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은 어떻게 내면화되는가 問 라이브러리 5
강수돌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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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미국인이 공격적으로 사업을 벌이며, 기꺼이 경쟁에 뛰어든다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다. 이러한 고정관념의 이면에는 이와 정반대로 아주 수동적인 심리상태가 자리한다.

지난 10년간 내가 만난 미국인 중산층은 구조적인 변화를 꾀하는 것을 체념한 채 그냥 받아들이는 경향을 보였다. 일자리의 안정성이 훼손되고 학교가 민간기업처럼 경영되는 것을 불가피한 일로 여겨지는 분위기다.『뉴캐피탈리즘』13쪽

 

지구마을이 미국화라는 황사로 덮이면서 동네방네 콜록거림이 터져 나오고 여기저기서 숨막힘에 쓰러지는 사람들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메케함을 걷어내면서 메슥거림을 없애지 않고 ‘어쩔 수 없다’면서 죽어나가는 사람들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습니다. 쪼그만 미국이 되고자 그동안 죽을힘을 쓴 한국은 미국처럼 하루에 수십 명이 죽어나가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울병에 시달리는 미국인들처럼 한국인들도 꿀꿀한 얼굴을 한 채 ‘그냥 이대로’ 시달리며 살아갑니다. 다음에 죽을 사람은 부디 ‘내’가 아니길 바라며!

 

카이스트에서 잇달아 사람들이 죽어나가자 한국사회는 눈을 똥그랗게 떴지만, 그렇다고 딱히 새로운 바뀜을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마구 죽어나가는 걸 ‘현실의 규칙’으로 삼았으니까요. 카이스트 장례식장에 걸린 현수막의 글자가 얼마나 섬뜩하게 다가오는지요. “먼저가신” 이라는 말을 쉽사리 넘길 수 없습니다. 삶을 살다가 그저 먼저 갔다는 뜻으로 읽히지 않고 당신들이 ‘조금 먼저 갔을 뿐’ 우리도 곧 따라갈 거라는 뜻으로 읽히지 않는지요? 이렇게 살다간 머잖아 우리 모두는 죽을 거라고 카이스트는 일러줍니다.

 

어쩌다 사회가 경쟁으로만 치닫는 으스스한 쑥대밭이 되었는지 강수돌은『경쟁은 어떻게 내면화 되는가』에서 짚어냅니다. 왜 지금 행복하게 살려고 하기보다 지금은 경쟁을 통해 저 녀석을 쓰러뜨린 뒤 나중에 행복해질 거라는 ‘끔찍한 환상’을 사람들이 품고 사는지, 이러한 ‘반죽된 머릿속’을 어떻게 걸러내고 닦아내야 하는지, 지은이는 소담하면서도 뜨겁게 글을 적어갑니다.

 

옆 사람을 팔꿈치로 치면서 사회에서 파놓은 홈 따라 아득바득 달음박질쳐야 하는 사회를 ‘팔꿈치사회’라고 합니다. 산뜻하고 싱그러운 오늘을 꿈꾸며 삶의 하루하루를 긍정하며 살아가기보다 불행하게 살더라도 옆 사람이 더 불행하기를 바라는 ‘경쟁사회’를 일컫죠. 한국은 팔꿈치사회와 다른 사회를 상상하면서 이름을 붙이자면 ‘어깨동무사회’, ‘강강술래사회’를 이룩하려고 애쓰지 않고 더 날카롭고 딱딱한 팔꿈치를 저마다 키우기로 ‘합의’가 된 듯합니다. 그래서 모든 이들은 모든 이들을 상대로 치고받으며 서로를 물어뜯고 할퀴며 악다구니를 벌입니다. 곧장은 다투지 않더라도 머잖아 드잡이를 위해 주먹을 불에 달궈야 합니다. 모두가 숨을 몰아쉬면서도 정작 마음 놓고 쉬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예컨대 ‘팔꿈치사회’에서 심각한 문제는, 한 번 일등 한다고 영원히 일등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무수히 많은 새로운 경쟁자들이 호시탐탐 그 자리를 노린다. 시간이 갈수록 경쟁은 치열하다. 그것을 버텨내려면 목숨을 걸어야 할 지경이다. 36쪽

 

이러한 팔꿈치사회에서는 누군가의 옆구리를 자신도 치지만 자신 또한 누군가의 팔꿈치에 얻어맞을 수밖에 없기에 겉으론 멀쩡해도 속은 곯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루하루 안절부절못하고 힘겨운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지요. 끝내 목숨까지 꺾입니다. 카이스트에서 죽어간 사람들은 팔꿈치사회의 결과를 고스란히 보여줬을 뿐, 매우 소스라칠 일이 아닙니다. 카이스트 사람들처럼 ‘빛을 받지 못한 채’ 어둠 속에서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 날마다 사라지고 부서집니다.

 

카이스트는 팔꿈치로 옆 사람 때리기를 가장 빡세게 서로 하라는 전쟁터였지요. 오늘날 학교는 삶을 나누는 배움터가 아니라 암기를 날리는 싸움터로 변한 지 오래입니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한 10대들이 학교 밖으로 쏟아지고 있고, 그 안에서 참고 있는 10대들은 잿빛 얼굴로 책상 위에 쓰러져 자고 있지요. 아이들이 죽어나가도, 학교를 떠나도, 그러거나 말거나 경쟁이라는 채찍질은 더욱 호되게 아이들 등짝을 내려치고 아이들은 시험을 보는 순간 말짱 잊어버릴 먹물들을 머릿속에 들이 붓고 있습니다. 이렇게 제도권 학교에서 ‘정신의 삽질’을 당하며 닦달된 사람들은 시멘트인간이 되어 사회로 나옵니다.

 

한마디로. ‘죽임’의 교육인 것이다. 아이들을 점수에 주눅 들게 하고 새벽부터 밤까지 점수경쟁이라는 감옥에 가둔다. 즉 ‘너 죽고 나 살자!’라는 식이다. 주기적으로 시험이 있을 때마다 아이들은 시험에 대한 ‘공포’로 삶의 감각이 마비된다. 희로애락을 있는 그대로 느끼지 못한다. 57쪽

 

앞에 낭떠러지와 수렁이 있는데 도대체 왜 그리로만 뜀박질하여야 하는지 잠깐이나마 멈춘 뒤 차갑게 따져 물어야 하건만, ‘딴 생각’을 하면 안 된다고 어릴 때부터 길들여진 사람들은 그대로 허둥지둥 헐레벌떡 허겁지겁 휩쓸려갑니다. 이렇게 경쟁을 하면 ‘실력’도 생기고 ‘행복’해질 거라는 헛소리가 아직도 메아리치고 있고, 비록 행복하지 못할 지라도 나보다 너가 더 불행하기를 바라는 ‘딱한 영혼들’이 죽음의 달리기를 벌입니다. 얼마나 더 죽어야 벼랑으로 몸 던지는 일이 그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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