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김덕희의 '낫이 짖을 때'를 읽었다.
김덕희 작가는 이 소설로 처음 알게 되었는데, 근래 읽은 작품 장 가장 좋았다.
고백하자면, 이 작품을 손에 집어들었을 때 작품 제목을 '낫이 짖을 때'가 아니라 '낮이 짖을 때'로 잘못 읽고서, 대낮의 대지의 부르짖음을 생각하며 읽기 시작했다. 그건 내가 최근에 친구의 소개로 Julien Mauve (http://www.julienmauve.com)라는 작가의 밤과 빛에 대한 사진을 보고 난 직후였던 탓인 것 같다. 하지만 이 책은 '낮'이 아니라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고 할 때의 그 낫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 작품의 문제 의식은 다양하게 읽힐 수도 있지만 내게는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에 대한 것이었다. 기역자를 낫으로밖에 이해할 수 없는 처지에 대한, 그래서 글을 읽는 것과 글쓰기에 대한, 글자를 의미로부터 끝없이 분리시키는 것에 대한, 무엇보다 오독에 대한 이야기. 마치 낫을 낮으로 읽는 것처럼 말이다.
1. 소설에서 수복의 주인은 자신의 노비인 수복의 이름을 물은 후 한자로 명이 길다는 뜻으로 한번, 명이 짧다는 뜻으로 또 한번, 두번을 써서 의미를 두 개로 갈라 놓는다. 이건 데리다가 조이스의 ‘피네간의 경야’를 분석할 때 ‘he war’가 지닌 의미론적 풍요로움을 언급하는 대목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war'는 영어에서는 전쟁을 뜻하지만 독일어에서는 존재했다는 의미로 데리다는 의미의 복수성에 대한 예로 가져온다. 이 작품에서 ‘수복’이라는 '말'은 그저 노비인 수복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주인은 그것을 바닥에 씀으로 목숨이 짧다는 것으로도, 정반대로 목숨이 길다는 뜻으로 만든다. 수복이라고 부르는 말은 이런 의미상의 차이를 소거시키는데, 음성중심주의는 차이를 소거시킨다는 데리다의 견해, 요컨대 파롤은 발화주체의 동일성을 유지하지만 에크리튀르는 그것을 바로 찢어서 이중화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모든 기호는 원리적으로 항상 동시에 복수의 언어, 복수의 컨텍스트, 복수의 독해레벨에 속한다. 실제로도 수복의 목숨은 주인의 손에 달려 있다. 주인이 원한다면 목숨을 짧게도, 길게도 만들 수 있는 '노비'의 상태에 있다. 그런 점에서 주인은 수복의 이름을 잘못 쓴 것이 이렇게 한번, 저렇게 한번 정말 정확히 쓴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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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 작품에서 수복의 직업은 책을 베껴 쓰는 일, 즉 '필경사'다. 바틀비처럼 ‘I would prefer not to’를 밤낮없이 하다간 수복은 목숨이 붙어 있을 수 없을 것이기에, 수복은 바틀비와는 반대로 주어진 일을 철저하고 성실하게 빈틈 없으리만큼 정확히 수행한다. 그런데, 이 필경이라는 일, 책을 모사하고, 따라쓰고, 베껴쓰는 일의 끝은 이상하리만큼 파국적인 성격을 갖는다는 점에서 만큼은 바틀비와 공통적이다. 바틀비는 무수한 반복적 작업과 모방으로 모든 것을 거부하기에 이르고, 수복은 무수한 반복적 작업과 모방으로 글을 완전히 의미로부터, 또 자신으로부터 분리시켜 버리는데까지 이른다. 즉 반복은 이상하게도 원심력을 가지고, 사람들을 어떤 중심으로부터 바깥으로 내몬다. 이 작품에서 반복의 끝은 첫 문장과 끝 문장이 반복되는 것이다. '난 글을 읽을 줄 모른다'. 글을 읽을 줄 모른다는 말은 수복의 말인지, 주인의 말인지 분명하지 않다. 되풀이(불)가능성에 대한 장면처럼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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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낫이 짖을 때' 라는 제목은 수복의 말에서 온 것이다. 흙에 그린 낫으로는 지푸라기 하나 벨 수 없고, 흙에 그린 개가 도둑을 쫓아내기 위해 짖을 수는 없다는 수복의 말은 글의 무력함을 항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낮으로 그린 개, 그러니까 글자는 짖을 수는 없을 지언정 개보다 훨씬 더 강하다. 작품 곳곳에서 글의 힘을 강조하는 대목이 나온다. 수복의 아비는 글이라는 것은 무서운 것이라 배워서는 안된다고 몇번을 거듭해 말한다. 본래 양반 가문이었던 수복의 집안을 노비가 된 것도 글 때문이고, 붉은 도포를 입은 문하생이 매질을 당한 것도 글 때문이다. 글은 소 한 필, 쌀 열가마니 보다 비싼 값에 거래되기도 한다. 수복은 글쓰기가 아닌 글을 그리지만, 만약 수복이 글쓰기가 시작된다면 글쓰기는 많은 것을 바꿔 놓게 될 것이다. 에크리튀르, In-scription을 생각나게 하는 대목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이본은 정본을 파괴시키지만, 정본보다 이본들이 더 큰 진실을 담게 되는 경우가 있는 법이다. 정본은 오직 현전적인 주체, 지금 이곳에 있는 주체와 결부되어 있지만, 베껴써진 이본은 ‘자기컨텍스트와의 단절력’이 자리잡고 있다. 아즈마 히로키가 이를 두고 ‘씌어진 문자는 이야기된 소리와 다르고, 그것을 발화한 주체의 부재, 극단적인 경우 죽은 후에도 계속 남는다’, ‘에크리튀르는 항상 주체의 통제를 완전히 벗어나 있기에 자유롭게 인용되고 해석될 수 있다’고 한 문장도 함께 떠오른다.
4. 작품을 읽으며, 정확히 수복과 수복의 주인을 보며, 나는 글을 쓰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 작품은 내게 그런 걸 묻고 있다. 나는 반복하고 있는 것일까? 어떤 원심력을 그려내는 것이 가능한 반복적 회전 운동이 내게 있는 것일까? 아마도 아직은, 어쩌면 앞으로도 어려울 것 같다. 그래도 낫을 들고 쓴 글쓰기를 상상하게 된다. 낫은 쓰거나 말할 수 없고, 짖을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낫으로 그려진 글이야말로 붓으로 쓰여진 글보다 훨씬 더 크게 세상을 향해 부르짖는 글이 될 수도 있다.
"양반들은 그 낫으로 도둑의 목을 베고 그 개를 앞세워 사냥을 할 수도 있다. 어디 그뿐일 줄 아느냐. 그 낫이 짖기 시작하고 그 개가 논두렁에 뛰어들어 추수를 할 때가 올 것이다. 그러면 세상은 혼란에 빠지게 된다. 오래전 네 증조부 때처럼 말이다".
마지막 문장에서 단서를 삼아 이 작품에 나온 수복의 주인을 수복의 다른 자아라 생각해본다면 정사에서 누락된 사사를 기록해 글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주인의 뜻, 수복의 증조부의 의지는 날카로운 낫이 짖을 때의 모습, 혁명의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난 글을 읽을 줄 모른다'라는 문장은 'I would prefer not to'에 비견할만한 문장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새로운 세계를 그려내는 말의 조건인 힘을 가진 자가 그려내는 글의 세계를 거부하는 말, 그 말이 바로 이 말이지 않을까. ‘난 글을 읽을 줄 모른다’. 수복은 글을 쓰지 않는다. 글을 ‘그린다’.
5. 지금 쓰는 이 글은 이 작품을 제대로 베낀 것일까? 나는 문맹인 편이 더 낫지 않았을까? 데리다로 이 작품을 이해하려는 시도 자체가 이미 이 작품에 대한 배반이 아닐까? 이 소설을 제대로 그리지 않고 읽고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