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6강은 형상적 본질의 의미를 찾아가는 작은 보물찾기 같은 시간이었다. 5부 정리2122와 연결해서 2부 정리8과 따름정리에 묻어있는 플라톤의 표식을 찾아내었지만, 바로 플라톤으로 향하지 않고 다른 길을 찾아가다가 라이프니츠를 다시 만나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독특한 실재가 실존하지 않는 이유를 찾기고 마음먹고 그래서 손에 쥐게 된 이미 먹어버린 아이스크림 속에서 마침내 형상적 본질의 의미를 찾아낸, 복잡하지만 근사하게 짜여진 보물찾기였다. 선생님을 비롯한 과거의 여러 탐사대들이 지도를 읽어내는 대로 그저 따라갔을 뿐이지만. 플라톤주의로 가버리거나 보물찾기를 주최한 스피노자의 일관성을 의심하지 않고 끈질기게 지도를 붙잡고 아주 작은 것들까지 실마리가 될 만한 것들을 모아 다른 방향을 찾아 걸어가며 스피노자 철학에 잘 맞는 길을 낸 누군가들의 학자적인 집념과 태도에 대해 걷는 내내 깊이 생각했다.

 

스피노자가 본질에 대해 분명하게 두 가지로 나눈 것처럼 보이는 흔적들을 앞에 두고 두 개념이 사실은 하나일 수도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에 대해 들었을 때,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주장하려면 몇 가지 중요한 측면을 해명해야만 한다는 것을 들었을 때 그게 어떻게 가능할지 전혀 감도 오지 않았다. 그런데 2부 정리4를 가지고 평범해 보이는 문장 뒤에 숨겨진 물음표들을 끄집어 올리셨듯이, 1부 정리8 주석2의 한 대목, “이 때문에 우리는 실존하지 않는 변양들에 대한 참된 관념을 가질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이 지성 바깥에서 현행적으로 실존하지 않는다 해도 그것들의 본질은 다른 것 안에 포함되어 있어서 이 다른 것을 통해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에서 이미 답이 자명해 보여 그냥 자기가 할 소임을 다하고 제자리에 놓여져 있는 것 같던 다른 것이 사실 우리가 찾고 있는 그것일 수도 있다는 걸 시사하셨을 때 미미하게 소름이 돋았다. 2부 정리4때도 느낀 거지만 난 이런 방식으로 평범한 문장이 실마리로 바뀌는 논증의 과정에 약간 열광하는 것 같다(“이 다른 것이 실체, 또는 물체의 경우라면 연장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그건 너무 자명한 만큼 우리에게 해주는 이야기가 거의 없으니까, 우리는 약간 더 구체화시켜 명시할 필요가 있다라는 말이 되게 좋았다). 애드거 앨런 포의 도둑맞은 편지 같은 다른 것’.

 

그리고 이미 먹어버린 아이스크림(멋진 예시였다!)과 함께 형상적 본질과 현행적 본질이, 그렇게 틀림없이 다르게 보였던 두 개의 본질이 하나로 이어졌다! 이 순간 정말 마음속으로 박수칠 수밖에 없었다. 하나의 본질 개념이 다른 식으로 표현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여지. 그리고 지금은 현행적 본질이 존재하지 않지만 내가 형상적 본질을 갖고 있는 한, 적합한 관념에 따라 언제든지 현행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 형상적 본질이 갖고 있는 의미가 내 삶과도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느낌이었다. 내가 형상적 본질을 갖고 있는 한, 현행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말이 내가 찾은 보물이었다. 명백해 보이는 플라톤주의로 가지 않은 탐사대들의 노력의 흔적을 따라 풀숲을 헤치고 스피노자적인 길을 찾았던 이날의 여정 끝에서 기다리고 있던.

 

2. 조금 다른 길이지만 이런 식의 길도 좋았다.

 

- 이런 식의 이야기를 해볼 수도 있다. 2부 정리8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들 또는 양태들에 대한 관념들은 신의 무한한 관념 속에 포괄되어/파악되어 있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뜻하려는 것은, 신의 무한한 관념 속에 포괄/파악되어 있는 이 관념들에 상응하는 (왜냐하면 이 관념들은 참된 또는 적합한 관념, 곧 그것에 상응하는 관념 대상을 가질 수 있는 관념들이기 때문이다) 실재들의 형상적 본질들이 신의 속성 안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 따라서 1부 정리17의 주석에서 스피노자의 반대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달리, 형상적 본질들이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은 그것들이 신의 지성 안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들이 신의 속성 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의 지성 안에 있는 것은 형상적 본질이 아니라 표상적 존재이며, 신의 속성 안에 존재하는 것이 형상적 본질

- 또한 스피노자가 2부 정리8의 증명에서 언급하는 앞의 정리는 사실 정리7의 따름정리라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신의 무한한 본성으로부터 형상적으로 따라 나오는 모든 것은 동일한 질서, 동일한 연관에 따라 신 안에 있는 관념으로부터 표상적으로 따라 나온다.” 2부 정리7의 따름정리가 말하는 것은 신의 지성 안에 존재하는 표상적 존재 또는 관념에 상응하는 형상적 본질이 신의 속성 안에 존재한다는 것.

- 따라서 스피노자가 2부 정리6의 따름정리, 2부 정리8, 2부 정리8의 따름정리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형상적 본질= 현실적 실재표상적 존재= 관념구별이다. 실재= 관념의 관계. 렇다면 스피노자가 형상적 본질이라고 말하는 것은 현행적 본질과 구별되는 또 다른 본질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3. 그동안 <에티카>에서 여러 번 봐왔던 스피노자의 플라톤주의 비판의 토대 위에서 <데카르트의 철학원리>에 부록으로 덧붙여진 <형이상학적 사유> 12장을 읽으니 플라톤주의와 스피노자 철학의 거리가 매우 명료하게 머릿속에서 정리되었다. “형상적 본질은 그 자신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창조된 것도 아니다라는 문장에서 그 자신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이 플라톤적인 이데아, 영원진리를 가리킨다는 것이 명확해지고 나니 1부 정리17의 주석과 연결되어 그동안의 스피노자의 비판들이 머릿속 서랍 하나에 깔끔히 정리되는 느낌(저런 집약적인 한 문장을 만나게 되면 수사법적으로도 감탄할 수밖에 없다)

 

형상적 본질은 그 자신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창조된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 양자는 실재가 현행적으로 실존함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형상적 본질은 신적 본질에만 의존하는데, 모든 실재는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실재들의 본질들이 영원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동의한다

- ”그 자신에 의해서 존재한다는 것은 바로 플라톤적인 이데아를 가리킨다. 이것은 신이 창조하는 것도 아니고, 신의 창조와 독립해서 그 자체로 영원히 존재하는, 17세기 철학에서 영원진리라고 부르는 것이다. 반면 창조된 것이라는 것은 영원성을 지니지 않은 지속의 차원의 존재라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형상적 본질은이 양자와 다르다고 주장. 왜냐하면 형상적 본질은 신적 본질에만 의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에티카> 1부 정리25에 보면 신적 본질에만 의존한다는 뜻에 대해 스피노자는 정확히 이렇게 말하다. 신은 실재들의 실존의 작용인일 뿐만 아니라 그것들의 본질의 작용인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본질이라는 것은 신이라는 원인과 무관하게 이미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신이 생산하는 것이다. 사물들의 실존뿐만 아니라 본질까지도 신에 의해 생산되는 것이다.

 

4. 피에르 벨이 스피노자를 두고 한 말, 텍스트로 하는 피에르 벨의 스피노자 성대모사ㅋㅋ를 듣고 크게 웃었다. 나도 가끔 봉이에게 말장난처럼 스피노자적 용어를 끌어다가 장난치기도 하고이를테면 어제도 퇴근하고 나니 피곤해서 죽을 것 같다는 말을 오늘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독특한 실재가 양태로서 소멸할 것만 같아라고 했더니 너는 나의 실체니까 본질적으로 실존을 포함하고 있어, 걱정하지 마라고 답을 했다ㅋㅋ- 넌센스 퀴즈처럼 문제를 내기도 하는데- ”신 안에는 어떤 관념의 독특한 대상에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한 인식이 존재하는데, 이는 오직 신이 이 동일한 대상의 관념을 갖고 있는 한에서 그렇다가 무슨 뜻인 줄 알아?“ ”뭔데?“ ”인간 정신은 자기 몸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대한 인식을 갖고 있다“ ”그게 뭐야!(동공지진ㅋㅋ)“- 위대한 학자가 위대한 비평서에서 저 비슷한 방식으로 스피노자에 대해 비평했다니 어쩐지 반갑고ㅋㅋ 이유가 있는 스피노자의 저런 화법에 이제 익숙해졌는데 스피노자와 주디스 버틀러가 대화하는 거 너무 보고 싶다. 정말 외계어로 이루어지는 대화를 보는 느낌일 것 같아ㅋㅋ

 

- 이쯤에서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냥 인간 정신이라고 하지, 왜 굳이 간주된 한에서의 신” “변용된 한에서의 신신이 다 알고 있다, 그런 이야기를 왜 하는가ㅋㅋㅋ 그냥 인간 정신은 자기 신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대한 인식을 갖고 있다라고 이야기하면 되는데 대체 왜 신 안에는 어떤 관념의 독특한 대상에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한 인식이 존재하는데, 이는 오직 신이 이 동일한 대상의 관념을 갖고 있는 한에서 그렇다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건가ㅋㅋ

- 스피노자보다 약간 뒤에 나온 계몽시대 굉장히 중요한 철학자 중 하나인 프랑스의 피에르 벨 Pierre Bayle의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가 <Historical and Critical Dictionary>라는 사전을 만든 것이다. 이 사전은 과거 사상가들에 대한 비평을 담은, 말 그대로 히스토리컬하고 크리티컬한 사전이다. 그 사전에서 피에르 벨은 스피노자에 관한 해설과 비평도 썼는데, 거기서 벨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스피노자 철학체계에서 가령 독일군대 만 명과 투르크군대 만 명이 싸운다면 스피노자는 독일군 만 명으로 변용된 신과 투르크군 만 명으로 변용된 신이 서로 싸웠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니까 신과 신이 서로 싸웠다. 이게 얼마나 웃긴 이야기냐, 이런 표현이 나온다.

 

5. 하지만 스피노자의 화법은 난해하기만 한 게 아니라 시적이기도 하다. 사실 난해해 보이는 저런 표현도 가만가만 따져보면 매우 시적이다(그러니까 스피노자의 난해한 표현과 시적 표현은 두 개의 다른 개념처럼 보이지만 한 개념을 두 가지 상이한 측면으로 보는 것이다ㅋㅋㅋ). 이런 표현 좀 봐. 인간은 다른 자연 사물들을 뛰어넘는 특별한 존재자가 아니라 여느 자연 사물들과 동일한 지위를 가진 하나의 양태일 뿐이라는 말을 인간은 국가 속의 국가가 아니다라고 하다니 너무 좋잖아ㅠㅠㅠ 1부 공리1와 정리10을 연결해서 깔끔하게 나온 답은 인간은 국가 속의 국가가 아니라는 점. 게다가 인간은 자신을 압도하는 자연의 역량에 둘러싸인 수동적인 존재라는 점이 스피노자 윤리학의 출발점이라는 것도 너무 좋다. 

 

- 정리10과 증명, 주석으로부터 따름정리는 인간의 본질은 신의 속성들의 일정한 변양들에 의해 구성된다는 명제를 도출해낸다. 이 명제는 인간이 다른 자연 사물들을 뛰어넘는 특별한 존재자가 아니라(3부 서문의 표현을 빌면 국가 속의 국가가 아니라는 것) 여느 자연 사물들과 동일한 지위의 한 사물 내지 실재라는, 곧 따름정리의 증명에서 말하듯이, 신이 없이는 존재할 수도 인식될 수도 없는 것이며, 신의 본성을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표현하는 변용 또는 양태라는 것을 확립하고 있다.

- 인간이 이처럼 제한된 존재라는 것, 인간은 실체가 아니고 다른 자연 사물들에 비해 특별한 존재가 아니며 여느 변용 내지 양태들 중 하나라는 것, 따라서 인간은 자신을 압도하는 자연의 역량에 둘러싸인 수동적인 존재라는 것(4부 공리)이 스피노자의 인간학과 윤리학의 근본적인 출발점이다.

- 4부 공리는 4부에 딱 하나 있는 공리다. 자연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기를 압도하는 자기보다 강한 것에 둘러싸여 살아 간다 -> 이런 의미에서 유한한 존재. 정치학적으로 말하면 자연 상태무한하게 많은 타자에게 둘러싸여 실존하는. 인간이 실체라면 그럴 리가 없다. “국가 속의 국가에서 앞의 국가는 자연을 뜻하고 뒤의 국가는 인간을 뜻한다. 인간은 자연이라는 체계의 한 부분이지 별도로 왕국을 갖고 있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다.

6. 사람들의 경험과 지각은 부정확할 수밖에 없기에 내가 어떤 상황에 대해, 사물에 대해, 사람에 대해 판단을 내릴 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짐작이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팩트인지 정확하게 구별해보는 것이 그나마 오류를 가장 줄일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이런 구별을 미리 해놓지 않으면, 편견이 반영된 짐작으로 만들어진 허구위에 허구들이 쌓이면서 최초의 허구에 나의 주관적 심상에 불과한 짐작과 객관적 사실이 어느 정도 비율로 섞여있는지를 찾아보기 점점 힘들어지고, 그러다보면 그것을 팩트로 믿게 되고(“내 판단이 틀릴리는 없어”), 그 허구들이 어떤 사고의 틀로 굳어져버리면서 틀로 찍어낸 듯한 판단들만 계속하게 되어 진리에서 점점 더 멀어지는 것 같다. 특히 내가 싫어하는 것,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것, 믿으면 동요할 게 분명한 것들 앞에서 그렇게 되기 쉽다는 것을 경험적으로알기에, 가끔 매우 괴로워하면서도(싫은 걸 떠올리다못해 면밀히 들여다봐야하니까) 노트에 짐작과 팩트를 나누어서 정리를 해보곤 하는데, 그러다보면 내 두뇌와 마음이 그 대상을 나쁜 쪽으로, 내가 받아들이고 싶은 쪽으로 판단하려고 얼마나 노력들을 하고 있는지를 느끼게 된다.

 

이미 내 마음속에 호불호가 생겨버린 것에 대해 그 호불호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생각이 흐르는 것은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기 때문에 이렇게 굳이 노력을 들이고 괴로움을 무릅쓰고 흐름을 멈추지 않는다면 그렇게 계속 멋대로 흘러가버릴 게 분명하다. 많은 경우에 판단에 대해 짐작과 팩트로 엄정하게 나누어서 쓴 다음, 짐작- 내 생각에 아무리 예리하게 들어맞는 짐작인 것 같더라도!-을 다 날려버리고 팩트만 남기고 나면 싫어할 이유가 없잖아? 받아들일 만한 여지가 많잖아? 같은 반문이 생겨나면서 판단의 경계가 흐릿해질 때가 있는데 그러면 불필요한 감정들이 다 사라진다. 단언할 수 없고 단언해서는 안 되는 감정들. 감정의 노예가 되어 감정에 맞춰 감각하고 경험하고 판단하다보면 이성의 일부분이 마비되며 감정이 좋아할 만한 정보들만 모으고 모아서 감정에게 갖다 바치게 되는데 이건 정말 무서운 일이다. 신인동형론이나 별자리 같은 점성학 같은 것들 다 이렇게 체계화되고 일부분 과학의 형식까지 흉내내며 자리잡았을 테지.

 

그냥 정리10의 주석에서 자신의 (부분적이며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감각대상으로부터 들어오는 정보들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것으로 세상의 많은 것들을 허구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에 대한 대목을 읽다가 반성이 되어서. 사고의 순서를 그렇게 거꾸로 해놓으면 어느 것이 올바른 관점인지 확실하고 일관되게 정하지 못하며, 자기모순들이 생겨나는 것 같다. “인간은 누구나 모순적인 존재다라는 말을 그러니까 나의 모순도 사랑하고 안고 가야지라고 너무 쉽게 자기위안으로 삼지 않고 왜 모순적인가를 계속 들여다보고 고민하며 사고의 순서를 조정할 줄 아는 사람들을 존경하고 사랑한다.

 

<에티카>의 형식이 철학함의 순서그 자체라는 사실이 묘하게 마음을 다시 울렸다. 내용과 별개로 기하학이라는 이 책의 방식과 신에서 출발하는 이 책의 순서, 그러니까 형식에서부터 이미 우리가 나아가야할 바를 명확하고 단호하게 담고 있는 책이라는 것. 신에서 출발해서 실체와 속성을 지나 양태가 나오고 2부 정리10에 와서야 인간이 나온다는 것 자체가 이미 우리게에 주는 메시지. 이 책을 읽으면서 알게 모르게 바뀌어가고 있을 보이지 않는 무언가.

 

과학적 지식의 누적이 진리를 인식하는 것과 별개라는 점을 짚어주신 것도 좋았다. 양자역학자 중에도 기독교 신자 있고 천문학자 중에도 별점 믿는 사람 있으니까ㅋㅋㅋ 과학책을 많이 읽는 것만으로 한 인간의 미신에 대한 신뢰에는 요만큼의 균열도 내지 못하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몸이 이것을 믿고 싶다‘ ’이것이 좋다‘ ’이것이 위안이 되고 편하다같은 감정에 맞춰 조율되어 있다 보면 이성도 감정이 좋아할 만한 정보들만 모으고 모아서 감정에게 갖다 바치며 최선을 다해 복무하기 때문에 과학적 지식이 누적이 된다고 한들 감정에 조율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그 지식들은 한쪽에 정보로서 힘없이 쌓여있을 뿐 모순의 괴리를 좁히는 데에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할 테니까. 



* 철학함의 순서 ordo

- <에티카>의 부제는 기하학적 순서ordine에 따라 증명된이다. 그러니까 이 순서라는 말은 매우 중요한 말이다.

- ”신이 인식에 있어서도 본성에 있어서도 앞선다만물의 제1원인. 신이야말로 존재론적/물리적/인식론적 원인이다. 신을 알아야 거기서 양태도 나오고, 양태가 어떤 질서를 이루는지도 알게 된다. 바로 <에티카>신에 대하여에서 출발하고, 2부 순서도 따져보면 실체와 속성에서 시작하고, 그 다음부터 정리8, 정리9에서 양태가 나오고, 정리10에 와서야 인간이 나온다. 즉 신에서부터 인간까지의 순서대로 도출된다.

- 감각 대상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다른 모든 것에 앞선다고 믿었기 때문이다의 문제는 우리의 감각적 인식이 부적합하고 아주 부분적이며 혼동된 인식이라는 점이다. 우리의 감각적 지각이 정확하다면 문제가 없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다. 이런 인식은 모든 걸 다 뒤섞어 버린다. 1부 부록에서 나온 목적록적 편견, 신인동형론처럼, 자연적 실재들은 곧 사라지는 유한한 것인데 불변하는 실체로 착각하는 것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양태에 불과한 것을 실체로 여기고 오히려 신을 인식할 때 자연사물을 통해 인식하는 잘못된 방식이다.

 

- 그러니까 스피노자가 말하는 철학하는 순서는 사실 논리적인 순서다. 신에 대해 일단 안 다음에, 그걸 바탕으로 세계의 체계를 세우는 것. 발견의 순서는 감각-> 신이지만 철학하는 순서는 다르다. 신이 만물의 원인이구나-> 그럼 그 원인에서 따라 나오는 본질은 뭘까, 이런 순서로 시작해야 한다.

- 이렇게도 이야기할 수 있다. 스피노자가 여기서 말하는 철학함의 순서와 발견의 순서는 다르다. 때문에 우리가 신의 본질, 신의 속성, 특성을 발견하게 되기까지는 상당히 많은 시간이 걸릴 수 있다. 우리가 신을 발견해서 신이 만물의 제1원이구나 -> 그럼 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은 뭘까 -> 그럼 신의 본질로부터 따라 나오는 것은 뭘까, 이것들을 논리적인 순서로 전개하는 것이 스피노자가 말하는 철학함의 순서다. 지금 하고 있는 것, 우리가 <에티카>를 읽는 것이 어떻게 보면 발견의 과정일 수 있다. 스피노자 자신은 철학함의 순서대로 에티카를 썼지만 우리는 스피노자처럼 발견의 과정을 아직 거치지 않았으니까.

 

스피노자는 오랫동안 히브리 공동체에서 유대인들이 받는 토라 같은 교육을 받았고 듣고 말하면서 세상물정을 알게 되고 친구들을 만나면서 철학이나 과학을 배우게 됐고, 자기가 배우던 히브리 유대교 전통과 단절하고 자기의 철학을 시작하게 된다. 스피노자 자신도 역시 발견의 과정을 거친 것이다. 발견의 과정을 거쳐서 자신이 이 세상의 참된 원리라고 이해하고 그것을 자신이 발견했다고 믿는 것들을 어떻게 철학적으로 순서 있게 구성할 수 있을까, 그것을 고민해서 쓴 책이 <에티카>. <에티카>라는 것이 결국 스피노자가 이야기하는 철학함의 순서인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 세상의 원리가 무엇인지 스피노자를 읽으면서 나름대로 각자 발견해가는 과정에 있다.



7. ”사람이 끌어안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나무를 enterndre 할 수는 있지만 comrehendre 할 수는 없다

  

데카르트에게 인간은 (유한해서) 신을 알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그에 따르면 알긴 알되 두 개의 단어로만 안다. entendre comprendre. 데카르트는 저 두 단어를 구별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사람이 끌어안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를 entendre 할 수는 있겠지만, comprendre 할 수는 없다고. 그러니까 후자는 거대한 나무를 완전히 끌어안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신의 본질을 완전히 다 파악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8.아 ... 이 정리가 영혼불멸론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지는구나... 아름답다...

 

정리13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의 대상은 신체 또는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연장의 어떤 양태이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자연전체로부터 인간을 돌출해내는 마지막 정리이다.

- 스피노자는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의 대상은 신체 또는 물체(‘신체물체는 똑같이 corpus), 다시 말하면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연장의 어떤 양태라고 주장한다. 만약 신체 또는 연장의 어떤 양태가 현행적으로 실존하지 않는다면, 관념 역시 실존하지 않게 될 것이다(2부 정리11의 증명). 그러니까 정신의 대상을 이루는 것은 잠재적으로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신체다.

- 이것은 나중에 5부에 가면 신학적인 문제와 연결된다. 4부에서 정신과 신체는 어떤 관계인가, 신체가 사라져도 우리의 영혼은 불멸하는가라는 문제를 던지고 스피노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리고 나중에 5부에 가서 영혼불멸에 대해 비판한다. 스피노자가 유대인 공동체에서 쫓겨날 때에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던 바로 그 영혼불멸론에 대한 부정. 창조론과 영혼불멸론은 유대 기독교 교리의 핵심이니까. <에티카>에서도 스피노자는 신체와 분리된 영혼, 그런 것은 없다고 말한다.

- 흥미로운 것은 스피노자는 5부에서 영혼불멸론을 부정하는 동시에 정신에는 영원한 부분이 있다고 말한다. 정신에는 영원한 부분이 있다. 영혼은 불멸하지 않는데 정신에는 영원한 부분이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정신의 영원성과 영혼의 불멸성의 차이가 뭘까. 그런 질문이 많이 제기가 된다.

 

8. 들뢰즈의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와 바슐라르의 책이 매우 읽고 싶어졌다. 번역 괜찮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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