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팅도 오랜만에 하는 탓일까요, 뭔가 부끄럽고 좀 어색하군요.

음, 볼드저널 15호 부부위기 편에 글을 쓰게 되어, '요즘 부부 공생의 위기'라는 주제로 말할 기회를 얻어 지난 금요일, 헤이그라운드에 다녀왔습니다.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시는 이혜민 에디터님과 제가 여러 잡지를 통해 글을 접해 온 장근영 박사님과 함께 스피커가 되었어요. 지난 해는 미술관에서만 주로 강의를 했는데, 올해 처음 강의는 헤이그라운드에서 시작했습니다. 뭔가 생각이 신선하게 되는 것 같은 멋진 장소였어요. 

이혜민 에디터님의 강연에선 '요즘 부부' 의 군상이 이토록 다양한지 놀라웠고, 다양한 '결혼' 모형을 만들어가는 아방가르드 부부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에 제가 왜 '요즘 부부'가 아닌지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장근영 박사님의 강의는 부부 생활은 사회 생활과 달리 자신의 돌아이-근성을 숨길래야 숨길 수 없는 영역이니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깨닫고 고쳐가려는 노력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지혜를 얻었습니다. 

정돈된 강의 형태는 아니었지만, 정돈되지 않았기에 좀 더 기분좋은 느낌이 있고, 그럼에도 플로어에 계신 분들이 저희 스피커들의 말이 무엇이든 다 들어줄 의향이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자리였습니다. 북토크 장소 사진을 못찍어둔 것이 아쉽습니다. 아마도 그날 다녀가신 분들이 또 올려주시겠죠. 저는 강연 원고를 써놓고도, 강연원고에 맞춰 제대로 말을 하고 왔는지 돌아오는 길에 아쉬움도 많이 남았습니다. 말이 좀 많았나 하는 후회도 남았습니다. 그래도 장근영 박사님과의 만남도, 오랜만에 볼드저널의 여러 분들과 만날 수 있어 참 좋았습니다. 기분 좋은 시간을 선물 받은 느낌이었습니다.


좀 길지만, 제가 말한 내용의 전문을 올려 보려 합니다. 혹시 공유하신다면 댓글 남겨주시면, 제가 잠을 좀 더 편하게 잘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볼드저널20분 스피치/ 헤이그라운드/ 요즘 부부, 공생의 기술/ 부부관계에서 해석하지 않는다는 것.


저는 철학을 공부했습니다. 철학의 임무는 ‘보는 것’이라기 보다 ‘잘 보는 것’에 있죠. 철학자들은 눈으로 보이는 것이 결코 세계의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세계 이면에서 이 세계를 가능하게 만드는 어떤 근본적인 원리를 보려고 했습니다. 여러분들도 아마 잘 아실 ‘이데아’ 같은 것이죠. 플라톤은 눈에 보이는 것은 ‘가상’이라고 했습니다. 눈이 아니라 지성으로 세계를 봐야 한다고 했죠. 그래서 이데아 같은 ‘진짜 세계’는 특별하게 훈련된 사람에게나 보인다고 했습니다. 형이상학이란 말은 영어로 ‘Metaphysics’인데요, 피직스 physics라는 말에 ‘메타’meta라는 말이 붙은 겁니다. 역시 Physics, 즉 물리적 세계 이면의 다른 세계가 있다는 생각이 이런 말을 만들어낸 겁니다. 저는 원래 신학을 공부해 목사가 되고 싶었는데요, 그렇게 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신학도 철학과 좀 비슷한 데가 있습니다. 이 세계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이 만든 ‘눈에 보이지 않는 섭리’에 따라 움직인다는 거죠. 철학자나 신학자 뿐 아니라 수학, 물리학도 어쩌면 좀 비슷합니다.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더 잘 보려는 것’이죠.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는 이 세계의 ‘원리’를 찾아내려고 했던 겁니다.











저는 ‘철학자 아빠의 인문 육아’라는, 지금 생각해보면 좀 웃긴 제목의 책을 낸 적이 있습니다. 이 책의 목표도 당시 세 살이던 제 아이를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더 잘 보는 것’을 돕는 것에 두었죠. 그래서 이 책은 아이가 하는 행동이나 제 마음을 움직이는 어떤 ‘원리’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아이가 하는 행동에는 그냥 드러난 이유 말고 ‘진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내가 느끼는 불안은 내 마음의 본질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고 육아에 접근했습니다. 그래서 아이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책을 찾아보며 공부했죠. 말도 통하지 않는 아이를 키우며, 저는 아이를 최대한 이해해보기 위해 저 나름대로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아이를 최대한 열심히 관찰하고, 아이 행동의 의미를 섬세하게 이해하고자 애를 썼습니다.

니체가 한 말 중에 “사실은 없다, 해석이 있을 뿐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니체의 말을 떠올리며 제 아이를 해석하고, 저를 해석하려고 했죠. 저는 그것이 철학자들의 임무이고, 제가 잘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오늘 ‘부부위기’, 공생의 기술이라는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 자리인데요, 저는 부부 관계 전문가도 아니고, 제 파트너와 특별한 위기가 있는 것 역시 아닙니다. 그래서 제게만 국한될 수밖에 없는 경험을 공유하는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됩니다. 저희는 동갑내기, 문과입니다.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철학’과 ‘해석’에 대해 말씀을 드렸는데요, 저는 부부생활에도 서로를 향한 ‘해석’이 필요하다, 그런 말씀을 드리려는 것일까요? 사실은 그와는 정반대입니다. 저는 철학이 이런 식으로 ‘원리’를 밝히기 위해, 우리 눈앞에 보이는 것을 무시하는 것에 단호하게 반대합니다. 굳이 말하자면, 저는 ‘해석’에 반대하고, 해석이 부부 관계를 늘 힘들게 한다는 말씀을 이제 드리고자 합니다. 세 살 아이처럼 말이 잘 통하지 않는다면, 아이에 대한 ‘해석’이 필요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제 아이와 저, 두 사람 사이의 불행도 지금은 ‘해석’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제 파트너, 그러니까 아내를, 제 아이를 해석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부부관계에서 해석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요? 우선 저는 제 파트너가 하는 행동과 하는 말 이상의 ‘저의’나 ‘의도’에는 가능한 관심을 갖지 않으려 합니다. 물론 서로 하는 농담은 예외죠. 농담은 해석을 해야 재밌습니다만, 제 파트너가 제게 하는 말을 가능한 한 말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 갈등을 줄이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되었습니다. 처음엔 파트너가 제게 하는 말을 듣고는 저를 무시하는 건가 하고 하는 생각을 자주 했습니다. 그런데 살다보니 제 파트너가 저를 무시할 의도는 없어요. 그런 식으로 파트너가 별 생각 없이 한 말을 파고 드는 건 같이 사는데 거의 도움이 되지 않더군요. 그래서 본의, 저의, 의도 이런 것 묻지 않고, 파트너를 향해 자동적으로 이뤄지는 제 내면의 해석과 싸우려고 마음을 먹게 된 겁니다.

이를테면 ‘살 좀 빼’라는 말은 제게는 좀 기분 나쁜 말입니다. 이 말과 함께 이 말이 갖는 진의가 동시에 바로 해석되기 때문이죠. ‘살을 빼라’는 말을 듣는 순간, ‘이 사람이 내게 이런 말을 하다니 나를 무시하고 있다’, ‘나를 뚱뚱해서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구나’, 더 나아가 ‘내가 뚱뚱해서 내 배우자가 나를 부끄러워 하는구나’. 물론 그 반대의 좋은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너를 사랑해서 염려가 되니까 살을 좀 빼자” 라거나, “네 건강을 위해서 살을 빼자” 정도로도 이해할 수 있는 말이죠. 살 빼라는 말을 들으면 보통은 기분이 나쁩니다. 저는 철학 연구자로 정체성을 삼고 있으니 여기에서 한 발자국 정도 더 나간 해석을 하죠. “내 파트너는 나를 있는 그대로, 내 존재로 사랑하지 않고, 내 겉모습을 보고 내 행위를 보고 사랑하는구나” 하고요.

아이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식탁에 앉은 아이에게 손 씻고 다시 오라고 하면 아이가 인상을 쓰지요. 인상을 찌푸리는 건 그냥 귀찮아서 그런 겁니다. 다른 의미가 없을 가능성이 크죠. 그런데 저는 저도 모르게 아이의 인상 쓴 얼굴에 대한 ‘관상’ 해석에 들어갑니다. 거의 자동적으로 해석이 이뤄지죠. 저 인상은 ‘아이가 아빠인 나를 무시하고 있다’는 의미로 말이죠. 더 나아가 ‘아이는 음식을 먹을 때 손을 씻는 기본적인 습관조차 형성이 안되었다’로 해석되면 불안이 동반됩니다. 지금 제가 한 해석 중에 사실 그 자체보다 더 나은 진실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있을까요? 해석은 저와 제 파트너, 아이를 모두 불행하게 만듭니다.

저는 오랫동안 해석을 옹호해왔기 때문에 파트너와 싸울 때마다 항상 제 진심을 강조했습니다. 저는 제 파트너가 제 말이나 행위에 대해 ‘사랑의 마음을 담아 해석해주지 않는 것’에 늘 불만을 가져왔습니다. 예전에 제가 어떤 인터뷰에서 “지금 제 파트너는 미국에 있어요”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인터뷰 당시 정말로 제 파트는 미국에 있었죠. 그 인터뷰가 출간되고 그걸 읽은 파트너가 미국에서 전화를 했습니다. “지금 파트너가 미국에 있으면 이전 파트너는 어딨어?”. 저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리가 멍해졌어요. 그러면서 “지금 제 파트너라고 하면 옛날 파트너도 있다는 말이잖아?”라면서 저보고 왜 오해가 생기게 말을 하냐는 거에요. 저는 제 말이 그렇게도 이해될 수 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내 말의 본래 의도가 그게 아니잖아?”라고 했더니, “네가 그런 의도로 말했는지 다른 의도로 말했는지 다른 사람은 관심이 없어. 애초부터 말을 정확히 해야 하는 거지”라는 말이 되돌아왔습니다. “파트너는 지금 미국에 있어요”라고 말해야 한다는 거였죠.











이번 볼드저널 15호에도 잠깐 썼지만 우리 부부의 갈등 아니면 위기는 가끔은 제 부모님으로부터 비롯하는 것인데요, 문제는 제 아버지와 어머니의 표현이 좀 섬세하지 않다는 거에요. 정교하지 않습니다. 생각이 나면 생각나는대로 말씀하시는 스타일, 좋게 말하면 뒤끝 없고 어떻게 들으면 막말에 가까운 말들도 하시죠죠. 그래서 제 파트너가 받는 충격을 완화하려면 저는 자주 제 부모님의 ‘진심’을 강조해야 합니다. 실제로 부모님은 며느리를 정말로 사랑하시니까요. 하지만 제 파트너는 왜 부모님의 모든 말과 행동을 ‘호의적’으로 해석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내 아들은 일하고 있는데, 너는 미국도 가고 참 좋겠다’고 어머니께서 제 파트너에게 말한 적이 있어요. 그런 말을 듣고 속상해하는 파트너에게 제 어머님의 진심을 말해도 별로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상처는 상처니까요. ‘진심’을 왜곡하지 말고, 말과 행동 이면에 있는 서로의 말을 긍정적으로 잘 해석해서, 가능한 서로의 진정성을 잘 해석해서 받아주면 좋은데, 일단 해석이 들어가면 긍정적 해석은 잘 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조금은 다 불완전하고, 상처가 있고, 콤플렉스가 있는 존재들이라 상대의 진심에 초점을 맞춘 해석보다는 자신의 상처에 초점을 맞춘 해석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열등감과 상처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한 서로의 말과 행동에 대한 해석을 중지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파트너의 이런 행동에는 ‘이런 이유’가 있고, 언제나 저 사람은 그런 식으로 행동할 것이라 해석하고 나면, 그 해석은 서로 간의 소통과 이해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방해물로 작용합니다. 저는 파트너가 말하거나 행동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고, 파트너는 제가 늘 자신을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사람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겠죠. 그게 불신이고, 부부위기 자체입니다.

‘진정성’이라는 말이 있는데요, 사실은 이게 상당히 애매한 말입니다. 자주 쓰는 말인데도 그게 뭘 의미하는지 잘 말하기 쉽지 않습니다. 저는 제 파트너에게 제 말이나 행위 자체가 아니라 제 진심, 제 진정성을 봐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제 진심, 제 진정성은 대체 어디 있는 것일까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내 마음 속에 있는 진심, 진정성은 이데아나 신과 비슷한 겁니다. 이데아나 신의 실체가 의심스러운 만큼 진정성과 진심의 존재도 그렇죠. 성서에서는 ‘하나님은 마음의 중심을 보신다’고 하지요. 저는 그 말씀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제 진정성을 보실 수 있죠. 하지만 사람은 제 중심을 보기 어려울 겁니다. 신의 영역을 제가 제 파트너에게 강요할 순 없는거죠.

현대철학에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본질적인 측면에서의 ‘자아’는 없다는 견해에 어느정도 합의를 이룬 듯 합니다. 변하지 않는 본질적인 자아란 없다고 합니다. 자아가 있다고 해도 모든 자아는 계속 변하고 있고 운동하고 있습니다. 자아는 여러 겹으로 되어 있고, 끊임 없이 움직입니다. 이걸 애벌레-주체라는 비유로 말하기도 하죠. 들뢰즈라는 철학자는 우리는 모두 다른 ‘-되기’의 가능성을 지닌 존재라고 합니다. 현대 철학이 변하지 않는 하나의 본질적인 자아 대신 ‘분열증적 자아’를 내세우는 것은 진심, 진정성이란 말이 더 이상 우리 내면의 있는 내 마음을 드러낼 수는 없다는 것을 뜻하죠. 리처드 세넷이란 사람은 심지어 우리에게 “자아란 외양에 있다”, “우리의 진정성은 우리의 겉모습 자체다”라고 말합니다. 상대의 본심을 이해하기 위해 상대를 해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죠. 오히려 상대를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해석’을 그만둬야 합니다. 상대의 말과 행동을, 말과 행동 그 자체로 이해하면 됩니다.
그러려면 말은 좀 더 신중하게 해야 하고, 행동은 좀 더 절제해야 합니다.

해석은 상대를 길들이기 위한 것,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강형욱 씨는 개들의 행동을 보고 해석합니다. 개들은 어느정도는 본능-프로그램에 따라 행동하니까 해석을 하면 원리를 발견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배우자는 아닙니다. 배우자들은 우리가 해석해서 원리를 발견해, 내가 길들일 수 없는 대상입니다. 그래서 부부 관계는 해석을 하지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해 해석불가능한 대상이란 점에서 개를 키우는 것보다 훨씬 더 고된 노동이 됩니다. 상대의 말을 해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오죽하면 ‘산은 산이요 물이 물이요’라는 말이 있는 것일까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은 수행이 필요한 일입니다.


어떻게 하면 있는 그대로 상대의 말을, 해석 없이 들을 수 있을까요? 자신의 콤플렉스나 상처를 잘 이해하고 있어야 상대 말이 ‘의도’가 아니라 ‘말’로 들리게 됩니다. 또 상대가 말을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따뜻한 마음으로 만든 ‘서늘한 말’이 필요합니다. 말을 섬세하게 다듬고, 표현을 위한 다양한 양식이 필요한 거죠. 나의 진정성과 진심은 내 말과 행위에 있습니다. 말하지 않고, 표현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고, 오해할 말을 하고, 오해할 행동을 하면 결국 오해를 삽니다. 그러니까 말을 정교하게 다듬어 가려는 노력이 필요해요. 우리 부모님의 세대에는 말이 거칠어도 남녀의 비대칭적 권력이 부부관계를 유지시켰지만, 우리 세대는 권력으로 유지될 수 있는 부부관계는 없습니다.

부부란 정교한 말의 공동체, 둘만의 섬세하고 은밀한 표현을 나누기로 한 관계입니다. 그래서 저는 부부관계가 유지되기 위해 서로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한 ‘해석’이 필요하다는 말에는 반대합니다. 하지만 해석에 반대한다고 해서 서로를 위해 어떤 노력도 필요 없다는 말에도 반대합니다. 부부 관계가 고된 노동이라면, 서로의 말을 자기 편에 유리하게 해석하지 않으려는 고된 노력, 자신의 진심 그 자체인 말을 가능한 정확하고 동시에 아름다운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15호 볼드저널에서 한 인터뷰이께서 남편이 카페에만 가면 쓰는 말, “오브제”, “시그니처”라는 말이 정말 싫다고 해요. 저 역시 “러프하다”던가 “되어지는”이라는 표현을 정말 싫어합니다. 왜 싫은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싫어요. 파트너는 제가 ‘잃어버렸다’를 ‘잊어버렸다’로 말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렇게 서로의 말을 다듬고, 코드를 맞춰가고, 둘만이 웃을 수 있고, 서로 더 고양될 수 있는 말을 공유하는 것이 부부 공생의 기술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가 제 배우자를 ‘파트너’로 부르는데, 이것도 좀 유별나 보이지만 말을 좀 정교하게 하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아내란 말은 제게는 평등한 언어로 들리지 않아요. 게다가 거기엔 좀 다른 이유도 있는데요, 파트너라는 말로 우리는 서로를 서로의 연기 파트너로 호명합니다. 저와 제 파트너는 서로의 자아가, 행동이, 말이 일관되지 않는 것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일관적일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아니 그렇게 되기는 너무 어렵기 때문에, 그 어려운 과제를 나 자신과 배우자에게 요구하지 않기로 한 것이죠. 그래서 제 파트너에게 좋은 점이 있다면 ‘너 그 때는 이게 좋다고 해놓고, 왜 지금은 또 아니라고 해?’ 같은 질문은 제게 하지 않습니다. ‘왜 책을 사놓고서 읽지는 않아?’ 같은 질문과 비슷한 말이죠. 제 파트너는 제가 책을 살 때는 그 책을 읽기를 희망했고, 지금은 그 책을 읽기를 간절히 희망하지 않는 존재일 수 있는 가능성을 존중합니다. 책을 읽길 원하는 나와 책을 도무지 읽고 싶지 않는 나, 두 명의 다른 남편을 모두 남편으로 받아들여주죠. 친구들 모임에서 좀 목소리가 커지며 거들먹대는 나와 불안이 올라와 아이처럼 행동하는 나, 두 명의 다른 나도 동시에 받아주죠. 그 때마다 제 파트너는 제 연기의 파트너가 됩니다. “저 인간이 왜 저렇게 이중적으로 행동하나? 왜 이렇게 모순적인가? 이랬다 저랬다하는 이유가 뭘까”.. 하고 저를 해석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그냥 모순적이니까요. 그리고 서로가 부부가 되었을 때는 가까운 사이가 된 만큼 서로의 모순을 가장 가까이에서 맞닥뜨릴 수밖에 없지요. 그 모순을 거부할 때 위기는 시작됩니다. 대신 그 모순을 수용하고 부부관계가 성숙하려면 고된 노동이 필요하죠. 제게 그 노동은 제 파트너가 농담할 때 농담 모드가 되기, 고민을 이야기할 때 친구가 되기, 이성적 관계일 때 괜찮은 남자친구가 되기, 감정적으로 힘들 때 아버지 되기 등입니다. 그리고 친구, 남편, 아버지가 된 나 모두 해석할 필요 없이 그냥 ‘나’입니다. 이 중 무엇이 나일지 물을 필요가 없죠.


며칠 전에 파트너가 제게 말하더군요.
“이번 생에 단 한번만이라도 잘생긴 남자와 한번 살아보고 싶다”.
저보고 살을 좀 빼라는 의미로 한 말인 건 나중에 알았습니다. 저는 그 말을 해석 없이 받아들였죠.
“기꺼이 지금 죽어 줄 수 있다”고요. 우리 부부만의 농담 코드입니다.
















눈치 채신 분도 물론 계시겠지만 제가 드린 오늘의 말들은 수잔 손택의 <해석에 반대한다>에서 영감을 얻은 겁니다. 이 철학자는 ‘해석은 비평가가 예술에 대해 예술가에게 가하는 복수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제 파트너와 아이에 대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 비평가처럼 굴지 않을 생각입니다. 제 파트너와 아이들 모두 예술일 뿐 아니라 예술 이상의 존재들이니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