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미디어의 이해 問 라이브러리 10
김주환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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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환 교수가 지은 <디지털 미디어의 이해>[2008. 생각의 나무]는 상당히 흥미로운 얘깃거리들을 던지네요. 1장에서는 기호학을 바탕으로 기호와 미디어를 얘기하며 가추법(가설추리법, abduction)을 다루고 있고 2장에서는 물질 노동에 대비되는 커뮤니케이션 노동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지요. 3장은 매체발전의 역사를 정치, 경제, 문화 변화와 연동하여 살펴보고 4장은 디지털 존재와 디지털 미디어에 대해 철학을 끌어들여 분석하지요.

 

말만 몰랐지 생활에서 널리 쓰는 가추법

 

벌써부터 어렵다고 느껴지시나요. 다행히 지은이는 되도록 이해하기 쉽게 쓰고 있지요. 여러 학자들 주장과 논문을 따오지만 자신의 말로 다시 덧붙여 설명을 해주기에 아주 어렵게 느껴지지 않네요. <가추법>을 보기로 들어볼게요. 가추법이란 말만 어렵지 생활에서 널리 쓰이는 방법이에요.

 

<연역법>

규칙 : 아궁이에 불을 때면 굴뚝에 연기가 난다.

사례 : 아궁이에 불을 땠다.

결과 : 굴뚝에 연기가 난다.

 

<귀납법>

사례 : 아궁이에 불을 땠다.

결과 : 굴뚝에 연기가 난다.

규칙 : 아궁이에 불을 때면 굴뚝에 연기가 날 것이다.

 

<가추법>

규칙 : 아궁이에 불을 때면 굴뚝에 연기가 난다.

결과 : 굴뚝에 연기가 난다.

사례 : 아궁이에 불을 때는구나.

 

천천히 읽어보면 가추법이 별 거 아니지요. 그리고 생활에서는 연역이나 귀납보다 가추를 훨씬 더 많이 쓰고 있지요. 영화관 앞에서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으면 그 영화관에서 상영하는 영화가 재미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땅이 젖은 것을 보면 비가 왔다고 생각하지요. 물론 가추법에는 항상 오류의 가능성이 있지요. 그러나 많은 경우 올바로 결론에 도달하고 기호학자 퍼스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올바로 가추할 수 있는 타고난 능력이 있대요.

 

기호생산 삼중삼각형 이론과 커뮤니케이션 노동

 

지은이가 만든 기호생산 삼중삼각형 모델은 움베르토 에코가 몹시 칭찬했다고 하네요. 기호생산이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물질(기호원료) - 지각하기 - 지각된 것’으로 이루어지죠. 이렇게 지각된 것은 기호화를 거쳐 기호가 되며 기호는 해석이 됨으로써 의미가 생겨요. 여기서 첫 번째, 두 번째라는 것은 설명을 쉽게 하려고 구분한 것이지 기호현상이 꼭 그러한 순서에 따라 차례차례 일어난다는 뜻이 아니에요. 오히려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기호생산 과정은 기호-해석하기-의미부터 이뤄지죠.

 

강의실에서 칠판에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 과정을 거친다. 선생이 어떤 단어를 써야 학생들이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나서, 그 단어를 어떤 크기와 형태로 써야 강의실에 있는 학생 모두가 읽을 수 있을까를 결정한 후, 실제로 손과 팔을 움직여서 글을 쓰는 경우, 기호생산은 세 번째, 두 번째, 첫 번째 삼자관계를 각각 거쳐서 이루어진다. - 책에서

 

이것은 상품생산에도 적용되지요. 생산물이 가치를 지닌 상품이 되려면 반드시 교환의 대상이 되어야만 하지요. 상품이 교환된다는 것은 교환당사자들을 항상 염두에 둬야 하지요. 서로 바꾸기를 원하려면 반드시 상대방의 생산물에 대해서 ‘알고’ 있어야 하지요. 그리고 상대의 생산물의 사용방법을 알아야 하고 마지막으로 상대방의 생산물이 자신의 욕구를 만족 시켜 주리라는 점을 받아들여야 하지요.

 

이러한 정보 조건을 생산하는 것이 바로 커뮤니케이션 노동이라고 하네요. 광고와 마케팅이 ‘허위의식’을 부추긴다고 비판만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해요. 커뮤니케이션 노동은 ‘사용가치의 변화에 따른 수요력의 증가’를 통해 더 큰 가치와 잉여가치를 생산하기 때문이죠. 자동차는 운송수단이고 핸드백을 그저 여성용 가방정도로 생각하는 것은 ‘분별 있는 유물론자’가 아니라 ‘분별 없는 관념론자’라고 이르지요.

 

현실세계에서 실존하는 것은 의미와 물질의 결합으로서 자동차지 순수한 운송수단으로서 승용차가 아니라는 것이죠. 커뮤니케이션 노동으로 새로운 의미를 생산하여 ‘자본의 재생산’을 하게 되는 것이죠. 대중매체를 통한 광고가 없었다면 독점자본에 기초한 후기자본주의는 애초부터 불가능했을 것이며 자본주의는 마륵스의 예언대로 벌써 몰락했을 거라고 얘기하네요.

 

디지털 미디어와 정보 격차에 대한 우리의 자세

 

정보화시대라는 21세기에 디지털 문명은 도시인들의 삶을 바꿔놓고 있지요. 지금 제가 쓰는 글도 컴퓨터로 작업하는 것이며 이걸 보는 분들도 인터넷이라는 가상공간을 거쳐서 보는 것이죠. 디지털 미디어의 등장으로 이러한 놀라운 변화들이 일어났지요. 대중매체를 통해 사람들은 모든 역사 사실을 간접경험하고 있어요. ‘시뮬라르크’는 오늘날 사람들의 경험 양식 이 되었지요.

 

가수 비나 이효리가 얼마나 춤을 잘 추는지도 다 안다. 다 알지만, 우리가 알게 된 것은 텔레비전 등의 대중매체를 통해서이다. 설령 이들을 직접 만날 기회가 있어도 우리는 ‘흠, 역시 텔레비전에서 본 것과 똑같군.’이라 생각하며 우리의 간접경험을 재확인할 뿐이다. 즉, 우리가 경험하는 이명박이나 이효리는 모두 영상기호화한 대상이다. - 책에서

 

대중매체는 아날로그 정보에서 디지털 정보로 바뀌고 있으며 뉴미디어들은 기존과 다른 기능들을 하고 있지요. 일방향이 아닌 상호작용으로 TV연속극에 시청자들이 개입하여 마음에 드는 짝과 결혼시킬 수도 이혼시킬 수도 있으며 뉴스 역시 자기가 알고 싶은 분야의 내용만 골라서 볼 수 있게 되었지요. 벌써 포털 사이트에는 독자 마음대로 편집하여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 개발 되어 있지요.

 

곧 컴퓨터의 주된 장소가 책상 위가 아니라 몸으로 이전될 것이며 ‘입는 컴퓨터’난 아예 몸이나 피부속에 이식하는 컴퓨터가 보편화되리라는 전망이에요. 신발밑창에 발전장치를 달아 걸어 다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전기에너지를 공급할 수 있는 구두컴퓨터는 이미 개발되어있고 음성자동인식 장치들은 조만간 키보드를 사라질 것이라고 하네요.

 

지은이는 “디지털 매체를 통해 추구해야 할 가치는 우선 정치적으로 자유롭고 경제적으로 평등하며 문화적으로 풍요로운 민주주의 사회라 믿는다.”며 디지털 매체를 새로운 정치참여의 한 방식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지요.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의 원칙을 위해 헌법 원칙까지 디지털 매체를 생각하고 근본부터 다시 고려하자고 말을 꺼내내요.

 

그러나 지은이는 이러한 정보화가 커다란 문제점을 가져올 수 있다고 꼬집어요. 먼저 의료서비스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정보화가 이뤄지고 있지요. 부자들은 원격진료를 받으며 24시간 전산망으로 실시간 관리를 받을 수 있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이러한 혜택에서 소외되니까요. 원격진료 기술뿐 아니라 정보서비스도 기본권으로 봐야하며 정보 빈자를 배려해야 한다고 얘기하네요.

 

인터넷 등의 컴퓨터 통신망과 관련해서는 누구나 이러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정보서비스 기본권의 개념을 세워가야 할 것이다. 마치 누구나 깨끗한 물과 전기를 싼 값에 공급받을 수 있어야 하는 것처럼, 누구나 인터넷에 최소한의 비용으로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아울러 정보 빈자와 정보 부자의 격차 문제도 더 이상 심각해지기 전에 논의를 시작해야만 한다. - 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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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한 분노 - 때로는 분노가 우리의 도덕률이 될 때가 있다
조병준 지음, 매그넘 사진 / 가야북스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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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화를 낼 줄 모릅니다. 다만, 자기 손에 움켜쥔 것을 나누자고 할 때만 분노하는 사람들. 눈 가리고 귀 막고 하란대로 살아가지요. 인류 역사에서 가장 풍족한 21세기, ‘먹고 살기 힘들다.’는 이유를 대며 세상의 부조리에 모르쇠하지요. 인내가 미덕이라고 허리띠를 조르고 기다림을 전략처럼 쓰겠다는 이 시대, 더 이상 속고만 있을 수 없지요. 때론 분노가 필요합니다.

 

지하철에서 책을 읽다가 울컥 솟아오르는 기운에 감정을 조절하느라 호흡을 골랐어요. 잠깐 진정하고 다시 책을 펴들어 사진을 봤어요. 뇌에서 통제하려는 시도에 앞서 눈이 먼저 반응을 하네요. 바로 <정당한 분노>[2008. 가야북스] 맨 앞에 나오는 ‘천안문민주화운동’ 사진이에요. 탱크행렬 앞에 한 사람이 꼿꼿하게 서 있어요. 19년 전, 천안문에서 탱크 앞을 가로막던 저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중국 천안문민주화운동과 광주민중항쟁

 

이 사진은 한국의 70~80년대와 겹치면서 더욱 아프게 다가와요. 세대가 달라 글과 사진으로나마 느끼는 저도 이정도인데, 그 시대를 온 몸으로 넘어온 세대들은 어떠할까요. 이제는 잊고 싶은 힘든 기억들일까요, 아니면 오늘을 제대로 살게 해주는 힘이 되고 있을까요. 이 책의 지은이 조병준 시인은 이렇게 적네요.

 

오늘 나는 이 사진을 보며, 까마득한 기억 하나를 끄집어 올린다. 1980년 5월의 어느 날, 정말 비처럼 쏟아지던 사과탄과 지랄탄의 연기들을 기억한다. 그리고 굳게 닫힌 교문 앞에 서 있던 탱크를 기억한다. 서울 시내 곳곳에 서 있던 탱크들을 기억한다. 학교 앞 골목길에 숨어 교문 앞의 탱크를 지켜보다가, 탱크에 깔린 것처럼 비참하게 넝마처럼 너덜너덜해진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가던 그날을 기억한다.

 

어느 새 까마득히 잊힌 서울의 봄, 그리고 시간이 조금 흐른 뒤, 지독한 검열과 수색의 틈새로 용케 빠져나와 몰래몰래 내 눈앞에 펼쳐졌던 광주의 사진들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때 내 온몸을 터지기 직전까지 채우던 감정 하나를 기억한다. 분노, 그렇다. 분노였다. - 책에서

 

서울 한복판에 탱크가 들어서고 대학생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던 게 불과 30년 전 이야기에요. 정권을 노린 군인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대도시로 공수부대원들을 보내 자국민을 학살한 것도 현대사에 버젓이 일어난 사건이지요. 그때 자유와 민주주의를 외치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영화 <화려한 휴가>을 본 뒤, 이게 사실이냐고 물어보는 젊은 친구들에게 뭐라고 얘기를 해야 할까요.

 

베트남 전쟁과 꽃의 세대

 

총검술을 아는가요. 군대에 가면 총에다 대검을 끼워서 적을 한 방에 죽이는 기술이지요. 인중, 목, 심장 같은 급소를 노리며 찌른 뒤 검을 빼낼 때는 치명상을 입히기 위해 대검을 비틀어 돌리며 빼는 걸 배우지요.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처럼 전쟁이 벌어져 육탄전이 벌어진다면 칼로 상대를 죽여야 하니까요.

 

이러한 총검 앞에 꽃을 내보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더러운 전쟁, 베트남 전쟁이 벌어졌던 1960년대 말, 꽃의 세대(flower generation)이라 불린 히피들은 총 대신 꽃을 들죠. 사진을 보세요. 어느 젊은 여학생이 미국 국방성 앞의 군인들에게 다가가 꽃 한 송이를 내미네요. 꽃이 총과 칼을 이길 수 있다는 그 순진함에 각박하게 살고 있는 제 모습이 무너져 내리네요. 누구나 한 번 쯤은 총 대신 꽃을 들고 살고 싶었던 적이 있으니까요.

 

세상에는 경쟁이 분명히 있습니다. 동물과 식물도 전부 더 나은 짝을 차지하려고, 더 많은 음식을 얻으려고 싸웁니다. 하지만 그들은 스스로 싸웁니다. 인간처럼 뒤에서 명령만 내리고 자신들의 목숨을 안락하게 지키며 젊거나 특정 계층 사람들만 죽음으로 내몰지 않지요. 사람들은 이러한 부조리에 침묵하고 국가공동체라는 허울을 뒤집어쓰고 살아가지요.

 

한 장의 사진이 역사를 바꾸지는 않는다. 그런 순진무구함은 역사에서 통하지 않는다. 한 송이의 꽃이 전쟁을 단번에 멈추게 하지 못한다. 하지만, 수 천 장의 사진이 쌓인다면, 수 천 송이의 꽃이 바쳐진다면, 역사의 바퀴가 굴러가는 궤도를 바꿀 수도 있다. 저 꽃 한 송이는 의미 없는 전쟁에 반대하는 ‘정당한 분노’가 피워낸 꽃이라고 말하면, 꽃처럼 약한 것들이 때로는 총과 칼을 이길 수도 있다고 말하면, 그것 역시 너무 순진한 말일까. - 책에서

 

베트남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장소만 바뀐 채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진행되고 있지요. 가장 강한 나라는 사람들을 죽이는데 최첨단 과학을 쓰고 있지요. 부당한 것에 부당하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탐욕 앞에 사람들의 눈은 멀기 쉽지요. 한국 역시, ‘이라크의 평화’라는 거짓 깃발을 들고 5년 동안 총을 들고 ‘더러운 전쟁’을 도왔습니다. 이달 20일에 완전 철수하는 자이툰부대에 대해 후손들은 뭐라고 평가할까요.

 

사랑이 담긴 분노는 더 나은 세상을 꿈꾸게 한다

 

매그넘 작가들은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숨이 멎는 순간들을 잡아서 사진을 찍었지요. 그렇게 찍은 사진이 십만 장이 넘었지요. 그 가운데 ‘천사표, 조병준 시인’이 심혈을 기울여 31장을 뽑았지요. 거기에 사람냄새 풀풀 나며 막 심장에서 꺼낸 듯싶은 절절한 글을 더하여 뜨거운 책으로 묶였네요. 사진에 들어있는 사연과 인상이 하도 가슴 아려서 보는 사람들은 순간 ‘헉’ 하겠네요.

 

올해, 전국에서 피워낸 촛불이란 아름다운 꽃을 생각해봅니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외치며 사람들은 정당한 분노를 촛불에 담아 캄캄한 밤을 밝혔지요. 치밀었던 분노를 묵묵히 눌러가며 촛불을 든 사람들에게 사과를 한 정부는 촛불이 사라지자마자 바로 탄압에 들어갔지요. 인권이나 자유, 민주주의는 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정치권력이 스스로 변화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배울 수 있는 교육시간이었죠.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이었고요.

 

여전히 가난, 질병, 전쟁, 폭력, 소외, 억압, 탐욕, 차별로 가득한 세상에 분노할 가슴은 지켜야겠지요. 분노가 자신을 삼키게 해서는 안 되겠지만 ‘선한 분노’의 불씨까지 꺼뜨려서는 안 되지요. 사랑이 담긴 분노가 더 나은 세상을 꿈꾸게 하니까요. 비록 아름답지 않은 세상이지만 누구에게나 아름답게 살 권리가 있으니까요.

 

세상이 그나마 이정도일 수 있는 이유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고 탱크 앞에 서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죠. 군수산업에 물 들은 전쟁에 사람들이 휩쓸리지 않는 까닭도 아직 총 대신 꽃을 들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이죠.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은 결코 거저 주어지지 않지요. 팍팍한 현실에 지쳐서 꿈을 서랍장 안에 감추고 아무렇지 않고 있다가 이 책을 읽으며 깊게 반성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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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삐 풀린 망아지, 옥천에서 일내다 - 풀뿌리 언론의 희망 오한흥 희망을 여는 사람들 3
정지환 지음, 희망제작소 기획 / 푸른나무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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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지역에 과연 희망이 있을까? 어떤 사람들은 머리를 내젓습니다. 모든 것이 서울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다른 지역과 각을 세우며 수도권 규제완화가 이루어집니다. 지방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며 서울로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강준만 교수는 <지방은 식민지다>라는 책까지 내놓을 정도죠.

 

그래도 희망을 놓지는 말아야겠지요. 여기, 권력이나 부가 없어도 작은 실천들이 쌓여서 어떻게 지역의 미래를 바꾸어 가는지 알려주는 책이 있습니다. 지방에서 묵묵히 앞날을 열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지역 인물 탐구 시리즈 <희망을 여는 사람들>은 현장에서 희망을 일구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희망을 여는 사람들 3편, <고삐 풀린 망아지, 옥천에서 일내다>에서는 오한흥 전 옥천신문 발행인을 다룹니다.

 

오한흥씨는 2004년 <한겨레>가 주관한 ‘한국의 미래 열어갈 100인’에 뽑힌 사람입니다. 그때 100명 가운데 언론 분야에서는 5명뿐이었습니다. 손석희 MBC 아나운서, 황용호 KBS PD, 최민희 민언련사무총장, 오마이뉴스, 그리고 오한흥이었습니다. <한겨레>가 오한흥을 꼽은 이유는 이렇습니다.

 

“지방분권시대가 꽃피우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지역신문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충북 옥천의 <옥천신문>은 척박한 지역 언론의 현실 속에서 서울의 유수한 전국지들도 쉽사리 끊지 못하는 관언 유착을 단호히 거부하고 올곧은 정론지로 성장해 왔다. 물론 <옥천신문>처럼 언론의 정도를 걷는 지역 언론들이 적지 않게 있다. 그러한 지역 언론들의 대표 격으로 오한흥 발행인이 선정됐다.”

 

<조선일보>뽑아내고 풀뿌리 언론 <옥천신문>키워내

 

그렇습니다. 충북 옥천을 빼놓고 그를 얘기할 수 없습니다. 충북 옥천은 ‘언론개혁의 성지’라고 불린 곳입니다. 인구 6만이 채 되지 않는 그곳에서 오한흥은 풀뿌리 언론 <옥천신문>을 창간하고 키웠으며 <조선일보>절독운동을 성공시킵니다. 그 역시 조선일보를 민족지로 알고 있었으나 <조선일보>의 역사를 알게 된 뒤 조선일보 바로보기 운동을 벌입니다.

 

“<조선일보>는 ‘한일합방은 조선의 행복을 위한 조약’이라고 보도했던 신문입니다. 그 한마디로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조선일보> 친일 행각을 알고 있는 주민이 적어도 2%~5%는 될 것이라고 봤습니다. 그러나 활동을 하면서 실제로 확인해보니 그 비율이 제로에 가까웠습니다. 친일 행각을 알려 주었더니 99.99%가 구독을 중지하겠다고 반응을 보였지요.”

 

실제로 안티조선운동이 벌어졌을 때 많은 지식인들이 <조선일보>만 친일한 것이 아닌데 왜 그렇게 물고 늘어지느냐 하면서 거리를 두었습니다. 대통령도 만들어낸다고 당당하게 떠들어대던 ‘밤의 대통령’ <조선일보>에 대해 고위 공직자나 지식인들은 두려워했지요. 이러한 <조선일보>의 권력에 대해 부담을 느끼지 않았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을 합니다.

 

“이해가 안 갑니다. 각자 자신이 있는 곳에서 소신껏 일하면 되는 것 아닌가요? 많이 배운 사람들은 <조선일보>의 친일 행각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는데 왜 알고도 여태까지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알아듣기 쉽게 가르쳐 주지 않았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됩니다. <조선일보>바로보기운동은 이웃사랑 실천운동입니다. 상한 음식을 먹는 이웃에게 그 음식은 상한 것이니 먹어서는 안 된다고 말해주는 게 당연한 일이 아닌가요?

 

“상한 음식을 먹는 이웃에게 그 음식은 상한 것이라고 말해주는 것은 당연”

 

<조선일보>가 나쁘다고 백 마디 떠들어 봤자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길거리에 쓰레기가 널려 있으면 주워서 쓰레기통에 버려야 하고 마약에 중독된 사람이 있으면 구해야 하는 것처럼, <조선일보>절독운동을 벌이는 일이야말로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이 반드시 실천해야 할 일이라고 봅니다.“

 

<조선일보>는 친일행각을 감추기 위해 반공을 들먹이죠. 친일파 척결이나 민주평화를 얘기하면 ‘빨갱이’라고 색칠하면서 과거의 진실을 손바닥으로 가리려 했지요.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해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등 독재정권에 빌붙어 국민들을 속이지요. 지금은 ‘30만원 밖에 없는’ 반란자를 위해 한 달에 22일이나 1면에 전두환 사진을 실으며 권력에 아부하지요.

 

1972년 10월 17일에 박정희가 영구집권을 하려고 비상계엄을 선포하자 18일 사설 '평화통일을 위한 신체제'에서 "앞으로의 보다 보람되고 영광스러운 삶을 얻기 위하여 진정 알맞은 조치임을 기쁘게 생각한다."며 "가장 적절한 시기에 가장 알맞은 조치"라고 하지요. 언론사에 대한 사전검열을 하고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철저히 유린한 반민주 폭거에 대해 칭찬하던 <조선일보>지요.

 

슬프게도 40여 년 동안 ‘민족지’ <조선일보>의 반공과 극우 논조는 국민들에게 먹혀들어 일그러진 권력을 쥐고 있지요. 이러한 상황에서 오한흥은 박정희 부인 육영수 여사가 태어난 곳, 보수성향이 강한 옥천에서 <조선일보>를 발붙이지 못하게 합니다.

 

꼴통짓하고 다녔던 오한흥, 언론 문제에 대해 눈을 뜨다

 

그가 처음부터 언론운동을 하고 주민의식변화에 나선 것은 아닙니다. 그 역시 30년을 방황하며 보냅니다. 자신은 “백수였고 꼴통짓을 많이 하고 다녔던 사람”이라고 소개할 정도지요. 20대 중반에 잠시 넘쳤던 재물은 그를 자만과 타락으로 이끌었으며 사람에 대한 신뢰를 잃게 하지요. 몇 차례나 자살을 시도했으며, 다시 머리를 깎고 속세에서 도망치려고도 했지요.

 

부조리하고 모순된 현실을 바꾸지 않고 살아가는 사회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었던 그는 막연하지만 반항심과 복수심이 있었지요. 그러다 1988년 <한겨레>창간 할 때 옥천지부장을 지내며 당시 40여명의 불과했던 옥천의 <한겨레>독자들과 만나면서 ‘사회성 개안’을 하게 됩니다. 자신의 행복추구와 부조리 극복을 해결하는 지점에 언론 문제가 놓여있다는 걸 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되지요.

 

“언론을 일컬어 흔히 세상을 비추는 창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현대를 살아가는 대중은 이 창을 통해서 소통할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가장 기본적인 이 소통의 도구가 왜곡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내 청춘을 불행으로 이끌었던 바로 그 부조리와 모순, 불합리한 괴리 현상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거지요. 그때부터 나는 왜곡된 창, 즉 언론을 바로잡는 것이 우리 시대의 최우선 과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어릴 때부터 어른이나 선배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늘 되돌아오는 대답이 “네 말이 옳지만 하지는 마라.”였다고 얘기합니다. 옭은 말이면 해야 되는데 현실에서는 할 수 없는 세상이었던 것이죠. 그렇기에 현실을 바꾸는데 뜻을 품었고 언론 바로잡는데 힘을 모으게 되지요. 그는 자식에게도 ‘착하고 바르게 살라.’고 말할 수 없을까봐 두려웠다고 털어놓습니다.

 

지성이면 감천, 지역주민에게 사랑받는 <옥천신문>

 

아무리 뜻이 좋아도 현실에서 통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기존 관행은 고치기 쉽지 않고 기득권 세력은 변화를 막으려 애를 쓰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옥천신문>은 흑자경영을 하면서 성공한 풀뿌리 지역 언론이 됩니다. 성공한 이유를 들여다보면 단순합니다. 정도를 걸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신문만큼 단순한 것이 없습니다. 신문이라는 상품 하나만을 취급하며 가격도 1년 내내 유지됩니다. 수입으로는 구독료+광고료, 지출에는 인건비+제작비, 답은 나오지요. 더 좋은 신문을 만들어 구독자를 꾸준히 늘리는 일이지요.”

 

좋은 신문이면 자연스레 사람들이 찾게 되지요. 좋은 신문이 되려고 그는 여러모로 애를 씁니다. 우선 ‘지방 대통령’이라고 불릴 정도로 지역에서 전권을 행사하고 있는 기초자치단체장과 지역 권력을 줄기차게 감시합니다. 권언이 서로 짬짜미하는 게 관행을 깨고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시비를 걸 수 없을 만큼 정확하게 기사를 씁니다. 문제를 지적하는 언론에 대해서 발끈하기 마련인데 지적당한 공무원은 이렇게 말하네요.

 

“<옥천신문>은 공무원이 못하면 못한다고 보도하고, 잘하면 잘한다고 보도합니다.”

 

그리고 지역 주민들의 관심과 지역 사회상을 반영합니다. 지역 주민 생활에 밀착해서 생활정보 기사를 실습니다. 주민들의 말을 실어 주민과 주민이 소통하는 신문이 됩니다.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자세히 알 수 있는 교류의 장이 되도록 말길을 열어놓습니다. 고객 감동 정신으로 주민과 독자를 신문의 주인으로 섬깁니다.

 

지성이면 감천이지요. 이러한 노력에 사람들은 <옥천신문>을 보게 됩니다. <옥천신문>을 보면서 무엇보다 상식과 원칙을 중시하게 되었다고 옥천 주민들은 이야기를 합니다. 색깔론, 지역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투표를 하고 사회에 참여합니다. 그들은 ‘언론을 바로 세우면 세상도 바로 선다.’는 진리를 몸소 보여주고 있는 셈이지요.

 

행복하십니까?

 

이 책은 정지환 <여의도 통신> 대표기자가 오랜 시간 오한흥을 지켜보며 쓴 책입니다. 학생운동을 시작으로 15년 동안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정지환 기자에게 오한흥은 행복하냐고 물어보지요. 정기자에게 ‘행복’이란 단어는 어색한 감정이고 낯선 말이기에 머뭇거리자 그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행복하십니까? 행복하지 않은 일은 하지 마세요. 우리에게는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어요. 그것보다 더 소중한 것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자신이 행복하려면 더 나은 세상이 되어야 하고 더 나은 세상이 되려면 언론이 바로 서야한다고 판단한 오한흥, 그는 행복해지기 위해 지금까지 땀을 흘렸고 그 결과가 <옥천신문>의 성공이었지요. 신문제작원칙을 철저히 지켰고 촌지와 계도지를 거부했으며 성역 없는 과감한 보도로 하였지요. 신문을 만드는 것 말고는 다른 일에 한눈을 팔지 않았던 그를 읽으며 한국 언론이 행복한지 돌아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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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게 말하다 김혜리가 만난 사람 1
김혜리 지음 / 씨네21북스 / 2008년 2월
평점 :
절판


 

세상은 혼자 사는 곳이 아니지요. 사람과 사람은 이어져 있으며 서로 교류하고 이야기를 나누게 되지요. 그런 면에서 모든 만남은 인터뷰에요. 누구나 인터뷰어이자 인터뷰이가 되어 사람들과 만나는 것이죠. 인터뷰는 ‘혼자에서 함께’로 변화하는 훌륭한 기술이 될 수 있기에 요즘 시대에 더 주목을 받고 있지요. 어느 때보다 소통이 간절한 시대니까요.

 

수많은 사람들이 세상에 있지만 외로움은 더욱 커진 현대사회, 누구나 자기 얘기를 하고 싶어 하며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지요. 그렇다고 덜컥 아무에게나 마음의 문을 열 수 없지요. 이때 좋은 인터뷰는 어깨너머라도 눈여겨볼 만하지요. 소통이 잘 된 인터뷰는 마음의 문 두드리는 방법을 알려주는 셈이지요. 마음을 세련되게 주고받는 태도와 소통하는 자세를 배울 수 있으니까요.

 

소설가 정이현은 몇 명의 사람들을 만났는데, 굉장히 다른 그들에게 하나의 공통점을 찾았대대요. 바로 김혜리 기자와 이야기 나눈 것을 생애 가장 인상 깊은 인터뷰로 기억한다는 것이죠. <그녀에게 말하다>[2008. 씨네21]는 왜 그들이 김혜리에게 빠져들어 마음을 열었는지 알 수 있는 책이에요.

 

꼼꼼한 준비, 편안하고 짜릿한 인터뷰

 

이 책은 <씨네21> 인터뷰 모음집이에요. 김혜리 편집위원이 하였던 인터뷰들 가운데 21편의 인터뷰를 추려서 묶었지요. 어떤 이들을 했는가 보면 소설가 박완서, 박민규, 배우 나문희, 임현식, 안성기, 송강호, 문소리, 이병헌, 김혜수, 영화감독 이창동, 강금실 전 법무장관, 진중권 교수 등이에요. 한국 사회에서 자기 자리를 일구는 사람들이죠.

 

유명하지만 인터뷰를 잘 안 하는 사람들이기에 지은이는 ‘내가 잘 할 수 있을까.’라는 불안감에 시달릴 법하죠. 그러나 불안감은 꼼꼼한 준비와 자료 수집을 이어져 편안하면서 짜릿한 인터뷰로 이끌어내죠. 충실한 이해는 상대를 기분 좋게 하지요. 짧은 만남으로 곁을 주기 힘든 유명인들도 근거를 둔 자연스러운 물음에 마음의 빗장이 덜커덕 열리게 되지요.

 

친절하게도 성실히 모은 재료를 적절하게 넣어주었지요. 일러주는 자료들은 인터뷰이를 더 자세히 알 수 있게 돕네요. 영화기자이기에 영화를 찬찬히 아는 일은 그렇다 해도 다른 분야까지 두루 헤아리는 일은 쉽지 않기에 발 벗고 나서 공부한 결과물들이죠. 디자이너 정구호, 건축가 황두진, 사진작가 구본창, DJ 전영혁처럼 자기 분야에서 우뚝 선 사람들과 이야기를 할 때 그녀가 얼마나 빈틈없이 준비했는지 읽으면서 느끼죠.

 

보기를 들자면, <순풍산부인과>, <거침없는 하이킥>을 연출한 김병욱 감독과 이야기하면서 시트콤 내용을 다 꿰차면서 감독의 의도와 생활을 물어보았고 <바람의 나라>를 그린 만화가 김진과 만나면서 그의 만화 발자취, 현재 만화계 지형과 분위기를 짚으며 대화를 해요. 동물도 자신에게 애정을 보이는 사람을 더 반가워하는데 사람은 오죽하겠어요. 지은이의 애정 어린 질문에 진실한 속내로 답변하네요.

 

궁금했던 유명인들의 알짬, 김혜리의 맛깔난 글 솜씨

 

예의에는 예의로 대하게 되지요. 자신에게 관심을 갖고 속 깊게 공부해온 사람에게 사부자기 넘길 수 없지요. 이러한 지은이의 땀방울은 평소 궁금하였던 유명인들의 알짬이 드러나게 되지요. 40여개에 달하는 다양한 질문들은 인터뷰이의 삶을 여러 면에서 충실히 드러내게 하지요. 단순히 유명인 홍보를 위한 인터뷰가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을 간직하려는 인터뷰를 하니까요.

 

인터뷰어로서 붙임성과 순발력은 좋지 않지만, 어딘가 ‘절박해’보이는 인상의 도움을 받고 있다며 겸손해 하는 지은이는 글 솜씨도 아주 맛깔나지요. 김형구 촬영감독을 소개하면서 들어가는 문구에요. 인터뷰가 꽤 만족했는지 이렇게 표현하네요. 지은이의 직업과 인터뷰할 때 분위기가 절묘하게 담겨있는 멋들어진 글이네요.

 

인터뷰에 붙들린 아빠를 기다리던 아이들이 진력날 시간이 됐다. “언니! 찍어줄게!” 김형구 촬영감독의 두 살배기 아들이 작은 카메라를 들고 통통 달려와 구슬 같은 눈을 파인더에 진지하게 갖다 댔다. 렌즈는 닫힌 채였지만 아기는 뭔가를 보았는지 까르르 만족스럽게 웃었다. 다시, 눈이 부셨다.

 

짝사랑처럼 준비하고 연애하듯 사람을 만나라

 

책을 덮으면서 다시 소통의 어려움을 생각해봅니다. 소통이 안 된다고 사람들은 아우성을 치며 목 놓아 한탄을 하거나 침묵의 동굴로 들어가기 일쑤지요. 어떻게 하면 소통이 잘 될까요. 지은이는 “분명한 건 예리한 질문만큼 듣기가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날카로운 질문은 기자의 이름 아래 표가 나지만, 경청의 공은 인터뷰이의 대답 속에 은연중에 드러난다고 믿어요.”라며 경청의 중요성을 말하네요.

 

예리한 물음을 던진다고 좋은 인터뷰가 되는 것이 아니듯 자신의 얘기를 주장하고 관철시켜야 좋은 소통이 되는 것은 아니지요. 21일 저녁, <오마이뉴스>에서 강의한 <PAPER>편집장 황경신씨 얘기는 그런 면에서 귀담아 들을 만하지요. 17년 전부터 사람들을 만나러 다닌 그녀는 ‘인터뷰는 연애’라고 설명하네요.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을 읊어주면서 사람을 만나는 일은 어마어마한 일이라고 강조하더군요. 몇 시간 얘기하고 그 사람을 마치 안 것처럼 시늉하기 쉽지만 마음을 제대로 알기란 어려운 일이지요. 상대를 만날수록 새로운 모습이 나타나는 연애와 마찬가지로 인터뷰도 상대가 모습을 드러내도록 집중해서 들어줘야 한다고 일러주네요. 어떻게 상대 마음을 얻어야 하는지 고민하고 마음 얻는 과정을 즐기라고 도움말을 주네요.

 

책에서도 무릎을 치게 할 정도로 똑같은 구절이 나와요. 지은이는 인터뷰 준비를 짝사랑의 축소판이라고 해요. 오감을 한 사람에게 집중시켜 출연작과 과거 인터뷰를 복기하고 그 행간의 감정에 대해 주제 넘는 짐작을 한대요. 그녀는 인터뷰 전날은 잠을 자주 설치고, 돌아오는 길에는 어렴풋이 짧은 인연이 끝나는 아픔을 느낀대요. 짝사랑과 많이 닮았지요?

 

종합해보면 ‘짝사랑처럼 준비하고 연애하듯 사람을 만나라.’로 간추려질 수 있겠네요. 사람은 다 거기서 거기지만 남다르게 소통하는 사람들은 있기 마련이지요. 자신의 만남이 조금 겉돌고 변화가 필요하다면 다른 사람들의 만남을 눈여겨보는 건 어떨까요. 만남은 사랑하되 독점하지 않아야 하지요. 이 책을 보며 사람과 만날 때 한 입보다는 두 귀를 써야겠다고 다짐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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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콘스탄티누스 - 신이 된 사나이
류상태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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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사람의 행복과 자유를 위해 존재하지요. 사람이 종교에 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한국 개신교는 너무 많은 말썽을 일으키고 있지요. 상식을 가진 보통 시민들에게는 너무나도 이상한 일인데, 개신교도들은 이성과 논리로 설명할 수 없을 때마다 ‘사람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며 둘러대지요. 그러면서 ‘사람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커다란 교회를 지어놓고 부와 권력을 누리는 목회자들은 자신들이 벌이는 짓을 이해하고 있을까요.

 

그들이 ‘자기들의 성’에서만 떵떵거린다면 안타까워도 뭐라고 말은 못하겠는데 사회 영역에서 예수를 팔아 반공을 소리치고 종교를 내세워 극우를 부추기고 있어 문제지요. 흔하게 볼 수 있는 ‘예수천국 불신지옥’에 이어 최근 ‘목사 된 고문기술자’까지 한국 개신교가 보여주는 극단성은 사회에 커다란 해를 끼치고 있지요.

 

기독교는 세계 3대 종교이지만 독선 교리를 고집하며 타종교를 밀어 내치기 때문에 인류 역사에 수많은 상처와 갈등을 안겼지요. <소설 콘스탄티누스>[인물과 사상사. 2008]는 기독교의 정통 교리가 예수의 가르침과는 매우 다르며, 로마 황제의 정치 의도에 따라 크게 왜곡되었다는 점을 알리는 역사소설이지요. 사실에 기초하여 이야기를 꾸미고 해석한 실화소설이지요

 

기독교가 로마제국에게 공인받는 과정

 

때는 3세기 후반, 로마제국은 끝없는 쿠데타가 일어났고 백성들은 참상을 겪지요. 정국은 극도로 불안정해졌고 이민족의 침입과 강탈로 민생은 말할 수 없이 피폐해졌지요. 피의 악숙환을 끊으려고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293년 로마제국을 4명의 황제와 함께 공동통치를 시도하지요. 크게 4개의 자치권으로 나누어진 연방 국가의 형태를 띠게 되었지요.

 

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은퇴함에 따라 로마제국은 다시 혼란에 빠지죠. 콘스탄티누스 쿠데타를 일으키고 이에 반발한 사람들이 나타나 여섯 황제나 생겨나게 되지요. 콘스탄티누스는 장인과 처남, 이복누이의 남편까지 죽이며 유일한 황제에 오르지요. 게다가 심성이 착한 친아들까지 죽이며 로마제국의 안정을 가져오려고 하네요.

 

303년 기독교 대탄압을 하는데 앞장선 콘스탄티누스였지만 권력을 쥐게 되자 기독교가 가진 양면성에 주목하지요. 지독한 독선과 편협성, 잔혹성도 있지만 로마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세련된 정신도 찾아낸 것이죠. 기독교는 통치자의 권위를 인정하는 종교이기에 제국의 구심점을 회복하는데 도움이 될 거라고 판단하여 313년 밀라노 칙령을 공포하여 기독교를 공인하지요.

 

그러나 그것만으로 부족하였지요. 로마인을 하나로 묶어줄 새로운 국가이념이 필요했고 기독교로 제국의 안정과 평화를 꾀하려 했지요 325년 니케아 공인회을 열어서 삼위일체설을 정통으로 삼고 반대파를 이단으로 단죄하여 자신의 정치 안정을 도모하지요. 기독교 교리를 보면 모든 권세는 하느님께 온 것이며 이미 있는 권세들도 하느님께서 세워준 것이기에 황제에게 도전하는 것은 곧 신에게 도전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죠.

 

 

예수를 신으로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기독교인들과 정치권력이 짬짜미를 하여 사람의 아들을 선언했던 예수를 300여 년 만에 신으로 올리고 민중의 종교는 제국의 종교로 바뀌게 되었지요. 마치 고려시대에 불교를, 조선시대에 유교를 국가이념으로 쓰듯이 기독교는 혼란한 로마제국의 터를 다지는 도구로 쓰이게 되네요.

 

기독교 교리가 잘못이 하나도 없는 신의 계시라고?

 

지은이 류상태는 소설 속 인물들을 입의 빌려 기독교의 여러 부분을 날카롭게 꼬집지요. 기독교인들의 신념과 예수의 가르침이 다르다고 자세하게 풀어 놓지요. 기독교는 경전과 전통, 교리에 집착하면서 예수를 배반하지요. 경전이란 것은 대부분 교회 입맛에 맞게 걸러지고 원치 않는 내용이 담긴 책은 위서로 간주되어 폐기되어왔지요. 처음부터 교회의 입김이 작용되었고 당시 기록물이 그렇듯 손으로 베껴 쓰다 보니 추가되거나 수정된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경전에 신의 절대 계시가 담겨 있으며 교리 역시 오류가 없다고 믿고 있지요. 상식에 따른 궁금증을 불경하다고 여기고 ‘정신 노예’가 되어 경전에 기록된 내용을 합당하게 분석하거나 비판하는 일은 엄두를 못 내지요. 신이 사람으로 내려와서 사람으로 살았다가 다시 신으로 돌아갔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지요.

 

지은이는 예수와 교회를 하나로 묶어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하네요. 기독교를 포함해서 모든 종교의 교리는 틀이고 그릇일 뿐이죠. 예수는 그 틀이라는 수단에 매이지 말고 본질을 보라고 가르쳤지요. 그릇을 씹지 말고 그 안에 담겨 있는 내용을 맛보고 완성되어 가는 참사람이 되라 했지요. 안타깝게 많은 사람들은 교회를 가야만 예수를 만날 수 있다고 믿고 있지요.

 

죽기 전날 밤의 예수가 혼신의 힘을 다해 제자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이야기한 뒤, 마지막에 이런 말을 하지요. “내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것이다, 너희가 내가 말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라며 사랑을 실천하라고 당부하지요. 자신에게 경배 드리고 ‘주님’으로 모시라고 하지 않고 사랑을 실천하여 ‘친구’가 되라고 했지요.

 

그러나 현재 교회는 황당무계한 교리를 믿기만 하면 천국도 갈 수 있고 영원한 생명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지요. 예수는 이제 사람들이 따라야 할 모범이 아니라 믿어야 할 대상이 되었지요. 그를 믿기만 하면 모든 죄가 용서되고 구원을 받으며 죽음에서 부활하여 영원히 살게 된다고 착각하고 있지요. 힘들고 어려운 일은 예수가 모두 대신해 주었다고 믿기만 하면 되지요. 현실은 어둡지만 저 하늘나라에서 주님 품에 안기면 그 모든 고통과 애곡과 눈물이 다시는 없는 세계로 누구나 들어갈 수 있게 되었지요.

 

진정한 믿음은 무엇일가

 

그렇다면 믿음이란 것은 무엇일까요. 일주일에 한 번 교회에 나가서 헌금내고 찬송 부르다가 기독교 경전 몇 번 읽는 것이 믿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 누구도 진정한 믿음이 무엇이라고 해석하고 독점할 권리는 없겠지요. 다만 예수에 기대는 것만으로 충분하며 굳이 예수처럼 지극히 애를 쓰며 살지 않아도 된다고 꼬드기는 개신교가 제대로 믿고 있다고 느껴지지는 않네요.

 

예수가 원한 것은 새로운 종교가 아니라 새로운 세상이었지요. 예수는 2000년 전이나 되는 먼 과거에 살았다고 전해지는 인물이고 실제로 살았는지 여부도 불확실하지요. 또한 예수는 한 사람이 아니라 한 흐름이며 한 인격체로서 예수는 여러 예수들이 한 인물로 합쳐져서 전승되었다는 주장도 있지요. 기독교 경전을 보여 지는 다양한 예수의 성격과 특징들은 보기로 들면서 예수가 한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고 하네요.

 

그러나 분명한 것이 있다고 지은이는 얘기하네요. 예수라는 개인이 없었을지 몰라도 예수운동은 분명히 있었고 게다가 예수정신은 너무나 또렷하다고. 예수가 오기 전부터 힘없고 가난한 백성을 붙들어주고 일으켜 세워주며 그들에게 희망을 부어주던 수많은 예언자들이 있었고 그들이 벌인 예언자 운동이 예수 운동으로 이어졌다고 설명하네요.

 

억누르고 고통 받는 자들에게 스스로 행복하게 살아가도록 힘을 주는 것이 종교지요. 예수처럼 불의에 항거하고 참사람으로 살고자 하는 것이 기독교 정신이겠지요. 기독교 정신을 잇지 못하고 엉망으로 세상을 살면서 천국티켓을 거머쥔 것처럼 믿고 사는 개신교인들의 모습은 누구 책임일까요. 신도들을 기복신앙에 수준에 머무르게 하고 국가가 주는 혜택은 꼬박꼬박 받아먹지만 시민으로서 의무는 소홀히 하는 목회자들이 자주 뉴스에 오르내리네요.

 

콘스탄티누스, 부시 그리고 이근안

 

예수가 진정으로 원한 것은 종교조직체가 아니라 사람이고 삶이고 세상이었지요. 그는 사람을 행복하게 하지 못하고 끝없는 갈등을 심는 종교라는 괴물을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하고 싶어 했지요. 당시 유대 종교 조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던 지도자들은 예수를 불편하게 여겼고 그를 처형하는데 동조하지요.

 

돈을 훔치는 자는 작은 도둑이요, 생명을 훔치는 자는 큰 도둑이지요. 작은 도둑에는 민감하게 법의 칼날을 들이대면서 큰 도둑들에게는 꼬리를 내리기 일쑤였지요. 국가보안법을 씌워 선량한 어부를 간첩으로 몰아세우기는 쉽지만 ‘성전’을 외치며 중동 사람들의 생명을 훔치는 부시에게 저항하기는 어렵지요. 가난한 자를 돕고 힘을 준다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 ‘폭탄 세례’를 퍼부으며 중동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고 있지요.

 

대충 살아도 마지막에 믿는 척하면 구원해주겠다는 종교보다 삶을 떳떳하게 살도록 힘을 주는 종교가 되어야겠지요. 수많은 사람을 고문하던 이근안씨가 늙어서 목사 이근안으로 변신하였다는 소식은 충격이지요. 그가 지난날을 뉘우치고 조용하게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면 다행이지요. 다만 아직 피해자들이 시퍼렇게 살아있는데 목사가 되어 당당하게 용서 받았다고 설교하는 일은 말도 안 되지요.

 

피바람을 일으켜 ‘신의 사나이’가 된 콘스탄티누스는 죽기직전 세례를 받아 ‘성’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되듯이 자기들 입맛대로 ‘나쁜 유명인’을 끌어들여다가 종교 선전에 써서는 안 되지요. 암흑시대였던 유럽 중세시대 때나 만들어지던 대형 교회들을 만들어놓고 믿쑵니다!를 외치는 한국 교회들은 무엇을 믿고 있는 걸까요. 한국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붉은 십자가들이 무섭게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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