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 서경식 김상봉 대담
서경식, 김상봉 지음 / 돌베개 / 2007년 12월
평점 :
품절


'만남'은 언제나 외부와 내부의 만남이다. 대화가 대화이고자 한다면 나 아닌 다른 누군가와의 '소통'이어야만 대화이지 그렇지 않으면 독백(monologue)일 따름이다. 이 책 '만남'은 그런 의미에서 '소통'에 대한 열망, 곧 내가 아닌 '외부'를-서로 '서로'를- '주체'로서 정립하는 데에서부터 시작한다.

서경식은 그 자신을 '우리' 외부에 있는 사람이라 인식하는 디아스포라이다. 그런 탓에 김상봉은 그를 '디아스포라적 주체'의 현실태이자 역사적 표상이라 칭한다. 김상봉은 서경식에 대하여 스스로 '내부자'임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이 꼭 '내부'일 수만은 없는 '내부의 외부'를 지향하는 자라고 자기인식한다. 이에 서경식은 그러한 김상봉 역시 '디아스포라'일 수 밖에 없다하고 이에 그들을 넘어선 '서로주체성'의 가능성이 깊이 있게 모색된다.

이 책 '만남'은 80년 광주, 6월항쟁, 8.15와 같은 우리 사회의 역사적 계기를 전유해 나가면서도 '지금-여기'의 우리가 사는 현 사태를 현상적으로(-서경식의 태도), 또 한편으로는 구조적으로(-김상봉의 태도) 파악해 나간다는 점에서 대담자들 스스로의 언급과 같이 '사건'이자 '역사적'이라 할만한 훌륭한 성취를 보여준다. '인간'과 '소통'을 의례적으로 둘러대는 결코-空談이 아닌 현사태 속에서 '인간은 무엇인가'-'어떻게 소통할 것인가'를 진면목으로부터 고찰하고자 노력하는 본 대화는 그런 의미에서 '소중한 통찰을 주는 것'과 더불어 '문제와 상황을 만나는 태도에 있어서 '각성'까지도 불러' 일으킨다. 그러한 태도의 각성이라 함은 곧 사유에 있어서의 근면함(김상봉)이며, 상황에 있어서의 감수성(서경식)이다. 대담자들의 '대화'는 나태함과 둔감함을 일깨우기에 충분하다.

새로운 공동체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그들을 내부와 외부의 소통 문제, 언어의 문제, 이념의 문제로 이끌어 갔고, 그것을 어떻게 이뤄가야 하는지에 대한 실천적 고민은 예술과 교양, 운동의 문제로 이끌어 갔다. 서로가 '외부-외부' 혹은 '내부-내부'로 만나는 몇몇의 지점이 아니고서야 그들은 대부분 '내부-외부' 혹은 '외부-내부'의 문맥에서 '만나기에' 목소리가 커지고 흥분하고, 감정이 상하고 긴장감이 형성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한편 독자들을 불편/불쾌하게 함과 동시에 책을 읽는 자신의 '내부성', '외부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므로 환영할만하다. '서로의 주체됨'은 리쾨르식으로 말하자면 해석학적인 긴 우회로로 정립된 것이기에 긴장이 없을 수 없지 않은가. 나는 그들이 주체로 정립되는 대화/대화의 내용을 통해 주체를 또한 확인/획득한다.

본서를 읽기 전에, 귀로 먼저 듣고 대담자들을 만나면서 그들이 이 대화에 얼마나 진지하고 열정적인 자세로 임했는지, 그들이 더 큰 '우리'를 고민하기 위해 어색함-감정상함을 감수하고서라도 모종의 단합으로 '우리-됨'에 천착하는 것을 피해가고자 했는지를 전하는 바다. '만남'의 성취가 큰 만큼 '만남'이 절실하고, 또 '만남'이 힘들고 어려운 만큼 '만남'이 더욱 소중함을 깨우치기에 책의 무거운 주제들만큼이나 불편한 세상에서 또 다른 '희망'을 발견하게 하는 책이다.

마지막으로, 서경식이 '책을 펴내며'에서도 말하고 있지만, 녹취를 하면서도 많이 느꼈던 김상봉의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어법'은 이번 대담의 긴장을 상징하기도 하거니와, 녹취 당시에 녹취자에게 조차 불편함을 가중시키기도 했다. 이유인즉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도무지 논리적인 접속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논리적 도약 내지 완전한 역접을 의미하기에 때로는 김상봉의 주장이 다소 정연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망의 끝으로 향하는 이 사회에서 '희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표현으로 가능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말하자면,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전복의 논리이며, 어둠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마땅히 지녀야 할 '실존적 주체'의 필수적 표현일 수도 있지 않을까.

내부-외부의 그들은 서로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남'이 가능했다는 것. 힘겨운 시대를 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 새로운 사회, 공동체를 향하게 하는 힘찬 전복의 논리가 아니겠는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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