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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한 계단 - 나를 흔들어 키운 불편한 지식들
채사장 지음 / 웨일북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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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몸마음 힐러 무아쌤 입니다 : )


12월 5일 저녁, 채사장님의 '열한 계단' 관련 강연을 열흘 앞두고 
앞으로 매일 조금씩 열한계단을 읽으며 내용을 곱씹어 보려고 합니다.
강연에서 인상깊은 질문을 하기 위해(훗-_-) 책을 읽을 생각을 한 것도 있지만 
지난 밤, 저자의 말 부분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머릿속에 든 생각은
'이 책 좀 위험한것 같은데...?'
였습니다.




'위험한 책'이라는 것에는 여러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1년 전 오쇼 책 이후로 증폭되던 진동이 저의 내면에 어떠한 균열을 만들었고
그 이후로 이런 부류의 위험한 책들을 일부러 찾기 시작했습니다.
어찌되었든 앞으로 열흘동안 이 책을 곱씹는 시간 또한 제 스스로에게 
여러모로 큰 의미가 될 것 같다는 직감입니다.

그럼 part 1. 을 시작하겠습니다.



"

출항과 동시에 사나운 폭풍에 밀려다니다가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같은 자리를 빙빙 표류했다고 해서,
그 선원을 긴 항해를 마친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긴 항해를 한 것이 아니라
그저 오랜 시간을 수면 위에 떠 있었을 뿐이다.

"


"

그렇기에 노년의 무성한 백발과 깊은 주름을 보고
그가 오랜 인생을 살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 백발의 노인은 오랜 인생을 산 것이 아니라 

다만 오래 생존한 것일지 모른다.
"
참으로 오랜만에 책의 첫 장 
그러니까 저자의 말을 보고 눈물이 핑 돌았다.
이 감정은 뭘까.
아, 최근 이와 비슷한 감정을 기억해냈다.

이제는 고인이 되어버린 스티브 잡스가
스탠포드대학 졸업식 연설에서 겨우 버티고있던 나를 조금씩 흔들어 깨우던
그리고 연설의 마지막에
"Stay Hungry, Stay Foolish!"
라고 말하는 부분을 나는 잊지 못한다.
곧이어 걷잡을수 없는 감정에 엉엉 목놓아 울었던 그 날을.


동굴에서 막 나와 자유의 몸이 되었음에도 내가 직면한 '진짜세계'는
내 예상보다 더욱 고통스러웠다.
나는 하루에도 몇번씩 (나 또한 포함되어 있음에도) 모든 인류의 그 위에 우뚝 서서
그들을 가엾게 그리고 안타깝게 바라보다가도
언제 어디에서 사라져도 모를것처럼 보잘것 없는 존재인 것만 같아 공허했다.
그래, 그건 공허함 이었다.
나는 앞으로 살아간다면 '농락당하거나' 혹은 '농락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하지만 나는 이제껏 농락당한쪽이었고 그 사실을 알아버렸다.
내가 살았던 인생, 나, 그리고 나의 가족들, 나의 친구들,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나와 함께 농락당해왔고 그 사실이 참으로 애통했다.

하지만 그건 내가 진짜라고 생각하는 세계의 진짜일 뿐이다.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의 세계는 그것과 다르다.
그들이 생각하는 진짜 세계와는 다르다는 말이다.
'어떻게 이럴수 있지?'
'하지만 그렇다한들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에게 알려야해.'
'아니, 그런게 무슨 소용이지?'
'진실을 알고 살아야 하니까.'
'이런 고통을 그들과 함께 한다고 달라질게 있을까?'
'그들이 진짜세계를 모르고 사는 걸 원해?'
'어디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이 카오스를 어떻게 감당해야할까?'
'그건 그들의 몫이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게 있을까?'
'난 고통을 전하는 사람일수만은 없다. 그럴거라면 알리지 않는게 나아' 
'고통이 있더라도 진실을 아는게 중요해'
'...내가 일단 먼저 가보겠어. 그리고 알리든 안내하는 자가 되든 할거야.'

그 이후 나는 어느순간부터 말이 없어진다.
어느순간 조금씩 더 고요해진다.
그렇게 기쁘지도 그렇게 슬프지도 않다.
다양한 사람들과 새로 만나고 헤어지고 사람들은 '꽃길만 걷자'고 말한다.
삶은 여전히 苦 이다. 
미련도 후회도 없다.
나는 내면 깊이 무언가를 간직하기 시작한다.
그때 쯤 이었을것이다.
분위기가 차분해졌다는 말을 듣기 시작한 건.
소용돌이치듯 미쳐 돌아가는 주변속에서 고요한 토네이도의 눈과도 같이.
그게 1년 전 이다.



저자의 말에서 나오는 나의 성장을 위해 나를 깨뜨리는 그 외부의 힘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깨달음은 늘 고통을 수반하는 법이다.
나는 이제 겨우 한 계단을 오른 것 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계단을 계속 오르느냐 그대로 자리를 잡느냐는 건 내게 달렸다.
그리고 나는 결국 그 다음 계단을 오르기로 한다.
무엇때문에?
글쎄... 그건 나도 모르겠다.
나의 삶이 얼마나 더 지속될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한번 깨진 이상,
여기에서 멈춰 평생 관찰자의 입장으로 살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래서 그 끝을 알수 없는 수행의 길을 떠나기로 한다.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안내하는 자가 되기 위해 
우선 내가 그 고통을 짊어지고 가보기로 한다. 
그러다가 '무아無我' 라는 호를 내게 선물한다.

그렇게 나는 지금의 몸마음 힐러 '무아'가 되었다.


출항과 동시에 사나운 폭풍에 밀려다니다가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같은 자리를 빙빙 표류했다고 해서,
그 선원을 긴 항해를 마친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긴 항해를 한 것이 아니라
그저 오랜 시간을 수면 위에 떠 있었을 뿐이다.

그렇기에 노년의 무성한 백발과 깊은 주름을 보고
그가 오랜 인생을 살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 백발의 노인은 오랜 인생을 산 것이 아니라

다만 오래 생존한 것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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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젠가 만난다 (1주년 한정 리커버 특별판) - 나, 타인, 세계를 이어주는 40가지 눈부신 이야기
채사장 지음 / 웨일북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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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치유공간에서 수련하시는 회원님이나 나의 지인 중에 자신도 나처럼 
심리 공부를 언젠가는 시작하고 싶다는 분들이 있다.
그러나 심리 탐구의 필요성은 너무 잘 아는데 하며 그다음에 말끝을 흐린다.
곧이어 붙는 말들은 이렇다.
'제 심리도 불안한데 과연 공부를 잘 할 수 있을지, 누구 심리상담이나 잘 
할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러면 나는 빙긋 웃는다.



"

심리를 탐구하고자 하는 사람들 보면
본인 심리가 멜랑꼴리한 사람들이 많아요.

"


비단 심리 분야이겠느냐마는 어떤 분야에 관심을 갖기 위해서
그 관심이 과연 어디에서부터 오겠는가 되짚어보면 많은 케이스가 '결핍'에서 온다.
'나는 이게 부족한데...' 라는 걸 본인이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나는 하물며 어떻겠는가.
나 또한 예전에 감정이 오르락 내리락하며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어차피 우리 모두는 과정에 있고 평생 수련이 필요하다.
몸마음 힐러라는 타이틀이라고 본인 몸마음이 완전해서 타인의 몸마음을 치유해준다는 건 아니다.
나는 안내자일 뿐이고 그저 먼저 시작한 사람인 것이다.
뛰어난 안내자와 스승을 만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수련은 본인이 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먼저 시작했다고 먼저 다다른다는 법도 없고 뒤늦게 시작했다고 뒤늦게 깨우치는 법도 없다.
수련을 1년 했다, 10년 했다, 30년 했다는게 과연 의미가 있을까 싶다.
햇수를 채우기 위한 수련인가?
누구에게 인정받기 위한 수련인가?
수련의 과정과 결과는 본인이 가장 먼저 알 것이다.



나에겐 나의 수련과정에서 가족이 풀리지 않는 숙제같이 여겨진다.
내가 나를 알아가는 과정에 있어서 억지로 가족을 포함시키지는 않은 이유 중에
하나는 어쩌면 그게 나만의 방식이자 이기심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모두의 삶에 '행복'만 있을 수는 없듯이
어떤 가족에게나 '평화'만 있기엔 쉽지 않다.
심리학에서 나오는 전문용어들의 나열은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의 과정이 어찌됐든 지금의 나는 이렇게 존재하고,
나의 내성적이었던 내면아이는 나의 기억속에서 영원할 것이다.
다양한 치유기법들이 존재하지만 
모든 사람에게는 저마다 삶의 지도가 있다는 것을 내가 깨달은 게 맞다면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그 상처받은 내면아이의 손을 굳이
잡아끌어서 혹은 내가 그 내면아이의 세계로 침범해서 그 아이의 감정을
흔들어깨울 필요가 있을까 싶다.

평화를 위한 전쟁은 들어봤어도,
평화를 위한 평화는 과연 존재할지 의문이다.
비온 뒤 땅이 굳어지는 것 또한 시기가 중요하다.
비가 얼만큼 올지 알수도 없고 비가 온 뒤의 땅의 상태가 어떨지 변수는 많다.
사람의 자아는 여러개로 존재하는 게 건강한 상태인 것처럼
나의 어두운 자아를 없애보겠다고 의인화를 시켜 빙의최면치유까지 할 필요는 없다.
치유가 안 먹히면 의인화된 어두운 자아는 더욱 활성화 될 뿐이다.
심지어 어떤 자아는 비록 어두울지언정, 그리고 악할지언정
일반적으로는 자기자신을 해하기보다는 보호하려고 한다.


"

그래서 나는 

가족이라는 이름의 생채기를 지니고 살기로 했다.

"


언젠가는 때가 올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영원히 그 때가 오지 않을거라고도 생각한다.


채사장님의 책 '우리는 언젠가 만난다'를 읽으며 한결 편해진 것은
어차피 우리는 타인에게 닿을 수 없다는 결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나를 위한 위로이자 팩트 그대로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목 부분에서 늘 느끼던 이물감이 그제야 사라져 
숨을 하아- 토해내듯 한결 가뿐하고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나는 고요해질 수 있었다.

가족이라는 이름의 생채기, 그건 분명 생채기로 존재할 것이다.
지워도 지워도 지울 수 없는.
우리에게 그 관계만큼 내 의지와 상관없이 연결된 관계가 있을까 싶다.
그건 슬프도록 잔인하고 그러면서 아름다운 관계인 것이다.

내가 그들의 고통을 원치 않는다고해서 과연 그들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가?
덜어주기 시작한다면 어디서부터 덜어줄수 있겠냐는 말이다.
마치 가족들이 알고 있는 내가 사실은 내가 아님을 이해시키기 위해
내가 어디서부터 설명하기 시작해야함을 고민하게 되는 것처럼.




개개인의 세계가 각각의 세계대로 온전하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모든 관계에서 자유로워야 할 것이다.
희생이 없으면 요구도 없고,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다.
자식은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누군가의 기대에 부응하는 삶을 살지 않아도 될 것이며
부모는 사랑의 이름으로 희생하는 삶을 살지 않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결국 자기 자신부터 세계를 갖고 두발로 그 세계를 단단히 딛고 서게 됨으로써,
가족은 물론 주위 사람들의 세계를 인지하게 되고
그들을 이해하기 시작하게 될 것이다.

가족이라는 이름의 생채기, 그건 분명 생채기로 존재할 것이다.
지워도 지워도 지울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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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젠가 만난다 (1주년 한정 리커버 특별판) - 나, 타인, 세계를 이어주는 40가지 눈부신 이야기
채사장 지음 / 웨일북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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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몸마음 힐러 무아쌤 입니다.




저의 존경하는 선배 작가님인 '채사장' 작가님의 새 책을 정말 아껴가며 읽고 있습니다.
한 장, 한 장 줄어드는게 너무 아쉬운 책이랍니다.
이전에 책 '열한 계단'이 그랬듯이 한 장, 한 장 넘길때마다
제가 그간 고민했던 것들이 집약되어 훅훅 꺼내지면서도 살살 달래듯

서술되어있을 것 같아 어느정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것도 있었습니다.


책 한 권과의 만남은 하나의 세계와의 만남과도 같습니다.
사람 대 사람 또한 내가 모르던 세계를 알게되는 만남, 소통의 장이지만
책 한 권과의 만남 또한 하나의 내가 모르던 세계와의 인연을 맺는 것입니다.
특히 이 책은 그저 빨리 읽고싶다는 호기심으로 첫장을 펼치고 싶지는 않았기에
내 마음 상태가 어지럽지 않고 오롯이 이 책에 집중할 수 있을 때
자, 이제 준비 됐다고 생각할 때 즈음에 책을 읽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아! '언어의 한계성' 에 대해 나오네요.

지난 요가철학 시간에 가르침을 주신 철학을 전공하신 선생님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그 선생님의 스승님 중 '언어 철학'을 가르쳐주신 교수님의 일화를 예로 들면서
우리가 우리의 언어로 소통하는 것의 한계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거든요.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고 해도 100% 같은 의미로 상대에게 전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A를 말한다고 해도 상대는 A'나 A"로 받아들이죠.
그건 상대가 갖고 있는 경험, 성향, 지식에 연합해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 인지했냐 못했냐가 다를 뿐 다들 경험은 하셨을 겁니다.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어떠한 것들에 대한 설명이 상대에게 그대로 받아들여져서
'Exactly!' 를 외치기 보다는, 뭔가 찜찜한 구석이 있는채로 서로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던 상황들.
나와 소통하고 있는 상대와의 교집합은 사실상 거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연합과정을 통해 어쩌면 독립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요?
소통은 하지만 그 소통에 순수한 언어만 들어가 있나요?
소통 즉, 커뮤니케이션의 90% 이상은 비언어적 요소로 채워집니다.
그 안에서 개개인의 의미의 차이가 생기게 되고요.

그러고보면 '이야기가 잘 통한다' 는 것의 기준은 무엇일까 의문이 듭니다.
나 스스로가  그렇게 믿고 있는건 아닐까요? 



이는 곧 이 책에서 말하는 '외로움'과 연결됩니다.
채사장님은 이게 바로 외로움의 본질이라고 말합니다.
고독과 쓸쓸함의 기원.
맞아요.
요가철학 스승님도 그 소통의 한계와 서로 완전히 이해되지 못한 상태에서 오는
그 오해를 인지할 때 오는 외로움에 대해 말하셨습니다.


저는 외로움을 결코 부정적인 감정상태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가 이 세상에 온 이상 모두 외로울 수 밖에 없는 존재인걸요?
왜 외롭지 않기 위해 노력하나요?
그건 그렇기에 우리가 오롯이 혼자서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말그대로 외로움을 받아들이고 즐기세요.
관계를 끊고 표면적으로 혼자의 시간을 억지로 즐기라는 말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에도 그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오롯이 인지할 수 있으며,
혼자 있으면서도 나 자신에게 몰입하여 충만한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

타인에게 닿을 수 없다는 진실을 인정하고 외로워지거나,

타인에게 닿을 수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속이며

매번 좌절하거나. 

"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 타인과의 관계는 어려운 것이겠지요.

개인적으로 저 스스로는 'Do 요가'가 아닌 'Live 요가'를 하기 위해 의식을 확장시키려는
노력 안에서 또 다른 타인과의 관계 속 '나'를 발견하곤 했습니다.
그러고보면 그 누구도 자기 혼자 성장하지는 못하는 것 같네요.
우리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조금씩 성장하죠.

다양한 관계 속, 다양한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그 안에서
늘 그랬듯이 크고 작은 고민을 안으시고, 기대하시고, 좌절하시면서
현명하게 성장하면 괜찮지 않을까 합니다 : )


우리의 소통이라는 것이 슬프게도 수화를 모르는 사람들 간에 이루어지는 수화 같고 작은 바늘구멍을 통해 오고 가는 외침 같을지 모르지만, 나의 언어가 정제되고 다듬어져서 당신에게 전해진다면 내가 느끼는 감정의 미묘함을 당신도 느낄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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