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본미술 순례 2 + 이 한 장의 그림엽서 나의 일본미술 순례 2
서경식 지음, 최재혁 옮김 / 연립서가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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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의 불신 서경식의 광학이론

 -서경식, 『나의 일본미술순례 2 + 이 한 장의 그림 엽서』(연립서가)를 읽고.




서경식은 카라바조의 ’토마스의 불신‘을 보기 위해 포츠담으로 갔다.


“몇 년 전, 나는 런던에서 옆구리의 상처를 자신의 두 손가락으로 억지로 벌리고 있는 괴이한 예수상을 보았다. 홀린 듯이 조사해 보니, 그것은 ‘의심하는 토마스’ 도상의 일부인 듯했다. 그리고 동시에 당시 동독의 포츠담에 카라바조의 걸작이 현존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도판으로 보니 토마스가 손가락을 예수의 상처에 쑤셔 넣고 있었다. “어때, 이 정도면 되겠는가?” 하듯 상처를 보여 주는 예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일까?” 하며 의심스러운 눈으로 손가락을 들이미는 토마스. 모든 종교에 전해지는 기적담을 넘어, 너무도 신랄하고 날카로운 인간 관찰이 이 그림에서 보인다. 이런 인간 관찰에 걸맞은 표현은 카라바조의 무자비한 리얼리즘에 의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그렇게 직감한 나는 어떻게든 실물을 보고 싶어 오래도록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다.


1990년 여름, 드디어 포츠담을 방문해 폐허처럼 보이는 상수시 궁전의 회화관에서 소원을 이루었다. 채광창에서 들어온 햇빛이 마침 토마스의 손가락 끝부분에 반사되어 보기 힘들어 조바심이 났던 기억이 난다.”

       — 『나의 일본미술순례 2 + 이 한 장의 엽서』, 연립서가, 235–236쪽, 카라바조의 ‘토마스의 불신’ 편 중에서




이 마지막 구절을 읽는 순간, 나도 모르게 ‘아…’ 하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하필 그 여름, 햇빛은 토마스의 손가락 끝에 가닿아 반사되었고, 이제야 작품의 구석구석을 살피려는 관람객을 조바심 속에 몰아넣었다. 이 문장은 마치 내가 포츠담의 상수시 궁전 회화관에서 카라바조의 작품 앞에 서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이것이 서경식의 문장이다. 『어둠에 새기는 빛』을 읽은 뒤, 나는 서경식의 글쓰기를 ‘회화적 글쓰기’라고 부른 적이 있다. 여기서 회화적이라는 말은 단순한 수사적 특징을 가리키지 않는다. 서경식은 현실을 논리적으로 해설하기보다, 장면을 배열하고 이미지를 병치하며 감정의 색조를 대비시킨다. 그의 텍스트는 서사보다는 배치로, 주장보다는 응시로, 설명보다는 감응으로 나아간다. 이 글에서도 그러한 회화적 글쓰기의 특성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토마스의 손가락 끝에 반사된 빛 때문에 그림을 제대로 볼 수 없어 조바심을 느끼는 한 동양인의 모습. 이 문장, 이 이미지를 통해 그는 무엇을 보여주려 했던 것일까..


“이런 인간 관찰에 걸맞은 표현은 카라바조의 무자비한 리얼리즘에 의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서경식은 사진이나 복제, 재현이 아닌 실물을 보러 간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실물 앞에 서서도 가장 결정적인 지점은 빛에 의해 가려진다. 현존 앞에서도 진실은 끝내 완전히 드러나지 않는다는 경험이다.


이 장면은 토마스의 불신과 정확히 겹쳐진다. 토마스가 보면서도 믿지 못해 손을 들이미는 인물이라면, 서경식은 보려고 하지만 끝내 완전히 보지 못하는 관람자다. 그림 속의 의심은 이렇게 관람자의 경험으로 전이된다. 이 순간, 서경식은 더 이상 그림 바깥의 해설자가 아니라 또 하나의 ‘의심하는 토마스’가 된다. 그가 의심하는 것은 무엇일까. 세상은 점점 좋아지å고 있으며, 이를 입증할 증거는 충분하다는 말들 앞에서 언제나 “과연 그럴까?” 하고 되묻던 그의 태도, 그리고 ‘진실은 끊임없이 말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던 그의 말 속에는, 진실이란 가만히 놓아두면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며, 안간힘을 써서 보려 하지 않으면 끝내 보이지 않는다는 감각이 담겨 있었던 것은 아닐까.


카라바조는 흔히 ‘모든 것을 드러내는 리얼리즘’의 화가로 이해된다. 그러나 이 문장은 리얼리즘을, 아니 카라바조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말하는 듯하다. 리얼리즘이란 모든 것을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보고자 하는 욕망과 끝내 닿지 못함을 함께 경험하게 하는 것이라고. 카라바조는 토마스의 의심을 남김없이 재현하려 했다기보다, 확인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 자체를 날것 그대로 드러낸다. 그의 리얼리즘은 모든 것을 보여주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그는 인간이 얼마나 끝까지 확인하고자 하는 존재인지를 보여준다. 믿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믿기 위해 손을 들이미는 인간의 모습. 그러나 그 손끝은 언제나 어딘가에서 가려지고, 빛에 번들거리며, 시야에서 벗어난다. 우리는 보고 싶어 하고, 만지고 싶어 하지만, 끝내 그것을 완전히 소유하지는 못한다.




이 책의 ‘부서진 말’에서 세간티니의 〈알프스의 한낮〉이라는 작품에 하라 다미키의 글을 겹쳐 읽으며 서경식은 이렇게 말한다.


“죽음은 어둠에, 삶은 빛에 곧잘 비유된다. 그러나 어둠과 죽음, 빛과 삶은 정말로 대응하는 것일까? 고지에서 맑게 갠 하늘을 올려다보면 파란 하늘이 끝 모를 암흑으로 보인다. 너무 투명한 대기는 모든 것을 흡수한다. 너무 밝은 빛은 어둠으로 통한다. 빛을 그려 내려 한 세간티니는 고지로, 또 고지로 주거를 옮겨서는 홀로 죽었다. ‘승천’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하는 죽음이다.” (185쪽)


“〈알프스의 한낮〉은 얼핏 보면 ‘평화’나 ‘목가적’이라는 형용이 가장 잘 어울리는 듯한 그림이다. 그 ‘목가적’인 풍경 속에서 하라 다미키는 너무 밝은 빛의 마魔를 느꼈을 것이다. 부서진 인간의 신경은 가장 평화로운 일상 속에서도 ‘뾰족한 바늘 같은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186쪽)


서경식의 광학 이론은 그의 근대론이기도 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너무 밝은 빛은 진리를 은폐한다. 그것은 미라기 보다 마에 가깝고, 밝음보다는 암흑에, 삶보다는 죽음에 더 가까운 상태다. ‘뾰족한 바늘 같은 것’은 빛이면서 동시에 빛(light)으로 표상되는 계몽(enlightenment)의 근대를 가리킨다. 그 빛은 얼마나 많은 이들을 무자비하게 찔러 대었는가. 햇빛은 손가락 끝에서 반사되어 시야를 가리고, 관람자를 조바심 속에 몰아넣는다. 빛은 진리를 비추는 동시에, 지나치게 강할 때는 오히려 시선을 방해한다. 이 한 문장에는 서경식이 제기해 온 근대의 아포리아가 응축되어 있다.




『나의 일본미술순례 2 + 이 한 장의 그림엽서』는 일본의 미술가들에 대한 글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우리가 통과하고 있는 근대와 근대적 문제에 관한 글이면서, 근대를 살아가는 나와 우리의 욕망, 그리고 가느다란 희망의 가능성까지 더듬어가는 하나의 리얼리즘 회화라 할 수 있다.


빛은 결국 사라지고, 그림은 다시 또렷해질 것이다. 그러나 순간의 조바심은 오래 남는다. 그때 완전히 보지 못했기 때문에 오히려 오래 기억하게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이 서경식이 카라바조를 경유해 말하고자 의심 진짜 형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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