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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8 모든 실체는 필연적으로 무한하다
증명 하나의 속성의 실체[하나의 같은 속성을 지닌 실체]는 오직 하나만이 실존할 뿐이며(정리5에 의해), 그것의 본성에는 실존함이 속한다(정리7에 의해). 따라서 그 본성으로부터 유한하거나 무한하게 실존할 것이다. 하지만 유한하게 실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정의2에 의해) 이 경우 그것은 동일한 본성을 지닌 다른 실체-이것 역시 필연적으로 실존해야하는 것이다(정리7에 의해)-에 의해 한정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같은 속성의 두 실체[같은 속성을 지닌 두 실체]가 실존하게 될 텐데, 이는 부조리하다(정리5에 의해). 따라서 그것은 무한하게 실존한다.
*** 정리8은 1차적 논증이 일단 끝이 나는 시점.
*** 실체가 존재할 수 있는 방식은 유한 아니면 무한인데, 정의2 유한이라는 정의 자체는 같은 본성을 지닌 두 개 이상의 레스가 존재할 수도 있는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다. 그리고 이 가능성을 받아들여 실체가 유한하다고 가정한다면, 같은 본성을 지닌 실체에 의해 한정되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 말은 ‘같은 본성을 지닌 두 개 이상의 실체’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말인데, 이것은 정리5와 함께 할 수 없다! -> 실체가 존재할 수 있는 방식은 유한 아니면 무한인데 유한할 수 없다 -> 따라서 실체는 필연적으로 무한하다는 것이 증명된다!!
*** 여기서 제기될 수 있는 질문
– 정리8의 증명에서 말하듯 “하나의 속성의 실체는 오직 하나만이 실존할 뿐” + 정의6에서 말하듯 “신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자, 곧 각자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표현하는,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로 구성된 실체” -> 이 두 개를 합쳐보면 하나의 속성의 실체는 오직 하나 -> (그렇다면)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에는 무한하게 많은 실체 -> 신: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로 구성된 = 무한하게 많은 실체들로 구성된 인가! ->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무한한 실체는 무한하게 많이 존재하는 것인가. (정리8에서 이미 주어가 “모든”인데,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인 어떤 것을 가지고 ‘모두’라고는 표현하지 않으니, 이 “모든”에는 ‘복수가 존재한다’는 의미가 함축된 것인데, 그렇다면 실체는 무한대의 가짓수인가)
- 정리8 + 정의6 = 하나의 속성에 존재하는 각각의 무한한 실체가 있고 각각의 무한한 실체가 무한하게 많이 구성된 것이 신인가. 그렇다면 실체는 무한+1이 존재한다는 이야기인가(<-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이 있고 무한하게 많은 실체들이 있다고 말하는데, 그 무한하게 많은 실체들이 구성하는 ‘절대적인 신’이라는 존재가 있으니 그게 바로 1. 아 이 기하학적 추론의 아름다움 어쩔거야ㅠㅠㅠ) 대체 실체는 몇 개나 존재하는가.
이것이 바로 정의9-15에서 스피노자가 논증하려는 것들이다
주석1 유한하다는 것은 사실은 어떤 본성의 실존에 대한 부분적 부정이고 무한하다는 것은 절대적 긍정이기 때문에, 단지 정리7만으로부터 모든 실체는 무한해야 한다는 점이 따라 나온다.
*** 스피노자에 따르면 정리8은 정리7에서 ‘바로’ 따라 나온다.
- 여기서 스피노자는 ‘유한’과 ‘무한’을 새롭게 규정하고 있다. <<유한함: 어떤 본성의 실존에 대한 부분적 부정/ 무한함: 어떤 본성에 대한 절대적 긍정>>
- 정리7: 실체의 본성에는 실존함이 속한다 = 실체는 본성상 실존할 수밖에 없다
- 이것을 다르게 표현한다면, 실존에 대한 절대적 긍정이다. 왜? 본성이 실존이기 때문에. 항상 언제든 실존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정리7은 실존에 대한 절대적 긍정이다)
- 반면에 “실존에 대한 어떤 것이 유한하다”= 어떤 경우에는 실존하고 어떤 경우에는 실존하지 않는다 = 실존에 대한 부분정 부정. 즉, 실존이 자기원인에서만 성립한다는 것이 아니고, 그것에 대해서만 절대적으로 긍정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 지금 나는 실존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평생 실존할 것은 아니다. 생일 이전에 나는 실존하지 않았고, 사망일 이후에는 실존하지 않을 것이다. 바로 이게 실존에 대한 부분적 긍정이고 부분정 부정이다. 그러나 무한하다는 말은 절대적 긍정이고, 그은 생일이나 사망일 같은 게 없이 “늘” 존재한다는 이야기다.
- 정의7 자유에 대한 정의: 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서만 실존하고(자기원인적= 실존에 대한 절대적 긍정), 자기 자신에 의해서만 행위하도록 규정되는 CF 필연적이거나 제약되어있는 것은 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것에 의해 실존한다는 이야기다.
- 예를 들면 내가 생일이 있다는 것은 내가 다른 실재에 의해 탄생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내가 어딘가에 고용관계로 들어가서 일정하게 정해진 시간동안 정해진 방식대로 일을 하도록 되어 있다는 것=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실존하고 작업하도록 규정.
*** 정리8에서는 무한한 것과 유한한 것이 대립되고 서로 상응관계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무한한 것은 자유롭고, 유한한 것은 제약적이고. 지금은 이렇게 이해해도 문제가 없는데, 나중에 인간학 3부에 가면 문제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저 도식을 받아들인다면 “자유로운 것은 무한한 것밖에 없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유한한 것은 자유롭지 못하고 제약적이다”도 따라 나온다. 이렇게 되면 어떤 결론이 나오냐면, “인간은 절대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럼 스피노자 철학에서 인간에게는 자유의 여지가 없는 것인가?
- 스피노자는 많은 사람들에게서 이런 비판을 매우 많이 받았다. 스피노자 당대에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피에르 벨 Pierre Bayle(프랑스 계몽주의의 선구자 같은 사람. 나름 16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 라이프니츠의 <변신론 Essai de Theodice Theodicy>. Theodicy: 라이프니츠가 만들어낸 신조어. 그리스 theos 신 + dike 이론. 신의 정의를 다룬 이론. 신은 정의롭고 자비로우니 절대 악한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논증하는 학문. 예전에는 ‘신정론’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변신론’이라고 한다.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신은 전능하고 전지한 분이라고 하는데, 실상은 세상에 너무나 많은 악이 창궐하고 선량하고 정의로운 사람들이 핍박받거나 악인에 의해 억압당하는 일들이 무수히 많고, 홍수나 가뭄 같은 자연 재해도 많고. 그러니 사람들이 도대체 신이라는 게 있는가. 신이 정의롭다고 하는데 정의로운 분이 맞는가. 신이 전지전능하고 자비롭다는데 대체 왜 인간에게 끊임없이 재앙이 닥치는가. 이런 것들을 설명하는 이론이다. 기독교를 매우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적인 이론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흥미로운 이론이기도 하다. 18세기 철학의 아주 중요한 화두 또한 저것이었다. 저 주제는 신학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정치철학, 은폐된 정치철학이다. 라이프니츠가 무려 800페이지나 되는 글을 썼는데 이 책에 나오는 사람 중 하나가 바로 피에르 벨이다.
- 피에르 벨이 아주 방대한 책을 하나 썼는데 <Dictionnaire historique et critique 역사적이고 비판적인 사전> 고대에서부터 현대까지 서양 사상사에서 아주 유명하고 저명한 사람들에 관한 사전을 쓴 것이다. 사상가들에 대한 비판적인 백과사전(국내에서는 서울대학교 도서관에서 실물로 본 적이 있다). 여기에 50페이지 정도 분량으로 스피노자 항목이 있다. 이 항목에서 바로 스피노자의 이런 측면을 비판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아무런 자유의지도 없고 인간의 윤리적 행동의 여지도 없다는 것.
- 하지만 나중에 3부에 가서 이 문제를 살펴보겠지만 사실 스피노자는 유한하다는 것에 대해서 자유의지를 전면적으로 부정한 것이 아니다. 정리8에서 유한한 것에 대한 ‘부분적인 부정’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다시 말하면 부분적인 긍정을 함축한다. 그러니까 유한자에게는 실존의 긍정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유한하게, 곧 부분적으로 긍정되고 있는 것이다. 이 “실존의 부분적 긍정”이 가진 인간학적 윤리적 함의를 포함, 부분적 부정/ 부분정 긍정에 대해 1부 정리 28과 36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다.
* 주석2는 정리7에 대한 부연설명. 상당히 재미있는 주석이다.
*** 실체와 변양을 혼동하는 것이 정리7의 증명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주된 이유다. 자기 안에 의해 인식되는 것과 다른 것에 의해 인식되는 것을 잘 구별하지 못하는 것. 사람들이 ‘실체’라는 것을 일상에서 접하는 사물들(자연적인 실재, 우리가 흔히 접하는 사물들)처럼 생각하니까 자꾸 혼동한다(아리스토텔레스적 실체로 생각하는).
- 변양과 실체의 핵심적인 차이는 “시초를 지니는가” 여부이다.
시초를 지니는가= 다른 실재에 의해 탄생/생산되는가.
- 양자를 혼동하는 사람들은 변신의 가능성을 믿는 사람들이다. 말하는 것은 사람의 고유한 특성인데 나무도 말하는 것처럼 형상이 변형된다고 상상하는. 만화동화적 상상력의 비판.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계속 서양 철학자들이 기본적인 원칙으로 삼는 것이 “모든 사물에게는 고유한 포르마(형상 form)가 있다”는 것. 인간에게는 인간의 포르마, 개에게는 개의 포르마가 있다. 우리가 본성이라는 말을 쓸 때 보통 저 포르마를 생각한다. 사람의 포르마와 개의 포르마는 섞이고 교환되지 않는다. 섞일 수 없다. 그런데 동화적인 상상력에서는 이걸 섞어 놓는다.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 메타모르포시스. 이 폼이 저 폼으로 바뀌는. 호박이 마차가 되고 손오공이 머리카락으로 사람을 만들어내고, 이런 것들. // 신에게 인간의 정서를 부여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신은 긍휼하고 사랑이 넘치고 분노했다! 이런 것들. 신과 인간을 혼동하고 인간이 가진 것을 투사해서 전가하는 것. projection.
*** 정리7은 공리 또는 공통통념 (common notion: 유클리드기하학 원론. 1+1=2, 이런 게 노치오 커뮤니스. 여기서 스피노자는 공리와 노치오 커뮤니스를 같이 쓰고 있다). 따라서 스피노자는 명석판명한 참된 관념을 갖고 있는 사람은 정리7의 참됨을 의심할 수 없다고 말한다 // “하지만 변양은 다른 것 안에 있는 것으로, [곧] 자신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실체]의 개념이 형성되는 것들로 이해할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실존하지 않는 변양들에 대한 참된 관념을 가질 수 있는데, 왜냐하면 지성 바깥에서 현행적으로 실존하지 않는다 해도, 그것들의 본질은 다른 것 안에 포함되어 있어서 이 다른 것을 통해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실체들은 자지 자신을 통해 인식되기 때문에, 지성 바깥의 실체들의 진리는 오직 그것들 자신 안에서만 존재한다” 그러니까 A라는 사람이 현행적으로(actually) 없다고 해도 우리는 지성 바깥에서(in reality) 다른 사람 B, C, D를 통해 인식할 수 있다.
*** “3. 각각의 실존하는 실재에 대하여 필연적으로, 그것이 실존하게 만드는 어떤 원인이 존재해야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 이 3번 주의사항도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무한한 실재의 원인: 그것의 본성, 2) 유한한 실재의 원인: 어떤 외부 원인(만약 실존하지 않으면 실존하지 않는 외부 원인이 존재한다) 평범한 듯 보이지만 사실 굉장히 독특한 주장인데 정리11의 증명게 가서 더 자세히 이야기하겠다. (정리8 증명의 “따라서 그 본성으로부터 유한하거나 무한하게 실존할 것이다.” 와도 통하는 말)
*** 인간 본성의 정의 안에는 거기 왜 20명의 사람이 존재하는가에 대해서는 담겨있지 않다. 참된 정의는 실재의 본성만을 표현할 뿐, 그러한 본성을 지닌 개체들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는 표현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즉, 같은 본성을 지닌 개체들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여부는 실재의 본성에 따라오지 않고, 그 본성 바깥의 외부 원인을 찾아야 한다. 따라서 “같은 본성을 지닌 실체는 오직 하나만 존재할 뿐”이라는 결론이 나온다.(“숫자”를 따진다는 것 자체가 이미 본성 바깥의 외부 원인에 영향을 받는다는 말이다. 이는 외부 원인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실체’의 정의에도 부합한다. 따라서 실체는 오직 하나만)
*** ”어떤 사물에 대해 숫자를 이야기하게 되면 그것은 사물이 유한하다고 하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사실 우리는 앞에서부터 계속 무한에 대해서 숫자를 써오고 있었다. 가령 우리는 속성에 대해 숫자를 쓰고 있다. ‘속성이 하나가 있다, 무한하게 있다’ 이런 식으로. 더 나아가서 실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하나인 것처럼, 두 개인 것처럼, 여러 개인 것처럼. 그렇다면 이런 것들은 첫 번째 문장과 모순되는 점이 분명히 있다. 스피노자가 주석2에서 했던 이야기도 바로 그 이야기다. ‘스무 개의 사람이 있다, 삼각형이 세 개 있다, 네 개 있다’ 이런 것들이 이미 그것들이 유한하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 그런데 우리는 왜 무한한 것에 대해 숫자를 계속 말하고 있었는가. 속성이나 실체는 무한한 것이고 외부원인을 갖지 않는 것인데 왜 우리는 숫자를 말하는가.
1) 우리가 실체나 속성 같은 무한자에 대해 숫자를 사용하는 것은 우리 인식 능력의 한계 혹은 언어상의 한계 때문이다. 무한자에 대해 사실 숫자나 언어를 써서는 안 되는데 우리는 숫자를 빌려오지 않고서는 그것을 표현할 방법이 없다.
2) 좀 더 심층적인 이야기를 하면. 정말 속성이라는 것이 숫자로 표현될 수 없는가. 숫자로 표현될 수 없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연장속성과 사유속성은 서로 다른 별개의 속성인데 우리가 거기에 ‘두 개의 속성’ ‘제 3의 속성’ 이렇게 숫자를 쓰는 게 별 문제가 없을 것 같은데 말이다. 사실 스피노자의 관점에 따르면 우리는 그 표현을 쓰지 말아야 하고 쓰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왜냐면 유한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공통된 본성, 속성을 전제로 한다고 정의2에서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유한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공통된 본성에 대해서만”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넘버링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어떤 공통된 본성에 대한 것”에 있어서만이다. 그런데 속성이라는 건 다른 것과 관계를 맺을 수도 없는 무한한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걸 넘버링 할 수 없다. 속성 안에서는 할 수 있다. 양태 하나, 양태 둘, 이렇게. 하지만 속성 자체에 대해서는 할 수 없다. 우리는 그냥 편의상 그걸 쓰는 것이지, 사실 불가능하다. 스피노자 정의에 따르면 일원론이나 이원론, 모니즘이나 듀얼리즘 같은 표현 또한 매우 잘못된 표현이다. 이 또한 숫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숫자로 표현한 방식들인데 정확히 말하면 그것에 수적인 값을 매겨서 일원론 이원론 다원론이라고 말하는 것은 실체와 변용을 혼동하는 것이다. 신의 속성은 무한하다. 사실 스피노자는 “많다”는 표현도 거의 안 쓴다. 그냥 무한하다는 표현을 쓴다. 신의 속성은 무한하다.
<<<< 이렇게 정리8까지 데카르트의 유한실체론에 대해 비판. 이제부터는 “실체는 무한하냐. 몇 개냐”에 대한 답들이 나올 것이다 >>>>
정리9 각각의 실존하는 실재가 더 많은 실재성 또는 존재를 지닐수록 그 실재에는 더 많은 속성들이 귀속된다
증명 이는 정의4로부터 명백하다
*** 스피노자가 명백하다고 했지만 풀어서 보자. 정리9가 두 개의 명제를 하나로 섞은 것이라는 점에 주목해보자. 한 문장처럼 보이지만 두 명제. 1) 어떤 실재가 더 많은 존재를 가질수록 그 실재는 더 많은 특성들, 곧 실재성 내지 완전성들을 갖게 된다. + 2) 속성은 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실재성 내지 완전성이다.
- 정리9는 데카르트 철학에서 유래한 것이다. 데카르트 철학의 관점에서 1)은 “우리가 어떤 사물의 특성을 잘 알면 알수록 그 사물을 더욱 잘 알게 된다”는 인식론적 원리로서의 의미를, 존재론적 원리도 다시 표현해서 “어떤 실재가 더 많은 실재성 존재를 지닐수록 더 많은 속성들이 귀속된다”. 즉, 데카르트 철학은 우주 안에 존재하는 것들에 위계질서가 있다고 생각했다. 가장 밑바닥에 존재하는 것이 무 nothing(아무런 특성도 갖지 않는다. 아무런 완전성 실재성도 없다) -> 다양한 실재성 내지 완전성을 지닌 존재자들 -> 신(모든 완전성 보유).
- 따라서 데카르트에게 신은 불가지한 존재다. 그리고 신은 불가지한 존재기 때문에 인간은 신에 대해 아주 약간만 알고 있을 뿐, 신의 본질을 알 수 없다. 신은 초월적인 분이기 때문에.
- 하지만 스피노자의 주장: 신은 “인식가능한 존재”다. 초월적이지 않다. 우리 인간이 갖는 범주와 신이 자신을 이해하는 범주는 근본적으로 같다. 우리 인간은 신의 본질을 인식할 수 있다. 그 사이에 거리가 없다.
- 즉, 정리9의 두 가지 명제는 데카르트 철학에서 유래했지만, 데카르트는 이 두 가지 명제를 신에게까지 적용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신에게도 적용했다. 이게 두 사람의 큰 차이점.
*** 주의할 점: 스피노자가 데카르트의 원리를 받아들여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쓰고 있지만, 데카르트의 원리에 담겨있는 존재론적 관점과 위계까지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정리8까지 스피노자는 “하나의 속성에는 하나의 실체만이 있고 그 실체는 필연적으로 무한하다”고 말하고, 정리 11, 15에 가서 “신은 하나의 속성만 갖고 있지 않고 무한한 속성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 하나의 속성만 갖고 있는 실체와 무한한 속성을 갖고 있는 실체, 이 두 가지 사이에 엄청난 양의 차이가 생긴다. 등급으로 따지면 하나의 속성을 가진 실체의 등급이 엄청 낮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하나의 속성만 갖고 있는 실체- 두 개의 속성을 가진 실체- 100개의 속성을 가진 실체의- 무한한 속성을 가진 실체의 위계질서를 상상해볼 수 있는데, 스피노자는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스피노자가 정리8에서 말하는 실체, 정리11과 정리15에서 말하는 실체는 다 같은 실체인데, 하나의 실체를 논증의 전개과정상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 정리9에서 말하는 것은 속성의 양과 더 많은 특성의 양을 추론하는 과정으로 받아들여야지, 우주의 객관적 질서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 스피노자가 존재의 양(어떤 실재가 “더 많은 존재를 가질수록”)과 특성 내지 완전성의 양(그 실재는 “더 많은 특성 내지 완전성을 갖는다”) 사이의 필연적인 대응 관계를 필연적인 원리로 간주하고 있는 것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자인 신의 본성을 조금 더 정확하게, 그리고 조금 더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 도입하는 논증절차이지 현실 자체에 이러한 상이한 등급이 실재들이 존재한다는 뜻이 아니다.
- 현실 자체에 이러한 상이한 등급의 존재자들이 존재한다고 간주하는 것은 플로티노스 Plotinos에서 유래한 신플라톤주의적 관점. 그래서 스피노자 철학이 결국 신플라톤주의의 새로운 어장 아니냐는 비판도 제기됐었다(현실 자체에 상이한 등급을 매기는 점에 있어서). 헤겔도 그렇게 읽고 있다. 하지만 스피노자의 실제 철학과는 차이가 있는 관점이다. 신플라톤주의처럼 “등급이 매겨졌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의 논거는 정리15까지 가면 나올 것이다.
*** 스피노자는 초기 저작인 <소론> 1부 2장 1절 주석에서 바로 이런 원리를 이용하고 있다. “우리가 신이 있다는 것을 증명했으니 이제 그가 무엇인지 증명할 차례이다. 말하거니와 그는 모든 또는 무한한 속성들(이 속성들 각자는 자신의 유 안에서 무한하게 완전하다)이 서술되는[술어로 귀속되는] 존재이다.” (이 점에 대한 근거는 다음과 같다. 무는 아무런 속성들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전체는 모든 속성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무는 그것이 무이기 때문에(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아무런 속성을 가질 수 없는 것처럼, 어떤 것은 그것이 어떤 것이기 때문에 속성들을 갖는다. 따라서 그것이 더 많은 어떤 것일수록 그것은 더 많은 속성을 가져야 한다. 결과적으로 신은 가장 완전하고 무한한 존재이며 전체인 어떤 것이기 때문에 또한 무한하고 완전한 모든 속성들을 가져야 한다.“ -> 존재의 정도와 실재성, 완전성의 비례 -> 더 많은 실존의 역량을 갖는 것
*** 정리9에 대한 이 표현. 존재관계와 실재성의 양적 비례관계. 정리8까지에서는 하나의 속성에는 하나의 실체만이 있다고 했는데, ”여러 개의 속성을 가진 어떤 실체가 존재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이 정의가 깨어진다. ”무한하게 많은 속성을 가진 실체가 있다“는 말에서. 즉, 정의8에서부터 ”무한하게 많은 속성을 가진 실체“까지 이르기위한 논증의 절차에서 정리9는 바로 중간단계인 것이다. 중간단계를 거친 이유는, 당대에 많은 영향을 미친 철학은 데카르트 철학이었고, 그 데카르트 철학의 문법을 가지고 그걸 넘어서고자 하는 스피노자의 논증전략에 있다. 정리9가 바로 그 논증전략의 중심에 있는 것. 즉 정리9에서 정리10, 11, 12로 가는 것은 데카르트 철학의 문법을 가지고 그걸 어떻게 넘어서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다. (그러니까 정리9만 딱 떼어놓고 스피노자 철학을 위계관계라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논쟁에서 중간 맥락 하나를 딱 떼어놓고 주장하지도 않은 것을 주장했다고 우기는 사람이랑 같다. 헤겔 여기서 또 그랬어ㅋㅋ)
정리10 하나의[같은] 실체의 각 속성은 자신에 의해 인식되어야 한다
증명 왜냐하면 속성은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지성이 지각하는 것이며(정의4에 의해), 따라서 (정의3에 의해) 자신에 의해 인식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Q.E.D
*** 정리10에서 초점이 되는 문구는 ”자신에 의해 인식되어야 한다“는 것. 지금까지 전개되는 논증과정에서 ”자신에 의해 인식되어야“하는 것으로 정립된 것은 실체뿐이다(정의3). 따라서 정리10은 ”하나의 실체의 각 속성“은 실체와 다르지 않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그리고 스피노자가 증명에서 정의4에 의거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정의4에서 ”속성은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정의되었기 때문에, 따라서 실체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속성도 자신에 의해 인식되어야 한다는 결론은 쉽게 내릴 수 있다. 하지만 더 문제적인 문구는 따로 있다.
*** “하나의[같은] 실체의 각 속성”. 참 이상한 말이다. 왜? 정리8까지만해도 하나의 속성에는 두 개 이상의 실체가 있을 수 없다고 해왔는데, 정리9에서 ‘많은’ 속성 운운하더니 갑자기 정리10에서는 아예 ‘주어’로 하나의 실체에 복수의 속성이 있을 수 있다는 전제가 당연한 듯 나와버렸기 때문이다. 시몬 드 프리스가 편지를 보낸 것도 정리10의 저 표현 때문이다. 왜 갑자기 저런 표현을 쓰지? 증명도 안 하고? (“하나의 속성에는 거기에 상응하는 하나의 실체가 있다”고 해놓고, 그럼 2개의 속성에는 실체도 2개 존재해야하는데, 복수의 속성에는 복수의 실체가 존재해야하는데 스피노자 선생께서는 왜 그런 결론을 안 내리고 다른 식으로 이야기하는가.“) 상당히 중요한 질문이자, 모두가 혼란스러워하는 지점.
*** 게다가 스피노자는 ”실체의 각 속성“이라고, 마치 속성이 실체에 속하는 것처럼 대뜸 말하고 있다. A) ”속한다“= 전체를 이루는 어떤 부분이라는 말인데, 이 표현을 따르면 속성이 실체의 한 부분인 것이다. 그런데 그 뒤에 바로 B) “자신에 의해 인식되어야 한다= 속성은 궁극적이고 상위개념이 없다”. 그러니까 이 말은 속성은 실체에 포괄될 수도 종속될 수도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A와 B는 모순 아닌가? 주어에 함축되어 있는 것을 술어에서 부정하는 것 아닌가.
A: 스피노자는 “실체의 각 속성”이라고, 마치 속성이 실체에 속하는 것처럼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무엇에 속한다”라고 이야기할 때 우리는 “무엇의 한 부분이다”라고 표현하는데, 이게 아마 “실체의 각 속성”이 담고 있는 뉘앙스일 것이다. “속성은 실체를 구성하는 부분이다”의 뉘앙스. 실체“의” 속성. 실체에 속하는 실체의 속성. 속성이 실체의 부분이라면 속성과 실체 사이에 위계관계가 있는 것이다. 속성들은 실체에 종속되는 것이고, 실체는 속성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B: - 하지만 속성은 “자신에 의해 인식되어야 한다”는 말은, 속성은 자기보다 상위의 논리적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 자기 위의 어떤 궁극적인 원인을 가지고 있지 않다(실체도 속성의 원인이 될 수 없다)= 무언가로 환원되거나 종속되지 않는 것이다 = 무언가의 결과일 수 없다 = 독립적이고 자율적이고 긍극적이다.
- 그리고 정리2, “상이한 속성을 지닌 두 개의 실체는 서로 아무런 공통적인 것도 갖지 않는다”로 인해, “자신에 의해 인식되는” 이 속성들은 서로 아무런 공통적인 것도 갖지 않는다.
- 그러니까 각자 자신에 의해 인식되어야 하는 실체의 각 속성은 서로 아무런 공통적인 것도 갖지 않으며, 따라서 서로 무관한 것으로, 각자 자율적인 것으로 존재해야 하며, 각각의 속성은 저마다 독립적인 실체를 이룬다는 결론이 나온다.
-> A와 B의 논리적 충돌. B가 A가 되었을 때 각 속성들은 “실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는 게 아닌가?? 이 속성들은 실체의 속성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라는 거 아닌가??
-> 이런 점에서 매우 수수께끼 같은 문장이다. ‘공통적으로’ 함께 속해있지만, 각자 또 자율적/독립적인. 그게 바로 실체와 속성의 관계라는 말이다.
* 시몬 드 프리스와의 편지(편지에서 정리8 주석3은 정리10의 주석에 해당)
- 우리는 각각의 존재자를 어떤 속성 아래 인식한다는 것, 그리고 어떤 존재자가 더 많은 실재성 내지 존재를 가질수록 그 존재자에게는 더 많은 속성들이 귀속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내가 어떤 존재자에게 더 많은 속성을 귀속시킬수록 나는 그 존재자에게 더 많은 실존을 부여할 수밖에 없다.
- A: 실체의 본성에는 그것이 지닌 실체의 각 속성이 그 자신에 의해 인식될 수 있다는 점이 속하기 때문이다: 실체는 그 본성상 실체에 속하는 각각의 속성이 그 자신에 의해 인식될 수 있게 한다. 그것이 실체의 본성이다. 실체에 함께 속한다고 해서 그게 실체의 부분을 내포한다거나 종속된다는 것이 아니라, 실체의 각 속성들은 자신에 의해 인식될 수 있다.
- B: 그 이유는 실체가 지니는 모든 속성은 항상 실체 안에 함께 존재해왔으며: 항상” 영원히. 함께 존재해왔다는 이야기는 속성들이 집합적으로 속해있다. 사유속성이 실체로 들어왔고 그 다음에 연장속성이 들어왔고 그 다음에 제3의 속성이 들어왔고 이런 게 아니다. 아예 애초부터 속성들은 실체 안에 들어와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하면 A의 논점과 어긋난다고 할 수 있다. 왜냐면 속성이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히 태초부터 실체에 속해왔다는 이야기니까. 주어와 술어 사이의 충돌의 여지.
- C: 그 중 한 속성이 다른 속성에 의해 생산될 수 없고, 각각의 속성은 실체의 실재성 또는 존재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A와 B사이의 충돌을 해소하는 것이 C. 한 속성이 다른 속성에 의해서 생성될 수 없다 = 그들이 자율적이면서 독립적이면서 동등하다는 이야기다. 그러면서 각각의 속성이 속성으로서 성립하는 것은, 다시 말하면 속성으로서의 논리적인 자율성 독립성 동등성을 얻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속성들 각자가 실체의 실재성 또는 존재, (정의4나 정의6의 표현을 빌면) 실체의 본질을 표현한다는 데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속성이 각자 논리적으로 독립적이고 자율성을 지닐 수 있는 것은, 실체의 본질, 실체의 존재를 집합적으로 표현한다는 데에서 나온다. 그게 속성들 각자가 갖고 있는 논리적 자립성 자율성을 성립하게 만든다.
*** 삼각형을 실체라고, 삼각형의 각 변이나 세 각을 속성이라고 생각해보자. 삼각형을 구성하는 세 변은 삼각형을 구성하지 않는 이상 속성으로 존재할 수 없다. 세 개의 변이 한꺼번에 삼각형에 속하기 때문에 각각의 변이 ‘직선’이 아니라 ‘삼각형의 변’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들 사이에는 시간적인 선후 관계도 없다. 동시에 삼각형을 구성하는 것이다. 삼각형이 가지고 있는 각각의 성질을 우리가 스피노자식의 속성이라고 한다면, 그들은 동시에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고 표현함으로써 삼각형이라는 실체의 본질과, 삼각형의 변이라는 자신의 본질, 자신의 정체성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각각의 변이 종속적인 것은 아니다. 자기 자율성을 갖고 있다. 스피노자가 정리10의 주석에서 표현하려고 하는 것은 그 이야기다. 각각의 속성이 논리적인 자율성과 동등성을 지니고 있으면서 집합적으로 함께 영원히 항상 실체의 본질, 실체의 존재를 표현해왔다는 사실. 까다롭지만 상당히 새로운 주장이다.
*** 하나의 속성이 실체를 표현하는 데에 충분할까? 그렇지 않다면 그 속성은 이미 자율적인 것이 아니다. 속성은 그 하나만으로도 실체의 본질을 다 표현한다. 사물 하나만으로도. 어려운 점은 뭐냐면, 그 속성이 실체의 본질을 다 표현하기 위한 조건이 “다른 속성과 함께 실체를 구성하고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각각의 속성이 하나만으로도 자율적으로 독립적이기 위한 조건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유속성이든 연장속성이든 그 속성 하나만으로도 실체의 본질이 온전히 표현된다. 그런데 각각의 속성이 실체의 본질을 남김없이 표현하기 위한 조건, 그와 동시에 성립하게 되는 논점은, 그 속성이 동시에 다른 속성들과 함께 실체의 본질을 표현한다는, 바로 그것으로 인해서 각각의 속성은 자율적으로 존재한다.
*** 왜 스피노자가 정의4에서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지성이 지각하는 것을 속성으로 이해한다”라고 이야기했을까. 지성이라는 것은 말하자면- 속성 아래서 인식하는 것이 지성이다. 속성을 초월해서 인긱하는 게 지성이 아니라 어떤 속성을 따라서 인식하는 게 지성인 것이다. “지성에 의해 지각된다”는 말 자체에 함축해있는 뜻은 “속성을 distribute(정확하게 어떻게 번역해야할지 모르겠지만 분배적으로? 분포적으로?) 사고한다”이다. 속성들 하나하나를 개별적으로 독립적으로. 지성은 항상 어떤 속성에 따라 인식을 하니까. 사유속성에 따라서든, 연장속성에 따라서든. 스피노자는 그걸 대립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속성이 개별적으로 자율적으로 성립하는 것과 집합적으로 실체에 속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대립이나 배제의 관계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각자가 집합적으로 함께 실체의 본질을 표현하거나 구성한다는 것이, 각자가 자율적이고 독립적으로 성립하기 위한 바로 그 조건이다. 역으로, 또 속성 각자가 자율적으로 독립적으로 존립하는 것이 이것들이 집합적으로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기 위한 역의 조건이다. 그러니까 이 두 가지는 서로 배타적인 관계에 있지 않다.
*** 스피노자가 아주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으로 이야기하지만. 이건 아주 구체적인 사회적 현실로 표현될 수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생태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이야기하고, 어떤 사람들은 자본가와 노동자, 정규직과 비정규직 이야기를 하고, 어떤 사람은 내셔널리즘-국민과 외국인, 인종문제, 각각 이야기를 한다. 예전에 막스주의가 한참 유행하던 시기에는 노동과 자본의 관계가 제일 중요한 관계고 나머지는 종속적인 문제다라고 치부하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사실 절대 그렇지 않다. 각각의 쟁점들이 다 독립적이고 자율적이다. 그런데 그걸 다 각각이 독립적이고 자율적이다라고 선을 긋고 나누어버리면 진정한 사회적 투쟁이 이루어질 수 없다. 각자 독립적이고 자율적이면서도 뭔가에 함께 속해야하고, 또 함께 속하는 것을 통해서 어떤 의미에서보면 각자가 자율적인 관계나 쟁점으로 성립할 수 있다. 그런 게 지금 존재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존재해야 한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이 실체-속성 관계를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게 한 가지 방식이다. 이것은 매우 풍부하고, 우리에게 많은 생각할 거리를 가져다주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