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6일 근처는 어쩔 수 없이 힘들다. 오늘은 여러 가지 생각이 지나치게 멀리까지 나아가며 이런저런 것들을 다 건드리는 바람에 깊은 우울감에 빠져 집에 돌아와서도 아무 것도 하지를 못했다.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그 상태가 이 지구에서의 나 그 자체 같다. 대체 무엇을 위해? 라는 의문이 작은 행동 하나하나마다 따라붙었다. 며칠 사이 잔뜩 쌓인 날카로운 꼬챙이 같은 의문부호들을 일단 툭툭 털어내고 내 앞에 펼쳐진 내 몫의 삶의 계단을 한발한발 나아가는 수밖에 없겠지. 늘 그랬듯이. 정말 그러는 수밖에 없나 갈 곳 없는 미안함들과 죄책감들과 괴로움들을 어딘가에 토로하는 것도 사치스러워서 거의 아무도 오지 않는 이곳에다가만 잠깐만 부려놓는다 답답해 그래도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계단을 오르겠다 내일부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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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올타임 에코백. 오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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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달 마지막 주 토요일 오후 416분에 열리는 304낭독회의 낭독 청탁을 고민 끝에 일단 수락해놓고도 며칠 동안 원고를 시작할 엄두를 못 냈다. 세월호에 대해 갖고 있는 복잡하게 헝클어져있는 감정을 내가 과연 하나의 정돈된 글로 쓸 수 있을까. 단편적인 느낌 외에는 관련해서 단 한 번도 정리된 긴 글을 써본 적이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나에게도 너무 무겁고 너무 아프고 너무 조심스러우면서도 끝내는 격앙되고야 마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런 격앙 조차도 조심스럽고 미안한 일이었기 때문에. 마감이 다가왔고 더이상 미룰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뭐라도 쓰려고 워드를 열어놓고 첫 문장을 쓰기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 마지막 문장을 쓰고 있었다. 살면서 청탁 받아 쓴 원고 중 가장 빨리 쓴 원고가 아니었을까. 내 마음에 오랫동안 고여있던 것들이 흘러나오는 대로 쓰다보니 이 일이 시사하는 어떤 사회적 의미나 같이 생각해보면 좋을 문제를 고민해서 덧붙일 틈 없이 지극히 개인적인 고백의 글이 나오고 말았지만 그래서 이대로 괜찮을까 싶어 송고 전까지 조금 망설였지만 아직 나로서는 여기까지인 것 같다. 그저 미안한. 세월호 추모 주말을 맞으며 1월 낭독회 때 쓰고 읽었던 글을 다시 꺼내어 읽어보며 이때와 또 달라진 건 무엇일까 고민해 본다.  


여름을 밀어내고 봄이 바다가 되었습니다 

 

20144, 몸에 피주머니를 달고 있었습니다. 의미심장한 날짜와 피주머니라는 비일상적인 단어의 연결 때문에 어떤 종류의 비유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실제로 저는 배액관이라고 부르는 피주머니를 달고 4월의 그 뉴스를 보고 있었습니다. 살면서 처음으로 받아본 크다면 큰 수술과 일주일의 입원 끝에 퇴원을 했고, 병원 올 때를 제외하고는 최대한 몸을 움직여서는 안 된다는 의사의 당부로 회사도, 여타의 사회생활도, 꾸려가던 일상도 전부 중단한 상태였습니다. 태어나서 그 어느 때보다도 가장 가만히 있어야했던 날들에 방 한구석에 앉아 그 뉴스들을 보고 있었습니다. 이제 얼굴만 봐도 저분은 누구의 어머니이고, 이름만 들어도 그 아이는 몇 학년 몇 반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 봄이 지나가는 내내 그 뉴스들만 보고 있었습니다.

20144, 저는 살아남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의미심장한 날짜와 살아남은 사람이라는 단어의 연결 때문에 이 또한 어떤 종류의 비유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실제로 사망의 가능성이 제법 높았던 6시간의 수술을 마치고, 그 가능성에 대해 고지를 받았던 그날부터 혹시에 딸려오는 생각들을 떨치지 못해 불안에 떨어왔던 친구 중 하나가 눈물을 터뜨리며 너는 이제부터 살아남은 사람이야라고 말했습니다. 코앞까지 다가왔던 혹시를 떨쳐낸 지 며칠 안 지나서부터 이번에는 어떤 혹시들이 믿을 수 없는 사실이 되어가는 걸 계속 지켜봤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국가시스템이라는 게 있는데 결국 구조하겠지, 라는 생각이 아무리 그래도 수습을 잘 하겠지, 아무리 그래도 진상규명을 명확히 하겠지, 아무리 그래도 충분한 책임을 지겠지, 아무리 그래도 애도는 하겠지, 아무리 구조할 능력은 없었어도 구조할 의지는 있었겠지로 계속 변해갔고, 그 모든 아무리 그래도는 변함없이 깨어져나갔습니다.

엄청난 슬픔과 분노와 무력감이 밀려들었다 나가는 자리마다 미안함이 항상 남아있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살아남은 자로서의 미안함과 얼마 안 되는 돈들을 보내고 서명을 하고 노란리본을 곳곳에 다는 것 정도 밖에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미안함, 살아남아서 피주머니를 매단 채 몇 주를 그것만 내내 지켜봐왔으면서도 점점 잊어가는 것에 대한 미안함. 물론 이 사건과 이 사건 주변에 산산조각 난 채 흩어져있는 수많은 아무리 그래도들은 절대 잊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누구의 어머니였는지, 누가 몇 학년 몇 반이었는지, 유가족들이 처음으로 청와대를 향해 밤새 걸었던 그날, 막아서는 경찰들에게 차마 돌을 던지지 못하고 뜯은 풀과 바닥에 떨어진 잎사귀를 모아 집어 던졌던, 경찰을 향해 욕하는 시민들에게 쟤들도 그냥 시키는 대로 하는 것뿐이니까, 가만히 있으라고 시키는 대로 했던 애들처럼 쟤들도 그냥 말 잘 듣는 애들일 뿐이니까라고 가만가만히 말렸던 유가족들의 어떤 심정들 같은 세세한 결들에 대해 하나하나 떠올리며 아파하는 시간들은 줄어가고 있었습니다.

작년 여름 여행길에 배를 탔다가 조타실이라는 글자를 보고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살면서 조타실이라는 단어를 가장 많이 들어본 게 언제일까요. 하지만 그렇게 울고 나서 세 시간도 안 돼서 바다 한가운데서 카약을 타고 노를 저으며 한가롭게 저녁을 보냈습니다. 지난달 동대문을 우연히 지나다가 전태일 열사의 동상에 매어진 자주색 목도리에 노란리본이 걸려있는 것을 보고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겨울이라고 동상에 목도리를 둘러주고 노란리본을 걸어주는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하지만 그렇게 울고 나서 두 시간도 안 돼서 식당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즐겁게 저녁을 보냈습니다. 슬픔에서 일상으로 돌아오는 데 걸리는 시간들이 줄어가고 있었습니다.

작년 봄 광장에서 열린 3주기 추모미사에서도 미안했습니다. 2주기까지는 차마 엄두가 나지 않아 떼지 못했던 발걸음인데, 그 발걸음의 무게가 줄어들었기에 갈 수 있었다는 걸 마음 한 쪽에서는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1월의 어느 주말, 안산병원과 아산병원 장례식장을 다녀오면서도 미안했습니다. 끝내 돌아오지 못한 다섯 분과, 유가족이 되고 싶다는, 그 슬픈 소망을 이루지 못한 유족분들이 눈에 밟혀 가야만 했던 기저에는 이렇게라도 다시 한 번 더 되새겨야만 한다는 강박 또한 있었다는 걸 마음 한쪽에서는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안산병원에 붙어있는 커다란 전지에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쓰면서도 미안했습니다. 되새겨야 한다는 강박을 갖는 것,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에는 잊어가고 있다는 저의 상태가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같은 사건이 사람들에게 가닿을 때는 제각각 다른 모양의 그릇이 되고, 모양 따라 흘러 담기는 마음도 다릅니다. 제가 가진 그릇은 그다지 깊지도 견고하지도 못해서 시간이 흐를수록 어딘가로 마음이 조금씩 새어나가는, 담긴 마음의 눈금이 천천히 줄어드는 그릇입니다.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기약을 믿음직하게 품을 수 있는 모양과 강도의 그릇을 가지고 있지 못한 제가 그나마 다짐할 수 있는 기약이 있다면, “잊지 않도록 발버둥 치겠습니다정도일 것입니다. 이 발버둥에는, 어느 날 문득 줄어든 눈금을 발견하고 내가 또 이만큼이나 잊고 있었구나를 대면하고 죄책감에 빠지는 것도, 그래서 황급히 무언가를 그릇 안에 부어넣어 다시 채우며 이렇게라도 해야지만 잊지 않을 수 있다니라는 자괴감에 빠지는 것도 다 포함되어 있을 것입니다. 이 사건을 제 안에서 깊고 견고한 그릇으로 만들어내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그래서 생각날 때마다 그제야 채워 넣어야 해서 미안합니다.

이제 한 달이 더 지나 다음번 낭독회가 열릴 때쯤은 봄이 오고 있을 것입니다. 언젠가부터 봄은 바다처럼 밀려듭니다. 바다는 여름에나 떠올리는 것이었는데 언젠가부터 여름을 밀어내고 봄이 바다가 되었습니다. 그 봄에도 계속 미안해하며 계속 채워 넣으며 연대해야하는 어떤 순간순간들에 반도 안 찬 그릇을 내미는 일이 결코 없도록, 잊지 않도록 발버둥 치겠다는 것만큼은 잊지 않겠습니다. 이 정도밖에 다짐할 수 없어서 정말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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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적절한 순간에 쫀득쫀득한 욕을 구사하는 여자들에 대한 동경이 있다. 남자든 여자든 욕 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고 즐겨할 생각도 전혀 없지만 가끔 살다보면 이 순간에는 욕이 터져주어야 분위기가 사는, 다른 여타의 언어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그런 순간 있잖아. 적절한 순간에 터지는 쫀득쫀득한 욕이 가져다주는 카타르시스. 나는 이걸 잘 못했다. 욕이 나와 주어야 하는 타이밍 포착은 제법 잘 하는데 막상 욕을 하려고 하면 마음속 여러 종류의 방어기제들이 빨간불을 키고 웅웅대기 시작하며 내 입을 가로막아 버렸다. 본인이 먼저 웃겨서 웃어버리면 안된다가 농담의 제 1법칙이듯이 욕은 본인이 하면서 민망하거나 쑥쓰러워하면 안된다가 제 1법칙쯤 될 텐데 욕을 하려고 하면 내가 이미 쑥쓰러워져서 차마 할 엄두가 안 났다. 그래도 주량은 타고나는 거라지만 욕설은 트레이닝에 따라 얼마든지 개발 가능한 부분이잖아? 그래서 한 때, 아주아주 오랜 옛날 고3 시절에 욕을 잘하려고 잠깐 노력해봤던 적이 있었다.


중고등학교 때 나는 친한 친구 층이 좀 다양했다. 같이 학생회를 했던 모범생 친구들 한 그룹, 같이 맨날 귀에 헤드셋 꼽고 일본 밴드와 만화책에 푹 빠져 살았던 덕후 친구들 한 그룹, 그리고 내가 키가 컸던 편이어서 교실 뒷줄에 주로 앉게 되며 친해진, 방과 후 제일 많이 몰려다녔던 좀 놀았던 친구들 한 그룹. 내 친구 P는 이 세 번째 그룹에 속하는 친구였고 당시 P와 나 외에도 너뎃 명이 몰려다니며 친했었는데 이 친구들은 교내에서 뿐만 아니라 그 일대에서 좀 유명한 친구들이라 행동의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었다. 술도 굉장히 잘 마시고 싸움(....)도 굉장히 잘 하고 춤도 굉장히 잘 추고 당연히 욕도 잘했다. 그렇게 맛깔나게 욕할 수가 없었다. 그것도 당시 일반 남자애들이 쓰는 욕에서도 조금 더 레벨업 한, 어떻게 설명해야할 지 모르겠는데 뭔가 참 낭창낭창하면서도 파워풀하고 밀어붙일 때 밀어붙이고 잡아주어야 할 때 적절히 잡아주는, 참 절제됐으면서도 질펀한 그런 욕이었다.


특히 나는 체다치즈맛, 바베큐맛, 사워크림맛 등 무수히 많은 변종이 나와도 고집스럽게 오리지널 프링글스만 죽자고 집어 드는 사람처럼 걔들이 쏟아내는 무수한 재기 넘치고 다채로운 욕들 중에서도, 욕설계의 클래식인 "씨발"이 그렇게 정겨울 수가 없었다. 걔들의 씨발은 여느 일반적인 씨발과 다르게 상황에 따라 퇴폐적이기도 했다가 격정적이기도 했다가 장난스럽기도 했다가 서글프기도 한, 씨발 하나에 세상만사의 모든 감정들이 녹아들어가 있는 나름의 미학이 있었다. 나는 그들의 씨발이 정말 부러웠고 그것만큼은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들의 욕이 부러웠던 것에는 개그 욕심도 어느 정도 작용했다. ,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욕설이 들어가야만 개그적 상황이 완성되는 순간에 욕하는 걸 꺼려하는 마음 때문에 그냥 지나치고야말았던 유머의 스팟들이 늘 돌아서면 은근히 아쉬웠다. .. 그 상황에서 걸쭉한 씨발 한번만 넣어주었으면 분위기 바로 끝장나는 건데. 화룡점정을 찍었어야 했는데. 이런 생각들이 쌓이며 욕에 대한 욕구불만이 커져갔고 그래, 안 되겠어, 내 영혼을 덕지덕지 감싸고 있는 방어기제들을 과감히 벗어던지고 유머의 완성을 위해서라도 확 지르자! 라는 결심을 하고 19년 인생동안 한 번도 입에 담아보지 않았던 씨발을 내 인생에 데뷔시키기 위해 기회를 노리기 시작했다. 걸리기만 해봐. 할거야 한다고.



2.

그러던 어느 겨울 같이 놀던 친구 중 한명이 이렇게 추운 날에는 떡볶이를 먹어줘야 한다고 해서 과자들, 음료수들을 사서 친구네 집에 떡볶이를 해 먹으러 갔다. 떡볶이를 다 먹고 과자를 뜯어먹으며 깔깔거리며 이 이야기 저 이야기 수다를 떠는데.. 그 순간이, 테트리스에서 길다란 작대기 하나면 블럭 네 줄을 한꺼번에 깨부실 수 있듯이, 돌아가는 모든 상황이 저 위에서 쌍시옷 모양 하나만 떨어지면 모든 블럭이 줄줄이 깨부셔질 그런 순간이 포착되었다. 이 타이밍이다. 나의 씨발 데뷔를 할 수 있는 순간이 왔다. 이 순간을 잘 넘기면 나는 이제 드디어 씨발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거야. 다른 세계로 들어가기 직전의 흥분과 아직도 마음 한구석에서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는 19년 묵은 유교 소녀의 거리낌과 눈앞에 바로 닥친 최상의 타이밍을 놓칠 수는 없다는 의무감 사이에서 마음이 마구 흔들리다가 결국 세상에서 가장 어설프고 수줍은 씨발이 내 입에서 나왔다.


"씨발"


......... 내가 뱉어놓은 씨발을 내가 들으면서도 괴로워 죽을 뻔했다. 보통 씨발 프로들을 보면 이게 "씨파" "씨바" 사이에서 물 흐르듯 굴러가며 발음이 자연스럽게 나오는데 나의 씨발은 아나운서가 뉴스 중에 씨발을 했어도 이렇게는 못하겠다 싶을 정도의 너무도 깔끔하고 굴곡 하나 없는 씨발이었다. 평소 씨발을 눈여겨봐오던 내 나름의 고찰을 돌이켜봤을 때 씨발 프로들의 ""는 뭔가 바람소리가 많이 섞여 듣기만 해도 야성적이며 ""라는 소리보다는 이 공기 마찰음이 더 많이 나오는 ""였는데 내가 뱉은 씨발의 ""는 병원에서 간호사들이 "임찰리 씨" "김 아무개 씨"라고 부를 때의 깔끔한 ""였고, 이게 "" 쪽으로 가면 더 가관인데 프로 씨발러들의 """"""사이의 어떤 음, 약간 모던한 씨발의 경우 가끔씩 "바아알" 에 가까운 모호한 발음이 나오기도 하던데, 나의 씨발은 정말 깔끔한, 한국어 듣기 시험 문제로 내 씨발의 ""을 내보내면 100명중 96명은 논란의 여지없이 ""로 적어낼 것이 분명한 그런 ""이었다. 간호사 억양의 ""와 너무나 깔끔한 ""의 결합이 내 입에서 나왔을 때 이미 그것은 상대방에 대한 욕이 아니라 말을 뱉은 본인에게 욕스러운 그런 욕이 되었다.


그래도 타이밍이 워낙에 잘 맞았고 평소 욕을 입에 올리지 않던 사람이 예상치 못하게 던진 욕이라 다들 우하하하 뒤집어 지기는 했지만 (다행이다..거기서 내 생애 첫 씨발을 쥐어짰는데 싸한 분위기에 연민의 시선이 오갔으면 난 너무 챙피해서 집에 가버렸을 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 트라우마로 씨발포비아가 돼서 더욱 욕이랑 담쌓는 사람이 되었을 지도 몰라.) 나는 혼자 너무 민망해서 괜시리 일어나서 테이블에 늘어서 있던 과자 봉지, 빈 음료수캔들을 주섬주섬, 나의 씨발의 에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깔끔하게 치웠다.


집에 돌아가려고 현관문을 여니 눈발이 마구 흩날리고 있었다. 그게 첫눈은 아니었다고 기억하는데 어쨌든 흩날리는 눈발은 우리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고 눈발 속으로 뛰어들자마자 친구들은 "! 하얀 솜사탕 같은 눈이 세상을 하얗게 만들고 있어!"라는 감상을 역시 "~씨발. 존내 춥잖아"라는 쉬크한 말 한마디로 압축,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여기저기서 씨바씨파씨바알 거리는 소리가 눈 오는 거리를 가득 메웠다. 흩날리는 눈발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했다. ... 쟤네들의 씨발은 정말 멋지구나.. 저런 멋진 씨발이 나오기까지 쟤들은 얼마나 많은 씨발을 듣고 말하고 살았을 것이란 말인가.


애들과 문 앞에서 헤어져서 P와 함께 집까지 걸어가는 길에 나는 P에게 말했다.

"P. "씨발"이라고 말해봐."

"?"

"씨발- 해봐"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어떻게 하면 너처럼 씨발을 잘 해?"

"우하하 미친년. 나 세상에 또 씨발 잘한다고 칭찬받는 건 처음이네"


얘나 지금이나 공부를 하면 꾸준히 하루에 몇 시간씩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고 속성으로 며칠만에 왁- 달려버리는 걸 좋아하던 나의 심보는 여전해서 나는 씨발도 속성으로 배우고 싶었다. 그래서 가르쳐달라고 졸랐다.


"그래, 사실은 너 아까 씨발하는 데 좀 어이없더라."

"그치? 이상했지?"

". 앞으로 왠만하면 하지 마라"

"뭐야. 제대로 좀 하게 뭔가 조언을 좀 해 봐."

"근데 우리들이 너무 걸져서 그렇지, 니가 한 씨발도 나쁘지 않았어"

"아냐. 나는 니들처럼 맛깔나게 하지 않을 거면 평생 안하고 살꺼야. 무난한 씨발이라니... 그런건 용납이 안 돼"

"아 됐어. 그냥 생긴대로 살어. 너 같은 목소리로는 맛깔나게 하기 힘들어."

", 씨발. 빨리 안 가르쳐 줘! ........?.. , , 이번 씨발은 좀 괜찮않지? 그치?"

"아까보단 난데.. .. .. 씨발, 이걸 어떻게 가르쳐 줘야해..?"

"그러니까 "" 따로 "" 따로 떼어서 하나씩 차근차근 말해줘 봐.“


나는 정말 배울 자세가 되어있었다. 분석도 끝나있었다. 일단 내가 이해한 걸로는... ""는 일반적인 ""를 발음할 때처럼 육성이 많이 섞여서 나오면 안 된다. 혀랑 입모양은 ""를 발음할 태세를 갖추지만 그 사이로 공기를 더 많이 내보내야한다. 그러니까 윗니랑 아랫니를 딱 붙히고, 좀 더 카리스마있게 하려면 아랫니를 주걱턱처럼 약간 앞으로 내보내고, 그랬을 때 생긴 윗니랑 아랫니 사이 공간으로 공기를 확 내뿜으며 ""하면 그럴듯해진다. 이렇게 아랫니를 주걱턱처럼 내밀면 얼굴이 살짝 일그러지는 효과까지 생겨서 더 그럴 듯하다.


그리고 발. 그들이 하는 걸 들어보면 "씨발"이 단독으로 쓰일 때와 형용사로 명사를 수식할 때가 좀 달랐다. 단독으로 쓰이는 씨발은 """"발음을 정확하게 하려고 하면 맛이 안 살았다. 살짝 ""이 굴리듯이 들어가면서 끝 발음이 약간 흐지부지되게 해야 하는데 대신에 "씨발넘" "씨발새끼"처럼 형용사로 들어갈 때는 ""의 정확한 발음이 다시 중요해졌다. K는 이런 경우도 ""을 흘리듯이 흐지부지하게 하던데 그건 영 별로였다. K가 단독 씨발은 괜찮은데 그 형용사 씨발 때문에 P보다 조금 뒤처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가끔 P"" 발음을 자음동화 비슷하게 연음해서 발음하는 게 좋았는데, 이를테면 "씨발라마" 발음 비슷하게 """"로 넘어가서 발음되는, 그런 느낌이 좋았다. 요령은 알겠는데 왜 발음하면 안 되는 거지 근데? 내가 계속 조르니 P도 슬슬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한 번 해봐"

"씨발"

".. 해봐"

"씨발"

"..내가 봤을 때 니가 ""하고 ""사이를 잘 처리 못해서 그러는 것 같애"

"그래?"

". 그게 씨를 약간 길게 발음하게 되는데.. "씨이발-"이렇게. 중간에 낀 ""에 톤을 넣어봐


! 그거였어. 그러니까 "씨이발" 이런 식의 발음인 건데 그 중간에 잠깐 끌어주는 그 ""에 톤이 좀 들어가야 하는 거구나. 그리고 이 톤의 질에 따라서 씨발의 운명이 무난함과 맛깔짐 사이에서 갈리게 되는 거구나. , """" 사이에 들어가는 ""가 바로 씨발의 정수였던 것이다. 타이밍에 따라서 이 ""를 짧게 끊어치느냐, 그냥 길게만 끌어주느냐, 약간 톤을 넣어서 살짝 꺾어주느냐, 이걸 TPO에 맞춰서 잘 선택하는 것이 프로의 비결이었던 것이다. 때에 따라서는 ""에 강하게 액센트를 주고자 할 때, ""을 살짝 올려서 말하기 직전의 "도움닫기 역할"까지 ""가 도맡아서 하고 있었다. "" 를 끌어주는 시간 속에 사람의 감정과 영혼을 살짝 담아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 세상에 늘 보이는 것에만 혹해서 살면 안된다. 이렇게 "씨발"에는 제 3의 존재, 하마터면 보지 못하고 지나쳐 버릴 뻔했던 ""가 있었던 거였다.


"씨이이발. 이렇게?"

"그건 너무 억양이 길고 인위적이잖아"

"그럼, 씨이발. 이건?"

"낫긴 한데 너무 밋밋하잖아."

"그럼 씨발. 이건?"

",진짜. 씨이발. 이렇게 못하겠어?!"

"씨이발.했잖아."

"그건 그냥 길게 끌었을 뿐이지 감정이 없잖아. 씨이발. 씨이발. 이거야, 이거!"

눈발이 흩날리던 밀레니엄 직전의 겨울. 우리는 그렇게 씨발씨발 거리면서 눈이 내린 길을 자박자박 걸어갔다.



3.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결국 나는 "" "" 사이의 벽을 넘지 못하고 내 친구들처럼 멋진 씨발러가 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어려서부터 걔네들이 멋지고 쫀득한 씨발로 쓸데없이 내 눈높이 귀높이를 올려놓아서 이제는 웬만한 씨발은 전혀 마음에 와닿지도 않고 별로 따라하고 싶지도 않았다. P에게 했던 말처럼 "너희처럼 멋지게 하지 못할 바에는 아예 하지 않고 살겠다"는 심정으로, 그 이후로 살면서 두 번인가 더 써본 게 내 씨발의 연대기이다. 그래, 어쩌면 이 """"사이에 들어갈 감정의 진폭, 인생의 정수에 깊이와 연륜이 없어서 걔네들처럼 멋진 씨발이 나오지 않는 지도 몰라. 열심히 공부하고 인생에서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워서 """"사이 숨겨진 ""에 생명을 불어넣어야 내 마음에 썩 드는 씨발을 할 수 있게 될 지도 모르겠다.



4.

......라는 이상한 글을 9년 전에 썼던 걸 파일 정리하다가 어제 우연히 발견했다. 나 대체 이런 걸 왜 쓴 거야ㅋㅋㅋㅋㅋ 그런데 정말 감정의 진폭과 연륜이 쌓인 건지 2018년의 나는 저때보다는 씨발을 잘 한다. 잘 됐네.......사실 여기에는 이명박근혜 정부가 기여한 바가 매우 크다. 정부에 커다란 빚을 졌다 씨이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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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 오고 바람불고 쌀쌀한 축구장에서는 팩소주지! 하며 신나서 사러갔다가 없어서 대신 포켓 소주를 홀짝이며 경기를 봤다. 유달리 정신 없던 한 주라 7일동안 맥주 한방울 입에 안 대다가 마시니 한쪽에 쌓여있던 긴장이 어느 정도 녹는다. 평생 동물원과 수족관, 동물들이 나오는 쇼에는 가지 않겠다고 다짐하기 이전에는 동물원을 좋아했었다. 특히 비오는 날 유독 진동하는 특유의 동물 냄새를 맡으며 빨대 꽂은 팩소주를 들고 빈 팩이 될 때까지 돌아다니는 거 참 좋아했었는데. 오늘 문득 그랬던 많은 날들 중 하루가 생각났다. 이제 동물원 갈 일은 없겠지만 축구장이 있다. 역시 비 추적추적 오는 축구장에서는 팩소주야!

 

*

지지난주에 요 며칠 평소에 잘 먹지 않는 바나나, 군밤, 꼬마김밥이 먹고 싶은데, 바나나는 위스키와 군밤은 샤도네와 꼬마김밥은 소주와 먹고 싶다. 대체 술안주의 범위를 어디까지 확장시킬 셈인가....”라고 페북에 썼더니 모님께서 마지막 단계, 생수, 까지.. 파이팅!”이라고 한게 문득 생각나서 혼자 웃었다ㅋㅋ 난 안주:술의 비율이 보통 3:1이라서 아마 마지막 단계까지 갈 일은 없겠지만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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