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의 봄 문학과지성 시인선 64
고정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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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같은 날- 편지7 / 고정희

 

솔바람이 되고 싶은 날이 있지요

무한천공 허공에 홀로 떠서

허공의 빛깔로 비산비야 떠돌다가

협곡의 바위틈에 잠들기도 하고

들국 위의 햇살에 섞이기도 하고

낙락장송 그늘에서 휘파람을 불다가

시골 학교 운동회날, 만국기 흔드는 선들바람이거나

원귀들 호리는 거문고 가락이 되어

시월 향제 들판에 흘렀으면 하지요

 

장작불이 되고 싶은 날이 있지요

아득한 길목의 실개천이 되었다가

눈부신 슬픔의 강물도 되었다가

저승 같은 추위가 온 땅에 넘치는 날

얼음장 밑으로 흘러들어가

어둡고 외로운 당신 가슴에

한 삼뱁 년 꺼지잖을 불꽃으로 피었다가

사랑의 "사리" 로 죽었으면 하지요

 

햇살좋은 토요일 오후 만큼 괜시리 기분이 좋아지는 날도 드물다. 어쩐지 특별한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기분좋은 상상이 들기때문이다. 한주내내 갑자기 쏟아져 내리던 폭우도 잠깐 멈췄다.때를 기다렸다는듯 매미들은 일제히 울고 나도 라디오를 켜고 노래를 듣는다. 발랄한 목소리의 진행자가 경쾌한 음악과 함께 오후를 알린다. 오늘은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한답니다. 마침들고 있던 시구절 사랑의 '사리'로 죽었으면 하지요가 팍 와닿는다.

오늘같은 날은 햇살이 되어 외로운 당신의 가슴을 따뜻하게 비춰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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