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멸감 - 굴욕과 존엄의 감정사회학
김찬호 지음, 유주환 작곡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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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모멸감을 준 사람들에 대해서도, 내가 모멸감을 준 사람들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해준 책이었다. 그리고 내게 모멸감을 준 대부분의 사람들은 학교 선생님들과 교수였음을 새삼 확인했다. 책을 다 읽고 나자 당시 내가 느낀 모멸감은 더욱 또렷해졌고 반드시 되갚아 주고 싶다는 생각이 나를 사로잡는다. 모멸감이 수치심을, 분노를 촉발시키는 최악의 방아쇠라는 저자의 말은 확실히 맞는 말이다.

교통방송에서 모욕과 모멸을 주제로 한 나만의 삼부작 소개가 끝났다. 모욕 당하지 않는 사회는 있을 수 없겠지만 모욕을 주고, 모멸감을 느끼도록 하는 사회와 싸우는 사회는 가능하다. 그리고 그 싸움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시민적 자부심일 것이다. 장애, 가난, 지방대 출신, 지방 거주, 비만, 여성이라는 사실이 자부심이 되는 사회에서 모욕과 모멸을 하는 이들이야말로 모욕과 모멸을 당하게 될 것이다. 본색소사이어티가 생각하는 사회는 그런 사회다.

 

 

모멸감

-굴욕과 존엄의 감정사회학

 

1. 안녕하세요? 이번 주는 어떤 책을 소개해주실 건가요?

 

혹시 2011년 7월 노르웨이에서 벌어졌던 테러를 기억하시나요? 어느 괴한이 오슬로 정부 청사 인근에서 차량 폭탄 테러를 일으켜서 8명을 숨지게 했고, 곧바로 노동당 청년캠프가 열리고 있던 섬으로 건너가 한 시간 동안 구석구석을 뒤지고 다니면서 69명을 사살한 일이 있었는데요, 섬에 있던 청년들은 이곳 저곳으로 쫓겨다니면서 사냥을 당했습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기억하고 계실텐데요, 범인은 브레이비크라는 32세 청년이었고, 단독범행이었습니다. 브레이비크가 왜 이토록 끔직한 짓을 저질렀는지 아시나요?

 

2. 글쎄요, 브레이비크도 노르웨이 사람이니까 이슬람 원리주의의 테러인 것도 아닐테고, 혹시 사이코 패스였던 것일까요?

 

저도 이번에 범행 동기를 처음 알게 되었는데요, 학창 시절 브레이비크에게 이런 경험이 있었다고 합니다. 브레이비크는 학창 시절에 심한 괴롭힘을 당했는데, 그때 그를 구해준 이는 파키스탄계 이민자 친구였다고 해요. 그러면 고마워 해야 할 것 같은데, 브레이비크는 오히려 굴욕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도움을 준 이는 이민자였기 때문이에요. 평소에 자기보다 열등하다고 업신여겼던 외국인에게 보호 받은 일이 너무 창피했다고 합니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부터는 브레이비크는 신체적인 강인함을 키우는 일에 집착하기 시작합니다. 또한 여성들에게 남자로서 인정받고 싶었는데요, 미국으로 건너가 북유럽 사람들은 잘하지 않는 성형 수술까지 하고 왔는데, 주변의 여성들은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고 해요. 그는 매춘으로 그 박탈감을 해소하며 여성에 대한 복수심을 키워 갔습니다. 학살을 할 때 예쁜 여학생부터 살해했다는 증언도 있습니다. 즉 브레이비크는 자기가 업신여기던 사람에게서 도움을 받았다는 모욕감, 여성들로부터 외면당했다는 굴욕감 때문에 살인마가 된 것이지요.

(*세바시 강연에서는 브레이비크가 터키계라고 말씀하셨음)

 

3. 아, 여성들에게 인정 받고 싶어서 성형까지 했는데 모두에게 외면 당했다면 비합리적이긴 하지만 수치심이나 굴욕감이 생겼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사실 우리 방송을 들으시는 분들이라면 아시리라 생각하는데요, 제가 그동안 ‘모욕감’이나 ‘굴욕감’이라는 주제로 책을 자주 소개해왔는데요, 김애란 작가의 소설집 <비행운>, 김현경 선생의 <사람, 장소, 환대>도 모두 갑이 을에게, 을이 병에게 모욕을 주는 이야기와 그 때 사람들이 느끼는 생생한 경험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모욕감을 주제로 한 책 삼부작 중 마지막 책을 소개해드릴까 하는데요, 바로 출판사 <문학과 지성사>에서 만들고, 김찬호 선생님이 쓰신 <모멸감>이라는 책입니다. 김찬호 선생님은 사회학 연구자인데요, 한국 사람들 마음 속에 얽혀 있는 수치심, 열등감, 자기혐오, 분노, 두려움 등의 감정이 어떻게 폭력적으로 분출되게 되는지, 모멸감이라는 감정이 한국 사회의 어떤 역사적 맥락에서 나온 것인지를 이 책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4. 모욕감, 모멸감 이런 감정들에 대해서 말씀을 해주셨는데, 모욕감, 모멸감은 모두 비슷한 말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일까요? 수치심보다는 모멸감이 더 피하고 싶은 감정인 것 같긴 한데요..

 

네, 먼저 모욕감부터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모욕감은 다른 사람이 자기를 대하는 태도에서 느껴지는 감정인 거죠. 많은 경우는 모욕감도 일종의 수치심으로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모욕을 당하면 수치심이 생겨나니까요. <디스커넥트>라는 영화가 있는데요, 중학교 남학생들이 벤이라는 학생을 골탕 먹이는 내용이 나옵니다. 외톨이로 지내며 음악과 SNS에 빠져 지내는 벤에게 두 명의 학우가 제시카라는 미모의 가짜 여성 아이디를 만들어 다가갑니다. 벤과 제시카는 친해지는데요, 제시카는 자신의 누드 사진을 보내면서 벤에게도 사진을 찍어 보내달라고 해요. 이게 친구들 장난인 줄 모르고 벤은 알몸에 사랑의 노예라고 쓰고 셀카를 찍어 보냅니다. 다음 날 두 학생은 전교생에게 이 사진을 발송하고, 벤은 사랑의 노예로 불리다가, 결국 자살을 감행하게 됩니다. 이런 경우 벤이 느낀 감정이 모욕입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거의 말로 쓰시긴 하지만 오늘 책의 제목인 <모멸감>은 모욕감과는 좀 뉘앙스가 다릅니다. 앞서 브레이비크가 느낀 것도 굳이 말하자면 모욕감이 아니라 모멸감이라고 할 수 있어요. 모멸감은 ‘모욕’과 ‘경멸’이 섞여 있는 단어거든요. 모욕이 적나라하게, 상대에게 직접 공격적인 언행을 가하는 거라면, 경멸이나 멸시는 은연 중에 무시하고 깔보는 태도에 더 가깝습니다. 그러니까 아무 생각 없이 모욕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지만 상대를 경멸하는 것은 무심코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거든요. 그리고 많은 경우는 모멸감이 모욕감보다 훨씬 더 사람을 기분나쁘고 수치심을 일으키도록 만듭니다. 브레이비크가 수치심을 느낀 것은 학교에서 당한 집단 괴롭힘 때문이 아니라 이민계 학생에게 도움을 받았던 것이 결정적이었던 거거든요. 이민계 학생이 브레이비크에게 일부러 수치심을 느끼도록 하기 위해서 했던 일이 아닌데도 브레이비크가 모멸감을 느낀 거죠.

 

5. 꼭 어떤 사람이 내게 모욕을 주는 것이 아니라도 어떤 상황 때문에 모멸감 같은 것이 느껴질 때도 많은 것 같아요. 을의 입장에서 갑의 위치에 있는 사람을 찾아가서 오랫동안 기다렸는데 만나지 못했다면 갑이 그럴 의도가 없었다고 해도 을은 무시당했다는 기분이 들죠.

 

이 책의 저자인 김찬호 선생님은 한국 사회가 모멸감을 주고, 모멸감을 느끼는 사회라고 진단하는데요, 모멸감을 느끼거나 모멸감을 느끼도록 만드는 거나 모두 낮은 자존감에서 비롯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무시하는 표정, 비웃는 눈빛, 퉁명스런 말투로 상대에게 모멸감을 주는 사람의 경우도 상대를 무시해야지만 자기 자신이 그 위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열등의식에서 나온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멸감을 느끼는 경우도 상대가 나는 이런 대우를 받으면 안되는데 나를 무시했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비롯했으니까 낮은 자존감이 원인이 되는 거죠. 하급자가 자신을 깍듯이 떠 받들지 않는다고 호통을 치는 공위 공직자들은 자존감이 낮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하급자가 자신을 무시했다는 거죠. 정작 무시한 사람도 없는데 말이죠. 실제로 우리나라는 개인의 자부심이 매우 낮은 사회라는 통계가 있습니다. 2005년 자료인데요, 미국에서 조사한 연구에 따르면 조사 대상인 53개국 중 한국은 개인의 자부심 수준이 44위였다고 해요. OECD 36개국 중 삶의 질 수준은 2013년에 27위였다고 합니다.

 

6. 개인의 자부심이 낮은 사회에서 삶의 질이 높을 수가 없는 것은 당연한 결과인 것 같아요. 그러면 한국 사람들이 이렇게 자존감이 낮고, 개인에 대한 자부심이 낮은 이유가 뭘까요?

 

이 책의 저자인 김찬호 선생님은 그 이유를 다각도로 분석하시는데요, 전부 소개해드리기는 어려워 하나만 소개해드릴까 합니다. 혹시 일본에서는 ‘부라쿠민’이라는 집단이 있는 것 아세요? 부라쿠민은 가축의 도살, 사형 집행, 피혁 가공 업체 등에 종사한 천민집단의 후손들을 말하는데요, 일본은 불교 사회라서 이런 살생과 관계된 일은 혐오 직업이었다고 해요. 지금도 그래서 차별 받는데, 기업에서도 만약 부라쿠민이라는 것이 드러나면 음성적으로 해고하거나 애초부터 합격시키지 않을 정도라고 합니다. 유력한 총리 후보가 부라쿠민 출신이라고 지명을 받지 못했던 적도 있구요, 반대로 1990년대 호소카와 총리가 지명될 때는 호소카와가 영주 가문 상류층 출신이라는 것이 유리하게 작동했다고 해요.

 

7.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일은 거의 없는데, 가까운 일본이라도 상당히 다르네요.

 

맞습니다. 한국은 전통적인 신분제도는 거의 대부분 무너졌구요, 핏줄에 따른 특혜나 불이익도 거의 없지요? 양반의 후손임을 내세워도 유리할 게 별로 없고, 상놈 집안 출신임이 밝혀져도 낙인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처럼 혈통적 신분제가 깔끔하게 정리한 사회는 세계적으로도 많지 않아요. 거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는데요, 18세기부터 평민들이 돈을 주고 호적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기 시작하면서 양반수가 늘어났구요, 19세기가 되면 인구 절반이 양반이 되니까 양반이 귀족 노릇하기가 어려워지기 시작합니다. 게다가 일제 강점기가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요, 식민지배가 되니까 어차피 다 식민지 백성인데 거기서 반상을 따지는게 우스운 일이 되는 거죠. 그래도 일제 때는 어느 정도 양반의 지위가 유지되었는데 결정적으로 6.25 전쟁이 신분제를 쓸어버렸습니다. 전쟁이 나니까 기존 질서가 모두 뿌리 뽑히게 되고, 사람들이 전국적으로 피난 가니까 지역 사회에서 양반 노릇하던 사람들이 더 이상 그렇게 할 수 없게 된 거죠. 그런데 문제는 이런 신분제 청산이 신분제에 억눌렸던 사람들이 힘을 모아 이뤄낸 성과가 아니라 식민지, 전쟁, 산업화의 결과라서 겉으로 드러나는 신분제는 없어졌지만 신분 의식은 그대로 남아 있게 된 겁니다. 그런 신분 의식이 과거 신분을 대신해 학력, 빈부, 외모, 피부색, 지위 등으로 위계질서를 만드는 기준이 되게 된 거지요.

 

무슨 가게만 가면 ‘주인 나오라고 해!’라는 사람들 있죠? 그런 사람들은 주인 아닌 아랫것들과는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는 신분의식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겁니다. 신분의식이 아주 옛날부터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서 철저한 서열의식, 귀천관념,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짓밟으면서 느끼는 쾌감을 느끼도록 만드는 거죠.

 

8. 갑과을 사회도 그런 신분 의식이 만들어 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요즘은 중매도 당사자들이 직접 만나지 않고 예전 신분제 사회 때처럼 당사자의 부모들이 나와서 본다고 하더라구요.

 

홍세화 선생님이 쓴 <나는 파리의 택시 운전사>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파리에서 택시 운전하며 사십 세쯤 되어 보이는 두명의 승객은 회사의 간부로 보였고, 한 사람은 삼심 여세로 부하직원이었다고 해요. 운전사가 한국인인지 모르고서 그들이 나눈 대화를 듣고 홍세화 선생님은 적지 않게 충격을 받습니다. ‘근데 이 친구 월남애지?’라고 한 사람이 묻습니다. “글쎄요. 여기에 인도 지나 사람이 많으니까요”라고 부하직원이 답하자 “아냐 내 말이 맞아. 월남애가 틀림 없어. 깡마른게 월남애가 틀림 없다고”. “보트피플아냐?”라고 말하자 홍세화 선생이 뒤를 살짝 돌아봤다고 합니다. 그러자 하는 말이 “뭘 돌아봐 인마. 운전이나 잘할 것이지. 그래도 이 자식들 출세했어. 파리에서 택시 운전을 다 하고. 용됐지, 용 됐어”.

 

9. 피부색으로, 직업으로 서열을 나누는 우리의 슬픈 자화상이네요. 이제 정리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제가 은연 중에 누군가에게 모멸감을 주거나 수치심을 준 적이 얼마나 많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의도를 가지고 한 일은 아니지만 누군가를 기다리게 만들고, 퉁명스럽게 대하고, 연락을 끊어 버리고... 어쩌면 그 모든 것이 저의 낮은 자존감에서 비롯되는 것일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을 하며 반성을 많이 했습니다. 그 분들에게 모두 사죄하고 싶은 마음인데요, 청취자분들도 이 책에서 먼저 자기 자신에게는 그런 점이 없었는지 보실 수 있으면 좋겠어요.

 

요즘 취업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모욕 스터디’라는 것이 있습니다. 면접관들이 하도 대답하기 힘든 곤혹스럽고 기분나쁜 질문을 던지니까 거기에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답하도록 연습하는 건데요, 예를 들면 면접관들은 “외모 때문에 고생 좀 하겠네요”. “그 나이가 되도록 뭐했어요?”, “공부 엄청 못했나 봐요”라는 식으로 모욕적인 말을 압박 면접이라는 명분으로 합니다. 그걸 대비하겠다는 건데요, 면접 경험이 있는 75%가 이런 질문을 받고 불쾌했다고 합니다. 약자일 수밖에 없는 취업준비생에게 모욕을 주는 것이 면접의 일부라는 것은 직장 생활에서는 이런 모욕이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기도 하겠지요.

 

생각 없이 한 말과 행동이 누군가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되기도 합니다. 타인에 대한 우리의 감수성이 회복되고, 사람들 사이의 결속을 통해 모멸감 사회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이 책을 말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품위를 지키려는 노력이 있어야 하는데, 거기에는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공부하는 것도 한 몫을 하지요. 이 책은 구성이 특이한데요, 책을 사면 책과 함께 음악이 담긴 CD가 있습니다. 유주환씨가 모멸감을 주제로 한 곡을 만들었는데요, 이 책을 읽으시고 음악을 들으시면서 굴욕 주는 사회에서 우리의 존엄을 지켜나가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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