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복적 이성 - 포스트신자유주의 시대의 자본, 국가, 계급에 대한 비판적 성찰 아우또노미아총서 29
워너 본펠드 지음, 서창현 옮김 / 갈무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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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자”, 지구동네 골목골목에서 메아리가 울려 퍼집니다. 터져 나오는 목소리들은 이 ‘이행기’에 들어섰음을 일러줍니다. 한국은 공업화, 도시화, 정보화, 탈근대화까지 워낙 짧은 시간 안에 많은 걸 겪으면서 맨날 ‘과도기’인 느낌이지만 또 새로운 길목에 이르렀습니다. 그동안 이 사회를 세차게 휘감았던 신자유주의가 물러나고 있네요. ‘포스트신자유주의’를 맞고 있습니다.

 

너무 빠른 바뀜들에 신물이 날 만하지만 더 나은 사회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눈을 부릅뜨고 팔을 내저으며 헤엄쳐갈 수밖에 없죠. 가만히 있다가는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떠내려가기 십상이니까요. 새로운 시대를 맞아『전복적 이성』은 지금까지 믿어왔던 것들을 뒤엎습니다. 낡은 것들과 이별하기 위해 사회를 뒤집는 비판이 필요한 때니까요.

 

지은이 워너 본펠드는 맑스를 밑천 삼아 자본과 국가, 그리고 계급을 가늠합니다. 번뜩이는 대목들이 많지만, 그 가운데 국가는 ‘부르주아의 집행위원회’라는 맑스의 주장을 밀어붙이는 대목에선 공감을 꽤 얻습니다. ‘국가’에 대한 책이 꽤 많이 나오는 까닭도 오늘날 국가를 보면 갸웃거릴 수밖에 없으니까요. 한국도 용산참사나 쌍용자동차 사태 들을 치르면서 “과연 국가란 무엇인가?” 물을 수밖에 없죠.

 

국가가 ‘복지’는 커녕 나서지 말라는 자유경제주의자들의 주장들을 읽다보면 국가가 끼어들지 않아야 세상이 잘 돌아갈 거 같은데, 국가가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는 경제인들의 씨불거림대로 시장에 많은 걸 맡길수록 소스라치게도 국가폭력은 세집니다. 자본주의는 자본가의 자유와 국가폭력이 맞물린 구조니까요. 미국을 봐도 잘 알 수 있듯 자본가들의 입맛에 맞게 시장이 돌아갈 수 있도록 정부는 시장의 뒤에서 팔뚝을 내보여야 합니다. 경제가 정치와 떼려야 떼어지지 않는 이유죠.

 

그래서 나치의 철학자 칼 슈미트와 신자유주의의 텃밭을 닦은 하이에크가 얼마나 가까운지, 경제자유주의가 독재와 얼마나 얽혀있는지 선보이는 데서 지은이의 글들이 빛납니다. 지난날 독재정권에 빌붙다가 오늘날 ‘시장만능주의’를 나불거리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이들의 정신상태를 엿볼 수 있게 하죠. 한국의 이른바 ‘보수’층들 또한 앓고 있는 도착증세, 시장의 자유를 위해서라면 모든 자유를 버리는 독재도 상관없다는 ‘이상한 논리’의 뿌리를 밝혀줍니다.

 

지은이는 사회민주주의, 레닌주의, 트로츠키주의, 국제사회주의, 알튀세주의 같은 수많은 좌파들에게도 비판의 날을 세웁니다. 코뮤니즘과 민주주의를 내세우더라도 어느새 목적을 잃어버린 조직논리와 다중들 위에 서려는 권력의지에 취하기 마련이니까요. 다중들이 당이나 전위들에게 이끌어져야 한다는 건 ‘부르주아의 편견’을 좌파들이 받아들인 거라고 본펠드는 따끔하게 꼬집습니다. 다중에겐 자신들 위에서 이끄는 ‘지도자’가 필요 없기 때문에 다중들을 교육하겠다는 생각을 바꿔야 하는 것이죠.

 

대중이 그들 자신을 책임진다면 혁명적 당에는 무슨 역할이 남는가? 그것은 대중의 일부가 되어 자신의 ‘지도력’을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혁명적 대중 위에 자신의 지도력을 선언할 것인가? 대중이 자신들의 노력 속에서 자기결정을 달성하려고 고집한다면, 이런 일이 어떻게 수행될 수 있는가? 239~240쪽

 

2008년 촛불시위는 그동안 믿어왔던 사회운동과 투쟁방식의 변화를 가져왔고, 그만큼 사회관계가 ‘이미’ 바뀌었다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시민단체나 운동권의 ‘지도’를 받으면서 머릿수 채우던 ‘대중동원’의 시대는 저문 것이죠. 저마다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그 생각들이 만나고 섞이면서 사회를 움직이는 시대, 발달한 통신기술로 서로 접속하고 어울리는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이에 따라 ‘혁명’이라는 말이 다시 불거지고 있습니다. 사회정치체가 바뀌는 혁명에는 갈등과 싸움을 거칠 수밖에 없는데, 군사무기가 너무나 무섭고 끔찍해져서 그동안 혁명은 쑥 수그러들었지요. 그렇지만 인간해방을 위한 혁명의 불길은 단 한 번도 꺼진 적이 없으며 지금도 지구 곳곳에서는 끝없이 타오르고 있습니다. 시대가 바뀌어 어떤 세력을 갈음하여 다른 세력이 권력을 차지하던 혁명이 아니라 다중 모두가 연결되고 공부하면서 사회에 참여하여 세상을 바꿔내는 ‘혁명’이 나타나는 것이죠.

 

인류 역사는 역사 자체가 끌고 가거나 어떤 법칙 따라 이뤄지지 않습니다. 인간들의 몸짓 하나 하나가, 인간들의 욕망들이 모이고 모여 역사를 만들어냅니다. 우리 모두가 너무 조바심 내지 않으면서 멀리 보며 꿈을 꾸고 꾸준하게 움직여야 하는 이유죠. 맑스는 “모든 것을 의심하라”는 말을 가장 좋아하였는데, 지은이 또한 얘기합니다. 지금을, 확신을 의심하라!

 

나는 혁명이 급작스럽고 예기치 않게 벌어지는 계시록적 사건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혁명은 부정의 과정이다. 내가 알고 있는 한도 내에서는, 자유롭고 평등한 사람들의 사회로 우리를 자동적으로 이끌어주는 역사적 법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 발전의 객관적인 법칙들을 심도 깊게 과학적으로 통찰한 사람들은 우리에게 그와는 다른 이야기, 즉 확실성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지만 신학적으로 고안된 역사적 법칙들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볼 때, 자유롭고 평등한 사람들의 사회의 달성은 자본과 그 국가에 대한 성실하고 정직한 투쟁에 달려 있다. 350~3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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