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의 죽음충동 개념을 처음 들었던 건 고등학교 때였다. 굉장히 공감갔고 일견 매혹적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프로이트에 잠시 빠졌던 것은 바로 이 죽음충동 이론과 (이때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타나토노트'를 찾아 읽었었다. 소설은 그냥 그랬다) 애도와 우울증에 대한 이야기 때문이었다(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에서 멋지게 변주된).


스피노자는 죽음충동같은 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모든 유한적 동물들의 근저에는 현행적 본질로서의 코나투스가 있다고 말했지만, 나는 사람에게는 분명 죽음충동이라는 게 있다고 생각하고, 그게 스피노자의 코나투스와 상충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존속하려고 애쓰는 방식 중 하나가 죽음일 수 있는 역설적 상황들, 많지 않을까? 물을 양태로 인식하는 방법과 실체로 인식하는 방법에 대해 정리15에서 이야기했었지만, 그런 것처럼, 어차피 나라는 인간 하나가 죽어도 실체적으로는 소멸되는 것이 아니듯이, 사람이 어느 순간 코나투스로서의 죽음충동을 느끼는 것은, 연장으로서 존속하는 것이 힘에 부칠 때, 연장으로서 존속해나갈 방법이 더 이상 없다고 느꼈을 때, 나의 소멸이 실체의 소멸이 아님을 우리는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에, 연장으로서의 삶이 끝나도 어떤 형태로든지 실체로서는 존속할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이를테면 누군가의 기억속에) 코나투스의 회로를 연장에서 실체로 바꾸는 것이 아닐까. 연장으로서의 세계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지만 실체로서의 세계는 또 다를지 모른다라는 생각이 무의식에 있을 지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면서 사는 것이 인간으로서 사는 것의 필수적 요소라고 느끼는 사람이라면, 연장으로서 더 이상 인간적 '존엄'을 지키기 어려운 어떤 상황을 맞았을 때, 죽음으로서, 존엄이 다한 연장으로서의 나 자신은 소멸시킴으로서, 실체로서의 인간적 '존엄'은 존속시키겠다는 의지일지도. 


- 1920년에 프로이트가 <쾌락원칙을 넘어서>에서 아주 흥미로운 개념을 말하는데 바로 죽음충동이라는 개념이다. 프로이트는 인간을 포함한 유기체에는 아주 기본적인 두 가지 충동이 있는 것 같다는 사변적인 가설을 세운다. 하나가 삶의 충동. 에로스. 이것은 스피노자의 코나투스와 거의 같은 개념이다. 살아남으려는, 생존하려고 막 애쓰는. 다른 하나가 바로 죽음 충동. 무기물과 같이 아무런 자극이 없는 평온한 상태로 돌아가려는 충동.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뭔가에 자극을 받는 다는 것이다, 그게 좋은 자극이든 나쁜 자극이든. 스피노자가 2부에서 말하지만, 산다는 것은 외부로부터 끊임없이 변용되는, 물을 마시든, 바람을 쐬든, 화를 내든, 뭔가 이렇게 끊임없이 영향을 받고 영향을 주고, 변용하고 변용되고. 이것은 계속 자극을 받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유기체는 그 자극이, 자극 받는다는 것은 고통이다. 즐거운 고통도 있고 안 좋은 고통도 있겠고. 유기체는 그런 고통을 받는 것이 싫으니까 무기체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충동이 있다는 것. 생명이 없어지면 아무 자극도 느끼지 못하니까. 그 상태가 굉장히 편안한. 이렇게 프로이트는 에로스와 타나토스를 같이 이야기하며, 저 두 가지 충동이 인간을 포함한 유기체들을 이루는 기본저인 충동인 것 같다는 가설을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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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20 ”신의 실존과 본질은 하나의 동일한 것이다

증명 신과 (앞의 정리에 의해) 그의 모든 속성들은 영원하다. (정의 8에 의해) 신의 각각의 속성은 실존을 표현한다. 따라서 (정의 4에 의해) 신의 영원한 본질을 설명하는 이 동일한 신의 속성들은 동시에 신의 영원한 실존을 설명한다. 곧 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이 동일한 것이 동시에 신의 실존을 구성한다. 따라서 그의 실존과 본질은 하나의 동일한 것이다. Q.E.D.

따름정리1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점이 따라나온다. 1. 신의 본질과 마찬가지로 신의 실존은 영원 진리다.

따름정리2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점도 따라나온다. 2. 신 또는 신의 모든 속성은 불변적인 것들이다. 왜냐하면 이것들이 실존의 관계에서 변화된다면, (정리 20에 의해) 또한 본질의 관계에서도 변화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자체로 명증한 것처럼) 참이 거짓이 되어야 할 텐데, 이는 부조리하다.

 

* 1) 1부의 전반부: 정리1~정리15

- 우주의 논리적 구성에 대한 이야기.

- 스피노자의 우주는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을 가진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체다.

 

2) 1부의 후반부: 정리16~정리36

- 만물의 근원인 실체와 신, 신과 만물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 만물의 원인으로서의 신과,

신으로부터 따라 나오는(신이 산출하는) 무한한 만물들 사이의 인과관계를 다루는 것.

(무한하게 많은 것들을 신이 어떻게 산출하는지)

 

* 1부 정의3 실체에 대한 정의 + 정의5 양태에 대한 정의 + 공리1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신 안에 있거나 다른 것 안에 있다“ ->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실체이거나 양태다.“

* 정리16: 신의 본성으로부터 따라 나오는 무한하게 많은 것들 = 만물

* 정리18: 신은 만물의 내재적 원인이지 타동적 원인이 아니다. 일시적 원인 이행적 원인이 아니라, 신이라는 것이 외재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만물 안에서 내재적으로 작용하는 원인이 바로 신이다. 신과 만물 사이의 관계는 외재적이고 타동적이지 않다. 1부 정리15을 염두한다면 정리16은 사실 당연하다. // 모든 것이 신 안에 있다. 역으로 말하면, 신은 만물에 내재해있다.

 

* 정리21~23: 스피노자가 양태에 대해 체계적으로 이야기하는 첫 번째 대목. 무한양태에 대해서도. 그동안 우리가 양태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1부 정의5, 공리1이 전부였다.

* 정리24~25에서 어떻게 신이 만물 안에서 내재적 원인으로 작용하는지 부연한다

 

* 1부 정의5에서 스피노자의 양태 개념이 매우 독특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데카르트에 비해서도 독특하다. 라틴어의 Modus. 방식. 데카르트는 양태를 물체의 색깔이나 촉감 같은 것까지 포함하는 모든 것이라고 말했지만, 스피노자는 우리가 개체라고 말하는 모든 것들을 모드라고 한다. <<<<<<<<<<<<<<3)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차이

양태는 데카르트에서 유래한 개념이지만, 스피노자의 개념과는 몇 가지 측면에서 차이난다.

 

A. 사물의 상태인가 사물 자체인가.

데카르트의 양태개념은 스콜라철학의 우연속성accidents과 달리 실체와의 내재적 관계를 함축한다. 양태는 실체가 변용되거나 변화되는 것을 고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물체의 경우 모양, 크기, 운동 등, 정신의 경우, 감각, 상상, 의지 등.(즉 데카르트에게 양태는 사물의 상태)

반면 스피노자에게 양태는 실체의 상태나 변화 방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사물 그 자체를 의미. 더 나아가 스피노자에게는 무한양태들도 존재. (스피노자에게 양태는 사물 그 자체)

직접적 무한양태: 연장 속성- 운동과 정지/ 사유 속성- 무한 지성

매개적 무한양태: 우주 전체의 모습

 

*** 양태개념 관련해서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차이

- 스피노자는 올덴부르크와의 편지에서(1강의록2P) 초기에는 양태라는 표현 대신에 아키댄스accidence 우연적 속성. 우유라고 썼다. 그러나 에티카에서는 affection이라고 용어가 바뀌었다. 왜 그랬을까. 아키댄스(우연속성)과 사물, 이 두 개념 쌍을 사용하게 되면- 스콜라 철학에서 사람의 본질은 이성을 가진 짐승이고, 특성은 웃을 수 있고, 직립보행이고... 등등인데, “어떤 사람은 키가 190이고 어떤 사람은 170이고, 어떤 사람은 피부가 하얗고 어떤 사람은 까맣고...”<-바로 이런 것들이 아키댄스에 해당하는 것이다. , 아키댄스-사물 간의 관계는 외재적 관계, 우연히 갖게 되는 외재적인 것. 그러나 내재적 특성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실제 변용으로 그런 외적인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 외재적으로만 보면 제대로 설명해내는 것이 불가능하니까 아키댄스 대신, affection, mode를 즐겨 쓰게 됨. , 스피노자가 아키댄스 대신에 이 단어를 선택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변용이 내재적이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 데카르트 또한 mode라는 말을 자기 철학의 주용법으로 채택했는데 데카르트의 경우 mode는 어떤 사물의 표현 방식/형태를 의미했다. 예를 들면

물체의 경우: 물체가 갖고 있는 무늬, 형태

정신의 경우: 감각, 상상

 

- 이 두 가지는 매우 중요한 차이다!!

a. 데카르트에게 mode는 정말 의존적인 것이었다. mode가 속해있는 사물하고 독립적으로 분리해서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것 VS 스피노자의 다섯 번째 정의와 정리1~36을 보면, 스피노자가 모드라고 부르는 것은 사물 일반이다. 실체를 제외한 모든 것이다.

b. 데카르트에게는 무한 실체- / 유한 실체: 정신, 물체, 사람 VS

스피노자에게 실체는 오직 무한 실체 밖에 없다. 스피노자 사상에서 실체를 실체라고 부르려면 반드시 무한해야만 한다. , 스피노자는 실체의 유한성을 배격했다! 매우 중요함!!!

c. 데카르트가 유한실체라고 불렀던 것이 스피노자에게는 양태가 된다. 데카르트는 사물과 독립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 모드, 스피노자에게는 그 사물 자체!

 

*** 그럼 스피노자에게는 유한한 것들만 양태냐?

아니! 스피노자에게도 무한 양태가 있다! 에티카 1부 정리 21~23: 무한양태에 관한 내용.

- 직접적 무한양태: 연장속성의 경우 운동과 정지, 사유속성의 경우 무한지성

매개적 무한양태: 우주전체의 모습

*** 스피노자가 양태라고 부르는 범위가 굉장히 넓다. 그 이유는? 스피노자가 실체의 개념을 아주 엄밀하게 정하는 바람에 생긴 결과다. 그 실체를 제외한 나머지 것이 다 양태에 포함되니까. (이거 어쩐지 너무 멋있다..) >>>>>>>>>>>>>>>>>>>>

 

*** 여기에 더해 스피노자 양태 개념의 충격적인 점은 바로 정리21~23에 걸쳐 나오는 무한양태 개념이. ? 양태는 어디에 의존하고 있고 실재적이고 독립적인 것이 아닌데 이걸 무한하다!라고 말하니까. 유한한 양태라는 것도 이해가 쉽지 않은데 무한하다니. 이 무한양태 개념은 스피노가 실체가 우주 전체라고 이야기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스피노자는 유한양태에 말하기 앞서서 무한양태를 21~23에서 말하고 있다.

 

정리21 “신의 어떤 속성의 절대적 본성으로부터 따라 나오는 모든 것은 항상 실존해야 했으며 무한한 것이어야만 했다. 또는 이 동일한 속성에 의해 영원하고 무한하다.

 

- 항상 실존했고 실존하고 있고 -> 영원하다는 이야기. 무한하다는 이야기.

- 무한양태의 무한성과 영원성은 어디서 생겨난 것인가? 자기 스스로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속성에 의해 갖게 되는 것. 만약 자기 자신에 의해 무한성 영원성을 갖게 된다면 그것은 실체다. 그러나 양태라는 것은 정의5에서 실체의 변형. 다른 것에 의해 인식되는 것. 이때 다른 것이 바로 실체. 실체에 존재론적으로 의존한다는 것. 즉 여기서 갖는 양태의 무한성은 스스로 갖는 것이 아니라 속성에 의해.

- , ”신의 어떤 속성으로부터 무한하고 영원한 무한양태가 따라 나온다.“

 

정리22 “신의 어떤 속성이 이 동일한 속성을 통해 필연적으로 실존하고 무한한 어떤 변양에 의해 변양된 한에서, 그 속성으로부터 따라 나오는 모든 것은 또한 필연적으로 실존하고 무한해야 한다.”

 

- “이 동일한 속성을 통해 필연적으로 실존하고 무한한 어떤 변양”= 정리21의 무한양태

- 변양: modification 모디피카치오 (정리8의 주석2에 나온다). 스피노자는 양태(모두스)라는 말을 더 자주 쓰고 변양(모디피카치오)는 거의 쓰지 않는데 변양과 양태를 같은 의미로 쓴다. 여기서는 양태라고 쓰지 않고 변양이라고 썼다. 양태라고 썼으면 덜 헷갈렸을 텐데ㅋㅋ

 

1) 속성에서부터-> 필연적으로 실존하고(=영원하고) 무한한 어떤 변양, 무한양태가 따라 나온다

(= 속성이 영원하고 무한한 양태에 의해 변양된다)

2) 그리고 이 영원하고 무한한 양태에 의해서 변양된 이 속성으로부터 -> 또 영원하고 무한한 양태가 따라 나온다.

*** 그러니까 스피노자에 따르면 영원하고 무한한 양태에 의해 두 가지 형태가 있는 것이다

1) 신의 속성으로부터 직접 따라 나오는 무한한 양태

2) 이 직접 따라 나온 무한양태에 의해서 변양된 속성으로부터 나오는 무한한 양태

*** 스피노자 연구자들끼리 1)을 직접적 무한양태, 2)를 매개적 무한양태라고 부른다. 직접적 무한양태를 매개로해서 따라 나오는 무한양태기 때문에.

 

*** 매개적 무한양태에서 따라 나오는 것은 또 없는가. 없다. 뭐가 나올 것도 같은데. 이를테면 유한양태. 여기서 유한양태가 따라 나올 것도 같은데. . 유한한 양태들이 있으니까. 그런데 그렇지 않다. 누가 이렇게 생각했냐면 헤겔이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이렇게 신-> 속성-> 직접적 무한양태-> 매개적 무한양태-> 유한양태, 이게 스피노자의 세계에서 우주가 환원하는 순서다, 라고 말했다. 완전한 신에서부터 덜 완전한 속성, 덜 완전한 직접적 무한양태, 덜 완전한 매개적 무한양태, 덜 완전한 유한양태 순서로. 하지만 스피노자는 그렇게 이야기한 적이 없다. 매개적 무한양태에서 끝이다.

 

*** 직접적 무한양태로 변양된 속성은 그냥 속성과 다른가. 다르다. 직접적 무한양태로 변양된 속성이라고 스피노자가 왜 그렇게 이야기하냐면, 매개적 무한양태가 직접적 무한양태로부터 따라나오는 것이 아니다, 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매개적 무한양태가 직접적 무한양태로 변양된 한에서 속성으로부터 따라나온다, 라고 말하고 싶어서. 그러니까 직접적 무한양태나 매개적 무한양태다 원인은 속성이다. 출처는 속성.

*** 가령 연장속성을 예로 들면, 스피노자가 직접적 무한양태를 운동과 정지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물질적 우주에서 바로 따라 나오는 직접적 무한양태는 바로 운동과 정지.

*** 스피노자가 생각한 직접적 무한양태는, 속성이 갖게 되는 특성 중 하나다. , 직접적 무한양태를 산출하지 않으면 이 속성은 속성일 수 없는 것. 어떤 속성이 속성이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산출할 수밖에 없는 것. 그러니까 물질이 물질이려면, 물질은 운동을 해야하고 정지를 해야 한다. 이 운동과 정지를 스피노자는 연장이라는 속성의 직접적 무한양태라고 보는 것이다. 물질은 항상 운동과 정지 중이다.

 

*** 그렇다면 스피노자가 생각하는 매개적 무한양태는?

- 2부 정리14 보조정리의 주석(55P) : 어떤 개별적인 개체라는 것은 복합물체. 개체들이 모여가지고 형성하는 또 다른 상위의 개체가 있고, 이 상위의 개체들이 모여서 형성하는 또 다른 상위의 개체가 있고... 이렇게 죽 나아가다보면 자연전체를 하나의 개체처럼 생각할 수 있다. 자연전체가 단 하나의 개체이며, 그 부분들, 곧 모든 물체들은 전체 개체의 변화 없이도 무한한 방식으로 변이한다는 것을 쉽게 인식하게 된다그러니까 단 하나의 개체로 사고되는 자연, 이게 바로 스피노자가 이야기하는 매개적 무한양태. 스피노자는 슐러에게 보내는 예순네 번째 편지에서 이것을 우주전체의 모습이다라고 이야기 (강의록 10)

 

- 여기서 말하는 우주전체는 실체가 아니다. 여기에서는 지금 하나의 개체로서의 자연전체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개체로서의 자연전체= 전체로서의 자연. 실체는 개체가 아니다.

- 부분과 전체를, 스피노자는 notion이라고 부른다. 통념이라고 부르지, 부분-전체를 real thing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부분과 전체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상의, 상대적인 부분과 전체로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하나의 개체로서 인식된 자연전체는 실체로서의 자연과는 다르다. 개체로서의 자연전체- 우리가 알고 있는 지구, 태양계, 은하계, 우주 이런 것들. 우리가 자연 안에 존재하고 있다고 인식하는 물체들.

- 사람-> 국가-> 지구-> 태양계 -> 우주, 이런식으로 죽 나아가다보면 이 자연 안에 우주라는 것을 여러 개의 개체들이 합성해서 만든 최상위의 개체처럼 인식할 수 있다. 이게 바로 스피노자가 말하는 매개적 무한양태. 하지만 이 최상위의 개체가 스피노자가 말하는 실체로서의 자연과는 동일하지 않다. ?? 이것은 원인이 아니니까. 이것은 원인이 아니라 원인으로서의 실체가 생산해낸 결과다.

*** 직접적 무한양태도 매개적 무한양태도 실체가 원인. 이 직접적 무한양태나 매개적 무한양태는 결과들의 집합이지, 여기에는 논리적으로서의 원인은 빠져있다.

- ”매개로 해서원인으로 해서를 절대 혼동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지금 논리적으로 원인과 결과를 분해하는 것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우주전체 모습이라는 것이 운동과 정지라는 직접적 무한양태를 원인으로해서 따라나오는 게 아니다. 우주전체 모습의 원인은 속성이다. 이게 성립하기 위해서는 운동과 정지라는 매개로 해서가능하다. 논리적으로 봤을 때 운동과 정지라는 직접적 무한양태를 매개로 해서“, 연장속성이 원인이 돼서따라 나온 결과가 우주전체의 모습.

 

- 스피노자의 연장개념은 원인으로서의 연장개념이다. 1부 정리14에서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연장개념이 굉장히 큰 차이를 만든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데카르트의 자연은 물질적인 자연, 내재적 원인이 없고 내적 동력이 없는 기하학적 자연. 여기서 운동이라는 것은 단지 위치이동만을 의미할 뿐이다. 그러나 스피노자처럼 연장이 신의 속성이 되면, 그러니까 물질적인 연장이 신의 바깥이 아니라 신의 안에 들어와 있고 신을 구성하는 것이면, 신이 갖고 있는 절대적으로 무한한 역량이 자연 안으로 들어와 있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연장개념은 데카르트의 기하학적 자연이 아니라 무한하고 다이나믹한 동력학적인 자연. 그러니까 연장개념이 없으면 운동과 정지는 단지 기하하적인 장소 이동, 위치 이동에 불과할 텐데 스피노자에게는 연장개념 자체에 동력학적인 원인개념이 들어가 있으니까, 여기서 말하는 운동과 정지 역시 동력학적인 것이 된다. 이게 두 사람의 차이이며, 스피노자의 연장개념에 원인이 들어있다고 말하는 근거.

- ”운동과 정지를 전제로 했을 때 스피노자의 세계에서 공간이라는 것은? 정리15에서 스피노자와 데카르트는 진공을 부정했다. 진공을 부정했다= 우주 전체가 물질로 가득 차있다, 충만하다, 공백이 없다. 그러므로 연장이라는 것 자체와 공간은 구별이 안 된다. 공간 자체에 다 물질이 차 있는 것이기 때문에.

 

*** 정리21의 증명

첫 번째 부분: 무한성 증명/ 두 번째 부분: 영원성 증명

-”신의 관념에서 주의해야할 점! 신의 관념에 대해 주의해야 한다. 스피노자가 신의 관념이라고 부르는 것은 인간의 정신이 신에 대해서 갖고 있는 관념ㄴ을 뜻하는 게 아니다. 신이 자기 자신에 대해 갖는 관념. 스피노자는 2부 정리3과 정리4에서 이 신의 관념이 무한지성이라고 이야기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연장속성에서 직접적 무한양태가 운동과 정지라고 이야기했다면, 사유속성에서 직접적 무한양태는 바로 무한지성이다.

- 그렇다면 사유속성의 매개적 무한양태는 뭘까? 아무도 모른다. 다 추측만 할 뿐이다. 이것은 다 슐러라는 사람 때문이다ㅋㅋㅋ

- 63번째 편지에서 슐러는 직접적 무한양태와 매개적 무한양태의 사례를 알고 싶다고 했고, 스피노자는 64번째 편지에서 답을 한다. “직접적 무한양태의 사례들로는, 사유의 경우에는 절대적으로 무한한 지성이 있고 연장의 경우에는 운동과 정지가 있습니다. 매개적 무한양태의 사례로는 우주 전체의 모습이 있는데 이는 무한한 방식으로 변이됨에도 항상 같은 것으로 남아 있습니다.” .

- 이상하지 않은가. 두 번째 정리의 사례로 우주전체의 모습 하나만 이야기했다. 슐러가 한 번 더 편지를 보냈어야지! 선생님, 하나 빠지셨는데요? 사유의 경우에 매개적 무한양태가 뭔지 말씀해 주셔야죠, 라고 질문을 했어야지. 이거 분명 궁금했을 텐데. 이게 지금 사람들을 몇 백년째 궁금하게 만들고 있다. 주석가들의 의견도 분분하다. 이게 뭘까, 대체. 어떤 사람은 평행론에 따라서 우주전체 모습의 관념이다, 라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스피노자가 이 하나를 가지고 두 개 모두에 답했다(연장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라 사유에도 해당한다)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왜 여기에서만 찾냐 5부에서도 찾자고 하고 제각각이다. 그래서 논문 쓰기 굉장히 좋다ㅋㅋㅋ 스피노자가 아무 이야기도 안 했으니까

 

-유한하고 규정된 실존을 갖는다는 이야기는, 이것이 생겨나는 시간과 소멸하는 시간이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규정된 실존을 갖는다는 것 = 기원과 종말이 있다는 것. 시작 이전과 끝 이후라는 것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때는 사유속성으로부터 아무 것도 따라나오지 않는가. 따라 나오겠지. 하지만 신의 속성과는 무관하겠지. 그러니까 신의 속성으로부터 유한하고 규정된 실존을 가진 신의 관념이 필연적으로 따라 나온다는 가설에 모순이다. 신의 속성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신의 관념이 따라 나오는 것이 아닌 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신의 속성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따라 나온다고 하려면 무한해야 한다(귀류법)

- 창조론은 우주의 영원성을 이야기할 수 없다. 신 이전에 무가 있었어야 하니까. 창조라는 시작이 있어야 하니까. 스피노자에게 창조라는 시작은 없다. 영원히 계속 존재해있었다.

창조라는 시작은 없다. 영원히 계속 존재해있었다.

 

정리23: “필연적으로 실존하고 무한한 모든 양태는 신의 어떤 속성의 절대적 본성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따라 나와야 했거나 아니면 필연적으로 실존하고 무한한 어떤 변양에 의해 변양된 어떤 속성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따라 나와야 했다.”

 

정리24-29는 유한양태에 대한 이야기 (딱 부러지게 유한양태라고 이야기하기 어려울 수 있는데 어쨌든 정리28, 28가면 singular thing에 대한 이야기를 하니까)

 

정리24: “신에 의해 생산된 것들의 본질은 실존을 함축하지 않는다

 

- 스피노자가 따름정리에서 신이 단지 생성원인일 뿐 아니라 존재원인이라고 부연하는 것은 데카르트의 유한실체론을 비판하기 위해서이다. 데카르트주의자들은 정신이나 신체, 인간 같은 개별적 존재자를 유한실체라고 간주하고 있고, 신에 의해 일단 창조되고 나면 자기 스스로 실체처럼 존립할 수 있다고 본다. 반면 스피노자는 정의5, 공리1, 정리15에서 일관되게 실체와 양태를 구별하고 있으며 모든 것은 신 안에 존재하고, 신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한 바 있다. 스피노자에게 신을 제외한 실체는 존재하지 않으며, 더욱이 유한실체는 논리적 모순에 불과하다(양태도 무한한데, 실체가 유한할리가!!!). 따라서 모든 것이 신 안에 존재하고 존재론적으로나 인식론적으로 신에 의존한다면, 신을 제외한 모든 것은 처음 생성될 때만이 아니라 생성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신에게 의존해야 한다. 이것이 따름정리의 의미다.

- 정리25에 가서 다시 할 이야기지만, 마지막 문장처럼 이야기하면 스피노자는 유한한 개체들로부터 존재론적인 자립성을 박탈한 것처럼 보인다. 생성될 때뿐만 아니라 재생산될 때도 지속될 때도 항상 신이 있어야 존립할 수 있으니까. 신이 없으면 유한한 양태들은 존립할 수 없으니 매순간 신에 의존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러니까 비실재적, 비자율적으로 보이는데. 정리25로 가보자.

 

정리25: “신은 실재들의 실존의 작용인일 뿐만 아니라 그것들의 본질의 작용인이기도 하다.”

따름정리 특수한 실재들은 신의 속성의 변용들과 다르지 않다. 곧 신의 속성이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표현되는 양태들과 다르지 않다. 이점에 대한 증명은 정리15 및 정의5로부터 명백하다.

 

- 존재하는 개체들은 신의 속성의 변용이다.

- 정리15가 유난히 많이 나오는데, 이유는, 정리15가 신과 만물 사이에 가장 원초적인 관계를 제시한 명제라서 그렇다. 정리16부터 정리36까지가 신과 만물 사이의 인과관계를 설명하는 것이라, 증명할 때 다 정리15로 돌아간다. 정리15가 이하의 논의들의 출발점이라서.

- 정리24가 데카르트의 유한실체론을 비판적으로 보는 것이라면 정리25는 플라톤주의를 겨냥하는 것이다. 플라톤주의의 요체는 이데와의 세계와 현상의 세계가 있다는 것. 이게 중세철학에서 나타날 때는 영원한 본질의 세계와 유한한 실존의 세계로 구별이 된다. 본질이라는 것은 생성되지도 않고 소멸되지도 않고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고, 그래서 플라톤주의자들에게 사물의 본질과 실존은 엄밀히 구분된다. “사물들의 실존이 시간적이고 변화하며 소멸하는 것이라면, 사물들의 본질은 신의 지성 안에 존재하는 원형(이데아로서)에 입각한 것으로 영원히 존립하는 것이다

- 신이 창조한 것은 사물들의 실존. 사물들의 본질은 스콜라 철학식으로 말하면 가능태로, 잠재태로 있는 것. “possibility 가능태로 존재(본질) + 신이 existence를 부여 -> actuality를 갖고 현실태” -> 이게 바로 창조. 본질 자체는 actuality는 없지만 possibility 가능태로서는 계속 영원히 존립하고 있다

- 스피노자는 정리25에서 이러한 플라톤주의 모델을 반박한다. “하지만 증명에서 공리4와 정리15에 근거를 두고 있듯이, 스피노자가 신을 제외한 모든 것은 신이 없이는 존재할 수도 인식될 수도 없다고 주장하는 한에서, 사물들의 본질이 신이라는 궁극적 원인과 무관하게 영원히 존립한다고 말하는 것은 허용될 수 없다. 따라서 스피노자는 신이 만물의 실존만이 아니라 그 본질들에 대해서도 작용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주석에서처럼 기분 나쁠 때는 생산 안 했다가 기분 좋을 때는 생산했다가 이런 거 아니고 만물을 필연적으로 생산해내고 있다. 넘치도록 전능해서. 무한한 생산자로서.

 

- 그렇다면 스피노자는 개체들로부터 일체의 독자적인 실존과 행위의 역량, 또한 사유의 역량을 완전히 박탈하는 것인가?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체들은 아무런 자율성과 실재성도 지니지 못하게 되는 것일까?

-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다. 신 없이는 존재할 수도 인식될 수도 없으니까. 신은 만물의 존재의 원인이자 지속의 원인이기도 하니까. 신 없이는 인간은 아무런 역량도 가질 수 없으니까.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할 대목은!

-“신의 속성이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표현이라는 점이다. 신의 속성을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표현한다는 점은, 신의 속성이 지니고 있는 본성, 곧 그의 무한한 역량을 양태들 역시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다만 절대적으로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표현”(중세식으로 말하면 분유’)할 뿐이다.

 

*** 스피노자의 존재론의 윤리적인 함의를 이야기할 때 항상 유념해야할 점

- 신이 양태하고 맺는 관계는 어떤 관계인가. 스피노자식 신의 속성을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양태들이 표현한다’, ‘신이 양태들의 원인이다’, ‘신이 양태들의 실존의 원인일 뿐만 아니라 본질의 원인이다’, ‘양태들을 생산한다같은 표현들에서 나오는 신과 양태의 관계는 뭘까. 한마디로 말하면, 신은 양태들에 있어서 타자가 아니다. 이 말의 의미는-

- 우리가 일반적으로 타자, 어떤 개체 사물과 타자의 관계를 생각할 때 항상 염두하는 것인데, ‘유한하다는 말은, 자신과 타자의 것에 대해서 배척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모든 사물이 자신의 타자를 전적으로 다 받아들일 수 없다. 유한한 사물은 자신이 존재하기 위해 동물을 먹기도 하고 식물을 먹기도 하고, 먹고 먹히는 생태 사슬을 거부할 수 없다. 유한한 것이 유한한 것으로 존재하려면 타자와 positive한 관계만 맺을 수는 없다. 이게 바로 유한자와 타자의 관계의 기본적인 측면인데-

 

-신은 그렇지 않다. 신은 무한자다. 신은 어느 경우에도 양태를 배제하지 않고, 항상 긍정적인 관계를 맺는다. 신은 양태들로부터 무언가를 뺏거나 박탈하지 않고 양태들에게 항상 근거와 역량을 제공한다. 존재할 수 있는 역량, 사유할 수 있는 역량을 부여해주는 존재. “신은 타자가 없다는 것은 그런 의미다. 신과 양태의 관계는 절대적으로 긍정적인 관계다. 신은 양태에 대해 아무것도 부정하지 않으니까. 신은 자기와 관련된 모든 것에 절대적으로 긍정한다. 무언가를 제한하고 박탈하는 게 아니라.

-문제는 양태가 신으로부터 신의 절대적인 무한한 역량을 다 갖고 올 수 있는가. 아니다. 이게 바로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표현된다는 의미.

- 그러니까 양태의 자율성의 근거!!는 신이 준 긍정성과 역량에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신의 역량을 표현한다는 점. 물론 그걸 얼마나 표현하는지 얼마나 갖고 있는지는 개체마다 다르지만. 나중에 가면 코나투스.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역량. 그러니까 신과 피조물, 신과 양태들과의 관계는 신의 입장에서 보면 절대적인 긍정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자.

 

- ‘실체가 양태의 원인이다라는 말과 실체가 양태의 본질이다라는 말은 다르다. 신은 양태의 원인이기는 해도 양태의 본질은 아니다. 양태는 각각 개별본질이 따로 있다. 이 개별본질이 코나투스. 양태 자신의 존재 안에서 존립하려는 노력. 양태들의 본질이 코나투스.

- 그 근거를 꼭 으로 놓았어야 하는 이유. 이 당시에는 신이 만물의 근거, 만물을 사고하기 위해 거쳐가지 않을 수 없는 전제였기 때문에 신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스피노자가 이 당시 사람이 아니었다면 이를테면 동양철학자였다면 다르게 이야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냥 자연만 이야기한다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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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야 벌린의 소극적 자유 & 적극적 자유 (지난 시간 강의 again)

- 이사야 벌린의 아주 유명한 <자유에 관한 에세이 4Four Essays on Liberty(1969)>

- 예전에는 “liberty”를 많이 썼던 것 같은데 요즘은 “freedom”을 더 많이 쓰는 추세

 

*** negative liberty 소극적 자유:

- 핵심은 간섭받지 않을 권리.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운 것, ~로부터의 자유. 자유라는 것은 다른 사람의 간섭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 소극적 자유의 대표자로 스튜어트 밀, 칸트를 꼽았다.

- 다른 연구자들 중에는 소극적 자유를 근대에서 최초로 도입한 사람은 홉스다, 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꽤 많다. 토마스 홉스: “장애물이 없으면 자유다

 

*** positive liberty 적극적 자유:

- 간섭받지 않고 방해받지 않는, 이것만 가지고는 자유라고 할 수 없다.

- 진정한 의미의 자유는 자율성을 유지하는 것,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정신적, 도덕적 이런 자율성을 유지하는 것, 고귀한 목표 같은 것을 추구하는 것, 이런 것이야말로 진짜 자유다

이 예로 드는 것이 루소와 스피노자

 

*** 냉전자유주의 : 벌린 같은 사람을 우리는 냉전자유주의라고 부른다.

- 냉전: 1940년대 말 2차 대전이 끝난 후 전 세계가 소련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진영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 진영으로 나뉘고 -> 한국전쟁 이후 본격적으로 양 진영으로 나누어져서 전쟁 아닌 전쟁을 벌이는 것을 냉전이라고 하는데.

- 냉전자유주의: 사회주의, 전체주의에 맞서서 자유세계, 서구에서 자유의 가치를 옹호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는 생각에서 나온.

- 대표적인 냉전자유주의자들: 칼 포퍼는 <Open Society and Its Enemies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이라는 두 권짜리 책이 대표작에서 플라톤, 헤겔, 마르크스를 전체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우두머리로 지목, 이들의 주장을 비판하고 열린 사회를 주창한다(1권에서는 플라톤, 2권에서는 막스 헤겔에 대해 비판) 프랑스에서는 레이몽 아롱 Raymon Aron, 오스트리아 출신 영국경제학자인 프리드리히 하이예크가 대표적. 그가 1944년에 쓴 <노예의 길>은 미국에서 수십 만권이 팔리며 그를 아주 대표적인 냉전자유주의자이자 사회철학자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그리고 지금 말하는 이사야 벌린.

- 이들 모두는 다 냉전시대에 자유의 가치를 옹호하려고 했던 사람들이다. 이들 자유주의의 특징은 사회주의 전체주의에 맞선 이념적 가치로서의 자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주요쟁점으로 중시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다른 사람들, 그게 공산당이 됐든 국가가 됐든 상위세력들이 개인의 자유들을 억압하거나 방해하는 모든 것들이었다. 간섭받지 않을 자유로서의 소극적 자유는 1980년대까지 자유민주주의의 아주 중요한 가치였다.

- 그러나 80년대부터 신자유주의가 본격화되고 신자유주의가 약속과는 다르게 사회를 엄청나게 불평등하게 만들다보니, 소극적 자유개념에 대한 불신과 회의가 팽배해졌다.

그러다보니까 소극적 자유 개념에 대한 불신 회의가 팽배해지게 되었다. 우리에게 상당히 익숙한 자유의 개념이 소극적 자유의 개념.

 

*** 스피노자의 자유원인에 대한 그릇된 이해 반박

- 스피노자가 자유원인에 대한 그릇된 이해를 반박할 때, 그릇된 이해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소극적 자유 개념이다. 신이 전능하거나 자유로운 사람이다라고 할 때 사람들이 신의 자유로움을 신이 자연의 법칙을 위배하거나 초월하는 것이 자유로움이라고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하는 사람들은 자연의 법칙을 따르고 그 안에서 제약을 받으면 자유의 법칙에 위배되는 거 아니냐고 착각한다.

- <신학정치론> 6장의 제목이 [기적에 대하여]인데, 이것은 기적이라는 개념이 왜 잘못된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다. 기적이라는 것이 자연적 법칙이나 현상을 위반하는, 그런 법칙이나 현상이라고 믿기 어려운, 성경의 바다가 갈라진다거나 여호수아가 해를 지지 않게 한다거나 하는 것들인데, 스피노자는 사람들이 이런 것들을 자유라고 착각한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자연법칙조차도 넘어설 수 있고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들을 자유와 전능이라고 생각하는 잘못된 생각에 대하여.

- 2부 정리3의 주석에서 포테스타스 개념을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신의 전능을 왕의 힘과 비교한다. 왕이 자기 마음에 들면 법을 세우고 내키는대로 법을 폐기하고 막 이런 것. 포테스타스와 포텐시아의 개념 대비.

- 스피노자한테 자유라는 것은, 정의7에서 그 개념을 제시했듯, 본성의 필연성에 입각해서 행위하고 실존하는 것이다. 그리고 스피노자 입장에서 그럴 수 있는 존재는 신밖에 없다. 신을 제외한 나머지 존재는 어떤 방식으로든 간에 다른 존재, 타자에게 제약돼서 실존하고 행위하고 작업하도록 되어있다. -> 스피노자에게 형이상학적인 의미의 자유는 즉, 타자가 없는 것. 타자 없이 자기원인에 의해서만, 자기에 의해서만 실존하고 행위하는 것, 우연적으로가 아니라 필연적으로. 그래서 스피노자에게 데카르트 같은 자유원인은 부조리한 것이다

 

*** 데카르트의 영원진리창조론 비판

 

- 여기서 스피노자가 이름을 명시적으로 거론하지 않았지만, 그릇된자유개념은 데카르트의 개념이다.

- 데카르트의 영원진리 창조론. 데카르트가 생전에 출간한 책에서는 한 번도 말하지 않았지만, 16304월과 5월에 메르센 Mersenne 신부에게 보낸 두 통의 편지에 적혀있는 영원진리창조론. 그에게 영원진리를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신의 전능함이었다. 영원진리조차도 신에 의해 창조됐고, 신이 그러려는 의지만 있다면 이 영원진리도 진리가 아닌 것으로 만들 수도 있다! 신은 그 정도로 파워가 있다!는 내용인데 즉 영원진리창조론은 신의 전능함에 대한 이론이다. 그러니까 데카르트는 영원성보다 논리적 참과 거짓, 필연적 법칙보다 신이 더 높은 곳에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 1+1=2 같은 영원진리를 신이 창조했다는 말은 이미 이 말 자체에 모순이 들어가 있다. “창조가 됐다는 말은 어떤 일에 시작점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영원하다는 말이 성립되지 않는다.

- 그리고 영원진리창조론의 맥락에서 생각하면 지성과 의지에 차이가 있다는 말이다. 즉 의지가 지성보다 더 위에 있다는 것이다. 창조한다는 것은 즉 의지의 힘이니까. 신학적인 면에서 신이 무엇을 창조한다는 것은 의지다. 지성이라는 것은 진리를 의식한다는 것. , 영원진리랑 관련된 것이 지성. 그러니까 영원진리를 창조한다고 하면 당연히 의지가 지성의 위에 있는 것이다.

- 이 논리를 따르면 또한 신과 피조물 사이에 무한한 거리가 존재하게 되어버린다. 신이 어떤 존재인지 우리가 이해할 수 있고 인식할 수 없으니까. 영원진리까지도 창조할 수 있고 폐기할 수 있을 정도로 신이 전능하다는 이야기는 신은 인간으로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면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점은 (고작) 영원진리를 이해하는 것이니까.

- 데카르트는 자연법칙에 신이 따라야 한다. 신이 자연법칙을 준수해야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고대 스토아 철학처럼 신을 운명에 종속시키려는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데카르트에세 신의 전능은 그 모든 필연을 초월하는 것.

- 스피노자가 여기서 하려는 것이 바로 저런 영원진리창조론에 대한 거부다. 그런 게 있을 수 없다는 것.

 

- 데카르트의 이야기가 너무 신학적이고 어이없게 보일 수 있겠지만, 사실 형이상학적으로는 참으로 흥미로운 이야기다. 진리가 만들어 진다는 이야기 아닌가. , 진리를 규정하는 어떤 힘이 있다는 것. 니체식으로 이야기하면 진리를 규정하는 권력이 있다는 것. 그러니까 진리는 그 자체로 진리가 아니라 사실은 어떤 권력에 의해 진리로 만들어진 것이다라는 이야기로 이어질 수 있으며, 후대에 가서 니체가 됐든 막스가 됐든 프로이트가 됐든 사람들이 이렇게 이야기하도록 할 수 있는 어떤 형이상학적 경로가 바로 이런 데서 나오는 것이다.

- 이를테면 프로이트의 유명한 말, ”무의식은 모순을 모른다“. 이때 모순은 모순율이다. 논리학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이자 영원진리 중 하나가 모순율인데, 프로이트는 무의식은 모순율을 모른다, 모순을 모른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의 의식의 관점에서 보면 말도 안 되는 차원의 일이 무의식의 차원에서는 이루어진다는 것. 물론 프로이트는 무의식이라는 것이 고유한 규칙이나 매커니즘을 갖고 있고 우리는 그것을 편의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 133의 주석에 가서 영원진리창조론에 대해 다시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정리17 주석의 또 다른 논점은,

 

2) 신의 지성과 의지는 신의 본질이 아님

- 스피노자가 논박하고 싶어하는 적수들의 주장: 인간이 가진 것 중 가장 완벽한 것이 의지와 지성이다 > 그러니 신의 그것은 그보다도 더욱 무한할 것이다 > 그러니 신의 무한한 의지와 무한한 지성이야말로 신의 본질이다!

- 신의 지성과 의지, 곧 무한지성과 무한의지는 신의 본질이 아니라, 그 본질에서 따라 나오는 특성이라는 점을 논증하고자 한다 (나중에 가면 나오지만 스피노자에게 지성과 의지는 무한양태이다)

 

2-1) 신의 지고한 의지야말로 신의 전능함의 표현이라는 주장에 대한 반박

 

- 지금은 아무것도 수행하지 않지만 인식할 수 있는 능력 자체는 가진 사람: 잠재적 인식자

지금 인식하는 것을 수행중인 사람: 현행적 인식자

- 신을 옹호하는 스피노자 적수들의 주장: 신은 (무한지성을 통해) 무한하게 많은 것을 현행적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무한의지를 통해) 그걸 하나하나 다 창조해서 실존하게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게 신의 전능함을 인식할 수 있는 증거이다. ? 신이 인식하는 대로 모든 것을 계속 창조해야한다면, 당연히 지성보다 우위에 있어야할 신의 자유의지가 제한을 받는다는 말이다. ”인식하는 대로 다 창조해야한다는 당위에 제한을 받는 자유의지는, 이미 자유의지가 아닌 게 되어버리니까. 그래서 그들은 신은 무한하게 많은 것을 인식하고 있지만 그걸 다 창조해서 실존하게 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 게다가 그들의 관점에서 신이 인식하는 대로 계속 창조를 한다면, 남아있는 비장의 뭔가가 없는 것이 아닌가. 그건 신의 전능함에 위배되는 것이고, 신의 전능함을 폄하하는 것 아닌가. 신은 인식하는 대로 다 하는 게 아니라 창조해야 되겠다고 의지하는 것만 창조하신다(결국 의지를 부각시키기 위해 의지가 없을 때는 필연적 법칙을 하지 않아도 되는 무관심함도 전능함에 들어가고, ”의지로서 필연적 법칙을 위배하고 거스르는 것도 전능함에 들어가니, 의지의 힘을 부각시키기 위해 의지하는 것만 창조한다고 주장)

 

- 하지만 스피노자에게 신의 전능함은 여분을 남겨두고 부분만 수행하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현행적으로 발휘되는 능력이다. 신이 무한하게 많은 것을 인식해놓고 나서는 무언가는 창조하고 무언가는 창조하지 않고 남겨두면 그거야말로 신의 전능함을 깎아먹는 것 아닌가. 신의 잠재적 역량, 현행적 역량을 나누는 것을 스피노자는 견디지 못한 것이다. 아니, 그게 무슨 전능함인가. 발휘되지 않는 능력이 있고, 발휘되는 능력이 있는 게 무슨 전능함이야.

- 스피노자에게 전능함이라는 것은 막 흘러넘치는 것이다. (주체할 수 없이 넘쳐서) 본성적으로 필연적으로 산출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것이야말로 진짜 풍부함이고 전능함이지 뭐가 부족해서 아껴뒀다가 나중에 꺼내 쓰고ㅋㅋㅋㅋ 이런 게 무슨 전능함이냐는 이야기다.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프롤로그에서 짜라투스트라가 10년 입산수도를 하고 어느 날 해 뜨는 아침에 나와 해를 보면서 아, 풍요로운 태양아, 너 어떻게 그렇게 나랑 비슷하냐ㅋㅋ 너 넘치도록 풍요로운 태양아 세상만물을 다 너의 열기로 빛으로 넘치도록 가득한 빛으로 비추는 태양아, 나의 지혜가 바로 그렇다. 내 지혜가 너무 넘쳐서 주체할 수 없으니 사람들에게 이제 나눠주러 가야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스피노자가 이야기하는 전능함은 이렇게 넘치도록 주체할 수 없이 매순간 발휘되는 것이다. 넘치도록 만들어내는 게 전능한 거지, 아껴놓다가 나중에 풀어주고 그런 게 무슨 전능한 것인가. 그러니 그렇게 말하는 너희들이야말로 신의 전능함을 부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신의 전능함은 영원히 현행적이었으며, 영원히 같은 현행성 속에 남아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해서, 적어도 내 생각으로는, 신의 전능함에 대해 훨씬 더 완전한 관념이 확립되게 된다. 더욱이 신의 전능함을 부정하는 이들은 바로 반대자들인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이 무한하게 많은 창조 가능한 것들을 인식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것들을 창조할 수 없으리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만약 그렇지 않다면, 곧 만약 그가 자신이 인식하는 모든 것을 창조했다면, 그들에 따를 경우, 신은 자신의 전능함을 모두 소진시키고 자신을 불완전하게 만들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그러니까 이것은 신의 전능함에 대한 너무 소심한 생각이다. 다 써버리고 고갈된다는. 상당히 생태주의적인 생각. 신의 전능함이라는 건 너무 넘쳐서 무한하게 많은 것들을 매순간 만들어내는 것인데 너희들은 그게 고갈될 까봐 두려워하다니 신의 전능함에 대해 못 믿는 건 혹은 반대하는 건 너희들 아니냐) 따라서 신이 완전하다는 점을 확립하기 위해서 그들은 동시에 신은 자신의 역량이 미치는 모든 것을 해낼 수 없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게 되는데, 나는 사람들이 이보다 더 부조리한 것 도는 신의 전능함과 더 양립불가능한 것을 꾸며낼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2-2) 신의 지성과 의지는 인간의 지성과 의지와 다르다

 

왜냐하면 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지성과 의지는 우리의 지성과 의지와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달라야 하며, 이 후자의 것들과는 이름 말고는 합치하는 점이 전혀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하늘에 있는 개의 별자리와 짖는 동물인 개 사이에 이름 말고는 합치하는 점이 전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 이름만 같을 뿐, 우리가 우리의 지성과 의지를 지성과 의지라고 지칭하는 것과 신의 지성과 의지를 지성과 의지라고 지칭하는 것은 다르다.

상당히 재미있는 주장이다

- 스피노자가 초기에 썼던 <정신교정론>에서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한다. ”원이라는 관념은 둥글지 않다이것도 아주 재미있는 표현이다. 원은 둥글지만, 원에 대한 인식인 원의 관념은 둥글지 않다는 말이다. 이 말은 (2부에 가서 보게 되겠지만) 스피노자가 신체와 정신은 상호작용하지 않는다, 간섭하지 않는다고 했던 것과, 앞서 봤던 사유속성과 연장속성은 서로 간섭하지 않고 상호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의 맥락이다. 그러니까 사유속성에 속하는 관념과 연장속성에 속하는 신체는 다르다는 것이다. 이것을 표현한 말이 바로 원이라는 관념은 둥글지 않다“. , 원이라는 연장에 속하는 도형은 둥근 모양을 갖지만 관념은 둥글다 네모나다는 모양을 갖지 않듯이, 관념과 관념의 대상이 되는 무언가는 전혀 다르다.

- 여기서도 그렇다. 신이 갖고 있는 지성과 의지와 인간의 지성과 의지를 비교하고 있다. 양자가 천양지차로 다르다는 것.

 

만약 (신의) 지성이 신의 본성에 속한다면, (<- 적수들이 하는 주장) 그러한 지성은 우리의 지성이 그러하듯이 본성상 인식된 실재 다음에 오거나 그것들과 동시에 오지 않는데, 왜냐하면 인과성에서 모든 것에 앞서 있기 때문이다.“

 

- ”신의 지성은 인과성에서 모든 것에 앞서 있기 때문이다“: 아까 데카르트의 영원진리창조론 이야기를 하면서 창조는 신이 의지하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중세철학 근대철학의 또 다른 신학자들은 신의 지성이라는 것 자체가 창조적인 지성이다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의미냐면-

- 그러니까 인간이 인식한다= 인간이 관념을 갖는다는 이야기는, 우리의 지성/정신 바깥에 있는 어떤 현실적인 사물을 대상으로 인식한다는 이야기다. 그게 우리 인간들의 인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인식한다= 인간이 관념을 갖는다에는 항상 사물/대상이 전제되어 있다. 사물/대상이 먼저 존재하고, 이 사물이나 대상을 인간이 나중에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논리적 시간적 선후관계로 보면 인간의 인식은 항상 지성보다 먼저 있는 사물을 전제한다.

- 이것을 현대적 용어로 하면 representation. 인식이라는 것은 representation의 성격을 갖고 있다. 다시 프리젠테이션한다, 무엇을? 여기 present에 있는 presence, 현존하고 있는 사물이다. 대상을 우리의 지성 안에서 다시 representation 재현하는, 다시 현존하게 만드는 것, 그게 바로 인식이다. 인간의 인식의 성격.

 

- 그렇다면 신의 지성은 어떨까. 신이 (지성으로) 인식한다는 것이 만약 인간의 그것과 같다면, 신이 인식하기 전에 인식할 사물이 있어야한다. 그러면 그 사물은 누가 갖다놓은 것인가, 신 이전에의 문제에 부딪힌다. 이건 말이 안 되니까, 인간의 인식과는 다르게 신이 지성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대상이 없는 인식이다. 그러니까 원형으로서의 관념이다. 원형으로서의 관념에 입각해서 신의 의지가 창조를 하는 것이다. 신학자들마다 차이는 좀 있지만 원형으로서의 관념은 일종의 모델이다. 우리가 건물을 짓거나 어떤 것을 만들 때 모형을 만들 듯이, 신이 지성으로 인식한다= 신이 관념을 갖는다는 것은 이 세계의 모형, 이 시계의 원형으로서의 관념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는 것은 신의 의지. 그러니까 신의 관념= 신의 인식이라는 것은 미리 전제하는 대상이 없는 인식.

-스피노자가 여기서 하는 이야기가 바로 이것이다. ”인식된 실재 다음에 오거나(’실재라는 게 먼저 있고-> 실재 다음에 지성이 인식하고-> 그래서 실재는 우리에게 인식되는 것이고. 그러니까 사물이 먼저 있고 지성의 인식이 있다) 그것들과 동시에 오지 않는데, 왜냐하면 인과성에서 모든 것에 앞서 있기 때문이다.(뭔가를 새롭게 처음으로 구상하고 처음으로 원형을 만드는 것이 신의 지성이니까 신의 지성자체가 창조적이다)

 

역으로 실재들의 진리와 형상적 본질이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그 진리와 형상적 본질이 신의 지성 안에서 표상적으로(objective) 그처럼 실존하기 때문이다.“

 

- ”실재들의 진리와 형상적 본질이라는 테크니컬한 텀이 쓰였는데

- ”형상적 본질이라는 것은 인식과 지성과 독립해서 미리 존재하고 있는 사물의 본질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 같다.

- 인간이 인식한다 = 인간이 사물의 형상적 본질을 인식한다는 것. 즉 리프리젠테이션 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데카르트나 스피노자는 표상적으로 인식한다“ ”표상적 본질을 갖는다라고 표현한다. 이때 표상적이라는 말은 라틴어로 오브젝티바. 뜻은 by representation. ”리프리젠테이션을 통해서 이것의 본질을 지성 안에 담는다라는 맥락에서. 영어로는 objective지만 흔히 쓰는 객관적인이라는 말과는 다르다.

- , 오브젝티바=표상적: by representation을 통해서 사물의 형상적 본질을 지성 속에 다시 한 번 담는다는 뜻.

- 이게 바로 objective essence라는 말의 스콜라철학적 용어법. <에티카> 영역본에 objective essence라고 나오지만 이것은 객관적 본질이 아니라 표상적 본질이다.

 

- 인간의 인식의 경우 이런 순서: formal essence가 먼저 있고(사물이 갖고 있는 형상적 본질이 먼저 있고) -> 그 다음에 by representation을 통해서 사물의 형상적 본질을 지성 속에 다시 한 번 담는. <- 이걸 데카르트와 스피노자가 objective essence라고 부른다. objective essence = 머릿속에서 재현된 사물의 본질.

-그러니까 형상적 본질 formal essence가 먼저 있고, 관념을 통해 재현되는 표상적 본질 objective essence가 나중에 있는.

 

- 그런데 신의 경우에는 관념이 먼저 있다. 원형으로서의 관념이 있고 그 관념으로부터 신이 사물들을 창조하는 거니까.

-, 신의 경우: 표상적 본질 objective essence가 먼저 있고-> 그것에 입각해서 신이 자신의 의지를 통해 그 표상적 본질 objective essence에 합치하는 사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형상적 본질 formal essence가 나중에 온다는 것.

- “역으로 실재들의 진리와 형상적 본질이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그 진리와 형상적 본질이 신의 지성 안에서 표상적으로(objective) 그처럼 실존하기 때문이다.”는 이런 이야기다. 신의 지성 안에서 신의 관념으로서(원형의 관념으로서= 표상으로서) 미리 존재했기 때문에 그걸 모델 삼아서 사물이 형상적 본질을 가지게 될 것이다.

 

*** 요약

왜냐하면 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지성과 의지는 우리의 지성과 의지와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달라야 하며, 이 후자의 것들과는 이름 말고는 합치하는 점이 전혀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하늘에 있는 개의 별자리와 짖는 동물인 개 사이에 이름 말고는 합치하는 점이 전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점을 나는 다음과 같이 증명해보겠다. 만약 (신의) 지성이 신의 본성에 속한다면, (<- 적수들이 하는 주장) 그러한 지성은 우리의 지성이 그러하듯이 본성상 인식된 실재 다음에 오거나 그것들과 동시에 오지 않는데, 왜냐하면 인과성에서 모든 것에 앞서 있기 때문이다. 역으로 실재들의 진리와 형상적 본질이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그 진리와 형상적 본질이 신의 지성 안에서 표상적으로(objective) 그처럼 실존하기 때문이다.“

= 만약 신의 지성이 신의 본질에 속한다면, 그 지성은 우리 인간이 갖고 있는 지성과 이름만 같지, 본질은 전혀 다르다. ? 우리 인간의 지성은 사물이 먼저 있고 나중에 그 사물의 표상이 있으니까. 사물의 재현을 통해서 사물에 대한 표상적 본질을 갖는 것이 인간의 인식이니까. 하지만 신의 경우, 원형으로서의 관념이 먼저 있고 여기에 입각해서 사물들을 창조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관념이 먼저 있고 거기서 formal essence를 가진 사물들이 창조된다, 이 이야기다.

따라서 신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인식되는 한에서의 신의 지성은 사실은 실재들의 본질 및 실존의 원인이다.“ <- ? 이때 신의 지성은 사물들을 창조하는 지성이니까.

 

- 이러한 창조적 지성의 관념은 아우구스티누스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에 이르기까지 중세철학에 상당히 광범위하게 전해 내려오는 생각이며, 근대철학에서는 말브랑슈 Nicholas Malbranche에 의해 계승되는 생각이다. ”세계가 창조되기 이전에는 오직 신만이 존재했으며, 신은 인식 및 관념들 없이 창조할 수는 없었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신이 갖고 있던 이 관념들은 신 자신과 전혀 다르지 않다.“ <진리탐구>

 

- 이어지는 스피노자의 논점. 신의 지성이 실재들의 본질과 실존의 원인이기 때문에 신은 본질과 실존에서 필연적으로 실재들과 달라야한다. ”왜냐하면 원인지어진 것(결과)은 정확히 말하면 바로 그것이 원인으로부터 얻는 것으로 인해 원인과 다르기 때문이다, 원인이 되는 것과 그 원인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은 전혀 달라야 한다는 말.

- 이것은 정리29의 주석과도 연결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은 다르다. 소산적 자연은 항상 능산적 자연의 결과지 원인이 될 수 없다. 능산적 자연은 항상 원인일 수밖에 없다. 원인-결과의 측면에서 보면 두 자연은 전혀 다르다.

- 그러니까 정리17의 주석에서 만물이라는 것이 산출된 자연을 가리킨다면 신은 산출하는 자연인 것이고, 이 경우 만물과 신의 관계는 매우 비대칭적인 것이다.

- , 신의 지성은 우리 지성의 본질 및 실존의 원인이며, 따라서 신의 본질에 속하는 것으로서의 신의 지성은 이름 말고는 우리의 지성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는 의지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논점이다, 땅땅!

 

- 정리15의 주석에서 물을 양태로 인식하는 방법과 연장의 실체로 인식하는 방법에 대해 했던 이야기를 <<<<<<<<<“가령 우리는 물이 물인 한에서는 분할되며 그 부분들은 서로 분리된다고 인식하지만, 물체적 실체인 한에서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실체인 한에서 물은 분리되지도 분할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물인 한에서의 물은 생성과 부패에 종속되지만, 실체인 한에서는 생성에도 부패에도 종속되지 않는다.” - 양태로서의 물은 생겨났다가 사라지기도 하고 변용되기도 하지만 실체로서의 물은 그렇지 않다. 물이 물인 한에서(=물이 양태인 한에서)는 증발되기도 하고 고여서 썩기도 하지만, 물이 실체인 한에서(연장 그 자체인 한에서의 물)는 물이 사라져버린다고 하면, 물이 있던 자리가 진공으로 바뀌는 것이다. 아무 것도 없어진다. H20라는 분자가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다. 양태로서의 물은 생겼다가 변용되고 사라지기도 하지만, 실체로서의 물은 생성도 소멸도 없다.>>>>>>>> 정리17 주석에서 스피노자는 사람의 본질과 엮어서 말하고 있다.

- 한 사람의 실존이 생성 성장 소멸 변형의 대상이 될 수는 있다. 하지만 사람이라는 본질은 다 똑같다(사람의 본질은 영원진리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본질에 관해서는 이들 모두 완전히 합치할 수 있지만 실존 속에서는 서로 달라야 한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한 사람의 실존이 사라진다해도 다른 사람의 실존이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만약 한 사람의 본질이 파괴되고 거짓된 것이 될 수 있다면 또한 다른 사람의 본질 역시 파괴된 것으로 나타날 것이다) 만약 사람이라는 본질이 사라져버리면 다른 사람이라는 본질도 사라져버린다. 구멍이 난다. 진공이 생긴다. 그런 것은 있을 수가 없다.

 

*** 현행적 본질 VS 영원진리로서의 본질

 

- 그런데 이것이 나중에 가면 재미있는 논의로 이어지면서 어떤 문제가 제기가 된다. 한번 2부의 정의2로 가보자. 2부의 정의2는 실재의 본질이라는 것은 무엇인지, 본질개념을 정의해놓은 것이다. 나는 어떤 실재의 본질에는, 그것이 주어지면 그 실재가 필연적으로 정립되고, 그것이 제거되면 실재도 필연적으로 제거되는 것이 속한다고, 또는 그것이 없이는 실재가, 역으로 실재가 없으면 그것이 존재할 수도 인식될 수도 없는 것이 속한다고 말한다.

- 그러니까 여기에 따르면 A라는 사물이 있고 A라는 사물의 본질이 있다. 그러면 이 A라는 사물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것이 성립하면 A도 성립, 이것이 사라지면 A도 사라지는. 반대로 A가 성립하면 A의 본질도 성립하고 A가 사라지면 A의 본질도 사라지는. 이게 바로 사물의 본질이다.

- 그런데 이 정의2에 나오는 이 본질개념의 아주 독특한 특징은, 이 본질은 굉장히 개체화된 본질이다. A라는 개체, A라는 사물과 뗄레야 뗄 수 없게 긴밀하게 연결된 본질. 이게 정의2에 나오는 본질이다.

- 그런데 우리가 2부 정리17의 주석에서 사람의 본질 이야기를 했는데 다시 정리해보자. A라는 사람이 생겨나서 살다가 사라졌다. 2부 정의2에 따르면 이 A라는 사람의 본질은 사라져야 한다. 하지만 1부 정리17의 주석에 따르면 A라는 사람의 본질은 남아있어야 한다. 영원본질이니까. 그런데 2부 정의2를 따르면 A라는 사람이 성립하면 A의 본질이 성립하고 A라는 사람이 사라지면 A의 본질도 사라진다. 그러니까 상호관계가 성립. 그러나 1부 정리17의 주석에서는 이러한 상호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 그리고 아까 1부 정리17의 주석에 삼각형의 본질 이야기도 나온다. 삼각형A의 본질이라고 안 하고 삼각형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이때의 본질은 보편적인 본질, 류적인 본질, 종적인 본질이다. 어떤 특정한 개체와 긴밀하게 연결이 되어있는. 삼각형의 본질은 삼각형A 하나가 없어져도 남아있다. 사람의 본질도 사람 하나가 없어져도 남아있다. 그런데 2부 정의2에 나오는 것은 A가 사라지면 이 본질도 당연히 사라진다. 뭐지?????

 

- 3부 정리7로 가보자. “각각의(each) 실재가 자신의 존재 안에서 존속하려고 하는 노력(conatus)은 실재의 현행적 본질(actual essence) 자체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스피노자가 여기서 코타투스를 현행적 본질이라고 말한다. 이 현행적 본질이 바로 2부 정의2에서 내리는 이 본질이다. 이것은 그 사물이 성립하면 이 사물의 코나투스도 성립하고 이 사물의 코나투스가 성립하면 이 사물도 존립하고, 이 사물의 코나투스가 없어지면 이 사물도 없어지고. 그러니까 이 사물과 이 사물의 본질 사이에는 상호성, 상호전제관계가 성립한다. 이걸 스피노자가 actual essence라고 부른다.

- 그러니까 2부 정의2는 사실은 3부 정리7의 코나투스를 염두해두고 제시된 정의다.

 

- 그럼 1부 정리17의 주석에 나오는 이 본질은 현행적 본질인가? 아니다. 스피노자는 이것을 영원진리로서의 본질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럼 영원진리로서의 본질과 현행적 본질은 무슨 차이가 있을까, 이런 질문들이 제기될 수 있다. 이 답은 나중에 5부에 나온다. 그것도 아주 첨예한 문제로 나온다. 왜냐하면 그 전까지는 사람과 관련해서 영원성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안 하는데, 지금 영원한 것은 다 신, 속성 이런 것들인데, 5부에서는 인간 같은 유한한 것과 관련해서 영원성을 이야기한다.

 

*** 코나투스

- 코나투스라는 개념은 라틴어로 말하면 노력. “존속하려고 애쓴다”. 이 코나투스라는 말은 어떻게 보면 상당히 평범한 말이다(사실 나는 존속하려고 애쓴다는 말을 듣자마자 매우 울컥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이 평범한 말을 잘 뜯어보면 참 신기한 단어다. 존속하려고 애쓴다. 우리가 농담 삼아 왜 사니이런 말을 쓰는 경우가 있는데, 산다는 것은 굉장히 평범하지만 굉장히 심오한 활동이다. 곰곰이 뜯어보면 아주 이상하다. 왜 살까, 도대체. 누군가는 죽지 못해 산다고도 하는데, 그 죽지 못해 산다는 것도 참 신기한 것이다

- 1920년에 프로이트가 <쾌락원칙을 넘어서>에서 아주 흥미로운 개념을 말하는데 바로 죽음충동이라는 개념이다. 프로이트는 인간을 포함한 유기체에는 아주 기본적인 두 가지 충동이 있는 것 같다는 사변적인 가설을 세운다. 하나가 삶의 충동. 에로스. 이것은 스피노자의 코나투스와 거의 같은 개념이다. 살아남으려는, 생존하려고 막 애쓰는. 다른 하나가 바로 죽음 충동. 무기물과 같이 아무런 자극이 없는 평온한 상태로 돌아가려는 충동.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뭔가에 자극을 받는 다는 것이다, 그게 좋은 자극이든 나쁜 자극이든. 스피노자가 2부에서 말하지만, 산다는 것은 외부로부터 끊임없이 변용되는, 물을 마시든, 바람을 쐬든, 화를 내든, 뭔가 이렇게 끊임없이 영향을 받고 영향을 주고, 변용하고 변용되고. 이것은 계속 자극을 받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유기체는 그 자극이, 자극 받는 다는 것은 고통이다. 즐거운 고통도 있고 안 좋은 고통도 있겠고. 유기체는 그런 고통을 받는 것이 싫으니까 무기체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충동이 있다는 것. 생명이 없어지면 아무 자극도 느끼지 못하니까. 그 상태가 굉장히 편안한. 이렇게 프로이트는 에로스와 타나토스를 같이 이야기하며, 저 두가지 충동이 인간을 포함한 유기체들을 이루는 기본저인 충동인 것 같다는 가설을 세운다.

- 그러나 스피노자는 죽음충동같은 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모든 유한적 동물들의 아래에는, 근저에 있는 현행적 본질은 코나투스에 있다고 말한다. 살려고, 존속하려고 애쓰는 것. 참 평범한 것 같아도 따지고 보면 참 신비하다. 사람이 산다는 것. 산다는 것 자체가 어떻게 보면 영원성에 속하는 것일 수도 있다. (실존주의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 전혀 다른 것처럼 보여도 사르트르가 스피노자를 굉장히 좋아했다)

 

* 정리18: “신은 모든 것의 내재적 원인이지 타동적 원인이 아니다

- 타동적 원인 causa transiens : 자기 바깥에 결과를 생산해내는 원인.

신에게는 바깥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타동적 원인일 수 없다.

 

* 정리19: “신 또는 신의 모든 속성은 영원하다

- 데카르트의 관념이론 중에서 흥미롭고 스피노자 철학에도 영향을 준 용어법이 형상적 실재성과 표상적 실재성. formal reality objective reality. 데카르트가 objective라는 말을 썼다는 것은 객관적이라는 뜻이 아니라 표상적이라는 뜻이다. 데카르트 철학에서 이 용어들이 어떻게 정의가 되고 있는지 정리된 것을 읽어보면 낯선 용어들이기는 하지만 매우 흥미롭다. 그리고 이런 걸 보면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칸트 이후에 우리의 인식의 지평이 너무 좁아졌구나, 칸트 이전의 사람들은 이런 용어를 써가면서, 신을 호출해가면서 인간의 지성 너머에 있는 존재, 사유의 영역을 막 제멋대로 상상했는데 칸트 이후에 그 반경이 너무 좁아졌구나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칸트의 불가지론, 우리는 현상만 인식할 수 있다, 우리의 인식이라 현상세계에만 국한하여 이루어져야 한다, 이런 생각이 독창적이지만 인식의 범위를 이렇게 딱 정해버리는, 우리가 정당하게 인식할 수 있는 범위는 여기까지이고 나머지는 다 가상이다, 라고 인식의 범위를 좁혀버린 그런 점에 있어서 아쉽다(존재 자체, 존재 너머에 대한 인식과 사유를 근본으로 하는 형이상학적 사고를 괄호로 묶어 본문 밖으로 빼어버린 것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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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다시 들어본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설. 스피노자와 연관시켰을 때 스피노자가 부각시킨 작용인과 스피노자가 질색했던 목적인개념이 흥미로웠다. 나도 많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촘촘한 결들을 목적으로 소급해버릴 위험이 다분한 목적론이 질색인데(‘먹고사니즘같은, 천박하지만 강력한 원인소급도 결국 이런 맥락), 과거에 존재하는 것을 원인 삼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존재하는 것을 원인으로 삼는 것, 이 시간의 혼란이 가져다주는 욕망의 혼란이 흥미로웠다.


강의에서 목적인의 예로 든 건강은 산책의 원인이다는 사실 산책은 건강의 원인이다로 바꿔 말할 수 있고, 논리적으로나 언어학적으로 따져봤을 때 전자보다는 후자가 더 타당한 말일 것이다. 하지만 목적인적인 논리로서 우리는 자주 혼란에 빠진다. 건강하기 위해서 산책을 시작했으므로 건강이 산책의 원인이 되기도 하고, 건강하기 위해서 산책을 시작했다는 것 자체에 이미 산책이 건강의 원인이 된다는 전제가 포함되어 있기에 명사의 순서를 반대로 뒤바꾸어도 말이 되는 건 너무 당연하다. 하지만 후자는 뻔하지만 전자는 나의 의지가 좀 더 강조되기 때문에 보다 능동적인 느낌이 나고, 거기에 시간을 살짝 헝클어놓는 맛이 나기 때문에 매력적이지. 재미를 위해 약간의 맥락을 지우면 건강의 결과가 산책이라는 이야기인데 이렇게 살짝 비트는 표현, 재미있잖아.


게다가 건강 때문에 산책을 시작했다 같은 단순한 상황묘사에서 좀 더 나아가면 별 의미 없었던 과거의 어떤 시간에 의미를 부여할 여지조차 있다. 이를테면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당신을 제대로 알아보려고 그동안 (시행착오인) 연애들을 계속 해온 것 같다” “내가 (현재 너무나 의미 있는) 이 일을 하게 되려고 그동안 많은 기회들을 놓쳤나보다같은 것. 의미 없이 흘려보낸 시간들이나 후회나 회한으로 남겨진 사건들에, 그 당시에는 세상에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당신이나 이 일을 만나기 위한, 나에게 커다란 충만함을 안겨주는 당신이나 이 일을 만나게 만든 결과라는 의미를 덧대면 내 인생의 한 부분이 조금 더 그럴듯해진다.


매력적이자 기만적인. 스피노자와는 다른 이유지만 역시 나도 목적인이 마음에 안 든다ㅋㅋ 하지만 그런 기만적인 위안이나마 적절히 섞는 게 필요할 때도 있는 게 인생이니까. 나 스스로가 목적인적 태도를 취하는 것은 엄격하게 경계하되, 누군가의 목적인적 태도를 함부로 기만이라고 폄하하지는 말자.

 

***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설:

1. 질료인 material cause : “원인이란 우선 한 사물을 구성하고 있는 내재적 질료이다. 청동은 [청동] 조각상의 원인이고...” , 질료인은 그것으로 무엇으로 되어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2. 형상인 formal cause : “다른 의미에 있어서의 원인은 형상과 범형, 즉 본질(과 그런 유들)의 정의이다.” , 형상인은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서 제시되는 원인이다.

3. 작용인 efficient cause : “또 원인은 변화/정지의 제일원리이다. 한 결정의 주인공은 그 행위의 원인이고, 아버지는 아이들의 원인이며, ...” , 운동인/작용인은 무엇이 저것을 저 상태에 이르게 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 질료인과 형상인은 사물에 내재해 있지만, 작용인은 사물에 외재해 있다. “한 결정의 주인공은 그 행위의 원인이고라는 말은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4. 목적인 final cause : “원인은 또한 목적이다. 즉 목적인이다. 예컨대 건강은 산책의 원인이다. ...” , 목적인은 ?” 혹은 무엇을 위해?”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작용인은 과거에 존재하고, 목적인은 미래에 존재.

 

-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설(형상인, 질료인, 작용인, 목적인) 중에 스피노자는 작용인을 부각시켰다. 사실 이건 17세기 후반에 과학혁명을 정당화하고, 과학혁명에 부합하는 어떤 형이상학 철학을 만들려고 했던 대개의 철학자들이 공유하고 있던 생각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네 가지 원인을 작용인을 중심으로 해서 재구성하려는 작업.

- 작용인 외에 목적인이라는 것을 유지하려고 했던 철학자들도 굉장히 많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이런 목적론에 대해 아주 철저하게 비판하는 입장. 그래서 스피노자 철학에서는 네 가지 원인 중에서 작용인만이 실제로 자연에서 작용하는 유일한 원인인 것으로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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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랜만에 다시 들어본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설. 스피노자와 연관시켰을 때 스피노자가 부각시킨 작용인과 스피노자가 질색했던 목적인개념이 흥미로웠다. 나도 많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촘촘한 결들을 목적으로 소급해버릴 위험이 다분한 목적론이 질색인데(‘먹고사니즘같은, 천박하지만 강력한 원인소급도 결국 이런 맥락), 과거에 존재하는 것을 원인 삼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존재하는 것을 원인으로 삼는 것, 이 시간의 혼란이 가져다주는 욕망의 혼란이 흥미로웠다.

강의에서 목적인의 예로 든 건강은 산책의 원인이다는 사실 산책은 건강의 원인이다로 바꿔 말할 수 있고, 논리적으로나 언어학적으로 따져봤을 때 전자보다는 후자가 더 타당한 말일 것이다. 하지만 목적인적인 논리로서 우리는 자주 혼란에 빠진다. 건강하기 위해서 산책을 시작했으므로 건강이 산책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건강하기 위해서 산책을 시작했다는 것 자체에 이미 산책이 건강의 원인이 된다는 전제가 포함되어 있기에 명사의 순서를 반대로 뒤바꾸어도 말이 되는 건 너무 당연하다. 하지만 후자는 뻔하지만 전자는 나의 의지가 좀 더 강조되기 때문에 보다 능동적인 느낌이 나고, 거기에 시간을 살짝 헝클어놓는 맛이 나기 때문에 매력적이지. 재미를 위해 약간의 맥락을 지우면 건강의 결과가 산책이라는 이야기인데 이렇게 살짝 비트는 표현, 재미있잖아.

게다가 건강 때문에 산책을 시작했다 같은 단순한 상황묘사에서 좀 더 나아가면 별 의미 없었던 과거의 어떤 시간에 의미를 부여할 여지조차 있다. 이를테면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당신을 제대로 알아보려고 그동안 (시행착오인) 연애들을 계속 해온 것 같다” “내가 (현재 너무나 의미 있는) 이 일을 하게 되려고 그동안 많은 기회들을 놓쳤나보다같은 것. 의미 없이 흘려보낸 시간들이나 후회나 회한으로 남겨진 사건들에, 그 당시에는 세상에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당신이나 이 일을 만나기 위한, 나에게 커다란 충만함을 안겨주는 당신이나 이 일을 만나게 만든 결과라는 의미를 덧대면 내 인생의 한 부분이 조금 더 그럴듯해진다.

매력적이자 기만적인. 스피노자와는 다른 이유지만 역시 나도 목적인이 마음에 안 든다ㅋㅋ 하지만 그런 기만적인 위안이나마 적절히 섞는 게 필요할 때도 있는 게 인생이니까. 나 스스로가 목적인적 태도를 취하는 것은 엄격하게 경계하되, 누군가의 목적인적 태도를 함부로 기만이라고 폄하하지는 말자.

 

***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설:

1. 질료인 material cause : “원인이란 우선 한 사물을 구성하고 있는 내재적 질료이다. 청동은 [청동] 조각상의 원인이고...” , 질료인은 그것으로 무엇으로 되어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2. 형상인 formal cause : “다른 의미에 있어서의 원인은 형상과 범형, 즉 본질(과 그런 유들)의 정의이다.” , 형상인은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서 제시되는 원인이다.

3. 작용인 efficient cause : “또 원인은 변화/정지의 제일원리이다. 한 결정의 주인공은 그 행위의 원인이고, 아버지는 아이들의 원인이며, ...” , 운동인/작용인은 무엇이 저것을 저 상태에 이르게 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 질료인과 형상인은 사물에 내재해 있지만, 작용인은 사물에 외재해 있다. “한 결정의 주인공은 그 행위의 원인이고라는 말은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4. 목적인 final cause : “원인은 또한 목적이다. 즉 목적인이다. 예컨대 건강은 산책의 원인이다. ...” , 목적인은 ?” 혹은 무엇을 위해?”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작용인은 과거에 존재하고, 목적인은 미래에 존재.

 

-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설(형상인, 질료인, 작용인, 목적인) 중에 스피노자는 작용인을 부각시켰다. 사실 이건 17세기 후반에 과학혁명을 정당화하고, 과학혁명에 부합하는 어떤 형이상학 철학을 만들려고 했던 대개의 철학자들이 공유하고 있던 생각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네 가지 원인을 작용인을 중심으로 해서 재구성하려는 작업.

- 작용인 외에 목적인이라는 것을 유지하려고 했던 철학자들도 굉장히 많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이런 목적론에 대해 아주 철저하게 비판하는 입장. 그래서 스피노자 철학에서는 네 가지 원인 중에서 작용인만이 실제로 자연에서 작용하는 유일한 원인인 것으로 제시한다.

 

2. 스피노자가 라틴어로 쓴 <소론>의 원본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못했다고 하는데 누군가 이 책에 얽힌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나 로랑비네 풍의 소설을 써주면 좋겠다. 아 근데 둘 다 프랑스 작가들이네. 30대 초반까지만해도 나는 프랑스 특유의 어떤 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특히 영화. 에릭 로메르 정도가 마지노선 아니었을까) 어느 순간부터 취향이 조금 변한 것 같다. 심지어 미셸 뷔시 같은 프랑스 대중 추리소설도 좋아하기 시작한 걸 보면.

 

3. 자유개념과 관련해서 스피노자를 비판하는 의견들에 동의할 수가 없었다. 일단 우연에 대한 여지를 두는 것과 자유의 여지의 상관관계에 커다란 의문이 있다. 그래서 비판자들의 “(스피노자는) 필연적인 법칙의 체계로서의 자연을 이야기하면서 어떻게 자유, 항상 우연을 전제할 수밖에 없는 자유를 이야기할까라는 의견을 들을 때 의아했다.

일단 항상 우연을 전제할 수밖에 없는 자유라는 전제 자체에 동의할 수 없다. 물론 톱니바퀴처럼 딱딱 맞물리는 어떤 법칙에서 벗어났을 때, 즉 톱니바퀴의 제약에서 벗어난 상태를 자유로 생각하는 맥락이라는 것은 알겠다. 하지만 아무 것에도 제약받지 않는 상태에서의 자유에 대해 평소에도 매우 회의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일단 나 스스로를 가장 많이 제약하는 것은 결국 신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나 자신이기 때문에 내가 유체이탈을 하지 않는 한은 뭐...).

차라리 항상 우연을 전제할 수밖에 없는에 맞닿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고작해봐야 예외’ ‘의외성정도가 아닐까(‘우연이라는 단어와 예외’‘의외성이라는 단어의 의미 사이의 거리가 너무 가까운 것만 봐도 나는 우연이 전제된 상황 뒤에 나올 결과에 대해 상상력이 부족하거나 지나치게 회의적인 것 같다. 뭐가됐든 우연뒤에 나오는 단어가 자유인 것에는 동의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건 확실하다). 우리는 이 사회에서 이미 너무나 많은 제약을 디폴트로 안고 살기 때문에 이 제약에서 잠시 풀려나는 순간, 혹은 이 제약이 원래의 시스템 트랙을 따라 돌아가지 않고 잠시 법칙에서 벗어난 경로로 빠질 때 의외성을 느끼고 이 예외적인 상황을 자유로 착각하기 쉬운 것 같다.

갑자기 제약이 사라져도, 그래서 우연이 발생해도, 자율적 역량에 따라서 그 제약이 사라진 상태가 자유에 가까운 상태로 바뀌기도 하고 더욱 속박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일단은 우연자유의 잠재성을 포함한, 자유의 잠재태로서의 밀도가 더 진하다고 생각하느냐하면 그것도 솔직히 아니다. ‘자유의 잠재태로서의 밀도가 진한 건 외부적 상황보다는 내부적 상황인 것 같다. 제약 안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자유롭고, 제약 밖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는 사람은 자유롭지 못하니까. (물론 전쟁중이라든가 국가가 선포하는 거시적 제약에 관해서는 다른 의견을 갖고 있다. 이건 어디까지나 그냥 세속적 의미로서의 평범한상황에서)

아무튼 비판자들의 의견을 들었을 때 이미 동의할 수 없었으므로 앞으로 나올 스피노자의 자유에 대한 이야기들이 기대가 된다.

 

- 스피노자에게 자연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우연적인 게 없다. 스피노자의 형이상학 체계에서는 우연이라는 게 있을 수 없다. 모든 것은 다 필연적으로 일어난다. 필연적으로 규정이 돼서 일어나게 되어있다. 그래서 스피노자 철학이 결정론 철학이다, 필연성 철학이다, 그래서 스피노자 철학에는 자유의 여지가 없다, 이런 비판들이 상당히 많이 제기된다

- 그래서 어떤 스피노자 연구자들은 스피노자 철학에는 아주 실천적인 비일관성이 있다”, 한편으로 필연을 이야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자유를 굉장히 강조하는. 그런데 필연적인 법칙의 체계로서의 자연을 이야기하면서 어떻게 자유, 항상 우연을 전제할 수밖에 없는 자유를 이야기할까, 그러니까 스피노자 철학은 비일관적인 철학이다, 라고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다수는 아니지만 꽤 있다.

 

4. 3번까지를 메모해 놓고 나서야 이사야 벌린의 자유개념에 대해 들었다. 맞다, 이런 분류가 있었지. 그래, 자유라는 개념은 하나로 정의내릴 수 없는 것인데 나는 나대로의 자유개념만을 가지고 다른 자유개념을 바라봤던 것 같다. 그리고 소극적 자유, 적극적 자유, 네오-로만 리퍼블릭카니즘 모두 어느 것 하나에 더 동감한다고 고를 수 없을 정도로 골고루 다 동감했다. 번호가 다른 골프채들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 앞에 놓인 상황에 따라 골라서 빼어들. 하지만 "적극적 자유"의 개념, "그러니까 이것은 아주 이상적인 어떤 것을 추구하고 그것을 획득했을 때, 달성하려고 할 때 누릴 수 있는 어떤 자유다. 그러니까 장애물이나 간섭이 없다고 해서 자유가 아니라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추구하고 그 무엇을 이루려고 할 때 누릴 수 있는 자유가 바로 적극적 자유다"를 들었을 때 어쩔 수 없이(?) 가장 마음이 크게 반응했다는 점은 솔직히 고백하겠다...


 

*** Negative liberty & Positive liberty

 

- 현대적인 의미의 자유개념을 가장 명료하게 분류한 사람은 바로 영국의 정치사상가인 이사야 벌린. 그가 1958년에 옥스퍼드 대학에 정치사상사 석좌교수로 취임하면서 했던 굉장히 유명한 강연이 있는데 바로 자유의 두 개념에 관한 강연이다. 거기에 나오는 자유의 두 개념이 굉장히 유명한 개념이다. NL(소극적 자유) PL(적극적 자유)

- 이사야 벌린 같은 사람은 자유개념의 진짜 핵심은 후자가 아니라 전자라고 생각한다. 소극적 자유말로 진짜 자유의 핵심이고, 자유주의의 규범적인 정수에 해당하는 것이다. 소극적 자유의 가장 기본적이면서 핵심적인 뜻은 아주 간단하다. 간섭을 받지 않는 것. 간섭이 없는 것. 그래서 흔히 이것을 “~로부터의 자유라고 부르기도 한다. liberty from-

- 그러니까 우리가 이해하는, 특히 자유주의적으로 이해하는 자유개념의 핵심은 이 소극적 자유개념이다. 어떤 장애물이 없거나 간섭하는 게 없을 때 그때를 두고 우리는 자유롭다라고 한다. 이사야 벌린이 이런 소극적 자유개념에 가장 대표적인 사상가로 존 스튜어트 밀과 칸트를 꼽았는데, 실제로 존 스튜어트 밀이나 칸트보다 조금 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이런 의미의 소극적 자유의 개념을 아주 잘 설명하고 명시적으로 정리한 사람이 있다. 바로 홉스

홉스가 자유 개념을 정리할 때 딱 그렇게 정의한다. “장애물이 없는 것이 자유다물체가 운동을 하는데 가로막는 것이 없으면 계속 운동을 하지 않는가? 그에게는 이게 바로 자유다. 장애물의 부재.

 

- 이사야 벌린은 스피노자나 루소는 PL의 대표적인 인물들이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적극적 자유. 적극적 자유는 Liberty to- ~을 향한 자유/~로 될 자유/ ~을 할 자유.

- 그러니까 이것은 아주 이상적인 어떤 것을 추구하고 그것을 획득했을 때, 달성하려고 할 때 누릴 수 있는 어떤 자유다. 그러니까 장애물이나 간섭이 없다고 해서 자유가 아니라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추구하고 그 무엇을 이루려고 할 때 누릴 수 있는 자유가 바로 적극적 자유다.

- 그런데 이사야 벌린은 이 적극적 자유를 아주 위험한 자유 개념이라고 말한다.

 

- 신공화주의(Neo-Roman Republicanism) : 1990년대부터는 이 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새로운 정치철학도 나오는데 그게 바로 신공화주의. Pettit 페팃 교수는 이 신공화주의의 주창자. 그는 자유의 반대 개념을 지배와 예속이라고 정의하면서 보다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자유를 연구하는 미국의 석학이다. 그는 원하는 일을 뜻대로 하고 있는 순간에도 그 권리가 침해당할 가능성(지배, 예속)이 있다면 완벽한 자유가 아니다고 설명했다.

- 왜 네오-로만 리퍼블릭카니즘이라고 부르는가. 이걸 주창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고전적인 공화주의자들과 다르다. 고전적인 공화주의는 positive liberty를 수반한 자유주의였는데, 그들이 말하는 새로운 종류의 공화주의는 형식적 자유개념에 입각한 공화주의이며, 그렇기 때문에 네오 로만 리퍼블릭카니즘이라고 부른다.

-이들의 주장: “자유주의는 우리와 다르다, 자유주의는 간섭의 부재를 이야기하지만 우리는 지배의 부재를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비지배야말로 negative liberty의 핵심이지, 간섭의 부재만으로는 부족하다.”

 

5. 데카르트의 신의 완전한 무관심은 그의 전능함의 거대한 증거다라는 문구를 듣고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서 혼자 살짝 웃었다. 신의 무관심이 그의 전능함의 거대한 증거라는 말에도, 인간의 어떤 특성을 신에게 투사해서 신을 설명하는 오류가 들어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동안의 투사들이 너무 1차원적인 투사였다면, 이 투사는 약간 레이어가 있는 투사라서 좀 귀엽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 인간세계에서 무관심은 전능함의 증거기도 하지. 목적인적 논리도 첨가할 수 있다. 전능해서 무관심할 수 있기도 하지만(그러니까 무관심의 원인은 전능함) 좀 더 전능하기 위해서는 무관심해야하기도 한다(전능의 원인은 무관심). 무관심할수록 승리자가 되는 그 많은 상황들.

 

이러한 생각은 데카르트에게서 바로 나온다. 물론 이렇게 단순한 뜻은 아니고 좀 더 복잡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만 데카르트 철학에 이런 표현이 나오는 것은 사실이다. “네 번째 성찰에서 그는 의지는 다만 우리가 어떤 것을 할 수 있거나 할 수 없다는 데에- 즉 어떤 것을 긍정하거나 부정하고 추구하거나 기피하는 데에 존립하는 것이기 때문에라고 자유의지에 대해 말하고 있고, “여섯번째 성찰에서는 신의 완전한 무관심은 그의 전능함의 거대한 증거다라고 말한다. 이 구절들에 대한 스피노자의 반박은 뒤에 가면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다

 

6. <<신학자들 대신에 자연의 법칙, 자연의 필연성을 잘 인식하는 것이 중요해지고, 이걸 잘 인식하는 것은 개개인의 윤리적인 역량과 바로 직결된다. 자기의 삶을 영위하고 자기의 삶을 꾸려가는 역량. 그러니 자신의 삶이나 운명을 신에게 의탁하는 것은 미신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자연에는 초월적인 주재자가 결코 존재하지 않고, 자연은 필연적인 법칙에 의해 진행된다라는 전제가 확고하면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신학자들이나 신학이 아니다. 자연을 움직이는 법칙들과 그 사이 필연적인 인과관계를 잘 인식하고 그것에 부합하는 어떤 인간들 간의 법칙과 관계에 대해 잘 인식하는 것, 바로 이것이 인간이 자신의 삶을 합리적으로 살아가고 개척하기 위한 굉장히 중요한 조건이 되는 것이다.>> 저기에서 그리고 신학자자리에 많은 것들이 들어갈 수 있다. 사주나 별자리 같은 미신, , luck, 그밖에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권능을 부여하는 것들.

 

그러니까 스피노자가 이렇게 주석까지 붙여 주장한 것은, 바로 이러한 자유개념에 대한 이해가 신학적인 이유와도 직결되어서기도 하다. 마치 신을 인간처럼, 인간과 같은 의지를 갖고 있고, 왕국의 법률을 마음대로 만들었다 없앴다 무시했다가 내키면 권한을 실행할 수도 있는 왕처럼 신을 이해하는 것에 대한 반박. 신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냐면, 대중은 신에게 모든 것을 의탁하게 된다. 내 기도를 들어달라면서 신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게 되며, 스피노자가 보기엑 이보다 더 나쁜 것은, 신의 말을 아무나 해석할 수 없다는 점을 이용해서 신의 말을 전문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전문가(목사나 신학자)를 필요로 하게 되고, 그러다보면 그들의 권력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신을 자유원인으로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누구의 권력이 커지는 것인가. 목사나 신학자들이 그 수혜를 입는다. 대중들은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운명이나 삶을 개척해갈 수 있는 역량을 키우려고 하는 대신에 전능한 초월자에게 다 맡겨버리려고 의지하려는 결과가 나오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니 스피노자가 보기에 신을 인간이나 왕 같은 자유원인으로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결국 절대군주를 정당화하게 되고 절대군주와 결탁한 신학권력을 정당화하게 되고 백성들의 미신과 무지를 강화하게 된다. 이게 신학정치론에서 스피노자가 논박하려는 주요 타깃이다.

 

저런 문제의식을 형이상학적으로 보면 이런 논제가 나타나는 것이다, “자유원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여기서 스피노자가 말하는 자유원인은 필연적인 원인이다. 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서만 사물들을 생산하고 행위 하는 자유원인으로서의 신. 이렇게 되면 어떤 일이 생기냐면, 신학자들 대신에 자연의 법칙, 자연의 필연성을 잘 인식하는 것이 중요해지고, 이걸 잘 인식하는 것은 개개인의 윤리적인 역량과 바로 직결된다. 자기의 삶을 영위하고 자기의 삶을 꾸려가는 역량. 그러니 자신의 삶이나 운명을 신에게 의탁하는 것은 미신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자연에는 초월적인 주재자가 결코 존재하지 않고, 자연은 필연적인 법칙에 의해 진행된다라는 전제가 확고하면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신학자들이나 신학이 아니다. 자연을 움직이는 법칙들과 그 사이 필연적인 인과관계를 잘 인식하고 그것에 부합하는 어떤 인간들 간의 법칙과 관계에 대해 잘 인식하는 것, 바로 이것이 인간이 자신의 삶을 합리적으로 살아가고 개척하기 위한 굉장히 중요한 조건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정리17 주석에 나오는 이야기는 겉으로 보기에는 상당히 건조한, 형이상학적 이야기 같지만 사실 굉장히 중요한 신학적 정치적 윤리적인 함의가 담겨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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