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분음표를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얼마 전 아이에게 ‘음표의 길이’를 가르치면서 있었던 일이다. 먼저 아이에게 4/4 박자라면 한 마디에 4분음표(♩)가 네 개가 들어가야 한다고 알려줬다. 그러니까 4분음표 하나는 곧 한 박을 의미한다. 만약 4/4 박자에서 8분음표(♪)를 사용하고 싶다면 한 박은 8분음표 두 개가 되어야 한다는 것도 알려줬다. 4/4박자에서 8분음표는 반 박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에게 6/8 박자에서는 한마디에 8분음표가 6개 들어가기 때문에 한 박은 8분음표로 표시한다는 것을 알려주자 이해하기 어려워했다. 아이는 왜 똑같이 생긴 8분음표(♪)가 어떤 경우에는 ‘반 박’이 되고, 다른 경우에는 ‘한 박’이 되냐고 물어 왔다. “아빠, 숫자 1은 언제나 1이고 알파벳 A는 언제나 A인데, 왜 8분음표는 한 박도 되고 반 박도 되는거야?”. 4/4 박자에서는 분모에 4가 있으니까 4분음표가 한 박이 되고, 6/8 박자에서는 분모에 8이 있으니까 8분음표가 한 박이 된다고도 설명해 보았고, 박자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8분음표의 길이도 달라진다고 해보았지만 아이는 여전히 잘 이해가 되지 않는지 다시 되물어왔다. “아빠, 나는 할아버지와 있어도 나고, 엄마하고 있어도 나잖아. 그런데 왜 8분음표는 바뀌는거야?”.


<음의 길이를 측정하려면 자가 필요하지 않나요?>

아이의 느린 이해가 답답했지만 ‘음표의 길이’라는 개념은 나도 아이 또래일 때 전혀 이해하지 못했었다. 부끄러운 고백이긴 하지만 나는 초등학교 때 ‘음표의 길이’를 묻는 문제가 왜 음악 시간에 나오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했다. ‘길이’를 재는 문제라면 응당 수학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길이를 정확히 측정하기 위해서는 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기억 나는 문제가 있다. 음표를 길이에 따라 나열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온음표 < 2분음표 < 8분음표(♪) < 잇단음표(♬)’ 순으로 적었다. 자로 길이를 쟀을 때 잇단음표가 가장 길었기 때문이다. 온음표가 네 박을 표시하기 때문에 이 중 가장 길다는 것은 중학생이 되어서야 알았다. 그러니 초등학생 때 나는 8분음표가 한 박인지 반 박인지 몰랐던 것은 물론, 어떤 물체가 아닌 소리인 ‘음’에도 길이라는 것이 있다는 관념 자체가 없었다.

내가 ‘길이’의 의미가 상황과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려워 한 것이나, 아이가 ‘8분음표’의 의미가 박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려워 한 것이나 어찌보면 같은 문제라고도 할 수 있다. 같은 말, 같은 사람, 같은 존재라도 다른 위치에 놓이면 전혀 다른 의미,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비슷한 문제는 플라톤의 대화편 <파이드로스>에서도 나타난다. 이 대화편에는 ‘파르마콘’이라는 말이 잠깐 언급되는데 이 말은 약국 문 앞에 가면 볼 수 있는 ‘pharmacy’의 어원이다. 그런데 파르마콘은 ‘치료’를 의미하는 동시에 ‘독약’이라는 상반되는 뜻을 갖는다. 그래서 번역자들은 문맥에 따라 이 말을 때로는 ‘치료’로, 때로는 ‘독약’으로 번역하는데 언뜻 생각해보면 하나의 말에 이렇게 상반된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지만, 약을 잘못 사용하면 독이 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8분음표가 한 박도 되고, 반 박도 될 수 있다는 것은 파르마콘이 약도 되고, 독도 된다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아이의 질문대로 아이는 할아버지와 있을 때와 엄마와 있을 때, 혹은 유치원에 있을 때와 집에 있을 때 항상 똑같은 아이일까? 8분음표의 의미도, 길이의 의미도, 파르마콘의 의미도 상황과 문맥에 따라 달라진다면 아이의 존재도 누구와 있는지에 따라, 어디에 갔는지에 따라,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마다 달라지고 있다고 봐야 한다. <다중인격의 심리학>이라는 책에서는 인간은 그 어느 누구도 완전히 일관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다중적인 인격을 갖는 것이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 더 유리하다고 한다. 나 역시 아이 엄마와 있을 때, 아버지와 있을 때, 혹은 동료나 모르는 사람과 있을 때 대화 내용은 물론 행동하는 방식, 말투까지 달라지기도 한다. 나는 ‘하나의 나’인 동시에 ‘여러 종류의 나’이기도 하다. 아이 역시 마찬가지다. 아이는 할아버지에게는 응석을 부리지만, 아빠에게는 잘 그러지 않는다. 8분음표가 반 박이기도 한 박이기도 한 것이 모순이 아닌 것처럼, 할아버지와 아빠의 다른 육아 원칙도 아이에게는 전혀 모순적이지 않을 수 있다. 아이의 질문에 이렇게 답하고 싶다. “할아버지와 있을 때와 아빠와 있을 때 너는 모두 같은 하나의 너야. 하지만 할아버지에게는 밥도 먹여 달라고 하지만 아빠에게는 그러지 않지? 누구와 있느냐에 따라 다르게 행동하게 되지? 8분음표도 똑같아. 8분음표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박자에 따라서 한 박도 되고 반 박도 되는거야”.

파르마콘에서 독을 빼내고 약만 남기려는 시도, 즉 세상과 사람을 단 하나의 방식으로만 보려고 하는 것은 플라톤 철학만큼이나 오래된 인간의 습관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에게 정답을 주입시키고, 외우게 하고, 꿈도 하나만 꾸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보다 가치 있는 교육은 그런 사고의 습관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아닐까? 세상은 온갖 모순으로 가득 차 있고, 변하지 않는 것도 별로 없다는 것을 말이다.

아이들에게 세상이 얼마나 모호한지를 가르쳐주자. 장난감 자동차는 실제의 자동차가 아니기에 ‘가짜’라고 믿는 아이에게 실제로 눈 앞에 존재하는 이 장난감이 왜 가짜라고 생각하는지 물어보자.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여전히 ‘같은 나’라고 생각하는 아이에게 키도 크고 생각도 달라졌는데 어째서 ‘같은 나’라고 말할 수 있는지 물어보자. 바로 그 때 “여러 종류의 나”가 서로 섞이면서 아이는 세상에 단 하나 밖에 없는 존재로 자라나게 되는 것이리라. 단번에 파악할 수 없는 깊이를 가진 존재로 말이다.


키자니아 7월호에 쓴 글이다.
얼마 전에 파트너가 시킨대로 아이와 음악 이론 책을 공부하다가 생겼던 일을 <키자니아> 7월호에 썼다. 음의 길이를 이해 못하는 것까지 닮은 아이를 보며 한숨과 웃음이 동시에 생긴다. 음에도 길이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가 그 떄는 왜 그렇게 이해하기 어려웠을까? 나는 8분 음표의 길이가 박자에 따라 달라지는 것처럼 인간 존재도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당연하다는 '당연한 이야기'를 썼지만 라캉식으로 말하자면 나는 소타자든 대타자든 아무 것도 잃고 싶지 않고, 내 아이에게도 마찬가지 바램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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