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 (양장) - 버려서 얻고 비워서 채우다 글항아리 동양고전 시리즈 7
노자 지음, 김원중 옮김 / 글항아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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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를 읽을 때의 인상적인 느낌은 공자가 우리와는 다른 차원의 인간이라는 점이다. 그는 배우기를 좋아한다고 말하거나 제자들에게 언성을 높이며 호통칠 땐, 평범한 스승으로 다가왔지만 덕(德)과 인(仁)을 강조하며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자신의 전 존재를 던질 때 진정 성인의 모습으로 비춰졌다.  문명사에서 공자가 예수나 부처, 소크라테스와 함께 4대 성인으로 추앙받아 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가 <논어>에서 도덕적이자 완벽한 인간에 대한 이상형을 설정하였고 그것은 곧 공자로 연상 작용을 일으킨다.  동양의 모든 도덕적 가치가 <논어>에서 시작되었음은 부인할 순 없다.  그는 내세를 관장하는 귀신에 대해선 경원(敬遠), 즉 공경하되 멀리하라고 말함으로써 완벽한 현실주의자의 모습을 보여줬다. 유토피아가 있다면 공자는 내세가 아니라 지금 바로, 지상에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듯하다.

사마천이 지은 <사기>에는 당대 최고의 성인이었던 공자와 노자라는 인간의 만남이 그려지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싱겁고 놀랍다. 왜냐하면, 이 두 사람의 만남은 예(禮)를 묻는 공자에게 일장 훈계조로 노자가 내뱉은 몇 마디 말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사마천에 따르면 공자는 노자를 만나고 와서는 제자들에게 노자를 묘사하면서 그를 용이란 영험한 존재로 신비화시킨다. 사마천의 <사기> `노자한비열전'을 읽은 독자들은 이 뜻밖의 만남과 평가에 대해 주목할 것인데, 그것은 동양에서 신비주의적 아우라를 뽐내는 사람인 노자의 등장 때문이다. 

노자는 당대 최고의 석학이자 현인인 공자에게 "교만과 지나친 욕망, 위선적인 표정과 끝없는 야심을 버리라고" 충고한다. 그 말을 하기 전에, 공자의 뒷통수를 따갑게 만드는 말을 한마디 곁들인다. "내가 듣건대 훌륭한 상인은 물건을 깊숙히 숨겨두고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군자는 아름다운 덕을 지니고 있지만 모양새는 어리석은 것처럼 보인다하고 하였소"  노자의 말은 공자가 그 반대로 살아왔다는 점을 공략하는 것이다.  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이런 모욕적인 언사를 듣고 온 공자가 제자들에게 노자와의 만남을 서술하는데, 그 기록이 정확하다면 우리는 공자의 인내심을 통해 진정 그를 성인으로 인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나는 새는 잘 난다는 것을 알고, 물고기는 헤엄을 잘 친다는 것을 알며, 짐승은 잘 달린다는 것을 안다. 달리는 짐승은 그물을 쳐서 잡을 수 있고, 헤엄치는 물고기는 낚시를 드리워 낚을 수 있고, 나는 새는 화살을 쏘아 잡을 수 있다.  그러나 용이 어떻게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오늘 나는 노자를 만났는데 그는 마치 용 같은 존재였다."   사마천 <사기> 노자한비열전 中

이런 정황을 통해, 사마천은 노자를 공자와 동시대의 사람으로 인식한다. 시간으로 따지자면, 2500년 전 이야기다.  신약성서가 나오기 약 500여년 전 중국 대륙에서 태어난 노자는 주나라의 장서를 관리하던 사관(史官)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것은 사마천의 이야기일 뿐이고, 노자가 언제 태어났고 언제 죽었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노자의 저술로 알려진 <도덕경>은 지인의 간곡한 부탁에 의해, 쓰여졌다고 알려졌지만 그것 또한 정확하지 않다.  현재 <노자>라는 저술은 5,200자의 단어로 중국 고전 가운데 가장 적은 글자수를 기록한다. <한비자> 같은 저술이 10만자를 넘는 것을 볼때 <노자>가 얼마나 적은 문장으로 인생론,정치론,우주론을 담아냈는지 알 수 있다.  

글자수가 적고 산문이 아니라 시어로 기록되다보니, 해독이 난해한 것은 당연지사였다. 특히, 공자가 그를 용이란 존재로 신비화 한 것은 괜한 호들갑이 아니었다.  그 의미가 불명확한 도(道)를 사상의 중심에 두고 있는 <노자>를 사마천은 미묘하여 이해하기 어렵다고 단정지었다.  현대의 독자들이 그 난해함에 안도하고 노자를 읽어야 할 이유기도 하다.  <노자>의 5200자를 해설한 주석서가 283종이나 되는 것은 고금의 내로라하는 학자들도 <노자>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얼마나 큰 어려움을 가졌는지 단적으로 증명하는게 아닌가.  그럼에도, 노자의 언어를 아예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반어와 역설로 점철된 문장들을 통해, 삶의 정체와 진실에 다가서는 모양새는 무릎을 칠 정도의 탁견으로 가득하다.  이를 통해, 우리는 나와 세계, 우주를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 

"도가 말할 수 있으면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 이름이 이름 지을 수 있으면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道可道 非常道 (도가도 비상도)  名可名 非常名 (명가명 비상명)" 노자 전체 81장 가운데 제 1 장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다.  노자의 철학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무위(無爲)라고 명할 수 있다. 무위란 작위의 반대말로 무엇을 하지 않는 것, 인위를 배제한 것, 자연적인 것으로 해석한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고 표현했는데, 노자 1장은 정확히 그 반대를 말하고 있다.  언어의 불완전성에 대한 노자의 일갈이다. 공자도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라고 말하며, 그 무엇이 되고 무슨 일을 이루기 위해선 먼저 그 이름 짓는 일을 우선했다.  하지만, 노자는 어떤 개념이 언어로 포장되는 순간 그것의 진정한 의미가 사라진다고 역설한다. 도(道)가 만물의 본질이라면 인간의 언어는 그것을 담아낼 수 없고, 오히려 왜곡될 수 있다는 점을 짚은 것이다.

18장은 노자 철학의 역발상이 분명히 드러나는 구절이다.  "위대한 도가 없어지자 인과 의가 생겨났고, [교묘한] 지혜가 나타나자 큰 거짓이 생겨났다. 육친(아버지,자식,형,동생,남편,아내,곧 가정)이 화목하지 못하자 효성과 자애가 생겨났고, 국가가 혼란해지자 충신이 나왔다 大道廢 有仁義 (대도폐 유인의) 六親不和 有慈孝 (육친불화 유자효) 國家昏亂 有忠臣(국가혼란 유충신)"  이 모두는 공자의 유가철학에서 가장 강조되며 일생 소중히 여겨야할 가치로 등장하지만, 노자철학에선 그것이 등장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고 그같은 가치가 삶의 주체가 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인과 의,효과 충을 북돋을게 아니라 근본적으로 그것은 자연의 이치(道)를 따르지 않았기에 제도와 예법이 생겨났다는 역발상적 해석에 가닿는다.  

<사기> 노자 편을 마무리하며 사마천은 "세상에서 노자의 학문을 배우는 이들은 유가 학문을 내치고, 유가 학문을 배우는 이들은 역시 노자의 학문을 내쳤다. 길이 다르면 서로 도모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정말 이것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고 적었다. 18장을 보면, 공자의 반대편에서 정확히 세상의 이치를 읽어내는 노자가 보인다.  

처세론과 인생론으로 읽을 수 있는 부분을 보자.  22장 "굽으면 [도리어] 온전해지고, 구부리면 곧아지며, 움푹하게 되면 채워지고, 해지면 새로워지며,[지식이] 적으면 얻게 되고, 많아지면 미혹된다"  23장 "말을 별로 하지 않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希言自然(희언자연), 그러므로 회오리바람은 아침나절 내내 불지 못하고, 소나기는 하루 종일 내리지 못한다. 누가 [그것들을] 이렇게 하는가?  천지(자연)이다. 58장 "화란 복이 기대어 있는 바이며, 복이란 화가 엎드려 있는 바구나. 누가 그 궁극을 알겠는가?  아마도 정도라는 것은 없으니, 정도가 다시 기이한 것이 되고, 선함이 다시 요사스런 것이 된다. 사람들의 미혹된 그날들이 참으로 오래되었구나.  이 때문에 성인은 반듯하지만 가르지 않고, 예리하지만 상처주지 않으며, 올곧지만 함부로 하지 않고, 빛나지만 번쩍거리지는 않는다."  이해하기 어렵지 않지만, 사람들은 그 반대로 살고 생각하는데 익숙하다. 역설과 반어속에 세상 이치가 들어 있는 문장들이다.

노자는 공자의 철학과 상극처럼 보이나 71장 아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서술에서는 반갑게도 그 의견이 일치한다. [스스로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을 [제대로] 아는 것이 최상이고, 알지 못하는 것을 [스스로] 안다고 [말]하는 것이 병이다. 知不知上(지부지상) 不知知病 (부지지병), 오직 병을 병으로 여기기 때문에 병이 아닌 것이다. 성인은 병이 없으니 병을 병으로 여기기 때문에 병이 없는 것이다."  이 말은 공자의 <논어> 위정 편과 대구를 이룬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유야, 너에게 어떤 것을 안다는 것을 가르쳐줄까?  어떤 것을 알면 그것을 안다고 하고 알지 못하면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 이것이 [진정으로] 아는 것이다. 知之爲知之(지지위지지) 不知爲不知 是知也(부지위부지 시지야)"

노자의 정치론을 보자.  "가장 뛰어난 자[군주]는 그가 있다는 것을 백성들이 알지 못한다. 太上(태상) 不知有之(부지유지), 그 다음은 [아래 사람들이] 그를 가깝게 여기고 기린다. 그 다음은 그를 두려워한다. 그 다음은 그를 업신여긴다."  가장 이상적인 정치란 백성들이 임금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경우라고 노자는 말하고 있다. 즉, 정치에서 최고의 단계는 백성들이 정치 따위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 경우를 말한다. 이 말은 현대 대의민주주의와는 좀 맞지 않다고 여길 수 있다. 권력을 위임한 통치자를 감시하는 것이 유권자의 의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통치자의 자질이나 능력, 도덕성에 문제가 있다면 국민은 먹고사는 일에 보태어, 정치와 정치인을 감시하는 역할까지 맡아야 한다. 여러모로 피곤하다.  노자는 최고의 정치란 백성이 신경쓰지 않아도, 그 정치와 사회가 잘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의 정치상황에 대입해도 탁견이다. 

5200자의 언어로 이루어진 <노자>안에는 반복해 읽고 읽을수록 뜻에 가닿고, 이치에 맞는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간략히 소개한 문장들은 그저 맛보기에 지나지 않고 인용하고 싶은 문장들이 한없이 눈에 들어온다. <노자>라는 책은 반어와 역설, 그리고 역발상을 통해 도(道)를 해명하고 있다.  도는 인간을 초월해 세계와 우주, 작게는 사회가 운행되는 길을 말한다.  공자가 인과 예, 덕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노력해, 이상적인 사회를 현실에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면 노자는 인간의 노력 자체가 오히려 일을 방해하고, 망친다고 보고 있다.  노자는 자연(自然)처럼 `스스로 그러함'을 숭상한다.  일을 한다는 것은 무엇을 꾸민다는 것이지만, 궁리하여 잘못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때, 우리는 자연이 운행되는 이치로 눈을 돌리게 된다.  

중국대륙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은 제국은 통일하였지만, 불로장생의 꿈을 결국 이루지 못했다. 통일이 작위라면 죽음은 자연이다.  인간의 삶은 자연을 거슬러 작위를 추구하지만 결국엔 그 한계를 깨닫기 마련이며 누구도 그러한 이치를 거스르지 못한다.  <노자>철학은 물의 철학이라고 빗대어진다. <노자>의 유명한 명구인 "上善若水(상선약수),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는 비유 때문이다. 노자가 물을 최고의 선이라고 언명한 것은 세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그것이 만물을 이롭게 하기 때문이다. 물은 만물을 생육하는 생명의 근원이다. 둘째, 다투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의 성질은 순서대로 흘러가는 것이다.  자연스러움을 비유할 때, 우리는 물과 같다고 쓴다. 셋째,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는 점이다.  즉, 가장 낮은 곳에 임한다.  물은 높은 계곡을 지나 강을 건너 땅보다 낮은 바다로 향한다. 물을 통해 우리는 노자가 말한 물의 덕을 배운다.  노자에게 자연은 인간이 닮아가야 할 도의 표본이며, 교과서이다.

<논어>에 이어 <노자>를 읽었다.  사실 읽었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못하다.  일생 곁에 두고, 계속 읽어가야 할 책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맹자><묵자>,<장자>,<순자>,<한비자> 등 아직 섭렵하지 못한 책들로 눈을 돌리게 된다.  동양철학이 가진 오묘한 이치와 논리를 맛보는 것 자체가 인생을 살아가는 하나의 즐거움이자 쾌락처럼 보인다. 그것은 이 책을 읽는 이들만이 경험할 수 있는 특권이다.  그것이 지혜를 주고 있어서기도 하지만, 내 독서의 가벼움을 질책한다는 의미에서도 그렇다.  `진리가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는 말이 있다. <논어>와 대척점에 있는 <노자>를 읽으며 독자는 진리의 상대성을 배운다.  우리의 독서가 그 경계를 허물고 끝없이 확장해야 하는 이유를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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