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안에서 길을 잃어라 - 이현주의 루미 잠언 읽기
루미 지음, 이현주 옮김 / 샨티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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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성이론이 아이슈타인의 임종에 도움이 되었을까요? 자본론이 마르크스의 최후를 평안함으로 이끌었을까요? 불확실성 원리가 하이젠베르크를 낙원으로 안내했을까요? 가끔씩, 위대한 사람들의 삶을 떠올려 봅니다. 대단한 지식들이 참으로 그들의 삶을 행복하게 해주었는가를 물었을 때, 선뜻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을 수 있죠.

 

이 때, 루미는 말을 합니다. 알아야할 모든 지식들 가운데 마지막 날을 위해 갖춰야 할 가장 좋은 지식은 영혼의 가난을 아는 것이라고.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혼의 걸작품이라 평가받는 <마드나위>를 지은 메블라나 젤랄룻딘 루미는 13세기 페르시아의 신비주의 사상가이자 시인입니다. 한국에도 꽤 알려진 이 수피의 말은 퍽퍽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한 모금의 정갈한 샘물 같네요.

 

지난 20세기 말, 서양 세계의 다양한 종교를 지닌 사람들은 루미의 글에 감탄을 합니다. 문학계와 영성계에 이른바 ‘루미열풍’이 불었지요. 그의 이야기들이 번역되었고 해석되어져 왔지요. 오랜 세월을 우연이라 불리는 운명들을 거쳐 마침내 이 책이 우리에게 닿았습니다. 이현주 목사님이 풀어서 쓴 글 덕분에 <사랑 안에서 길을 잃어라>[샨티. 2005]는 한층 더 아름다워진 작품이네요.

 

세계는 산이다. 말한 대로 돌아 온다. 그런데 사랑이라고 외쳐도 미워라고 메아리가 울린다면?

 

세계는 산이요

우리의 모든 행동은

메마리로 돌아오는 바람이다.

 

산에는 골짜기가 있어서 메아리를 울린다. 내가 “사ㅡ”하면 메아리도 “사ㅡ”하고 내가 “ㅡ랑”하면 메아리도 “-랑”한다. 내가 “미ㅡ”하면 메아리도 “미ㅡ”하고 내가 “ㅡ워”하면 메아리도 “-워”한다. 산은 제 소리를 따로 만들어내지 않는다. 들리는 소리를 그대로 되돌려줄 따름이다. 내게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은 모두 네가 만든 것들이다. 이 비밀을 알기에 군자는 위로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아래로 남을 탓하지 않는다.

 

루미의 글과 이현주 목사님의 풀이는 절묘하게 어우러지면서 가슴을 울립니다. 정말 모든 것은 맞물려 돌아가죠. 가끔 우리가 알 수 없는 시간차가 생겨서 그렇지, 뿌린 대로 거두기 마련입니다. 이 점을 깨닫고 나면, 삶이 달라집니다. 지금 사랑을 해야 하고, 잔뜩 부풀어 오른 배가 부끄러운 것임을 알게 되죠. 상대를 향한 자신의 독설은 결국 자신에 대한 불만족과 공허함에서 나온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다만 쉬쉬하며 그냥 살아갈 뿐.

 

여기서 고개를 갸우뚱할 수 있습니다.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세상이 있을 수 있으니까요. 아무리 사랑이라고 외쳐도 미워라고 메아리 울리는 산이 있을 수 있으니까요. 그때도 사랑을 해야 하냐고 사바세상의 사람들은 딴지를 걸게 되죠. 그들과 나누고 싶은 말은 먼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미워라는 메아리가 겁이 난 나머지 사랑을 실천해보지도 못하고 그럴싸하게 자기 합리화를 하는 사람이 많으니까요.

 

사랑을 얘기해도 미워라고 답하는 산일 때, 우리는 용기를 내야 합니다. 사랑이란 이름의 망치를 들어야죠. 억울하게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어린 아이가 굶주려 죽는 세상을 바꿔야죠. 그런 맥락에서 군사독재에 맞서 싸운 사람들은 진짜 사랑을 하고 싶었던 사람들이고, 제국주의 시대 때, 독립을 외친 사람들 역시 사랑을 실천한 사람들이죠. 사랑할만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니까요.

 

오늘날 사람들은 모두 사랑에 목마른 자들이 되었죠. 그늘진 곳에서 누구는 배를 곯고 있는데, 혼자서 모피코트를 입어대는 사람들은 사랑을 실천할 능력도 힘도 없지요. 그저 바닷물을 마셔가며 하루하루 야위어가는 자신의 영혼을 번쩍거리는 보석과 물건으로 가려보려 하지만 더욱 안쓰럽게 보일 뿐이죠. 수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거리로 나와 사랑을 구걸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사람들은 사랑을 갈구했고, 예수가 인류에게 보여준 것 역시 사랑입니다. 세상과 사람을 사랑하라고 공생애 동안 거듭 가르치죠. 그러나 예수를 신으로 우러르는 사람들 가운데 입으로만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요. 그들은 예수처럼 살지 않습니다. 예수처럼 사랑하지 않죠. 그저 예수라는 이름을 내걸고 또는 종교라는 간판을 붙이고, 사랑과 너무 멀리 떨어져버린 수많은 단체들 사이를 헤매고 다닐 뿐이죠.

 

우리는 이미 구원받았다는 예수의 복음! 사랑하는 순간, 그것이 천국이다. 지금 사랑하라!

 

천국을 팔면서 오늘을 지옥으로 만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예수는 우리를 죄인으로 만들려고 온 게 아니라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주기 위해 왔다고 하면서, 갑자기 예수가 죄를 대신 값아 준 죄인이라면서 포승줄을 던지고, 회개하라고 소리치죠. 사람들의 외로움과 약함을 부추기며 돈을 바쳐야 복을 받는다고 합니다. 영혼이 가난한 자들은 하늘나라에 보화를 쌓는다며 종교단체 대표의 배에 기름기를 채우고 있죠.

 

그렇다면 예수의 복음이란 무엇일까요? 우리가 이미 구원받았다는 것입니다. 죽어서 최후의 심판을 통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라 우리는 모두 사랑의 존재이며 지금 천국을 누려야 한다는 거죠. 예수를 비롯하여 깨달음을 얻은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다 말한 것들이죠. 항상 천국은 와 있지만 사람들은 볼 수 있는 눈이 없을 뿐인 거죠. 복음은 언제나 우리 곁을 떠돌고 있지만 들을 수 있는 귀가 없는 겁니다.

 

천국을 누리려면? 몸이 변해야죠. 구원을 받으려면 자기 몸을 바꿔야 하는 겁니다. 이것이 깨달은 자와 깨닫지 못하는 자의 차이죠. 헌금을 통해서, 목사의 기도를 통해서 천국에 가는 게 아니란 거죠. 어리석은 자는 그 자체로 징계입니다. 지혜로운 자는 그 자체로 복이죠. 복된 자는 거짓과 욕망으로 물든 우상들을 망치로 부숩니다. 그것이 천국의 문을 두드리는 일임을 알기에.

 

기독교 경전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유대인 경전 토라를 보면, 띄어쓰기가 되어있지 않습니다. 구두점 하나를 어디에 찍느냐에 따라서 해석이 달라집니다. 물론, 자기만의 해석을 유일한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어디가나 어깨를 떡 벌린 채 정통이란 이름으로 진리라는 것들을 독점하죠. 왜냐하면 다른 해석은 자신의 수입을 줄어들게 만드니까요. 어리석은 사람들은 엄마가 씹어준 밥을 먹듯 누군가 해석한 이야기를 되뇌며 살아가게 됩니다.

 

누구나 한 번쯤, 더할 나위 없이 자기 삶이 초라하고 의미 없게 다가올 때가 있을 겁니다. 그러하기에 사람들은 자살을 하거나 극단의 쾌락을 쫓으며 ‘살아있음’을 느끼려 하죠. 그만큼 우리들 삶이 살아있지 못하다는 반증이기도 하죠. 좀비들만이 어떻게든 살아있고자 애를 쓰는 거니까요. 인생 뭐 있나, 다 그렇게 사는 거지, 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에게 루미는 얘기합니다. 지금 사랑하라고, 사랑 안에서 길을 잃으라고.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오는 것을 눈으로 볼 수 없다. 또 ‘보아라. 여기 있다’ 또는 ‘저기 있다’고 말할 수 없다. 하나님 나라는 바로 너희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바로 지금 사랑하는 순간이 천국이고 하나님 나라라는 얘기죠. 사랑이 천국이기에 거기서 길이란 세속의 욕망과 집착들은 잃어버리게 됩니다. 등 하나가 천년 동안 쌓인 어둠을 한순간에 없앤다고 했습니다. 사랑이 삶을 구원합니다. 세상과 뜨거운 사랑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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