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11 인간정신의 현행적 존재를 구성하는 일차적인 것은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독특한 실재의 관념과 다른 것이 아니다.

 

- 스피노자는 이미 2부 정의3에서 관념에 대한 정의를 제시한 바 있는데(나는 관념을 정신이 생각하는 실재이기 때문에 형성하는 정신의 개념으로 이해한다), 여기서 인간 정신을 관념이라고 명확히 제시한다. “인간정신은 관념이다라고 정리하는 첫 정리. 스피노자의 관념을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식대로 표상이라고 받아들이면 잘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스피노자에게 관념은 아무런 존재론적 실재성이 없는 표상으로서의 관념이 아니라 사유속성의 한 양태로서의 관념이며, 따라서 관념은 자신의 형상적 본질을 갖고 있고 원인으로서 작용할 수 있는 실재다. 관념은 사유속성의 한 양태고,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양태는 실재다. “관념은 양태다라는 말은 관념이 실재다라는 말과도 같다.

- 따라서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달리 말하면 인간 정신과 동일한 관념이 있으며, 또한 뒤에서 계속 보겠지만, 인간정신이 갖고 있는 관념들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관념으로서의 정신이 산출하는 것은 또 다른 관념이다. ,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과 인간 정신이 만들어내는, 혹은 소유하는 관념이 존재하는 것이다. 스피노자에게 정신은 관념이 담겨있는 상자나 틀 같은 그런 것.

- “현행적 존재라고 하는데 존재는 라틴어로 하면 esse, 어떤 경우에는 essentia와 같은 말로 쓰인다. 그러니까 여기서 현행적 존재라고 하는 것은 현행적 본질과 같은 뜻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정리11을 다른 말로 하면 인간 정신은 관념이다이다. 어떤 관념?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독특한 실재의 관념그렇다면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독특한 실재는 무엇일까? 아직 여기까지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고 있지만, 신체다. 그러니까 정리11신체의 관념이 바로 정신이다라는 말이다. (정신: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독특한 실재의 관념 / 신체: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독특한 실재)

 

* 정리11의 증명

 

- “인간의 본질은 (정리10의 따름정리에 의해) 신의 속성의 양태들로 구성된다” <- 정리10의 따름정리에서는 인간의 본질은 신의 속성들의 일정한 변양들에 의해 구성된다고 그랬고, 여기서는 인간의 본질은 신의 속성의 양태들로 구성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만 봐도 스피노자가 변양이라고 하는 것은 양태로 대체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같은 개체 안에 다른 양태들(관념이 그것들에 대해 선행하는)에는 예를 들면 사랑, 욕망, 의지 등등이 있다.

- 따라서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일차적인 것은 관념이다. 하지만 실존하지 않는 실재의 관념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는 (2부 정리8의 따름정리에 의해) 관념 그 자체가 실존한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실재의 관념일 것이다. 하지만 무한한 실재는 아닌데, 왜냐하면 무한한 실재는 (1부 정리21과 정리22에 의해) 항상 필연적으로 실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는 (2부 공리1”인간의 본질은 필연적 실존을 함축하지 않는다에 의해) 부조리하다. 따라서 인간의 현행적 존재를 구성하는 일차적인 것은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독특한 실재의 관념이다. Q.E.D.

 

따름정리

이로부터 인간 정신은 신의 무한지성의 일부라는 점이 따라 나온다. 따라서 우리가 인간 정신이 이것 또는 저것을 지각한다고 말할 때, 이는 신이 무한한 한에서가 아니라 인간 정신의 본성에 의해 설명되는 한에서 또는 인간 정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한에서 이 관념 또는 저 관념을 갖는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우리가 신은 인간 정신의 본성을 구성하는 한에서만이 아니라, 그가 인간 정신과 동시에 그것과 다른 것의 관념도 갖는 한에서 이 관념 또는 저 관념을 갖는다고 말할 때 이는 인간 정신이 실재를 부분적으로 또는 부적합하게 지각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로부터 인간 정신은 신의 무한지성의 일부라는 점이 따라 나온다

- 이것은 자연스럽게 따라 나오는 명제다. 유한지성을 지닌 인간 정신은 무한 지성의 일부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스피노자는 이 명제에서부터 따라가기 다소 어려운 결과들(이어지는 내용들)을 도출한다.

- ”인간정신의 본질은 신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

- ”인간정신은 신의 무한지성의 일부라는 점은 데카르트의 영원진리창조론과 반대에 있는 스피노자의 생각을 담고 있다. 스피노자에게 데카르트의 영원진리 창조론은 매우 모순적인 이야기다. 영원진리가 어떻게 창조가 되는가. 영원하다면서? ”창조가 됐다는 말은 어떤 일에 시작점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영원하다는 말이 성립하지 않는다.

 

*** 데카르트의 영원진리창조론 VS 스피노자

 

- 데카르트가 1630년에 메르센 신부에게 편지를 몇 통 보냈는데, 이 편지들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면 몇 통 안 되는 이 편지들에 영원진리창조론 (영원진리라는 것은 신에 의해 창조됐다는 독트린을 담고 있다)에 대한 이야기가 쓰여 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가 생전에 출판한 책 어디에서도 이런 이야기는 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다.

- 데카르트가 영원진리라고 말하는 것은 1=1=2 a=b 의 아주 기본적인 논리. 즉 영원진리는 시공간을 초월해서 항상 참인 것. 이것들은 시간적인 구애를 받지 않는다. 기원전에는 참이었다가 서기 3000년에 거짓이 되고 이런 거 없음. 흥미로운 것은 데카르트가 이 영원진리들이 신에서 창조된 것들이라고 말한다는 점이다.

- , 이 말은 영원진리는 영원히참인 것이 아니라 신에 의해 진리라고 창조됐다. 이 말은, 신이 마음만 먹으면 이것들을 진리가 아닌 것으로 바꿔버릴 수 있다는 말이다. 신은 전능한 분이니까. 그러니까 데카르트는 영원성보다 신이 더 높은 곳에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만약 신의 바꾸려는 의지에도 불구하고 영원진리는 전부 참이다라고 하면 이것은 신의 전능하고 무한한 의지를 제한하는 것이 되니까. 영원진리로 한정해버리는 것이니까. 그러면 이건 신이 아니지, 신은 영원진리까지도 거짓으로 만드는 힘을 가져야 신이지. 이게 데카르트의 관점. 신은 논리적 참과 거짓도 초월한다고 보는 것. 그러니까 데카르트는 영원성보다 논리적 참과 거짓, 필연적 법칙보다 신이 더 높은 곳에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 근데 스피노자는 자연이 영원진리이고 영원하다고 본 것이다. 스피노자의 신은 이것을 거짓으로 만드는 신이 아니다. 저것들을 참이라고 인식하는신이다(창조하는 신이런 거 없고, 영원진리를 참이라고 인식하는 신이라고 못 박음) 1+1=2 같은 영원진리를 신이 창조했다는 말은 이미 이 말 자체에 모순이 들어가 있다. “창조가 됐다는 말은 어떤 일에 시작점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영원하다는 말이 성립되지 않는다.

 

- 그리고 영원진리창조론의 맥락에 생각하면 지성과 의지에 차이가 있다는 말이 된다. 즉 의지가 지성보다 더 위에 있다는 것이다. 창조한다는 것은 즉 의지의 힘이니까. 신학적인 면에서 신이 무엇을 창조한다는 것은 의지다. 지성이라는 것은 진리를 의식한다는 것. , 영원진리랑 관련된 것이 지성. 그러니까 영원진리를 창조한다고 하면 당연히 의지가 지성의 위에 있는 것이다.

- 이 논리를 따르면 또한 신과 피조물 사이에 무한한 거리가 존재하게 되어버린다. 신이 어떤 존재인지 우리가 이해할 수 있고 인식할 수 없으니까. 영원진리까지도 창조할 수 있고 폐기할 수 있을 정도로 신이 전능하다는 이야기는 신은 인간으로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면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점은 (고작) 영원진리를 이해하는 것이니까.

- 데카르트는 자연법칙에 신이 따라야 한다. 신이 자연법칙을 준수해야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고대 스토아 철학처럼 신을 운명에 종속시키려는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데카르트에세 신의 전능은 그 모든 필연을 초월하는 것.

 

- 데카르트에게 인간은 (유한해서) 신을 알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그에 따르면 알긴 알되 두 개의 단어로만 안다. entendre comprendre. 데카르트는 저 두 단어를 구별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사람이 끌어안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를 entendre 할 수는 있겠지만, comprendre 할 수는 없다고. 그러니까 후자는 거대한 나무를 완전히 끌어안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신의 본질을 완전히 다 파악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 신에 대해서 우리는 entendre할 수는 있지만 comprendre 할 수는 없다. 말하자면 comprendre는 라틴어의 adaequatio 같은 것. 외부 사물과 우리의 지성이 일치하고 합치하는 것. 데카르트는 이 아다이콰치오는 인간이 이룰 수 있는 경지가 아니며, 인간 지성과 신의 지성에는 괴리가 있다고 말했다.

- 그러나 스피노자는 이 괴리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데카르트가 들으면 아니, 인간지성이 신의 지성의 일부라니! 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인간이 지각한다고 말할 때 신이 지각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가 인간 정신이 이것 또는 저것을 지각한다고 말할 때, 이는 신이 무한한 한에서가 아니라 인간 정신의 본성에 의해 설명되는 한에서 또는 인간 정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한에서 이 관념 또는 저 관념을 갖는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 이 신은 무한한 신이 아니다. <인간 정신과 본성에 의해서 설명되는 한에서= 인간 정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한에서= 인간 정신에 변용되는 한에서의 신>이다. 자연전체로부터 개체화되어가는 과정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신이 어떻게 개별정신으로 분화되어가는지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덧붙이면 <인간 정신과 본성에 의해서 설명되는 한에서= 인간 정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한에서= 인간 정신에 변용되는 한에서>는 인간정신이 개체화된 방식으로 신의 정신을 표현하는 것이다. 왜 이렇게 사유속성에 특권을 부여하는지는 정리13에 가면 알 수 있다.

- 이 명제가 가리키는 것은 인간 정신이 다른 관념들과 고립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관념들과 연쇄를 이루고 있는, 또는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 속에 실존하는 한 양태인 한에서, 인간 정신이 이것 또는 저것을 지각하는 것은 정리9에서 말하듯 독특한 실재의 관념으로 변용된 한에서의 신이 지각하는 것과 같다. 또는 인간정신이라는 것은 인간 정신의 본질에 의해 설명되는 한에서”=“인간 정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한에서의 신이다. 이는 1부 정리34, 36, 그리고 2부 정리3에 의하면 인간 정신은 인간 정신에 의해 전개되는 한에서의 신의 사유역량이라고 말할 수 있으, 나중에 3부 정리7의 표현을 선취한다면, 코나투스로 표현되는 한에서의 신이라고 바꿔 말할 수 있다. (인간 정신: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독특한 실재의 관념= 인간 정신의 본질에 의해 설명되는 한에서/ 인간 정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한에서의 신= 인간 정신의 사유역량을 구성하는 신 = 코나투스로 표현되는 한에서의 신)

 

신은 인간 정신의 본성을 구성하는 한에서만이 아니라, 그가 인간 정신과 동시에 그것과 다른 것의 관념도 갖는 한에서 이 관념 또는 저 관념을 갖는다고 말할 때 이는 인간 정신이 실재를 부분적으로 또는 부적합하게 지각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 앞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2부 정리14에서 정리29까지 전개될 부적합한 인식의 존재론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인간 정신의 본성을 구성하는 한에서의신이라는 것은 인간 정신의 사유역량을 구성하는 신, 따라서 인간 정신이 적합한 또는 참된 인식을 가질 수 있는 원인으로서의 역량을 구성하는 한에서의 신이라는 뜻이다. 인간 정신은 바로 무한한 사유역량으로서의 신을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표현함으로써 자신의 원인으로서의 역량을 갖게 되는 것이다.

- 그 뒷문장은 인간 정신만이 아니라 다른 것의 관념도 갖는 한에서의 신을 말하고 있다. 이때의 신은 앞문장 속 신과는 달리 인간 정신의 내적인 사유역량을 구성하는 신이 아니라 부분적으로만 인간정신의 역량을 구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경우 인간정신은 신의 사유역량을 부분적으로만 표현하기 때문에 실재를 부분적으로 또는 부적합하게 지각한고 말할 수 있다. 즉 이때의 신은 인간정신만이 아니라 다른 것들도 구성하는 신 -> 인간의 정신은 그 일부일 뿐이다 -> 그러므로 부적합한 인식을 가질 수 있다.

*** 즉 결론은 인간정신은 진리의 역량을 갖고 있지만, 부분적/제한적으로 가질 수 있다

 

* 들뢰즈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 들뢰즈는 스피노자에 관한 박사학위 논문인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1968)>에서 표현이라는 것을 굉장히 중요한 키워드로 삼고 있다. 스피노자를 설명하는 데에 있어서 이 표현의 문제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 그 중에 하나로 그는 “pli”라는 어간이 들어가는 세 가지 용어에 주목 한다. le plithe fold ‘주름이라는 뜻으로 그는 이 말을 키워드로 라이프니츠의 철학을 설명하는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라는 책을 1988년에 펴낸다.

implicare/ explicare/ complicare

- implicare는 함축하다, explicare는 보통 뜻으로 말하면 설명하다가 되겠지만 존재론적인의미로 하면 펼치다’. 가령 본질을 설명하다라고 할 수도 있지만 본질을 펼치다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complicare는 원래대로 하면 무언가를 뒤엉키게 하다’, ‘서로 얽히게 하다라는 뜻인데 들뢰즈가 complicare를 주목할 때는 신 또는 실체가 만물을 감싸안는 것, 포괄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이 용어를 쓰고 있다. 들뢰즈는 <표현의 문제>에서 이 세 가지 단어를 상당히 중요하게 제시하고 있다.

- 사실 스피노자는 implicare라는 용어를 에티카에서 한 번 밖에 쓰지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 implicare 대신에 involvere를 쓴다. 1부 정의1, 자기원인에 대한 정의에서도 본질이 실존을 함축하는 것에서 involvere를 쓴다. 들뢰즈는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에서 스피노자 철학에서 함축한다는 이야기를 할 때 이 involvere를 쓰면서 어떤 경우에는 implicare를 쓴다. 사실 들뢰즈는 속으로 굉장히 아까웠을 것이다. 스피노자가 이왕 같은 뜻이라면 involvere 대신에 implicare를 써줬으면 어미가 딱딱 맞을 텐데. 어쨌든 그는 스피노자를 직접 인용할 때는 involvere를 쓰지만 같은 뜻이니까 involvere라고 쓴 것도 implicare라고 간주하고 다른 대목에서는 implicare를 써서 세 개의 구도를 쓴다. 들뢰즈의 의도, “pli”라는 어간을 갖는 세 개의 용어가 스피노자 철학에서 이 표현 개념을 나타내는 키워드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

 

정리12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의 대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인간 정신에 의해 지각되어야 한다. 또는 정신 속에는 이것[관념의 대상에서 일어나는 것]에 대한 관념이 필연적으로 존재하게 될 것이다. 곧 만약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의 대상이 물체라면, 이 물체 안에서 정신에 의해 지각되지 않는 것은 어떤 것도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 우리가 2부 정리7에서 살펴본 이른바 평행론명제, 또는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과 실재들의 질서와 연관의 동일성명제에 기초를 두고 있다.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과 실재들의 질서와 연관은 같은 것이고, 신의 사유역량과 신의 현행적인 행위역량이 동등하기 때문에, 다시 말해 신의 무한한 본성으로부터 형상적으로 따라 나오는 모든 것은 동일한 질서, 동일한 연관에 따라 신 안에 있는 신의 관념으로부터 표상적으로 따라나오기 때문에, 정리12의 증명에서 말하듯 정리9의 따름정리의 명제가 성립하게 된다. 신 안에는 어떤 관념의 독특한 대상에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한 인식이 존재하는데, 이는 오직 신이 이 동일한 대상의 관념을 갖고 있는 한에서 그렇다.”

- 스피노자가 정리12의 주석에서 말하듯 정리122부 정리7의 주석에도 근거를 하고 있다. 사유하는 실체와 연장되는 실체는 하나의 동일한 실체로 때로는 이 속성 안에서 때로는 저 속성 안에서 파악된다. 그리하여 연장의 양태와 이 양태의 관념 또한 하나의 동일한 것이지만 두 가지 방식으로 표현된다.그러니까 항상 어떤 속성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다른 속성에서 일어나는 것이 상응하는 것이다. 정리12에 들어가면 대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정신에서 다 지각이 된다고 말하는데 연결된다.

 

- 따라서 2부 정리12의 명제 자체를 증명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닌데, 그런데 우리가 2부 정리12의 명제를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과 연결시켜서 생각해보면 상당히 어려운 제의가 된다. 다음 같은 회의적인 문제제기가 있을 수 있다.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이 자신의 대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지각해야 한다, 또는 정신 속에는 이것에 대한 관념이 필연적으로 존재하게 될 것이라면, 우리는 정말 우리 신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지각하는 것일까? 우리는 그것들에 대한 관념을 갖고 있는 것일까? 가령 우리는, 우리 몸 안에서 일어나는 이런저런 변화들을 모두 깨닫고 있는 것일까? 세포 하나하나의 생성과 소멸까지 다?

정리7의 주석의 저 문장을 잘못 읽게 되면 굉장히 삼천포로 빠지게 된다. 이것을 가령 인간의 정신과 신체와 연결시켜서 생각하면 우리 신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작은 사건과 그 사건에 상응하는 정신 안의 관념이라고 받아들이게 된다. 이를테면 신체라고 하지만 신체의 수준이 다 다른데, 아주 미시적인 수준으로 들어가면 세포가 있겠고, 그렇다면 이 세포가 죽으면 정신 안에 이 세포의 죽음을 인식한다거나 이 세포의 죽음을 애도하는 관념이 있다는 말인가, 라는 의문에 봉착할 수 있다. 사실 우리는 세포가 죽는지 사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스피노자의 저 문장을 잘못 이해하게 되면 모든 것에 다 1:1 상응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하나하나가 다 상응해야 한다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데 스피노자가 하려는 말은 그것과는 다르다.

 

- 스피노자가 해야 한다내지 필연적으로같은 표현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는 모종의 예외나 통계적 경향의 여지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정신은 자신의 신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반드시 지각해야 하고, 정신 안에는 필연적으로 신체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한 관념이 존재해야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존재론적 질서에서 볼 때 우리가 2부 정리7 이하의 명제를 참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정리12의 명제가 따라 나오게 되지만, 경험적인 차원에서 볼 때 정리12의 명제는 개연성이 부족한 것으로 보인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명할 수 있을까?

1) 원칙적인 인식의 가능성: 스피노자는 정신이 자신의 신체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원칙적으로 인식할 수 있으며, 또한 노력을 기울이면(여기에는 현미경과 같은 도구를 사용하는 일도 포함된다) 그것들을 모두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지, 정신은 신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즉각적으로 다 지각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답변해볼 수 있다.

2) 관념의 대상의 본성: 스피노자가 여기에서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의 대상이라고 했을 때, 이 대상은 관념에 상응하는 대상, 곧 관념과 합일을 이루고 있는 대상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곧 이때의 대상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우리의 경험에 입각하여 우리의 대상이라고 인식하는 대상이지, 우리의 경험의 범위를 초과하는 대상, 가령 내시경이나 전자현미경 또는 CTMRI 등을 통해서 비로소 식별될 수 있는 대상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정리13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의 대상은 신체 또는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연장의 어떤 양태이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자연전체로부터 인간을 돌출해내는 마지막 정리이다.

- 스피노자는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의 대상은 신체 또는 물체(‘신체물체는 똑같이 corpus), 다시 말하면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연장의 어떤 양태라고 주장한다. 만약 신체 또는 연장의 어떤 양태가 현행적으로 실존하지 않는다면, 관념 역시 실존하지 않게 될 것이다(2부 정리11의 증명). 그러니까 정신의 대상을 이루는 것은 잠재적으로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신체다.

- 이것은 나중에 5부에 가면 신학적인 문제와 연결된다. 4부에서 정신과 신체는 어떤 관계인가, 신체가 사라져도 우리의 영혼은 불멸하는가라는 문제를 던지고 스피노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리고 나중에 5부에 가서 영혼불멸에 대해 비판한다. 스피노자가 유대인 공동체에서 쫓겨날 때에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던 바로 그 영혼불멸론에 대한 부정. 창조론과 영혼불멸론은 유대 기독교 교리의 핵심이니까. <에티카>에서도 스피노자는 신체와 분리된 영혼, 그런 것은 없다고 말한다.

- 흥미로운 것은 스피노자는 5부에서 영혼불멸론을 부정하는 동시에 정신에는 영원한 부분이 있다고 말한다. 정신에는 영원한 부분이 있다. 영혼은 불멸하지 않는데 정신에는 영원한 부분이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정신의 영원성과 영혼의 불멸성의 차이가 뭘까. 그런 질문이 많이 제기가 된다.

 

* 정리13의 증명

 

1) 만약 신체가 인간 정신의 대상이 아니라면- 신체의 변용들에 대한 관념들은 신이 우리의 정신인 한에서가 아니라 다른 실재의 정신을 구성하는 한에서 신 안에 존재할 것이고 -> 신체의 변용들에 대한 관념은 그 다른 실재의 정신에 있지 우리의 정신 안에 있지 않을 것이고 -> 하지만 2부 공리4에 의해 우리는 신체의 변용들에 대한 관념들을 갖고 있고 -> 따라서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의 대상은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신체다.

2) 만약 신체 이외에 또 다른 정신의 대상이 존재한다면- (1부 정리36에 의해) 그로부터 어떤 결과가 따라 나오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 정신 안에는 이 다른 대상의 결과에 대한 관념이 필연적으로 존재해야할 것이고 -> 하지만 2부 공리5에 의해 그것에 대한 관념은 전혀 존재하지 않고 -> 따라서 우리의 정신의 대상은 실존하는 신체이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 벌써 다 예측하고 공리로 넣어 놨다ㅋㅋㅋ 우리가 공리를 읽을 때는 이 이야기가 왜 여기 나와 있나 했는데 이때 써먹으려고ㅋㅋㅋ 공리로 넣어놨다는 것은 증명하지 않겠다, 우리가 신체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변용되는 것을 느낀다는 것을 증명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자명한 진리로서 공리로 설정해놓은 것이다. 아마 스피노자가 물리학 자연학에 관한 책을 썼다면 이것을 공리로 놓지 않고 아마 증명의 대상으로 삼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자연학책이 아니라 윤리학책이니까, 다시 말하면 스피노자가 이 책에서 목표로 삼는 것은 우리 신체가 무엇인지, 우리 신체의 본성이 무엇이고 특성이 무엇이고, 근육은 어떻게 되어있고 같은 생리학적 설명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우리 신체의 역량을 증대시킬 것인가. ? 우리의 신체의 역량을 증대시키는 것과 우리의 인식 능력, 지적 역량이 향상되는 것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니까. 우리의 신체 역량이 향상되고, 우리의 지적 역량이 향상되어야 스피노자에 따르면 우리는 능동성을 갖게 되고, 우리가 능동성을 획득해야 우리가 윤리적으로 행복해질 수 있고 자유를 얻을 수 있으니까. 이게 스피노자 에티카의 목표인 것이다.

- 하지만 (2부 공리4에 의해) 우리는 신체의 변용들에 대한 관념을 갖고 있다.” 공리4에서는 느낀다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변용들에 대한 관념들을 갖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스피노자가 느낀다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지각, 인식방식이다. 스피노자가 느낀다라는 표현을 많이 쓰지 않는데, 아마 칸트였으면 이것을 내감이라고 이야기했을 것이다.

 

따름정리 이로부터 인간은 정신과 신체로 구성되어 있으며, 인간의 신체는 우리가 느끼는 대로 실존한다는 점이 따라 나온다.

 

- 여기에서 인간이 정신과 신체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 처음으로 밝혀지며, “인간의 신체는 우리가 느끼는대로 실존한다는 점이 제시된다.

- 여기에서 느낀다라는 말이 다소 이상하게 들릴 수 있다. 스피노자는 2부 공리4에서 이미 느낀다sentimus sentire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바 있다. “우리는 어떤 신체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변용되는 것을 느낀다스피노자가 느낀다고 쓴 표현은 감각적인 지각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지각하다는 동사가 주로 외부 대상이 우리 신체를 변용함으로써 생겨나는 일 내지 사건에 대한 감각적 지각을 가리킨다면, “느낀다는 동사는 우리 신체 내부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대한 내적 감각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느낌은 부적합한 인식이라고 할 수 있지만, 모든 느낌이 다 부적합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 “인간의 신체는 우리가 느끼는 대로 실존한다는 표현도 다소 애매하다. 에드윈 컬리는 “The human body as we aware of it”이라고 번역했다. sentimusbe aware of로 번역. 그런데 저 영어 번역도 좀 애매하기는 마찬가지다. 라틴어에 prout라는 단어를 컬리는 as로 번역했다. 느끼는 대로, 자각하는 대로, 감지하는 대로. 그런데 이 prout라는 단어가 무엇을 뜻하는지 좀 불분명하다. 여기서 몇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는데,

1) ‘인간 신체가 우리가 느끼는 바와 똑같이, 실제 그대로 존재한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도 있는데, 부적합한 인식으로서의 느낌이 신체의 본성과 모습을 있는 그대로 제시해준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2)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이 말은 인간 신체는 우리가 느끼는 경우에만 실존한다는 말로 이해될 수도 있다. 곧 우리가 대상으로서의 신체를 느끼는 경우에만, 감각적으로 지각하는 경우에만 신체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우리가 느끼지 않으면 신체는 존재론적으로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존재론적으로 무. 이것을 철학사에서 주관적 관념론이라고 한다. 영국의 경험론자였던 조지 버클리George Berkeley 같은 사람이 한 유명한 말 존재는 지각이다로 대표되는. 이것은 마치 스피노자의 이 전제를 버클리의 주관적 관념론의 명제로 이해하는 것이니까, 같은 명제를 주장한다는 의미이니까 역시 부적절하다.

3) 아니면 2)와 다르지만, 신체는 우리가 느낌을 통해서만 그 존재를 깨닫고 이해할 수 있는 대상이라는 뜻으로 생각할 수 있다. 가장 적절한 해석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우리가 노력을 해서 CT를 찍고 MRI를 찍고 전자현미경으로 들여다보고 의학교과서나 생물학교과서를 통해서 인간의 신체가 어떤 것인지 아주 정확한 인식을 얻으려고 하지 않고, 평소에 우리가 생각한대로 우리 신체를 느끼는 것, 배고프면 허기가 느껴지고 졸리면 졸음이 느껴지고 아프면 고통스럽고 이런 방식이 스피노자가 따름정리에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우리가 신체를 인식하는 가장 1차적이고 직접적인 방식. 적합한 인식을 얻기 전에 원초적으로 우리의 신체를 지각하는 방식은 이런 방식이다.

- 스피노자가 해야 한다내지 필연적으로같은 표현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는 모종의 예외나 통계적 경향의 여지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정신은 자신의 신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반드시 지각해야 하고, 정신 안에는 필연적으로 신체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한 관념이 존재해야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존재론적 질서에서 볼 때 우리가 2부 정리7 이하의 명제를 참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정리12의 명제가 따라 나오게 되지만, 경험적인 차원에서 볼 때 정리12의 명제는 개연성이 부족한 것으로 보인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명할 수 있을까?

1) 원칙적인 인식의 가능성: 스피노자는 정신이 자신의 신체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원칙적으로 인식할 수 있으며, 또한 노력을 기울이면(여기에는 현미경과 같은 도구를 사용하는 일도 포함된다) 그것들을 모두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지, 정신은 신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즉각적으로 다 지각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답변해볼 수 있다.

2) 관념의 대상의 본성: 스피노자가 여기에서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의 대상이라고 했을 때, 이 대상은 관념에 상응하는 대상, 곧 관념과 합일을 이루고 있는 대상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곧 이때의 대상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우리의 경험에 입각하여 우리의 대상이라고 인식하는 대상이지, 우리의 경험의 범위를 초과하는 대상, 가령 내시경이나 전자현미경 또는 CTMRI 등을 통해서 비로소 식별될 수 있는 대상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 정리13의 주석

 

이로써 우리는 인간 정신이 신체와 단지 연합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정신과 신체의 연합을 무엇이라 이해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 긴 말 하지 않고ㅋㅋ 이 한 문장으로 여러 사람(데카르트 중세스콜라철학 기독교 철학)을 동시에 비판하고 있다.

- 데카르트. 데카르트도 정신도 실체고 신체도 실체고 상이한 두 실체가 합일을 이루는 게 인간이다라고 말한바 있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데카르트 말처럼 유한 실체로서의 정신과 신체의 합일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만약 데카르트처럼 이러한 합일이 실체들 사이의 합일이라고 한다면, 이는 양자의 상호작용을 전제하게 된다. 이는 2부 정리73부 정리2, 5부 서문을 통해 불가능한 것이다. 스피노자에게 정신과 신체의 합일은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그 대상으로서의 합일이다.

- 중세 스콜라철학. 따라서 정신 내지 영혼을 인간의 실체적 형상으로 이해하는 중세 스콜라철학적인 관점도 배격된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인간이라는 실체는 정신 내지 영혼이라는 형상과 신체라는 질료로 구성되어 있으며, 따라서 영혼이 능동적이고 신체는 수동적이라고 간주된다. 이렇게 영혼의 능동성과 신체의 수동성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스콜라철학적 관점과 데카르트는 일치하는 측면이 있다. , 데카르트는 이것을 도덕적 관점에서 주장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데카르트는 신체가 정신 내지 영혼에 대해 수행하는 작용으로 인해 생겨난 우리의 정념들의 힘을 제어하는 것, 따라서 능동적인 정신이 신체를 통제하는 것이 유덕한 삶을 위해 필요하다고 보았다. 스피노자는 지속적으로 이러한 관점을 비판한다.

- 후기 데카르트 철학의 어려운 점은, 데카르트 자신이 정신이라는 것은 사유의 질서에 속하고 신체라는 것은 연장의 속성에 속한다, 이 양자는 서로 섞일 수 없다.’라고 이야기해놓고 합일을 이루고 있다고도 이야기하는 것. 어떻게 서로 섞일 수 없는 게 합일을 이루고 있을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다.

- 더 나아가서 데카르트가 나중에 <정념론>에서 정념 passion우리의 신체가 우리의 정신에 능동적으로 작용해서 영혼에 생겨난 관념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신체가 우리 영혼에 작용을 미친다는 이야기다. 신체가 능동적으로 작용하게 되면 우리 정신이 수동적으로 영향을 받아서 정념을 갖게 된다고. 그런데 정념의 영향을 받게 되면 데카르트에 따르면 그 사람은 뭔가 일관성 있는 삶을 살기 어렵고, 유덕한 삶을 살기 어렵고, 도덕이 어려워진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유덕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이 정념을 억제해야하고, 그러려면 반대로 정신과 의지가 능동적인 힘을 발휘해서 신체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 신체의 능동성을 억제해야 정념의 작용을 억제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데카르트의 경우 신체와 정신이 상호작용을 하는 것이다. 이 상호작용은 데카르트 철학의 형이상학적인 구도와 잘 맞지 않는다. 그러니까 스피노자가 이 명제를 가지고 데카르트의 심신상호작용을 비판하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인간학도 잘못됐고 데카르트의 윤리학도 문제가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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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강의 정리- 2부 정리8이 어려웠던 이유는 형상적 본질이라는 개념 때문이었다. 2부 정리8이 현행적 본질 형상적 본질이 뚜렷하게 나뉘는데, 들뢰즈 철학에서는 이것을 virtual 형상적 본질, actual 현행적 본질이라고 말한다. 문제가 되는 것은 언제 virtual한 형상적 본질이 actualize해서 actual한 현행적 본질이 되는가이다. 이런 구분은 자칫하면 플라톤주의로 가버릴 수 있다. 플라톤주의로 빠지지 않고 이 길을 우리가 잘 찾아가볼 필요가 있다. 스피노자가 form 형상을 정의할 때 개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forma와 다르지 않다고 보는데, 그러니까 형상적 본질을 꼭 초월적인 어떤 것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 정리8에서 실존하지 않는에도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1부 정리11의 다른 증명과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의 를 비교하며 살펴봤는데 저 실존하지 않는의 이유도 초월적인 이유가 아니라 독특한 실재와 연관된 이유였다. 이를테면 다윈의 종 멸종이론이라든가 이미 먹어버려서 없는 아이스크림. 그러니까 우리는 형상적 본질을 꼭 초월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 일단 여기까지 정리해서 알아두고 넘어가자.

 

정리9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독특한 실재의 관념은 무한한 한에서의 신이 아니라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다른 독특한 실재의 관념에 의해 변용되는 것으로 간주되는 한에서의 신을 원인으로 지니며, 후자의 관념 역시 다른 제3의 관념에 의해 변용되는 한에서의 신을 원인으로 지니고 있고, 이처럼 무한히 나아간다.”

 

-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독특한 실재의 관념의 원인을 지정하고 있다. 이러한 원인은 무한한 한에서의 신이 아니라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다른 독특한 실재의 관념에 의해 변용되는 것으로 간주되는 한에서의 신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논점이 제시된다.

 

1) 관념은 그 자체가 하나의 실재, 곧 양태이며 따라서 양태인 한에서의 관념은 그것이 속해있는 속성, 곧 사유속성 안에서 다른 양태들과 인과관계를 맺고 있다. 관념은 사유 속성 안에서 다른 관념과 인과 관계를 맺지, 연장 속성에 속하는 물체 내지 신체와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다.

- 스피노자가 말하는 관념은 단순한 표상이 아니라 thing이다. 관념은 물체 같은 양태다. 양태로서의 물체가 연장 속성 안에서 다른 물체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처럼, 양태로서의 관념은 사유 속성 안에서 다른 관념과 관계를 맺고 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1부 정의2에서 나온 자신의 유안에서 유한하다는 점이다. 같은 유안에서. 즉 관념은 물체에 의해서는 한정될 수 없다.

 

2) 더욱이 정리9에서 문제가 되는 관념은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독특한 실재의 관념”(관념A라고 하자)이다. 이러한 관념의 원인이 되는 다른 관념 역시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독특한 실재의 관념”(관념B라고 하자)이며, 이처럼 무한히 나아간다. 그런데 이때 관념A의 원인이 되는 관념B는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독특한 실재 내지 양태로 변용된 한에서의 신이다.

- 스피노자가 1부 정리15에서 말하듯 모든 것은 신 안에 있고 신이 없이는 존재할 수도 인식될 수도 없기 때문에, 신은 만물의 원인이다. , 모든 건 다 신 안에 있고, 신은 무한하면서 모든 걸 품고 있다. 신 그 자체로 보면 무한하다. 동시에 신은 유한한 모든 것의 내재적 원인이다. 데카르트의 자연적 우주는 신/ 연장을 이렇게 분리해버린, 매우 타동적인 세계였다. 그러나 스피노자에게 만물의 원인으로서의 신은, 유일한 피조물들과 초월적인 거리를 두고 떨어져있는 무한한 신이 아니며, 내재적 원인으로서의 신(1부 정리18), 곧 무한하게 많은 자연 사물들 내에 내재해있는 신이며, 역으로 이러한 자연 사물들은 신의 양태들과 다르지 않다. “특수한 실재들은 신의 속성의 변용들과 다르지 않다.”(1부 정리25의 따름정리) 따라서 우리가 어떤 독특한 실재가 다른 독특한 실재를 원인으로 하고, 이 다른 독특한 실재는 또 다른 독특한 실재를 원인으로 하고 이처럼 무한히 나아간다고 할 때(1부 정리28), 원인으로서의 독특한 실재는 유한한 양태로 변용된 한에서의 신이다.

- 전체로서의 연장이 변용된 것이 바로 각각의 물체이다. 즉 물체는 유한하게 변용된 것이지만, 무한한 연장 속성의 한 부분이라는 점에서는 무한하다. 관념도 마찬가지다. 이게 바로 정리9에서 하는 말이다.

- 즉 정리9에서의 신은 초월적인 존재를 표현하는게 아니라 내재적 원인으로서의 신을 표현하는 것이다. 만약 무한한 신이 정리9에서의 이유라면, 조지오웰의 빅브라더식의 신, 기복신앙의 신이 되어버린다. 신이 전지전능하고, 모든 소원을 들어주고 등등. “무한한 한에서의 신은 스피노자가 말하는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다른 독특한 실재의 관념에 의해 변용되는 것으로 간주되는 한에서의 신의 반대개념이다


증명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독특한 실재의 관념은 다른 사유 양태들과 구별되는 하나의 독특한 사유 양태이며(2부 정리8의 따름정리 및 주석에 의해)(= 관념이라는 것은 독특한 사유양태다), 따라서 (2부 정리6에 의해) 오직 신이 사유하는 실재인 한에서 신을 원인으로 지닌다(= 즉 관념은 관념 안에서 인과를 맺지, 물체와 인과를 맺지 않는다). 그리고 이는 (1부 정리28에 의해) 신이 절대적으로 사유하는 실재인 한에서가 아니라, 다른 사유 양태에 의해 변용되는 것으로 간주되는 한에서 그러하며, 이 후자의 사유 영태 역시 신이 다른 사유 양태에 의해 변용된 한에서 신을 원인으로 지니고 있고 이처럼 무한히 나아간다. 그런데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은 (2부 정리7에 의해) 원인들의 질서와 연관과 같은 것이다(‘실재원인으로 바꿔 말하는 것. 즉 실재는 곧 원인이다라는 생각이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이 모든 독특한 관념의 원인인 것은 바로 다른 관념, 곧 신인데, 이는 신이 다른 관념에 의해 변용된 것으로 간주되는 한에서 그런 것이며, 이 후자의 관념 역시 다른 관념에 의해 변용되는 한에서의 신을 원인으로 지니고 있고 이처럼 무한히 나아간다. Q.E.D.

 

- 정리91부 정리28과 짝을 이루는 관념의 연쇄를 말하고 있다. 1부 정리28에서 A라는 독특한 실재는 B에 의해, B라는 독특한 실재는 C에 의해, C라는 독특한 실재는 D에 의해 규정되고 이렇게 무한히 나아간다. 1부 정리28에서 독특한 실재가 그 대상이었다면 2부 정리9에서는 사유 속성 안에 존재하는 관념”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다른 독특한 실재의 관념에 의해 변용된 관념이 그 대상이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증명에서 저렇게 주장하는 것이다.

- , 1부 정리28에서처럼 관념 역시, 관념A는 관념B에 의해, 관념B는 관념C에 의해, 관념C는 관념D에 의해 규정되고 이렇게 무한히 나아간다. 그리고 이런 관념A, 관념B, 관념C.....들은 바로 신이 아니라, 신이 변용된 한에서의 관념이다.

 

따름정리 신 안에는 어떤 관념의 독특한 대상에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한 인식이 존재하는데, 이는 오직 신이 이 동일한 대상의 관념을 갖고 있는 한에서 그렇다

 

증명 신 안에는 어떤 관념의 독특한 대상에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한 인식이 존재하는데(2부 정리3에 의해), 이는 신이 무한한 한에서가 아니라 신이 이 독특한 실재의 다른 관념에 의해 변주되는 것으로 간주되는 한에서 그런 것이다(앞의 정리9에 의해). 그런데 (2부 정리7에 의해)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은 실재들의 질서와 연관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신 안에는 어떤 관념의 독특한 대상에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한 인식이 존재하는데, 이는 오직 신이 이 동일한 대상의 관념을 갖고 있는 한에서 그렇다.

 

- 신 안에는 어떤 관념의 독특한 대상에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한 인식이 존재한다는 것은 증명에서 말하듯이 스피노자가 2부 정리3에서 이미 말한 것이다. 신학적인 어법으로 말하면 신은 전지하다고 말할 수 있다. 쉽게 말해 신은 다 알고 있다.

그런데 신이 전지한 것은 앞의 정리9와 마찬가지로 유한한 피조물들의 세계와 분리된 초월적인 자리에서 신이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꿰뚫어보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직 신이 이 동일한 대상의 관념을 갖고 있는 한에서그런 것이다. 즉 무한한 한에서의 신이 아니라! 변용된 한에서! 여기서 스피노자는 정리9가 뜻하는 바를 더 정확히 해명하고 있다.

- “어떤 관념의 독특한 대상” : 예를 들면 내가 물컵을 보면서 갖는 관념. 그런데 스피노자가 따름정리에서 말하는 것은 이것과는 좀 다르다. 여기서 어떤 관념은 정신이고, 인간 정신의 독특한 대상은 신체이다. 인간이 연장 속성에 의해 표현될 때는 신체로 나타나고 사유속성에 의해 표현될 때는 정신으로 나타나고 유니온에 의해 표현될 때는 코나투스로 나타나고. 그리고 정리10에서는 인간 정신은 자신의 신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인식을 갖고 있다, 무의식적 인식이든 비자각적 인식이든, 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 이쯤에서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냥 인간 정신이라고 하지, 왜 굳이 간주된 한에서의 신” “변용된 한에서의 신신이 다 알고 있다, 그런 이야기를 왜 하는가ㅋㅋㅋ 그냥 인간 정신은 자기 신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대한 인식을 갖고 있다라고 이야기하면 되는데 대체 왜 신 안에는 어떤 관념의 독특한 대상에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한 인식이 존재하는데, 이는 오직 신이 이 동일한 대상의 관념을 갖고 있는 한에서 그렇다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건가ㅋㅋ

- 스피노자보다 약간 뒤에 나온 계몽시대 굉장히 중요한 철학자 중 하나인 프랑스의 피에르 벨 Pierre Bayle의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가 <Historical and Critical Dictionary>라는 사전을 만든 것이다. 이 사전은 과거 사상가들에 대한 비평을 담은, 말 그대로 히스토리컬하고 크리티컬한 사전이다. 그 사전에서 피에르 벨은 스피노자에 관한 해설과 비평도 썼는데, 거기서 벨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스피노자 철학체계에서 가령 독일군대 만 명과 투르크군대 만 명이 싸운다면 스피노자는 독일군 만 명으로 변용된 신과 투르크군 만 명으로 변용된 신이 서로 싸웠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니까 신과 신이 서로 싸웠다. 이게 얼마나 웃긴 이야기냐, 이런 표현이 나온다.

- 어쨌든 2부 정리9 정리10 정리11에서 하는 이야기는 다 정신과 신체와 관련된 이야기다. 스피노자가 계속 정신과 신체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정신을 어떤 독특한 실재의 관념으로 변용된 한에서의 신” “변용된 것으로 간주되는 한에서의 신이라고 표현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스는 뜻 그대로 하면 그냥 우리 정신, 어떤 관념인데 스피노자는 왜 그렇게 복잡하게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왜 이렇게 복잡하게 꼬아서 이야기를 할까. 정리10에 가면 이 답의 실마리를 좀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정리10 인간의 본질에는 실제의 존재가 속하지 않는다. 또는 실체는 인간의 형상forma을 구성하지 않는다.

 

정리10은 인간은 본성상 실체가 아니라는, 다시 말해서 실체는 인간의 형상을 구성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니까 당연한 이야기다. 이것은 2부 공리1에서 말하듯 인간의 본질은 필연적 실존을 함축하지 않는다는 것, 따라서 인간은 본질이 실존을 함축하는 자기원인적(본질로부터 따라나오는 신의 특성) 실체가 아니라 실체의 변용이라는 점에서 당연히 따라 나오는 명제다. 인간의 본질은 필연적 실존을 함축하지 않는다는 공리로서 제시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독자적으로 증명이 된 명제는 아니다. 2부 공리11부 정의1을 합쳐서 생각하면= 인간은 유한하다. 이걸 스피노자가 공리1로 깔고 2부를 시작하는 것이다. 공리1에서 정리10은 너무 쉽게 따라 나온다.

 

따름정리 이로부터 인간의 본질은 신의 속성들의 일정한 변양들modificationibus에 의해 구성된다는 점이 따라 나온다

 

- 정리10과 증명, 주석으로부터 따름정리는 인간의 본질은 신의 속성들의 일정한 변양들에 의해 구성된다는 명제를 도출해낸다. 이 명제는 인간이 다른 자연 사물들을 뛰어넘는 특별한 존재자가 아니라(3부 서문의 표현을 빌면 국가 속의 국가가 아니라는 것) 여느 자연 사물들과 동일한 지위의 한 사물 내지 실재라는, 곧 따름정리의 증명에서 말하듯이, 신이 없이는 존재할 수도 인식될 수도 없는 것이며, 신의 본성을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표현하는 변용 또는 양태라는 것을 확립하고 있다.

- 인간이 이처럼 제한된 존재라는 것, 인간은 실체가 아니고 다른 자연 사물들에 비해 특별한 존재가 아니며 여느 변용 내지 양태들 중 하나라는 것, 따라서 인간은 자신을 압도하는 자연의 역량에 둘러싸인 수동적인 존재라는 것(4부 공리)이 스피노자의 인간학과 윤리학의 근본적인 출발점이다.

- 4부 공리는 4부에 딱 하나 있는 공리다. 자연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기를 압도하는 자기보다 강한 것에 둘러싸여 살아 간다 -> 이런 의미에서 유한한 존재. 정치학적으로 말하면 자연 상태무한하게 많은 타자에게 둘러싸여 실존하는. 인간이 실체라면 그럴 리가 없다. “국가 속의 국가에서 앞의 국가는 자연을 뜻하고 뒤의 국가는 인간을 뜻한다. 인간은 자연이라는 체계의 한 부분이지 별도로 왕국을 갖고 있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다.

*** 그러니까 따름정리를 정리10과 연결해서 요약하면- 1부 공리1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신 안에 있거나 다른 것 안에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실체 아니면 양태다. 그런데 정리10에서 인간의 본질에는 실체가 속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므로 인간은 실체가 아니다. 그러면 인간의 본질에는 뭐가 속하겠는가. 변용, 여기 표현대로라면 변양에 의해 구성된다. 그게 바로 따라 나오는 것이다.

 

- modificatio modification 변양. 이 모디피카치오가 가장 처음 나왔던 것은 1부 정리8. affectio 변용과 같이 쓴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모디피카치오를 드물게 쓴다. 이 모디피카치오를 쓸 때의 용법을 보면 아펙치오와 별로 다르지 않게 쓴다. 변용, 양태, 이런 말들과 같이. 에티카에서 변용affectio, 변양modificatio, 양태modus는 같은 뜻으로 봐도 된다.

- substantia 실체 / affectio 변용 신과 다른 모든 것 (= modus 양태)

* 2부 정리14에 가면 물체 자체가 하나의 변용이고 여기에 또 변용이 일어나서 변용의 변용이 일어나는데 스피노자가 하필이면 이 물체가 겪는 변용에도 “affectio”라는 단어를 붙인다.

* 3부에 가면 affectus라는 말이 나오는데 우리가 감성, 정서라고 여기는 것을 말하고, 이것은 정신의 변용과 관련되어있다. 그러니까 단어는 둘 다 affectio인데 뜻이 다른 것.

- 들뢰즈는 양태와 변양을 다르다고 이야기한다. 가령 인간의 경우에 들뢰즈에 따르면 인간의 정신은 사유속성의 한 양태고 신체는 연장속성의 한 양태다. 그렇다면 인간은? 인간은 양태인가? 스피노자에게 인간은 양태다. 하지만 들뢰즈가 볼 때 인간을 그냥 양태라고 하기에는 좀 이상한 것이다. ? 정신과 신체가 합일된 게 인간인데 어떻게 인간을 단순히 정신과 신체와 같이 양태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겠는가라는 생각에서. 그런데 들뢰즈가 보니까 스피노자가 모modusaffectio라는 말 외에 modificatio라는 말을 쓰고 있었고, 그는 이 말을 채택해서 인간처럼 사유속성에 속하는 하나의 양태와 연장속성에 속하는 하나의 양태가 하나의 합일을 이루고 있는 것을 변양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런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 인간만인가. 아니지ㅋㅋ 다른 존재자들도 관념과 물체가 다 합일을 이루고 있는 여러 개의 변양들 무한하게 많은 변양들이니까. 어쨌든 들뢰즈는 modificatio라는 말을 그런 용법으로 쓴다. 하지만 스피노자 철학 자체에서는 그런 용법이 나타나지 않는다.

 

* 정리10의 주석

 

- 따름정리에 함축되어 있는 쟁점들을 풀어내는 것이 주석의 내용이다. 1) 분명히 모든 사람은 신이 없이는 어떤 것도 존재할 수도 인식될 수도 없다는 점에 동의해야 한다1부 정리15에서 제시한 명제이며, 스피노자주의자가 아닌 사람들도 쉽게 동의할 수 있는 명제다.

- 문제는 사람들이 1)2) 많은 사람은 어떤 실재의 본질에는 그것이 없이는 그 실재가 존재할 수도 인식될 수도 없는 것이 속한다고 말한다.를 연결시킨다는 점이다. 본질에 관한 통상적인 정의인 2)는 스피노자 2부 정리2에서 제시한 본질에 대한 정의와 매우 다른 것이다. 2부 정의2에서는 상호성이 있는데, 2)의 명제에는 그런 상호성이 없고 본질이 중심이다. 그런데 스피노자의 용어법대로 하면 2)는 본질이 아니라 원인이다. 즉 스피노자는 지금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이 본질과 원인을 혼동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계속 읽어보면 사람들은 신이 본질이라고 생각해야하는지, 신이 원인이라고 생각해야하는지를 모르고 있다. 사람들은 만물의 원인으로서의 신과 인간의 본질을 혼동하고 있다.

- 1)2)가 저렇게 연결되어버리면 3-1) “그들은 신의 본성이 피조물의 본질에 속하거나3-2) “아니면 피조물들은 신이 없이는 존재하거나 인식될 수 없다고 믿는 셈 같은 양지택일이 나오기 마련이다. 3-1)의 경우, 피조물의 본질에는 신의 본성이 속하기 때문에 피조물, 특히 인간은 신적인 존재가 될 것이다. 반면 3-2)의 경우라면 피조물은, 신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는, 따라서 마치 꼭두각시와도 같은 완전히 타율적이고 수동적인 존재가 될 것이다.

 

- 스피노자는 그리하여 그들이 충분히 일관되지 못, 곧 둘 중 어느 것이 올바른 관점인지 확실하고 일관되게 정하지 못하게 된다고 말하며, 이는 그들이 철학함의 순서를 준수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만물의 제1원인이며, 따라서 인식이나 존재에서 제일 앞서는 것과 우리가 감각적으로 지각하는 것을 혼동하며, 오히려 우리가 감각을 통해 지각하는 것을 제일 원인에게 부여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자연적 실재들에 대해 숙고할 경우 그들은 다름 아닌 신의 본성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고“ ”자신들의 최초의 허구들, 곧 그들이 자연적 실재들에 대한 자신들의 인식을 그 위에 쌓아올린 그 허구들/ 허구들이 신의 본성을 인식하는 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상황에 처했다. , 제일 원인을 우리가 감각으로 지각하는 것 또는 우리가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것에 따라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1부 부록에서 스피노자가 길게 말한 바와 같이 신인동형론적 관점을 낳기 쉽다. 이런 허구적 관점은 신의 본성을 이해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 철학함의 순서 ordo

- <에티카>의 부제는 기하학적 순서ordine에 따라 증명된이다. 그러니까 이 순서라는 말은 매우 중요한 말이다.

- ”신이 인식에 있어서도 본성에 있어서도 앞선다만물의 제1원인. 신이야말로 존재론적/물리적/인식론적 원인이다. 신을 알아야 거기서 양태도 나오고, 양태가 어떤 질서를 이루는지도 알게 된다. 바로 <에티카>신에 대하여에서 출발하고, 2부 순서도 따져보면 실체와 속성에서 시작하고, 그 다음부터 정리8, 정리9에서 양태가 나오고, 정리10에 와서야 인간이 나온다. 즉 신에서부터 인간까지의 순서대로 도출된다.

- ”감각 대상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다른 모든 것에 앞선다고 믿었기 때문이다의 문제는 우리의 감각적 인식이 부적합하고 아주 부분적이며 혼동된 인식이라는 점이다. 우리의 감각적 지각이 정확하다면 문제가 없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다. 이런 인식은 모든 걸 다 뒤섞어 버린다. 1부 부록에서 나온 목적록적 편견, 신인동형론처럼, 자연적 실재들은 곧 사라지는 유한한 것인데 불변하는 실체로 착각하는 것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양태에 불과한 것을 실체로 여기고 오히려 신을 인식할 때 자연사물을 통해 인식하는 잘못된 방식이다.

- 그러니까 스피노자가 말하는 철학하는 순서는 사실 논리적인 순서다. 신에 대해 일단 안 다음에, 그걸 바탕으로 세계의 체계를 세우는 것. 발견의 순서는 감각-> 신이지만 철학하는 순서는 다르다. 신이 만물의 원인이구나-> 그럼 그 원인에서 따라 나오는 본질은 뭘까, 이런 순서로 시작해야 한다.

 

- 이렇게도 이야기할 수 있다. 스피노자가 여기서 말하는 철학함의 순서와 발견의 순서는 다르다. 때문에 우리가 신의 본질, 신의 속성, 특성을 발견하게 되기까지는 상당히 많은 시간이 걸릴 수 있다. 우리가 신을 발견해서 신이 만물의 제1원이구나 -> 그럼 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은 뭘까 -> 그럼 신의 본질로부터 따라 나오는 것은 뭘까, 이것들을 논리적인 순서로 전개하는 것이 스피노자가 말하는 철학함의 순서다. 지금 하고 있는 것, 우리가 <에티카>를 읽는 것이 어떻게 보면 발견의 과정일 수 있다. 스피노자 자신은 철학함의 순서대로 에티카를 썼지만 우리는 스피노자처럼 발견의 과정을 아직 거치지 않았으니까.

 

스피노자는 오랫동안 히브리 공동체에서 유대인들이 받는 토라 같은 교육을 받았고 듣고 말하면서 세상물정을 알게 되고 친구들을 만나면서 철학이나 과학을 배우게 됐고, 자기가 배우던 히브리 유대교 전통과 단절하고 자기의 철학을 시작하게 된다. 스피노자 자신도 역시 발견의 과정을 거친 것이다. 발견의 과정을 거쳐서 자신이 이 세상의 참된 원리라고 이해하고 그것을 자신이 발견했다고 믿는 것들을 어떻게 철학적으로 순서 있게 구성할 수 있을까, 그것을 고민해서 쓴 책이 <에티카>. <에티카>라는 것이 결국 스피노자가 이야기하는 철학함의 순서인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 세상의 원리가 무엇인지 스피노자를 읽으면서 나름대로 각자 발견해가는 과정에 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안티 스피노자가 되어있을 수도 있고ㅋㅋㅋ

 

과학적인 인식과 철학적인 인식은 차이가 좀 있다. 아마 과학적인 지식이 많이 누적이 되더라도 그것이 철학에서 이해하는 제1 만물의 원인이라든가 세계의 근거라든가 그런 문제에 대한 충분한 답변을 주기 어려울 수 있다. 방식이 조금 달라질 수는 있겠지만. 우리가 양자역학을 열심히 한다고 해도, 양자역학을 하는 사람들 중에도 기독교 신자도 있을 테고ㅋㅋ 그런 의미에서 과학적 지식의 누적과 철학적인 인식은 차이가 좀 있다.

-하지만 이 점에 관해서 스피노자는 1부 부록에서 길게 논의했기 때문에 더 이상 논의하지 않고, 대신 왜 자신이 통상적인 본질 개념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어떤 실재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은, 그것이 주어지면 그 실재가 정립되고 그것이 제거되면 실재도 제거되는 것, 또는 그것이 없이는 실재가 역으로 실재가 없으면 그것이 존재할 수도 인식될 수도 없는 것이라고 본질개념을 제시했는지 그 이유를 밝힌다. 그것은 이는 독특한 실재들이 신이 없이는 존재할 수도 인식될 수도 없지만 신은 그것들의 본질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며, 이것은 신과 독특한 실재들 사이의 존재론적 차이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 , 스피노자 자신은 실체의 본질을 그렇게 이해하지 않는다. ? 독특한 실재들이 신이 없이는 인식될 수도 존재할 수도 없지만, 신은 그것들의 본질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은 독특한 실재들의 본질이 아니라 원인이다. 신은 만물의 내재적 원인이지만 모든 독특한 실재의 원인이지만 독특한 실재의 본질은 아니다. 그러니까 원인과 본질을 혼동하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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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8 ”독특한 실재들 또는 양태들의 형상적 본질들이 신의 속성들 안에 포함되어 있는(continentur) 것과 마찬가지로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들 또는 양태들에 대한 관념들은 신의 무한한 관념 속에 포함/파악되어(comprehendi) 있어야 한다.“

 

증명 이 정리는 앞의 정리로부터 명백하지만 앞의 주석으로부터 좀 더 명료하게 이해가 된다.

 

따름정리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점이 따라 나온다. 독특한 실재들이 신의 속성 안에 포함/파악되어 있는 한에서만 실존하는 동안에는, 그 실재들의 표상적 존재 또는 관념들은 신의 무한한 관념이 실존하는 한에서만 실존한다. 그리고 독특한 실재들이, 단지 신의 속성 안에 파악되어 있는 한에서가 아니라 또한 지속된다고 말할 수 있는 한에서도 실존하는 경우, 이 실재들의 관념들 역시 그것들이 지속된다고 말할 수 있게 해주는 그런 실존을 함축한다.

* 정리8을 정리해보면,

- 독특한 실재들(=양태들)의 형상적 본질들

-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들(=양태들)의 관념들

이 두 가지가 대응관계다. 여기서 공통된 것은 독특한 실재인데, 이것은 어떤 인상을 주냐면, 형상적 본질은 독특한 실재들이 가지고 있는 본질인데, 실존하든 실존하지 않든 무관하게 양태들이 갖고 있는 것이라는 것.

 

* 정리8의 따름정리

1) 독특한 실재들이 신의 속성 안에 파악되어 있는 한에서만 실존

-> 사물이 갖고 있는 현상적 본질

2) 독특한 실재들이 단지 신의 속성 안에 파악되어 있는 한에서가 아니라 또한 지속된다고 말할 수 있는 한에서도 실존하는 경우

-> 사물이 갖고 있는 현행적 본질

- 지속 개념은 3부의 코나투스와 관련해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2부 정의2와 연관 지어 보면 실존하는 사물이 있어야 코나투스가 존재하고 실존하는 사물이 없으면 코나투스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코나투스는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다. 사물이 존재할 때만 함께 존재하는 현행적 본질이다. 3부 정리8을 보면 각각의 실재가 자신의 존재 안에서 존속하려고 하는 노력은 유한한 시간이 아니라 무한정한 시간을 함축한다라고 하는데, <<<코나투스의 시간은 무한정하다= 그 사물의 시간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 = 그럼 코나투스의 시간은 지속이다= 하지만 영원은 아니다.>>>> 그러니까 어떤 실재가 끝나기는 끝날 것인데, 언제 끝날지는 정해져 있지 않은.

 

- 1부 정의8에서 영원을 다뤘고 2부 정의5에서는 지속을 다루고 있다(”지속은 무한정한 실존의 연속이다“)

- 5부 정리21에서는 정신은 신체가 지속하는 동안이 아니라면 어떤 것을 상상할 수 없고 과거 실재들을 회상할 수도 없다라며, 정신이 상상/기억/회상을 하는 건 신체의 지속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한다. 정리22에서는 하지만 신 안에는 영원의 관점에서 이 또는 저 인간 신체의 본질을 표현하는 관념이 필연적으로 존재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정리21지속의 관점에서 파악하는 신체의 본질이고, 정리22영원의 관점에서 파악하는 신체의 본질이다.

그러니까 현행적: 지속. 신체 / 형상적: 영원. 신의 속성 안

- 5부 정리21, 22를 연결해서 생각하면, 현행적 본질은 지속의 차원에서 규정되는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면 형상적 본질은 영원의 차원에서 규정되는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어떤 실재는 지속의 차원에서는 현행적 본질을 갖는데 영원의 차원에서는 형상적 본질을 갖는다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를테면 우리들 각자가 다 영원의 차원에서 (지속의 차원에서 갖고 있는 코나투스와는 또 다른) 형상적 본질을 갖고 있는 것이다.

- 그렇다면 질문이 생길 수 있다. 형상적 본질은 현행적 본질을 포괄하는 것 아닌가? 지속도 영원에 포괄되는 것 아닌가?

- 또한 이렇게 되면, 플라톤이 감각적 세계와 형상적 세계/이상적 세계 두 개를 구별했듯이 스피노자도 지속의 차원과 영원의 차원, 현행적 본질의 차원과 형상적 본질의 차원 이렇게 두 개의 세계로 구별하는 것이고, 이것은 결국 플라톤주의가 되어버리는, 플라톤주의적인 세계상으로 가게 되는 것인데, 사실 그것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스피노자 철학이랑 잘 맞지 않는다. 1부 정리17의 주석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 플라톤주의 철학과 스피노자 철학

- 여기서 보면 창조적 지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신의 지성은 창조적 지성이니까, 신이 무언가를 생각한다는 것 -> 곧 창조, 인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인식하려면 이미 존재하고 있는 어떤 것을 지각하거나 식별하거나 발견하는 것, 스피노자 식으로 이야기하면 우리의 지성은 본성상 사물이 먼저이고 우리의 지성이 그 다음에 오거나, 혹은 동시에 온다

- 인간의 인식의 경우 이런 순서: formal essence가 먼저 있고(사물이 갖고 있는 형상적 본질이 먼저 있고) -> 그 다음에 by representation을 통해서 사물의 형상적 본질을 지성 속에 다시 한 번 담는. <- 이걸 데카르트와 스피노자가 objective essence라고 부른다. objective essence = 머릿속에서 재현된 사물의 본질.

-그러니까 형상적 본질 formal essence가 먼저 있고, 관념을 통해 재현되는 표상적 본질 objective essence가 나중에 있는.

- 그런데 적수들에 따르면 신의 지성은 창조적 지성이니까, , 뭔가를 인식한다는 것= 뭔가를 만들어내는 것이니까 인과성에서 모든 것에 앞서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성이라는 것 자체가 창조적 지성이며, 실재들의 본질 및 실존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 이것이 바로 플라톤주의적인 신학이다.

- 이것과는 약간 다른 형태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앞에서는 신의 지성을 창조적 지성이라고 했는데, 그와 다르게 신의 의지를 지성하고 구별하는 경우다. 그때는 신의 지성이 인식하는 것을 ideal type, 원형으로서 이해한다.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영원한 이데아로서의 원형이 있고, 신의 지성이 그걸 인식하고 그것을 의지를 통해 창조한다. ideal type으로서의 원형들, 이데아들은 다 영원한 것이다. <- 이것 역시 플라톤적인 생각이다.

- 그러나 스피노자는 이런 생각들을 전부 인정하지 않는다.

 

-스피노자 초기 저작 중 하나인 <형이상학적 사유>에 나오는 구별법을 염두에 두는 것도 필요하다. <형이상학적 사유>는 스피노자가 생전에 자기 이름으로 출판한 유일한 책이자 유럽철학계에서 아주 큰 명성을 얻은 <데카르트의 철학원리>에 일종의 부록으로 덧붙여진 저작인데, 스콜라 철학에서 사용되는 주요 용어들에 대한 설명을 담고 있는 책이다. 스피노자 자신의 형이상학적 사유를 담고 있다기보다 당대의 대학에서 가르치던 스콜라철학 용어들을 정리해서 그 개념들이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를 제시하고 있는 책이다. 여기서 형이상학으로 부르는 것은 스콜라철학을 말한다.

- 12. 형상적 본질은 그 자신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창조된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 양자는 실재가 현행적으로 실존함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형상적 본질은 신적 본질에만 의존하는데, 모든 실재는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실재들의 본질들이 영원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동의한다

- ”그 자신에 의해서 존재한다는 것은 바로 플라톤적인 이데아를 가리킨다. 이것은 신이 창조하는 것도 아니고, 신의 창조와 독립해서 그 자체로 영원히 존재하는, 17세기 철학에서 영원진리라고 부르는 것이다. 반면 창조된 것이라는 것은 영원성을 지니지 않은 지속의 차원의 존재라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형상적 본질은이 양자와 다르다고 주장. 왜냐하면 형상적 본질은 신적 본질에만 의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에티카> 1부 정리25에 보면 신적 본질에만 의존한다는 뜻에 대해 스피노자는 정확히 이렇게 말하다. 신은 실재들의 실존의 작용인일 뿐만 아니라 그것들의 본질의 작용인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본질이라는 것은 신이라는 원인과 무관하게 이미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신이 생산하는 것이다. 사물들의 실존뿐만 아니라 본질까지도 신에 의해 생산되는 것이다.

- 이런 것들만 봐도 플라톤주의는 스피노자 철학과 상당히 거리가 멀다. 정리17의 주석을 통해서도 알 수 있고, 1부 정리33의 주석이나 정리31의 주석만 봐도 스피노자가 여러 대목에서 플라톤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런 측면에서 보면 플라톤주의적으로 스피노자 철학을 해석하는 것은 스피노자 철학과 맞지 않는다.

- 플라톤주의라는 것은 한편으로는 신과 무관한 영원성의 세계를 상정하게 되고, 이것은 또 뭔가 초월적인 세계를 상정하게 된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초기저작부터 계속 이런 초월성을 비판해왔기 때문에 플라톤주의적으로 스피노자 철학을 해석하기에는 뭔가 걸리는 것들이 많다. 스피노자 철학의 기본정신하고 잘 맞지 않는다.

 

-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보면 2부 정리8, 5부 정리21, 22에서, 스피노자가 영원성과 지속을 상당히 뚜렷하게 구별하고 있고 2부 정리8을 보면 형상적 본질과 현행적 본질을 아주 뚜렷하게 구별하고 있다. 이게 정리8이 매우 troublesome한 정리라고 말했던 이유다. 스피노자 철학하고 플라톤주의는 뭔가 잘 맞지 않는데, 어떤 측면에서 보면 스피노자 철학에서 플라톤주의를 연상시키는 이런 이원론적인 모습들이 군데군데 이렇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영원과 지속, 형상적 본질과 현행적 본질, 본질과 실존, 이런 식으로. 또 하나 유명한 대목은 1부 정리18에 나온다.

- 신은 모든 것의 내재적 원인이지 타동적 원인이 아니다 원인 개념을 두 가지로 구별하고 있다. 내재적/ 타동적. 타동적 원인causa transiens 우리말로 번역하기 쉽지 않다. 영어로는 transitive cause. 타동적 원인은 결과를 자기 바깥에 생산하는 원인을 말한다. 그러니까 원인과 결과 사이에 외재적 관계가 있는 것. / 내재적 원인은 신이 자신이 생산한 결과를 신 바깥에 산출하는 하는 것이 아니라 신 안에 산출하는 것이다.

- 그래서 신은 모든 것의, 즉 신은 만물의 내재적 원인이지 타동적 원인이 아니라고 말하는데, 이 문장 자체만 보면 별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이것은 이원론적으로 해석하기 아주 좋은 대목이다. 신이 만물에 내재적 원인이라면 만물끼리는 어떻다는 말일까? 신과 만물 사이에는 내재적 인과관계가 있는데 그러면 사물과 사물 사이에는? 거기에도 신과 만물 사이에 존재하는 내재적 관계가 있을까? 스피노자의 답은 아니다이다. 그러니까 신과 만물사이에는 내재적 관계가 있는데 사물과 사물 사이에는 타동적 관계가 있는 것이다.

- 여기서 1부 정리28을 찾아보자. 모든 독특한 실재, 곧 유한하고 규정된 실존을 갖는 모든 실재는, 역시 유한하고 규정된 실존을 갖는 다른 원인에 의해 실존하고 작업하도록 규정되지 않는 한, 실존하고 작업하도록 규정될 수 없으며, 이 후자의 원인 역시 유한하고 규정된 실존을 갖는 다른 원인에 의해 실존하고 작업하도록 규정되지 않는 한 실존하고 작업하도록 규정될 수 없으며, 이처럼 무한하게 나아간다. 1부 정리28은 바로 사물과 사물 사이, 특히 유한양태와 유한양태 사이의 관계를 아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정리이다. 스피노자의 인과관계를 이원론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신과 만물 사이에는 내재적인 관계가 있는데, 각각의 사물과 사물들 사이에는 정리28과 같은, 타동적 인과관계가 성립한다고 본다. 이렇게 되면 우주에는 신과 만물 사이의 인과관계- 사물과 사물 사이의 인과관계, 이 두 가지 인과관계가 이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 이와 같이 1부 정리18과 정리28에 나타난 이원적인 인과관계, 2부 정리8에 나오는 형상적 본질과 현행적 본질의 이원적인 본질 관계, 5부 정리21과 정리22에 나오는 지속과 영원의 이원적 관계... 이런 식으로 스피노자 철학은 한편에서 보면 매우 반플라톤적인 철학인 것처럼 보이면서도 이상하게 여러 대목들을 보면 매우 이원론적인 것들이 있다.

 

-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스피노자는 일관성이 없다, 어디서는 이원론적인 이야기를 하고, 영원성이라는 단어, 신에 대한 사랑이야기를 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아주 무신론자로 보일만큼 반신학적인 반기독교적인 색채를 드러내고 있다고 말한다. <에티카>15년이 걸린 책이기 때문에 쓰면서 초기 생각하고 후기 생각하고 많이 달라져서 이 책은 한 권의 책이 아니다, 여러 권의 책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그렇게 일관성이 없다고 일축해버리는 것은 너무 편리한 방법이다. 어쨌든 연구하고 해석하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일관성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은 좀 게으른 사람들이다. 열심히 보면 충분히 일관되게 해석할 수 있다. (<- 이게 바로 학자들의 논쟁법이다ㅋㅋ)

 

* 형상적 본질과 현행적 본질이 같은 개념이라는 관점에 대하여

 

- 어떤 사람들은 스피노자가 분명히 본질에 대해 두 개의 개념, formal essenceactual essence를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도 말한다. 스피노자의 형상적 본질과 현행적 본질은 다른 개념이 아니다. 같은 개념이다. 한 개념을 두 가지 상이한 측면으로 보는 것이지 그것을 아예 다른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 그런데 우리가 후자처럼 주장하려면 몇 가지 중요한 측면을 해명해야만 한다. 일단 우리가 처음에 두 가지 개념으로 나눠서 설명하게 만들었던 그 대목들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들이것이 무슨 이야긴가. ”신의 속성 안에서만 파악되어 있어야 한다는 무슨 말인가. 이런 것들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가령 예를 들어서 1부 정리8의 주석2

- 하지만 변양은 다른 것 안에 있는 것으로, [] 자신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실체]의 개념에 따라 그 개념이 형성되는 것들로 이해할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실존하지 않는 변양들에 대한 참된 관념을 가질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이 지성 바깥에서 현행적으로 실존하지 않는다 해도 그것들의 본질은 다른 것 안에 포함되어 있어서 이 다른 것을 통해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실체들은 자기 자신을 통해 인식되기 때문에 지성 바깥의 실체들의 진리는 오직 그것들 자신 안에만 존재한다.“

 

- 스피노자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실존하지 않는 변양들/양태들에 대한 관념들은 관념 대상들이 없는 관념들이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스피노자의 주장은, 변양들이 지성 바깥에 현행적으로 실존하지 않는다 해도그것들의 본질은 (그것이 다른 것에 의존하는 변양인 한에서) 다른 것 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실존하지 않는 변양에 대해서도 우리는 참된 관념을 가질 수 있다는 것.

-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다른 것이라는 것은 뭘까? 이 다른 것이 실체, 또는 물체의 경우라면 연장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그건 너무 자명한 만큼 우리에게 해주는 이야기가 거의 없으니까, 우리는 약간 더 구체화시켜 명시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 도움이 될 만한 텍스트를 끄집어내보면 1부 정리11의 두 번째 증명이 있다. 여기서 스피노자는 라이프니츠와 매우 다른 근거율을 제시하고 있다.

 

*** 라이프니츠의 <이성에 토대를 둔 자연과 은총의 원리> 7. “어떤 것도 충분한 이유 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곧 어떤 것도 사태를 충분하게 인식하는 이에게 왜 그것이 다른 식으로가 아니고 그처럼 존재하는가에 대하야 충분한 이유를 제시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게끔 일어나지 않는다. 이 원리가 정립되면 우리가 첫 번째로 제기할 수 있는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왜 도대체 무가 아니라 어떤 것이 존재하는가?[왜 도대체 아무것도 없지 않고 어떤 것이 존재하는가?] 왜냐하면 무는 어떤 것보다 더 단순하고 더 쉬운 것이기 때문이다.”

- 충족이유율 principle of sufficient reason PSR 충분한 근거의 원리

- noting without sufficient reason. 일어나는 모든 일은 사태를 충분히 인식하는 사람이라면 충분한 설명을 제시할 수 있다. 왜 도대체 아무 것도 없지 않고, 어떤 것이 존재하는가. 무는 더 단순하고 쉬운 것인데. 세상에는 이렇게 더 단순하고 쉬운 무이지 않고 존재하는 것들이 왜 많은가.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적 무에 대한 이 질문이 여전히 나는 매우 매력적이고 흥미롭다. 물론 그 결과가 은총이라는 것이 매우 찬물을 끼얹지만ㅋㅋ)

- 라이프니츠의 질문에서 어떤 것은 논리적으로, 형이상학적으로 동등한 두 가지 선택지로 제시되어 있다. 어떤 것, 존재자, 자연, 더 나아가 이 세상, 이 우주가 존재하는 것은 필연적이거나 당연한 일이 아니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 역시 얼마든지 논리적으로 가능한 경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에서 존재는 무에 대하여 논리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우월성을 지니지 않는다. 만약 무 대신에 어떤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형이상학적 필연성의 결과가 아니라 어떤 선택의 결과이다. 창조의 선택. 은총.

- 그러니까 라이프니츠는 존재에는 어떤 신학적인 사건과 선택이 개입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개입은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논리.

 

*** 스피노자에게도 무가 존재한다. 하지만 라이프니츠처럼 형이상학적 무가 아니라, 존재해야 마땅한 어떤 것이 어떤 이유내지 근거로 인해 존재하지 않는 상태. 그러니까 단순히 실존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실존하지 않음에 대해서도 충분한 이유가 요구되고 있다. (라이프니츠는 실존하지 않음에 대해 별다른 이유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가 더 당연한 상태니까)

- 라이프니츠에게 무라는 것은 대등하게 맞서있는 것 VS

스피노자에게 무라는 것은 (존재의 한가지 양상으로서) 존재 안에 들어와 있는 것,

- 무언가 있어야 하는데(<- 이게 전제) 있어야 할 자리에 어떤 이유로 무언가가 사라진 상태가 무이다. 왜 없을까? 불에 타서 사라졌을까? 질병을 앓아 죽었나? 같은 설명이 필요한 상태. , “존재해야 마땅한데왜 존재 안하지? 이런 논리.

- 스피노자에게는 무는 항상 이미 존재 안에 포함되어 있으며, 존재의 한 방식이다. 이미 를 포괄하고 있다.

 

*** 그렇다면 라이프니츠는 존재만이 설명의 대상인가? 그렇지 않다. 선택이 가능한 것이다. 물론 무일 때는 딱히 설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스피노자가 불교를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아마 라이프니츠는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동양철학에 관심이 많았으니까.

- 스피노자에게는 본성상 실존하지 않는 것은 없나? 그러니까 형이상학적인 무? 없다. 스피노자가 신학적인 것을 거부하는 이면이다. 자연은 영원하고, 자연이 영원하다는 것은 창조의 순간이 없다는 말이다. 시초나 기원, 끝점이 없다

 

- 그러니까 스피노자에게는 뭔가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 신의 역량이 너무나 무한하기 때문에, 충만하게 넘쳐흐르는 생산적 본질이라서 무엇이 있는 것이 필연적이다. 그런데 이게 없다? 있어야 하는 것이 없다? 그러면 없다는 것을 증명해야한다. 존재라는 것이 무와 대립하는 게 아니라, 존재와 대립하는 형이상학적인 무가 아니라, 스피노자에게 무는 항상 실재 속의 무이다. 실재 속에 항상 있어야 했는데 어떤 이유로 사라진 것.

- 삼각형이 실존한다면 왜 실존하는지 그 이유가 필요하고, 부재한다면 부재의 이유도 필요하다. 그러니까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도 스피노자 근거율에 따르면 이유가 있다. 그냥 당연히 실존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걸 실존하지 못하게 만드는 어떤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 , 정리하면- 1부 정리8의 주석 이 때문에 우리는 실존하지 않는 변양들에 대한 참된 관념을 가질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이 지성 바깥에서 현행적으로 실존하지 않는다 해도 그것들의 본질은 다른 것 안에 포함되어 있어서 이 다른 것을 통해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 1부 정리11의 두 번째 증명에서 봤듯이 뭔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걸 존재하지 않게 만드는 원인이 있다 -> 그럼 여기서 실존하지 않는 변양들이라고 하면 그 변양들의 실존하지 않는 이유가 있다.

 

- 그렇다면 이 다른 것을 우리가 굳이 실체나 속성이라고 하지 않고 그보다 더 가까운 좀 더 구체적인 사물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 어떤 주석가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다. 내가 제빵학원에 다니면서 빵, 아이스크림 만드는 법을 배워서 어제 집에 돌아와 아이스크림을 만들었다. 스피노자 식으로 이야기하면 이것은 내가 아이스크림에 대해 적합한 관념을 갖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만들어서 다 먹었고 맛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그 아이스크림은? 실존하지 않게 됐다. ? 내가 먹었으니까. , 아이스크림이 부재하는 원인을 지정할 수 있다. 게다가 아이스크림을 먹어서 살이 쪘다. 그러니까 실존하지 않는 그 아이스크림은 뭔가 효과를 내면서 사라졌다(유령처럼 나의 뱃살에ㅋㅋ)

- 이 아이스크림이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 1부 정리8의 두 번째 주석에서 이야기하는 실존하지 않는 변양이다. 이 실존하는 독특한 실재에 대해 어떤가. 아이스크림은 실존하지 않는데 실존하지 않는 아이스크림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지 않은 것이 아니지 않은가. 분명 어떤 관념을 갖고 있다. 더욱이 그 적합한 관념을 갖고 있다. 내가 원하면 거기에 상응하는 아이스크림을 만들 수 있는 것= 적합한 관념.

- 그러니까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들의 관념을 내가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관념은 적합한 관념. 그리고 이 적합한 관념이라는 것은 독특한 실재의 형상적 본질에 대한 관념이다. 이 독특한 실재를 독특한 실재로 만드는 형상에 대한 관념, 독특한 실재를 독특하게 만드는 그 form, form이 무엇인지를 인식하는 것이 독특한 실재에 대한 적합한 관념이다.

- cf) 데카르트 <성찰>에 유니콘의 예가 많이 나오는데 그걸 가리키는 스피노자의 용어가 있다. “사고상의 존재스콜라 철학의 용어로 ena rationis라고 쓴다.

 

*** , 정리하면-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에 대해 내가 관념을 갖고 있는데 그 관념은 적합한 관념이다. 나는 레시피를 갖고 있고 실제로 만들어서 성공을 했으니까. 적합한 관념이라는 것은 뭐냐면 이 실재의 형상적 본질을 인식할 수 있는 것.

- 지금 이 독특한 실재에는 actual essence 현행적 본질은 없다.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하지만 현행적 본질은 없지만 내가 형상적 본질을 인식하고 있는 독특하 실재다. 그렇다면 이 실재의 형상적 본질은 현행적 본질과 같은 걸까, 다른 걸까? 다르지 않다. 왜냐면 지금은 현행적 본질이 존재하지 않지만 내가 형상적 본질을 갖고 있고, 그것을 적합한 관념에 따라 언제든지 현행적으로 바꿀 수 있다.

- 그러니 우리가 형상적 본질을 뭔가 초월적인 것이라든지, 뭔가 영원한 어떤 것이라고 굳이 생각할 필요는 없다. 저 예에서 형상적 본질이라는 것이 지금 실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현행적 본질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형상적 본질과 현행적 본질이 다른 것은 아니다.

- 4부 정리4와 증명으로 가보자. 인간이 자연의 일부가 아니게 되는 것은 없으며 (=인간은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인간이 능동적일 수 없다), 그의 본성만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인간이 적합한 원인이 되는 그러한 변화들만을 겪는다는 것도 있을 수 없다(=인간은 항상 외부원인에 의한 작용을 겪는다)

- 증명을 가면 인간이 갖고 있는 자기보존의 역량은 신의 일부, 자연전체로부터 받은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현행적 본질이라는 말을 딱 두 번 쓰는데 3부 정리7과 바로 여기, 4부 정리4의 주석에서다. 두 번 다 코나투스와 관련해서. 따라서 인간의 현행적 본질에 의해 설명되는 한에서의 인간의 역량은 신 또는 자연의 무한한 역량, 곧 신 또는 자연의 본질의 일부다 때문에 인간이 뭔가를 원인으로서 수행한다는 것은 사실 자연 전체의 원인의 역량의 한가지 표현이다. 내가 지금 여기서 스피노자 공부를 하는 것도 다 자연전체의 역량이라는 것이다. 바람과 물과 땅과ㅋㅋ 모든 것들이 다 기여한 덕이다. 좁게는 부모님과 형제자매와 선생님과 이 강의를 알게 해준 사람들 같은 여러 외부 원인 덕분이다.

 

*** 그래서 최종적으로 정리를 하자면- 스피노자 철학에서 형상적 본질과 현행적 본질이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하나는 영원의 차원에 있고 속성에 속하고, 다른 하나는 지속의 차원에 있고 유한성의 속하는 두 개의 본질처럼 보이지만, 스피노자 철학의 여러 대목들을 참조하면 꼭 그렇게 형상적 본질과 현행적 본질을 이원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 하나의 본질 개념이 다른 식으로 표현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여지도 충분히 존재한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바로 그것이 스피노자 철학의 정신, 지양에 더 잘 들어맞는다. 앞으로 우리가 더 나아가다보면 이런 이야기들을 되풀이할 기회들이 계속 있을 것이다.

 

- 이런 식의 이야기를 해볼 수도 있다. 2부 정리8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들 또는 양태들에 대한 관념들은 신의 무한한 관념 속에 포괄되어/파악되어 있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뜻하려는 것은, 신의 무한한 관념 속에 포괄/파악되어 있는 이 관념들에 상응하는 (왜냐하면 이 관념들은 참된 또는 적합한 관념, 곧 그것에 상응하는 관념 대상을 가질 수 있는 관념들이기 때문이다) 실재들의 형상적 본질들이 신의 속성 안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 따라서 1부 정리17의 주석에서 스피노자의 반대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달리, 형상적 본질들이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은 그것들이 신의 지성 안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들이 신의 속성 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의 지성 안에 있는 것은 형상적 본질이 아니라 표상적 존재이며, 신의 속성 안에 존재하는 것이 형상적 본질

- 또한 스피노자가 2부 정리8의 증명에서 언급하는 앞의 정리는 사실 정리7의 따름정리라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신의 무한한 본성으로부터 형상적으로 따라 나오는 모든 것은 동일한 질서, 동일한 연관에 따라 신 안에 있는 관념으로부터 표상적으로 따라 나온다.” 2부 정리7의 따름정리가 말하는 것은 신의 지성 안에 존재하는 표상적 존재 또는 관념에 상응하는 형상적 본질이 신의 속성 안에 존재한다는 것.

- 따라서 스피노자가 2부 정리6의 따름정리, 2부 정리8, 2부 정리8의 따름정리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형상적 본질= 현실적 실재표상적 존재= 관념의 구별이다. 실재= 관념의 관계. 렇다면 스피노자가 형상적 본질이라고 말하는 것은 현행적 본질과 구별되는 또 다른 본질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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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설명을 통해 스피노자의 따라 나온다가 기원으로서의 신의 관념이 아니라, 관념이라는 것 자체를 가능하게 해주는 틀이라는 의미가 더 명확히 다가왔다. 재미있는 설명이었다.

 

신의 지성 안에서 신의 관념으로서(원형의 관념으로서= 표상으로서) 미리 존재했기 때문에

 

- 신이 원인이지 대상은 원인이 아니다.“ : 대상이 우리를 자극해서 관념이 생겼다고 이해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다. 이를테면 내가 눈앞의 컵을 인식한다. 컵이라는 물체/대상에 대한 관념을 형성한다. 컵이라는 대상이 여기 있으니까. 컵이라는 대상이 촉발돼서 내가 이것을 지각한 것. 그렇다면 컵이라는 대상이 원인이 될 것이다. 스피노자는 이게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 우리가 어떤 사물에 대한 관념을 형성하게 되는 원인은 컵이라는 대상이 아니라 신이라는 것.

 

스피노자의 따라 나온다는 말은 신의 관념이 기원이라든가 최초의 원인이라든가 시원이라는 게 아니라 모든 개별적인 관념을 가능하게 해주는 그런 틀이라는 이야기다. 신의 관념으로 인해 모든 관념이 가능하다. 신의 관념을 통해 모든 관념을 형성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신의 관념 없이는 우리가 어떤 관념을 가지고 인식을 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2. 알튀세르가 게릴라 전술이라고 말했다는 것은 몰랐지만, 강의 첫 시간부터 거칠게 말하자면 시치미를 뚝 떼고 약간 의뭉스럽게 을 가져다 쓰는 스피노자의 방식이 무척 매력적이었다. 스피노자의 의도를 이미 알고 있는 상태에서 에티카 1부를 하나하나 따라가다가 어떤 정리나 문장들은 차후에 신학자들에게 먹일 한 방을 위한 밑밥들처럼 느껴져서, 참으로 밑밥도 촘촘히 깔아놓으시네 진짜 못 당하겠다 싶어 혼자 웃은 적도 있었다. <에티카> 초반부는 세상에서 가장 난해하면서도 정밀하고 신랄하면서도 우아한 블랙코메디 아닐까. 더글러스 애덤스의 근대 철학자 버전이라고 내 멋대로 생각하고 있다.

 

그 덕에 혹은 그 탓에 유난히 스피노자는 오해를 많이 받는 철학자인 것 같다. 문장 그대로 받아들여 스피노자를 교조주의자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고, 신을 초월적 영역에 놓고 생각하는 범신론자로 오해하는 사람들도 꽤 많다. 몇 년 전에 A”B가 가장 좋아하는 철학자가 스피노자다라고 한 걸 듣고 사람들이 B가 의외로 신앙적인 사람이라고 오해했었던 것도 생각나고. 지금도 얼핏얼핏 스피노자에 대해 묻거나 찾아보면 많은 사람들이 스피노자가 신을 찬양하고 신 안에서 은총과 평안을 얻어 지구 종말의 그 날에 사과나무를 심을 수 있는 온건한 사람 정도의 느낌으로 알고 있다. 누구보다 우아한 방식으로 과격(?)했던 사람인데.

 

나도 스피노자를 오랫동안 오해했었다. 내가 읽었던 책들에 언뜻언뜻 나오는 스피노자 인용구들을 보면 그는 너무나 구조주의자고 너무나 유물론자로 보였던 것. 이 오랜 오해가 풀린 건 주디스 버틀러 세미나에서였다. 그 세미나가 아니었으면 스피노자 <에티카>를 강독할 생각도 하지 못했을 거고 나는 평생 그가 구조주의자 아니면 유물론자라고 여기며 살았을 것이다. 심지어 에티카 1부 강의 중반까지도 나는 그런 틀로 그를 보고 있었다.

 

적진 속에 들어가서 적의 무기를 들고 적과 싸워 적을 내파하는 것. 사실 메갈에서 썼던 미러링이 일종의 이런 방식인 건데 그 판의 성격과 미러링 하는 대상의 성격과 수준 때문에 메갈의 미러링은 혐오발언 문제와 겹치며 더욱 복잡한 문제가 되었지만(여기에 대해서 나는 주디스 버틀러의 <혐오발언>에 대체로 동의한다. 물론 언어의 상처에 저항하는 언어들은 상처를 재실행하지 않고서 그 상처를 되풀이해야 한다.“라는 게 현실적으로, 특히 물리적 위협과 연결되었을 때 어디까지 작동할 수 있을지에 대해 의문이 들지만, 아무튼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으니 스피노자식으로 마무리해서 지금으로서는 이 정도로 충분하다ㅋㅋ), 적의 무기를 들고 적과 싸우는 것은 적에게 커다란 타격을 안기기에는 매우 효율적인 것 같다. 어쨌거나 10년 동안 보이지 않는 것이었던 페미니즘 이슈를 보이는 것으로 리부트하는 데에 성공했으니 굉장한 위력이었던 것. 미러링 그 이후-(”그 이후에 이미 찍어야할 마침표가 들어가 있지만 사실 아직도 잘은 모르겠다)에 대해 더욱 같이 고민해야겠지만.

 

아무튼 적진에 들어가서 적의 언어로 적을 해체하는 스피노자 멋있어. ”너희가 말하는 그런 신 따위 없어!“라는 외침을 이렇게 길고 기하학적으로 아름답게 쓰고 있는 걸 본다는 것.

 

* 스피노자는 왜 자연법칙이라고 쓰지 않고 이라고 썼을까.

 

스피노자가 기독교신학적인 용어법을 그대로 가져다 쓰는 것을 두고 알튀세르는 스피노자의 철학적인 게릴라 전술이다라고 말했다ㅋㅋㅋ 적진에 들어가서 적으로 단장하고 적의 무기를 들고 적과 싸운다. 만약 스피노자가 신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자연법칙’ ‘자연적인 사물이라는 어휘를 갖고 이야기했으면, 스피노자 적수들이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별로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쟤하고 나는 어차피 노선이 다르니까, 쟤는 아예 신을 무시하는 사람이니까 각자 갈길 가자. 그런데 스피노자는 처음부터 시종일관 신이 무한하시고, 신이 전능하시고, 모든 것이 신에 의지하고, 마치 교조적인 독실한 신자인 것처럼, 아주 철저한 신학적인 어휘를 가지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내용을 보면 이것은 기독교 신학에서 말하는 인격적이고 초월적인 신학하고는 매우 다르다. 그래서 알튀세르가 스피노자가 게릴라 전술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적의 진지 속에 들어가서 파괴하는.

 

3. 자크알랭 밀레가 스피노자의 용어법을 구조주의의 핵심개념인 구조개념에 적용했고, 저 적용이 소쉬르의 구조언어학의 구조 개념이라든가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적 구조 개념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이나믹하게 만들었는지 좀 더 깊이 알고 싶어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보고 있는데 아직은 여의치 않다. 언젠가 만약 내가 구조주의를 공부하게 된다면 그때 풀 숙제로 남겨 두기로.

 

자크알랭 밀레는 60년대에 이런 개념을 쓴다. 구조의 작용/ 구조의 행위. 구조화하는 작용/ 구조화되는 작용. 스피노자의 철학의 용어법, 산출하는 자연-산출되는 자연을 가지고 와서 구조주의의 핵심개념인 구조 개념에 적용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원인과 결과가 들어가면서 가령 소쉬르의 구조언어학의 구조 개념이라든가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적 구조 개념이 굉장히 다이나믹해진다. 60년대에 이런 시도들이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예전에는 그리 주목 받지 못했지만 1960년대-70년대 프랑스 철학에 굉장히 중요한 사상적인 원천을 준 것이 스피노자 철학이다.

 

문단띠로 사각형입니다.

4. 그 유명한 2부 정리7을 들어가는 날, 강의 시작 전에 어쩐지 폭풍전야같은 고요한 긴장이 내 마음에서 느껴졌다ㅋㅋ 자세히 파고들자면 한 달은 다뤄야할 정리7에서 기본적으로 꼭 알고 넘어갈 것만 뽑아서 설명해주신 것 같은데 그래서인지 걱정했던 것보다는 매우 명료하게 다가왔고 그 이전 정리들에서 구름 사이로 보듯이막연하게 보였던 어떤 의문들도 같이 또렷해졌다. 들뢰즈의 3중 평행성을 찾아 읽은 게 이해를 돕는 데에 한 몫 했다. 무엇보다 정리7이 좀 더 깊게 다가왔던 것은 선생님의 이 표현 때문이었는데, 내가 언젠가의 스피노자 일기에도 썼었던, 무한하게 많은 속성 가운데 두 개의 속성이면 표본이 너무 작지 않은가라는 의문. 지울 수 없었던 의문이었는데 이날 마침 선생님이 이 이야기를 하시면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정리7이다라고 했을 때 정리7이 좀 굉장하게 느껴졌다. 저 정리7을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고가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입장의 상당부분을 결정할 것 같은 느낌. 그러니까 결정적 모멘트 같은. 그 이전에도 여러 논쟁적이고 당대 및 후대 철학자들의 반발을 불러왔던 마치 스피노자의 선언 같은 정리들이 있었는데도 나에게는 정리7이 그 무엇보다도 크게 다가왔다. 커다란 세계를 결정짓는 최종 결제 도장 같은.

 

들뢰즈의 3중의 평행성

1) 양태들의 평행성 (관념과 그 대상(가령 물체)의 평행성) <- 이것이 평행한 이유는 2)

2) 속성들의 동등성/상동성 (사유속성, 연장속성...) <- 이것이 동등/상동하는 이유는 3)

3) 존재의 동일성 (무한하게 많은 무한한 속성들은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

 

5. 정리7의 주석을 보면서 스피노자가 <정신교정론>에서 했던 원이라는 관념은 둥글지 않다는 말이 같이 생각났다. 수업을 듣기 전인 과거의 나에게 수수께끼를 내고 싶다. ”자연 안에 실존하는 원과 실존하는 원의 관념은 하나의 동일한 것이다원이라는 관념은 둥글지 않다는 모순이게 아니게? 분명 모순이지!“라고 대답했을 것이다ㅋㅋ

 

어떤 히브리인들이 신과 신의 지성 및 신이 인식한 실재들은 하나의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마치 구름 사이로 보듯이 보았던 게 바로 이 점인 듯하다. 가령 자연 안에 실존하는 원과 실존하는 원의 관념(이것 역시 신 안에 존재한다)은 하나의 동일한 것으로, 상이한 속성들에 의해 설명된다. 그리하여 우리가 자연을 연장 속성 아래에서 인식하든 사유 속성 아래에서 인식하든 아니면 다른 어떤 속성 아래에서 인식하든 간에, 우리는 하나의 동일한 질서 또는 하나의 동일한 원인들의 연관causarum connexionem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곧 동일한 실재들이 서로 따라 나오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신은 오직 그가 사유하는 실재인 한에서만 어떤 관념, 가령 원의 관념의 원인이며, 오직 그가 연장되는 실재인 한에서만 원의 원인이라고 말한 것은 다름 아니라 원의 관념의 형상적 존재는 가까운 원인으로서의 다른 사유 양태에 의해서만 지각될 수 있고, 이 다른 사유 양태 역시 또 다른 사유 양태에 의해서만 그럴 수 있으며 이처럼 무한하게 진행되기 때문이다.

 

스피노자가 초기에 썼던 <정신교정론>에서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한다. ”원이라는 관념은 둥글지 않다이것도 아주 재미있는 표현이다. 원은 둥글지만, 원에 대한 인식인 원의 관념은 둥글지 않다는 말이다. 이 말은 (2부에 가서 보게 되겠지만) 스피노자가 신체와 정신은 상호작용하지 않는다, 간섭하지 않는다고 했던 것과, 앞서 봤던 사유속성과 연장속성은 서로 간섭하지 않고 상호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의 맥락이다. 그러니까 사유속성에 속하는 관념과 연장속성에 속하는 신체는 다르다는 것이다. 이것을 표현한 말이 바로 원이라는 관념은 둥글지 않다“. , 원이라는 연장에 속하는 도형은 둥근 모양을 갖지만 관념은 둥글다 네모나다는 모양을 갖지 않듯이, 관념과 관념의 대상이 되는 무언가는 전혀 다르다

 

6. 동일한 시간을 가리키는 두 개의 시계에 대한 라이프니츠의 세 가지 모델을 통한 설명과, 거기에 페히너가 덧붙인 네 번째 모델, 스피노자의 방식 또한 매우 흥미로웠다. 페히너의 방식을 두고 수업시간에 다른 분들이 억지 같다고 했지만, 선생님도 스피노자가 말하는 정신과 신체의 관계를 두 개의 떨어져있는 시계(아마도 떨어져있는에 방점이 찍히는)가 어떻게 일치하는지의 틀로 설명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고 이야기하셨지만, 그래도 페히너의 의도가 매우 명료하고 매력적인 방식으로 반영되었다는 점에서 이 비유를 최대한 살려주고 싶어서 잠깐 생각 해봤는데. 그럼 하나의 커다란 몸체에 두 개의 시계가 나란히 붙어있으면서 같은 매커니즘으로 움직이는, 몸체에 달려있는 태엽과 초침을 움직이는 힘이 양쪽에 매달려있는 두 개의 시계에 동시에 작용하니까 같은 질서와 연관으로 움직이게 되는 모델로는 설명할 수 없을까? 이 시계라면 두 개의 다른 시계이기도 하면서 하나의 같은 시계이기도 한, 두 개의 시계로 표현되지만 사실은 하나의 시계라고(가게에서 저런 모양의 시계를 산다고 했을 때 분명 저거 하나주세요라고 말할 테니까)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이것도 역시 억지고 무리일까? 

 

라이프니츠는 정신과 신체의 관계, 더 정확히 말해서 서로 독립적인 정신과 신체가 어떻게 일치하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시계의 비유를 든다. 라이프니츠가 1695년에 짧은 글을 하나 쓰는데, 그 중 하나가 <실체들 사이의 소통에 관한 새로운 체계>. 정신이라는 실체, 신체라는 실체 사이에 어떻게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는가, 어떻게 일치가 이루어지는가, 어떻게 조화가 이루어지는가를 설명하는 새로운 체계에 대한 글이다. 이 글을 두고 여러 사람이 반론을 제기하니까 거기에 반해서 라이프니츠가 몇 차례 자신의 입장을 옹호하는 해명을 쓰는데, 그 중 하나의 해명이 동일한 시간을 가리키는 두 개의 시계에 대한 이야기다. 여기서 동일한 두 개의 시계는 평행성에 대한 비유다. 하나의 시계는 관념의 질서에 속해있는 시계, 다른 시계는 사물의 질서에 속해있는 시계. 이 시계가 똑같은 시간을 가리킨다는 것은 상응한다는 이야기. 이 사실을 설명하기 위한 몇 가지 모델이 있다.

 

1) 두 개의 시계가 서로 연동하여 작용하게 만드는 방식. (데카르트주의)

하나의 시계가 작동하면 다른 시계도 따라서 작동하도록 연결을 만들어놓은 시계

2) 두 개의 좋지 못한 시계가 서로 항상 일치하게 만드는 길은, 능력 있는 시계공이 두 시계를 조정해서 그들이 매 순간마다 서로 일치하게 만드는 방식이다.

- 이것은 니콜라 말브랑슈가 제시한 것이다. 17세기의 프랑스의 사제이며, 포스트 데카르트주의자라고 불리는. 하지만 데카르트에게 굉장히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노선은 조금 다르다. 그가 제시하는 것이 바로 occasionalism 기회원인론. 기회라는 말을 썼냐면, 예를 들어 내가 손을 든다고 하면 그에게는 내가 손을 드는 것이 하나의 occasional, 내가 손을 들 때, 이것은 나의 의지가 아니고, 나 자신이 원인이 돼서 손을 든 것도 아니고, 나로 하여금 신이 손을 들게 하도록 원인으로서 작용을 미친 것이다, 라는 의미다. 어떤 기회에 어떤 작용이나 사건, 어떤 행위가 일어나면 그 모든 것의 진정한 원인은 신이라는 것이 기회원인론이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같지만 굉장히 재미있다. 마치 구조주의 같은 느낌. 이 두 번째 방식은 기회원인론적 방식이다.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두 개의 별로 좋지 못한, 자꾸 느려지거나 해서 오차가 나는 시계는 방향이 안 맞을게 분명한데, 이 두 시계의 방향이 계속 일치하도록 아주 능력이 뛰어난 시계장인이 매 순간마다 두 시계를 조절한다는 것이다. 내가 손을 들 때 신이 나를 통해 작용하듯이 시계에도 매번 시계공이 작용해서 시간을 일치시키는 것. 엄청 바쁘겠죠ㅋㅋㅋ

*** 말브랑슈 malebranche: 기회원인론 occasionalism

- 유한한 인간을 비롯한 유한한 사물들이 행위하고 작용하는 모든 것은 신에 의해서다. 내가 이렇게 손을 든다면, 내가 손을 드는 이것이 바로 오케이션, 이 기회의 원인이 신이다. 말브랑슈 철학에서는 개인과 개체는 꼭두각시다. 신에 의해 규정되어 움직이는. 하지만 생각보다 미묘하다. 손을 드는 원인은 신인데, 말브랑슈 이야기는 이 근육의 운동, 인간이 가지고 있는 팔근육의 작용방식, 그러니까 팔을 들 때 근육이 이완되고 팽창되고 하는 방식, 이것을 신이 정해놓은 일정한 규칙에 따라 작동하는 것이라고 봤다. 인간의 신체를 규정하는 생리학적인 법칙. , 내가 움직이는 것은 임의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신체를 규정하는 근육의 운동 패턴에 따라 움직인 것이다.

 

3) 두 시계를 처음부터 대단한 기술과 정교함으로 제작하여 그것들이 이후에 서로 일치할 것이라는 점을 확신할 수 있게 하는 방식.

- 이게 라이프니츠 자신이 제시하는 방식이다. 예정조합. 아주 완벽하게 만들어서 알아서 둘이 일치하게 만드는 것. 라이프니츠는 자신의 설명에 제일 설득력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스피노자는 어떻게 했을까?

 

19세기 후반 독일의 아주 유명한 학자 게오르그 페히너 georg fechner, psychophysics라는 학문을 만든 사람이다. 심리물리학이라는 학문 분야를 개척한 사람. 오늘날식으로 말하면 뇌과학? 신경생리학? 같은 것을 처음으로 시도했던 사람이다. 프로이트 초기저작에서 페히너에 대해 얼마나 대단한 존경심을 갖고 있는지를 여러 대목에서 볼 수 있듯이 프로이트에게도 대단한 영향을 준 사람이다. 심리물리학. 그냥 psychology도 아니고 physics도 아니고 psychophysics 학문 이름부터가 범상치 않다ㅋㅋㅋ 이 결합된 이름 자체가 심리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이 일치하는, 이것을 통합적으로 규명하고자 하는 학문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페히너가 라이프니츠에게서 parallelism을 가지고 온다. 평행성, 평행론이라는 모델을 가지고 와서 자신의 심리물리학에 저것의 기본원리들을 채택했다. 심리적인 사건과 신체적인 사건이 일치하는 이유, 그 매커니즘을 밝히려는 학문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면서 페히너가 라이프니츠가 이야기한 이 두 개의 시계의 세 가지 모델을 이렇게 언급한다.

 

라이프니츠는 세 개의 방식만 이야기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 방식들 이외에 네 번째 방식이 있다. 그 네 번째 방식이 바로 스피노자의 방식이다. 스피노자의 방식이란 무엇일까? 페히너의 답은 두 개의 시계가 사실은 하나다“ ”두 개의 동떨어진 시계가 아니라 하나의 같은 시계다“, 그러니 당연히 시계가 일치한다. 이게 스피노자의 방식이다. 이렇게 이야기한다. 페히너의 취지는 이해가능 하지만, 사실 이게 스피노자의 2부 정리7이나 3부 정리2에 나오는 스피노자 이야기에 대한 적절한 설명이라고 보기에는 좀 어렵다. 어떻게 보면 정신과 신체의 관계, 또는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과 실재들의 질서와 연관 관계를 두 개의 떨어져있는 시계라는 모델이 어떻게 일치하는지의 틀로 스피노자를 설명하는 것 자체가 적절하지 않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라이프니츠가 여기에 스피노자를 언급하지 않은 이유도 뭔가 스피노자의 철학, 2부 정리7이나 3부 정리2에 나오는 설명이 자기 모델에 맞지 않고 부적절해서였을 수도 있다.

 

7.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은 스피노자와의 대비로서 잠깐씩 접할 뿐이지만, 그럴 때마다 받는 인상은, 조금 이상한 표현일지 모르겠지만, 그의 형이상학의 세계는 어쩐지 로맨틱하다는 것이다. 존재만이 질문의 대상이 되는 것에 의문을 품고 아무 것도 없는 라는 상태도 존재와 대등한 것이라며 던졌던 왜 무가 아니라 어떤 것이 존재하는가라는 그의 질문도 그렇고, 관념이 어떻게 정신이 될 수 있는가?라는, 인간의 정신을 굉장히 내면화되고 사적인 것으로 여기며 이런 개별적인 정신과 마음이 들어갈 여지가 없는 스피노자의 철학에 던지는 질문도 그렇다. 나에게 그의 철학적 세계는 어쩐지 (신을 향해서든 스피노자에 대해서든) 구애적이고 다소 맹목적이고 따뜻하고 의리 있지만 혹은 그렇기 때문에 병약하고 나이브한 소년의 그것 같은 느낌이다. 그에 비해 스피노자는 매우 냉정하고 단호하면서 이성적이고 강건한 느낌(물론 이건 아무 근거 없는 지극히 개인적인 인상비평일 뿐이다). 그리고 나는 대체적으로 로맨틱하고 나이브한 사람을 좋아하면서도 싫어하지ㅋㅋㅋㅋ

 

라이프니츠의 스피노자 비판을 보기 전에는 스피노자의 관념론에 개별적인 정신, 마음이 들어갈 여지가 없는, 보편적인 정신만 존재하고 개별화되고 내면화되고 사적인 정신이 없다는 사실 자체를 깨닫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깨닫지 못한 건 아니다. 관념을 사물처럼 생각하고 보편적이고 물성이 있는 어떤 것, 그러니까 계량이 가능하고 법칙화가 가능한 어떤 것으로 본다는 것은 알았는데, 그 이면에 숨어있는 뜻이 개별화되고 내면화되고 사적인 정신이 없다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말하자면 보편적인 정신이 존재하는 것은 알았지만 이것이 보편적인 정신존재하는 것일 수 있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나는 너무나 당연히 정신을, 선생님 표현을 빌면, public한 것으로 생각해왔던 것이다. 정신이라는 것은 당연히 public한 것이고 사물 같은 것이고 계량화할 수 있고 법칙화 할 수 있고 보편적이고 과학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좀 더 거칠게 말해 개개인마다 갖는 감정이나 생각이나 느낌이 매우 특별하고 고유한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스피노자 철학에 라이프니츠가 생각한 어떤 결여가 있다는 것을 추호도 눈치채지 못했다. 물론 하나의 사건을 접할 때 어떤 상황에 놓여있을 때 외부 자극을 받았을 때 사람마다 갖는 감정 느낌 기억들은 다 다르고 그것대로 특별하겠지만, 그것들을 외부로 끄집어내어 죽 늘어놨을 때(그렇다, 나는 표현할 수 있는 언어와 그걸 건져낼 수 있는 전문가가 있다면 정신을 외재적으로 끄집어낼 수 있는 어떤 것이라고 이미 전제하고 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알 수 없고 해독해낼 수 없고 이름 붙일 수 없는 어떤 것이 있을 거라고는 당연히 생각하지 않아왔던 것이다

 

그래서 라이프니츠가 문제제기를 한 것을 보고나서야 아, 그렇구나,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구나라고 뒤늦게 깨달았다. 나는 자기 자신, 혹은 인간이라는 종의 어떤 내면이나 정신을 유달리 특별하고 내밀하고 굉장히 사적이며 조금 중22한 표현을 빌면 아무도 내 마음 알 수 없어“ ”나는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어떤 특별한 정신세계를 갖고 있어라고 여기는 유형의 사람을 매우 피곤해하는 편인데 이런 상태를 뜻하는 창문이 없는이라는 표현이 무척 좋았다. 매우 높은 천장에 창문이 달린 지하에 지어져있는 집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 지상을 오고가는 사람들은 그 창문으로 그 안을 언제든 들여다볼 수 있는데, 집 안에 있는 사람만이 목을 뒤로 젖혀 천장을 한 번도 보지 않는 바람에 자신의 집에 창문이 달려있는 줄 전혀 모르는. 그래서 아무도 이 집 안을, 집 안에 있는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인간이니까, 혹은 니까 나의 정신이나 내면 안에 무언가 아무도 알 수 없고, 그래서 아무도 따라잡을 수 없는 특별함이 한 두 개쯤은 있을 거라고 믿고 싶어 하고, 나의 감정은 특별한 어떤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하는 인간의 마음이 어떤 건지 알기에 스피노자에게 납득하지 못하는 라이프니츠가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그런 것 하나도 특별하지 않고 관념은 사물이나 마찬가지라고 확 깨부수어 버리는 스피노자는 그런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참 무자비할 것이다. 하지만 나의 정신, 나의 심리적인 것을 굉장히 사적이고 내면적이고 특별한 것으로 생각하다 못해 어떤 특출한 정신과의사도 믿지 못하고 의사들이 몇 번의 상담, 백 마디도 안 되는 말들 속에서 나에 대해 대체 무엇을 알 수 있냐며 끝내 마음을 열지 못한다거나, 그 누구도 자신을 알아주지 못할 것 같은 마음에 혼자 피해의식의 집을 쌓고 그 안으로 자꾸 들어가 버린다거나(아마도 그 집은 매우 높은 천장에 창문이 달린 지하에 지어져있는 집일 것이다), 아집 속에서 듣기 좋은 말, 보고 싶은 것만 보면서 사는 것은 더 무자비한 일이다..

 

나는 관념을 하나의 독자적인 실재, 독자적인 사물, 다른 것의 원인이 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보는 스피노자 철학이, 개별화되고 내면화되고 사적인 정신이 들어갈 여지가 없는 스피노자의 철학이 매우 마음에 든다. ”모든 것이 정신화 되어있다는 말도 무척 좋다. 이런 점들이 시사하는 바를 라이프니츠의 비판 덕에 더 선명하게 알 수 있었다는 의미에서 기억에 남을 라이프니츠의 [보편정신 학설에 대한 고찰].

 

[“모든 것이 정신화되어있다는 주장과 관련하여] 정신이 관념이라고 말하는 것은 완전히 불합리한 것이다(2부 정리13에서 스피노자는 정신을 신체의 관념이라고 이야기한다) 관념들은 숫자나 도형처럼 완전히 추상적인 것이며, 행위할 수 없는 것들이다. 관념들은 추상적이고 보편적이다(<- 이것을 스피노자식을 말하면 관념들은 형상적 실재가 아니다라고 라이프니츠가 말하고 있는 것이다). ... 영혼은 결코 관념이 아니라, 관념들의 원천이다.”

 

라이프니츠 비판의 또 다른 논점은 관념과 정신, 관념과 영혼을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말하자면 영혼(정신) 안에 관념들이 담기는 것이고 영혼(정신) 안에서 관념들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 그에게 스피노자는 너무 이상한 것이다. 정신을 관념이라고 생각한다니. 정신이 어떻게 관념일수 있지?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도 담겨있다.

 

심리학 또는 심리철학의 역사를 보면, 처음에 19세기 말, 20세기 전반기까지 사람들은 인간의 정신, 인간의 심리적인 것을 굉장히 사적이고 내면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정신, 심리가 사적이고 내면적이다라는 것은, 과학의 대상이 되기 어려웠다는 말이다. 정신, 심리가 사적이고 내면적인 것으로 여겨지니까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다른 사람이 알 수 없는 일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외부에서 과학적으로 법칙화하거나 계량화하거나 평가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철학이나 심리학에서 introspection이라는 말을 한다. 내성. 자기성찰. 어떤 심리주체가 자신의 마음 안을 들여다보는 것. 이런 시기에는 내성의 방법이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한 반박으로 20세기 중반쯤 미국에서 행태주의라는 게 나오면서 심리적인 것을 어떤 외재적인 행동처럼 평가하고 측정하는 방식들이 나왔다.

 

그러니까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 두 사람이 인간의 심리, 정신에 대해 평가하는 방식을 보면, 라이프니츠는 전자의 방식, 스피노자는 후자의 방식인 것이다. 라이프니츠에게 정신, 심리적인 것은 굉장히 내밀하고 내면적이고 사적인 것. 말하자면 창문이 없는 것. 그러나 스피노자에게는 정신이라는 건 관념이고, 나중에 정리11에 가게 되면 정신은 무한지성의 일부다. 그러니까 스피노자에게서 정신이라는 건 전혀 내면적이고 사적인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열려있고 개방되어 있는 것. public한 것. 그러니 라이프니츠가 볼 때 스피노자의 생각은 참 이상했을 것이다. 스피노자를 반박한 이 글의 제목에 보편정신이라는 말이 있는데, 라이프니츠가 볼 때 스피노자 철학에는 개별적인 정신, 마음, 이런 것이 들어갈 여지가 없는 것이다. 무한지성 같은 보편적인 정신만 있지 개별화되고 내면화되고 사적인 그런 정신은 없는 것이다. 개채성.

 

어쨌든 우리가 라이프니츠 인용문에서 보듯이 라이프니츠가 parallelism을 쓰는 맥락을 보면, 이 말은 스피노자의 철학을 우호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쓴 말이 아니라 스피노자에 대한 비판의 맥락에서 스피노자 철학과 구별되는 자기 철학을 말하기 위해 쓴 용어다. 이 용어를 가지고 스피노자 철학을 해석하고 이론화하기에는 이 용어의 출발점에서부터 좀 문제가 있는 것 같다.

 

* 평행론을 현대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평행론이 하나도 아니고, 적어도 두 개의 평행론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스피노자가 정리7, 따름정리, 주석에서 말하는 스피노자의 평행론은 하나가 아니라 두 개라는 주장인데, 표현들은 약간 다르지만 요점은 이거다. 1) 존재론적 평행론이 있고 2) 인식론적 평행론이 있다. 존재론적 평행론이란, 하나의 동일한 질서와 연관이 모든 속성에 걸쳐서 펼쳐지고, 각각의 속성에 따라서 때로는 연장속성 아래서 때로는 사유속성 아래서 표현된다는 바로 이 부분. 평행론을 주장하는 주석가들은 이걸 존재론적 평행론이라고 이야기한다. 다른 하나는 관념과 그 관념의 대상 사이의 일치를 설명하는 문제이고, 이것을 바로 인식론적 평행론이라고 본다. 스피노자의 2부 정리7에 두 가지 상이한 쟁점이 다 들어있다는 것은 일리가 있는데, 두 측면이 다 가능한 것 같다.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이 실재들의 질서와 연관과 같다고 했을 때 우리가 이 관념들을 형상적 실재로 이야기하면 존재론적 평행론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관념들을 표상적 실재로 이야기하면 표상으로서의 관념과 일치하는 대상으로서의 실재가 2부 정리 7에 들어가 있는 것.

 

2부 정리32의 증명을 보면 왜냐하면 신 안에 있는 모든 관념은 그 대상이 되는 것들과 완전히 합치하며(2부 정리7의 따름정리에 의해) 따라서 (1부 공리6에 의해) 이 관념들은 모두 참되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여기서 스피노자가 2부 정리7의 따름정리를 혼용하는 방식이 관념과 그 대상 사이의 합치다. 그러니까 표상으로서의 관념과 표상의 대상과의 일치. 그래서 이것을 두고 어떤 주석가들은 인식론적 평행론이라고 부른다.

 

* 표상적 실재로서의 관념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그 관념이다. 우리는 보통 사물에 대한 표상을 관념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런 점에서 표상적 실재라는 말은 상당히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다. 그런데 스피노자 철학의 독특성은, 우리는 관념이라는 것을 그냥 하나의 독자적인 실재, 하나의 사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스피노자는 관념이라는 것을 그 자체가 하나의 사물이라고 생각한다. 스피노자적인 의미에서 실재, 사물이라는 것은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인과작용을 할 수 있는 것, 다른 것의 원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관념a는 관념b를 낳을 수 있고 관념b는 관념c를 낳을 수 있고... 이런 게 바로 형상적 실재다. 관념을 하나의 사물처럼 생각하는 것. 이게 스피노자의 특징이다. 우리는 자동차에 대한 관념을 가질 수 있고, 달에 대한 관념을 가질 수 있고, 그러니까 모든 사물에 대해 관념을 갖는, 표상적 실재로서의 관념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스피노자 철학에서는 관념을 이렇게 표상으로만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라이프니츠가 스피노자에게 반론한 게 바로 그것이다. 정신이 어떻게 관념일 수 있는가. 스피노자는 관념을 표상으로만 생각한 게 아니라 사물처럼 생각하니까, 무언가의 원인이 될 수 있고 작용할 수 있고 작용 받을 수도 있는 사물처럼 생각하니까, 그래서 정신도 관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니까 스피노자에게 정신이나 관념이나 다 사유속성에 속하는 양태들이다. 그러나 라이프니츠는 말하자면 관념이라는 것을 표상으로만 생각하는 것이다. (“관념들은 숫자나 도형처럼 완전히 추상적인 것이며, 행위할 수 없는 것들이다. 관념들은 추상적이고 보편적이다(<- 이것을 스피노자식을 말하면 관념들은 형상적 실재가 아니다라고 라이프니츠가 말하고 있는 것이다). ... 영혼은 결코 관념이 아니라, 관념들의 원천이다.”) 반면에 스피노자는 관념을 표상적 실재로서의 관념, 형상적 실재로서의 관념으로 구별한다. , 스피노자의 철학의 독특성은 관념이라는 것을 마치 하나의 사물처럼 독자적인 원인으로서 작용할 수 있는 사물처럼 제시했다는 것, 그러니까 형상적 실재로서 제시했다는 것이다. 관념이 하나의 사물이니까 이게 당연히 표상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스피노자처럼 관념을 사물처럼 생각하면, 관념이든 정신이든 사적인 것이 아닌 게 된다. 관념이라는 것이 public한 것이 될 수 있는 것은 관념을 사물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다. 이게 3부에 가서 정서론을 이해하는 데에도 굉장히 중요하다. 우리는 보통 우리의 감정을 굉장히 사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구에 대한 나의 애틋한 사랑, 누군가의 비극에서 내가 느끼는 슬픔, 이런 건 나만이 알 수 있는, 나만의 고유한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감정을 우리 개개인의 굉장히 고유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정신이라는 것을 굉장히 사적이고 내밀한 것이라고 판단하는 생각을 반영하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정서라는 것을 그렇게 내밀하고 내면적이고 주관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굉장히 퍼블릭한 것으로 여겼다. 이게 나중에 모방의 문제로 이어진다. 모방 욕망. 뒤에 가면 자세히 나올 것이다.

 

8. 나에게는 에티카 질문노트가 있다. 수업을 듣다가 질문이 생기면 적어두는 노트인데 바로바로 질문하지 않고 노트에 적는 이유는 나중에 가면 그 답이 나오겠지 싶어서다. 이미 그런 경우가 제법 있었어서 현재까지 나의 질문노트에 적혔던 23개의 질문 중에서 11개가 지워지고 12개 남아있다. 이번에 지웠던 열한 번째 질문이 바로 이것, 다른 속성에 비해 사유속성이 훨씬 클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사유속성이 다른 속성들에 비해 우월한 속성인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었다. 그리고 이번 강의에서 그 답을 들었다. 물론 스피노자가 직접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고, 스피노자라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라는 추측이 담긴 답이기는 하지만 나는 이 답을 듣는 순간 너무나 납득했고 조금 감동했다. “어차피 무한한데.” 아 너무나 논리적이면서 근사한 답 아닌가. 어차피 무한한데 무한한 것에 400을 곱하나 10000000을 곱하나 무슨 상관이야, 진짜. 스피노자에게는 시간조차도 아무 의미 없는 개념인데. “무한이라는 가늠도 상상도 제대로 해볼 수 없는 커다란 세계에서 사유속성이 연장속성보다 더 양이 많네 적네 따지는 것이 정말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12가지 색 물감 중에 보라색이 특권을 얻어 다른 색깔 물감보다 600000배의 양으로 물에 풀어진다고 한들 바다 색깔에는 변함없다.

 

* 들뢰즈가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에서 이런 문제를 제기한다. A속성에서는 a가 따라나오고 B속성에서는 b가 따라나오고 연장속성에서는 물체가 따라나오고, 사유속성에서는 관념이 따라 나오는데, 이런 관점에서 보면 속성들은 동등하다. 그런데 우리가 표상적 실재로서의 관념을 생각해 보면, 저기서 물체에 대한 표상으로서의 관념이 있을 테고, a에 대한 관념도 있을 테고 b에 대한 관념도 있을 테고. 게다가 또 관념 자신에 대한 관념도 또 있을 것이다. 관념1에 대한 관념2, 관념2에 대한 관념3, 관념3에 대한 관념4..... 그리고 저 관념에 대한 관념은 분명 표상적 실재로서의 관념이고, 관념이니까 다 사유속성에 속할 것이다. 게다가 관념1에 대한 관념에 대한 관념에 대한 관념에 대한.... 이런 식으로 나가다보면 연장속성에 속하는 양태보다 사유속성에 속하는 양태가 훨씬 더 많을 것이다. , 양태들에 대한 관념들이 다 있으니까 + 게다가 각각의 관념이 형상적 실재가 될 수 있다면 계속해서 관념에 대한 관념으로 배가가 될 수 있으니까 다른 속성에 비해 사유속성이 훨씬 더 커지지 않는가. 이런 문제제기.

 

스피노자는 여기에 대해 특별히 이야기하는 바가 없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었을 것 같다. 아니, 어차피 무한한데...ㅋㅋㅋㅋ 무한 곱하기 9를 하나, 무한 곱하기 30000을 하나 다 무한한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라고 생각할 수 있다ㅋㅋ 1부 정리15의 주석에 무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는데(“무한 양을 가정한 것에서부터 이런 부조리한 결론들이 나오기 때문에“), 누군가 직접 스피노자에게 저 질문을 던진다면 스피노자가 뭐라고 답할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답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이야기다. 아무튼 물체에는 이런 경우가 전혀 없지만 관념들의 경우에만 무엇에 대한 무엇에 대한 무엇에 대한..... 관념의 관념의 관념의.... 이게 생겨나니까, 다른 속성에 비해 사유속성은 뭔가 다른 점이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속성들 사이의 동등성, 평등 이런 것을 유지할 수 있는가 같은 질문을 해볼 수 있다.

 

9. 주석가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는 정리로도 유명하고, 스피노자를 잘 모르던 시절에도 평행론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었을 정도로 유명한 정리7을 바짝 긴장하고 들었다가 정리8로 넘어가면서 조금 마음을 놓았는데, 웬걸. 의외로 정리8이 만만치가 않았다.

 

일단 독특한 실재들 또는 양태들의 형상적 본질과 마찬가지인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들 또는 양태들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처음 들었을 때 내가 이해한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지금까지 에티카에서 만났던 어떤 것들 중에서도 가장 생경하고 낯설었다. 형상적 실재성-표상적 실재성의 개념도 이렇게까지는 낯설지 않았다. ”웃을 수 있는 특성만 갖고 있는 인간“ ”말할 수 있는 특성만 갖고 있는 인간같이 한 가지 특성만 갖고 있는 걸 말한다고? 살면서 이런 류의 개체를 상상한 적이 없어서 낯선 걸까? 아니다. 구체적으로는 아니더라도 과장적인 비유로서 일상에서 들어본 적은 있다. 예를 들어 아무런 생산적인 일도 하지 않는 사람을 두고 숨만 쉬는 사람“ ”밥만 축내는 사람“ ”잠만 자는 기계뭐 이런 식으로. 그런데 이렇게 한 가지 특성만 갖고 있는, 실존한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허구이기만 한 것은 아닌(부분적인 진실이 있는) 존재에 대해 이렇게 유형화를 하고, 거기에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들 또는 양태들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게 SF소설이 아니라 철학책, 그것도 스피노자 <에티카>의 정리에 등장을 한다고? 이 사실이 어쩐지 생경하고 어색해서 내가 이해를 제대로 한 것이 맞는지 재차 확인했던 것이다. 재밌어ㅋㅋㅋ

 

따름정리도 재미있었다. 저 정리에서 놓쳐서는 안 될 키포인트인 글자는 인 것 같다. <독특한 실재들이 신의 속성 안에 포함/파악되어 있는 한에서실존하는 동안에는>, 우리가 경험할 수도 없고 실존하는 개체로서 우리가 표상할 수도 없는 실재들이니까 오직 신의 무한지성 안에존재한다는 의미고, 그렇기 때문에 그 실재들의 표상적 존재나 관념들은 신의 무한지성이 실존하는 한에서실존할 수 있고, 그것들을 유일하게 파악/포함하고 있는 신의 지성이 사라지는 순간 그것들도 사라진다.

 

이어서 나오는 신의 속성 안에서 파악되고+ 지속된다고 말할 수 있는 한에서도 실존하는 경우에 속하는 실재들은 정리8과는 다르게 시공간적인 개체성을 갖는, 아직 실존하지 않고 그게 어떤 것인지 우리는 정확히 모르지만 시공간적인 개체 형태를 갖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는 것들이라는 것도 흥미로웠다. 스피노자의 우주가 무한한 우주라는 것을 배워왔지만 정리8과 정리9는 정말 뭔가 우주적이고 SF소설 같은 느낌이잖아? 하지만 나에게 아직 주석은 완전히 이해되지 않았다. 왜냐면 주석에서 예로 든 원 안에 존재하는 두 개의 선 이외에 존재할 수 있는 무수히 많은 다른 선과 직사각형들은 나에게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가 아니라 정리9의 지속의 차원에 속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아직 그려지지 않은 원 안의 선이나 직사각형은 시공간적 개체성을 가지고 있는 것 아닌가? 이 그림 속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사실 내가 저 원 안에 당장 선 하나만 그어도 생겨날 수 있는, 어떤 개체 형태를 갖고 있는지 우리가 분명 알고 있는 것들로서의 실재 아닌가? 주석에서 이런 커다란 의문이 남은 채로 일단 강의가 끝났는데 다음 강의에서 정리8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질 것 같으니 기다려봐야겠다.

 

정리8 ”독특한 실재들 또는 양태들의 형상적 본질들이 신의 속성들 안에 포함되어 있는(continentur) 것과 마찬가지로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들 또는 양태들에 대한 관념들은 신의 무한한 관념 속에 포함/파악되어(comprehendi) 있어야 한다.“

증명 이 정리는 앞의 정리로부터 명백하지만 앞의 주석으로부터 좀 더 명료하게 이해가 된다.

따름정리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점이 따라 나온다. 독특한 실재들이 신의 속성 안에 포함/파악되어 있는 한에서만 실존하는 동안에는, 그 실재들의 표상적 존재 또는 관념들은 신의 무한한 관념이 실존하는 한에서만 실존한다. 그리고 독특한 실재들이, 단지 신의 속성 안에 파악되어 있는 한에서가 아니라 또한 지속된다고 말할 수 있는 한에서도 실존하는 경우, 이 실재들의 관념들 역시 그것들이 지속된다고 말할 수 있게 해주는 그런 실존을 함축한다.

- 그렇다면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들에는 뭐가 있을까. 우리는 2부 공리1에서 신/실체는 본질적으로 실존을 함축한다고 했지만, ”인간의 본질은 필연적 실존을 함축하지 않는다. 곧 자연의 질서에 따라 이 인간이나 저 인간이 실존하거나 실존하지 않는 일이 똑같이 일어날 수 있다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기원인과 다르게 인간은 본질상 실존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본질과 실존 사이의 존재론적 괴리가 인간을 포함한 유한한 것들의 특징이다.

-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들의 사례로 생각되기 쉬운, 이를테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 아직 출시되지 않은 아이폰 13 같은 것들은 정리9에 나오는 사례들이다. 정리8의 따름정리를 보면 명확해지는데, 따름정리에서 두 가지를 구별하고 있다. 1) 신의 속성 안에 포함/파악되어 있는 한에서만(이게 정리8에서 이야기하는 것), 2) 지속된다고 말할 수 있는 한에서만 실존하는 것. 이때 지속이라는 것은 우리식으로 좀 더 풀어서 말한다면, 시공간적인 어떤 개채성을 갖고 있는 어떤 것이다. 아이폰13이라든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는 아직 실존하고 있지 않지만, 스피노자적인 의미에서 보면 지속의 차원에 속하는 것이다. 그것들 모두 아직 존재하지 않지만, 우리가 그게 어떤 것인지 정확히 예측할 수 없지만, 그게 시공간적인 개체 형태를 갖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것들은 정리8에서 이야기하는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와는 다른 것이다.

 

-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란 가령 인간의 예를 들어 설명하면, 인간은 본질을 갖고 있고 여러 가지 특성들, 웃을 수 있다/직립할 수 있다 같은 득성들을 갖고 있다. 그럼 여기서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란 직립할 수 있는 성질만 갖고 있는 인간, 웃을 수 있는 특성만 갖고 있는 인간, 말할 수 있는 특성만 갖고 있는 인간,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오는데 앉아있다는 특성만 갖고 있는 소크라테스같은 그런 것. 이런 것들이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이다. 이것들은 지속을 갖고 있는 것들이 아니다. 이런 것들은 있을 수 없다. 다른 건 아무 것도 없고 말할 수 있는 특성만 갖고 있는 인간같은 것. 그렇다고 이게 아주 없다고 말할 수도 없다. “말할 수 있는 특성은 인간이라는 동물이 갖고 있는 특성이니까. 그러니까 한 가지 특성으로만 파악된 독특한 실재, 이것이 여기서 말하는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이다.

- 그렇다면 신의 무한한 관념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의 의미는, 직립하는 성질만 갖고 있는 인간, 웃을 수 있는 성질만 갖고 있는 인간, 이것들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고, 또한 우리가 실존하는 개체로서 개별적으로 표상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니까 오직 무한지성 안에만 있다는 그런 의미다.

- 스피노자가 정리8에서 이런 사례들을 든 이유는 그래야 정리8과 정리9의 차이가 확연히 느껴질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정리8지속의 차원에 속하는 어떤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구체적인 개체라고 상정할 수 있는 어떤 실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정리8과 정리9는 구별되어야 하고, 정리8에서 스피노자가 말하는 실존하지 않는 현행적 실재라는 것은 아직 지속의 차원이 들어가지 않은, 구체적인 개체성을 갖지 않는 그런 독특한 실재다. 실존한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허구라고 말할 수도 없는 그런 것.

- 스피노자의 주석을 보면 그림 하나를 제시하고 있다. 스피노자가 예시하는 이 원은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론>3권 정리35에 증명의 대상으로 나오는 도형이다. 수직으로 교차하는 선을 가진 원. 스피노자는 여기서는 이렇게 두 개의 선만 존재하지만 이 원 안에는 무수히 많은 다른 선 또는 직사각형이 있을 수 있고, 그게 실존하지 않는 어떤 독특한 실재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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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피노자 자신이 쓰지 않은 용어를 가지고 스피노자 철학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는 왜곡이나 변형의 위험이 따르기 마련인데, 2부 정리7을 워낙 평행성 명제라고 부르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다. 물론 모든 철학자들이 평행론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고 부적절하다고 말하는 철학자들도 상당히 많다.

 

2부 정리73부 정리2와 연결이 되어있다. ”신체는 정신이 사고하도록 규정할 수 없고 정신은 신체가 운동하거나 정지하도록 또는 그 이외에 (만약 다른 어떤 것이 존재한다면) 다른 어떤 것을 하도록 규정할 수 없다.“ 하지만 정신과 신체 사이에 아무런 인과관계나 상호 작용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정신과 신체가 전혀 별개의 존재인 것은 아니다. 실체가 무한하게 많은 무한한 속성들을 통해 표현되듯이, 그리고 동일한 실재들의 질서 또는 연관이 때로는 사유속성 안에서 때로는 연장속성 안에서 표현되듯이, 인간이라는 통일체 역시 때로는 정신을 통해 그리고 때로는 신체를 통해 표현된다. 정신과 신체의 존재론적 동일성이 함의하는 것 중 하나는, <윤리학> 2부 정리7의 주석이 말하듯이 정신과 신체는 하나의 동일한 질서 또는 하나의 동일한 원인들의 연쇄를 표현한다는 점이다.

 

3부 정리2의 주석 이 점은 2부 정리7의 주석에서 말한 것, 곧 정신과 신체는 하나의 동일한 것으로 때로는 사유속성 안에서 인식되고 때로는 연장속성 아래에서 인식된다는 점으로부터 명료하게 이해된다. 그리하여 자연이 이 속성 아래서 인식되든 아니면 저 속성 아래서 인식되든 간에 실재들의 질서 또는 연관은 하나다. 결과적으로 우리 신체의 능동과 수동의 질서는 본성상 정신의 능동과 수동의 질서와 하나를 이루고 있다., 신체가 능동적일 때 정신도 능동적이고, 신체가 수동적일 때 정신도 수동적이다.

 

하지만 데카르트와 라이프니츠의 생각은 다르다. 5부 서문에 가면 그 이야기가 나오는데 데카르트는 신체의 힘이 너무 강하면 정신이 약해진다고 이야기한다. , 신체가 능동적일 때 정신은 수동적. 반면에 정신이 강해지면 신체가 약해진다. 의지력이 강해져서 신체가 통제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 정신이 능동적이면 신체가 수동적. 반비례 관계라고 생각한다.

 

2부 정리7을 평행론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관념과 관념의 대상 사이에 상응 관계가 있다, 관념A는 관념의 대상이 되는 사물A와 일치하고, 관념B는 관념의 대상이 되는 사물B와 일치한다

는 관점으로 생각한다. 이렇게 보게 되면 물체의 질서는 평행한데-> 평행하다는 것은 서로 간섭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의 원인이 될 수 없다는 말인데-> 이 말은 정신과 신체 / 관념과 그 대상은 독립적이고 외재적이라는 말인데-> 이게 평행론적인 해석에 함축되어 있는 것인데-> 그렇다면 관념과 그 대상이 어떻게 상응하는가. 그 근거가 무엇인가. 여기에 대해 설명하기가 굉장히 어렵다.

 

라이프니츠는 정신과 신체의 관계, 더 정확히 말해서 서로 독립적인 정신과 신체가 어떻게 일치하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시계의 비유를 든다. 라이프니츠가 1695년에 짧은 글을 하나 쓰는데, 그 중 하나가 <실체들 사이의 소통에 관한 새로운 체계>. 정신이라는 실체, 신체라는 실체 사이에 어떻게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는가, 어떻게 일치가 이루어지는가, 어떻게 조화가 이루어지는가를 설명하는 새로운 체계에 대한 글이다. 이 글을 두고 여러 사람이 반론을 제기하니까 거기에 반해서 라이프니츠가 몇 차례 자신의 입장을 옹호하는 해명을 쓰는데, 그 중 하나의 해명이 동일한 시간을 가리키는 두 개의 시계에 대한 이야기다. 여기서 동일한 두 개의 시계는 평행성에 대한 비유다. 하나의 시계는 관념의 질서에 속해있는 시계, 다른 시계는 사물의 질서에 속해있는 시계. 이 시계가 똑같은 시간을 가리킨다는 것은 상응한다는 이야기. 이 사실을 설명하기 위한 몇 가지 모델이 있다.

 

1) 두 개의 시계가 서로 연동하여 작용하게 만드는 방식. (데카르트주의)

하나의 시계가 작동하면 다른 시계도 따라서 작동하도록 연결을 만들어놓은 시계

2) 두 개의 좋지 못한 시계가 서로 항상 일치하게 만드는 길은, 능력 있는 시계공이 두 시계를 조정해서 그들이 매 순간마다 서로 일치하게 만드는 방식이다.

- 이것은 니콜라 말브랑슈가 제시한 것이다. 17세기의 프랑스의 사제이며, 포스트 데카르트주의자라고 불리는. 하지만 데카르트에게 굉장히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노선은 조금 다르다. 그가 제시하는 것이 바로 occasionalism 기회원인론. 기회라는 말을 썼냐면, 예를 들어 내가 손을 든다고 하면 그에게는 내가 손을 드는 것이 하나의 occasional, 내가 손을 들 때, 이것은 나의 의지가 아니고, 나 자신이 원인이 돼서 손을 든 것도 아니고, 나로 하여금 신이 손을 들게 하도록 원인으로서 작용을 미친 것이다, 라는 의미다. 어떤 기회에 어떤 작용이나 사건, 어떤 행위가 일어나면 그 모든 것의 진정한 원인은 신이라는 것이 기회원인론이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같지만 굉장히 재미있다. 마치 구조주의 같은 느낌. 이 두 번째 방식은 기회원인론적 방식이다.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두 개의 별로 좋지 못한, 자꾸 느려지거나 해서 오차가 나는 시계는 방향이 안 맞을게 분명한데, 이 두 시계의 방향이 계속 일치하도록 아주 능력이 뛰어난 시계장인이 매 순간마다 두 시계를 조절한다는 것이다. 내가 손을 들 때 신이 나를 통해 작용하듯이 시계에도 매번 시계공이 작용해서 시간을 일치시키는 것. 엄청 바쁘겠죠ㅋㅋㅋ

*** 말브랑슈 malebranche: 기회원인론 occasionalism

- 유한한 인간을 비롯한 유한한 사물들이 행위하고 작용하는 모든 것은 신에 의해서다. 내가 이렇게 손을 든다면, 내가 손을 드는 이것이 바로 오케이션, 이 기회의 원인이 신이다. 말브랑슈 철학에서는 개인과 개체는 꼭두각시다. 신에 의해 규정되어 움직이는. 하지만 생각보다 미묘하다. 손을 드는 원인은 신인데, 말브랑슈 이야기는 이 근육의 운동, 인간이 가지고 있는 팔근육의 작용방식, 그러니까 팔을 들 때 근육이 이완되고 팽창되고 하는 방식, 이것을 신이 정해놓은 일정한 규칙에 따라 작동하는 것이라고 봤다. 인간의 신체를 규정하는 생리학적인 법칙. , 내가 움직이는 것은 임의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신체를 규정하는 근육의 운동 패턴에 따라 움직인 것이다.

 

3) 두 시계를 처음부터 대단한 기술과 정교함으로 제작하여 그것들이 이후에 서로 일치할 것이라는 점을 확신할 수 있게 하는 방식.

- 이게 라이프니츠 자신이 제시하는 방식이다. 예정조합. 아주 완벽하게 만들어서 알아서 둘이 일치하게 만드는 것. 라이프니츠는 자신의 설명에 제일 설득력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스피노자는 어떻게 했을까?

 

19세기 후반 독일의 아주 유명한 학자 게오르그 페히너 georg fechner, psychophysics라는 학문을 만든 사람이다. 심리물리학이라는 학문 분야를 개척한 사람. 오늘날식으로 말하면 뇌과학? 신경생리학? 같은 것을 처음으로 시도했던 사람이다. 프로이트 초기저작에서 페히너에 대해 얼마나 대단한 존경심을 갖고 있는지를 여러 대목에서 볼 수 있듯이 프로이트에게도 대단한 영향을 준 사람이다. 심리물리학. 그냥 psychology도 아니고 physics도 아니고 psychophysics 학문 이름부터가 범상치 않다ㅋㅋㅋ 이 결합된 이름 자체가 심리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이 일치하는, 이것을 통합적으로 규명하고자 하는 학문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페히너가 라이프니츠에게서 parallelism을 가지고 온다. 평행성, 평행론이라는 모델을 가지고 와서 자신의 심리물리학에 저것의 기본원리들을 채택했다. 심리적인 사건과 신체적인 사건이 일치하는 이유, 그 매커니즘을 밝히려는 학문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면서 페히너가 라이프니츠가 이야기한 이 두 개의 시계의 세 가지 모델을 이렇게 언급한다.

 

라이프니츠는 세 개의 방식만 이야기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 방식들 이외에 네 번째 방식이 있다. 그 네 번째 방식이 바로 스피노자의 방식이다. 스피노자의 방식이란 무엇일까? 페히너의 답은 두 개의 시계가 사실은 하나다“ ”두 개의 동떨어진 시계가 아니라 하나의 같은 시계다“, 그러니 당연히 시계가 일치한다. 이게 스피노자의 방식이다. 이렇게 이야기한다. 페히너의 취지는 이해가능 하지만, 사실 이게 스피노자의 2부 정리7이나 3부 정리2에 나오는 스피노자 이야기에 대한 적절한 설명이라고 보기에는 좀 어렵다. 어떻게 보면 정신과 신체의 관계, 또는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과 실재들의 질서와 연관 관계를 두 개의 떨어져있는 시계라는 모델이 어떻게 일치하는지의 틀로 스피노자를 설명하는 것 자체가 적절하지 않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라이프니츠가 여기에 스피노자를 언급하지 않은 이유도 뭔가 스피노자의 철학, 2부 정리7이나 3부 정리2에 나오는 설명이 자기 모델에 맞지 않고 부적절해서였을 수도 있다.

 

<라이프니츠의 스피노자 비판>

 

[보편정신 학설에 대한 고찰]은 그가 1702년에 쓴 짧은 글로 상당부분이 스피노자에 대한 반박으로 이루어져있다.

 

나는 정신 안에서 일어나는 것과 물체 안에서 발생하는 것 사이에 완전한 평행성parallelism을 확립해놓았다(<- 이게 바로 parallelism의 유래다. 예정조합.) .... 스피노자는 윤리학 3부 정리2의 주석에서 영혼과 신체가 동일한 것이며, 단지 두 가지 상이한 방식으로 표현될 뿐이라고 말하며 2부 정리7에서는 사유하는 실체와 연장되는 실체가 하나의 동일한 실체, 곧 사유 속성 아래에서 인식하거나 연장 속성 아래에서 인식하는 하나의 동일한 실체라고 말한다 ... 나는 이점(<- 정신과 신체가 하나의 동일한 것)에 반대한다. 영혼과 신체는 능동의 원리와 수동의 원리가 동일하지 않은 것처럼, 서로 동일한 것이 아니다. ... [“모든 것이 정신화되어있다는 주장과 관련하여] 정신이 관념이라고 말하는 것은 완전히 불합리한 것이다(2부 정리13에서 스피노자는 정신을 신체의 관념이라고 이야기한다) 관념들은 숫자나 도형처럼 완전히 추상적인 것이며, 행위할 수 없는 것들이다. 관념들은 추상적이고 보편적이다(<- 이것을 스피노자식을 말하면 관념들은 형상적 실재가 아니다라고 라이프니츠가 말하고 있는 것이다). ... 영혼은 결코 관념이 아니라, 관념들의 원천이다.”

 

라이프니츠 비판의 또 다른 논점은 관념과 정신, 관념과 영혼을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말하자면 영혼(정신) 안에 관념들이 담기는 것이고 영혼(정신) 안에서 관념들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 그에게 스피노자는 너무 이상한 것이다. 정신을 관념이라고 생각한다니. 정신이 어떻게 관념일수 있지?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도 담겨있다.

 

심리학 또는 심리철학의 역사를 보면, 처음에 19세기 말, 20세기 전반기까지 사람들은 인간의 정신, 인간의 심리적인 것을 굉장히 사적이고 내면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정신, 심리가 사적이고 내면적이다라는 것은, 과학의 대상이 되기 어려웠다는 말이다. 정신, 심리가 사적이고 내면적인 것으로 여겨지니까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다른 사람이 알 수 없는 일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외부에서 과학적으로 법칙화하거나 계량화하거나 평가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철학이나 심리학에서 introspection이라는 말을 한다. 내성. 자기성찰. 어떤 심리주체가 자신의 마음 안을 들여다보는 것. 이런 시기에는 내성의 방법이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한 반박으로 20세기 중반쯤 미국에서 행태주의라는 게 나오면서 심리적인 것을 어떤 외재적인 행동처럼 평가하고 측정하는 방식들이 나왔다.

 

그러니까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 두 사람이 인간의 심리, 정신에 대해 평가하는 방식을 보면, 라이프니츠는 전자의 방식, 스피노자는 후자의 방식인 것이다. 라이프니츠에게 정신, 심리적인 것은 굉장히 내밀하고 내면적이고 사적인 것. 말하자면 창문이 없는 것. 그러나 스피노자에게는 정신이라는 건 관념이고, 나중에 정리11에 가게 되면 정신은 무한지성의 일부다. 그러니까 스피노자에게서 정신이라는 건 전혀 내면적이고 사적인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열려있고 개방되어 있는 것. public한 것. 그러니 라이프니츠가 볼 때 스피노자의 생각은 참 이상했을 것이다. 스피노자를 반박한 이 글의 제목에 보편정신이라는 말이 있는데, 라이프니츠가 볼 때 스피노자 철학에는 개별적인 정신, 마음, 이런 것이 들어갈 여지가 없는 것이다. 무한지성 같은 보편적인 정신만 있지 개별화되고 내면화되고 사적인 그런 정신은 없는 것이다. 개채성.

 

어쨌든 우리가 라이프니츠 인용문에서 보듯이 라이프니츠가 parallelism을 쓰는 맥락을 보면, 이 말은 스피노자의 철학을 우호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쓴 말이 아니라 스피노자에 대한 비판의 맥락에서 스피노자 철학과 구별되는 자기 철학을 말하기 위해 쓴 용어다. 이 용어를 가지고 스피노자 철학을 해석하고 이론화하기에는 이 용어의 출발점에서부터 좀 문제가 있는 것 같다.

 

* 다시 강조하면, 물체와 실재를 구분하는 게 정리7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포인트다. 실재는 관념을 포함한 넓은 의미의 실재다. 관념들 자신도 실재의 하나다. 형상적 실재로서의 관념도 있고 표상적 실재로서의 관념도 있다. 그러니까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에서 관념이라는 말을 형상적 실재와 실재에 대한 표상, 이렇게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관념을 형상적 실재로 본다는 말은 관념을 양태로 본다는 말이다. 하나의 어떤 속성에 속해있는 양태. 그러니까 형상적 실재의 특징 중 하나는 원인이 된다는 점, 어떤 것의 원인이 되고 작용을 하고 작용을 받는. 반면에 표상적 실재라는 것은 이 형상적 실재에 대해 내가 표상을 갖는 것. 자동차에 대한 표상을 갖는다, 신호등에 대한 표상을 갖는다, 더 나아가서 이런 외부 물체뿐만 아니라 관념도 표상적 실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 평행론을 현대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평행론이 하나도 아니고, 적어도 두 개의 평행론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스피노자가 정리7, 따름정리, 주석에서 말하는 스피노자의 평행론은 하나가 아니라 두 개라는 주장인데, 표현들은 약간 다르지만 요점은 이거다. 1) 존재론적 평행론이 있고 2) 인식론적 평행론이 있다. 존재론적 평행론이란, 하나의 동일한 질서와 연관이 모든 속성에 걸쳐서 펼쳐지고, 각각의 속성에 따라서 때로는 연장속성 아래서 때로는 사유속성 아래서 표현된다는 바로 이 부분. 평행론을 주장하는 주석가들은 이걸 존재론적 평행론이라고 이야기한다. 다른 하나는 관념과 그 관념의 대상 사이의 일치를 설명하는 문제이고, 이것을 바로 인식론적 평행론이라고 본다. 스피노자의 2부 정리7에 두 가지 상이한 쟁점이 다 들어있다는 것은 일리가 있는데, 두 측면이 다 가능한 것 같다.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이 실재들의 질서와 연관과 같다고 했을 때 우리가 이 관념들을 형상적 실재로 이야기하면 존재론적 평행론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관념들을 표상적 실재로 이야기하면 표상으로서의 관념과 일치하는 대상으로서의 실재가 2부 정리 7에 들어가 있는 것.

 

2부 정리32의 증명을 보면 왜냐하면 신 안에 있는 모든 관념은 그 대상이 되는 것들과 완전히 합치하며(2부 정리7의 따름정리에 의해) 따라서 (1부 공리6에 의해) 이 관념들은 모두 참되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여기서 스피노자가 2부 정리7의 따름정리를 혼용하는 방식이 관념과 그 대상 사이의 합치다. 그러니까 표상으로서의 관념과 표상의 대상과의 일치. 그래서 이것을 두고 어떤 주석가들은 인식론적 평행론이라고 부른다.

 

* 표상적 실재로서의 관념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그 관념이다. 우리는 보통 사물에 대한 표상을 관념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런 점에서 표상적 실재라는 말은 상당히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다. 그런데 스피노자 철학의 독특성은, 우리는 관념이라는 것을 그냥 하나의 독자적인 실재, 하나의 사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스피노자는 관념이라는 것을 그 자체가 하나의 사물이라고 생각한다. 스피노자적인 의미에서 실재, 사물이라는 것은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인과작용을 할 수 있는 것, 다른 것의 원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관념a는 관념b를 낳을 수 있고 관념b는 관념c를 낳을 수 있고... 이런 게 바로 형상적 실재다. 관념을 하나의 사물처럼 생각하는 것. 이게 스피노자의 특징이다. 우리는 자동차에 대한 관념을 가질 수 있고, 달에 대한 관념을 가질 수 있고, 그러니까 모든 사물에 대해 관념을 갖는, 표상적 실재로서의 관념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스피노자 철학에서는 관념을 이렇게 표상으로만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라이프니츠가 스피노자에게 반론한 게 바로 그것이다. 정신이 어떻게 관념일 수 있는가. 스피노자는 관념을 표상으로만 생각한 게 아니라 사물처럼 생각하니까, 무언가의 원인이 될 수 있고 작용할 수 있고 작용 받을 수도 있는 사물처럼 생각하니까, 그래서 정신도 관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니까 스피노자에게 정신이나 관념이나 다 사유속성에 속하는 양태들이다. 그러나 라이프니츠는 말하자면 관념이라는 것을 표상으로만 생각하는 것이다. (“관념들은 숫자나 도형처럼 완전히 추상적인 것이며, 행위할 수 없는 것들이다. 관념들은 추상적이고 보편적이다(<- 이것을 스피노자식을 말하면 관념들은 형상적 실재가 아니다라고 라이프니츠가 말하고 있는 것이다). ... 영혼은 결코 관념이 아니라, 관념들의 원천이다.”) 반면에 스피노자는 관념을 표상적 실재로서의 관념, 형상적 실재로서의 관념으로 구별한다. , 스피노자의 철학의 독특성은 관념이라는 것을 마치 하나의 사물처럼 독자적인 원인으로서 작용할 수 있는 사물처럼 제시했다는 것, 그러니까 형상적 실재로서 제시했다는 것이다. 관념이 하나의 사물이니까 이게 당연히 표상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스피노자처럼 관념을 사물처럼 생각하면, 관념이든 정신이든 사적인 것이 아닌 게 된다. 관념이라는 것이 public한 것이 될 수 있는 것은 관념을 사물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다. 이게 3부에 가서 정서론을 이해하는 데에도 굉장히 중요하다. 우리는 보통 우리의 감정을 굉장히 사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구에 대한 나의 애틋한 사랑, 누군가의 비극에서 내가 느끼는 슬픔, 이런 건 나만이 알 수 있는, 나만의 고유한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감정을 우리 개개인의 굉장히 고유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정신이라는 것을 굉장히 사적이고 내밀한 것이라고 판단하는 생각을 반영하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정서라는 것을 그렇게 내밀하고 내면적이고 주관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굉장히 퍼블릭한 것으로 여겼다. 이게 나중에 모방의 문제로 이어진다. 모방 욕망. 뒤에 가면 자세히 나올 것이다.

 

* 들뢰즈가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에서 이런 문제를 제기한다. A속성에서는 a가 따라나오고 B속성에서는 b가 따라나오고 연장속성에서는 물체가 따라나오고, 사유속성에서는 관념이 따라 나오는데, 이런 관점에서 보면 속성들은 동등하다. 그런데 우리가 표상적 실재로서의 관념을 생각해 보면, 저기서 물체에 대한 표상으로서의 관념이 있을 테고, a에 대한 관념도 있을 테고 b에 대한 관념도 있을 테고. 게다가 또 관념 자신에 대한 관념도 또 있을 것이다. 관념1에 대한 관념2, 관념2에 대한 관념3, 관념3에 대한 관념4..... 그리고 저 관념에 대한 관념은 분명 표상적 실재로서의 관념이고, 관념이니까 다 사유속성에 속할 것이다. 게다가 관념1에 대한 관념에 대한 관념에 대한 관념에 대한.... 이런 식으로 나가다보면 연장속성에 속하는 양태보다 사유속성에 속하는 양태가 훨씬 더 많을 것이다. , 양태들에 대한 관념들이 다 있으니까 + 게다가 각각의 관념이 형상적 실재가 될 수 있다면 계속해서 관념에 대한 관념으로 배가가 될 수 있으니까 다른 속성에 비해 사유속성이 훨씬 더 커지지 않는가. 이런 문제제기.

 

스피노자는 여기에 대해 특별히 이야기하는 바가 없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었을 것 같다. 아니, 어차피 무한한데...ㅋㅋㅋㅋ 무한 곱하기 9를 하나, 무한 곱하기 30000을 하나 다 무한한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라고 생각할 수 있다ㅋㅋ 1부 정리15의 주석에 무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는데(“무한 양을 가정한 것에서부터 이런 부조리한 결론들이 나오기 때문에“), 누군가 직접 스피노자에게 저 질문을 던진다면 스피노자가 뭐라고 답할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답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이야기다. 아무튼 물체에는 이런 경우가 전혀 없지만 관념들의 경우에만 무엇에 대한 무엇에 대한 무엇에 대한..... 관념의 관념의 관념의.... 이게 생겨나니까, 다른 속성에 비해 사유속성은 뭔가 다른 점이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속성들 사이의 동등성, 평등 이런 것을 유지할 수 있는가 같은 질문을 해볼 수 있다.

 

* 데카르트는 정신과 신체의 이원론을 주장했고 데카르트 철학에서는 정신이 속해있는 질서와 신체가 속해있는 질서는 별개의 질서다. 데카르트는 철학자 이전에 과학자로서 커리어를 시작했다. 그는 수학과 물리학에서 커다란 업적을 남긴 후, 그 과학적 수학적 발견을 철학적으로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형이상학자가 된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철학에 관심이 많기는 했지만. 데카르트는 17세기의 과학혁명이라고 하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인 세계관을 배격하고 대신에 근대의 새로운 과학혁명을 이룩한 사람 중 하나다. 갈릴레이와 뉴턴의 중간 시기에 있었던 사람. 갈릴레이, 뉴턴, 데카르트들의 공통점은 자연을 수학적으로 인식하려고, 수학의 논리를 가지고- 스피노자식으로 말하면 기하학적인 방식을 가지고- 이해하려고 했던 점이다.

 

뉴턴 이전에는, 자연을 수학적으로 인식하다는 말은 자연으로부터 원인의 힘을 박탈하겠다는 말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사람이 자연에 내재해있는 걸로 생각했던 원인- 아리스토텔레스의 그 원인은 굉장히 목적론적인 원인인데- 원인으로서의 힘을 자연으로부터 박탈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연의 사물을 원이나 삼각형이나 원통 같은 도형처럼 환원했다. 데카르트에게 있어서 운동이란, 물체가 자기의 내적인 원인으로서의 힘을 가지고 움직이는 게 아니라 그저 위치 이동일뿐이다. 다른 어떤 것에 밀려서 움직이는 것. 이렇게 자연을 수학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자연은 굉장히 피동적인 세계가 된다. 어떤 내적인, 인과적인 힘이 없는. 외부에서 충격을 주는 대로 움직이는. 그게 관성의 원리 inertia (, 관성의 원리가 이렇게 이어지는구나)

 

자연을 수학적으로 해석한 결과는 자연으로부터 운동능력, 역량을 다 빼앗아간 것이었다. ? 이 시기에는 이 이라는 것을 수학적으로 표현할 방법을 몰랐다. 라이프니츠나 뉴턴 때에 와서 미분적분법을 가지고 와서 운동에너지, 힘이라는 것을 수학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되어서야 자연의 사물들이 피동성에서 벗어나서 원인으로서의 힘을 부여받게 됐다. 하지만 그 이전, 갈릴레이 데카르트까지는 자연을 수학적으로 표현하는 대가로 자연으로부터 힘을 다 박탈했다. 데카르트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데카르트의 초기 과학적이고 수학적인 작업을 가지고 이 복잡한 것처럼 보이는 자연 사물들을 환원해야할 텐데, 이걸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방법을 나름 탐구한 것이다. 그래서 데카르트의 신체가 속해있는 물리적인 세계는 완전한 피동성의 세계다. 능동성이나 자발성이 전혀 없는 세계.

 

그러면서 이런 문제가 생긴다. 인간의 신체가 물리적인 세계에 속한다고 하면, 인간으로부터 뭐가 빠져버린 거지? 요즘식으로 말하면 주체성, 자발성, 의지, 이런 것들이 빠지는 것인데, 데카르트 입장에서는 그 또한 허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데카르트의 신학적 관점에서도 그렇고, 그리고 데카르트는 인간의 제일 고유한 점이 의지라고 봤기 때문에 인간에게 뭔가 의지의 여지를 남겨줘야만 했다. 벌써 데카르트의 물리학이나 수학의 세계에서는 신체에게 그런 여지를 남겨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남아있는 것은 결국 정신. 그러니까 데카르트의 이원론은 데카르트의 학문적인 관점(학문적인 맥락)에서 보면 필연적이다. 물리학자로서 보면 신체의 질서는 완전히 수학적으로 양으로 환원된 사물들의 질서인데, 거기서 그대로 놔두면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에 의지라든가 자유가 들어갈 여지가 전혀 없어지기 때문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정신과 신체를 분리시킨다.

여기에서도 문제가 생긴다. 형이상학적으로 보면 정신과 신체가 분리가 되고, 정신이 속해있는 사유의 질서와 신체가 속해있는 연장의 질서가 완전히 다른데, 그럼 자연의 통일성, 우주의 통일성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이게 굉장히 수수께끼처럼 남는다. 또 하나, 인간학적 관점에서 보면 데카르트에 따르면 정신과 신체는 서로 상이한 질서에 속해있기 때문에 상호작용 할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날마다 일상적인 경험 속에서 우리 정신과 신체가 하나를 이루고 있는, 합일되어 있는 것을 느끼고 있다. , 데카르트의 질서에 따르면 이 두 가지는 분리되어야 마땅하고 다른 질서에 속해있어야 하는 것인데, 우리는 정신과 신체가 합쳐져 있다는 것을 일상경험에서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그걸 두고 우리는 맨날 속고 있는 것이다라고 우길 수도 없고. 그래서 데카르트는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할지에 대한 난감한 문제에 봉착한다.

 

데카르트가 1649년에 쓴 마지막 책인 <정념론>, 영혼의 정념이라는 책의 중요한 주제는 정신과 신체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데카르트 이후 서양근대철학자들, 라이프니츠, 스피노자, 말브랑슈 등이 제일 고심했던 주제도 바로 정신과 신체의 관계였다. 라이프니츠가 두 개의 시계의 세 가지 모델을 제안했을 때 첫 번째 모델은 바로 데카르트주의에 입각한 설명이었다. 두 번째가 말브랑슈고 세 번째가 자기 자신. 그러니까 심신 문제는 당시 철학자들에게 굉장히 견고한 논의주제였다. 데카르트가 정신과 신체는 다르다, 분리되어 있다라고 하는 것에 반하여 스피노자는 2부 정리7에서 정신과 신체는 같은 것이다로 출발한다.

 

정리8 ”독특한 실재들 또는 양태들의 형상적 본질들이 신의 속성들 안에 포함되어 있는(continentur) 것과 마찬가지로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들 또는 양태들에 대한 관념들은 신의 무한한 관념 속에 포함/파악되어(comprehendi) 있어야 한다.“

증명 이 정리는 앞의 정리로부터 명백하지만 앞의 주석으로부터 좀 더 명료하게 이해가 된다.

따름정리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점이 따라 나온다. 독특한 실재들이 신의 속성 안에 포함/파악되어 있는 한에서만 실존하는 동안에는, 그 실재들의 표상적 존재 또는 관념들은 신의 무한한 관념이 실존하는 한에서만 실존한다. 그리고 독특한 실재들이, 단지 신의 속성 안에 파악되어 있는 한에서가 아니라 또한 지속된다고 말할 수 있는 한에서도 실존하는 경우, 이 실재들의 관념들 역시 그것들이 지속된다고 말할 수 있게 해주는 그런 실존을 함축한다.

- comprehendi 해석하기 참 까다로운 단어다. 이해된다, 파악된다/ 포함된다 포괄된다, 이렇게 두 가지 뜻이 있어서. 스피노자가 여기서 continenturcomprehendi, 이렇게 다른 단어로 표현하고 있는데 맥락상으로 보면 이 양자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 같다. 그냥 같은 단어를 쓰지 다른 단어를 써서 차이가 있을까 고민이 계속 되지만 맥락상 비슷하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 우리가 정리7에서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과 실재들의 질서와 연관이 같다는 이야기를 했고 그게 초점이었다면, 여기서는 독특한 실재들 또는 양태들의 형상적 본질들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들 또는 양태들에 대한 관념들이 초점이 된다.

정리9로 가게 되면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독특한 실재의 관념이 초점이 된다.

정리7에서 8, 9로 가면서 조금씩 초점이 변하고 있다.

 

- 정리8을 보면 독특한 실재들 또는 양태들의 형상적 본질들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들 또는 양태들에 대한 관념들 사이에 마찬가지로라는 말이 들어갔으니 전자와 후자에 상응하는 점이 있다는 것을 유추해볼 수 있다. , 독특한 실재들 양태들의 형상적 본질들 =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들 양태들에 대한 관념들

- 2부 정의2에서 본질에 대한 정의를 살펴봤었다. 실재가 주어지면 본질도 주어지고, 그 본질이 주어지면 그 실재도 주어지고, 그 실재가 제거되면 그 본질도 제거되고 본질이 제거되면 실재도 제거되는 현행적 본질actual essence . 그리고 이 정의의 본질과 상응하는 것이 3부 정의7의 코나투스.

- 저기서 코나투스를 그냥 본질이라고 하지 않고 현행적 본질이라고 했지만, 정리8에서는 형상적 본질formal essece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부분이 스피노자 주석가들 사이에서 크게 논쟁이 되는 부분이다. 논문 쓰기 굉장히 좋은 문제ㅋㅋ actual하고 formal하고 달라? 다르다면 어떻게 다른 거지?에 대한 문제로.

 

- 본질에 대한 아주 독특한 정의다. 스피노자의 본질은 종적 본질또는 여러 개체들이 공유하는 형상으로서의 본질이 아니라 매우 개체적인 본질이다. 이를테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이성을 가진 말을 할 줄 아는 동물이다라고 정의했는데, 이것은 동물의 한 으로서 인간의 본질은 이성을 가진’ ‘말을 할 줄 아는에 있다고 보는 것. 곧 여러 동물들 가운데 오직 인간만이 이성을 가지고 있고 말을 할 줄 알며 이것이 인간이라는 종의 고유한 본질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본질 개념에 입각해서 생각하면, 인간 중 어떤 한 사람이 사망한다고 해서 으로서의 인간의 본질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반면 스피노자의 본질 개념에 따르면 실재와 그 실재의 본질은 둘 중 하나가 정립되면 다른 것도 정립되고, 하나가 없으면 다른 것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본질 개념의 구체적인 사례는 3부 정리7에 나오는 코나투스’, 정리9에 나오는 욕구내지는 욕망이다. 스피노자는 이것을 현행적 본질 essentia actualis actual essence라고 부른다.

- 2부 정리40에서 스피노자는 ‘ ’을 상상적인 관념/통념으로 규정하며 비판한다. 스피노자는 인간 전체‘ ’돌고래 전체같은 집합적 를 비판하고 이런 아리스토텔레스적 정의를 불신한다.

 

- 그러면 스피노자에게는 이런 개별화된 본질개념 말고 다른 본질 개념은 없는가. 이를테면 종적인 본질같은 것. 있다. 1부 정리8의 두 번째 주석에 나오는 형상개념. forma. 여기에 깔려있는 생각은 어떤 특정한 개인만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부르는 전체가 forma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 이 말은 forma라는 것이 우리가 방금 정의2에서 본 것처럼 개체화된 본질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공유하는, 종적인 성질의 개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forma 개념에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종적인 본질 개념이 녹아들어있는 것. (이 주석에서 이런 질문을 가질 수 있다. ”정서를 갖는다라는 성질은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도 갖고 있는데 이건 다른 종끼리 forma를 공유하는 것 아닌가. 아니다. 인간도 정서를 갖고 동물도 정서를 갖지만 이것 역시 forma가 다른 것이다. 인간과 고양이는 forma가 다르니까 인간이 갖는 정서 forma와 고양이가 갖는 정서 forma는 다른 것이다)

 

- 한 가지 예를 더 들면 4부 서문. ”변형된다“ mutetio mutation. 여기서 스피노자가 변형된다는 말을 어떻게 쓰냐면, 말의 고유한 form이 있는데 이게 벌레의 고유한 form으로 바뀌게 되면 말의 고유한 form이 해체되니까 파괴된다는 이야기. 그러니까 하나의 form이 다른 form으로 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 , 스피노자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이 종적인 형상, 종적인 본질을 완전히 거부하지는 않았다. 이것을 받아들이고 있는데 이 본질 개념을 가지고서는 개별적인 본질, 개체적인 본질을 설명하기 적절하지 않으니까 2부 정의2에서는 바로 개체화된 본질을 정의로 제시하고 있다,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 그러나 들뢰즈 같은 경우는 약간 다른 이야기를 한다. ”짐 끄는 말하고 경주용 말 사이의 차이가 짐 끄는 말과 짐 끄는 소의 차이보다 더 크다그러니까 들뢰즈는 form의 차이보다 무슨 일을 하느냐-들뢰즈는 이것을 affect의 차이라고 하는데-의 차이가 종적인 형상의 차이보다 더 크고 중요하다, 말과 소라는 form의 차이보다 어떤 기능을 하고 어떤 affect를 갖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이것은 스피노자 생각과 가깝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간 이야기다. 스피노자는 그렇게까지는 확실히 이야기 하지 않았다.

 

이것은 1부 정리17의 주석에 나오는 본질과도 또 다르다.

 

<<<<<<<<<<<<<<<<< *** 현행적 본질 VS 영원진리로서의 본질

 

- 그런데 이것이 나중에 가면 재미있는 논의로 이어지면서 어떤 문제가 제기가 된다. 한번 2부의 정의2로 가보자. 2부의 정의2는 실재의 본질이라는 것은 무엇인지, 본질개념을 정의해놓은 것이다. 나는 어떤 실재의 본질에는, 그것이 주어지면 그 실재가 필연적으로 정립되고, 그것이 제거되면 실재도 필연적으로 제거되는 것이 속한다고, 또는 그것이 없이는 실재가, 역으로 실재가 없으면 그것이 존재할 수도 인식될 수도 없는 것이 속한다고 말한다.

- 그러니까 여기에 따르면 A라는 사물이 있고 A라는 사물의 본질이 있다. 그러면 이 A라는 사물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것이 성립하면 A도 성립, 이것이 사라지면 A도 사라지는. 반대로 A가 성립하면 A의 본질도 성립하고 A가 사라지면 A의 본질도 사라지는. 이게 바로 사물의 본질이다.

- 그런데 이 정의2에 나오는 이 본질개념의 아주 독특한 특징은, 이 본질은 굉장히 개체화된 본질이다. A라는 개체, A라는 사물과 뗄레야 뗄 수 없게 긴밀하게 연결된 본질. 이게 정의2에 나오는 본질이다.

- 그런데 우리가 1부 정리17의 주석에서 사람의 본질 이야기를 했는데 다시 정리해보자. A라는 사람이 생겨나서 살다가 사라졌다. 2부 정의2에 따르면 이 A라는 사람의 본질은 사라져야 한다. 하지만 1부 정리17의 주석에 따르면 A라는 사람의 본질은 남아있어야 한다. 영원본질이니까. 그런데 2부 정의2를 따르면 A라는 사람이 성립하면 A의 본질이 성립하고 A라는 사람이 사라지면 A의 본질도 사라진다. 그러니까 상호관계가 성립. 그러나 1부 정리17의 주석에서는 이러한 상호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 그리고 아까 1부 정리17의 주석에 삼각형의 본질 이야기도 나온다. 삼각형A의 본질이라고 안 하고 삼각형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이때의 본질은 보편적인 본질, 류적인 본질, 종적인 본질이다. 어떤 특정한 개체와 긴밀하게 연결이 되어있는. 삼각형의 본질은 삼각형A 하나가 없어져도 남아있다. 사람의 본질도 사람 하나가 없어져도 남아있다. 그런데 2부 정의2에 나오는 것은 A가 사라지면 이 본질도 당연히 사라진다. 뭐지?????

 

- 3부 정리7로 가보자. “각각의(each) 실재가 자신의 존재 안에서 존속하려고 하는 노력(conatus)은 실재의 현행적 본질(actual essence) 자체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스피노자가 여기서 코타투스를 현행적 본질이라고 말한다. 이 현행적 본질이 바로 2부 정의2에서 내리는 이 본질이다. 이것은 그 사물이 성립하면 이 사물의 코나투스도 성립하고 이 사물의 코나투스가 성립하면 이 사물도 존립하고, 이 사물의 코나투스가 없어지면 이 사물도 없어지고. 그러니까 이 사물과 이 사물의 본질 사이에는 상호성, 상호전제관계가 성립한다. 이걸 스피노자가 actual essence라고 부른다.

- 그러니까 2부 정의2는 사실은 3부 정리7의 코나투스를 염두해두고 제시된 정의다.

 

- 그럼 1부 정리17의 주석에 나오는 이 본질은 현행적 본질인가? 아니다. 스피노자는 이것을 영원진리로서의 본질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럼 영원진리로서의 본질과 현행적 본질은 무슨 차이가 있을까, 이런 질문들이 제기될 수 있다. 이 답은 나중에 5부에 나온다. 그것도 아주 첨예한 문제로 나온다. 왜냐하면 그 전까지는 사람과 관련해서 영원성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안 하는데, 지금 영원한 것은 다 신, 속성 이런 것들인데, 5부에서는 인간 같은 유한한 것과 관련해서 영원성을 이야기한다. (1부 정리17의 주석에 나오는 본질: 영원진리로서의 본질 VS 2부 정리2에 나오는 본질: 현행적 본질) >>>>>>>>>>>>>>>>>>>>>>>>>>>>>>>>>>

 

- 여기서 1부 정리13의 따름정리를 다시 보자. 이 정리에서 신이 물체라면, 신도 분할될 것 아니냐, 물체는 분할되니까라는 적수들의 반론에 스피노자는 이렇게 대답한다. 물체의 분할은 실체로서의 분할이 아니라 양태로서의 분할이다. 모든 물체가 분할하는 것은 아니다. 양태적으로 구별되는 것들로 물체를 이해할 때만 물체는 분할된다. 하지만 연장속성, 물질전체로서, 실체로서의 물체는 분할되지 않는다 (다시 들어도 딱 떨어지는 멋진 반박이다)

 

- 스피노자의 현행적 본질과 형상적 본질이라고 하는 것은 완전히 일치한다고 보기 어려운 점이 있다. 여기서 스피노자가 독특한 실재들 또는 양태들의 형상적 본질들이라고 한 것이 무엇인지 삼각형의 예를 들어보자. 삼각형을 독특한 실재의 사례라고 본다면, 삼각형의 형상적 본질이 있을 것이고, “내각의 합이 두 직각과 같다가 바로 형상적 본질이다. 그러니까 스피노자에 따르면 독특한 실재들 또는 양태들의 형상적 본질들은 신의 속성들 안에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이 형상적 본질에서 특성들이 따라 나온다. , 삼각형이 갖고 있는 여러 가지 성질들이 따라 나온다. 그것들 역시 신의 속성들 안에 포함되어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 정리7과 정리7의 주석에서 관념이라고 하는 것은 형상적 실재로서의 관념이지만 표상적 실재로서의 관념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고 말했다. 원과 원의 관념은 사유속성에 따라서 표현되기도 하고 연장속성에 따라서 표현되기도 하고 자연 안에 실존하는 원과 실존하는 원의 관념은 하나의 동일한 것으로 상이한 속성들에 의해 설명된다스피노자는 정리8에서 독특한 실재들 또는 양태들의 형상적 본질들이 신의 속성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는데 정리7의 논법대로 하면 이것들은 실재들의 질서와 연관이라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이것이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들 또는 양태들에 대한 관념들은 신의 무한한 관념 속에 포괄되어(comprehendi)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이것이 바로 관념들, 이때 관념들은 표상적 실재로서의 관념들이라는 말로도 이해될 수 있다. 그것이 실재들의 질서와 연관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 그렇다면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들에는 뭐가 있을까. 우리는 2부 공리1에서 신/실체는 본질적으로 실존을 함축한다고 했지만, ”인간의 본질은 필연적 실존을 함축하지 않는다. 곧 자연의 질서에 따라 이 인간이나 저 인간이 실존하거나 실존하지 않는 일이 똑같이 일어날 수 있다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기원인과 다르게 인간은 본질상 실존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본질과 실존 사이의 존재론적 괴리가 인간을 포함한 유한한 것들의 특징이다.

-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들의 사례로 생각되기 쉬운, 이를테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 아직 출시되지 않은 아이폰 13 같은 것들은 정리9에 나오는 사례들이다. 정리8의 따름정리를 보면 명확해지는데, 따름정리에서 두 가지를 구별하고 있다. 1) 신의 속성 안에 포함/파악되어 있는 한에서만(이게 정리8에서 이야기하는 것), 2) 지속된다고 말할 수 있는 한에서만 실존하는 것. 이때 지속이라는 것은 우리식으로 좀 더 풀어서 말한다면, 시공간적인 어떤 개채성을 갖고 있는 어떤 것이다. 아이폰13이라든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는 아직 실존하고 있지 않지만, 스피노자적인 의미에서 보면 지속의 차원에 속하는 것이다. 그것들 모두 아직 존재하지 않지만, 우리가 그게 어떤 것인지 정확히 예측할 수 없지만, 그게 시공간적인 개체 형태를 갖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것들은 정리8에서 이야기하는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와는 다른 것이다.

- 지속 개념은 3부의 코나투스와 관련해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2부 정의2와 연관 지어 보면 실존하는 사물이 있어야 코나투스가 존재하고 실존하는 사물이 없으면 코나투스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코나투스는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다. 사물이 존재할 때만 함께 존재하는 현행적 본질이다. 3부 정리8을 보면 각각의 실재가 자신의 존재 안에서 존속하려고 하는 노력은 유한한 시간이 아니라 무한정한 시간을 함축한다라고 하는데, 코나투스의 시간은 무한정하다= 그 사물의 시간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 = 그럼 코나투스의 시간은 지속이다= 하지만 영원은 아니다

- 그러니까 지속이라는 것은 정의상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정확히 말하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이게 그냥 쭉 계속 될 수도 있는데 그렇다고 무한하지는 않고, 또 영원하지도 않은. 그래서 무한한이라고 하지 않고 무한정한이라고 한 것이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을 수 있지만 무한하다, 영원하다라고 얘기할 수 없는 실존의 차원을 스피노자는 지속이라고 한다.

 

-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란 가령 인간의 예를 들어 설명하면, 인간은 본질을 갖고 있고 여러 가지 특성들, 웃을 수 있다/직립할 수 있다 같은 득성들을 갖고 있다. 그럼 여기서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란 직립할 수 있는 성질만 갖고 있는 인간, 웃을 수 있는 특성만 갖고 있는 인간, 말할 수 있는 특성만 갖고 있는 인간,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오는데 앉아있다는 특성만 갖고 있는 소크라테스같은 그런 것. 이런 것들이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이다. 이것들은 지속을 갖고 있는 것들이 아니다. 이런 것들은 있을 수 없다. 다른 건 아무 것도 없고 말할 수 있는 특성만 갖고 있는 인간같은 것. 그렇다고 이게 아주 없다고 말할 수도 없다. “말할 수 있는 특성은 인간이라는 동물이 갖고 있는 특성이니까. 그러니까 한 가지 특성으로만 파악된 독특한 실재, 이것이 여기서 말하는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이다.

 

- 그렇다면 신의 무한한 관념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의 의미는, 직립하는 성질만 갖고 있는 인간, 웃을 수 있는 성질만 갖고 있는 인간, 이것들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고, 또한 우리가 실존하는 개체로서 개별적으로 표상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니까 오직 무한지성 안에만 있다는 그런 의미다.

- 스피노자가 정리8에서 이런 사례들을 든 이유는 그래야 정리8과 정리9의 차이가 확연히 느껴질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정리8지속의 차원에 속하는 어떤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구체적인 개체라고 상정할 수 있는 어떤 실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정리8과 정리9는 구별되어야 하고, 정리8에서 스피노자가 말하는 실존하지 않는 현행적 실재라는 것은 아직 지속의 차원이 들어가지 않은, 구체적인 개체성을 갖지 않는 그런 독특한 실재다. 실존한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허구라고 말할 수도 없는 그런 것.

- 스피노자의 주석을 보면 그림 하나를 제시하고 있다. 스피노자가 예시하는 이 원은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론>3권 정리35에 증명의 대상으로 나오는 도형이다. 수직으로 교차하는 선을 가진 원. 스피노자는 여기서는 이렇게 두 개의 선만 존재하지만 이 원 안에는 무수히 많은 다른 선 또는 직사각형이 있을 수 있다, 그게 실존하지 않는 어떤 독특한 실재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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