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찌무라 간조 회심기 믿음의 글들 40
우찌무라 간조 지음, 양혜원 옮김 / 홍성사 / 200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신앙을 갖게 되면서 내겐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교회에 출석하는 일, 성경을 읽는 일, 그리고 신앙서적을 아무런 꺼리낌없이 찾게 되는 일, 그리고 식사 때 기도를 하는 일, 힘들 때 주문처럼 하나님을 찾는 일,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마음의 평안을 얻는 일.  기독교 신앙이 내 삶에 미친 영향은 이 정도로 열거할 수 있으리라.  이 가운데 가장 낯간지러운 일은 물론, 하나님을 나의 주문을 받아주는 마법사처럼 시시때때로 부르는 일같다.  그를 불러서 내 고민을 이야기하고 해결해주실것을 부탁한다.  일단 마음은 편안해지고, 현실적인 불안은 잠시 내 마음속에서 사라져 버린다.  하나님은 정말로 유용하신 분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때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도 한다. 하나님의 가르침에 따른 삶은 적절한 타협으로 넘기기 일수이면서도 나는 내가 필요할 땐 하나님을 찾아 구걸한다.   이렇게 믿어도 되는 건가 ? 이것이 신앙인가 ?

신앙을 갖게 된 이후로 마음은 편안해졌을지 모르지만, 내 양심은 끝없이 요동쳤었다. 언제나 삶은 하나님의 가르침에 반대되는 반향으로 튀려는 성질을 갖고 있는 듯 했다. 거기서부터 삶은 신앙적인 모순으로 빠져들게 마련이다. 가르침은 알지만, 일단 행동은 뒤로 미룬다. 올바른 길은 알지만, 그건 지름길이 아니지 않습니까? 라는 자기기만. 이 모순에서 나는 신앙을 가진 이후로 지금껏, 또 앞으로 언제까지 기독교 신앙을 회의하게 될지 알 길 없다. C.S 루이스나 필립 얀시, 그리고 오늘 우찌무라 간조까지 이들 신앙인들의 서적을 관심갖고 읽는 이유는 이 모순속에서 빠져나오고 싶어서였다.  아니 그 모순이 나만의 문제인지 정말로 간절히 알고 싶어서다.  나보다 더 뛰어난 지성을 갖고 있었던 그들은 신앙안으로 어떻게 들어섰으며, 또 어떻게 신앙을 키워갔는지 알고 싶었다.  오늘 소개하는 책은 19세기 이웃나라 일본에서 기독교의 태동기에 나같은 고민을 깊이 있게 끌고간 한 사람, 우찌무라 간조의 신앙에 대한 진솔한 고민을 담고 있는 이야기다.

우찌무라 간조는 1861년 일본 에도에서 무사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874년 동경 외국어 학교을 거쳐, 1877년 샷포르 농업대학교에 입학, 거기서 기독교 신앙과 만난다. 그 시절 일본은 신문명을 받아들이며 수많은 서양 선교사들이 파송되어 기독교 신앙이 전파되던 때다. 그는 대학에서 기도모임을 갖고 또래 학생들과 성경공부를 하며, 예배를 보며 기독교인으로 자라난다.  일본에서 교회중심의 기독교가 전파되는 시대에 그는 일본의 지식인으로 성장하며, 기독 신앙을 키워갔던 것이다.  그는 신앙을 갖기 전까지, 일본의 수많은 잡신들을 섬기는 사람이었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신들을 갖고 있는 일본에서 그는 아침에 일어나 태양앞에 절하고, 길을 가다가 큰 바윗돌에 절하는 평범한 일본인이었다. 그러던 그가 유일신인 하나님을 믿고 성경을 접하게 되면서, 모든 미신에서 벗어나 진정한 기독교인으로 태어난다. 그러나 일본에 전파되는 기독교는 오늘날로 치자면 장로교나 감리교처럼 교파들이 분리되어, 서로간 경쟁속에서 진행된다.   

진리가 하나일진데, 왜 이들 선교사들은 같은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경쟁을 하는 것일까? 그들은 일본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파송된 것인지, 아니면 자신들의 교파을 선전하고 성장시키기 위해 온 것인지, 간조는 의구심을 품기 시작한다.  간조는 훗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거기서 대학을 다니며 신학을 접하게 되면서, 이러한 의문들을 하나씩 풀어가며 바른 신앙을 위한 진정한 회의를 시작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간조의 민족에 기반을 둔 기독교 신앙의 정립과 ``무교회주의'라는 그의 독특한 기독사상이다.  무교회주의는 신앙 연구를 주축으로 올바른 교회를 만들어가자는 사상인데,  이같은 그의 사상이 발현한 기점이 바로 청년시절, 조국의 기독교 선교사들의 횡포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간조는 서양에서 전파된 기독교를 보편적인 진리 자체로 받아들였고 단순히 서양적인 것, 그들의 민족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을 볼때, 그가 얼마나 민족적인 자부심으로 깨어있었는지, 신앙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무수한 회의가운데 받아들였는지 알 수 있다.

"내가 생각하는 참된 관용은, 자기 자신의 신앙에 대한 신념을 굽히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모든 정직한 신앙을 허용하고 참아 주는 것이다. 진리의 일부는 알 수 있다고 믿으나, 모든 진리를 다 알 수 있다고는 믿지 않는 태도야말로 진정한 기독교적 관용의 기초이며, 모든 사람에게 호의를 가지고 평화롭게 대할 수 있는 원천이다."  <우찌무라 간조 회심기>, p.186

과연, 오늘날 한국 교회는 우찌무라 간조에게 배울게 없을까?  그의 `무교회주의'가 한때 우리나라 종교지도자들에게 외면받던 시기가 있었다고 한다. 무교회주의란 교회에서 예배를 보지 말라는 얘기로 단순히 해석하면, 대단히 위험하게 보인다.  그러나 선교초기 교파들 간의 경쟁으로 자신들만의 교회를 만들고자 했던 선교사들을 보면서, 그것이 바른 신앙인의 모습인가 회의하던 간조의 고민이 담겨 있는 사상이라고 보면 이해할 수 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수많은 문제들로 얼룩져 있다.  대형교회들은 목회직을 부자간 세습하고, 교회 재정과 운영은 투명하지 못하다.  교회의 담임목사들은 신도들 위에 굴림하며, 교회를 자기것인냥 소유하려 든다.  그러나 사실 교회는 하나님의 것이자, 신도들의 것이다.  오늘날 과잉배출된 목회자들이 갈데가 없어서, 거대한 실업시장을 만들고 있다.  목회의 실업시대,  이만큼 서글픈 현장도 없단 생각이 든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자격없고 소양없는 목회자들이 대량으로 양성된다는 데 있다. 간조는 성직을 직업으로 여기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한 때 품었다고 이 책에 적어두었는데, 그것이 19세기 기독교인의 순진한 생각이라고 하더라도 의미하는 바가 남다르다고 본다. 왜냐하면, 성직을 하나의 밥벌이로 생각하는 목회자들이 있다는 현실을 우리가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직을 직업으로 인정하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긴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갖기 어려운 직업을 성직으로 해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판사나 검사가 되는 것보다도 한 교회의 담임목사가 되는 길이 더 어렵고 험하다면 어떨까? 어렵다는 것은 성직자가 하나의 자격증처럼 시험만 보고 통과되는 현실적인 문제 때문이다. 정말로 하나님의 기준으로 봤을때, 올바른 소양을 가진 성직자가 도대체 몇이나 될지 알 수 없다.

"아직도 내가 신학을 공부하는 것을 타인 앞에서 부끄러워할 때가 있다는 사실이 부끄럽다. 사실, 세속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어떠한 학문이건 그것의 영적인 측면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단지 먹기 위해서 설교한다는 발상을 갖고 있는 그들에게는, 신학을 공부한다는 게 분명 매우 비열하게 보일 것이다." p.259 

우찌무라 간조를 통해서, 회의가 진정한 신앙의 출발점이라는 사실을 다시한번 확인하게 된다.  교회에 나가서 목사님이 읽어주는 성경과 설교만을 믿고, 오직 목사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음성인냥 느끼는 것도 물론 신앙인의 틀린 자세는 아니나, 그러나 진정한 신앙의 출발은 언제나 성경과 기도를 통한 깊은 묵상을 통해 바로 하나님과 교류하고, 하나님의 음성이 내 내면에 직접 울릴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모든 신자는 아마추어 신학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학은 학문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깊이 영접하기 위해선, 하나님에 대해 더 많이 알 필요가 있는 것이다. 건강한 신앙은 건전한 회의속에서 키워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우찌무라 간조의 `무교회주의' 사상의 핵심이다.  그것이 세상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지 않는, 신앙인이 되는 길이다.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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