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 기쁨에게 창비시선 19
정호승 지음 / 창비 / 199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슬픔이 기쁨에게/ 정호승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번도 평등하게 웃어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오늘 일을 하면서 곁에 두고 잠깐씩 틈내서 읽었던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

한번도 평등하게 웃어주지 않았던 기쁨을 읽는 순간 마음한켠이 짠해졌다. ' 언니, 사는게 왜 이리 힘들까요?'  은이 써놓은 이말을 우연히 읽었을 떄와 같이 갑자기 그렇게 슬플 수가 없었다. 애처러움, 서러움, 안타까움, 답답함과 같은 무엇이라 딱히 설명할 수 없는 느낌들. 비가 내렸고 음악이 흘렀고 시읽는 오후인 이런 만족스러운 상황에 갑자기 끼어든 슬픔이 당혹스럽다. 파닥파닥파닥. 주위를 둘러본다. 열어놓은 창문으로 들어온 바람에 비정규직15% 감축을 알리는 종이가 파닥거리며 때맞춰 소리를 낸다. 6월30일. 한숨이 푹. 몸이 또 무거워진다. 서둘러 가방에서 약을 꺼내 챙겨먹었다.

저녁엔 노점에 앉아서 떡볶이를 먹었다. 지친아줌마는 다리를 쓰다듬으며 나에게 말을건다. 말을 건네는건지 그냥 혼잣말을 하는 것인지. '그래도 오늘은 떡볶이가 제법 팔리네. 비가 오니까. 몇일간 더울땐 얼마나 안팔리든지. 사람이 없어. 하긴 오늘같으면 또 뭐해? 다리가 너무 아파가지고 일주일에 한번씩 몇 만원씩 하는 주사를 맞는다니까. 요 아래 농협도 못가서 택시를 타구가요.. 7월 1일부터 단속한다고 하든데 이제 리어카까지 이고다니게 생겼어. 그전에는 그냥 놔두고 다녔는데.. 대학나와서 취직한다고 30키로뺀 우리딸 회사다니더니 요새 다시 쪘어. 어째. 걷는게 최곤데. 난 다리가 아파서 요 아래 농협도 못가서 택시를 타구가요. 뭐 할 수 없어. 되는대로 살아야지. 먹고 싶은 만큼 먹고 걸으면되. 걷는게 최고야.' 

그렇군요. 아주머니도 7월이 두렵군요. 저도 그렇습니다.  누구를 위한 법인지 모르는 그 법이 우리를 오싹하게 만듭니다. 아마 아주머니나 저를 위함은 아니겠지요?

슬픔이 기쁨에게 말한다.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고.

제법 당당한 이 말에 다시 기운을 내며.

이럴땐 악으로 깡으로. 슬픔의 힘으로 견디어야겠다. 나는 단련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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