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요일 저녁부터 주말내내 스피노자를 읽고 정리하는 데에 푹 빠져있다가 아침 요가와 함께 일상으로 돌아왔다. 퇴근하고 내가 정말정말 좋아하는 추리소설가와 번역가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던 양꼬치모임까지 너무 좋은 흐름으로 며칠을 살았다 아아 너무 즐거웠네 정말. -스피노자-요가를 왔다갔다하는 세미묵언수행모드가 어쩐지 꽤 삶을 한적하면서도 꽉 채우는 느낌이라 5월 초까지는 최대한 사적인 약속을 줄이고 이렇게 살고 싶은데 그렇게하기 쉽지는 않을 테고 전환을 빨리빨리 잘하는 걸로.

 

* 전에 다니던 회사에 내가 무척 좋아하던 친구가 있었다. 여러 장점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특히 가장 존경스러웠던 점은 일상을 뒤흔들만한 재앙이 밀려들었을 때 충분히 흔들릴 줄 알고, 그럴 여지가 잠재되어있는 어떤 일들에 일단 마음을 열어볼 줄 아는 단단함이었다. 보통의 경우 그 어느 것에도 잘 흔들리지 않는 게 단단함인 것 같은데, 그래서 나는 어떤 일이 닥치면 거기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그러니까 단단하게 버티기 위해, 그 일에 내포되어있는 여러 가시들을 다 발라내서 부드럽게 씹어 넘길 수 있는 살만 남겨놓은 다음에야 삼켜 넘길 수 있었는데, 그 친구는 가시가 여기저기 박혀있는 걸 일단 그대로 입에 넣었고 그 상황에 내재되어있는 어떤 괴로운 결들까지도 그대로 받아들이고 괴로워했다.


생각해보면 나는 결국 단단하지 못해서 단단하려고 했고, 한 번 크게 흔들리고 난 그 이후가 늘 두려웠고, 내 영혼의 관성력을 신뢰하지 못해서 잘 흔들리지도 못했던 것 같다. 그 친구에게는 한없이 요동치다가도 결국 잔잔한 어딘가에 가닿을 거라는 확고한 믿음이, 어딘가에 가닿지 못하더라도 그건 그것대로 뭐 어때~라고 생각할 줄 아는 대담함이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늘 어딘가로 나아갔지. 내가 늘 가지고 싶어했던 단단함은 그런 거였던 것 같다. 흔들리지 않기 위해 모든 걸 다 쳐내어버리는 단단함이 아니라 파도에 나를 내맡겨볼 수 있는 단단함. 흔들리지 않는 단단함이 아니라 흔들릴 줄 아는 단단함. 그냥 어쩌다보니 맥락없이 막 흔들리는 게 아니라 흔들릴 준비가 되어있고 기꺼이 선택하는 단단함. 이번 생에서 가져나 볼 수 있을지. (그렇다고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같은 김난도식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다(질색...)


* 요가 수련 중에 가장 힘든 시간은 아쉬탕가도 아니고 빈야사도 아니고 코어요가 시간인데 빈야사를 플랭크처럼 하는 시간이라 코어 근육을 굉장히 많이 써야한다. 지난 달에는 코어요가 수업 듣고 오면 그 다음날 배와 엉덩이 근육이 욱신거려 크게 웃지도 못했는데ㅋㅋ 이번주는 그래도 한결 낫다. 게다가 지난 달에는 신경 쓴다고 신경 썼지만 버티다보면 힘이 자꾸 분산돼서 안 가야할 어깨랑 허리 손목으로 힘이 가서 약간 뻐근했는데 이번 주는 그것도 한결 없어졌다. 한 동작씩 없는 힘을 짜내서 홀딩을 하고 있으면 평소에 그 동작을 할 때 내 몸이 어떻게 움직이고 내 몸 안에서 힘이 어떻게 흐르는지를 느껴볼 수 있어 이것 또한 좀 좋은 것 같다. 코어요가는 꾸준히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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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11 ”신 또는 각자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표현하는,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로 구성된 실체는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증명 만약 이것을 부정할 경우, 할 수 있다면 신이 실존하지 않는다고 생각해보라. 이렇게 되면 (공리7에 의해) 그것의 본질은 실존을 함축하지 않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정리7에 의해) 부조리하다. 따라서 신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Q.E.D.

 

* 정리11은 중세철학 및 근대철학에서 이른바 신 존재 증명 과정(demonstraion of the God) 이라고 불리는 것의 형태로 되어있다. 여기에 대해 스피노자는 3개의 증명과 주석 제시

* 정리11의 증명1은 귀류법. 신이 실존하지 않는다고 가정하고 귀류법에 따라 신이 필연적으로 존재한다고 증명하고 있다.

* 증명2: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하여 causa sive(or) ratio- 존재하는 것도 이유가 있기 마련이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 핵심적인 스피노자 철학의 형이상학

*** 1)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는 그 이유가 사물의 본성 안에 있거나(, 존재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그 본성 안에 있거나), 2) 어떤 경험적인 이유에 의해서 존재하거나(실재의 본성 밖에 이유가 있거나)

*** 네모난 원은 실존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본성 안에 있다. 모순을 함축하고 있다. 불가능.

*** 실체가 왜 존재하는가는 그 이유가 실체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본성 안에 함축되어 있다(정리7) 원이나 삼각형은 본성상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자기원인적이 아니라) 물체의 보편적 본성의 질서, 자연의 어떤 법칙에서 따라 나온다.

 

*** 매우 흥미로운 형이상학적 주장. 여기 깔려있는 생각은 모든 것은 본성상 존재하려는 경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중요한 전제). , 실존하려는 경향. 모두 그런 경향이 있는데 왜 실존하지 않나? 그것을 가로막는 어떤 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래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 사실 본성상 잠재적으로 다들 실존하려고 한다. -> 그러므로 신을 방해하는 것이 없다면 신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 만약- : 신의 본성 밖에 있다= 다른 본성을 지닌 다른 실체 속에 그 이유나 원인이 있을 것이다. 왜 하필이면 다른 본성이냐? 만약 같은 본성을 지닌 실체라면 이건 신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다른 본성을 지닌 다른 실체 속에 신이 존재하는 것을 방해하는 이유나 원인이 있다고 해보자. 공통적인 것을 갖고 있지 않으면 서로 상호작용 인과 작용 할 수 없다. 즉 신하고 공통적인 것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은 신을 방해할 수 없다는 이야기. -> 따라서 그 이유는 바깥에 존재할 수 없다.

*** 왜 신의 본성이 모순을 함축하냐면 신이라는 것은 실체니까. 신은 본성을 함축하고 있다. 그런데 신의 본성 안에 실존하지 않는 이유를 갖고 있다고 하면 저것과 부딪힘-> 모순.

 

* 강의록

 

<<<<< 라이프니츠 <자연과 은총의 원리 Principle de la Nature et de la Grace> 7.

왜 무가 아니라 어떤 것이 존재하는가?”

-> 라이프니츠의 이 문장은 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 자연(넓은 의미의 자연/ 존재하는 것 모두, 실재하는 것 모두)

- 은총(즉 실재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이걸 넘어서!)

형이상학이라면 실재를 초월하는 것에 대한 질문을 해야 한다. 그러니까 실재를 창조한 것에 대한 질문. 신학적 질문. 이프니츠 입장에서 존재만이 질문의 대상이 되는 건 너무 납작했다. “도 질문이 돼야한다. 형이상학적인 ”. 아무것도 없는 것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존재와 대등한 것. (그 말은 반대로 말해서) 이 세상이 존재하는 것은 당연한 것/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니 질문이 뜻하는 바는 왜 존재하는가. 이 우연은 누가 가능하게 했냐”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바로 신... 그분....) 저 질문 자체만 듣고 너무 멋있었는데 추론해나가며 답까지 이르는 과정에서 깼다ㅋㅋ

 

*** 스피노자의 말과는 매우 대조적 개념.

 

* 스피노자: 무는 이미 있다가 없어진 것(“시간의 개념으로 놓았다?) 그러니 왜 실존하지 않는지 밝혀야 한다(왜 실존하지 않는가? VS 왜 실존하는가). 실존하지 않는 것에는 원인 또는 이유가 존재할 테니까. 당연히 없는 게 아니라-> 우연적으로 없는 게 아니라-> 어떤 이유로 없는 것이다. 그 존재하지 않는 어떤 이유를 밝히자!

 

* 스피노자는 무와 실존을 동등한 두 개의 항으로 정립하지 않고, 비실존/”를 이미 실존의 한 양태로 포섭하고 있는 것이다(실존의 양태 중에 없음상태로 실존). 이는 첫째, 스피노자에게 는 실재성을 지닌 사태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실존이나 마찬가지니까). 둘째 이것은 논리적 근거나 인과성 원리는 항상 이미 일어난 존재함이라는 사태 이후에 적용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 ( 1) “는 이미 존재로 포괄되니까 2) “는 이미 일어난 존재함이 없어진, 그러니까 그 이후의 상태인 것. , “이미 일어난 존재함이라는 사태 이후!)

 

* 스피노자에게 자기원인은 이러저러한 존재자 또는 실재의 필연적 실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이미 필연적 실존 그 자체를 의미하고 있다. 곧 이는 누구에게 귀속되기 이전의, 누구의 실존으로 존재하기 이전의 있음이라는 사태 자체를 의미. 자기원인에 대한 정의에서 그 본성이 실존하는 것으로... 인식될 수 없는이라는 규정, “그것말고 달리~ 일 수 없음라는 규정은 바로 이를 가리킨다. (스피노자에게 존재(실존)한다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 필연적인 것이므로 왜 존재하는가 라는 질문은 아예 성립하지 않는다. 이미 저 스피노자의 문장에 필연으로써그 이유, 왜에 대한 답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아니 실존할 수 밖에 없다고 필연성을 이미 잔뜩 부과했는데 거기에 뭘 물어!)

 

* “그 본질이 실존을 함축하는 것이라는 규정은 라이프니츠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가능태인 본질에서 현실태인 실존으로의 이행이라는 관점이 스피노자에게는 부재함을 가리킨다(왜냐면 이미 본질 안에 실존이 들어가 있는데, AB가 들어가 있는데 어떻게 A에서 B로 움직일 수가 있나!). 본질은 항상 이미, 영원하게 실존을 함축하고 있으며 실존은 항상 이미 본질의 행위, 현행적인 본질이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자기원인 개념은 암묵적으로 자연의 외부나 자연 이전에 성립하는 형이상학적 무를 가정하는 궁극적 근거에 관한 문제설정과 무관하며, 근본적으로는 부정이나 결핍, 무를 포함하지 않는 존재, 있음의 순수한 실정성을 가리킨다!

(형이상학적 를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창조론을 너무나 뒷받침해주는 것이니까! 스피노자에게 이 세계란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가 나타나는 기원따위는 없다)

 

*** 스피노자 주장: 형이상학적인 무는 존재하지 않는 허구다. 무의미한 말. 라이프니츠는 있지도 않은 것을 만들어서 혹세무민 하고 있다 VS 라이프니츠의 주장: 스피노자는 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

 

*** 라이프니츠의 <이성에 토대를 둔 자연과 은총의 원리> 7. “어떤 것도 충분한 이유 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곧 어떤 것도 사태를 충분하게 인식하는 이에게 왜 그것이 다른 식으로가 아니고 그처럼 존재하는가에 대하야 충분한 이유를 제시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게끔 일어나지 않는다. 이 원리가 정립되면 우리가 첫 번째로 제기할 수 있는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왜 도대체 무가 아니라 어떤 것이 존재하는가?[왜 도대체 아무것도 없지 않고 어떤 것이 존재하는가?] 왜냐하면 무는 어떤 것보다 더 단순하고 더 쉬운 것이기 때문이다.”

- 충족이유율 principle of sufficient reason PSR 충분한 근거의 원리

- noting without sufficient reason. 일어나는 모든 일은 사태를 충분히 인식하는 사람이라면 충분한 설명을 제시할 수 있다. 왜 도대체 아무 것도 없지 않고, 어떤 것이 존재하는가. 무는 더 단순하고 쉬운 것인데. 세상에는 이렇게 더 단순하고 쉬운 무이지 않고 존재하는 것들이 왜 많은가.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적 무에 대한 이 질문이 여전히 나는 매우 매력적이고 흥미롭다. 물론 그 결과가 은총이라는 것이 매우 찬물을 끼얹지만ㅋㅋ)

- 라이프니츠의 질문에서 어떤 것은 논리적으로, 형이상학적으로 동등한 두 가지 선택지로 제시되어 있다. 어떤 것, 존재자, 자연, 더 나아가 이 세상, 이 우주가 존재하는 것은 필연적이거나 당연한 일이 아니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 역시 얼마든지 논리적으로 가능한 경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에서 존재는 무에 대하여 논리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우월성을 지니지 않는다. 만약 무 대신에 어떤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형이상학적 필연성의 결과가 아니라 어떤 선택의 결과이다. 창조의 선택. 은총.

- 그러니까 라이프니츠는 존재에는 어떤 신학적인 사건과 선택이 개입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개입은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논리.

- 라이프니츠는 원래도 긴 글보다는 10-20페이지 분량의 짧은 글들을 굉장히 많이 썼는데 워낙 쪽글들을 많이 써서 분류에 애를 먹는 바람에 아직도 전집이 완성이 안 됐다. 100년 동안 편찬 중상태로 아직도 한 권씩 나오고 있다. 불어로 쓴 게 대부분이고 소수의 글들을 독어와 라틴어로 썼다. 이 시대에는 불어가 우리나라의 영어 같은 지위를 지녔기 때문이다.

 

*** 스피노자에게도 무가 존재한다. 하지만 라이프니츠처럼 형이상학적 무가 아니라, 존재해야 마땅한 어떤 것이 어떤 이유내지 근거로 인해 존재하지 않는 상태. 그러니까 단순히 실존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실존하지 않음에 대해서도 충분한 이유가 요구되고 있다.

- 라이프니츠에게 무라는 것은 대등하게 맞서있는 것 VS

스피노자에게 무라는 것은 (존재의 한가지 양상으로서) 존재 안에 들어와 있는 것,

- 무언가 있어야 하는데(<- 이게 전제) 있어야 할 자리에 어떤 이유로 무언가가 사라진 상태가 무이다. 왜 없을까? 불에 타서 사라졌을까? 질병을 앓아 죽었나? 같은 설명이 필요한 상태. , “존재해야 마땅한데왜 존재 안하지? 이런 논리.

- 스피노자에게는 무는 항상 이미 존재 안에 포함되어 있으며, 존재의 한 방식이다. 이미 를 포괄하고 있다.

 

*** 그렇다면 라이프니츠는 존재만이 설명의 대상인가? 그렇지 않다. 선택이 가능한 것이다. 물론 무일 때는 딱히 설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스피노자가 불교를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아마 라이프니츠는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동양철학에 관심이 많았으니까.

- 스피노자에게는 본성상 실존하지 않는 것은 없나? 그러니까 형이상학적인 무? 없다. 스피노자가 신학적인 것을 거부하는 이면이다. 자연은 영원하고, 자연이 영원하다는 것은 창조의 순간이 없다는 말이다. 시초나 기원, 끝점이 없다(지난 번 강의와 묶어서 생각해보면 흥미롭게 이어짐)

 

*** 데카르트의 영원진리창조론 VS 스피노자

- 17세기 철학은 여러모로 참 재미있다. 데카르트와 메르센 신부. 메르센 신부는 철학적으로 아주 독창적인 사상가는 아니지만, 훌륭한 사교성을 바탕으로 17세기 후반 유럽 철학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유럽의 유명한 사상가와 많이 알고 지냈고 서로를 연결시켜주는 역할. 그래서 메르센 신부의 전집은 대부분 편지다(이거 어쩐지 재밌다ㅋㅋ 역시 그 시대의 사교성이 활발한 사람들은 지금의 sns처럼 편지를 사랑) 데카르트가 1630년에 신부에게 편지를 몇 통 보냈는데, 이 편지들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면 몇 통 안 되는 이 편지들에 영원진리창조론 (영원진리라는 것은 신에 의해 창조됐다는 독트린을 담고 있다)에 대한 이야기가 쓰여 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가 생전에 출판한 책 어디에서도 이런 이야기는 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다.

- 데카르트가 영원진리라고 말하는 것은 1=1=2 a=b 의 아주 기본적인 논리. 즉 영원진리는 시공간을 초월해서 항상 참인 것. 이것들은 시간적인 구애를 받지 않는다. 기원전에는 참이었다가 서기 3000년에 거짓이 되고 이런 거 없음. 흥미로운 것은 데카르트가 이 영원진리들이 신에서 창조된 것들이라고 말한다는 점이다.

- , 이 말은 영원진리는 영원히참인 것이 아니라 신에 의해 진리라고 창조됐다. 이 말은, 신이 마음만 먹으면 이것들을 진리가 아닌 것으로 바꿔버릴 수 있다는 말이다. 신은 전능한 분이니까. 그러니까 데카르트는 영원성보다 신이 더 높은 곳에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만약 신의 바꾸려는 의지에도 불구하고 영원진리는 전부 참이다라고 하면 이것은 신의 전능하고 무한한 의지를 제한하는 것이 되니까. 영원진리로 한정해버리는 것이니까. 그러면 이건 신이 아니지, 신은 영원진리까지도 거짓으로 만드는 힘을 가져야 신이지. 이게 데카르트의 관점. 신은 논리적 참과 거짓도 초월한다고 보는 것.

- 이게 17세기 철학이 재미있어지는 부분이다. 우리가 진리라고 부르는 영역 이외에 또 하나의 영역을 만드는 것이니까. 어떻게 보면 순전히 사변적이고 쓸모없는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형이상학적으로는 매우 재밌는 이야기다.

- 근데 스피노자는 자연이 영원진리이고 영원하다고 본 것이다. 스피노자의 신은 이것을 거짓으로 만드는 신이 아니다. 저것들을 참이라고 인식하는신이다(창조하는 신이런 거 없고, 영원진리를 참이라고 인식하는 신이라고 못 박음ㅋㅋ) 데카르트에 대한 스피노자의 반박을 앞으로 <에티카>에서 보게될 것이다.

 

- 그렇다면 데카르트에게 신은 진리가 아닌가? 진리의 신이 있고 진리 위의 신이 있고 그런 것인가? : 1) 진리로서의 신이 있고(“전지함으로서의 신”) -> 신의 무한한 지성 // 전능함으로서의 신 -> 신의 무한한 의지, 이렇게 신한테 저 두 가지가 다 있다고 보는 것이다.

- 그렇다면 스피노자의 신은 지성 + 의지? 그렇지 않다. 스피노자의 생각은 지성이나 의지는 같은 것이고 지성이나 의지는 신의 본질과 무관하다. 지성과 의지는 신의 본질이 아니고 신의 본질(=실체의 본질)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하나였다. 실체의 본질은 속성 밖에 없다. “실체의 본질=> 속성이것은 스피노자가 일관되게 하는 말이다.

- 정리12-14에서 다루게 될 것들: 스피노자는 본질에서 바로 따라나오는 성질을 특성이라고 했고. 신에게도 이런 특성이 있다고 했다. 신만이 고유하게 갖고 있는 특성. 자기원인, 영원성, 무한성 같은. 이것들은 특성이지 본질이 아니다. 정의12-14까지는 이런 다른 성질이 나올 것이다.

 

*** 라이프니츠에게 이 우주가 존재하는 것은 필연적이지도 않고 영원하지도 않다. 신이 창조했으니까. 양자택일이 가능한 무와 존재. 스피노자에게는 아니다. 우주는 계속 존재해왔고 영원하다. “무로부터의 창조이런 것은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사망했다 사라졌다면, 스피노자에 따르면 그 죽음에 대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어떤 생물의 종이 멸종했다면, 거기에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처음부터 없는 것은 없다. (여기서 나의 질문: 스럼 스피노자는 모든 것들은 무한하다가 전제였던 것일까? 지금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들은 이유가 있을 텐데, 지금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 과연 몇 개인지는 알 수 없으니까. 이를테면 지금 세상에 30종이 존재하고 있다고 치자.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원래 400종이 있는 가운데 370종이 없어진 건지 500종인데 470종이 없어진 건지 알 수 없으니까, 그렇다면 기본적으로 스피노자는 무한을 전제로 하는 것인가. 스피노자는 그럼 조차도 무한한 거라고 생각한 것인가)

- 자연의 일부인 인간. transformation. 인간은 다른 종류의 물질 형태였다가 어떤 조합에 의해서 이런 형상을 갖게 된 것. 그래서 스피노자 철학은 진화론을 이야기할 수 있는 여지가 많다.

 

* 역량 potentia VS potestas

이탈리아어, 불어, 독어는 저 두 가지가 다 단어로 구분되어 있는데 영어에는 “power”라는 단어가 일괄적으로 저 두 가지를 다 의미한다. 그래서 번역하는 데에 고민이 따름

- 스피노자 윤리학에서 저 두 개를 잘 구별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다. 나중에 정치학에 관한 논의에서 특히 중요하다. 2부 정리3에 가면 potentiapotestas로 오해하는 것에 대해 나온다.

- 그 오해의 내용: 포테스타스는 어떤 주체가 자기 의지대로 임의대로 행사할 수 힘을 말한다. 이를테면 왕이 자기 마음대로 기존의 법을 폐지하거나 제정하거나 하는 것. 하지만 자연의 법칙 같은 것은 신이 그렇게 마음대로 만들었다가 없앴다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사람들이 마치 신의 포텐시아를 포테스타스로 오해한다. 그래서 신의 역량을 기적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그 기적이라는 것은 결국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것을 말한다.

- 그러니까 신의 역량을 왕의 역량과 같은 것으로 혼동한다. 포테스타스는 어떤 필연적인 법칙에 따라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임의대로 주체자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것인데 말이다.

 

- 에드윈 컬리의 <윤리학>을 제일 좋은 번역이라고 추천했지만, 컬리의 맹점은 이것이다. 이렇게 구분이 중요한 포텐시아와 포테스타스를 일괄적으로 다 “power”라고 번역해놨다. 나중에 그는 이 부분에 대해서 1993년에 낸 논문집에서 자기비판을 하는데 1985년에 <에티카>를 번역할 때만 해도 이 두 가지를 굳이 구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정치학을 공부하면서 아, 이건 꼭 구분했어야 했구나, 자기 실수를 깨달았다고.

- 이 두 개를 가장 세밀하게 구분한 사람은 안토니오 네그리 Antonio Negri. 그가 1981년에 낸 책이 <The Savage Anomaly 야생의 별종>인데, 이 야생의 별종은 바로 스피노자다. “17세기 서양 근대철학 역사 속에서 스피노자 철학은 아주 별종이었다. 어떻게 분류가 안 되는이라는 내용이 골자인데, 한국에는 <야만적 별종>이라고 번역되어 나왔다. 물론 잘못된 번역이다. 제목부터 이렇게 잘못 번역했는데, 혹시 도서관에서 이 책을 보면 피해가야 한다ㅋㅋ 읽을 수가 없다. 얼마 안 돼서 절판됐기 때문에 읽을 수가 없고, 번역이 엉망이라서 읽을 수가 없고ㅋㅋ

- 네그리의 저 책에서 다중이라는 말이 처음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다중이라는 용어를 스피노자 철학에서 처음으로 발굴해낸 것이 바로 이 책. “다중이야말로 스피노자 철학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가 바로 이 책의 핵심이다. 그 전까지는 그 누구도 스피노자의 다중이라는 것에 주목한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이 책이 스피노자 연구의 고전이라고 불리우는. 그런데 왜 아직까지 재번역되어서 나오지 않을까? 아마도 이탈리아어로 쓰였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에 이탈리아어를 잘 하면서 동시에 스피노자를 잘 아는 사람은 매우 드무니까(정말 없을 것 같다ㅋㅋ)

- 저 책을 영어로 번역한 사람은 네그리의 제자 마이클 하트. 네그리의 <야생의 별종>의 또 다른 중요한 테제는 포테스타스와 포텐시아를 엄격히 구별해야 한다. 포테스타스는 지배권력이 행사하는 힘. 권력자라거나 미신적 신이라거나 신학적 철학자의 힘이다”. 그렇다면 네그리 책을 영어로 번역할 때 이 두 개념을 하트가 어떻게 구별해서 썼을까? 그는 역자 서문에서도 굉장히 강조한다. 포텐시아를 대문자 Power, 포테스타스를 소문자 power로 번역했다. 정말 궁여지책으로 낸 아이디어다.

- 우리나라 연구자들은 너무나도 쉽게 번역을 한다. 자기가 처음 보면 신조어인 줄 알고 신조어를 막 만들어낸다. 하지만 외국 연구자들은 그렇지 않다. 방금 컬리나 하트 이야기를 했지만, 이게 그렇게 중요한 말이라면 포텐시아는 “potential”로 쓰고, 포테스타스는 “power”라고 썼을 수도 있을텐데(이게 바로 우리나라식 번역이다) 근데 potential에는 포텐시아가 갖는 능동적인 의미가 없으니까 고심 끝에 그 단어로 번역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나라 연구자들은 막... 포텐시아를 역능이라는 말로 풀어썼다. 저건 그냥 능력을 뒤집은 말에 불과하다ㅋㅋㅋ 새로운 말을 만들어내는 것이 진보인 줄 안다.

어쨌거나ㅋㅋ 포텐시아와 포테스타스를 구분하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 증명3

실존하지 못함은 무능력 = impotentia

- 인간을 비롯한 유한한 존재자들, 많은 개체들은 세상에 존재한다 = 존재할 수 있는 역량potentia을 갖고 있다.

- 따라서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그것보다 역량이 작은 것들은 실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실체로 실존하거나 양태로 실존하니까. 그리고 양태로 실존하려면 실체가 필요하니까. 그렇기 때문에 실체는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 증명3에 딸린 주석.

- 후험적 aposteriori 아포스테리오리

선험적 aporiori 아포리오리

- 증명3에서 나는 경험적(후험적)으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에 입각해서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했다는 의미로 시작해서 요약하면- 우리가 존재하잖아. 우리 인간이, 우리 유한한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 수 있잖아. 우리가 실존할 수 있는 역량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잖아.그럼 생각해보자. 우리가 이렇게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 수 있는데 우리보다 역량이 더 큰 신이 실존하는 거 당연한 거 아니냐. <- 이게 바로 후험적인 증명. 이렇게 하면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니까 증명3에서는 이렇게 증명을 해봤는데 이는 그들이 오직 외부원인들로부터 따라나오는 실재들을 바라보는 데만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주석에서는 선험적으로도 증명해보겠다.

- 핵심은 외부 원인에 의해 생겨나는 것들“(양태/변용)자기 자신의 본성에 의해 실존하는 것을 구별하는 것

 

* 정리12-14는 신의 특성을 도출해내는 정리들

 

정리12 ”어떠한 실체의 속성도, 그로부터 실체가 분할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오게끔, 참으로 인식될 수 없다.“

정리13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체는 분할될 수 없다

 

- 의미: 실체가 분할될 수 있다고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경우는 없다.

- 실체가 분할된다 = 실체가 여러 부분으로 쪼개진다

- 정리1213은 한 쌍을 이루고 있다. 실체는 분할될 수 없다는 핵심 논점을 공유하고 있으며, 증명 절차도 거의 동일하다. 스피노자는 정리12에서 가설적으로 다수의 실체를 전제한 가운데, 실체를 분할되게 만드는 어떠한 실체의 속성도 참되게 인식할 수 없다는 논점을 이끌어낸다. 그 다음 정리13에서는 여느 실체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체에 대하여, 이 실체는 분할될 수 없다는 동일한 논점을 이끌어낸다. 귀류법.

- 정리12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체만이 아니고 실체라고 부를 수 있는“ // 정리13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체.

 

* 정리12 증명

실체가 분할될 수 있다고 가정을 해보자

그렇게 되면 1) 분할된 부분들이 실체의 본성을 유지하는 경우 2) 유지 못하는 경우

1)의 경우부터 살펴보자. 그럴 때 이 말은 하나의 실체로부터 다수의 실체가 형성될 수 있다는 것을 함축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정리6에 의해 모순된다(실체는 다른 실체에 의해 생산될 수 없다) -> 따라서 실체는 분할될 수 없다

- 2)의 경우. 이것은 부분들이 전체와 아무런 공통적인 것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하나의 실체는 (분할된) 다른 실체와 공통되는 것들이 하나도 없다. , 속성을 공유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속성을 공유하지 않는 것들은 서로 인과작용을 할 수 없다. 이렇게 되면 전체는 부분들 없이 존재하고 인식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반대로 부분들도 전체와 무관하게 인식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정의4와 정리10에 의해 모순된다. -> 분할될 수 없다

- 자연이 분할될 수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자연이 두 개가 될 수 없다는 이야기다.

무한하게 많은 속성이 있다는 것은 속성이 있다는 것은 분할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 * 정리10을 살펴보면서 여기서 주어를 잘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하나의 실체의 각each 속성하면- 이것은 마치 실체가 전체고 each 속성들은 실체를 이루는 부분들이라고, 실체-속성은 전체-부분의 관계라고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든다. 하지만 정리10의 술어를 보면 자신에 의해 인식되어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그러니까 속성 각자는 자신에 의해 인식되는, 논리적 자립성(정의3에서도 나오지만)을 갖는, 독립적이고 자립적인, 상위에 어떤 개념도 갖고 있지 않는다는 것. 실체-속성이 전체-부분의 관계라면 자립적일 수밖에 없으니 이렇게 이해하면 저 술어에서 위배된다. 그래서 정리10은 매우 복잡하고 어떤 점에서 역설적이다. 요지는, 속성들은 실체에 공통적으로 집합적으로 속해있지만 전체-부분의 관계가 아니다. 속성들 하나하나가 자립성을 가진 채로 실체에 속해있다. 사유속성 없이도 연장속성이 인식될 수 있듯이(그 반대도 마찬가지듯이) 자립적으로 성립한다. 그렇다고 이 두 개의 속성이 두 개의 상이한 실체를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스피노자는 실체의 본성에는 실체의 각 속성이 그 자신에 의해 인식될 수 있다는 점이 속한다고한다. 그 이유는 실체가 지니는 모든 속성은 항상 실체 안에 함께 존재해왔기 때문이다, 영원히. 그러니까 각각의 속성은 다 자립적이다.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실체에도 결코 의존하지 않는다. 실체가 속성보다 존재론적으로 상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신이라는 실체는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이 함께 집합적으로 구성하는 것. 영원히.

 

* 속성은 실체의 각각 다른 표현들이다. 각각의 속성이 실체를 전부 다 표현한다. 2부 정리7로 가보자. 유명한 평행론. 여기에 매우 재미있는 표현이 나온다 order and connection.

*** 주석을 보자. ”곧 무한 지성이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지각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하나의 유일한 실체에 속하며, 따라서 사유하는 실체와 연장되는 실체는 하나의 동일한 실체로, 때로는 이 속성 아래에서, 때로는 저 속성 아래에서 파악된다.“ -> 하나의 동일한 것이 두 가지 속성으로 표현된다. ”그리하여 우리가 자연을 연장 속성 아래에서 인식하든 사유속성 아래에서 인식하든 아니면 다른 어떤 속성 아래에서 인식하든 간에, 우리는 하나의 동일한 질서 또는 하나의 동일한 인과 연관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곧 동일한 실재들이 서로 따라 나오게 될 것이다.“

*** 이 논리가 나중에 3부에 가게 되면- 인간은 정신과 신체로 구성되어있다. 정신은 사유속성에 속하고 신체는 연장속성에 속하지만, 이렇게 상이한 속성에 속하는 두 개의 양태지만, 이 두 개의 양태가 구성하는 인간이라는 통일체는 동일한 코나투스를 표현한다. 하나의 동일한 코나투스가 때로는 정신을 통해 때로는 신체를 통해 표현되기도 하는 것이다. 하나의 똑같은 코나투스다.

***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의 경우에도 인간과 신체, 인간과 정신이 부분-전체 관계가 아니다. 실체-속성의 관계가 전체-부분의 관계가 아닌 것처럼.

 

* 인공지능인 AI가 속성이 될 가능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마 스피노자라면 사유속성이라고 할 것 같은데 사유속성을 벗어난 새로운 속성이 될 가능성은? 아마 스피노자는 AI, 이게 바로 내가 말한 정신이야! 내가 말하는 관념이야! 라고 말할 것 같다ㅋㅋㅋ 그럼 무한지성으로 바라볼 수 있는가? ㅋㅋㅋ 그렇겠지, 무한지성의 일부겠지. (사유나 연장속성이 아닌 속성의 예를 찾아보기 위한 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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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리3이 너무나 당연한 말을 쓴 것 같지만("주어진 규정된 원인으로부터 필연적으로 결과가 따라 나오며, 반대로 아무런 규정된 원인도 주어져 있지 않다면 결과가 따라나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모든 일에는 다 규정된 원인이 있다"는 하나마나해보이는 말), 그리고 인간-특히나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이성적 인간-은 누구나 다 저 당연한 말에 동의할 것 같지만, 잘 생각해보면 인간은 어떤 초월적 영역, 불가지한 영역에 쉽게 유혹된다. 합리적으로 밝혀내지 못한 원인의 결과로 존재하는 것(종교에서의 신, 사주나 별점 같은 미신)믿고 싶다는 욕망이 생기면 얼마든지 신비초월성에 이성의 영역을 내어주면서까지 믿으려고 든다. 믿고 싶은 것 앞에서는 합리적으로 밝혀내지 못한 원인에 대한 그럴만한 이유를 어떻게든 붙여주고 싶어하고, 심지어 그 합리적으로 밝혀내지 못한 원인에 어떻게든 합리를 부여하려고 한다.


이를테면 사주나 별점의 경우 후자에 속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이야기가 인류 역사를 거쳐 쌓인 통계에 기반한다인데, 몇 세기를 걸쳐 몇십 만명을 대상으로 그들의 운명과 성격을 탄생일과 탄생시간별로 자료를 모아 분석하고 통계를 낸 흔적으로서의 실질적 자료를 본 적 있는 사람? ‘통계에 기반한다는 것은 아직까지 그 누구도 명확히 제시하지 못한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다(그리고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건 애초에 말이 안 되는 불가능한 작업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기독교에서 성경에 근거하여 신의 기적이라는 초월에 합리를 덧입히려고 하는 것은 또 어떻고.


'합리가 통하지 않을 때 사람들은 신은/오컬트는 초월적 영역에 속해있는 거라서 인간의 지성으로는 인식할 수 없다는 말로 믿고 싶은 것을 그냥 영역 밖의 어떤 미지의 세계라는 신비를 덧바른다. 물론 인간의 지성이 매우 하찮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자연만물을 신이 만들어냈고 조종한다는 이유를 붙여 인간의 삶에 종속시켜버리고, 자연 그 자체로 존재하는 별자리를 미지의 영역이라는 이유를 붙여 인간의 삶에 대해 말해주는 어떤 것이라고 보는 것 자체가 이미 너무 인간 중심주의 아닌가. 인간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자연만물들이 인간의 운명에 대해 다 말해주고 신앙에 대한 인간의 믿음을 돈독하게 하기 위해 기독교적 수단으로 존재하겠어. 인간처럼 하찮은 존재에 자연만물이 그리 관심이 있을 거라고, 거기서 인간의 운명을 읽고 점칠 수 있고 신앙의 근거를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인간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인간은 그냥 일개 만물 중 하나일 뿐이니까. 


아무튼 초월적 존재인 신에 대한 중세신학의 이런 비합리적인 점들이 스피노자는 참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인식할 수 없는 영역따위를 아예 뿌리뽑아버리려는 의지가 듬뿍 담긴 공리2, 공리2에서 분명히 그은 선 위에 한 번 더 분명한 선을 긋는 공리3이 어쩐지 좋았다. 그리고 나는 장담할 수 있다. 공리3을 읽으면서 뭐야, 이거 너무 당연한 말이잖아?”라고 말하는 현대사회의 이성적인 사람들 중에도 믿고 싶은 것앞에서는 저 공리3을 쉽게 버려버릴 사람이 많을 거라는 것을. 중세신학의 시대에 살면서 스피노자는 얼마나 속이 터졌을까.. 4-5년이라는 시간 동안 사주나 별점을 보러 다니고 재미있어하고 진지하게 귀담아 듣기도 했던 사람= 즉 공리3처럼 생각하지만 믿고 싶은 것 앞에서 지성을 잠시 버리고 초월성을 덧바르며 무너졌었던 사람으로서 매우 찔렸고, 반성합니다... 그리고 그 시기에 나의 비이성을 저러다 말 귀여운 일탈로 여겨주고 견디어줬던(심지어 매우 심드렁한 상태로 같이 사주나 별점을 보러 가주기도 했던), 나의 친구들에게도 감사합니다... 


아울러 공리3을 정의7과 함께 생각해보면서, “자유로움에 대해 오해하는 많은 사람들이(나를 불편하게 만들고 부정적 감정을 주거나 압박- ‘잘하고 싶다라는 성취욕까지 포함하는 압박-을 주는 모든 것을 없애버리는 것을 진정한 자유로움이라고 오해하는) 합리적 인식 영역을 벗어나는 것 앞에서 매력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두 가지 모두 객관적 이성의 토대가 단단하지 않을 때 쉽게 빠져들 수 있는 것들이니까. 자유에 대한 오해(이성이 헐거우면 감성과 부딪히는 제약적인 것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감당하기 버거우니까)와 비이성적 영역에 대한 맹신(이성 대신 감성을 건드리는 마음에 드는 것들이 주는 위안은 매우 크니까).


3. 사주나 별자리에 대한 신뢰를 보이지 않을 때 명리학자나 점성술사들에게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 중 하나가 이것이다. "인간이 되게 복잡하고 개개인이 다 특별해보여도 사실 그렇지 않다.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눠 분류할 수 있고, 그 분류에 누군가는 속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적 오만이다"  나는 여기에 동의한다. 심지어 12가지 유형 분류도 너무 많다고 생각한다ㅋㅋㅋ 소설이나 시나리오 작법서만 읽어봐도 그렇다. 인간 캐릭터나 인간의 삶을 담은 서사구조의 종류는 의외로 몇 가지 안 된다. 그 몇 가지 안 되는 타입이 끝임없이 변주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유형 분류의 기준이 '출생년도와 출생시간' '별자리'라는, 과학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아무런 근거 없는(아무 자료나 사료도 없는 통계학 이야기 빼놓고는) 것이라면, 그게 어떻게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이 되겠느냐는 것이 이성적인 사람들이 사주나 별자리에 눈하나 깜짝하지 않는 근거다. 근거 없는 전제로 그룹핑을 한 뒤에 미래까지 점치는 것을 어떻게 믿지? 기독교 교리도 마찬가지다. 성경이라는, 누군가의 번역이 거친 텍스트를 누군가의 해석이 붙은 설교로 전해지는 것인데 그 "누군가"의 역량에 따라 천차만별의 해석이 나오는 와중에 하나의 신앙적 규범이라는 것이 굳건하게 존재하는 게 가능한가? 그걸 마치 "신의 말씀" "신의 뜻"이라고, "누군가"에 해당하는 인간들의 사고가 완전히 배제된 초월적 교리라는 듯이, 무조건 따르고 순종하라고 주장하는 걸 어떻게 믿지? 허무맹랑한 것에 기대고 싶은 마음은 알지만(나도 내 인생에서 가장 혼란스럽고 나약했던 시기에 이 모든 것들에 차례로 한번씩 기대었던 몇 년의 시간들이 있었기에), 그 허무맹랑함을 '합리'로 치장하고 이성적 인정까지 바라지 않았으면 좋겠다. 말 같지 않지만 그냥 내가 믿고 싶어서-라고, 잘 쓴 건 아니지만 그냥 내가 읽으면 좋아서-라고 아끼는 책 이야기하듯 하면 되잖아.


4. 별점과 신앙 이야기하면서 정희진 님이 그랬지. 그게 무엇이 됐든 인생에서 쉽게 답을 얻으려고 하는 모든 시도들은 다 사기라고.


5. 그래서 스피노자의 성격이 확실히 보이는 공리2와 거기에 함축되어있는 뜻이 정말 좋았다("다른 것에 인식될 수 없는 것은 자신에 의해 인식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인식할 수 없는 영역으로 존재하는 것들, 그래서 초월성이라는 아우라를 자동적으로 갖게 되는 것들에 대해 그런 건 있을 수 없다고 철저하게 논박하는 것. 그 "초월성"이라는 아우라가 중세신학의 신에게 비합리적이면서 커다란 권위를 부여하는 당대 분위기의 싹을 아예 뽑아버리려는 그의 지성적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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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을 한 적 있다. 사실 시중에는 스피노자의 <에티카>에 관한 책들이 제법 많이 나와있다. 요약본, 개론서, 해설서 등등. 아니, 여기까지 갈 것도 없이 <에티카> 원서도 있고, 번역서들도 여러 권있다. 이 중에 서너 권만 골라서 읽으면 되지 않을까. 보통 내가 책에서 얻고자 하는 것은 재미나 지식, 지혜, 저 모든 것들을 즐길 수 있는 방법적 틀, 같은 것들일 테니까. 그렇다면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이렇게이렇게 말했고 이것은 이러저러이러저러한 것이며 여기서 우리는 이렇고저렇고를 배울 수 있다정도의, 생산적이고 삶에 바로 적용할 수 있는, 결론에 해당하는 메시지들을 바로 가져가고 넘어가는 것이 여러모로 현명한 방법일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하루에 2시간 30분씩, 네 번의 세미나를 거쳐 겨우 책에서 한 장에 해당하는 분량을 읽어내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렇게 문장 by 문장으로 해석하고 파고들면서 a-> b-> c-> d.... 그러다가 마침내 Z를 얻어내는, 결국에는 저 Z에 해당하는 것들을 얻거나 알고자 책을 읽기 시작하는 것인데 그 과정인 a, b, c, d, e, f....에 이렇게 1년 이상을 통째로 쏟아 붓는 것이 과연 현명한가. 비생산적이지 않은가. 이런 현타가 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 10시간동안 한 장을 읽은 경험이 그동안 했던 몇 안 되는 철학공부 비스무리와 비교했을 때 훨씬 재미있었고, 이 과정을 쫓아가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철학에서 얻고 싶은 것 그 자체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만큼 느리게느리게 걸어가는 시간들이 무척 황홀했다. 세미나가 끝나고 녹초가 된 상태로 집에 돌아갈 때면 늘 그렇게 가슴이 두근거릴 수가 없었다


이런 소회들을 느끼던 중에 공리4를 접했고, 스피노자가 했던 잘려나가고 혼동된 방식으로라는 표현이 성큼 와 닿았다. 첫 시간에 스피노자가 "어떻게 해야 자신이 갖고 있는 철학사상을 최대한 진리의 소실 없이 전할 수 있는가.“에 대해 고민하고, 그 오랜 고민 끝에 기하학적 방식으로 집필한 것이 <에티카>라는 이야기와 하나의 맥락에서 생각하면, 나는 지금 최대한 진리의 소실 없이 전할 수 있는고민이 담긴 <에티카>최대한 진리의 소실 없이가져가기 위해서, ”잘려나가고 혼동된 방식이 끼어들 여지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 이렇게 한 문장 한 문장에 몇 시간씩을 들이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아무리 이렇게해도 당연히 엄청나게 많은 진리의 소실이 있을 것이고, 잘려나가고 혼동된 방식으로 남는 진리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행위 자체에서 오는 감동이 크다. 이를테면 10시간의 소요 끝에 공리4에서 2부 정리7로 넘어갔을 때, 그리고 공리5에서 공리6으로 넘어갔을 때 몰려오는 커다란 감동 같은 것은 이런 방식이 아니었다면 얻을 수 없었을 것이기에.


삼스럽지만(정리1에서부터 정리10까지 읽으면서 늘 그래왔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기 때문에), <에티카> 정리들의 간결한 한두 문장이 도출되기까지의 과정을 따라가는 것은 살면서 뇌를 가장 근사하게 쓰는 방법 중 하나가 아닐까. 스피노자 철학에 관심이 있어서 나에게 이런저런 것을 묻는 친구들에게 이제부터는 잊지 않고 덧붙이려고 한다. “기회가 있다면 꼭 한 줄 한 줄 읽어나가는 강독을 들어봐라고. 가장 비생산적이지만 가장 짜릿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라고. <에티카>는 담겨있는 메시지를 이해하고 내 것으로 만들기에도 시간이 매우 많이 걸릴 난해한 책이지만, 그 메시지를 이해하고 내 것으로 만드는 것에만 만족하기에는, 메시지가 도출되는 과정을 하나하나 느릿느릿 따라가는 감동을 놓치기에는 너무 아까운 책이다. 기하학적으로 단단하게 세공된 철학책은 에티카가 유일하니까. 수학 교과서에서 외우라고 파란칸이 쳐져있는 공식을 그냥 외우는 것보다 그 공식이 왜 나왔는지를 알아가는 즐거움, 혹은 영어 단어를 그냥 외우는 것보다 그 단어의 어근과 어원을 아는 재미에 약했던 사람은 <에티카>를 보면 정신을 못 차릴 지도 모른다ㅋㅋ 정리5때도 그랬지만 정리8의 증명을 따라가면서도 그랬다. 수학적 짜릿함. 나의 머릿속에 레고가 한 조각도 남김없이 딱딱 맞춰지며 작고 볼품없는 건물이라도 하나씩 세워지는 짜릿함.

 

- 정리8 + 정의6 = 하나의 속성에 존재하는 각각의 무한한 실체가 있고 각각의 무한한 실체가 무한하게 많이 구성된 것이 신인가. 그렇다면 실체는 무한+1이 존재한다는 이야기인가(<-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이 있고 무한하게 많은 실체들이 있다고 말하는데, 그 무한하게 많은 실체들이 구성하는 절대적인 신이라는 존재가 있으니 그게 바로 1. <- 아 이 기하학적 추론의 아름다움 어쩔거야ㅠㅠㅠ 무한+1이라니ㅠㅠㅠㅠ) 대체 실체는 몇 개나 존재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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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8 모든 실체는 필연적으로 무한하다

증명 하나의 속성의 실체[하나의 같은 속성을 지닌 실체]는 오직 하나만이 실존할 뿐이며(정리5에 의해), 그것의 본성에는 실존함이 속한다(정리7에 의해). 따라서 그 본성으로부터 유한하거나 무한하게 실존할 것이다. 하지만 유한하게 실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정의2에 의해) 이 경우 그것은 동일한 본성을 지닌 다른 실체-이것 역시 필연적으로 실존해야하는 것이다(정리7에 의해)-에 의해 한정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같은 속성의 두 실체[같은 속성을 지닌 두 실체]가 실존하게 될 텐데, 이는 부조리하다(정리5에 의해). 따라서 그것은 무한하게 실존한다.

 

*** 정리81차적 논증이 일단 끝이 나는 시점.

 

*** 실체가 존재할 수 있는 방식은 유한 아니면 무한인데, 정의2 유한이라는 정의 자체는 같은 본성을 지닌 두 개 이상의 레스가 존재할 수도 있는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다. 그리고 이 가능성을 받아들여 실체가 유한하다고 가정한다면, 같은 본성을 지닌 실체에 의해 한정되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 말은 같은 본성을 지닌 두 개 이상의 실체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말인데, 이것은 정리5와 함께 할 수 없다! -> 실체가 존재할 수 있는 방식은 유한 아니면 무한인데 유한할 수 없다 -> 따라서 실체는 필연적으로 무한하다는 것이 증명된다!!

 

*** 여기서 제기될 수 있는 질문

정리8의 증명에서 말하듯 하나의 속성의 실체는 오직 하나만이 실존할 뿐” + 정의6에서 말하듯 신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자, 곧 각자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표현하는,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로 구성된 실체” -> 이 두 개를 합쳐보면 하나의 속성의 실체는 오직 하나 -> (그렇다면)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에는 무한하게 많은 실체 -> :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로 구성된 = 무한하게 많은 실체들로 구성된 인가! ->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무한한 실체는 무한하게 많이 존재하는 것인가. (정리8에서 이미 주어가 모든인데,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인 어떤 것을 가지고 모두라고는 표현하지 않으니, 모든에는 복수가 존재한다는 의미가 함축된 것인데, 그렇다면 실체는 무한대의 가짓수인가)

- 정리8 + 정의6 = 하나의 속성에 존재하는 각각의 무한한 실체가 있고 각각의 무한한 실체가 무한하게 많이 구성된 것이 신인가. 그렇다면 실체는 무한+1이 존재한다는 이야기인가(<-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이 있고 무한하게 많은 실체들이 있다고 말하는데, 그 무한하게 많은 실체들이 구성하는 절대적인 신이라는 존재가 있으니 그게 바로 1. 아 이 기하학적 추론의 아름다움 어쩔거야ㅠㅠㅠ) 대체 실체는 몇 개나 존재하는가.

이것이 바로 정의9-15에서 스피노자가 논증하려는 것들이다

 

주석1 유한하다는 것은 사실은 어떤 본성의 실존에 대한 부분적 부정이고 무한하다는 것은 절대적 긍정이기 때문에, 단지 정리7만으로부터 모든 실체는 무한해야 한다는 점이 따라 나온다.

 

*** 스피노자에 따르면 정리8은 정리7에서 바로따라 나온다.

- 여기서 스피노자는 유한무한을 새롭게 규정하고 있다. <<유한함: 어떤 본성의 실존에 대한 부분적 부정/ 무한함: 어떤 본성에 대한 절대적 긍정>>

- 정리7: 실체의 본성에는 실존함이 속한다 = 실체는 본성상 실존할 수밖에 없다

- 이것을 다르게 표현한다면, 실존에 대한 절대적 긍정이다. ? 본성이 실존이기 때문에. 항상 언제든 실존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정리7은 실존에 대한 절대적 긍정이다)

- 반면에 실존에 대한 어떤 것이 유한하다”= 어떤 경우에는 실존하고 어떤 경우에는 실존하지 않는다 = 실존에 대한 부분정 부정. , 실존이 자기원인에서만 성립한다는 것이 아니고, 그것에 대해서만 절대적으로 긍정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 지금 나는 실존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평생 실존할 것은 아니다. 생일 이전에 나는 실존하지 않았고, 사망일 이후에는 실존하지 않을 것이다. 바로 이게 실존에 대한 부분적 긍정이고 부분정 부정이다. 그러나 무한하다는 말은 절대적 긍정이고, 그은 생일이나 사망일 같은 게 없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다.

 

- 정의7 자유에 대한 정의: 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서만 실존하고(자기원인적= 실존에 대한 절대적 긍정), 자기 자신에 의해서만 행위하도록 규정되는 CF 필연적이거나 제약되어있는 것은 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것에 의해 실존한다는 이야기다.

- 예를 들면 내가 생일이 있다는 것은 내가 다른 실재에 의해 탄생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내가 어딘가에 고용관계로 들어가서 일정하게 정해진 시간동안 정해진 방식대로 일을 하도록 되어 있다는 것=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실존하고 작업하도록 규정.

 

*** 정리8에서는 무한한 것과 유한한 것이 대립되고 서로 상응관계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무한한 것은 자유롭고, 유한한 것은 제약적이고. 지금은 이렇게 이해해도 문제가 없는데, 나중에 인간학 3부에 가면 문제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저 도식을 받아들인다면 자유로운 것은 무한한 것밖에 없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유한한 것은 자유롭지 못하고 제약적이다도 따라 나온다. 이렇게 되면 어떤 결론이 나오냐면, “인간은 절대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럼 스피노자 철학에서 인간에게는 자유의 여지가 없는 것인가?

- 스피노자는 많은 사람들에게서 이런 비판을 매우 많이 받았다. 스피노자 당대에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피에르 벨 Pierre Bayle(프랑스 계몽주의의 선구자 같은 사람. 나름 16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 라이프니츠의 <변신론 Essai de Theodice Theodicy>. Theodicy: 라이프니츠가 만들어낸 신조어. 그리스 theos + dike 이론. 신의 정의를 다룬 이론. 신은 정의롭고 자비로우니 절대 악한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논증하는 학문. 예전에는 신정론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변신론이라고 한다.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신은 전능하고 전지한 분이라고 하는데, 실상은 세상에 너무나 많은 악이 창궐하고 선량하고 정의로운 사람들이 핍박받거나 악인에 의해 억압당하는 일들이 무수히 많고, 홍수나 가뭄 같은 자연 재해도 많고. 그러니 사람들이 도대체 신이라는 게 있는가. 신이 정의롭다고 하는데 정의로운 분이 맞는가. 신이 전지전능하고 자비롭다는데 대체 왜 인간에게 끊임없이 재앙이 닥치는가. 이런 것들을 설명하는 이론이다. 기독교를 매우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적인 이론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흥미로운 이론이기도 하다. 18세기 철학의 아주 중요한 화두 또한 저것이었다. 저 주제는 신학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정치철학, 은폐된 정치철학이다. 라이프니츠가 무려 800페이지나 되는 글을 썼는데 이 책에 나오는 사람 중 하나가 바로 피에르 벨이다.

- 피에르 벨이 아주 방대한 책을 하나 썼는데 <Dictionnaire historique et critique 역사적이고 비판적인 사전> 고대에서부터 현대까지 서양 사상사에서 아주 유명하고 저명한 사람들에 관한 사전을 쓴 것이다. 사상가들에 대한 비판적인 백과사전(국내에서는 서울대학교 도서관에서 실물로 본 적이 있다). 여기에 50페이지 정도 분량으로 스피노자 항목이 있다. 이 항목에서 바로 스피노자의 이런 측면을 비판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아무런 자유의지도 없고 인간의 윤리적 행동의 여지도 없다는 것.

- 하지만 나중에 3부에 가서 이 문제를 살펴보겠지만 사실 스피노자는 유한하다는 것에 대해서 자유의지를 전면적으로 부정한 것이 아니다. 정리8에서 유한한 것에 대한 부분적인 부정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다시 말하면 부분적인 긍정을 함축한다. 그러니까 유한자에게는 실존의 긍정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유한하게, 곧 부분적으로 긍정되고 있는 것이다. 실존의 부분적 긍정이 가진 인간학적 윤리적 함의를 포함, 부분적 부정/ 부분정 긍정에 대해 1부 정리 2836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다.

 

* 주석2는 정리7에 대한 부연설명. 상당히 재미있는 주석이다.

*** 실체와 변양을 혼동하는 것이 정리7의 증명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주된 이유다. 자기 안에 의해 인식되는 것과 다른 것에 의해 인식되는 것을 잘 구별하지 못하는 것. 사람들이 실체라는 것을 일상에서 접하는 사물들(자연적인 실재, 우리가 흔히 접하는 사물들)처럼 생각하니까 자꾸 혼동한다(아리스토텔레스적 실체로 생각하는).

- 변양과 실체의 핵심적인 차이는 시초를 지니는가여부이다.

시초를 지니는가= 다른 실재에 의해 탄생/생산되는가.

- 양자를 혼동하는 사람들은 변신의 가능성을 믿는 사람들이다. 말하는 것은 사람의 고유한 특성인데 나무도 말하는 것처럼 형상이 변형된다고 상상하는. 만화동화적 상상력의 비판.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계속 서양 철학자들이 기본적인 원칙으로 삼는 것이 모든 사물에게는 고유한 포르마(형상 form)가 있다는 것. 인간에게는 인간의 포르마, 개에게는 개의 포르마가 있다. 우리가 본성이라는 말을 쓸 때 보통 저 포르마를 생각한다. 사람의 포르마와 개의 포르마는 섞이고 교환되지 않는다. 섞일 수 없다. 그런데 동화적인 상상력에서는 이걸 섞어 놓는다.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 메타모르포시스. 이 폼이 저 폼으로 바뀌는. 호박이 마차가 되고 손오공이 머리카락으로 사람을 만들어내고, 이런 것들. // 신에게 인간의 정서를 부여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신은 긍휼하고 사랑이 넘치고 분노했다! 이런 것들. 신과 인간을 혼동하고 인간이 가진 것을 투사해서 전가하는 것. projection.

 

*** 정리7은 공리 또는 공통통념 (common notion: 유클리드기하학 원론. 1+1=2, 이런 게 노치오 커뮤니스. 여기서 스피노자는 공리와 노치오 커뮤니스를 같이 쓰고 있다). 따라서 스피노자는 명석판명한 참된 관념을 갖고 있는 사람은 정리7의 참됨을 의심할 수 없다고 말한다 // “하지만 변양은 다른 것 안에 있는 것으로, [] 자신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실체]의 개념이 형성되는 것들로 이해할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실존하지 않는 변양들에 대한 참된 관념을 가질 수 있는데, 왜냐하면 지성 바깥에서 현행적으로 실존하지 않는다 해도, 그것들의 본질은 다른 것 안에 포함되어 있어서 이 다른 것을 통해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실체들은 자지 자신을 통해 인식되기 때문에, 지성 바깥의 실체들의 진리는 오직 그것들 자신 안에서만 존재한다그러니까 A라는 사람이 현행적으로(actually) 없다고 해도 우리는 지성 바깥에서(in reality) 다른 사람 B, C, D를 통해 인식할 수 있다.

 

*** “3. 각각의 실존하는 실재에 대하여 필연적으로, 그것이 실존하게 만드는 어떤 원인이 존재해야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 3번 주의사항도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무한한 실재의 원인: 그것의 본성, 2) 유한한 실재의 원인: 어떤 외부 원인(만약 실존하지 않으면 실존하지 않는 외부 원인이 존재한다) 평범한 듯 보이지만 사실 굉장히 독특한 주장인데 정리11의 증명게 가서 더 자세히 이야기하겠다. (정리8 증명의 따라서 그 본성으로부터 유한하거나 무한하게 실존할 것이다.” 와도 통하는 말)

 

*** 인간 본성의 정의 안에는 거기 왜 20명의 사람이 존재하는가에 대해서는 담겨있지 않다. 참된 정의는 실재의 본성만을 표현할 뿐, 그러한 본성을 지닌 개체들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는 표현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 같은 본성을 지닌 개체들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여부는 실재의 본성에 따라오지 않고, 그 본성 바깥의 외부 원인을 찾아야 한다. 따라서 같은 본성을 지닌 실체는 오직 하나만 존재할 뿐이라는 결론이 나온다.(“숫자를 따진다는 것 자체가 이미 본성 바깥의 외부 원인에 영향을 받는다는 말이다. 이는 외부 원인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실체의 정의에도 부합한다. 따라서 실체는 오직 하나만)

 

*** ”어떤 사물에 대해 숫자를 이야기하게 되면 그것은 사물이 유한하다고 하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사실 우리는 앞에서부터 계속 무한에 대해서 숫자를 써오고 있었다. 가령 우리는 속성에 대해 숫자를 쓰고 있다. ‘속성이 하나가 있다, 무한하게 있다이런 식으로. 더 나아가서 실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하나인 것처럼, 두 개인 것처럼, 여러 개인 것처럼. 그렇다면 이런 것들은 첫 번째 문장과 모순되는 점이 분명히 있다. 스피노자가 주석2에서 했던 이야기도 바로 그 이야기다. ‘스무 개의 사람이 있다, 삼각형이 세 개 있다, 네 개 있다이런 것들이 이미 그것들이 유한하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 그런데 우리는 왜 무한한 것에 대해 숫자를 계속 말하고 있었는가. 속성이나 실체는 무한한 것이고 외부원인을 갖지 않는 것인데 왜 우리는 숫자를 말하는가.

 

1) 우리가 실체나 속성 같은 무한자에 대해 숫자를 사용하는 것은 우리 인식 능력의 한계 혹은 언어상의 한계 때문이다. 무한자에 대해 사실 숫자나 언어를 써서는 안 되는데 우리는 숫자를 빌려오지 않고서는 그것을 표현할 방법이 없다.

2) 좀 더 심층적인 이야기를 하면. 정말 속성이라는 것이 숫자로 표현될 수 없는가. 숫자로 표현될 수 없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연장속성과 사유속성은 서로 다른 별개의 속성인데 우리가 거기에 두 개의 속성’ ‘3의 속성이렇게 숫자를 쓰는 게 별 문제가 없을 것 같은데 말이다. 사실 스피노자의 관점에 따르면 우리는 그 표현을 쓰지 말아야 하고 쓰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왜냐면 유한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공통된 본성, 속성을 전제로 한다고 정의2에서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유한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공통된 본성에 대해서만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넘버링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어떤 공통된 본성에 대한 것에 있어서만이다. 그런데 속성이라는 건 다른 것과 관계를 맺을 수도 없는 무한한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걸 넘버링 할 수 없다. 속성 안에서는 할 수 있다. 양태 하나, 양태 둘, 이렇게. 하지만 속성 자체에 대해서는 할 수 없다. 우리는 그냥 편의상 그걸 쓰는 것이지, 사실 불가능하다. 스피노자 정의에 따르면 일원론이나 이원론, 모니즘이나 듀얼리즘 같은 표현 또한 매우 잘못된 표현이다. 이 또한 숫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숫자로 표현한 방식들인데 정확히 말하면 그것에 수적인 값을 매겨서 일원론 이원론 다원론이라고 말하는 것은 실체와 변용을 혼동하는 것이다. 신의 속성은 무한하다. 사실 스피노자는 많다는 표현도 거의 안 쓴다. 그냥 무한하다는 표현을 쓴다. 신의 속성은 무한하다.

 

<<<< 이렇게 정리8까지 데카르트의 유한실체론에 대해 비판. 이제부터는 실체는 무한하냐. 몇 개냐에 대한 답들이 나올 것이다 >>>>

 

정리9 각각의 실존하는 실재가 더 많은 실재성 또는 존재를 지닐수록 그 실재에는 더 많은 속성들이 귀속된다

증명 이는 정의4로부터 명백하다

 

*** 스피노자가 명백하다고 했지만 풀어서 보자. 정리9가 두 개의 명제를 하나로 섞은 것이라는 점에 주목해보자. 한 문장처럼 보이지만 두 명제. 1) 어떤 실재가 더 많은 존재를 가질수록 그 실재는 더 많은 특성들, 곧 실재성 내지 완전성들을 갖게 된다. + 2) 속성은 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실재성 내지 완전성이다.

 

- 정리9는 데카르트 철학에서 유래한 것이다. 데카르트 철학의 관점에서 1)우리가 어떤 사물의 특성을 잘 알면 알수록 그 사물을 더욱 잘 알게 된다는 인식론적 원리로서의 의미를, 존재론적 원리도 다시 표현해서 어떤 실재가 더 많은 실재성 존재를 지닐수록 더 많은 속성들이 귀속된다”. , 데카르트 철학은 우주 안에 존재하는 것들에 위계질서가 있다고 생각했다. 가장 밑바닥에 존재하는 것이 무 nothing(아무런 특성도 갖지 않는다. 아무런 완전성 실재성도 없다) -> 다양한 실재성 내지 완전성을 지닌 존재자들 -> (모든 완전성 보유).

- 따라서 데카르트에게 신은 불가지한 존재다. 그리고 신은 불가지한 존재기 때문에 인간은 신에 대해 아주 약간만 알고 있을 뿐, 신의 본질을 알 수 없다. 신은 초월적인 분이기 때문에.

 

- 하지만 스피노자의 주장: 신은 인식가능한 존재. 초월적이지 않다. 우리 인간이 갖는 범주와 신이 자신을 이해하는 범주는 근본적으로 같다. 우리 인간은 신의 본질을 인식할 수 있다. 그 사이에 거리가 없다.

 

- , 정리9의 두 가지 명제는 데카르트 철학에서 유래했지만, 데카르트는 이 두 가지 명제를 신에게까지 적용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신에게도 적용했다. 이게 두 사람의 큰 차이점.

 

*** 주의할 점: 스피노자가 데카르트의 원리를 받아들여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쓰고 있지만, 데카르트의 원리에 담겨있는 존재론적 관점과 위계까지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정리8까지 스피노자는 하나의 속성에는 하나의 실체만이 있고 그 실체는 필연적으로 무한하다고 말하고, 정리 11, 15에 가서 신은 하나의 속성만 갖고 있지 않고 무한한 속성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 하나의 속성만 갖고 있는 실체와 무한한 속성을 갖고 있는 실체, 이 두 가지 사이에 엄청난 양의 차이가 생긴다. 등급으로 따지면 하나의 속성을 가진 실체의 등급이 엄청 낮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하나의 속성만 갖고 있는 실체- 두 개의 속성을 가진 실체- 100개의 속성을 가진 실체의- 무한한 속성을 가진 실체의 위계질서를 상상해볼 수 있는데, 스피노자는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스피노자가 정리8에서 말하는 실체, 정리11과 정리15에서 말하는 실체는 다 같은 실체인데, 하나의 실체를 논증의 전개과정상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 정리9에서 말하는 것은 속성의 양과 더 많은 특성의 양을 추론하는 과정으로 받아들여야지, 우주의 객관적 질서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 스피노자가 존재의 양(어떤 실재가 더 많은 존재를 가질수록”)과 특성 내지 완전성의 양(그 실재는 더 많은 특성 내지 완전성을 갖는다”) 사이의 필연적인 대응 관계를 필연적인 원리로 간주하고 있는 것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자인 신의 본성을 조금 더 정확하게, 그리고 조금 더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 도입하는 논증절차이지 현실 자체에 이러한 상이한 등급이 실재들이 존재한다는 뜻이 아니다.

- 현실 자체에 이러한 상이한 등급의 존재자들이 존재한다고 간주하는 것은 플로티노스 Plotinos에서 유래한 신플라톤주의적 관점. 그래서 스피노자 철학이 결국 신플라톤주의의 새로운 어장 아니냐는 비판도 제기됐었다(현실 자체에 상이한 등급을 매기는 점에 있어서). 헤겔도 그렇게 읽고 있다. 하지만 스피노자의 실제 철학과는 차이가 있는 관점이다. 신플라톤주의처럼 등급이 매겨졌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의 논거는 정리15까지 가면 나올 것이다.

 

*** 스피노자는 초기 저작인 <소론> 121절 주석에서 바로 이런 원리를 이용하고 있다. “우리가 신이 있다는 것을 증명했으니 이제 그가 무엇인지 증명할 차례이다. 말하거니와 그는 모든 또는 무한한 속성들(이 속성들 각자는 자신의 유 안에서 무한하게 완전하다)이 서술되는[술어로 귀속되는] 존재이다.” (이 점에 대한 근거는 다음과 같다. 무는 아무런 속성들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전체는 모든 속성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무는 그것이 무이기 때문에(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아무런 속성을 가질 수 없는 것처럼, 어떤 것은 그것이 어떤 것이기 때문에 속성들을 갖는다. 따라서 그것이 더 많은 어떤 것일수록 그것은 더 많은 속성을 가져야 한다. 결과적으로 신은 가장 완전하고 무한한 존재이며 전체인 어떤 것이기 때문에 또한 무한하고 완전한 모든 속성들을 가져야 한다.“ -> 존재의 정도와 실재성, 완전성의 비례 -> 더 많은 실존의 역량을 갖는 것

 

*** 정리9에 대한 이 표현. 존재관계와 실재성의 양적 비례관계. 정리8까지에서는 하나의 속성에는 하나의 실체만이 있다고 했는데, ”여러 개의 속성을 가진 어떤 실체가 존재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이 정의가 깨어진다. ”무한하게 많은 속성을 가진 실체가 있다는 말에서. , 정의8에서부터 무한하게 많은 속성을 가진 실체까지 이르기위한 논증의 절차에서 정리9는 바로 중간단계인 것이다. 중간단계를 거친 이유는, 당대에 많은 영향을 미친 철학은 데카르트 철학이었고, 그 데카르트 철학의 문법을 가지고 그걸 넘어서고자 하는 스피노자의 논증전략에 있다. 정리9가 바로 그 논증전략의 중심에 있는 것. 즉 정리9에서 정리10, 11, 12로 가는 것은 데카르트 철학의 문법을 가지고 그걸 어떻게 넘어서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다. (그러니까 정리9만 딱 떼어놓고 스피노자 철학을 위계관계라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논쟁에서 중간 맥락 하나를 딱 떼어놓고 주장하지도 않은 것을 주장했다고 우기는 사람이랑 같다. 헤겔 여기서 또 그랬어ㅋㅋ)

 

정리10 하나의[같은] 실체의 각 속성은 자신에 의해 인식되어야 한다

증명 왜냐하면 속성은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지성이 지각하는 것이며(정의4에 의해), 따라서 (정의3에 의해) 자신에 의해 인식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Q.E.D

 

*** 정리10에서 초점이 되는 문구는 자신에 의해 인식되어야 한다는 것. 지금까지 전개되는 논증과정에서 자신에 의해 인식되어야하는 것으로 정립된 것은 실체뿐이다(정의3). 따라서 정리10하나의 실체의 각 속성은 실체와 다르지 않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그리고 스피노자가 증명에서 정의4에 의거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정의4에서 속성은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정의되었기 때문에, 따라서 실체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속성도 자신에 의해 인식되어야 한다는 결론은 쉽게 내릴 수 있다. 하지만 더 문제적인 문구는 따로 있다.

 

*** “하나의[같은] 실체의 각 속성”. 참 이상한 말이다. ? 정리8까지만해도 하나의 속성에는 두 개 이상의 실체가 있을 수 없다고 해왔는데, 정리9에서 많은속성 운운하더니 갑자기 정리10에서는 아예 주어로 하나의 실체에 복수의 속성이 있을 수 있다는 전제가 당연한 듯 나와버렸기 때문이다. 시몬 드 프리스가 편지를 보낸 것도 정리10의 저 표현 때문이다. 왜 갑자기 저런 표현을 쓰지? 증명도 안 하고? (“하나의 속성에는 거기에 상응하는 하나의 실체가 있다고 해놓고, 그럼 2개의 속성에는 실체도 2개 존재해야하는데, 복수의 속성에는 복수의 실체가 존재해야하는데 스피노자 선생께서는 왜 그런 결론을 안 내리고 다른 식으로 이야기하는가.“) 상당히 중요한 질문이자, 모두가 혼란스러워하는 지점.

 

*** 게다가 스피노자는 실체의 각 속성이라고, 마치 속성이 실체에 속하는 것처럼 대뜸 말하고 있다. A) ”속한다“= 전체를 이루는 어떤 부분이라는 말인데, 이 표현을 따르면 속성이 실체의 한 부분인 것이다. 그런데 그 뒤에 바로 B) “자신에 의해 인식되어야 한다= 속성은 궁극적이고 상위개념이 없다”. 그러니까 이 말은 속성은 실체에 포괄될 수도 종속될 수도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AB는 모순 아닌가? 주어에 함축되어 있는 것을 술어에서 부정하는 것 아닌가.

 

A: 스피노자는 실체의 각 속성이라고, 마치 속성이 실체에 속하는 것처럼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무엇에 속한다라고 이야기할 때 우리는 무엇의 한 부분이다라고 표현하는데, 이게 아마 실체의 각 속성이 담고 있는 뉘앙스일 것이다. “속성은 실체를 구성하는 부분이다의 뉘앙스. 실체속성. 실체에 속하는 실체의 속성. 속성이 실체의 부분이라면 속성과 실체 사이에 위계관계가 있는 것이다. 속성들은 실체에 종속되는 것이고, 실체는 속성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B: - 하지만 속성은 자신에 의해 인식되어야 한다는 말은, 속성은 자기보다 상위의 논리적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 자기 위의 어떤 궁극적인 원인을 가지고 있지 않다(실체도 속성의 원인이 될 수 없다)= 무언가로 환원되거나 종속되지 않는 것이다 = 무언가의 결과일 수 없다 = 독립적이고 자율적이고 긍극적이다.

- 그리고 정리2, “상이한 속성을 지닌 두 개의 실체는 서로 아무런 공통적인 것도 갖지 않는다로 인해, “자신에 의해 인식되는이 속성들은 서로 아무런 공통적인 것도 갖지 않는다.

- 그러니까 각자 자신에 의해 인식되어야 하는 실체의 각 속성은 서로 아무런 공통적인 것도 갖지 않으며, 따라서 서로 무관한 것으로, 각자 자율적인 것으로 존재해야 하며, 각각의 속성은 저마다 독립적인 실체를 이룬다는 결론이 나온다.

 

-> AB의 논리적 충돌. BA가 되었을 때 각 속성들은 실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는 게 아닌가?? 이 속성들은 실체의 속성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라는 거 아닌가??

-> 이런 점에서 매우 수수께끼 같은 문장이다. ‘공통적으로함께 속해있지만, 각자 또 자율적/독립적인. 그게 바로 실체와 속성의 관계라는 말이다.

 

* 시몬 드 프리스와의 편지(편지에서 정리8 주석3은 정리10의 주석에 해당)

- 우리는 각각의 존재자를 어떤 속성 아래 인식한다는 것, 그리고 어떤 존재자가 더 많은 실재성 내지 존재를 가질수록 그 존재자에게는 더 많은 속성들이 귀속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내가 어떤 존재자에게 더 많은 속성을 귀속시킬수록 나는 그 존재자에게 더 많은 실존을 부여할 수밖에 없다.

- A: 실체의 본성에는 그것이 지닌 실체의 각 속성이 그 자신에 의해 인식될 수 있다는 점이 속하기 때문이다: 실체는 그 본성상 실체에 속하는 각각의 속성이 그 자신에 의해 인식될 수 있게 한다. 그것이 실체의 본성이다. 실체에 함께 속한다고 해서 그게 실체의 부분을 내포한다거나 종속된다는 것이 아니라, 실체의 각 속성들은 자신에 의해 인식될 수 있다.

- B: 그 이유는 실체가 지니는 모든 속성은 항상 실체 안에 함께 존재해왔으며: 항상영원히. 함께 존재해왔다는 이야기는 속성들이 집합적으로 속해있다. 사유속성이 실체로 들어왔고 그 다음에 연장속성이 들어왔고 그 다음에 제3의 속성이 들어왔고 이런 게 아니다. 아예 애초부터 속성들은 실체 안에 들어와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하면 A의 논점과 어긋난다고 할 수 있다. 왜냐면 속성이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히 태초부터 실체에 속해왔다는 이야기니까. 주어와 술어 사이의 충돌의 여지.

- C: 그 중 한 속성이 다른 속성에 의해 생산될 수 없고, 각각의 속성은 실체의 실재성 또는 존재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AB사이의 충돌을 해소하는 것이 C. 한 속성이 다른 속성에 의해서 생성될 수 없다 = 그들이 자율적이면서 독립적이면서 동등하다는 이야기다. 그러면서 각각의 속성이 속성으로서 성립하는 것은, 다시 말하면 속성으로서의 논리적인 자율성 독립성 동등성을 얻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속성들 각자가 실체의 실재성 또는 존재, (정의4나 정의6의 표현을 빌면) 실체의 본질을 표현한다는 데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속성이 각자 논리적으로 독립적이고 자율성을 지닐 수 있는 것은, 실체의 본질, 실체의 존재를 집합적으로 표현한다는 데에서 나온다. 그게 속성들 각자가 갖고 있는 논리적 자립성 자율성을 성립하게 만든다.

 

*** 삼각형을 실체라고, 삼각형의 각 변이나 세 각을 속성이라고 생각해보자. 삼각형을 구성하는 세 변은 삼각형을 구성하지 않는 이상 속성으로 존재할 수 없다. 세 개의 변이 한꺼번에 삼각형에 속하기 때문에 각각의 변이 직선이 아니라 삼각형의 변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들 사이에는 시간적인 선후 관계도 없다. 동시에 삼각형을 구성하는 것이다. 삼각형이 가지고 있는 각각의 성질을 우리가 스피노자식의 속성이라고 한다면, 그들은 동시에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고 표현함으로써 삼각형이라는 실체의 본질과, 삼각형의 변이라는 자신의 본질, 자신의 정체성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각각의 변이 종속적인 것은 아니다. 자기 자율성을 갖고 있다. 스피노자가 정리10의 주석에서 표현하려고 하는 것은 그 이야기다. 각각의 속성이 논리적인 자율성과 동등성을 지니고 있으면서 집합적으로 함께 영원히 항상 실체의 본질, 실체의 존재를 표현해왔다는 사실. 까다롭지만 상당히 새로운 주장이다.

 

*** 하나의 속성이 실체를 표현하는 데에 충분할까? 그렇지 않다면 그 속성은 이미 자율적인 것이 아니다. 속성은 그 하나만으로도 실체의 본질을 다 표현한다. 사물 하나만으로도. 어려운 점은 뭐냐면, 그 속성이 실체의 본질을 다 표현하기 위한 조건이 다른 속성과 함께 실체를 구성하고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각각의 속성이 하나만으로도 자율적으로 독립적이기 위한 조건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유속성이든 연장속성이든 그 속성 하나만으로도 실체의 본질이 온전히 표현된다. 그런데 각각의 속성이 실체의 본질을 남김없이 표현하기 위한 조건, 그와 동시에 성립하게 되는 논점은, 그 속성이 동시에 다른 속성들과 함께 실체의 본질을 표현한다는, 바로 그것으로 인해서 각각의 속성은 자율적으로 존재한다.

 

*** 왜 스피노자가 정의4에서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지성이 지각하는 것을 속성으로 이해한다라고 이야기했을까. 지성이라는 것은 말하자면- 속성 아래서 인식하는 것이 지성이다. 속성을 초월해서 인긱하는 게 지성이 아니라 어떤 속성을 따라서 인식하는 게 지성인 것이다. “지성에 의해 지각된다는 말 자체에 함축해있는 뜻은 속성을 distribute(정확하게 어떻게 번역해야할지 모르겠지만 분배적으로? 분포적으로?) 사고한다이다. 속성들 하나하나를 개별적으로 독립적으로. 지성은 항상 어떤 속성에 따라 인식을 하니까. 사유속성에 따라서든, 연장속성에 따라서든. 스피노자는 그걸 대립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속성이 개별적으로 자율적으로 성립하는 것과 집합적으로 실체에 속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대립이나 배제의 관계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각자가 집합적으로 함께 실체의 본질을 표현하거나 구성한다는 것이, 각자가 자율적이고 독립적으로 성립하기 위한 바로 그 조건이다. 역으로, 또 속성 각자가 자율적으로 독립적으로 존립하는 것이 이것들이 집합적으로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기 위한 역의 조건이다. 그러니까 이 두 가지는 서로 배타적인 관계에 있지 않다

 

*** 스피노자가 아주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으로 이야기하지만. 이건 아주 구체적인 사회적 현실로 표현될 수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생태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이야기하고, 어떤 사람들은 자본가와 노동자, 정규직과 비정규직 이야기를 하고, 어떤 사람은 내셔널리즘-국민과 외국인, 인종문제, 각각 이야기를 한다. 예전에 막스주의가 한참 유행하던 시기에는 노동과 자본의 관계가 제일 중요한 관계고 나머지는 종속적인 문제다라고 치부하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사실 절대 그렇지 않다. 각각의 쟁점들이 다 독립적이고 자율적이다. 그런데 그걸 다 각각이 독립적이고 자율적이다라고 선을 긋고 나누어버리면 진정한 사회적 투쟁이 이루어질 수 없다. 각자 독립적이고 자율적이면서도 뭔가에 함께 속해야하고, 또 함께 속하는 것을 통해서 어떤 의미에서보면 각자가 자율적인 관계나 쟁점으로 성립할 수 있다. 그런 게 지금 존재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존재해야 한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이 실체-속성 관계를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게 한 가지 방식이다. 이것은 매우 풍부하고, 우리에게 많은 생각할 거리를 가져다주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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