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자서전 1 니코스 카잔차키스 전집 17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안정효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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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소설가이자 노벨상 작가 알베르 카뮈는 카잔차키스를 추모하면서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자신보다 백배는 더 노벨문학상을 받았어야 할 작가라고 말이다.  카뮈의 말은 겸손이기도 하지만 진실이기도 하다.  카잔차키스는 카뮈의 글에 많은 영향을 준 듯 하다. 카잔차키스의 소설과 자서전을 한 편씩 읽었다.  한데,  내가 젊은 시절 좋아했던 카뮈의 흔적을 이 그리스 작가에게서 발견하고는 신기했다. 

 

도서출판 <열린책들>에서 펴낸 2권으로 된 700여 장의 자서전을 읽어내는 것엔 꼬박 한달 가까이가 걸렸다.  쉼없이 빈 시간을 이용해 자서전의 문장들을 훑어갔지만 끝은 오지 않았고,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어느 한 문장 빈틈없이 꽉 채운 듯 진지했고, 둔중한 사유는 계속되었다.  눈이 아프고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질주하는 문장들에서 쉽게 내려설 수 없었다.  그의 삶도 그처럼  놀라운 진념과 열정으로 빚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1883년 그리스의 크레타 섬 이라클리온에서 태어났을 당시, 고향 크레타는 터키의 점령하에 있었다.  터키인들은 기독교인과 크레타인을 박해했다. 아버지는 자신을 이웃섬에 피신시키고, 자신은 독립을 위해 싸움을 이어갔다. 아버지는 상인이었지만, 아들 카잔차키스가 크레타를 위해 육체가 아닌 두뇌로써 싸워주길 원했다.  큰 인물이 되어 크레타인으로서 명예을 지키고, 독립에 기여하라고 말이다.  아들은 훗날 아버지의 원대로 그리스 전체를 대표하는 작가가 되었다.  훗날 터키에서도 독립을 쟁취한다.  하지만, 카잔차키스의 싸움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바로 신과 인간, 영혼과 육체, 선과 악, 신앙과 무신론, 삶과 죽음, 종교와 철학의 대척점에서 그는 전사로서 평생을 보냈고, 피를 흘렸다.

 

카잔차키스가 죽기 2년 전에 탈고한 <영혼의 자서전>은 이 투쟁과 반항, 피흘림의 기록이다.  그는 일생동안 끝없이 여행했고 방랑했다.  유럽의 수도원을 순례했고, 러시아의 혁명 현장을 목격했고, 중국과 아시아의 나라들을 탐색했다.  이 자서전은 그가 일평생 여행한 나라들에서 깨달은 잠언들의 모음집이다.  그는 쉼없이 진리와 신과 스승을 찾아 헤맸다.  누구나 청년기에는 형이상학적 기질을 품는다.  세계에 대한 의문, 인간에 대한 질문은 청년의 영혼에 자연스레 깃들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일흔 두살 이 자서전을 쓰는 순간까지도 그의 영혼은 여전히 청년의 열정과 고민에 휩싸여 있었다.  그는 두번째 아내 엘레니 카잔차키와 함께 스위스 루가노의 별장에서 한달을 보내던 시기 이 자서전을 집필했다.  

 

그 전년에 교황청과 그리스 정교회는  카잔차키스의 두 작품 <미할리스 대장>과 <최후의 유혹>이 신성을 모독했다며 작가를 맹비난했다.  결국 교황은 <최후의 유혹>을 카톨릭교회의 금서목록에 추가하고, 조국 그리스에서 이 두 작품의 출간은 미뤄진다.  훗날  카잔차키스는 그리스 정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이런 사족을 남겼다.

 

"성스러운 사제들이여, 여러분은 나를 저주하나 나는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여러분께서는 나만큼 양심이 깨끗하시기를, 그리고 나만큼 도덕적이고 종교적이시기를 기원합니다."

 

이 말에 비약은 없다.  카잔차키스는 젊은시절 사제가 되고 싶었고, 되는 길을 심각히 고려했다. 그가 유럽의 수도원을 시시때때로 방랑하며 수행자의 삶과 실제를 온몸으로 배우고, 터득하려 했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그는 많은 수도자들을 만났고 그들과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수행자 가운데 신실한 이도 있었지만 가식과 죄악에 물든 영혼을 수도복으로 가린채 살아가는 이도 많았다.  사제들의 본질이 종교적 형식에 있지 아니하고 그들의 본래적 영혼에 있다고 믿었다.   자서전의 1편은 바로 젊은 시절의 삶과 수도원 기행이 주를 이룬다.  그는 수도원을 방랑하며 그리스도교의 엄격한 금욕의 세계관과 고향 크레타의 그리스적 자유분망함 사이에서 고뇌했다.  종교의 가르침은 현세 부정과 내세의 보상이었다.  카잔차키스는 이 편향된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가 훗날 그 둘 사이의 조화, 즉 인간이 육체와 영혼으로 나뉠 수 없고 오직 그 둘 모두로 이루어졌음을 인정하며, 그리스도교적 가르침에 고뇌한 이유다.

 

"너는 선하고 평화롭고 참아야 하며, 한쪽 뺨을 맞으면 다른 쪽 뺨을 내주어야 하며, 현세의 삶은 가치가 없으며, 참된 삶은 천국에서 찾아야 한다, 고 성서가 가르쳤다.  너는 강해야 하며, 포도주와 여자와 전쟁을 사랑하고, 인간의 존엄성과 자부심을 드높이기 위해 죽이고 죽어야 하며, 이 땅의 삶을 사랑하고, 하데스의 왕이 되느니 살아서 노예가 되라, 고 그리스의 할아버지인 호메로스가 말했다."   p.324  <영혼의 자서전 1>

 

<영혼의 자서전 2>에서 그는 본격적으로 인생의 스승들을 찾아 헤맨다.  신문사 특파원으로 학생으로 여행자로, 그는 세계를 여행하고 여러 도시들을 거쳤다.  그 과정에서 길 위의 스승으로 자신의 영혼에 가장 깊은 자취를 남긴 이들을 밝힌적이 있었다.  그들은 호메로스와 붓다와 니체와 베르그송과 조르바였다.   호메로스에 대해 그는 기운을 불러오는 광채로 우주 전체를 비추는 태양처럼 평화롭고 찬란하다고 묘사했다.  조국 그리스의 전설적 작가 호메로스에 대한 경의다.  붓다에게서 그는 세상 사람들이 빠졌다가 구원을 받는 한없이 까만 눈을 발견했다고 적었다.  젊은 시절 철학의 온갖 문제들에 대한 답을 준 이로 철학자 베르그송을 언급했고,  니체의 사유는 고민하는 그를 새로운 고뇌로 살찌게 하며, 불운과 괴로움과 불확실성을 역설적인 자부심으로 되돌려준다.  실존 인물이자 사업의 동반자이기도 했던 무학의동료 조르바로부터 그는 생동하는 삶을 즐길것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를 배웠다고 고백한다.

 

카잔차키스의 자서전은 독특한 서술 방식을 택했다.  그것은 이 자서전이 `영혼의' 라는 수식어를 갖다 붙인 가장 중요한 이유다.  자질구레한 생의 구체성에 대해선 되도록 피해간다.  구체적인 인생의 사건들을 회고할 때에도 그는 언제나 시와 잠언같은 문체를 유지한다.  그같은 방식은 700 여 장, 어느 곳을 펴들어도 독자가 고뇌하는 작가의 영혼과 맞대면 하는 느낌을 전해준다.  책 전체가 잠언의 깨달음과 시어의 비유적 언어로 가득하다.   자서전을 곧 최고의 문학작품으로 승화시켰다. 

 

일평생 그는 수많은 작품을 썼다. <영혼의 자서전>은 그가 써낸 모든 작품의 태생적 배경과 모태를 확인토록 돕는다.  그는 죽는날까지 인간의 본질과 어떻게 살 것인가를 두고 고민했다.  그 답을 얻기 위해 여러 스승을 찾고자 했고, 훌륭한 스승들을 결국 만났다.  그들에게 배움으로써 그는 자신의 삶이 교조주의적 부자연스러움에 빠져드는 것을 막아냈다.  그는 자유를 원했고 그 자유속에는 영혼과 더불어 육체의 자유도 포함되었다.  어린 시절 그에게 성경을 가르치던 교사는 성경에 대한 아이들의 질문을 죄악시했다.  신의 섭리에 구체적 질문은 가당치 않다고 말이다.  자유에 대한 카잔차키스의 지칠줄 모르는 열망은 어린시절 금지된 질문들에 얽힌 깊은 트라우마 였을지도 모른다.

 

"내 영혼을 처음으로 뒤흔든 것은 공포나 고통이 아니었고, 쾌감이나 장난도 아니었으며, 자유에 대한 열망이었다.  (중략..) 우선 터키인들로부터 찾아야 하는 자유, 그것이 첫 단계였고, 그 다음에는 내면의 터키인인 교만과 악의와 시기로부터, 공포와 게으름으로부터, 눈을 멀게 하는 헛된 사상으로부터,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사랑과 흠모를 받는 대상들까지도 포함한 모든 우상들로부터 자유를 찾으려는 새로운 투쟁이 시작되었다."   p.84-85, <영혼의 자서전1>

 

그가 추구한 자유, 스승으로부터 배운 삶의 지혜, 그 모두를 조화시키는 한 사람은 실존인물 조르바였다.  조르바와 카잔차키스는 탄광 사업을 위해 만난 파트너였지만, 조르바는 카잔치키스에게 놀라운 가르침을 준다.  그것은 조르바가 어떤 종교에도 구애되지 않고, 어떤 이론과 억압에도 굴복하지 않고, 태초의 자유로운 품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다가올 천국을 위해서도 봉사하지 않고,  현실을 즐기고 매일 아침 매 순간 삶을 태초의 그것으로 받아들이며, 창조적 단순성과 영혼보다 우월한 힘을 내면에 간직한 채, 분명한 행동력으로 가득한 삶.  그것은 카잔차키스가 일평생 찾기를 갈망한 자유의 참모습이었던 것이다.

 

결국 카잔차키스는 74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길위에 있었다.  백혈병을 앓고 있었던 그를 아시아 독감이 급습했고  최후의 순간까지 작품과 인생을 위해 더 많은 시간을, 더 충만한 시간을 구걸하고 싶어했던 노작가는 영면에 든다.  생의 1분 1초를 누리고 오직 현세의 삶 가운데서 구원을 찾고자 했던 성실한 작가는 수많은 작품을 남겨두고 불멸의 영역으로 들어섰다.  그의 시신은 크레타로 운구되어 안치되고, 묘비에는 생전에 그가 정해두었던 묘비명이 새겨졌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그의 유골은 지금 고향 크레타 섬 이라클리온에 묻혀 있다.  하지만, 그가 창조한 인물속에서 작품안에서 그는 여전히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아 숨쉰다.  <영혼의 자서전>을 통해 독자는 여전히 젊고 생동하는 한 청년의 열정과 자유를 보게 될 것이다.  

 

"인간은 저마다 맞서 싸울 적의 정체를 결정짓는다. 비록 그것이 파멸을 뜻할지언정, 나는 신과 싸우게 되어서 기뻤다. 그는 흙을 빚어 세상을 창조했고, 나는 어휘를 빚는다. 신은 지금처럼 땅 위를 기어다니는 인간을 만들었고, 나는 꿈을 이루는 공기와 상상력으로 시간의 횡포에 항거하는 인간을, 보다 영적인 인간을 빚어내리라. 신의 인간은 죽지만, 내가 창조한 인간은 살리라 ! "  p.194 <영혼의 자서전1>

 

 

 

 

201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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