이론은 그들의 무기였다. 로자는 독일 야경단에 잡혀 살해당하기 전까지 네 권의 책을 썼다. '자본의 축적'은 1913년에 쓴 저작으로 마르크스의 '자본'에서 설명하고 있는 자본의 축적 과정을 자본과 제국주의의 관계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 '사회민주주의의 위기', '러시아 혁명' 등의 저작을 남긴 로자는 유대인, 여성, 장애인이라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뛰어난 사회주의자로 두각을 드러낸 인물이다. 그가 가진 불리함 때문에 여전히 널리 알려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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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문학선 16
백남룡 지음 / 도서출판 아시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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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 - 백남룡

북한 문학 작품을 처음 읽은 건 군복무 하던 때였던 걸로 기억한다. 기억이 왜곡되었어도 그 언저리였던 건 분명하다. 그러니까 82년을 전후한 시기였고, 나는 부대 근처에서 그 책을 발견했다. 내가 복무하던 부대는 화천에서 산양리를 거쳐 민통선을 지나면 바로 나오는 포병대대였다. 부대 주변으로 가끔 북한에서 보낸 삐라가 떨어지곤 했다. 삐라를 주워도 가지고 다닐 수는 없었다. 만에 하나 관물대에서 북한 삐라가 나오면 말할 것도 없이 국가보안법으로 감옥에 가거나, 최소한 군대 영창이라도 가게 될테니, 삐라를 발견하면 주워서 보고를 하던지, 그냥 두고 지나가는 것이 최선이었다.
내가 주운 삐라에 실린 단편소설은 어린 소년과 기차 그리고 김일성 장군이 나오는 내용이었다. 단편 내용은 김일성을 찬양하는 것으로, 북한 문학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감동 코드가 들어 있었다. 그 단편이 언제 창작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제 읽은 백남룡의 소설 '벗'과 한 줄기로 연결되는 공통점이 있다. 이 작품은 1988년에 발표되었다고 하는데, 소설의 무대는 80년대 중반의 현실을 그리고 있다.

정진우 판사는 이혼 전문 판사로 복무하고 있다. 어느 날, 그에게 한 젊은 여성이 찾아온다. 채순희는 도 예술단의 성악 배우, 중음 가수(메조 소프라노)로 복무하는 예술노동자다. 그이는 정진우 판사에게 남편과 이혼하고 싶다고, 이혼시켜 달라고 요청한다.
정진우 판사는 채순희의 배우자인 리석춘의 의견과 주장도 들어봐야 해서 저녁에 자기 아파트로 리석춘을 부른다. 리석춘은 아내 채순희와 처음 만난 때부터 갈등을 일으키게 된 계기와 상황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초산군에 있는 철제일용품 공장에서 일하고 있던 채순희는 도시에 있는 강안공장에서 파견을 온 리석춘을 만나게 된다. 리석춘은 한 달을 기한으로 공장에 선반기와 후라이스, 원통연마반들을 설치해주고 운전공들의 기능 양성까지 해주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 과정에서 리석춘은 채순희를 발견하고 첫눈에 반한다.
두 사람은 서로 깊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결혼했고, 아들 호남이도 낳아 키우고 있다. 채순희와 리석춘이 말하는 이혼 이유는 '생활 리듬'이 맞지 않는다는 거였다. 우리식 표현으로는 '성격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정진우 판사는 두 사람 사이를 오가며 각자 주장하는 내용을 귀기울여 듣는다. 리석춘이 일하는 공장을 찾아가 리석춘의 선배 노동자를 만나 리석춘이 어떤 사람인가를 듣고, 채순희가 복무하고 있는 도 예술단장을 만나 채순희에 관해 동료들의 평가를 경청한다.
이 과정에서 정진우 판사와 그의 아내 한은옥의 상황도 등장한다. 두 사람은 대학에서 우연히 만났다. 법률 공부를 하는 정진우와 생물학을 전공한 한은옥이 만날 기회는 거의 없었지만, 정진우의 동기를 통해 알게 되었다. 정진우는 한은옥이 외진 시골의 가난한 마을에서 유학을 온 학생이고, 그가 마을을 위해 남새(채소) 육성 사업을 벌이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두 사람은 연인이자 동지적 관계로 호감을 갖고 결혼한다. 정진우는 곧 판사로 복무하고, 한은옥은 학부 때부터 연구해 온 남새(채소) 연구를 계속하는데, 물이 귀하고 온도가 낮은 고향 연수덕에서 남새를 재배할 수 있도록 육종 연구를 무려 20년 가까이 해오고 있다.
정진우는 자주 집을 비우고 출장 가는 아내 때문에 마음이 상할 때도 있고, 외로울 때도 있지만, 채순희, 리석춘 이혼 사건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자신과 아내 은옥의 지나온 삶을 돌아보며, 자기의 이기적인 태도를 반성하고, 아내에 대한 존경하는 마음이 더 커지는 걸 느끼게 된다.

소설은 결말을 보여주지 않는다. 채순희와 리석춘이 결국 이혼을 하게 될지, 아니면 정진우의 바람대로 다시 마음을 돌이켜 서로를 이해하고 행복했던 과거로 돌아갈지 독자는 알지 못한다. 다만 추측할 뿐이다. 이야기가 진행하면서 채순희가 바라는 남편 리석춘의 모습과 리석춘이 바라는 아내 채순희의 모습이 어떻게 다른지, 왜 다른지를 서정적으로 그리기 때문에, 독자는 희망과 긍정의 마음으로 마지막 책장을 덮게 된다.
이 작품의 특징은 서너 가지를 꼽을 수 있는데, 먼저, 이 소설에는 '위대한 지도자'가 등장하지 않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북한소설의 '우상화'와 '위대한 지도자'에 관한 충성에 관한 내용은 단 한 마디도 나오지 않는다. 이건 매우 특이하게 보이는데, 북한문학이 80년대 이전보다 사상적으로 훨씬 유연하고 자유로워진 것은 아닐까 짐작해 본다.
다만, 정진우를 비롯해 주인공들이 자신의 사회적 존재를 떠올릴 때, '당과 조국'을 위해 복무한다는 것, 개인의 삶의 존재 의미는 '당과 조국'의 이익에 있다는 정도가 이 소설이 북한소설이라고 생각되는 표현 수위다.
이 소설이 발표된 것은 1988년인데, 소설을 읽어보면 한국(남한)의 60년대, 70년대 풍경이 떠오른다. 이 시기를 살았던 사람-50대 이상-이라면 이 소설에서 묘사되는 풍경과 언어-작가가 구사하는 문장과 작품의 주인공들이 하는 대화-가 60년대, 70년대의 한국 풍경과 매우 비슷하다는 걸 알 수 있는데, 남한에서 60년대, 70년대 개봉한 영화를 보면 매우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때만 해도 북한(평안도)과 경기(서울 포함)의 말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작가의 언어는 부드럽고 순하다. 문장은 소박하고 대화는 은근하며, 마음을 직접 표현하지 않는다. 이것은 개인의 성향에 따른 개성이 아니라, 북한의 체제가 보여주는 환경의 영향이라고 본다. 북한은 경제적으로 어렵지만, '주체적'으로 그 어려움을 극복하고 있고, '개인'보다는 '당과 조국'을 마음에 품은 개인들의 공동체로 묶인 집단의 정서를 내재하고 있다.
북한에서 '판사'는 권위적이고 위압적인 존재가 아니다. 정진우 판사는 단지 법률을 배운 지식인으로, 법적 판단을 하는 사람일 뿐, 공장 노동자, 예술단 성악 노동자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노동하는 사람'으로 스스로를 인식하고 있으며, '노동자'는 모두 평등하다는 생각을 기본으로 갖고 있다. 이것은 북한 체제의 특수성에서 오는 모습이지만, 남한과 비교하면 극적으로 다르다. 남한의 판사는 스스로 최고의 엘리트라고 생각하며, 평범한 노동자를 깔보고 함부로 대한다. 이런 모습만 보면 '인간 중심'의 사회를 기준으로 볼 때, 어느 쪽이 더 평등하고 우월한가를 알 수 있다.
북한에도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인간은 있다. 이 소설에는 나오지 않지만, 자기 조국(북한)을 탈출해서 다른 나라로 가는 사람들 가운데는 - 물론,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 자본주의적 탐욕에 이끌려 조국을 배신한 사람도 있다고 본다. 이 소설에서도 그런 인물 - 채림 -이 있는데, 정진우 판사는 채림의 범죄 사실을 발견하고 호되게 질책한다. 채림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국가 재산을 원상복구하는 선에서 가벼운 징계를 받는데, 북한과 같은 집단주의 사회에서 개인이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행동을 하면, 그 집단은 내부에 균열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북한의 지배집단에서는 '개인주의'를 가장 경계하고, 이기적, 탐욕적 행위를 강하게 처벌한다.

정진우 판사는 채순희에게는 예술가가 갖는 허영심을 개인화하지 말라고 주의를 준다. 즉, 자기가 갖고 있는 재능-성악 가수-을 기예로써가 아닌, 그 노래를 듣는 노동자, 인민의 삶과 결합해 노동자, 인민이 예술단원의 노래를 통해 '당과 조국'을 더욱 깊이 사랑하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주문한다.
공장의 선반노동자 리석춘에게는 '헌신성'만으로는 위대한 노동자가 될 수 없다고 충고한다. 아내 채순희가 바라는대로 현재의 조건에 안주하지 않고, 늘 새로운 지식을 배우고, 다양한 경험을 주체적으로 하는 능동적 노동자로 거듭나지 않으면 '당과 조국'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고 충고한다.
이런 정진우의 주장은, 북한(노동당)이 과거에 가졌던 보수적 태도를 버리고, 현실을 적극적으로 개척해야 한다는 현실적 이유와 맞물리는 내용이다. 즉, 채순희와 리석춘의 불화는 진취적이고 진보적인 태도를 갖지 않는데서 오는 나태와 무기력이 원인이었고, 이것을 깨닫고 새로운 마음과 정신으로 스스로 능동적인 노동자로 발전하도록 노력하는 순간, 두 사람의 불화는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소설은 프랑스에서 남북한 문학을 통틀어 가장 많이 팔렸다고 한다. 소설 내용도 좋지만, 북한 체제가 보여주는 특수함, 북한 인민이 '당과 조국'을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이 프랑스 독자들에게는 매우 특별한 경험일 거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독자들도 이 작품을 읽기 권한다. 좋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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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일기 - 묻힌 기억을 끄집어내는 민간인 학살의 기록
박건웅 지음 / 우리나비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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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사에서 가장 참혹한 이승만 정권의 학살 사건. 반드시 진실을 밝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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