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라는 낙인 - 조주은의 여성, 노동, 가족 이야기
조주은 지음 / 민연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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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은아, 물론 네가 많은 상처를 받았다는 거 알아. 그런데 사람들마다 반응은 다 다를 수 있어. 그 정도 상처로 자살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너만큼 괴로워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 또 어떤 사람은 무시하고 넘어갈 만큼 덤덤한 사람도 있을 거야. 네 마음에 불이 났다면 일단 그 불을 끄는 데 집중해봐. 누가 불을 냈는지 방화범을 잡으로 다니다 집으로 돌아오면 이미 집은 새까맣게 타버렸다는 거지. 일단 네 마음의 불을 끄는 데 집중해라"

자신이 받은 상처를 성찰하면 그동안 방치해두었던 허약하고 어두운 내면을 발견할 수 있다. 끔찍하게 보기 싫겠지만 들여다보아야한다. 자기 상처를 직시하지 않는 사람은 그 어두운 면을 상대방에게 돌려버리기 쉽다. 자신이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는지 아느냐며 줄곧 흥분하는 이들이 오히려 타인에게 곧잘 상처를 주는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 사람에게 상처를 받았다고 느낀다면, 그때가 바로 스스로를 깊이 들여다보고 다독거리면서 강인한 내면을 키울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동료들의 작은 행동, 말 한마디에 파르르 떨며 기운을 소진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믿는 길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는.

 

나와 마주했던 짧은 시간이 뜻밖에도 많은 긍정의 에너지를 몰고온 것 같다. 거리두기와 다가서기에 대한 분별력이 생긴걸까. 혼란스럽고 조금의 틈도 없이 붙어있던 마음에 약간의 공간이 생긴듯. 귀중하게 얻은 그 공간이 다시 좁혀들어가서 괴로운 마음이 내 마음인지 너의 마음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워 하다가 울다 잠드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오늘도 여전한 사람들은 또 여전한 말들과 행동들을 한다. 이제 전처럼 펄펄뛰면서 흥분하고 속상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안다. 순간 기분은 상했지만 이제 그 부정의 기운들에 휩싸여 어쩔 줄 모르는 상태로 나를 내버려 두지 않을거다.

나를 들여다보는데 많은 시간을 보낼생각이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언제나 변하지 않는 사실.. 나는 나, 나는 소중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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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말 블루스 창비시선 149
신현림 지음 / 창비 / 199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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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한 자가 아는 진실 / 신현림

 

담배불을 끄듯 너를 꺼버릴 거야

 

다 마시고 난 맥주 캔처럼 나를 구겨버렸듯

너를 벗고 말 거야

그만, 너를, 잊는다, 고 다짐해도

북소리처럼 너는 다시 쿵쿵 울린다

 

오랜 상처를 회복하는 데 십년 걸렸는데

너를 뛰어넘는 건 얼마 걸릴까

그래, 너는 나의 휴일이었고

희망의 트럼펫이었다

지독한 사랑에 나를 걸었다

뭐든 걸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라 생각했다

네 생각없이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너는 어디에나 있었다 해질녘 풍경과 비와 눈보라,

바라보는 곳곳마다 귀신처럼 일렁거렸다

온몸 휘감던 칡넝쿨의 사랑

그래, 널 여태 집착한 거야

 

사랑했다는 진실이 공허히 느껴질 때

너를 버리고 나는 다시 시작할 거야

 

제법 담담하게 이야기 한지 오래전인데.. 실은 아직도 떠오르면 잡히지 않은 답답한 안개로 가득찬 것만 같은 이런 감정들은.. 아직도 그때처럼 똑같이. 미련인가?  아직은 사랑했다는 진실이 공허하게 느껴지지 않아서 일까. 언제쯤 나도 이별에 대한 진실을 알게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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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의 봄 문학과지성 시인선 64
고정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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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같은 날- 편지7 / 고정희

 

솔바람이 되고 싶은 날이 있지요

무한천공 허공에 홀로 떠서

허공의 빛깔로 비산비야 떠돌다가

협곡의 바위틈에 잠들기도 하고

들국 위의 햇살에 섞이기도 하고

낙락장송 그늘에서 휘파람을 불다가

시골 학교 운동회날, 만국기 흔드는 선들바람이거나

원귀들 호리는 거문고 가락이 되어

시월 향제 들판에 흘렀으면 하지요

 

장작불이 되고 싶은 날이 있지요

아득한 길목의 실개천이 되었다가

눈부신 슬픔의 강물도 되었다가

저승 같은 추위가 온 땅에 넘치는 날

얼음장 밑으로 흘러들어가

어둡고 외로운 당신 가슴에

한 삼뱁 년 꺼지잖을 불꽃으로 피었다가

사랑의 "사리" 로 죽었으면 하지요

 

햇살좋은 토요일 오후 만큼 괜시리 기분이 좋아지는 날도 드물다. 어쩐지 특별한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기분좋은 상상이 들기때문이다. 한주내내 갑자기 쏟아져 내리던 폭우도 잠깐 멈췄다.때를 기다렸다는듯 매미들은 일제히 울고 나도 라디오를 켜고 노래를 듣는다. 발랄한 목소리의 진행자가 경쾌한 음악과 함께 오후를 알린다. 오늘은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한답니다. 마침들고 있던 시구절 사랑의 '사리'로 죽었으면 하지요가 팍 와닿는다.

오늘같은 날은 햇살이 되어 외로운 당신의 가슴을 따뜻하게 비춰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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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기쁨에게 창비시선 19
정호승 지음 / 창비 / 199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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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기쁨에게/ 정호승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번도 평등하게 웃어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오늘 일을 하면서 곁에 두고 잠깐씩 틈내서 읽었던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

한번도 평등하게 웃어주지 않았던 기쁨을 읽는 순간 마음한켠이 짠해졌다. ' 언니, 사는게 왜 이리 힘들까요?'  은이 써놓은 이말을 우연히 읽었을 떄와 같이 갑자기 그렇게 슬플 수가 없었다. 애처러움, 서러움, 안타까움, 답답함과 같은 무엇이라 딱히 설명할 수 없는 느낌들. 비가 내렸고 음악이 흘렀고 시읽는 오후인 이런 만족스러운 상황에 갑자기 끼어든 슬픔이 당혹스럽다. 파닥파닥파닥. 주위를 둘러본다. 열어놓은 창문으로 들어온 바람에 비정규직15% 감축을 알리는 종이가 파닥거리며 때맞춰 소리를 낸다. 6월30일. 한숨이 푹. 몸이 또 무거워진다. 서둘러 가방에서 약을 꺼내 챙겨먹었다.

저녁엔 노점에 앉아서 떡볶이를 먹었다. 지친아줌마는 다리를 쓰다듬으며 나에게 말을건다. 말을 건네는건지 그냥 혼잣말을 하는 것인지. '그래도 오늘은 떡볶이가 제법 팔리네. 비가 오니까. 몇일간 더울땐 얼마나 안팔리든지. 사람이 없어. 하긴 오늘같으면 또 뭐해? 다리가 너무 아파가지고 일주일에 한번씩 몇 만원씩 하는 주사를 맞는다니까. 요 아래 농협도 못가서 택시를 타구가요.. 7월 1일부터 단속한다고 하든데 이제 리어카까지 이고다니게 생겼어. 그전에는 그냥 놔두고 다녔는데.. 대학나와서 취직한다고 30키로뺀 우리딸 회사다니더니 요새 다시 쪘어. 어째. 걷는게 최곤데. 난 다리가 아파서 요 아래 농협도 못가서 택시를 타구가요. 뭐 할 수 없어. 되는대로 살아야지. 먹고 싶은 만큼 먹고 걸으면되. 걷는게 최고야.' 

그렇군요. 아주머니도 7월이 두렵군요. 저도 그렇습니다.  누구를 위한 법인지 모르는 그 법이 우리를 오싹하게 만듭니다. 아마 아주머니나 저를 위함은 아니겠지요?

슬픔이 기쁨에게 말한다.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고.

제법 당당한 이 말에 다시 기운을 내며.

이럴땐 악으로 깡으로. 슬픔의 힘으로 견디어야겠다. 나는 단련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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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홀릭
권지예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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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 부드럽고, 딱딱하고, 외로운 인생같은 빵

 

프랑스의 소설 미셸 투르니에의 <빵에 관한 전설> 이란 산문에 보면, 옛날 옛적 프랑스의 서쪽 끝 지방에 두 마을이 있었는데 두 마을 주민들은 사사건건 대립하고 반목했다고 한다.

한쪽 마을에서는 입안에 넣으면 살살 녹을 정도로 온통 말랑말랑한 브리오슈를 먹었다면, 또 다른 마을은 말랑말랑한 데라고는 하나도 없는 딱딱한 빵을 특산물로 삼았다. 그런데 어느 날 이 두 마을의 빵집 아들과 빵집 딸이 눈이 맞아 온 마을 주민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하게 되었다.

두젊은이는 결혼을 결국 허락받았지만 혼인 잔치에 어떤 빵을 올릴까 하는 문제로 사태는 복잡해졌다. 두 연인은 고심끝에 딱딱한 빵과 말랑말랑한 빵을 멋지게 결합시킨 빵을 만들어내기로 했다. 수차례 연구끝에 드디어 바다가재처럼 겉은 딱딱하고 속은 부드러운 빵을 만들어냈으니 그게 바로 바게트였다.

가끔 느끼는 것이었지만, 갓 구워낸 빵은 '제2의 피부다' 따스한 체온과 결이 살아있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살처럼 빵이 느껴지니 말이다. 부드러우면 부드러운 대로 딱딱하면 딱딱한 대로 아기나 연인의 살처럼 느껴진다.

 

오늘도 빵을 한봉지 사왔다. 동생의 말처럼 이젠 김밥천국처럼 많아진 파리바게트에서 말이다.파리바게트에서 파는 바게트에선 작가가 도저히 먹지않고 버틸 수 없어 집까지 오다가 반은 다 뜯어먹어버린 파리의 그 바게트맛을 느낄 수 있을까? 파리에 가본적이 없는 나로서는 그저 파리바게트에서 먹은 바게트맛을 상상하며 읽는다. 말 그대로 심심하면 빵을 먹고 있는 빵중독인 요즘이다. 프랑스 유학시절 배고플때 먹었던 빵이어서 그런지 작가의 빵사랑이 착착 와닿는다. 힘든 요즘.. 나도 좀더 뚱뚱하고 큰빵으로 오늘도 손을 뻗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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