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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서재 속 고전 - 나를 견디게 해준 책들
서경식 지음, 한승동 옮김 / 나무연필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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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서재 속 고전>

나를 견디게 해준 책들

 

1. 안녕하세요? 이번 주는 어떤 책을 소개해주실 건가요?

 

안녕하세요? 제가 이번 주에 산 책은 나무연필 출판사에서 만들고 서경식이 쓴 <내 서재 속 고전>이라는 책입니다. 일종의 서경식의 독서기인데요, 그가 인상 깊게 읽었던 열 여덟 권의 책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서경식 작가와 이 책에 대해서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2. 저자인 서경식 작가는 저도 들어본 적이 있는데요, 혹시라도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간단히 소개해 주실 수 있나요?

 

서경식 작가는 재일조선인으로 도쿄케이자이대학에서 인권과 예술을 중심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작가는 1971년에 발생한 유학생 형제 간첩단 사건으로 체포된 서승, 서준식 선생의 동생이기도 합니다. 68년에 재일조선인이라면 가능했던 북한을 방문했던 것이 문제가 되었던 거지요. 그동안 일본 사회에서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당하고 거부를 받으며 살아왔는데, 형제들이 정치범으로 잡히게 되면서 한국에서까지도 거부를 당한 거지요. 그러니까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디아스포라가 된 겁니다. 서경식 작가는 디아스포라 즉, 고향을 잃은 실향민이라는 자기 처지에서 꾸준한 글쓰기를 해오고 있습니다. 이 책 역시 거부당하고 배척당한 한 사람으로 자신에게 지적으로나 감정적으로 힘이 되어준 책을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서재 속 고전>의 부제가 ‘나를 견디게 해 준 책’이지요.

 

3. ‘나를 견디게 해준 책’ 이라.. 그럼 서경식 작가가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견디도록 도와준 책들은 책 제목대로 모두 ‘고전’들인가요? 고전은 뭔가 어렵다는 느낌이 있는데요..

 

일반적으로 ‘고전’이라고 하면 헤로도투스, 호메로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키케로와 같은 그리스 로마의 위대한 고전이나 마키아벨리나 단테와 같은 르네상스 거장들의 저서를 떠올리고는 하는데요, <내 서재 속 고전>에는 소위 우리가 생각하는 이런 종류의 고전들은 한 권도 소개되고 있지 않습니다. 책 제목이 말해주는 것처럼 서경식이라는 한 개인의 서재 속에서, 서경식이 자기 처지에서 읽은 책들이지요. 예를 들어 이 책에서는 에드워드 사이드의 <지식인의 표상>이라는 책이 소개되는데요, 에드워드 사이드는 미국의 컬럼비아 대학의 교수로 살았지만 사실 서경식과 마찬가지로 그도 실향민이라고 할 수 있어요. 에드워드 사이드 역시 팔레스타인 출신이라 고향을 잃어 버렸거든요. 서경식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었던 에드워드 사이드의 글을 읽으면서 자신의 처지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되고, 세상과 맞서 싸울 지적 기반을 얻게 됩니다. 서경식은 이 책에서 자신이 1990년대에 만일 사이들을 읽지 않았다면 자신의 정신적 방황은 지금보다 훨씬 더 의지할 데 없고 더 혼란스러웠을 것이라고 이야기해요

 

4. 자신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었던 책을 ‘내 서재 속 고전’의 목록으로 삼았던 거군요. 그런데요, 고전이라고 하면 시대와 지역을 뛰어넘어 누구에게나 큰 울림을 줄 수 있는 책을 말하지 않나요? 자기 자신에게 의미가 있었던 책이라고 해서 그것을 ‘고전’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고전은 시대와 지역을 넘어서는 보편성을 가지는 책을 말하는 것이지요. 서경식 작가도 그 점을 모르는 바 아닙니다. 다만 서경식 작가는 이 책에서 시대와 지역을 넘어서 누구에게나 울림을 줄 수 있는 책이라는 고전을 누가 결정하는 것인지, 고전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고 할 수 있어요. 예를 들어 현재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동서양의 고전은 다수자의 관점에서 뽑힌 것들이 많습니다. 청소년들이 읽는 세계문학전집의 목록의 경우 서양의 백인 대학 교수들이 뽑아 놓은 것들이라 거기에는 흑인의 시선, 비서양의 시선, 교수가 아닌 비주류의 시선은 전혀 들어가 있지 않아요. 서경식은 비주류의 시선에서 자신이 읽은 책을 시대와 지역을 넘어 스스로를 비주류로 여기는 다른 사람에게도 소개하려는 것이지요.

 

5. 그러니까 비주류들을 위한 고전이라는 뜻이군요?

 

네, 그렇습니다. 서경식 작가는 늘 소위 잘 나가는 주류의 관점이 아니라 비주류의 관점에서 역사와 세계를 다시 써 내려오고 있습니다. 오늘 소개 드리고 있는 <내 서재 속 고전>이 주류가 읽는 고전이 아니라 나라와 고향을 잃은 비주류의 관점에서 읽은 고전의 목록을 뽑아낸 것이라면, 서경식 작가가 쓴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책의 경우는 언뜻 보면 위인전처럼 보이지만 자세하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영웅과 위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라를 잃고 방황하고 싸웠던 사람들, 주류의 관습과 세계관이라는 큰 바위를 깨뜨려 보려 도전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에요. 또 서경식이 쓴 첫 책이 <나의 서양 미술 순례>라는 책 역시 미술사에서 말하는 걸작들이 일방적으로 소개하는 식이 아니라 정치범의 가족으로, 또 고향을 상실한 사람으로 자기 자신에게 다가온 작품들을 소개하는 책이지요. 그러니까 서경식의 관심은 늘 이기고 승리한 사람들의 이야기 보다는 패배가 확실한데도 불구하고 끊임 없이 싸웠던 사람들, 그래서 패배해버린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6. 설명을 듣다 보니 저도 관심이 가는데요, 이 책에서 소개되고 있는 고전 중에 선생님께서 가장 인상 깊게 읽으신 부분은 어떤 부분인가요?

 

루쉰의 <망각을 위한 기념>이라는 책을 소개하면서 서경식 작가가 쓴 부분을 제가 조금 발췌해서 읽어보겠습니다.

 

“생각건대, 희망이란 원래부터 있는 것이라고 할 수도 없고 없는 것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것은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원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다니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길이 되는 것이다.”

 

루쉰의 소설 『고향』의 말미에 있는 이 말을, 나카노 시게하루도 지적하듯이, 많은 사람들이 “밝은 얘기로, 앞길에 광명이 있음을 깨닫고 나아가는 이들의 구호로 인용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읽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려는 얘기가 아니다. 나카노는 “여기에서 희망이라기에는 너무 깊은 어둠과, 어둠 그 자체를 통해 필연적인 힘으로 솟구쳐 오르는 실천적 희망과의 생생한 교착”을 본다고 얘기한다. 그리고 나카노는 루쉰을 읽을 때마다 이렇게 생각한다. “나 또한 좋은 인간이 돼야지, 나도 어떤 일이 있어도 올곧은 인간이 돼야지, (………) 일신의 이해, 이기라는 걸 떨쳐버리고 압박과 곤란, 음모가들의 간계와 맞닥뜨리더라도 그것을 참아내고 끝까지 나아가야지, 고립되고 포위당하더라도 싸워야지 하는 생각을 자연스레 갖게 된다. 그쪽으로 향하게 된다.”

 

생각건대, 이것이 시의 힘이다. 즉 승산이 있든 없든 그것을 넘어선 곳에서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다. 그런 루쉰의 정치와 문학의 결합을 나카노 시게하루는 “서정시 형태로의 정치적 태도 결정”이라고 불렀다. 루쉰이라는 중국의 시인을 만나 일본의 시인 나카노 시게하루가 감동을 받았다.

 

여기에서 동아시아 근대의 만남이 빚어낸 어렴풋한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어렴풋한 가능성’조차 지금은 야비하고 천박한 소리들에 눌려 소멸의 위기에 처해 있다.

나도 젊은 시절 루쉰의 어두운 말에서 절망과 같은 모습을 한 ‘희망’을 발견한 사람 중의 하나였다. 이제 나는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전하고 싶다. 하지만 그게 어렵다.

 

서경식은 늘 가짜 희망을 경계합니다. 그저 잘 될 것이다, 대박이 날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것이다라는 식의 말들은 모두 자기 자신을 기만하는 것이라는 거지요. 오히려 진정한 희망은 루쉰이 그랬던 것처럼 절망 속에 깊이 침잠할 때, 그리고 희망을 향해 걷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야 비로서 생겨난다고 봤어요. 서경식 작가는 젊었을 때는 두 형의 투옥으로 인해 깊은 절망을 느꼈고, 지금은 점점 더 우경화되고 있는 일본과 아시아 정세에 절망하고 있기에 희망이란 원래부터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다는 루쉰의 말이 더 무겁게 느껴졌을 겁니다.

 

7. <내 서재 속 고전>, 이 책을 지금 우리가 읽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이 책을 모든 사람이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주류가 아니다, 힘이 없다, 외롭다고 느끼는 분들이 있다면 이 책이 그런 분들이 어려운 현실을 견딜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을 거에요. 요즘 청년들이 금수저, 흙수저라고 수저계급론을 이야기하고, 우리나라를 헬조선, 지옥불 반도라고까지 표현하는 경우들이 있지 않습니까? 또 자영업 하시는 분들은 경기가 어느 때보다 어렵다고 많이들 말씀하십니다. 어쩌면 이 책이 절망을 직시하고 희망을 품도록 도와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또 다른 이유가 있는데요, 이 책 마지막 장에는 서경식 선생이 젊은 인문학 연구자들과 함께 한 우리 시대의 고전 읽기에 대한 대담이 실려 있습니다. 저도 대담자로 참가해 함께 대화를 나눴었는데요, 그것도 보실 수 있습니다.

 

이 책을 읽어보시고, 이 책이 소개하고 있는 고전도 읽어보시고, 서경식이 했던 것처럼 나만의 ‘내 서재 속 고전’을 꼽아 보시는 것은 어떠실까 합니다. 이상입니다.

   ( 대구교통방송 라디오에서 매주 금요일마다 책을 소개하는 코너에 나가고 있습니다. 거기서 소개해드리는 책을 이 곳에도 소개해드릴 생각입니다. 라디오에 나가는 대본 그대로 옮겨 둡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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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 - 서경식 김상봉 대담
서경식, 김상봉 지음 / 돌베개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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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은 언제나 외부와 내부의 만남이다. 대화가 대화이고자 한다면 나 아닌 다른 누군가와의 '소통'이어야만 대화이지 그렇지 않으면 독백(monologue)일 따름이다. 이 책 '만남'은 그런 의미에서 '소통'에 대한 열망, 곧 내가 아닌 '외부'를-서로 '서로'를- '주체'로서 정립하는 데에서부터 시작한다.

서경식은 그 자신을 '우리' 외부에 있는 사람이라 인식하는 디아스포라이다. 그런 탓에 김상봉은 그를 '디아스포라적 주체'의 현실태이자 역사적 표상이라 칭한다. 김상봉은 서경식에 대하여 스스로 '내부자'임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이 꼭 '내부'일 수만은 없는 '내부의 외부'를 지향하는 자라고 자기인식한다. 이에 서경식은 그러한 김상봉 역시 '디아스포라'일 수 밖에 없다하고 이에 그들을 넘어선 '서로주체성'의 가능성이 깊이 있게 모색된다.

이 책 '만남'은 80년 광주, 6월항쟁, 8.15와 같은 우리 사회의 역사적 계기를 전유해 나가면서도 '지금-여기'의 우리가 사는 현 사태를 현상적으로(-서경식의 태도), 또 한편으로는 구조적으로(-김상봉의 태도) 파악해 나간다는 점에서 대담자들 스스로의 언급과 같이 '사건'이자 '역사적'이라 할만한 훌륭한 성취를 보여준다. '인간'과 '소통'을 의례적으로 둘러대는 결코-空談이 아닌 현사태 속에서 '인간은 무엇인가'-'어떻게 소통할 것인가'를 진면목으로부터 고찰하고자 노력하는 본 대화는 그런 의미에서 '소중한 통찰을 주는 것'과 더불어 '문제와 상황을 만나는 태도에 있어서 '각성'까지도 불러' 일으킨다. 그러한 태도의 각성이라 함은 곧 사유에 있어서의 근면함(김상봉)이며, 상황에 있어서의 감수성(서경식)이다. 대담자들의 '대화'는 나태함과 둔감함을 일깨우기에 충분하다.

새로운 공동체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그들을 내부와 외부의 소통 문제, 언어의 문제, 이념의 문제로 이끌어 갔고, 그것을 어떻게 이뤄가야 하는지에 대한 실천적 고민은 예술과 교양, 운동의 문제로 이끌어 갔다. 서로가 '외부-외부' 혹은 '내부-내부'로 만나는 몇몇의 지점이 아니고서야 그들은 대부분 '내부-외부' 혹은 '외부-내부'의 문맥에서 '만나기에' 목소리가 커지고 흥분하고, 감정이 상하고 긴장감이 형성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한편 독자들을 불편/불쾌하게 함과 동시에 책을 읽는 자신의 '내부성', '외부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므로 환영할만하다. '서로의 주체됨'은 리쾨르식으로 말하자면 해석학적인 긴 우회로로 정립된 것이기에 긴장이 없을 수 없지 않은가. 나는 그들이 주체로 정립되는 대화/대화의 내용을 통해 주체를 또한 확인/획득한다.

본서를 읽기 전에, 귀로 먼저 듣고 대담자들을 만나면서 그들이 이 대화에 얼마나 진지하고 열정적인 자세로 임했는지, 그들이 더 큰 '우리'를 고민하기 위해 어색함-감정상함을 감수하고서라도 모종의 단합으로 '우리-됨'에 천착하는 것을 피해가고자 했는지를 전하는 바다. '만남'의 성취가 큰 만큼 '만남'이 절실하고, 또 '만남'이 힘들고 어려운 만큼 '만남'이 더욱 소중함을 깨우치기에 책의 무거운 주제들만큼이나 불편한 세상에서 또 다른 '희망'을 발견하게 하는 책이다.

마지막으로, 서경식이 '책을 펴내며'에서도 말하고 있지만, 녹취를 하면서도 많이 느꼈던 김상봉의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어법'은 이번 대담의 긴장을 상징하기도 하거니와, 녹취 당시에 녹취자에게 조차 불편함을 가중시키기도 했다. 이유인즉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도무지 논리적인 접속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논리적 도약 내지 완전한 역접을 의미하기에 때로는 김상봉의 주장이 다소 정연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망의 끝으로 향하는 이 사회에서 '희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표현으로 가능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말하자면,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전복의 논리이며, 어둠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마땅히 지녀야 할 '실존적 주체'의 필수적 표현일 수도 있지 않을까.

내부-외부의 그들은 서로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남'이 가능했다는 것. 힘겨운 시대를 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 새로운 사회, 공동체를 향하게 하는 힘찬 전복의 논리가 아니겠는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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